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언덕 위의 불길 : 1982년 가을에 이란과 이라크간 벌어진 전투들 - ACIG

박용수 2014. 10. 27. 15:47

< 원문 출처 : ACIG Database (http://s188567700.online.de/CMS/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59&Itemid=47) >

 

 

 


언덕 위의 불길 : 1982년 가을에 이란과 이라크간 벌어진 전투들
Fire in the Hills: Iranian and Iraqi Battles of Autumn 1982

 

 


 1982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이라크와 이란 국경 지역의 수마르 언덕(Sumar hills)에서는 1차 페르시아 걸프 전쟁(First Persian Gulf War) 기간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지역의 전투는 그 앞뒤에 벌어진 또다른 대규모 작전들에 비하면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양측은 공군력에 크게 의존하였고, 많은 결과들이 나왔으며, 특히 논란이 많아 유명해진 전과들도 많이 양산했다.

 

(전통적인 대형으로의 비행. 이는 미 육군 소속 UH-1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작전하면서 보여준 대형과 똑같다. 이 사진은 1982년 가을, 모하람 작전지역 남부지역의 이라크군 전선 후방으로 병력을 수송하러 이동하는 모습을 다른 이란군 헬리콥터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것은 1980년 9월 22일의 일이다. 당시 이라크 공군 전폭기들은 항속거리 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이란 활주로들을 폭격했으며, 이라크 육군은 국경지역의 여러 장소들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전면전으로 이어졌으며, 양국간의 길고도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18개월 동안 전투가 계속되던 시점인 1982년, 이란 지상군은 마침내 이라크군을 이란 영토에서 몰아낼 수가 있었다. 3월과 6월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공세들을 통하여 이란군은 이란령 쿠제스탄 주(province of Khuzestan)에 위치하고 있던 이라크 육군(IrA) 주력을 압도하며 동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라크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병력 규모가 21만명에서 15만명으로 감소하였고, 2만명 이상의 이라크군이 전사, 3만명 가량이 포로가 된다; 2개 기갑사단(당시 현역 기갑사단은 4개였음)과 3개 기계화 사단 전력이 각각 여단 이하 규모로 감소되었고, 이란군의 손에 45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를 빼앗기게 된다.

 

 이라크 공군(IrAF)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들은 1981년 12월 초 최대 55대의 항공기를 손실함으로써, 작전 가능한 전폭기 및 요격기 수가 100대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1982년 6월 시리아로 MiG-21을 타고 망명한 한 조종사에 따르면, 당시 이라크 공군이 공세 작전에 활용할 수 있는 전폭기 비행대대는 단지 3개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이라크 육군 항공단(IrAAC)의 사정은 다소 나았으리라 추정되며, 당시 70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운영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1982년 전투에서 이란군의 피해 역시 존재했으나, 그 피해는 이라크군이 겪은 것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비록 중화기와 탄약 부족에 시달렸음에도 사기는 매우 높았다. 이란군은 스스로가 정의로운 목적 - 이라크군이 불법 점령하고 있는 쿠제스탄 유전지대의 해방 -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목표를 달성한 이란군은 이제 그 다음 행보를 결심해야 했다. 여름 기간동안 이란의 고위 성직자들과 정치가들, 고위 장성들이 모여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론적으로은 유엔과 알제리가 중재한 중재안에 따라,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데에 대한 배상금을 사우디와 쿠웨이트로부터 받아내는 방안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바그다드 정권과의 협상을 전제로 했고, 이는 이란 지도자들로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을 사항이었다.

 


이라크 영내로의 침공

 

 테헤란의 지도자들은 그간의 성공에 도취하여 이제 이라크로 침공하여 그 기반이 취약해진 바그다드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라고 판단했다.

 

 이제 이란인들은 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전문 군인들은 장기전에 반대하고 조기 종전을 요구했으며, 장기전에 따른 장비 부족 및 파손이 심각해지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대안으로 일부 군인들은 바그다드를 향한 과감한 총력전 계획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이 경우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 점령은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제안들은 각하되었는데, 이는 이란의 종교, 정치적 지도자들이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별로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Islamic Republic Revolutionary Guards Corps, IRGC, better known as "Pasdaran") 부대를 활용하여 이라크 군사력을 하나 하나 붕괴시킴으로써, 장차 이라크 내의 시아파 사회에서의 폭동 내지는 봉기를 유도한다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수많은 이란의 실수 목록 중에서 첫번째를 장식하게 되며, 이로 인해 이란이 명백한 승리자의 입장에 놓이지 못하게 됨은 물론, 거의 패배의 직전까지 몰고가게 되는 원인을 마련하게 된다.

 

 최초의 전략 목표는 이라크 제 2도시인 바스라(Basrah)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UN의 또 한번의 휴전 제의를 거부한 뒤인 1982년 7월 14일,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는 라마단 작전(Operation RAMADHAN)을 개시한다. 그러나 당시 선정한 군사 목표는 당시의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었다. 이란인들은 이라크 군대가 최근의 패배로 혼란한 상황에 있는 틈을 타 적의 방어선의 약한 지점 한 곳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보 측면에서 이라크군에 뒤져 있었다. 이란인들은 이라크인들이 이미 라마단 작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북부 및 중부 전선의 병력을 빼내어 바스라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였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결과,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 병력과 바시즈(Basij) 민병대 병력들은 제이드 호수(Zeid Lake)와 샬람체 지역(Shalamcheh areas)에 있는 강력한 요새지를 공격해 들어가게 되었고,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이라크군의 강력한 화력과 측면 공격에 힘입어 공세는 돈좌된다. 이란군은 제 16기갑사단과 제 92기갑사단의 치프틴(Chieftain) 주력전차와 BMP-1 장갑차까지도 투입하였으나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번 공세 당시,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IRGC)는 최근 편성한 제 30 IRGC 기갑사단의 투입을 통해 최초로 기갑세력을 전장에 투입하게 된다. 이 부대는 이전의 이라크군과의 전투를 통해 노획한 T-55 전차 및 63/531형 장갑차들로 구성된 최초의 독립 전투부대였다. 이란 기갑부대들은 이외에도 제 21, 77 보병사단과 제 58 코만도 여단, 제 23 특수전 여단, 제 22, 33 포병단, 제 1,3,5,6 IRGC 보병사단 등의 지원을 받았다. 이란 육군항공대(Islamic Republic of Iran Army Aviation, IRIAA) 역시 상당수의 헬리콥터 부대를 투입하였다. 여기에는 34대의 AH-1J/T 코브라 헬 및 여러 대의 Bell 204, Bell 206, Bell 214, CH-47 치누크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동독 군사고문관 팀의 도움을 받고 있던 이라크인들 역시도 Mi-25 하인드 헬기와 SA-342L 가젤 헬기를 조합한 "헌터/킬러" 팀을 만들어 대항했다. 이 조합은 대단히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헌터/킬러팀들은 단순했지만 대단히 효과적이었으며, 양개 기종의 장점들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Mi-25가 먼저 들어가 이라크군 진지를 57mm 무유도 로켓으로 뒤집어 놓은 다음 대공포 진지를 상대했고, 가젤은 이 혼란 속으로 파고들어가 HOT 대전차 미사일을 이용하여 이란군 전차들을 사냥했다.

 

 비록 이란 육군(IRIA, Islamic Republic of Iran Army)과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IRGC) 소속 전차부대들이 끈질긴 전투를 통해 8월에 이르러 바스라까지의 통로를 개척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 이들은 인원 및 장비에 있어 크나큰 손실을 입게 되고, 마침내 이라크군 기갑 부대의 반격으로 전멸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이란 육군항공대의 AH-1J 코브라들이 뛰어들면서 이란 기갑부대는 전멸을 면하고 퇴각에 성공하게 된다.

 

 이란군이 이라크에 대한 일련의 공세들을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던 시기, 이라크군은 붕괴된 전열을 가다듬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동시에 이라크인들은 모든 가능한 자원을 활용하여 - 아마도 사우디와 쿠웨이트의 차관이 주 원천이었을 것으로 보임 - 새 장비들을 사들였다. 1982년 기간 동안, 이라크인들은 소련과의 접촉을 재개할 수가 있었고, 소련으로 하여금 1979년에 주문했지만 1980년에 인도 과정이 중단되었던 항공기와 전차들의 인도를 재개하도록 설득할 수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와의 협상도 타결되어 미라지 F1EQ 전투기들과 대공미사일, 탄약과 자주포 등을 구입할 수 있었다. 끝으로 중국에서 대규모의 전차와 F-7B 전투기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언젠가 이란인들이 쳐들어 올 것을 예상한 이라크인들은, 국경선 근처에 있는 이란 도시들의 산업시설 및 민간 시설들에 대한 일련의 공습을 감행한다. 이는 나중에 소위 "도시들의 전쟁(War of the Cities)"으로 불리게 되며, 이 전쟁의 독특하고도 흔한 장면으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의 이라크 공군은 우세를 보인다. 또한 이라크는 페르시아 걸프만에 연한 이라크 연안 지역과 카크 섬(Khark Island) 지역 - 이란의 석유 수출 경로의 대부분을 차지함 - 의 이란 국제 무역을 공습 목표로 삼는다. 이 전술은 나중에 일명 "유조선 전쟁(Tanker War)"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전략은 1차 걸프전쟁이 종결되는 그날까지도 이어지는 소모전을 불러일으키게 되며, 이란 공군이 이라크 석유 산업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으로 대응하면서 양측 모두에게 대규모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1982년 여름의 샬람체와 바스라 사이에서의 전투 기간 동안,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는 전쟁기간 최초로 기갑부대를 투입하게 된다. 이들은 이라크 방어에 가로막히게 되었고, 이란 육군의 치프틴 전차가 지원하러 가게 된다. 이라크군은 Mi-25와 가젤 헬기로 구성된 "헌터/킬러"팀으로 응수한다. 이 사진에 나타난 차량들은 개활지에서 포착되어 HOT 대전차 미사일에 명중하여 파괴된 것들이다.)

