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스크랩] [번역] 싱가포르 함락 70주년 기념 - 윈스턴 처칠은 싱가포르 함락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가? / Armchairgeneral.com

박용수 2014. 10. 27. 17:09

< 원문출처 : (http://www.armchairgeneral.com/was-winston-churchill-to-blame-for-the-fall-of-singapore.htm) >

 

 


 

윈스턴 처칠은 싱가포르 함락에 대해 비난받아야 하는가?
(Was Winston Churchill to Blame for the Fall of Singapore?)

 


저자: Hans Johnson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에서 일본군에 항복하는 영국군 장교들)

 

"나는 전화기를 놓았다. 내가 홀로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전쟁 내내 나는 이보다도 더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는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했던 말입니다. 1941년 12월 10일, 말라야 해안 근방에서 일본 해군 항공기가 2척의 영국 군함을 침몰시켰다는 전언을 들은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 수상은 이후의 2개월간 더 많은 충격들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것의 절정은 1942년 2월 15일의 싱가포르 함락이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싱가포르 요새"라는 표현을 한 바가 있습니다만, 그 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과연 싱가포르의 항복에 책임이 있을까요?

 

 대영제국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이미 일본을 싱가포르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며, 전쟁이 발발했을 때를 가정한 계획을 이미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영국 함대가 싱가포르로 항해하여 주변 바다를 장악하여, 싱가포르 및 북부의 말레이 반도에 대한 지상 침공을 방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칠은 전쟁 초기에, 호주와 뉴질랜드에게 싱가포르 방어야말로 영국의 지중해 방어보다 우선권이 있다고 확약을 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1년 말,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생사를 건 전투 속에 빠져드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싱가포르에는 기 계획되었거나 혹은 약속되었던 것들이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받을 수 있던 것은 일명 Z 부대(Force Z) 라고 불렸던 전대(squardon) 하나 뿐이었습니다.

 

 Z 부대에는 영국 해군에서 가장 최근에 건조된 주력함이었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가 있었으며, 그 외에 전투순양함 레펄스 호, 4척의 구축함이 있었고, 이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5피트 2인치의 제독이었던 톰 필립스 경(Admiral Sir Tom Phillips)이었습니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 호도 부대의 일부였지만, 자마이카 근방에서 좌초하면서 수리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함대(fleet)"에 항공모함이 없는 상태에서, 필립스 제독은 싱가포르에서 발진한 영국 공군기의 항공 엄호를 기대하고 12월 8일 싱가포르에서 출발합니다 - 이는 이날 있었던 일본군의 말레이 반도 동부해안 상륙을 방해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Z 부대에 대한 항공 엄호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만, 필립스 제독은 자신의 위치 근방으로 일본군의 두번째 상륙이 이뤄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항해를 실시합니다. 그는 무선 침묵을 유지했으며, 은밀성과 기동, 대공포의 위력이 자신의 함선들을 생존시켜줄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잠수함이 이들의 위치를 보고하게 됩니다. 12월 10일, 100대가 넘는 일본군 폭격기들과 25대의 뇌격기들이 공격을 감행합니다. 레펄스 호는 1/3의 승무원들과 함께 파도 속으로 사라집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호도 곧이어 침몰하였으며, 1/4의 승무원이 함께 가라앉습니다 - 이는 전시에 항공기에 의해 원양에서 침몰한 첫번째 주력함이었습니다. 필립스 제독 역시 익사합니다. Z 부대는 비록 그 지휘관과 승무원들이 대단히 용감하였긴 하지만, 영국의 싱가포르 방어 전략의 해군 부분을 담당하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였습니다. 여기에 HMS 인도미터블 호라는 단지 소수의 현대식 전투기를 탑재하는 항공모함을 더하더라도, 이러한 대규모의 항공전력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를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강력한 함대가 없음으로써 발생한 공백은 영국 공군력이 메워야 했을 것입니다. 영국 전략가들은 싱가포르에 수백대의 최신식 항공기를 증원하는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는 브루스터 버팔로(Brewster Buffaloes)와 같은 대단히 구식의 항공기들만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싱가포르 방어는 독일을 무찌르는 것 보다는 우선순위가 낮았으며, 설령 독일을 무찌륻 수 있었더라도, 수백대의 현대적인 영국 전투기들의 그 다음 우선순위는 소련으로 보내지는 것이거나, 혹은 중동의 영국군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전략의 세번째 요소는 남부 시암(오늘날의 타이)를 신속히 타격하여, 일본군이 말레이를 침공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을만한 비행장과 상륙지점들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타도어 작전(OPERATION MATADOR)의 성공은 영국측의 신속한 결심과 적시적인 이동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영국 측의 결심 주기 사이에 끼어들 수 있었으며, 마타도어 작전과 관련된 명령이 하나라도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상륙해 있었습니다. 영국 전략의 모든 요소들 - 바다를 장악하고, 하늘을 장악하며, 중요한 지점들을 점령한다 -이 모두 실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싱가포르에서의 항복행사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영국 장교들)

