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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전쟁외 작전(MOOTW)에서의 야전포병 (2) - 2004,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박용수 2014. 10. 27. 16:50

< 원문출처 :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GWOT_4.pdf) >

 

 


(계속)

 

1945-2000년간 전쟁외 작전에서의 미국 야전포병 (US Field Artillery and MOOTW: 1945-2000)

 

 제 2차 세계대전의 대부분 전투들이 재래식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점은 전통적인 군사적 사고관을 더욱 보강시켜 냉전시기로까지 유지되게 하였다. 비록 독일과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의 경우 오늘날에 안정화 작전(stability operation) 및 국가건국 지원과정(nation-building)으로 분류되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미래를 바라보고 있던 군사입안가들은 다음번 세계대전은 재래식 전투와 핵전쟁의 조합으로 이뤄질 것이며, 여기에 약간의 적후방에 대한 특수작전이 가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병의 경우에도 야전포병이 새로운 세계전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견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45년부터 다양한 학회와 위원회 등이 포병에 관련된 무기, 기동성, 화력지휘, 조직, 절차, 지휘통제 등에 관하여 분석을 실시하였다. 당시 도출된 권고안은 광범위했으며,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1944년-1945년 기간 유럽 전장에서 벌어졌던 고강도 재래식 전투에 상당하는 쪽으로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 상당수는 대전 후의 예산 삭감과 기타 우선순위 문제에 밀려 제대로 실행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것들은 실행 전에 보다 광범위한 연구개발이 필요한 것도 있었고, 또는 그 밖에 시간이 걸리는 절차들을 거쳐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이는 1950년 6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시점에 미군 병기고 내에 있는 대포들은 비록 그동안 더 기술적으로 발전된 무기류의 필요성이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종전 당시에 있던 것들과 동일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냉전의 대두와 함께, 미국 정책입안가들과 군사전략가들은 소련과, 1949년 이후에는 중공까지를 미국 안보에 있어서의 주요 위협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 행정부는 봉쇄정책(policy of containment)을 펼치게 된다. 비록 이론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은 전세계적(universal)인 것이었지만, 이러한 봉쇄에 있어 최초로 실시한 대규모 활동의 경우에는 전세계적인 활동이 아닌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라는 지리적으로 한정된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양개 국가는 소련의 모종의 압력에 노출된 상태였다. 추후 흔히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라고 불리게 된 접근방식은 이후 냉전 시대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따르게 된 것들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재래식 대결이 아니라, 일련의 지역적인 사태 및 전쟁이 일어났으며, 주로 위성국들끼리 벌어졌으나 종종 강대국 중 한쪽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2개 사례에서는 지역 전쟁이 미국을 재래식 제한전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2개의 전쟁을 제외하면, 트루먼 독트린이 통과된 1947년부터 냉전이 종식된 1990년 사이에 벌어진 대부분의 미국 군사활동들은 오늘날 전쟁외 작전으로 분류되는 수백건의 사건들로 이뤄져 있다. 이어서 소개하는 것들은 이러한 사례들 중에서 주요 사건들에 대해서만 골라 개괄한 것들이다.

 

 

 

그리스 (Greece)


 그리스에 대한 트루먼 독트린 원조는 오늘날 해외내부방어(foreign internal defense)로 분류되는 미군 개입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스의 우익 정부가 자국 북부 산간지대의 공산주의 게릴라들과 싸우는 것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국은 인상적인 군사원조 프로그램을 제공하였으며, 여기에는 그리스 군사계획 입안 및 작전조율을 도울 군사고문관들과 훈련, 보급 등이 포함되었다. 1947년 12월, 이들 고문관들은 합동 미군사고문단(Joint U.S. Military Advisory and Planning Group, JUSMAPG)으로 조직되었다. 미군 교리와 장비, 조직에 근거하여 그리스 군대를 창설하려는 시도 측면에서, JUSMAPG는 빠르면서도 짤막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48년 초, 그리스 국방군(Greek National Army)은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 미국 전술을 채용하며, 전술항공 폭격과 105mm 곡사포 활동등을 실시하여 한 중요한 산간지방에서 공산군을 소탕하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소탕(sweeps; 정식용어는 '유린공격'에 해당하나 이 글에서의 문맥상 '소탕'으로 사용합니다. 역주) 과정은 그리 신통치가 않았다. 내전이 정부군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게릴라들이 자신들의 부대를 재래식 전투에 맞춰 재편성한 이후의 일이었다. 많은 미군 관측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패배가 자신들 스스로 무덤을 판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JUSMAPG 측에서는 이 결과를 통해 미심쩍은 "교훈"을 도출하게 된다: 즉 "'강력한 화력(heavy firepower)'과 근접항공지원, 우수한 기동성의 조합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식 방식이어으며, 이는 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도 적합함이 드러났다"라는게 결론이었다.