 

 


목격자 진술

 

 이날은 라마단 작전 2일차 아침이었다. 3대의 AH-1 코브라와 1대의 Bell 214기로 구성된 이란 육군항공대 사격팀은 이라크군이 무전으로 지속적으로 방공망 요청만을 할 지경이 되도록 이라크군을 계속 타격했다.

 

 이러한 임무들을 수행하던 도중, 잠시르 푸라자드 소령(Maj. Jamshid Pour-Azad)과 게이비 대위(Capt. Gheibi)가 조종하던 Bell 214 SAR 기체가 3대의 이라크 MiG기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란 공군의 전방항공통제장교는 즉각 사격팀을 위한 항공 엄호를 요청했고, 곧바로 2대의 이란 공군 F-4 팬텀기들이 공역에 진입하여 이라크 전투기들과 교전을 벌인다. 한편, 헬리콥터 팀은 지정된 비상착륙 지점에 착륙하여 상공의 격투전을 목격하게 된다. 푸라자드 소령은 양측이 서로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하고, 이어 이라크 MiG기 중 한대가 화염에 휩싸여 뒤에 연기를 내뿜으며 이라크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기쁨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순간 2대의 이라크군 미라지 F.1EQ 전투기가 전투에 합류하여 이란군 전투기 한대에 미사일을 발사했던 것이다. 팬텀기의 후방 동체는 불길에 휩싸였고,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 두 명의 조종사 모두 안전하게 사출하긴 했지만, 이라크 진지 방향으로 낙하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공에 아직도 이라크 전투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SAR 헬기 조종사들은 이 팬텀 조종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즉각 이륙하게 된다. 팬텀 조종사들이 착륙했을만한 지점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대공포가 불을 뿜었고, 이라크 저격수들이 낙하산에 매달린 조종사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팬텀 주 조종사가 착지하자마자 SAR 헬기 역시 그 근처에 착륙하여 구출한다. 잠시 후 팬텀 항법사 역시 착지하였고, 그 역시 구조된다. 그러나 이것이 모험의 끝은 아니었다. 2대의 Mi-25 하인드 헬기가 SAR 팀을 쫓아왔던 것이다. 이란인들은 속력을 내어 아군 지상군 지역까지 이동했고, 지상군의 대공사격에 힘입어 추격하던 이라크인들은 단념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란인들은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다.

 


양군의 특징

 

 7월의 샬람체와 바스라 동부에 대한 공세 실패가 있은 후, 그해 여름 나머지 기간 동안 이란군의 공세는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된다 - 이번에는 이란군 합동 참모들(Joint Chief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Armed Forces, IRIAS)의 조언에 귀기울여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단지 120km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바그다드로 향하는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공세는 무슬림이븐아킬(MUSLIM-IBN-AQIL)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A. 로스타미 대령(Col. A. Rostami)이 지휘하는 이란 제 1군단에 의해 준비되었으며, 동 군단에는 제 28 기계화 보병사단(28th MID)과 제 81 기계화사단(81st AD)이 있었고, 다수의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 및 바시즈 민병대의 지원 하에 진행되었다. 이들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의 경우 상호간의 유치한 라이벌 의식 탓에 정규군과 합동작전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이 작전에서는 우선 수마르 언덕 서쪽의 아직 이라크 치하에 있는 이란 영토들을 해방시키고, 이어 이라크 국경도시이자 바그다드로부터 북동쪽 120km 지점에 있는 만달리 시(city of Mandali)를 점령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이라크 방어선에 적당한 균열이 생기는 경우 최종 목표인 바그다드 자체를 함락시키는 것으로 하였다.

 

 이란군 지휘관들은 이라크의 중부 혹은 북부 전선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이라크군의 방어가 흔들리기를 기대하였고, 이를 통해 이라크군 전 방어선을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란군은 나프트 샤흐르(Naft Shahr)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라크군을 먼저 고립시킨 후, 바그다드에서 75km 떨어져 있고 대규모 이라크군 보급시설 및 정비시설이 위치한 만달리-바쿠바(Mandali-Baqubah) 가도에 도착하여야 했다.

 

 이 작전을 위한 항공 지원은 케르만샤(Kermanshah) 육군항공단 소속 대대에 의해 제공될 예정이었으며, 동 부대는 H. 나마지안 대위(Capt. H. Namazian)가 이끄는 24대의 AH-1J 코브라 헬기 및 Bell 214A 이스파한 헬기로 무장되어있었다. 이들은 수마르 근처의 전진기지에 배치되어 진군하는 이란 지상군에 탄약을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란 공군은 R. 살만 대위와 S. 칼리리 대위가 이끄는 제 31 전술전투기대대(Tactical Fighter Squardon, TFS) 및 제 33 전술전투기대대 소속 약 14에서 15대의 F-4E 팬텀II 전폭기를 하메단(Hamedan) 근처의 TFB.3(제 3 전술 전투기 기지)에 배치하였다. 한편, 오미디예(Omidiyeh) 지역의 TFB.5에 있었던 제 51, 53 TFS의 경우 각각 7대와 9대의 F-5E 타이거II를 준비시켰다.

 

 이에 대항하는 이라크군 전력은 이라크 제 3군단이었으며, 여기에는 제 3 "살라딘" 기갑사단과, 제 5, 6 기계화사단, 제 11 보병사단, 그리고 최소 1개 포병 여단 및 1개 특수전 여단이었다. 제 3 "살라딘" 기갑사단의 경우 최근 재편성되어 T-72 전차를 장비하고 있었다. 또한 3군단 대부분 부대들은 아직 완전하게 복구된 상태가 아니었지만,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효과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다만 육군항공대가 이곳에 영구 주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언제라도 증원병력을 보낼 수 있도록 탄약과 연료가 준비된 일련의 주 기지들과 전방 활주로들을 활용할 수가 있었다.

 

 

(이란 공군의 TFB.3 소속 F-4E. 라마단 작전 기간동안 최대 4발의 BL.755 클러스터 폭탄(CBU)을 장착하며 다수의 전장차단 및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무슬림-이븐-아퀼 작전과 모하람 작전에서는 다수의 적기 격추에 대비하여 극히 적은 수의 손실만을 입게 된다.) 

 


이라크 Mi-25 헬리콥터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198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이란 침공 준비과정에서 창설되었다. 동 부대는 프랑스 육군항공대(French Army Aviation, ALAT)를 모델로 하였다. 동 부대는 보유 헬기를 전부 육군 지원용으로 사용하였고, 해당 조종사 및 기술자들은 주로 프랑스, 소련,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아직 완전히 발전된 상태가 아니었다. 비록 잘 훈련되고 유능한 요원들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부대의 장교들은 헬리본 작전에 대하여 더 배울 필요가 있었다. 상당수 경우 이들은 단지 이란 군의 전술을 모방하는 것 이상을 할 수가 없었다. 육군항공대는 전쟁 발발과 동시에 참전하였으며, 매일 수백 소티를 출격하였다: 예를 들어 1980년 10월 30일,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최소 120회 이상의 공격 소티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에게는 적합한 장비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들의 주력 장비였던 Mi-8 무장헬기의 경우 병력 수송 및 보급품 수송에는 적합했지만, 크기가 너무 크고 무장 상태가 충분하지 못하여 대전차 임무에 적합하지 못했고, 더구나 이란군 요격기에도 취약했다. 한편, SA-342 가젤 헬기의 경우, 프랑스로부터 HOT 대전차미사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전차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경무장이었다. 그외로 운영하였던 프랑스제 헬기로는 1970년대 초반에 도입한 SA.316C 알루엣 III 헬기가 있다. 알루엣 III 헬기에는 중기관총과 프랑스제 AS.11, AS.12 대전차미사일이 탑재되었다. 이 장비들은 과거 쿠르드족 반군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고, 탑재 미사일들은 동굴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쿠르드족은 다른 어떤 무기들 보다도 이 작은 헬리콥터를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루엣 헬기는 주로 북부 이라크 지방에서의 연락헬기 또는 포병 관측헬기로만 사용되게 된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은 2년간의 이란과의 전쟁 동안 심각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며 완강했다. 이라크인들의 침공 시도가 큰 피해와 함께 실패함에 따라, 이들은 무기 체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이들은 외국 자문단들을 초청했고, 어떤 좋은 아이디어든지 간에 귀를 기울였다. Mi-25 하인드에 대해서는 특히 더했다.

 

 1982년 무렵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총 8개의 비행대대로 불어났다. 각 부대의 단대호는 60번대(아마 61에서 68까지로 추정됨)를 갖고 있었으며, 총 70여대의 헬리콥터가 운영 가능상태에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Mi-8, Mi-25, SA.352L 가젤, SA.316C 알루엣 등이었다.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나중에 2개의 "공격 수송 헬기 편대(Attack Transport Helicopter Wings)"로 재편한다. 각각의 헬리콥터 비행대대는 여러 분견대로 나뉘어져 전방에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제 64 공격수송훈련특수작전 비행대대의 경우, 8대의 Mi-25를 2대씩 사마라(Samarah), 바이지(Baiji), 모우셀(Mousel), 팔루자(Falujah)에 고정 배치시키고, 화학무기로 채워진 활강폭탄을 장비시켰다.