 

 12월 8일, 일본군이 남 시암에 상륙하고, 북부 말레이에 상륙하면서, 이들은 싱가포르로부터 수백마일 북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대부분 인도군, 호주군, 영국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본군과 싱가포르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구식의 연합군 항공기를 신속하게 제압하고 항공 우세를 점하게 됩니다. Z 부대가 몰락하면서 일본군은 바다를 장악하게 되었고, 연합군 전선 뒤로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일본군은 연합군에게는 전혀 없었던 200여대에 가까운 전차를 가진 장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처음에 마주친 것은 인도군이었습니다. 화력과 기동이 승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전투에서 인도군을 압도했으며, 도로를 벗어나 인도군 진지 후방으로 침투함으로써 성공을 거둡니다. 트럭이 많지 않았음에도, 일본군은 자전거를 이용하여 꾸준한 진격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말레이에는 자전거가 많았는데, 일본군은 이를 징발하여 활용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60~70명의 그룹을 지어 반도를 따라 이동하였으며, 이로써 이 전역에는 일명 '자전거 전격전(Bicycle Blitzkrieg)'이라는 별명이 붙게 됩니다. 또한 일본군은 적군을 묶어두기에 딱 적절한 수준의 상륙작전을 연합군 전선 후방에 실시합니다. 12월 말에 이르르면, 침공군은 싱가포르까지 절반 정도를 도착하게 됩니다.

 

 일본군은 1942년 1월에도 주도권을 유지합니다. 연합군은 매복을 통해 일본군에 약간의 피해를 입히고, 또한 지연작전을 펼쳐서 동료들이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지만, 일본군에 대한 심각한 역습(counterattack)이나 반격(counteroffensive)은 전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연합군 증원군이 도착하기는 했지만, 공세를 저지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1월 말이 되어 연합군은 싱가포르와 말레이를 잇는 방죽 교각에 20미터의 틈새를 만들게 됩니다. 이제 말레이 전투는 끝장난 것입니다; 단지 싱가포르 전투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싱가포르에 대해 좀 더 잘 방어해야 한다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청원에 반응하여, 처칠은 증원군을 보냅니다. 여기에는 제 18 영국군 사단, 제 44 인도군 여단 - 이 부대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훈련된 부대였습니다 -, 약 50대의 허리케인 전투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2월 8일 싱가포르에 상륙하기까지 단지 며칠만을 멈춰섰을 뿐이었습니다.