 

 


필리핀 (The Philippines)

 

 게릴라전에 재래식 방식으로 접근하여 비정규군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래도 그리스 외에는 즉각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필리핀에서의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경 그리스에서의 폭란이 막 진압된 시점에서, 미국은 마닐라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헉 반군(Huk insurgents)과 싸우는 데에 대한 군사원조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필리핀 국방장관이자 나중에 필리핀 대통령이된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덕택에, 필리핀 군도에서의 게릴라와의 전투는 그리스에서와는 판이하게 진행되었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폭도진압기법들이 많이 활용되었다: 정치 및 경제 개혁이 진행되었고, 심리전과 민사활동 등이 군사적 압력의 지원 속에서 이뤄졌다. 군사적으로는 경무장이면서 대단히 기동성이 뛰어난 재래식 부대와 소규모 "헌터-킬러" 집단이 활용되었다. 기본적인 게릴라 소탕 재래식 부대는 대대전투팀(battalion combat team), 혹은 BCT로 불렸으며, 이는 3개 보병중대와 1개 중화기 중대 - 박격포, 기관총, 무반동포 보유 - 및 정찰소대, 기타 지원요소들로 이뤄졌다. 한 문헌에 따르면, "통상 포병은 편성되지 않았으나, 임무에 따라서는 105mm 견인포대가 배속되기도 하였다"라고 한다. 미국은 대포를 군사원조 프로그램의 일부로 제공하였으나, 이 무기는 폭도진압의 성공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였다.

 

 


한국전쟁 (Korean War)

 

 1950년 6월,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 소련이 지원하는 북쪽의 공산정권이 미국이 지원하던 남쪽의 대한민국을 공격했던 것이다. 전쟁 첫주 기간,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을 투입한다. 이 전쟁은 크게는 재래식 전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에만 국한되고 특정 무기 - 즉 핵폭탄 - 의 사용이 거부되는 제한전쟁이었다. 또한 이 해의 말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미국의 전쟁 목표도 수정되게 된다. 1951년 초가 되면 이 "제한전쟁"에서의 반공동맹은 결정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이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 촛점을 맞추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쟁을 종결시킬 정치적 해결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초기 1년 동안, 전장은 한반도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였다. 지도를 보면 양측을 가르는 연속적인 선이 이러한 오르내림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51년 중반 이전까지의 전장은 선형적이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이 문제는 1950년에 한국으로 파병된 미군 포병에게는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포병 상당수는 유럽에서 독일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으며, 나머지는 최소한 유럽 전장에서의 전술에 맞춰서 훈련받아왔다. 이들은 선형 전장에 익숙해 있었다. 한편 포병 요원들이 산간지역에서 활약하면서 자신들의 후방과 측방을 보호하는 것을 배웠던 태평양 전장에서의 경험들은 "비정상적 상황(aberration)"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상태였다. 비록 포병요원들이 한국에 입성하면서 "사주방어(all-around defense)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주변 보병 및 기갑부대와 공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동안 수년에 걸쳐 선형전투에 맞춰 훈련해 왔던 것을 이렇게 바꿔서 실제로 적용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은, 일단 포병들이 이러한 비선형 전장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점에 와서는, 전장이 이번엔 선형전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포병의 전면방어(perimeter defense) 기법들은 "지속적인 공격이나 대규모 소모전으로써 제대로 테스트 받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이라는 중강도 분쟁(mid-intensity conflict)에서 장차 저강도 분쟁 내지는 전쟁외 작전에 참가해야 하는 포병이 배워야 했던 가장 합당한 요소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십여년 뒤에 다시 배워야 하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195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같은 길면서도 제한된 전쟁을 통해 미국의 인력과 자원을 소모시키는 것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미국 군사전략은 다시금 유럽에서의 재래식 및 핵전쟁으로 촛점을 돌리게 된다. 만약 폭동이나 지역분쟁이 또다른 한국전쟁 수준으로 확산될 위협이 발생하게 된다면, 미국은 - 적어도 말한 바에 따르면 -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규모 보복, 즉 전술핵 혹은 전략핵무기를 사용할 것이었다.