 

 그 외에도 2대씩의 하인드팀이 자주 배치되던 곳은 바스라(Basrah) - 이곳은 바그다드의 대통령 궁전 근처인데, 사담 후세인 및 가족들의 헬기를 경호하는 임무에 주요 사용됨 -, 쿠트(Kut), 키르쿠크(Kirkuk), 나시리야(Nasseryah), 잘리바(Jalibah), 로웃바(Routba), 탈릴(Tallil) 등이었다. 이라크군 Mi-25의 경우 대형 조기경보 레이다가 있는 곳 근처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 이 레이다들이 자주 이란 코만도 부대의 목표물이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코만도의 공격이 성공하는 경우 종종 이라크군에게 파멸적인 효과를 거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 가을의 전투기간 동안, 제 64 공격수송훈련특수작전 비행대대의 Mi-25들은 2개 분견대로 나뉘어졌고, 쿠트와 모우젤, 키르쿠크를 기지로 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은 쿠르드족에 대한 작전에도 참가하게 된다. 쿠르드족들은 곧 이라크 중무장 헬기와 그 강력한 화력을 조심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들 화력은 종종 마을들과 피난민 행렬에도 쏟아졌다.

 

 1982년 당시 Mi-25는 아직 이라크군 입장에서 신형 장비였다. 이라크군이 처음으로 Mi-25를 주문한 것은 1977의 일이며, 이는 1979년까지의 총 250대 이상의 소련제 항공기 및 헬리콥터 구매 협약 -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1980년 9월 소련이 이라크에 대한 무기 인도를 중단하면서 1982년이 되어서야 인도되게 된다 - 의 일환이었다. 1980년 4월, 이라크에 처음으로 4대의 Mi-25D가 도착했다. 동년 6월에는 추가로 4대가 더 들어왔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9월 22일 시점이 되었을 때, 신편 이라크 육군항공대 4대대 휘하에는 6대의 헬기가 가동상태에 있었다. 1대는 9월 7일 이란과 이라크군간의 최초 교전이 발생하였을 때 이란군 F-14에 격추되었고, 1대는 수리 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 해 말까지 3대의 Mi-25가 이란군과의 전쟁에서 손실되었고, 1981년 1월에 5번째 헬기를 잃게 된다. 비록 이라크의 이란 침공 이후 소련이 "공식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이라크는 16대의 추가 Mi-25 주문을 실시한다. 1982년 5월에는 추가로 18대를 더 주문하게 되며, 이해 10월에는 이들 중 일부가 이라크에 도착하기 시작한다.

 

 당시 소련측에서 하인드 헬기를 인도하는 속도는 매우 더뎠는데, 이는 자신들 역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하인드 헬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 8월, 이라크 육군항공대에는 단지 20여대의 Mi-25들이 가동 중에 있었다. 전기체 모두 제 64 "공격수송훈련특수작전 비행대대"에서 운영되었으며, 이들 조종사들은 이라크 헬리콥터 조종사들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충성심 강한 요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에 대한 이라크 정권의 신뢰도는 2대의 Mi-25를 바그다드 근처에 항시 배치시킨 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로써 이들은 이라크 최고 지도자들의 이동을 항상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Mi-25 조종사들은 항속거리와 무장량, 속도, 다용도성 등에서 동 기체를 좋아했지만, 반면으로 무기 시스템의 신뢰도와 정밀도, 헬리콥터의 크기 및 민첩성 측면에서 불만을 가졌다. 이란 공군 F-5 조종사들이 전방 지역의 이라크 헬기를 사냥하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에서 전직 이라크 육군항공대 Mi-25 조종사였던 아두안 하산 야신 대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항상 주변에서 가장 큰 타겟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이란인들은 Mi-25의 위협에 대하여 금방 깨달았으며, 이걸 "사냥"하는 작전을 여러차례 구상했다.

 

 그 결과 1982년 여름에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일단의 동독 군사고문단을 초청하여 하인드 헬기의 전술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한 성과 중의 하나가 앞서 말한 헌터/킬러 팀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즉 Mi-25가 이란군 대공방어를 제압하는 동안, 보다 취약한 가젤 헬기가 HOT 대전차미사일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팀 5개가 창설되었고, 이들 중 한팀은 동독의 랄프 게슈케 대위(Capt. Ralf Geschke)가 이끌었다.

 

 흥미롭게도 이라크인들은 한번도 Mi-25 헬리콥터를 "대전차"용 헬리콥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보다는 "전투수송헬기"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그 결과 이라크군 Mi-25에는 AT-6 대전차미사일이 한번도 탑재된 적이 없으며, 수많은 서방 및 러시아 언론 보도와는 달리, AT-6 자체가 아예 이라크에 제공된 적이 없었다. AT-6는 이라크에 시험목적으로조차 전달된 적이 없었으며, 소련이 이 무기를 실전에서 시험해본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였다.

 

 또한 다른 보고들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게, 이라크 헬리콥터에는 AT-4 파곳/9K11 대전차미사일 역시도 장착되지 않았다. 비록 이 무기가 전쟁 훨씬 이전에 이라크군에게 인도되기는 했고, 이라크군이 이걸 헬기에 장착하려고도 하긴 했지만, 2가지 이유 때문이 이라크군은 이 무기를 Mi-8 및 Mi-25에 장착하지 못했다: 양개 기종 모두 사수를 위한 안정화 조준 장치가 없었던 것과, 이 미사일 발사시 발생하는 3에서 5미터 가량의 후폭풍 문제 때문이었다. 안정 포발사 시스템이 없다는 점 탓에 소련의 경우 AT-2 스콜피온 미사일을 Mi-25의 주무장으로 채택했다. 한편, 강력한 후폭풍 문제 탓으로 헬기 외곽에 AT-4를 장착하려는 제안도 무산되었다. 그 결과 전쟁 내내 이라크 육군항공대 하인드 헬기들이 사용한 대전차미사일은 느리고 약한 AT-2B/C 뿐이었다. 이들 중 1000발은 이라크에 대한 2회의 초기 하인드 배치(batch) 인도 과정에서 함께 인도 되었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6년 이상(1980-1983, 1986-1989)을 이라크에서 소련군 군사고문관으로 근무했던 세르게이 베즐루드니 대령과 다크 구로브 소령의 언급에 따르면, 이라크 Mi-25들은 이 미사일들 조차도 자주 장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Mi-25가 샬람체 평원의 이라크 기계화부대 위로 날고 있는 사진 (미 국방부 제공))

 

(1982년 가을 당시의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제 64 비행대대의 Mi-25. 피아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이라크 육군항공대에서는 헬리콥터 여러 곳에 국기를 커다랗게 표시하였다. (톰 쿠퍼 그림))

 


1982년 가을의 이라크 공군(IrAF) 상황

 

 이 시기에 이르러 이라크 공군은 몇몇 전투력이 바닥난 MiG-23MS 및 MiG-21MF 비행대대 및 1개 미라지 F.1EQ 비행대대, 2개 비행대대에 상당하는 Su-20/Su-22 5개 부대, 2개의 MiG-23BN 부대를 바그다드 동쪽에 있는 5개 비행장과 이란 국경 근처의 3개 비행장(수바쿠, 바쿠바, 세이크 자셈 기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미라지 F.1EQ들은 전선에 내보내기 보다는 후방의 전략 요충 시설들을 방어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이라크 공군 제 96 비행대대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이 부대의 경우 MiG-25PD를 운용했다. 이라크 MiG-25PD의 경우에는 가끔은 이란 영내에 있는 항공기 - 가끔은 민항기도 포함 - 를 요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편 MiG-25RB를 운용했던 제 84 비행대대의 경우 카르크 섬(Khark Island) 작전에 주로 사용되어 전방에서의 전투에는 그리 많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라크 공군 제 39 비행대대 도장을 한 MiG-23MS. 1980년대 초반 알-타카둠에서 목격된 형태이다. (톰 쿠퍼 그림)) 

 

 

 무기들의 장단점

 

 이란-이라크 접경지대 중부 지역의 험한 지세는 양측으로 하여금 항공력을 많이 사용하도록 강요하게 하였다. 이러한 지형으로 인하여 양측 항공기 모두 보다 많은 엄폐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1982년이 되면 양측 모두 이 전쟁은 누가 더 오랫동안 자체 전투력과 자원을 보존하며 버티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양측 모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긴 했지만, 이에 따른 대책은 양쪽이 서로 크게 달랐다. 이라크 정권의 경우 이란에 비해 보다 쉽게 항공기와 헬리콥터의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은 입히지 못하더라도 항공력을 계속 사용하는 편이 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라크 공군과 이라크 육군항공대는 지속적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1982년 여름에 이르르면 거의 작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1명의 조종사 손실이 사기와 총 전투력에 미치는 영향은 지상군 1개 연대 내지는 여단의 상실과 비교해 본다면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반면 이란 측의 경우 상황이 정 반대였다: 이란의 지상군은 숫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중장비 보유량이 부족했고, 항공부대의 경우 휘하의 장비 및 숙련 인력들에 대해 상당한 보호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결과 이란은 항공력을 대단히 신중하게 사용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베트남전 경험을 반영하여 조직 및 장비된 이란 정규군 육군의 경우 헬리콥터에 많이 의존해야 했다. 특히 1982년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작전이 벌어졌던 거친 지형 조건의 지역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양호한 도로는 부재하면서도 고속 기동전이 벌어지던 지역에서는 Bell 214 헬기와 CH-47기가 운송하는 보급품과 코브라 헬기에서 지원하는 화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나 바시즈 민병대들 조차도 이란 육군항공대 헬기의 출현을 반기게 되었고, 단지 한두대의 코브라 헬기만 시야 내에 있더라도 지상군의 사기는 크게 앙양되곤 하였다. 이란인들은 자신들의 조종사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깨달았고, 테헤란 정부 역시도 이란 공군과 이란 육군항공대의 에이스들의 유명세를 이용하길 꺼리지 않았다 - 사실 이들 대부분이 "대 악마(Great Satan; 미국 및 팔레비 정권을 의미하는 듯. 역주)"에 의해 훈련된 인원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참 모순적인 일이다.

