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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디고리 전투, 1121 (Battle of Didgori) - Armchairgeneral.com

박용수 2014. 10. 27. 16:50

< 원문출처: (http://www.armchairgeneral.com/miraculous-victory-battle-of-didgori-1121.htm) >

 

 암체어제네럴 홈페이지의 글을 읽던 중, 생소한 전투가 하나 소개되어 있어 번역하여 올립니다. 비잔틴 제국과 함께 십자군 국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던 국가인 그루지아의 전쟁 이야기로서, 좁은 의미에서의 십자군 전쟁 범위에는 다소 벗어납니다. 그러나 십자군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기독교 국가의 이슬람에 대한 종교/민족전쟁이었으므로, 어쨌든 넓은 의미에서는 포함된다고 보고 올리게 되었습니다.

 


Forgotten Battle in the Kingdom of Georgia during the Age of the Crusades

 

저자:  Alexander Mikaberidze

 

 


(국왕 다비드 하그마세네베리(King David Aghmashenebeli)의 모습)


 십자군 시기를 고찰하는 데 있어, 흔히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약탈당하는 예루살렘의 광경이라거나,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차드의 활약, 또는 장엄했던 하틴 전투나 아르수프 전투 등이 될 것이다. 동방과 서방의 이 장구한 투쟁은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으며, 또한 그 속의 승리와 패배에 대해서도 대중들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참가자 하나가 분명히 누락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그루지아 왕국이다. 1121년 8월 디고리(Didgory)에서의 그루지아 왕국의 대승리는 다른 십자군들의 승리들에 못지 않게 극적이었으며, 또한 이 지역의 지정학적인 측면에 있어서 향후 수백년간 그루지아를 기독교 세계의 선두주자로 각인시킬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그루지아의 위치. 북쪽에는 러시아, 남쪽에는 터키가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의 그루지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의 남부 코카서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는 여러 측면에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 위치한 그루지아는 지난 4천년간 상업과 문화, 종교가 통과하는 통행로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고대 세계에서는 황금양털(Golden Fleece)의 나라로써 숭앙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또한 수많은 정복자들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다투게 만드는 역할도 하였다. 10세기 경 통일된 왕국으로 부상한 그루지아는, 곧이어 훨씬 강력한 세력으로써 소아시아와 코카서스로 확장을 막 개시한 셀주크 투르크와 대결하게 된다. 셀주크 투르크는 1055년 셀주크 술탄국(Seljuk Sultanate)로 건국하였으며, 그 세력범위를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까지 확대하였다. 1064년에는 셀주크 술탄 알프 아슬란(Alp Arslan)이 그루지아 남부로 성공적인 원정을 실시하였고, 이어 4년 후에는 동부 그루지아를 짓밟았으며, 이어 서부 그루지아의 이메레티(Imereti)까지 도달한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로 셀주크 투르크가 비잔틴 제국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들이 코카서스 지방을 조직적으로 정복할 길이 열리게 된다. 1080년에는 크루지아에 "터키의 맹공격(Great Turkish Onslaught/ didi turkoba)"으로 알려진 시기가 닥쳐오며, 당시 대규모 터키계 부족들이 그루지아로 이주하여 점령지를 목초지로 바꿔버림으로써, 지역 농경 및 경제에 타격을 가하게 된다. 그루지아 국왕 기오르기 2세(King Giorgi II)(1072-1089)는 투르크의 우위를 인정하고 셀주크 술탄에게 조공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셀주크의 우위는 거의 10여년 가까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루지아는 당시 외적의 침공과 내부 불화, 자연재해 등으로 황폐화되고 있었다. 국왕 기오르기 2세는 이 상황에 무력하였으며, 그루지아는 투쟁에 앞장설 보다 강력하고 정력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였다. 1089년, 무혈 쿠데타가 발생하여 기오르기 2세가 퇴위하고 그의 16세 아들 다비드(David)가 즉위하게 된다. 이 새로운 국왕은 강력한 적군을 무찌르고 황폐해진 조국을 재건해야 한다는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비록 어렸지만, 다비느는 대단히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지도자임이 밝혀졌다. 1089-1100년 기간 동안, 그는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고립된 셀주크 군대를 괴롭히고 격파하였으며, 황폐화된 지역을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다. 1092년, 그는 셀주크의 말릭 샤(Malik Shah)의 죽음을 기화로 연간 조공을 중단하였고, 투르크인들이 계절마다 그루지아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어진 10여년 동안 그는 점진적으로 동부 그루지아 대부분을 해방시킨다.