 

 


레바논 (Lebanon)

 

 실제에 있어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확언한 대량 보복전략(strategy of massive retaliation)(보다 공식적인 용어로는 뉴룩 정책(New Look))에서 벼랑끝 핵사용(nuclear brinksmanship)에 의존한 경우는 드물었으며, 이는 소련이 195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핵을 투발할 효과적인 수단을 획득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뉴룩 정책에 대한 군과 민간의 비평가들은 몇몇 "국지전"("brush-fire" conflict)을 해결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을 근거로 한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좋든 싫든 간에,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적 행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재래식 군대와 무기로 개입할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1958년 레바논으로의 미군의 투입은 이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체 전쟁 스펙트럼 범위 중에서 아래쪽 끝을 차지하는 지역분쟁 상황에 미국의 재래식 군대를 투입하는 몇몇 우발사태 작전 중에서 첫번째였던 것이다.

 

 1958년 7월 중순, 이라크의 친서방 왕정에 반항하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왕실 가문이 살해되었으며, 이로써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해병대 및 미 육군을 레바논으로 향하도록 지시하는데, 레바논 역시도 친서방 정부가 국내외의 과격파들에 의하여 붕괴될 위험에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결정이 떨어지고 24시간만에 베이루트 남단 해안에 3개 해병 대대 상륙팀(Marine Battalion Landing Teams)이 상륙하게 된다. 며칠 뒤, 독일에서 출발한 미육군 전투단이 도착한다. (독일에 있던 포병요원이 집결 및 적재 과정에서 통제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해병과 육군의 전투부대들은 모두 포병을 데려왔다: 해병은 6문의 8인치 곡사포와 8문의 4.2인치 박격포를 갖고 있었고, 6문씩의 105mm 곡사포를 갖고 있는 포대 3개를 갖고 있었다. 7월 말까지 이들 모두는 통합 포병단(Force Artillery Group)의 지휘하에 통합되었다. 육군의 경우에는 1개 곡사포대와 1개 방공포대를 참가시켰다. 이 개입 과정에서 가장 이상했던 전개로서, 핵투발이 가능한 어니스트 존(Honest John) 전술로켓 발사대 2대를 갖고 있는 포대가 등장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어니스트 존 발사대들은 금방 다른 곳으로 재배치 되긴 했지만, 이러한 핵투발 가능 무기가 왜 이런 대단히 긴장되긴 하지만 분명 재래식 작전인 이곳에 투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있다.

 

 미군은 레바논에 들어가면서 전투를 겪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 다만 누구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는 확신하고 있지 못했다 - 미군의 임무는 외교관들이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가져올 때까지 레바논군을 도와 베이루트 근방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금방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도 근방을 둘러싸고 있던 미군이 당면해야 했던 위협은 재래식 군대가 아니라 미군진지 근처를 돌아다니는 반군 집단들의 소화기 사격에 불과했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괴롭힘에 잘 보호가 되어 있었고 - 미군의 피해는 반군의 저격에 1명이 사망한 것에 그친다 - 그 결과 해안교두보에 위치하고 있던 포병은 단 한발도 사격하지 않게 된다. 포병은 병력들에 대한 잠재적 지원을 실시하였고 (포병 전방관측장교(forward artillery observer)가 통상 순찰부대에 동행했다) 따라서 심각한 전투가 벌어질 경우 즉각 대포가 대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포병의 역할은 이미 친숙한 "화력 보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직사가 가능한 대포의 존재를 통해 적대적 집단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줄 수가 있었으나, 이제 레바논에서는 그 역할이 육군과 해병대가 가져온 전차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 결과, 비록 미 해병, 미 육군, 레바논군의 포병요원들은 서로 연락요원을 배치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력 협조방안을 수립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이러한 계획 및 절차가 시험대에 오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1958년 10월 말이 되자, 미군 현시에 힘입은 외교력이 정치적 해결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미군은 모두 철수하게 된다.