 

 1982년의 이란 육군항공대(IRIAA)는 탁월한 전투 능력 및 헬리콥터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부대였다. 1970년대 당시, 이란 육군항공대는 다수의 공격헬기 및 수송헬기를 구매했다. 여기에는 202대의 AH-1J 코브라와 287대의 Bell 214A, 214대의 AB.206 제트레인저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약 20여대의 AB.205가 SAR(탐색 및 구조) 및 CASEVAC(사상자 퇴출) 임무에 사용되었고, 118대의 CH-47 치누크 헬기(이 중 일부는 미국에서, 일부는 이탈리아에서 구매)가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1982년 무렵에 이르르면, 상당수의 Bell 214A 헬기와 일부 코브라 헬기가 1970년대 오만에서의 분쟁 당시 손실되었고, 1979년과 1980년 당시 이란 내 쿠르디스탄에서의 쿠르드족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과 이후의 이라크의 침공 과정에서도 상당수를 손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란 육군항공대의 규모는 아직도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으며, 620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운영함으로써 세계에서 제 4위의 헬리콥터 보유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3개의 소위 말하는 직접지원전투그룹(Direct Support Combat Group)으로 편성되었으며, 각 그룹은 1개 공격헬기사단(AH-1J, Bell 214/AB.205 및 AB/206 운용)씩을 운영했다. 그리고 또한 중형 및 대형 수송 헬리콥터 - Bell 214 및 CH-47C -로 구성된 "일반지원그룹(General Support Group)"을 편성해 운영했다.

 

 이란 육군항공대는 전선의 특정 지역으로 헬리콥터를 대량으로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주 이유로는 전선이 너무 길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보유 헬기에 비하여 승무원 수가 부족하였고, 새로운 승무원 훈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와 다르게, 정비문제는 별로 나타나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1970년대에 들어온 대규모 헬기 정비시설 탓이었다; 이란 헬리콥터 지원 및 재생회사 (Iran Helicopter Support and Renewal Company, IHSRC)가 메흐라바드 공항 동쪽에 벨 텍스트론/벨 회사에 의해 설립되었고, 이 회사는 대단히 유능하여 어떤 외국 도움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 시설은 이제 이란 군 장비목록에 있는 모든 헬기들에 대한 완벽한 정비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야전부대의 정비 능력도 꾸준히 향상되어, 비록 훈련된 인원은 계속 부족하긴 했지만, 전투 경험으로 단련되고 있었다. 이란 육군항공대와 이란 공군이 전쟁에 결정적인 요소로 기여하지 못한 원인은 바로 이란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된 전략 탓이었다. 1980년 가을, 이란 공군 및 육군항공대는 이란 지상군이 대체로 혼란속에 있는 가운데 자체 역량만으로 이라크군의 쿠제스탄으로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이란 공군 및 육군항공대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란 육군항공대 소속의 AH-1J 코브라 "국제형(International)" 의 모습. 뒷쪽에 조종사들의 텐트가 있는 것이 보인다. )

 


 바그다드로의 진격

 

 무슬림-이븐-아퀼 공세는 1982년 10월 1일 오후에 개시되었다. 높은 사기를 지닌 소규모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가 언덕 위에 있는 이라크 진지를 공격하였고, 이어진 아침에는 육군 기계화부대가 공격하였다. 새벽 직후, 오미디예 TFB.5에서 출격한 F-5E들과 하마단/노예의 TFB.3에서 출격한 F-4E들이 최초 공습을 실시하였고, 근방의 이라크군 보급 시설들을 타격하였다. 다만 지상에서는 이란 정규군(IRIAS)과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IRGC)간의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모든 고지마다 혈전이 벌어졌다. 이란군의 진격은 대단히 더뎠고, 10월 4일에 이르러서도 아직 만달리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 이라크군은 포병과 헬리콥터 건쉽의 지원 하에 수마르를 향해 반격하였다. 이로써 대규모 공지전투가 시작되게 된다.

 

 당초의 무슬림-이븐-이퀼 작전계획에 따르면, 제 31 및 33 TFS가 매일 9에서 12회의 타격 소티를 지원하고, 제 51 및 53 TFS는 비슷한 숫자의 근접항공지원 소티를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명백히 부족한 숫자였고, 이란 육군항공대 코브라는 기체 능력과 승무원 능력이 가용한 내에서 최대한의 전투 임무에 출격하였다.

 

 이라크 공군은 전방 근처의 비행장으로 추가 부대를 배치함으로써 더 많은 전폭기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란 공군은 만달리 근방의 전장을 커버하기 위한 MIM-23 HAWK 지대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였고, 10월 5일 아침부터 가동을 시작하여 MiG-23BN 한대를 격추시켰다. 이란 정규군 육군과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간에의 지속적인 다툼 속에서도 이란군은 당일 저녁, 다음 작전단계를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보병과 기갑의 연계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번에는 만달리 시에서 약 2~3킬로미터 떨어지고 도시를 감제하는 고지에서 저지되었다. 만달리 시 외곽 일부는 아주 잠시 동안만 점령할 수 있었는데, 이는 바시즈 민병대가 이날 아침 2시간이나 먼저 공격을 개시하는 바람에 이란 육군 포병대의 오인사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군은 시가전 전문훈련을 받은 공화국 수비대(Republican Guards) 특수전 여단을 투입하였다. 이들은 Mi-25와 SA.324로 구성된 "헌터/킬러"팀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다. 10월 7일이 되자 이란인들은 만달리를 감제하던 지역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의 다른 반격들은 격퇴하였으며 자국령 150km2를 해방시키는 외에도 이라크군 전폭기 7대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란 공군은 근방의 이라크 공군비행장 - 수바쿠, 바쿠바, 세이크 야셈 - 을 공습하기 시작하여 이라크 공군으로 하여금 이곳에 집결된 항공기들을 분산시키도록 강요하였다. 이날 이란군은 지역 지휘관이자 전술가였던 코브라 조종사 야햐 솀샤디안 대위(Capt. Yahya Shemshadian)를 잃는다. 10월 10일에는 F-14A를 몰고 보잉 707 급유기(tanker)를 호위하던 잘랄 잔디 소령(Maj. Jalal Zandi)이 2대의 이라크 MiG-23기를 격추시킨다 - 단, 이라크 측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란 공군은 당시의 공중전에서 보다 우세한 성과를 내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전투기의 장비와 화력의 우세 외에도, 조종사들의 훈련 측면에서 월등하였기 때문이었다. 잔디 소령이 격추한 2대의 MiG-23기 외에도 월말까지 1대의 Su-20(F-14가 격추), 2대의 MiG-21(F-4 및 호크 지대공미사일에 격추), 1대의 SA.324(F-5F가 격추), 2대의 Mi-8(F-5E가 격추)가 무슬림-이븐-아퀼 작전지역 내에서 격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이라크군은 3대 이상의 톰캣과 8대의 팬텀, 5대의 타이거와 20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란군의 손실은 1대의 F-4E(바그다드 근처의 알-라시드 비행장의 대공포가 격추), 1대의 F-5E(SA-3 혹은 SA-6 대공미사일이 격추), 1대의 AH-1J(아흐메드 살렘 대위가 조종한 MiG-21에 의해 격추) 뿐이었다.

 

(이란군의 F-14A 톰캣들은 전쟁 기간 완벽히 가동하였으며, 대단한 전과를 올린다. 이 그림은 F-14A 3-6079기의 모습으로, 이란에 마지막으로 인도된 기체이면서 동시에 전쟁 내내 가장 유명해진 기체이다. 이 톰캣을 몬 여러 명의 조종사들에 의하여 적어도 12대의 이라크 전투기들이 격추당했다. 이 그림은 전쟁 초기 당시의 형상대로 그려져 있다; 핀 플래시(fin flash)가 없으며, 조종석 아래에는 아직도 IIAF(Imperial Iranian Air Force, 이란 황실 공군)라는 표기가 남아있다.)

 

 

Mi-25 vs. F-4

 