 

 처칠은 싱가포르를 열심히 방어해야 한다고 지시하였고, 지휘관은 병사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연합군은 식량과 유류 저장고가 있는 부킷 티마(Bukit Timah)의 고지대에서 방어전을 펼칩니다만, 11일에는 진지를 잃게 됩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 시가지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연합군은 12일 병력을 섬 동쪽에서 후퇴시킵니다. 이로써 싱가포르의 물 저수지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식량, 물, 탄약이 부족한 가운데, 영국 지휘부는 역습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합군은 일부 병력을 빼내려고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은 대부분의 탈출 선박을 격침시킵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2월 14일 처칠은 입장을 바꿔 싱가포르의 항복을 승인합니다.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 및 영연방군 지휘관 아서 퍼시발 중장(Lieutenant General Arthur Percival)은 항복 조건을 협상합니다. 일본군 지휘관 도모유끼 야마시타 중장(Lt. Gen. Tomoyuki Yamashita)은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합니다. 퍼시발은 이를 승락합니다. 일본군에 항복한 병력 규모는 6만명에서 1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퍼시발 장군은 자신의 군대보다 훨씬 소규모의 군대에게 항복한 것입니다 - 야마시타 장군은 자신의 병력 규모가 단지 3만명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야마시타의 부대 역시 탄약이 부족했습니다만, 퍼시발은 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단지 70일 동안 500마일 이상을 진격하여 목표물을 점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합군 대부분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싱가포르에서 항복한 인원들은 Changhi 근방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으며,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굶어죽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습니다. )

 

 항복이 고통의 끝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으며, 단지 새로운 고통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수천명의 포로들을 처형, 고문, 학살했습니다. 다른 포로들은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민간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국 식민 주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놀라운 성공에 대한 찬탄도, 일본인들의 지배 속에서 신속하게 잊혀지게 됩니다. 일본인들이 식량을 다른 곳으로 실어감에 따라 시민들은 굶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연합군을 도와준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죽였습니다. 일본측이 전쟁 후 추산한 민간인 사망자는 5천명이지만, 다른 출처에 따르면 최대 5만명으로 잡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수정주의자 역사가들은 싱가포르에서의 참사를 처칠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처칠은 싱가포르를 잃고 싶지 않았고, 또한 호주인들과 뉴질랜드인들에게 그가 싱가포르를 방어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1월에 병력을 증원하고 항공기를 증원했습니다. 과연 그가 호주인들과 뉴질랜드인들에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것일까요? 네. 하지만 일본인들은 영국 뿐만이 아니라 미국까지도 공격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처칠이 싱가포르에 더 대규모의 함대를 보낼 수 있었을까요? 네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대서양에서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 이는 1943년이 되어서야 절정에 이릅니다 - 이는 대단히 긴박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강력한 영국 함대를 통하여 싱가포르를 방어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과연 대서양 전투에서 져도 될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처칠이 약속했던 바와 같이 항공기와 전차를 싱가포르에 보내 지중해를 희생해야 했을까요? 아닙니다. 중동의 유전지대를 독일로부터 지키는 것은 싱가포르 보다는 훨씬 중요했스니다. 소련에의 원조 역시도 같은 논리가 성립합니다. 1941년 12월에 독일군이 크레믈린 근방까지 도달하게 되자, 소련은 영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갈구하게 됩니다.

 

 싱가포르가 함락한 데에 대한 비난을 처칠에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그가 책임자라는 표현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의 결정에 잘못된 점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전반적인 전쟁노력의 일부라고 봐야 합니다. 비록 싱가포르 함락이 그곳의 시민들과 방어군에게 비극적인 일이었고, 이들과 태평양 지역 영연방 국가들이 배신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지만, 처칠은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2012년 2월 15일은 "난공불락의" 싱가포르가 일본제국군에게 함락당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기념하여 암체어 제네럴에서는 이 글과 함께, 2곳의 싱가포르 박물관에서 찍은 이 시기의 사진들을 전시하기로 하였습니다.

- 링크 : (http://www.armchairgeneral.com/world-war-ii-museums-in-singapore-photo-essay.htm)

 

저자 소개
Hans Johnson 은 플로리다에 사는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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