 

 

 

도미니카 공화국 (Dominican Republic)

 

 7년 후, 미군은 도미니카 공화국에 개입하는데, 이는 많은 면에서 레바논에서와 비슷한 점을 갖고 있었다. 1965년 4월, 친미 도미니카 정부가 무장 반군의 쿠데타로 전복되면서, 워싱턴에서는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벌어졌다고 인식하게 된다. 반군과 친정부 세력간 내전이 벌어지면서, 수도인 산토 도밍고 주변에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반군측이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머쥘 찰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미군이 이 국가로 진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획득을 막고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지시한다. 앞장선 것은 해병원정부대(Marine Expeditionary Unit)의 일부 및 육군 제 82 공정사단 예하 3개 전투여단들이었다. 제 82사단은 보유 야전포병도 함께 가져왔으나, 전투가 대단히 인구가 밀집한 도심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민간인 피해와 도시 자체에 대한 대규모 손상을 막기 위하여 박격포, 해군포, 대포 등등의 사격을 모두 금지하게 된다. 조명탄 사격은 허용된 시기가 잠깐 있었으나, 이것 역시도 도시 건물들이 가연성에 밀집해있기까지 하기에 화재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로 결국 중단되게 된다.

 

 도착하고 며칠 내로, 미군은 반군 대부분을 산토 도밍고 동남부 지역에 몰아넣게 되며, 워싱턴에서는 이제 군사적 승리 대신 정치적 협상을 추구하기로 결정한다. 미군이 이 나라에 남아있었던 이후의 1년 반 기간 동안, 미군들이 당면해야 했던 주 위협은 반군의 소구경 화기 사격과 저격수, 그리고 가끔씩 떨어지는 박격포탄이었다. 자주 바뀌는 교전규칙 속에서, 미군은 최소한의 전력으로 대응하였다. 일반적으로 106mm 무반동포와 M-72 경대전차화기가 실제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중화력이었다. 사단 야전포병 대대의 병사들은 전투여단들에 배속되어 다양한 "부차적 임무(secondary missions)", 예컨대 수색 및 소탕, 경비, 음식 분배, 교통정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대포들 자체는 도시에서 물러나 북동부에 위치한 사단 포병훈련캠프로 돌려졌다. 이곳에서 이들 대포들은 필요한 경우 준비상태에 놓이게 되나 - 이번에도 "화력 보험"이었다 - 주로 실탄 사격훈련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훈련들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도착한지 1달이 채 못된 5월 말이 되면, 1개 포대를 제외한 모든 포병부대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포트 브래그로 재배치되기 시작한다. 미주 평화유지군(inter-American peace force)이 수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2개월이 지난 7월이 되었을 때, 브라질측 지휘관은 다국적군의 역량을 보강하기 위하여 82사단의 포병대대 하나를 도로 재배치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은 정치적 고려문제로 결정이 지연되었고, 포병대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한 것은 12월이 되어서였다. 그동안 사단 포병부대 2곳에서 박격포탐지 레이다(countermortar radar)를 배치하였고, 이는 제대로 작동했을 경우에는, 때때로 박격포를 발사하여 일련의 정전협정들을 위반하는 집단이 어느 쪽인가를 밝혀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제 82사단이 도출한 교훈 중 하나는, 간섭과정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측이 엄청나게 열세한 군사 위협을 신속하게 처리해버린 경우,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은 비전투 자산, 예컨대 공병이나 헌병대(military police, MPs), 통신장비 등이라는 것이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한된 항공기로 이 추가 통신장비 및 추가 보병 및 헌병부대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포병을 감축하는 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다. 포병의 필요성이나 근접항공지원, 함포지원 등은 재래식 작전에서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띄고 있지 못했다. 소규모 기갑세력의 경우에는 대단히 유용했다: 전차의 경우 비록 그 주포의 사용이 배제되는 상황일지라도 대단한 심리적 가치를 제공해 주었다.

 

 


베트남 (Vietnam)

 