 이라크가 공중전 및 방공망에 의한 적기 격추대수를 부풀리던 것이야말로 이 전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상당수 이란측 보고서들도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27일 이라크 관영지 "바그다드 옵저버(Baghdad Observer)"에 실린 전과 내용이야말로 가장 논란거리가 된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제목이 "헬리콥터 건쉽의 날(The Day of the Helicopter Gunship)"이었으며 며칠 전의 공중전을 다루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한 Mi-24 하인드 공격헬기가 이란군 F-4 팬텀기를 격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바그다드 옵저버"의 내용에 따르면 "에이네 코시 지역 북방"에서 벌어졌으며, 이 팬텀기를 격추하면서 소련군이 공대공 모드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특별히 들여온 "차세대 장거리 AT-6 스프리얼 대전차미사일"을 Mi-24에서 발사함으로써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 주장이 다양한 서방, 우크라이나, 러시아 출판물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이 주장은 "신빙성 있고" "검증된"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헬리콥터와 기갑전 전문가들, 과거 소련 공군 및 항공산업 권위자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전문가들은 이 주장을 Mi-24 공격 헬기 및 AT-6 미사일의 능력을 "검증하는" 증거로서 사용하였다. 다만 이 주장의 배경이나, 최초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며, 일부는 그냥 이걸 무시했고, 일부는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검증된 것이라고 믿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아랍" 측의 주장 - 특히 서방측의 최신 기술의 산물인 F-4 팬텀II를 격추했다는 것 같은 - 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인 태도를 갖던 서방 기갑전 전문가들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자료 출처의 다양성과 그들의 권위를 살펴본 상황에서, 이 내용을 의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보다 면밀한 조사를 벌인 결과 실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아울러 이 사례가 이라크와 이란간의 항공전이 이제껏 얼마나 형편없는 방식으로 연구되었는가를 대표하는 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점차 깊이 연구하게 될 수록, 해당 시공간에서 이라크 Mi-25와 이란군 팬텀이 만나 교전했을 가능성이 극히 낮아진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동유럽 문헌이든 서유럽이든지 간에 최초 자료 출처가 어디인지를 추적해 나가다 보면 그것이 딱 1개로 좁혀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워싱턴에 소재한 "외국 방송정보 서비스(FBIS)"에서 바그다드 옵저버 내용을 인용한 '코뮤니케 885번, FBIS-MEA-82-209, 1982년 10월 28일자 E2 페이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비록 FIBS가 최초 CIA에서 설립한 기관이긴 하지만, 결코 "미국 정보기관"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 기관은 단지 해외 미디어 및 언론기관에서 나온 첩보들을 수집해서 미국의 각 군기관이나 정부단체 등에 배포하는 기관이었다. FBIS는 이 보고서를 배포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확인과 부정 둘다 하지 않는다: 그저 이 기관은 누군가가 알려준 보고서를 재배포할 따름이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보고서들에는 이 사실이 자주 간과되곤 한다. 특히 이들 내용에서는 이 교전이 발발한 것이 1982년 10월 27일이라고 명시하는데, 이 날짜는 바그다드 옵저버에서 이 내용을 발표한 날이다. 그런데 바그다드 옵저버 내용에서는 이 교전이 발표 며칠 전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 내용이 바그다드 옵저버에서 발표된 이후, 추가적인 어떤 증거도 발표된 바가 없다; 예를 들어 건카메라 사진이라던가 (모든 이라크 Mi-25 및 모든 소련제 Mi-24에는 건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음), 이 전과를 올린 조종사의 인터뷰 내용이라던가, 이 전투에 대한 상세 설명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러시아에서 흘러나온 소문 중에 이 전과가 바그다드 옵저버에 나오기 며칠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련인들과 이라크인들이 뭔가를 축하하는 파티를 벌였다는 내용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소련측에서 AT-6가 장착된 Mi-25를 이라크에 반입했을지 여부에 관한 이론적 가능성 연구 역시도 별로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앞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이라크인들은 AT-6을 전혀 갖지 못했었다. 게다가 이란군이 노획한 이라크 무기 중에서나, 나중에 1991년의 제 2차 페르시안 걸프 전쟁에서 미군이 이라크군에게서 노획한 수많은 무기 중에서도 AT-6가 발견된 바가 없다. 또한 1980년대 초반, 소련 공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Mi-24가 대단히 부족하였던 데다가, 나토군과의 대치를 위해 또한 최대한 많은 Mi-24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Mi-25 인도 역시도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어 왔던 바도 있다. 어떤 때에는 소련이 동독군의 Mi-24를 차출하여 자체 수요 및 아프가니스탄 전 수요로 활용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헬기들이 동독군에게 돌아왔을 때에는 상당수가 동체에 총탄자국 가득한 상태였다고 한다.

 

 1982년 당시의 모스크바와 바그다드의 관계를 살펴보았을 때, 과연 소련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무기를 이라크에 보낼 정도로 양측 관계가 가까웠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당시에 소련에서는 이미 R-60(ASCC 코드명 AA-8 아피드)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Mi-24의 주 공대공 무장으로 연구하고 있었고, AT-6가 이러한 임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 가용했던 AT-6 버전 - 9M114/AT-6A - 은 성능이 별로라서 이상적인 조건에서도 자주 명중에 실패하곤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1980년대 및 1990년대, 미국이 여러 동구권 국가들에서 비밀리에 입수한 120여기의 AT-6를 애버딘 병기 시험장(Aberdeen Proving Grounds)에서 코드명 패시브 노바 1,2,3이라는 이름으로 시험한 결과에서 잘 확인되었다. 소련제 무기 시스템 사용에 대한 미 육군 전문가들에 의해 실시된 이 테스트 결과, 15km/h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타겟에 발사한 100발의 AT-6 중에서 단지 4발만이 명중하여 성과를 낸 것으로 밝혀졌다. 정지 타겟에 대해서도 100발 중에서 단지 11발만이 명중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 시험은 전투 스트레스 및 압박감 속에 있는 승무원이 고속이동 중인 헬리콥터에서 쏜 것이 아닌 고정된 타워에서 발사한 것이었다. 미군은 이 시험 결과 이 무기가 탄두 위력에 있어서는 신뢰성있고 효과적이긴 하나 그 명중률에 있어서는 형편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시험 결과는 그간 러시아측 문헌에서 제시한 AT-6의 70-80%의 명중률 주장을 완전히 뒤엎을 뿐만아니라, 확률적으로 고속 이동중인 헬리콥터에서 발사된 AT-6가 무려 350-500노트의 속도로 이동하는 목표물을 명중시킬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아마도 70-80% 명중률이라는 수치는 1990년대 후반의 AT-6B와 AT-6C에 대한 실험 결과에서라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1994년, 러시아군은 보유한 AT-6 미사일 전량을 업그레이드했다. 사실 이들이 그래야 했을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일부 동유럽 소식통들은 이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보이는데, 이들은 Mi-24가 격추에 사용한 무기가 AT-6가 아니라 무유도 로켓과 기관총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들 역시도 교전 일시를 바그다드 옵저버지가 격추 주장을 발표한 1982년 10월 27일로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문헌들 역시도 신뢰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이 격추에 사용된 무기가 AT-4 "파곳" 대전차미사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이건 실제로 소련측에서 이라크군에게 제공한 무기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존에 이미 이라크군이 AT-4를 Mi-8이나 Mi-24에 장착하려다가 포기했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가능성이 희박하다.

 

(1991년 미군에 의해 노획된 이라크 육군항공대 소속 Mi-25에 장착된 AT-2 스콜피온 미사일의 모습. 전쟁 내내 이라크군 하인드가 사용한 미사일은 AT-2 뿐이었다. AT-6는 이라크에 제공된 바가 없었으며, AT-6를 장착한 Mi-24를 제공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이라크군 Mi-24가 이란군 F-4 팬텀을 AT-6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판단된다. (미 국방부 제공))

 

 반면에, 전직 이라크 및 이란군 조종사들의 도움으로 벌어지고 있는 연구 내용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이 당시에 이런 종류의 교전이 벌어졌을 리가 없다는 내용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2년에 이라크 육군항공대 제 4 비행대대에서 근무하였던 2명의 전직 이라크군 헬리콥터 조종사와, 또다른 3명의 전직 이라크군 장교의 기억들을 살펴보면, 이란군 헬리콥터의 잔해에 대한 기억이나 이란군에 의해 격추당한 동료 헬기조종사들에 대한 기억들은 남아있지만, 이란 F-4기를 격추한 Mi-25에 대한 기억이라던가, 이런 목적으로 소련군이 Mi-24 및 AT-6를 들여왔다던가 하는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이 사건과 그나마 가장 유사한 일은 1981년 1월, 수산게르드 전투 당시 4기의 스콜피온 미사일과 4기의 UV-32-57 포드를 장착한 이라크군 Mi-25가 지상 공격 중이던 이란군 F-4와 맞닥뜨렸을 때의 일이다. 이라크 헬기의 전방 콕핏에 있던 사수는 접근하는 F-4의 엔진에서 나오는 연기를 확인하고 조종사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저공으로 자신의 비행방향 수직 방향으로 날고 있던 이란 항공기를 향하여 132발의 57mm 로켓 전량을 발사했다. 이 이라크 조종사가 이란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며, 기타 다른 이라크 문헌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1년 후에  이르러서야 바그다드 옵저버에서 비슷한 격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저자와 인터뷰한 모든 이라크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단지 이라크 정부의 선전 수단으로 나온 이야기로 보고 있다 - 즉, 1982년 이전의 여러 차례의 패전으로 인해 당시로서는 뭔가 좋은 소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뉴스라는 것이다. 또는 어떤 영리한 이라크 기자가 같은 사건을 좀 다른 방식으로 각색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전직 이라크 육군항공대 조종사 2명 모두 AT-6가 이라크 육군에 도입된 적이 전혀 없으며, 특히 Mi-25에 사용된 적은 절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소련인들이 이 무기를 이라크에서 시험한 적도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저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란 공군의 전시 기록 및 기타 공식 기록에서 1982년 10월의 에이네 코시(Eye-e Khosh) 근방 전투에서 손실된 F-4나 F-5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이라크기 전투기에 의한 이란 전투기 손실도 전혀 없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인터뷰한 수십명의 전직 이라크 및 이란군 조종사들 누구도 이와 비슷한 주장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이런 내용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1982년 10월의 에이네 코시 전투에서 Mi-24가 F-4 팬텀기를 격추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실제 팬텀기가 Mi-25와 만난 장면; 1982년 이란 공군 RF-4E 정찰기가 이라크 전방 비행장인 슐레이마니야 근방을 저공비행하던 당시 사진으로, 주기 중이던 이라크군 Mi-25 2대가 보인다.)

 


"모하람(MOHARRAM)" 작전

 

 무슬림-이븐-아퀼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란군은 벌써 다음번 공세 - 모하람 작전 - 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을 위하여 이란 육군(IRIA)은 3군단의 3개 사단을 집결시켰고, 이외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의 5개 여단과 제 1 공격헬리콥터단(1st Attack Helicopter Group)의 2개 연대 소속 16~18대의 AH-1J 코브라들을 준비했다. 헬리콥터 연대들은 각각 A. 바시리 소령과 K. 오웨이시 대위가 지휘했으며, 이스파한에서부터 TFB.4로 배치되었다. 배치된 코브라들 중에서 8대가 TOW 미사일 운용이 가능했고, 이를 위해 300발의 TOW 미사일이 전진배치되었다. 이 작전에 참가했던 승무원들 중에는 알리 "묘지기" 샤피 대위(Capt. Ali "Gravedigger" Shafi)와 그의 사수(gunner)였던 아미르 알라이 준위(Warrent Officer Amir Ala'i)가 있었다. 이들은 이란 육군항공대에서 최고의 명성과 전과를 올린 인원들 중 하나였다. 헬리콥터들 외에도, 이란 헌병대(Iranian Gendarmerie)와 이란 육군항공대(IRIAA)에서는 소수의 세스나 O-2A 버드독 기를 전방항공통제기로 운영하여 항공기, 헬기, 포병 공격을 조율하는 데 활용하였다. (1982년 당시 헌병대 역시도 마약밀매범 단속을 위해 O-2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란 공군은 무슬림-이븐-아퀼 작전 당시보다는 더 잘 준비되어 있었다. 데즈풀 근방의 TFB.4에는 제 41, 43 TFS가 수십대의 F-5E와 F-5F를 대기시켜놓고 있었고, 이들은 샤흐람 로타미 소령과 A. 파타헤 대령이 이끄는 제 32 TFS 및 34 TFS의 약 12대의 F-4E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이스파한의 제 81 TFS의 톰캣은 전방의 팬텀기들을 지원하기 위한 보잉 707-3J9C 공중급유기(여기에는 미국제 전자전(ELINT) 장비인 "Roving Eye" 장비도 설치되어 있었다)를 엄호하기 위하여 전방지역 CAP(전투항공초계)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팬텀기와 타이거기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전방지역을 비행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이라크 요격기 및 헬기들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지상군 지원 임무에만 몰두할 수가 있었다.