 

 1103년, 다비드 국왕은 뤼스-위브니시 종교회의(Ruis-Urbnisi Church Council)를 개최하여 그루지아 정교회를 개혁하였는데, 당시 그루지아 정교회는 11세기 내내 강력한 세력을 펼치며 국토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국가 안의 국가"로 작용하면서 왕실의 권위와 충돌하고 있었다. 뤼스-위브니시 종교회의를 통하여 교회의 권한이 제한되었고, 왕에 반하는 성직자들이 추방되었으며, 왕실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강력했던 크콘디디 대주교(Archbishop of Chqondidi)의 직책은 왕의 수석보좌관직인 므치그노바르투쿠체시(Mtsignobartukhutsesi) 직책과 통합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크콘디델리-므치그노바르투쿠체시(Chqondideli-Mtsignobartukhutsesi) 직책은 왕실의 권한이 교회로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새로운 재판 시스템(saajo kari)을 감독하고 경찰조직(mstovrebi)을 지휘함으로써, 왕국 전체에 왕실의 권위를 퍼트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1106년, 다비드 국왕은 곧 교육 및 문화 중심지가 될 겔라티 수도원/ 학술원(Gelati Monastery and Academy)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1110-1117년, 다비드는 남부 트란스코카서스 지역으로 확장하게 되며, 삼쉬빌데, 제르나, 루스타비, 칼라조리, 로르, 아라가니 (Samshvilde, Dzerna, Rustavi, Kaladzori, Lore, and Aragani)등의 핵심 요새들을 탈취한다. 1105, 1110, 1116년에 각각 셀주크 투르크가 침공해 들어왔으나 모두 격퇴된다. 1118-1120년, 다비드 국왕은 대규모 군사개혁을 실시한다. 그루지아 왕가는 모나 스파(mona spa)라는 약 5000명 규모의 왕실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종종 왕을 무시하는 봉건 영주들이 제공하는 병력들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비드 국왕은 대단한 해결책을 내놓게 된다. 그는 북부 코카서스 지방에 살고 있던 쿠만인(Cuman-Qipcaq; 원문에는 다른 문장에서도 쿠만과 킵차크라는 말이 번갈아 쓰였는데, 역사적으로도 이 두가지 용어는 서로 헷갈리게 섞여 쓰였기에 지칭하는 대상이 같은지 다른지는 불분명함. 여기서는 편의상 쿠만인으로 통일하여 번역하였음. 역주)의 강력한 지도자의 딸과 결혼했던 것이다. 1118년, 그는 쿠만인 부족 모두를 불러들여 그루지아에 재정착하게 하였는데, 당시 이들은 부상하고 있던 세력인 러시아 공국(Russian principalities)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태였다. 다비드의 결정은 대단히 큰 결과를 몰고오게 된다. 당시 그루지아는 투르크인들의 오랜 침공으로 말미암아 인력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왕가는 왕가를 질시하고 중앙 정부의 권한이 증가하는 것을 우려하는 문제 귀족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쿠만인들은 왕가에게만 충성하는 세력으로써 역할할 수 있었으며, 기존의 그루지아 내의 기득권들과 전혀 연계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사실 대규모 외국 군대를 국내로 들여와 재정착시키고 활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결정이긴 했다. 그러나 이 도박은 먹혀들어간다.

 

 1118년에서 1119년 사이, 다비드 국왕은 약 4만 가구의 쿠만인들(약 20만명일 것으로 추산)을 북부 코카서스의 스텝지대에서 중부 그루지아의 카르틀리(Kartli)로 이주시켰으며, 또한 이들이 그루지아 주민들과 빠르게 동화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부족구조는 유지한 채로 다수의 장소에 분산되어 이주토록 하였다. 왕실은 이들에게 가재도구와 땅을 주어 정착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댓가로 이들은 가구당 1명씩의 병사를 제공함으로써, 왕실은 기존의 왕실군대에 더하여 4만명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루지아 연대기인 카르틸리스 츠호브레바(Kartlis Tskhovreba)에 따르면, 쿠만인들이 금방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루지아식 생활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다비드 왕의 정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새로운 군대는 왕으로 하여금 외부의 위협에 맞싸우고, 내부의 강력한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다비드 왕의 왕실 연대기 작가는 그루지아가 "페르시아(Persia)와 시르완(Shirwan), 대 아르메니아(Great Armenia)를 습격" 하는 데에 쿠만인들이 곧바로 활용되었으며, 또한 이런 작전이 끝나면 예외없이 "전리품을 한가득" 고향으로 가져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비드 국왕의 성공을 묘사하면서, 연대기에서는 "국왕은 잽싸고 발빠른 표범과 같았으며, 이는 다니엘(Daniel)이 알렉산더 대왕을 묘사했던 것과 같았다. 우리의 알렉산더 대왕은 실제 알렉산더 대왕만큼 젊지는 않았지만, 그 행운에 있어서는 비교할 만 했다"라고 쓰고 있다. 그루지아 왕의 세력권은 이제 트빌리시(Tbilisi)를 제외한 남부 트란스코카서스 대부분과, 북부 코카서스의 주요 지역까지 확장되게 된다. 그는 성지(Holy Land)에 있는 십자군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또한 양개 세력이 무슬림들에 대항하여 행동에 보조를 맞추려 시도했다는 증거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루지아 왕국의 판도. 디고리 전투는 트빌리시 40킬로미터 서쪽에서 벌어졌다.)