 1965년 미국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개입한 시기는 사실 미국이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점차 말려든 시기와도 일치한다. 몇가지 측면에서 이 동남아시아 분쟁에서 벌어진 일들은 한국전쟁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목표나 지리조건, 사용무기 측면에 있어서 제한전쟁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고려가 작전적 혹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군사적 필요성을 깔아뭉개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이 양개 전쟁 사이에는 또한 엄청난 차이점도 존재했는데, 이러한 차이점 중의 하나가, 비록 베트남 전쟁은 상당부분 재래식 미군전력과 재래식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 정규부대와의 전투인 부분도 있지만, 또한 한국전쟁에 비해 훨씬 큰 부분으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남베트남 전장에서 베트콩 게릴라들을 상대하는 비선형적인 비정규전 양상이 강했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참가했던 가장 긴 전쟁이었던 이 전쟁의 절정기에는, 약 50만명이 넘는 미군병력들이 베트남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병력에는 포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베트남에 배치된 포병들은 자신들이 배운 재래식 전술 및 훈련이 이곳의 적군의 위협을 상대하는 데 있어 항상 적합하지는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미국 포병요원들이 베트남에서 갖고 있던 일반적인 사고관은, 한국전쟁과 1960년대 초반시기에 있었던 군사발전들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 미 육군은 병력 현대화에 혼신의 힘을 쏟아 핵전쟁 시대에 걸맞게 만들려고 하는 상태였고, 한편으로 지상군을 경시하고 공군과 해군에 집중하는 예산 사용행태에 고생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50년대 말, 미 육군에서는 펜토믹 사단(Pentomic Division)을 도입하는데, 이는 핵전장, 즉 유럽 전장에서 충분한 산개가 가능한 5개의 전투단으로 구성되는 부대였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부대구조의 약점에 대하여 신속하게 지적하게 되며,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새로운 사단편제 - 육군 ROAD 사단(Reorganization Objective Army Divisions, ROAD) - 가 고안되어 펜토믹 사단 편제 대신에 재래식 및 핵전장에서 사용되도록 된다. 1960년대 초까지, 미육군은 새로운 대포들 또한 병기고에 포함시키게 된다: M110 8인치 곡사포와 M107 175mm 평사포는 자주포였다; M102 105mm 곡사포와 M114 155mm 곡사포, M115 8인치 곡사포는 견인포였다. 비록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에 미군을 투입시키던 시점에서 이들 무기들이 활용 가능한 상태이긴 했지만, 보다 구식이거나 아예 퇴역직전의 대포들도 아직 부대 병기고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 역사가의 요약대로 말하자면, 미육군 야전포병은 일련의 "신속한 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대량 보복(massive retaliation)이라는 압박 속에서, 미 육군은 핵시대에 끼어드는 기회를 잡게 된다. 보다 치명적이고 기동성 있는 재래식 야포를 도입하였으며, 표준화되고 보다 나은 핵포병을 개발하고, 컴퓨터화된 포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공중포병(aerial artillery; 근접화력지원을 하는 헬기부대를 의미, 역주)를 형성하고, 전술과 교리, 조직을 재래전과 핵전쟁에 맞게 개선하였다. 많은 포병 장교들이 올바르게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발전은 야전포병에 혁명을 불러왔다.

 