 

 비록 이란인들이 모하람 작전을 위하여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집결시켰으며, 이를 통해 이라크군 전선을 돌하파여 바그다드로 접근할 수 있는 충분한 위협요소가 될 수 있었음에도, 실제적인 작전 목표는 제한적이었고 어떻게 보자면 최소한만을 추구한 형태였다. 우선 배치된 병력들은 이란 내에 있는 여러 고지들과 함께 대규모 바얏 유전지대(Bayat oilfield)를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공업지대인 티브와 조베이단, 아부카랍 및 그와 연계된 유전지대들을 점령하게 되어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아마라(Ammarah)로 향하는 도로인 샤라하니-조베이닷 가도(Sharahani-Zobeidat road)를 절단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국 이란군 기계화부대에 의해 선도되게 된 이라크 내 깊숙한 곳으로의 과감한 진격은 초기 단계엣 이라크군의 지뢰지대와 방어사격에 의해 저지되고 만다 - 물론 폭우도 문제가 되었다. 바시즈 민병대에 의한 초기 공격은 1982년 11월 1일밤에 개시되었으며, 곧장 지뢰지대로 뛰어들어가면서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한편 이란인들의 바얏 유전지대에 대한 공격은 보다 성공적이어서, 이라크군이 북쪽으로부터 2개 여단을 이동시켜 진군을 저지하기 전까지, 약 50개의 유정을 점령할 수가 있었다.

 

 11월 2일 새벽까지 이라크 공군과 이라크 육군항공대, 이란 공군과 이란 육군항공대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전투에 투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라크측은 이란군의 서쪽으로의 추가 진출을 차단하고자 하였고, 이란측은 이란군 보병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이라크 기갑부대들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이란 공군의 톰캣들은 상당수의 이라크군 항공기를 요격하였으며, 총 7대의 MiG, 수호이, 헬리콥터들을 격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라크측은 이러한 손실에 대하여 부인하였으나, 결국에는 이란 공군이 이 지역의 항공 우세를 달성하였으며, 이로써 TFB.3에서 출격한 팬텀기들이 BL.755 집속탄을 활용하여 다수의 이라크 전차 및 차량들을 파괴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라크측 자료에서는 BL.755 집속탄에 의한 전차 사냥 효과가 이란측 주장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라크측에서는 동 집속탄에서 떨어진 폭탄의 약 80%가 불발이었다고 하고 있다). 게다가 이란 육군항공대의 코브라 및 헌병대 소속 O-2A가 전장 상공에 나타나 이라크 전차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란군은 항상 3-4대의 AH-1J를 전장 상공에 위치시키고 있었고, 이들이 고지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O-2A와 협동작전을 벌인 탓에, 이란 육군항공대 조종사들은 마치 자기네들 수십대가 동시에 공격을 펼친다는 느낌도 갖게 되었으며, 포로가 된 이라크 장교들 역시 이란군이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코브라를 도입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란 코브라 조종사들은 소위 "데드 그라운드(Dead Ground)"라는 전통적인 미 육군항공대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전술은 동일한 지역에 대해서 여러 다른 방향으로부터 공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항상 고속으로 엄폐물(낮은 고지나 땅이 가라앉은 곳, 바위지대 등)을 이용하여 비행하다가, 순간 호버링에 들어가 "팝업(pop up)"기동을 실시하여 목표물을 탐지, 사격을 가한 뒤 다시 엄폐물 뒤로 숨는 전술이다. 20mm 기관포와 무유도 로켓을 사용하면, 이라크군이 이들 헬기의 위치를 눈치채기도 전에 공격하고 사라질 수가 있었다. TOW 미사일을 사용할 때에도 상황은 크게 틀리지 않았은데 (※ TOW 미사일은 유선유도방식이므로 명중할 때까지 목표물에 대한 시야를 유지할 필요가 있음, 역주), 일단 미사일을 발사한 뒤 헬리콥터를 가까운 엄폐물 뒤로 숨기면서 미사일 유도에 필요한 코빼기 부분만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적에게는 로터와 동체의 아주 일부분만이 노출되게 된다. 이 전술을 사용함에 따라 11월 2일 및 이후 전투에서 이란 육군항공대는 총 106대의 이라크 전차와 70대의 장갑차를 파괴한다. 샤피 대위와 아랄리 준위의 팀만 하더라도 총 26대의 전차 및 기타 차량을 TOW 및 무유도 로켓으로 파괴하고, 2대의 가젤 헬기와 1대의 SA.316C 알루엣 헬기(전방포병관측용으로 사용)를 20mm 기관포로 파괴하였다. 이란 육군항공대는 1982년 11월 초의 모하람 작전지역에서 일부 손실을 기록하는데, 내용은 1대의 AH-1J(이라크군 대공포에 파괴), 1대의 O-2A(지대공 미사일에 피격 추정)였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모하람 작전의 3단계가 개시되었던 11월 6일에 이르르게 되면 이란군이 전략목표이자 지역내 이라크군의 가장 중요한 보급로인 샤라하니-죠베이닷 가도에 도착하게 된다. 헬리콥터를 통해 신속하게 전방 부대에 대한 재보급 및 보충을 실시한 이란군은 즉각 조베이닷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다. 이 마을을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이라크군이 정예 공화국 수비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반격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공화국 수비대는 최근 소련으로부터 인도받은 최신예 T-72전차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바그다드로부터 곧장 달려온 것이었다. 최초 이란측에서는 이 T-72에 대항할 수단이 TOW 장착형 코브라와 오토바이 RPG-7 팀(motorcycle-riding RPG-7 team) 외에는 없었다. 두가지 모두 T-72의 정면 장갑에는 효과가 없었으며, 그 결과 측면 공격을 시도해야만 했다. 그 결과 이란군 조종사 및 전사들의 상황이 대단히 어려워졌으며, 그 과정에서 1대의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군의 ZSU-23-4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기도 했다. 이란군 대전차팀의 피해 역시 엄청났다.

 

 11월 7일의 시점에서 양측의 피해는 엄청났으며, 전투 피로도 심각했다. 따라서 양측 모두 새로 장악한 진지를 안정화시키거나 국지적인 반격을 가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는 이달 나머지 기간동안의 전투가 악천후시를 제외하면 공중에서 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11월 2일의 심각한 피해 이후, 이라크 공군은 고공 공습으로 전술을 바꾸었는데, 이는 이란군의 F-14가 아직도 해당 지역을 순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전술이었음이 밝혀진다. 11월 7일 아침 최초로 전장에 도착한 이라크 공군부대는 라제 슐레이만 대위가 조종하던 Su-22기를 상실한다. 이어 다른 몇몇 전폭기 편대들이 전장에 도착하였지만, 이란군 F-14가 정면에서 나타남으로써 임무를 포기하고 만다. 그 결과 이라크군은 상황을 절망적으로 본 나머지 제 64 비행대대의 Mi-25에 화학무기 공격 임무를 준비하도록 지시한다: 강한 바람과 비로 인하여 이 임무는 다행히 취소되었다.

 

 이어진 기간 동안 날씨는 계속 악화되었으며, 11월 중순까지도 지상전은 진흙탕 속에서 정체되었다. 그럼에도 이란 공군은 호크 지대공미사일 기지 하나를 전방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이 기지는 11월 16일 아침 가동을 시작하여 바야트 유전지대 근처의 이란군 진지를 공습하려던 4대의 MiG-21 중 한대를 격추시킨다. 또 한대의 MiG-21도 F-4E에서 발사된 사이드와인더에 의하여 격추된 것으로 주장되었다. 다만 이 두가지 주장이 동일한 항공기에 대한 것일 가능성도 잇는데, 당시 이라크 문헌에서는 이런 종류의 부대가 이런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 대하여 부인하고 있으며, 당시 공대지 소티를 감행했다는 점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진 며칠동안 악천후로 인하여 항공작전은 별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11월 20일, 양군 공군들은 다시 날기 시작했고, 항공기와 헬리콥터에 의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이란측 항공기는 장비면에서 더 우수했으며, 덕택에 보다 경험 많고 더 잘 훈련된 이란측 조종사들이 더 우세한 상황인식(situational awareness)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는다. 그 결과 이란 공군이 훨씬 우위를 보이게 된다: F-4E 한대는 이라크 MiG-23BN 한대를 사이드와인더로 격추시켰고, F-5E들은 Mi-8(기관포로 격추)과 MiG-21(사이드와인더로 격추)을 각각 한대씩 격추시킨다.

 

(1982년 11월 7일 아침, 이란 공군 F-14A가 모하람 작전지역의 이란군 진지를 폭격하려던 Su-22를 격추시킨다. 이라크 공군의 모하메드 라예 솔레이만 대위는 안전하게 사출한 후 지상의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 병사들에게 곧 사로잡힌다.)