 

 이제 무슬림 세력들은 남부 코카서스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이 기독교 국가에 대하여 점차 염려를 갖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지중해 해안지방에 잘 묶어둔 팔레스타인의 십자군들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느끼게 된다. 1121년, 술탄 마흐무드 b. 무하마드(Mahmud b. Muhammad) (1118-1131)는 그루지아에 대한 성전(holy war)을 선포하고 무슬림 국가들의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이를 이끈 것은 아란(Arran)과 나히체반(Nakhichevan)의 셀주크 군주들이었던 아르투키드 나즘 알딘 엘가지(Artuqid Najm al-din El-ğazi)와 토그룰 b. 무하마드(Toğrul b. Muhammad)였다; 이 동맹에는 또한 보다 소규모이지만 중요한 지역 군주들도 참가했는데, 예를 들어 "아랍인의 왕(king of the Arabs)" 두바이 b. 사다카(Dubays b. Sadaqa)(1108-1135)이나 아르진과 비딜리스, 드빈의 군주(lord of Arzin, Bidlis and Dvin)인 투간 아슬란(Tughan-Arslan)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즘 알딘 엘가지는 상당히 최근인 1119년에 발랏(Balat)에서 안티오크 국왕 로저(King Roger of Antioch)가 이끄는 자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바 있었으며, 따라서 대단히 경험많은 무슬림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무슬림 군대의 규모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며, 80만명("Bella Antiochena", Galterii Cancelarii의 추산), 60만명(Matthew of Edessa의 추산), 40만명(Smbat Sparapet's Chronicle 추산) 등의 기록이 있는 한편, 현대 그루지아 학계에서는 10만명에서 25만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숫자는 아무래도 상당한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쨋든 모든 문헌자료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슬림들이 엄청난 병력을 준비했으며, 이제까지 성지에서 대결한 규모보다 훨씬 큰 군대를 모았기에 그루지아인들에 비해 수가 훨씬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1121년 여름, 무슬림 군대는 다양한 경로를 따라 진군을 시작한다. 이들 병력 중 일부는 아슬란 알 룸(Arsan al Rum (Erserum))과 알가스(al-Ghars (Kars))를 통과하였고, 토그룰 술탄의 경우에는 간자(Ganja)를, 꼽추 투간-아슬란(Tughan-Arslan the Hunchback)의 경우에는 드빈(Dvin)을 통과하여 진군하였다. 이들은 그루지아 영토로 진입하자 티플리스(Tiflis)로 가기 위해 망글리시-디고리 계곡(Manglisi-Didgori valley)을 택한다. 1121년 8월 10일, 대규모 무슬림 군대가 트빌리시 서쪽 40킬로미터 지점(1일 행군거리) 지점인 디고리 대평원에서 야영을 하게 된다.

 