 비록 미육군이 ROAD 편제가 재래전과 핵전에서 갖는 장점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고 있긴 했지만, 이것이 비정규전 상황에서는 어떻게 작동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고 있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훈련 역시도 유럽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데에만 맞춰져 있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베트남전을 포함하여 지역적인 "민족해방전쟁(wars of national liberation)"을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였으며, 그의 행정부에서는 군부로 하여금 폭도진압작전에 주목하게 하고자 시도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장교들은 게릴라전을 단지 특수부대(Special Forces)에서만 다룰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포병들은 1965-1973년의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cochina War)의 비정규전적 요소에 대하여 준비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또한 이 전쟁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바꿔주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1965년 11월 초에 남베트남 이아드랑 계곡에서는 미국 제 1기병사단 소속부대가 북베트남 정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견인식의 미국 야전포병은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 전투는 이 대포들의 사거리 밖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11월 중순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4개 포대가 전투병력과 대포사정거리 내 지점으로 수송되게 된다. 이후 가능해진 포격은 미군에 대한 위협을 격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적어도 한명의 장군은 일반포병(tube artillery; 공중포병에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됨. 역주)이 보병에게 "우세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 되었다고 치하한 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아 드랑 전투는 적군이 정면 승부를 걸기 위하여 병력을 밀집하여 부대 대 부대로 싸우는 경우, 전통적인 화력 집중에 대한 믿음이 올바르다는 점을 확신시켜준 전투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아 드랑 전투 이후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모두 미군의 화력을 피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대규모 공세를 목적으로 밀집하는 것을 꺼렸다는 점이다. 미군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적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는 전술을 개발하게 된다. 이러한 접근법 중 하나가 일명 '탐색 및 격멸(search and destroy)'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소규모 미군부대(통상 소대단위)가 시골 지역을 순찰하면서 적을 찾아낸 뒤 (적은 2명짜리 순찰대일 수도 있고 베트콩 연대규모일 수도 있었다), 적과의 접촉을 끊고는 항공기, 해군, 포병 화력을 불러들여 적을 해치우는 전술이었다. 여기서는 화력이 기동을 지원하기보다는, 기동이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였다. 이 논란이 많은 접근방식은 아무래도 미군 병사의 목숨은 많이 건질 수 있었겠지만, 반면 보병부대의 주도권에 있어서는 악영향을 준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화력지원만으로 전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이 수행되겠냐는 의문점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비록 적들도 가끔 정규군을 투입하였고, 미군은 통상 재래식 전투에 맞춰 훈련되어있긴 했지만, 한 작가의 설명대로 하자면, 미국은 "전반적으로 COIN 성격을 갖는 전쟁을 하느라 불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베트콩은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배합하여 작전하였으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정규군은 모두 상황이 적합한 경우 게릴라전술을 활용하였다. 또한 이들이 이렇게 한 지역은 남베트남 전국을 아우르는 넓은 비선형 전장이었다. 탐색 및 격멸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서 미군은 분산해야 했으며, 각 대대별로 상당히 넓은 지역을 책임져야만 했다. 야전포병 포대가 각 대대들을 따라다녔고, 이들은 당시 교리에서는 야전포병 대대가 해야할 일을 담당해야 했다. 따라서 각 포대급 부대에서 근무하던 하급 장교들은 이 분권화된 작전환경 속에서 자신들이 훈련받은 범위를 훨씬 초과하는 책임범위까지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러한 분산을 위해서는 기동성 또한 요구되었으며, 거친 지형에 세련된 도로망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헬리콥터야말로 대포들과 탄약을 운반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이러한 종류의 수송에는 보다 가벼운 105mm 대포가 155mm 대포보다 적합했다) 대포들을 최대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배치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한국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선형 전장이라는 특징은 적이 어느 방향에서든지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따라서 포병은 일단 배치된 뒤에는 "6400 밀"(mil은 주로 포병에서 사용하는 각도단위로, 6400밀은 360도에 해당함. 역주)에 걸쳐 방어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기동성 요구조건과 맞물려, 화력지원기지(fire support bases, FSBs) 네트워크의 탄생을 가져왔다. 여기서 대포는 통상 기동대대의 지휘소에 위치하게 되었다. FSB를 방어하기 위하여 발전된 전술들에는 대포병레이더의 활용이나, 인근 FSB에 의한 간접사격, 캐니스터탄을 사용한 직접사격 등이 있었다.

 

 이러한 분산된 고정진지들은 작전지역의 어떤 곳이든지 적어도 1개 포대, 통상 2개 이상의 포대가 커버해 줄 수 있도록 배치되었으며, 이곳들에서부터 기동 지휘관이 공세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또한 105mm 곡사포에서 175mm 평사포에 이르는 야포들이 공세에 대한 화력지원 및 다른 화력기지를 방어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포병사격 요청을 받았을 때 신속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역할을 하였으며, 게릴라전에 대해 화력지원을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만들었고, 결국 인명을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긴 했지만, 야전포병은 공중과 해양 전력과도 연계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화력지원을 극대화시켰다.

 

 많은 미국 장교들은 이러한 배치야말로 COIN 작전시 이론상 필요한 10:1의 비율(진압병력 10명 대 폭도 1명)에 훨씬 못미치는 아군의 숫자를 상쇄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포병이 이러한 차이를 메꿔줄 수 있는 정도는 훨씬 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적군은 단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대규모 재래식 공격을 위하여 집결할 수가 없었고, 이는 1968년의 구정공세(Tet Offensive)와 케산 전투(Khe Sanh)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입은 피해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케산 전투의 경우, 근접항공지원과 일반포병의 기여로 북베트남군의 파상공세를 분쇄해버림으로써, 마치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의 참상과 비슷한 모습을 재현하게 된다. (엄밀하게는 틀린 말이긴 하지만, 흔히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의 대규모 재래식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될 정도다.) 미군 포병은 또한 아군의 순찰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파괴해 주거나, 적과의 교전시 화력지원을 해 주거나 하는 도움을 주었다. 만약 교전 과정에서 보병이 적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포병은 적들의 퇴로나 증원군을 차단하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전쟁에서처럼 포병은 적들의 요새화된 진지에도 효과적 - 물론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 이었다. 베트콩들의 경우, 이들의 진지는 통상 지하 터널이나 벙커로서, 이곳에서부터 게릴라들이 튀어나와 노출된 미군 혹은 남베트남군을 기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발각되는 경우, 이러한 지하시설물들은 항공력과 기갑, 포병 등의 복합적인 수단으로 "파괴(busted)"될 수가 있었다. 포병의 경우에는 이를 위하여 105mm 공중폭발탄(airburst shells)을 사용하여 적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155mm 곡사포와 8인치 곡사포의 지연신관탄(delayed-fuse rounds)을 사용하여 벙커들을 파괴하였다.