 


이라크 장군들과 이란군 톰캣의 만남

 

 이란과의 전쟁 기간, 이라크 장군들의 삶은 2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되었다. 2가지 모두 이들의 상급자들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1) 너무 많은 활동을 함으로써 바그다드의 독재자로 하여금 위험 인물로 낙인찍히는 것을 피할 것 2) 너무 적은 활동을 함으로써 바그다드의 독재자로부터 무능한 인물로 낙인찍히는 것을 피할 것. 전반적으로 이라크 고위 장교들은 전방에 그리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통상 전선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소위 "야전 사령부"에서 안전하게 전투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종종 전방 시찰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며, "2)번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이건 대단히 중요했는데, 이라크 야전 사령관이 고의로 상급자에 대한 상황을 왜곡보고하는 경우가 여러차례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들이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매번 전방에 가봐야 했던 것이다.

 

 이 전쟁 중에 벌어진 일로써 이란 및 이라크, 그리고 일부 미국 군인들 사이에 잘 알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인터넷 상에서 회자되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다음 사건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2대의 이란 육군항공대 코브라 헬기가 한 이라크 장군이 타고 있는 헬기와 호위 MiG기를 격추 시킨 뒤, 이후의 17분간의 교전 동안 이라크 공군 요격기들에 의하여 5-6대의 이라크군 전투기들을 격추시키게 된 사건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이야기는 변형되었고, 양측 모두 이 내용을 부풀리고 각색하여 반복 사용하는 바람에, 이란과 이라크 조종사들이 갖고있는 기억들도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음 내용은 다양한 증언들과 양측의 문헌자료들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으로, 현재로서는 가장 완전한 버전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82년 11월 20일, 에이네 코시와 무시얀 사이의 모하람 작전지역에 있던 이라크군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란군은 몇몇 중요 유전지대를 점령했으며, 이 지역의 주요 통신로를 절단하였다; 이라크 공군은 이란 공군 요격기 및 지대공 미사일로 인하여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접근 시도 역시 이란 공군기 및 코브라 헬기에 요격당해 헬기를 격추당하거나 강풍 및 악천후 문제로 성공할 수가 없었다. 이라크군은 3500명에 해당하는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전선 대부분 지역이 붕괴 직전에 있었다. 이라크 장군들은 벌써 바그다드의 독재자로부터 헛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1982년 춘계 이란군 공세에서와 비슷한 피해가 발생할 것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이라크 육군 일반참모부 소속이자 제 3군단 사령관인 마헤르 압둘 라시드 소장, 4군단 부사령관이자 육군 대변인이었던 압둘 자바 모흐센 중장이 전선을 방문하여 지역 지휘관들과 만나보기로 하였다.

 

 11월 21일 아침, 두 장군들은 S. 모우사 대위가 조종하는 Mi-8 무장 헬리콥터에 탑승했다. 동 헬기는 다른 2대의 Mi-8 헬기와 패스파인더 역할을 한 Mi-25대 1대의 호위를 받았다. 그 위로는 4대의 MiG-21과 4대의 MiG-23이 상공 엄호를 실시하였고, 이들이 연료가 바닥날 때에는 계속 다른 항공기들로 교대하였다.

 

(표준 위장도색을 한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Mi-8. 아군 오인사격을 피하기 위해 대형 국기를 도색한 것이 눈에 띈다.)

 

 약 10:40경, 이란 국경에서 8km 떨어진 지점 약 12200m(4만 피트) 상공에서는 이라크 내의 표적을 공격하러 가던 2대의 이란 공군 F-4E가 보잉 707-3J9C 공중급유기에 접근하고 있었다. 동 급유기는 M. 코스로다드 대위가 지휘하는 2대의 F-14A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 톰캣들은 공중급유기 근처에서 소위 레이스 트랙 패턴(race-track pattern)을 따라 비행 중이었다. 톰캣 중 한대는 항상 전방의 공역을 AWG-9 레이더로 관찰할 수가 있었다. 첫번째 팬텀이 공중급유기로부터 연료를 공급받기 시작할 무렵인 약 10:45 무렵, 코스로다드 대위의 F-14A에 탑재된 레이다가 서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는 일군의 이라크군 항공기들이 자신의 F-14 전투기의 AIM-54 미사일 사거리 내에 있는 것을 탐지하게 된다.

 

 이라크 공역에 들어가거나 급유기를 무방비 상태로 놔둬서는 안된다는 기존 명령이 있는 상태였지만, 코스로다드 대위는 공격을 결심한다: 그는 스패로와 사이드와인더로만 무장하고 있던 윙맨에게는 급유기와 팬텀기들과 함께 남아있으라고 지시한 뒤, 혼자서 서쪽으로 향한다.

 

 그와 부조종사(radar intercept officer,RIO)는 신속하게 2발의 AIM-54A와 2발의 AIM-7E-4를 연속하여 발사하였다. 몇 초 내로 레이다 상의 표적들 중에 적어도 2개가 사라졌다. 이들은 그저 '또다른 이라크 공습' 하나를 저지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자신들의 레이다망이 이란 공역 내로 적어도 200km 지역까지의 항공기들은 모두 추적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던 이라크인들은 근처에 2대의 이란군 톰캣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우사 대위가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눈치챈 것은 수킬로미터 전방에서 호위임무 중이던 다른 Mi-8 조종사가 3대 이상의 이라크군 호위전투기들이 상공에서 불을 뿜으며 모우사 대위 쪽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외쳤을 때였다. 장군들을 태우고 있던 헬리콥터는 이 잔해들을 피하기 위해 우측으로 급기동을 해야 했다.

 

 몇 초 후, MiG 전투기 조종사들 중 하나가 또 큰 소리로 경고하기 시작했다. 즉, 누가 공격하는지 전혀 눈치챌 수가 없는 상태이니 장군들을 태우고 있는 Mi-8은 즉각 이곳을 떠나 서쪽으로 피하라는 것이었다. 격추된 MiG기들이 자기 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모우사 대위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기수의 방향을 틀었다. 결국 라시드 소장과 모흐센 중장의 전방 시찰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게 된다.

 

 한편 보유한 중거리 및 장거리 미사일들을 모두 사용하여 MiG-21 1대 및 MiG-23 2대를 격추시킨 코스로다드 대위는 공중급유기로 복귀하고, 이어 공중급유기와 근처의 다른 F-4들에게 이라크 전투기들에 관하여 알려준다: 그의 AWG-9 레이다에는 저공 저속으로 고지들 사이를 날고 있던 이라크 헬리콥터들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란군 팬텀기들은 이라크군 전투기들과 상대하기 위하여 날아가다가 헬리콥터들을 발견하기 전에 이란군 지상군을 공격하러 이동 중이던 이라크 공군 소속 Su-22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격렬한 독파이트가 벌어졌으며, 양측 모두 공중전을 위해 공대지 무장을 버리는 과정에서 Su-22 한대가 격추당했다. 나머지 이라크군 항공기들은 서쪽으로 도주한다.

 

 전투는 이라크 장성들이 없는 상태에서 지속된다. 그리고 이날 알리 "무덤지기" 샤피 대위도 공중전에 참가한다. 이라크군 기갑부대를 공격하던 중, 그는 한 이라크군 Mi-25 및 SA-352L "헌터/킬러" 팀과 마주치게 된다. 연료가 부족했던 샤피 대위와 아랄리 준위는 단지 2차례 20mm 기관포 사격을 Mi-25에 안긴 뒤 전과확인도 하지 못한채 복귀하였다. 샤피 대위와 아랄리 준위는 단지 5일 후에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이라크군의 대공포가 탑승하고 있던 AH-1J를 격추시킨 데 따른 일이었다.

 

 이 시점이 되면서 에이네 코시 및 만달리 지역에서의 이라크와 이란군간의 공대지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게 된다. 양측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다 : 이라크군은 대규모 병력 및 장비 손실을 입었으며, 국경선의 여러 중요 지점에서 퇴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달리 자체는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란군은 최소 2개 여단의 바시지 민병대를 희생시켜가며 이라크군 전선을 돌파한다. 그러나 이란군의 공격은 공격기세를 상실하였고, 비록 이번이야말로 이란군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돌파라고 하기에 가장 가까운 성공이었음에도, 이라크군의 끈질기고 강렬한 저항 앞에 바그다드로 향한 더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했다. 이라크군은 바그다드 및 다른 전선으로부터 증원군을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 결과 물자와 병력 측면에서 장기 소모전에 필요한 만큼을 갖지 못하였던 2차례의 이란군 공세는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양측 고위 지휘부는 이번 전투기간 항공력이 그 중요성을 다시금 드러냈음에도, 항공력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란과 이라크군 조종사들의 성공과 희생은 다시금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란 공군과 이란 육군항공대의 지원이 부족했음에도, 만약 더 강력한 기갑 예비대 투입이 허락되었더라면, 이란 육군은 이라크군 전선에 발생한 돌파구를 확장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란군 병사들은 사기가 높았고 상대적으로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이라크 깊숙한 곳으로 싸우러갈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분명 이란 공군이 충분히 기능하였다면 이란 육군은 더 많은 성과를 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이라크 공군이 더 적극적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더라면 적 보병을 더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더 빨리 이란군 공세를 봉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82년 가을에 벌어진 2차례의 이란군 공세의 전략적 결과가 어떠했는가와 무관하게도, 결과적으로 항공력의 기갑부대에 대한 효과는 대단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공격 헬리콥터들이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AH-1J 및 SA.342L 모두 NATO가 평시에 시행한 여러 실험들의 결과와 부합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미 육군이 중부 유럽 전장에서 약 16:1의 교환비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하여, 미군과 동일한 장비 및 전술을 사용했던 이란군은 약 40 내지 50:1의 교환비를 보여주었다.