 그루지아인들은 무슬림 군대의 동태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고, 이에 따른 준비를 실시하였다. 다비드 국왕은 무슬림 군대가 침공하는 지역을 소개시켰으며, 휘하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루지아인들은 약 56000명의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는 약 5백명의 알란인(Alans)들과 성지에서 온 2백명의 십자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121년 8월 11일, 다비드 국왕은 고대 수도 므츠케타(Mtskheta)로부터 니흐비시 계곡(Nichbisi Valley)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나왔으며, 이어 이들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큰 쪽은 직접 지휘하고, 작은 분견대는 아들 데메트르 왕자(Prince Demetre)가 인솔하게 하였다. 왕자의 부대는 비밀리에 인근 고지를 점령하고 신호에 맞추어 적의 측면을 타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왕명에 따라 그루지아 군대 뒷쪽의 니흐비시 계곡은 나무를 넘어뜨려 차단하였으며, 이로써 그루지아 군인들로서는 죽을 때까지 싸우는 외에 도주할 길은 없게 되었다. 프랑스 기사이자 역사가였던 갈테리(Galterii)에 따르면, 전투 직전 다비드 왕은 전사들에게: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여! 우리가 우리 주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마구 싸운다면, 이는 사탄의 수많은 노예들만을 무찌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악마 그 자신까지도 무찌르는 셈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명예와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가지만을 조언하려 한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손을 들어올림으로써 주에게 맹세하나니, 주에 대한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도주할 바엔 전쟁에서 죽고 말겠나이다..."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그루지아의 전투 계획은 교묘한 기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8월 12일 아침, 약 200명의 기병이 그루지아 진지를 출발하여 적에게 간 뒤, 자신들이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놀랍게도 무슬림 지휘자들은 단지 이들을 자신들의 진영에 들어오도록 허용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이들을 만나보기 위해 한데 모이게 된다. 신호에 맞춰 이들 그루지아인들은 갑자기 칼을 빼들고는 이 새로운 주인들을 살상한다. 적진에 혼란이 발생한 것을 관찰한 다비드 국왕은 적진에 대한 총공세를 지시하였으며, 또한 데메트르 왕자 역시 적 측면으로 돌격을 개시한다. 지휘부가 혼란에 빠진 무슬림 군대는 전방에서부터 이미 조직적인 저항을 포기하였으며, 후방의 병력 또한 곧 혼란에 말려들어 단지 3시간만에 전군이 무질서한 퇴각을 시작하게 된다. 한 그루지아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다비드 국왕의 군대는 3일간 이들을 추격하여 "이들 전부를 칼로 찔러 망글리시 계곡의 육식동물과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역사가인 우르파의 마테오(Mateos of Urfa)는 "적군에 대한 끔찍하고도 야만적인 학살이 이어져, 적군의 시체가 강과 계곡과 절벽을 가득 채웠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생존자가 전체의 10분의 1 미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슬림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Ibn al-Asir)는 "무슬림 군대 대부분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라고 탄식하였다. 무슬림 총사령관 엘가지 본인은 부상을 입고 도주에 성공하였으나, 동행한 것은 단지 20여명에 불과했으며, 또한 사위 두베이 b. 사다카(Dubays b. Sadaqa) 또한 간신히 도주에 성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목걸이는 나중에 겔라티 수도원에 봉헌된다). 그루지아인들은 적진을 점령하고 이곳에 있던 수많은 금은보화를 손에 넣는다.

 

 디고리에서의 대승리는 후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게 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어느 누구의 혓바닥이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께서 이날 우리에게 선사해주신 영광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호머와 아리스토텔레스가 트로이 전쟁과 아킬레스의 용기에 대해 설명한 것이나, 혹은 요세푸스가 마카베에 대하여, 혹은 예루살렘에서의 알렉산더와 티투스에 대하여 서술한 것에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이 전투는 그루지아인들의 마음 속에 "기적적인 승리(miraculous victory/dzlevai sakvirveli)"라고 각인되었으며, 또한 그루지아 역사에서의 절정의 순간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그루지아는 11세기 말-12세기에 걸쳐 군사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소아시아 동부에서의 문화적, 정치적 무게추가 그루지아로 쏠리게 된다.

 

(다비드 왕의 모습)

 

 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다비드 국왕은 마지막 무슬림의 보루였던 트빌리시를 함락시키게 되고, 이어 1122년 그루지아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된다. 왕은 교양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인정을 설파한다.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아즈락(Ibn al-Azraq)에 따르면, "왕은 무슬림들에게 aman(?)을 허용하였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그해, 왕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왕은 무슬림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보장해 주었다... 왕은 이들이 기도 시간을 알리는 것과, 기도하는 것, 공공장소에서 코란을 읽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그는 학자들과 수피(Sifis)들의 고매함을 존중함으로써 이들의 명예를 살려주었고, 이들이 무슬림 사이에 있을 때 보다도 많은 것을 허용해 주었다."

 

 1123-1124년 사이, 그루지아 군대는 주변 아르메니아, 시르완, 북부 코카서스 등을 정복함으로써, 그루지아의 영향권은 크게 확대된다. 다비드 국왕의 공주들은 시르완 샤 아흐시탄(Shirwan Shah Akhsitan)과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4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왕자(Prince Alexios, the son of Byzantine Emperor Nikephoros IV) 등과 결혼한다. 1125년 1월 24일 다비드 왕이 죽던 시점에서, 그루지아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다비드 국왕의 성공적인 전쟁은 그루지아 국민들의 자긍심을 이끌었고, 적에게 언젠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루지아의 농업과 공업은 부활하였으며, 그루지아의 도시들은 번영하였다. 다비드 왕의 업적을 고마워한 그루지아는 그를 아흐마세네베리(aghmashenebeli(부활자, 재건자))라고 칭송하였으며, 또한 성인으로 추증하였다. 말탄 그의 웅장한 조각상은 트빌리시의 한 언덕 옆에 서 있으면서 오늘날에도 그의 국민들을 굽어보고 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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