 

 포병의 다른 용도로는 병력수송 헬리콥터를 위한 착륙장을 "준비해주는(preparing)"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포병 습격(artillery raid)"라는 작전도 있었는데, 이는 대포들을 FSB로부터 빼돌려 평소에 기지에 있을 때에는 사거리 밖이라 타격할 수 없는 곳을 공격하도록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시에는 보통 1개 105mm 포대와 3문의 155mm 대포가 동원되었으며, 여기에 1개 보병중대가 경계를 위해 배치되었으며, 헬리콥터를 통해 투입된 뒤에 사전 지정된 목표물에 수백발의 탄약을 발사한 뒤, 다시 FSB로 돌아오는 순서를 밟았다. 이러한 포병습격 외에도, 포병은 은폐된 지역에 대해 사격을 가해 적들을 개활지로 몰아내는 역할도 수행했는데, 이 경우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미군 헬기 및 전투기들의 화력투사가 가능해진다. 다음으로 상당히 빈번하고 중요해으면서도, 또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요란 및 차단(harassment and interdiction)" 사격을 들 수 있다. 이 전술은 적의 포탄에 대응하는 속도가 신속한 경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논란거리를 불러일으켰는데, (1) 탄약을 너무 많이 소모하게 된다는 점, (2) 너무 많은 탄약이 "빈 땅에 낭비"되며, 적에게 단지 소량의 피해만을 준다는 점, (3) 요란 및 차단 사격이 상당한 민간인 피해를 일으킨다는 점, (4) 불발탄이 발생하게 되면 이것이 베트콩 손에 들어가 정글의 미군에게 지뢰 및 부비트랩으로 사용된다는 점 등이었다.

 포병의 마지막 용도로는, 대포가 사용될 수 없는 곳에 포병이 배치된 경우, 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경보병으로 활용되거나 기타 부차적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를 들 수 있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미국 포병의 효용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로 전술을 변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것 중 하나로는 자신들의 벙커들을 더욱 깊게 파는 것이었다. 또다른 방법은 미군 포병이 배치될 수 없는 지형으로 미군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적군은 미군을 "안아버리는(hug)" 방법도 시도했는데, 요컨대 전투시 미군에 극도로 접근함으로써 미군이 아군 피해를 우려해 포격이나 근접항공지원을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소규모로 활동하는 베트콩의 경우에는, 미군 진지나 마을 따위를 공격할 때, 공격 직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은밀하게 행동함으로써 포병이나 기타 화력지원이 미처 제대로 실시되기도 전에 끝내버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많은 경우 베트콩들이 실제 그 마을에 거주하면서 주민들과 섞여들어가 게릴라들의 인프라를 구축하였다. 이들의 존재는 종종 미군의 폭력적인 반응을 불러오곤 하였고, 이는 민간인을 살상하고 민간인 가옥 및 재산을 파괴하는 상황을 유발하여, 생존자들과 미군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사실 미군의 화력은 베트남 민간인들 사이에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킴으로써 수없이 많은 피난민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수준의 "간접피해(collateral damage)" 문제는 미국이 주장하던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공산치하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는 말과 배치되는 것으로 비춰졌다. 중립 혹은 우호적인 민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들을 죽인다는 이야기는 전쟁 지지자이나 반대자들 모두에게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미국과 전세계에 반전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미군들이 원주민들의 "우호감정 및 지지(hearts and minds)"를 얻는 데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베트남 전장에서 민간인들을 제외할 수는 없는 문제였으며, 이들이 적들과 근접해있다는 점은 양측의 행동으로 민간인 피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미군이 과도한 화력요청을 하는 풍습도 이 문제를 부채질했다. 예컨대 단지 AK-47 몇 발만 미군에게 발사되면, 미군은 종종 보복으로 엄청난 양의 공습 및 포격을 요청하곤 하였다.