 

 경무장 프랑스제 SA.342L 가젤 헬리콥터는 대전차전에서의 헬리콥터 사용에 대한 당시 유럽인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이들은 명백한 취약성을 드러냈으며, 이들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고위협 환경 하에서 가젤은 장갑 방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가젤의 HOT 대전차 미사일은 이란군에게 제공된 미제 TOW 미사일들처럼 적 전차 - 그 종류가 T-55가 되었건 T-62가 되었건, 아니면 미제 M60A1이건 영국제 치프틴이건 - 를 잡는데 특별히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 Mi-25에 장착된 크고 강력한 AT-2의 경우에는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밀도는 결여하고 있었지만, 적 포병이나 대공포를 제압하는 데에는 대단히 효과적이었으며, 가젤 헬기를 보완하는 데 크게 유용했다: 동독인들의 "헌터/킬러" 개념은 실전에서 입증되었다.

 

1979년 이란 혁명 기간동안에 CIA와 휴즈 사 기술자들에 의해 AIM-54에 사보타지가 이뤄졌다는 많은 루머들이 있었지만, 기존에 전달되었던 270발의 AIM-54는 멀쩡한 상태였다. 단지 카타미 비행장 (TFB.8)에 있던 18발만이 사보타지된 상태였다. 이들 역시도 모두 미국으로부터 몰래 들여온 예비부속들을 이용하여 나중에 수리된다. 이란 공군의 F-14 톰캣들은 이라크와의 전쟁기간 내내 이 미사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사진은 비디오 속에서의 스틸 컷으로, 이란군 F-14 좌측 날개에 장착되는 AIM-54A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후의 일들

 

 다음 인물들은 1982년 가을의 전투에 관련된 장교들과 조종사들로서, 이 연구에 기여한 증언자들 역시도 포함되어있다.

 

- 이라크 육군항공대 아두안 하산 야신 대위 : 이란군과의 전투에 1984년까지 계속 참가한다. 1983년을 예로 들면, 그는 Mi-25를 타고 총 22발의 AT-2 대전차미사일을 발사하여 단지 2차례 격파 - M-113 1대와 M60A1 1대 - 와 1차례의 소파 - M60A1 1대 - 를 기록한다. 이는 주로 탄두가 이란군 중전차의 장갑을 격파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한 탓이다. 1983년 9월 14일, 그는 57mm 무유도 로켓탄으로 이란 육군항공대의 AH-1J 1대를 격추한다. 이 기간동안 그의 Mi-25 역시 이란군 사격으로 9차례 이상 손상당한다. 1984년 7월 17일, 그는 같은 부대의 또다른 조종사 한명과 함께 2대의 Mi-25를 몰고서 시리아로 망명한다.

 

- 이라크 육군항공대 S. 모우사 대위 : 1983년 3월까지 Mi-8을 조종한다. 당시 그는 이란군 진지 상공에서 격추당하여 포로가 된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에 석방되어 이라크로 돌아간다.

 

- 이라크 공군 아흐메드 살렘 대위 : 그는 이란군 코브라기 격추로 훈장을 받았으며, 이어 프랑스로 보내져 미라지 F.1EQ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게 된다. 전쟁 후반부에, 그는 AM.39 엑소제 미사일이 탑재된 F.1EQ5를 조종하여 카르크 섬 주변의 이란 유조선들에 대한 총 15회의 대함 공격을 실시한다. 1987년 3월 말, 카르크 섬의 석유시설에 대한 Su-22 타격대를 엄호하던 중, 그는 2발의 R.550 매직 Mk.I 공대공 미사일로 이란 공군 F-4E를 격추시킨다. 그의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명성은 갑작스런 일로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이는 1987년 5월 15일 그의 마지막 대함 공격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는 2발의 엑소제 미사일로 미 해군 프리깃함인 스타크 호(FFG-31)를 명중시켜 총 37명의 미해군을 사망하게 만든다. 그와 그의 직속상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상요원으로 전환되어 이라크 비밀첩보부의 감시 속에 놓이게 된다. 그는 이라크 정권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89년 해외로 도주하고 만다.

 

- 동독인 랄프 게슈케 대위 : 그는 1983년 6월 16일까지 이라크 육군항공대의 제 64 비행대대 소속으로 Mi-25와 SA.342L로 이뤄진 "헌터/킬러"팀 하나를 이끌었다. 이날 그는 타지(Taji) 근처에 있는 육군 항공기지에서 하인드기를 조종하며 훈련 임무 수행 중, 이란 공군 소속 시야바시 바야니 중령이 조종하는 F-4E 팬텀기에 의해 격추당해 생애를 마감한다. 바야니 중령은 1980년에도 이미 한차례 이라크 Mi-25를 격추시킨 바가 있으며, 이날 게슈케 대위의 하인드를 사이드와인더로 격추시켰다.

 

- 이란 공군 잘랄 잔디 소령 : 그는 상급자인 아바스 바바이에 대령과의 잦은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란 공군에서의 그의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간다. 바바이에 대령의 경우 "이란 공군에서 F-14를 반드시 보존해야 한다는 사상의 중심자"로 묘사되는 장교였다. 그러나 상당수 전직 이란군 조종사들은 바바이에에 대해서 F-14를 조종할 줄조차 모르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고, 일부의 경우 그의 이란 고위 성직자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이름을 언급하기조차 꺼리기도 한다. 잔디 소령은 바바이에와의 수많은 불화와 이라크 공군과의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살아남아 최소 9차례의 확인격추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는 아마도 11에서 12회의 공대공 승리 스코어를 냈을 것으로 판단되며, F-14 톰캣 조종사로서는 최고의 성적을 냄과 동시에 이란 공군의 에이스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2001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 불과 몇 년 전에 중장 계급으로 전역하였다.

 

- 이란 공군 샤흐람 로스타미 소령 : 성공적인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간다. 그는 팬텀기만 몰았던 것이 아니라 톰캣도 조종하였으며 몇차례 공대공 전적도 기록한다. 예를 들면 1982년 12월에는 페르시아만 상공 6만피트 높이에서 마하 2.1로 비행하던 이라크군 MiG-25RB를 70km 이상 거리에서 AIM-54A 미사일로 격추시킨다. 그는 나중에 이란 공군 부사령관이 된다. 많은 장점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이란 공군의 최고위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이란에서 이민을 떠나게 된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다른 수많은 이란 및 이라크의 조종사들, 장교들이 전쟁 말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대다수도 조국을 등지고 떠나야 했다. 이들 모두는 여기서 말한 곳에서 사소한 일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이 말에 동의한다. 이들이 이 피비린내나는 전투에서 배운 교훈들은 여러 이유로 인하여 대중에게 외면받아왔다. 이들의 귀중한 기억들이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작성한 저자들은 도움과 조언을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자 한다.

 

(행복했던 나날의 모습들. 이 사진은 1977년 7월의 사진이다. 여기에는 당시 중위였던 아바스 바바이에(뒤줄 왼쪽에서 첫번째)의 모습도 나타나 있다. 아마도 아바스 바바이에는 F-14에 합격한 최초의 이란군 조종사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이란황실공군협회 제공) )

 


부록 I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의 기갑부대 역사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의 최초의 기갑부대는 이라크로부터 노획한 전차 및 장갑차들로 대다수 장비되었다:

 

 - 1981년 9월 "사메네-알-아에메" 작전 당시 전차 및 장갑차 160대 노획
 - 1981년 11월 "타릭 알-쿼즈" 작전에서 전차 100대 및 장갑차 70대 노획
 - 1982년 3월 파스-울-모빈 작전에서 전차 150대 및 장갑차 170대 노획
 - 1982년 4월 바잇 알-무가다스 작전에서 전차 및 장갑차 105대 노획

 

 전쟁 초기 단계에서 이라크 육군과 이란 육군은 사실 동일한 장비 - BMP-1, BTR-50, BTR-60 - 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란 육군에서는 BTR-60만이 사용되었고, 다른 장비들은 보관 상태에 있었다. 이란 육군은 주로 서구 장비를 사용하였으며, 다수의 노획 전차 및 장갑차들을 사용하기에 앞서 이를 관리할 조직부터 구성하여야만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전쟁 첫해에 노획된 이라크 전차들의 경우 나중에 구난 중대가 끌고 갈 수 있도록, 기관총만 탈거된 채 나머지는 온전하게 남겨둔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이란군이 노획해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므로, 승무원이 도주하면서도 전차를 파괴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임. 역주). 일부 이란 육군 병력의 경우 노획한 전차를 고정 포대로 사용하려고 한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이란인들이 이라크 제 3 기갑사단으로부터 약 160대의 멀쩡한 전차 및 장갑차들을 노획하는 1981년 9월부터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대량의 노획품 및 이란 육군 기술지원팀의 노력이 덧붙여져,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에 마침내 최초의 기계화 대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 대대는 병력 200명에 전차 10대, 장갑차 35대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1981년 11월의 타릭 알-쿼즈 공세에 성공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보스탄 해방과 더불어 추가적인 이라크군 장비 노획에도 기여하게 된다.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의 기갑 전력은 그 결과 제 30 IRGC 기갑여단으로 확장된다. 이 부대는 신속하게 훈련되어 다음번 대규모 작전인 1982년 3월의 파스 울-모빈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 결과 1982년 4월에는 이란 공화국 혁명수비대가 이라크군에서 노획한 약 500대의 T-54/55 및 다수의 장갑차들을 운영하게 된다. 여기에 기존에 이란 육군이 보관 중이던 100여대의 BMP-1 전투보병차량들도 합세하게 된다. 이제 제 30 IRGC 기갑사단이 된다. 이 부대는 4개 전투단과 1개 지원단으로 구성된다.

 

 이 새로운 사단의 훈련 및 작전을 위하여 쿠제스탄에 훈련 및 정비 시설이 설립된다. 이 부대는 코람샤흐르 해방 과정에서 400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며, 이란군의 최초 바스라 공세 작전인 라마단 작전에서 더 심각한 인명피해를 입게 된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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