 

 민간인 사상자를 막거나 적어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이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이러한 목적으로 기울여진 노력들은 이후 미군 포병이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어떻게 활동할지에 대하여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


 미군은 이 문제 [민간인 사상자 문제]에 대해 인지함에 따라, 즉각적인 군사적 요구와 화력계획에 제한을 가함에 다른 장기적 이득 사이에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였다. 어떤 지역의 경우 "사격 금지지역(no-fire zones)"이 설정되어, 과거 보잘 것 없는 타겟에도 자동으로 대규모 사격을 가하던 것을 제한하게 된다. 또한 정교한 사격승인절차가 설정되었는데, 이는 재래식 전쟁에서 적은 양의 사격(short round)이 재앙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릴라와 싸우는 싸움에 있어서는 과도한 사격(long round) 또한 동등하게 재앙이 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사격요청에 대해서 면밀하게 판단하는 한편, 보다 정확성을 높이기 위하여 반응시간을 희생하였다. 이는 특히 인구밀집지대라서 목표물이 아군과 민간인 사이에 위치하는 탓에, 차후에 사격수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경우에 더욱 중요했다. 확인된 목표물만 타격해야 하고 또한 매우 정교하게 타격해야 한다는 필요성 탓에, 전방관측장교의 숫자가 급증하였으며, 이는 다시 하급제대의 통신량을 급증하게 만들고 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야 하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다양하고 복잡한 통제 및 관련 절차들과 제한이 많은 교전규칙 속에서, 야전포병은 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너무 느리고 반응속도가 늦다고 비난받곤 했는데, 이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화력지원 절차에 끼어있는 2중 3중의 확인절차들이 원인이었다"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국 미군이 베트남의 재래식/비재래식 전장에 적용한 수정내용을 통해 종종 화력으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핵심이 정치-군사적 투쟁이었기에 부과된 여러 제한사항, 즉 싸우는 방법과 싸우는데 쓸 수 있는 무기에 대하여 제한이 걸리는 상황 속에서는 승리를 가져다 줄 수가 없었다. 1973년에는 남베트남에서 마지막 미군 전투부대가 철수하게 되며, 남베트남 정부는 2년 뒤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붕괴된다. 이 전쟁은 관련된 모두에게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하였으며, 미 지상군, 특히 미 육군에게는 1965년 전쟁에 뛰어들 당시의 잘 훈련되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의 외관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 경험에 대한 반발로, 미 육군은 비정규전을 회피하게 되었으며, 또한 미 육군은 이후로 정치적인 제한 탓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밑도 끝도 없는 전쟁에는 절대 다시 말려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으로 녹초가 된 미 육군은 스스로를 재건하는 과업에 착수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다시금 고강도 분쟁과 재래식 전쟁, 말하자면 유럽의 바르샤바 조약군과 싸우는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1970년대 나머지 기간과 1980년대 초의 야전포병의 발전은 이러한 프레임워크 속에서 이뤄졌으며, 그 사례로는 컴퓨터화/자동화된 정보처리 시스템을 사격 통제 및 목표물 선정에 활용하는 것, 최신식 대포병사격 및 목표 획득 체계 도입, 최신식 정밀유도 탄약(카퍼헤드탄(Copperhead) 등)의 도입, 보다 정밀한 대포병레이다(countermortar and counterbattery radars) 도입, 목표 획득을 위한 원격조종기체(remotely piloted vehicles, RPVs) 활용에 대한 실험, 화력지원팀(Fire Support Team, FIST) 창설을 통하여 전방감시 및 직접화력지원계획을 중대수준으로 통합하는 것, 그리고 상급부대에서 화력지원장교(Fire Support Officer,FSO) 및 화력지원반(Fire Support Element,FSE)을 통한 모든 화력의 통합 등을 들 수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의 소련의 위협에 주목하여, 미 육군은 자체 중사단 구조(heavy division)를 재편성하고 사단포병에 대한 할당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혁신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미군은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엇다. 사실 냉전 나머지 기간 내내, 미국은 지역분쟁에 군사적으로 계속 말려들곤 하였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워싱턴은 엘살바도르의 공산주의 공세에 깊게 개입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참조하여, 엘살바도르에는 미국의 재래식 전투부대는 전혀 파견되지 않았으며, 미국 군사고문단 역시도 55명으로 제한되었다. 한편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행정부는 CIA와 미국 특수부대에 눈을 돌려, 엘살바도르의 이웃국가이자 공산국가인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에 반대하는 반군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80년대 말까지 이 두 곳의 상황은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소련군과 싸우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에 대한 미국의 지원도 유리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들 사업에 있어서는 미군 야전포병은 최소한 눈에 띄는 기여는 전혀 하지 못했다.

 


그레나다 (Grenada)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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