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라트룬 전투에서의 교훈, 1948 (Lessons of the Battles of Latrun) - mideastweb

박용수 2014. 10. 27. 16:01

< 원문출처 : Lessons of the Battles of Latrun (http://www.mideastweb.org/latrun.htm) >


< 사진 및 역주 출처 :
[1] Fawzi al-Qawuqji (http://en.wikipedia.org/wiki/Fawzi_al-Qawuqji)
[2] Yitzhak Rabin (http://en.wikipedia.org/wiki/Yitzhak_Rabin)
[3] Mapai (http://en.wikipedia.org/wiki/Mapai)

[4] Latrun (http://www.zionism-israel.com/dic/Latrun.htm)

[5] Welcome To al-Latrun District of al-Ramla Ethnically cleansed 22,460 days ago (http://www.palestineremembered.com/al-Ramla/al-Latrun/)

[6] (http://tnuathaavoda.info/zope/home/1/b448_55/)

[7] Davidka (http://en.wikipedia.org/wiki/Davidka)

 

 



라트룬 전투 (The Battles of Latrun)

 


소개

 

 라트룬 수도원(monastery of Latrun) 및 그 근처의 영국인들이 지었던 요새는 1948년, 3차의 유혈 전투 장소로 유명해졌다. 이 전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Israel War of Independence) 당시 하가나(Haganah)와 이스라엘 방위군(Israel Defense Force)의 패배로 논란과 주목을 받았던 전투이기도 하다. 이 전투의 중요성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라트룬 수도원. 1187년 성당기사단(Templar)에서 최초 요새로서 만든 후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였다. 1890년 Trappist 수도회가 이곳에 성립되었고, 이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파괴를 당한 뒤 1927년 재건하였다. 현재 이곳에서는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판매하고 고고학적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4])

 

 라트룬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과 있으며, 트랜스요르단 병단(Transjordan Legion)은 이 지점을 활용하여 유태인 점령 예루살렘(Jewish Jerusalem)에 대한 봉쇄 수단으로 삼았다. 이스라엘 수상 벤 구리온(Ben-Gurion)은 라트룬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얼마 보유하고 있지 않은 귀중한 자원들을 투입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판단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경우 이는 이스라엘인들의 국민적 사기에 큰 타격이 될 것이며, 그 결과 독립전쟁은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라트룬 전투는 전쟁 초기 단계에 벌어진 전투로서, 그 전술 및 조직, 실패의 내용 등을 통하여 우리는 독립선언 직후 아랍군 침공 초기의 이스라엘군의 준비 상태와 능력에 대해서 많은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스라엘군은 인력 부족을 겪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럽의 강제수용소로부터 갓 도착한 이민자들을 다수 징집하여 하가나에 편입시켰고, 이들은 많은 훈련을 받지 못한 채로 전투에 동원되었다. 오랜 기간동안 이들 이민자들 상당수가 죽었다는 미신이 퍼져갔다. 우익과 좌익 빨치산들은 이 전투가 벤 구리온과 마파이(Mapai; '에레츠 이스라엘 노동자당'의 약자[3]) 지도부가 갖고 있던 "볼셰비키"적인 정신상태의 한 예라고 주장하였는데, 요컨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치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포스트-시오니스트(Post-Zionist) 역사가인 일란 파페(Ilan-Pappe)의 말에 따르면, "라트룬은 이스라엘인들의 기억 속에 남은 오점이다."라고 하였다.

 

(마파이당의 상징[3])

 

 라트룬에서 사용된 이민자들에 대하여 파페가 말한 바는 다음과 같다:

 

 지도부는 이민자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행동에도 동참해야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했다. 이들이 이것을 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관심 밖이었다. 지도부가 관심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군사행동에의 동참이 최고 수준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나는 다비드 벤 구리온이 했던 말 중의 한 문장이 생각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이들에게는 아직 조국 방위를 위해 희생해본 사람이 없다." 그는 이들 중에서 순교자, 즉 조국을 방위하다가 죽은 사람이 존재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희생으로써 이들의 입지가 하가나의 영웅적 병사들인 베테랑 사브라(Sabras; 이스라엘 지역에서 태어난 유태인)들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규모 이민자들이 라트룬에서 의도적으로 희생당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게 되었고, 이 전투의 패배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게 되었다. 파페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은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이며 국수적인 사회이다. 그리고 신화, 특히 근본주의적인 신화가 공급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국수주의적 사회다. 신화와 실제가 이스라엘에서는 혼합되어 있다. 이 나라는 역사의 국가(country of history)라기보다는 신화의 국가(country of mythology)라고 하는 편이 더 적당하다.


 파페는 이스라엘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원인을 이스라엘군이 아랍측 군대들보다 병력 수와 무기 측면에서 우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 중의 하나이다. 이들 학자들은 이스라엘군이 최초 병력과 화력 측면에서 열세였다고 하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라트룬 전투와 이 전투에 관련된 역사 편찬과정, 참가자들의 반응 등은 이스라엘 역사가 어떻게 쓰여지고 재서술되었으며, 이스라엘 및 기타 지역에서의 신화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왜 만들어지는가를 이해하는 데 대한 좋은 연구재료가 된다.

 

 

 전쟁 당사자들 (The Antagonists)

 

 아랍인들과 유태인들간의 충돌은 1947년 11월 29일, UN 분할안(UN partition plan)이 선포됨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였다. 팔레스타인 아랍 비정규군들은 국경지대의 다양한 지역과 특히 예루살렘을 통한 "회랑(corridor)"지대를 통하여 무기를 밀수하였으며, 이들은 숫자상으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다수의 무장 촌락민들을 소집하여 수송대에 "파자(faza)" 공격을 가할 수가 있었다. 이 기간동안 주변의 우방 아랍 정규군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군수물자가 예루살렘과 기타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 또한 영국측은 1948년 초, 파우지 엘 카욱지(Fawzi El Kaukji)가 이끄는 아랍 해방군(Salvation army; salvation army 용어 자체는 구세군으로 번역해야 옳지만, 1948년 파우지 엘 카욱지가 이끈 부대의 원래 명칭은 Arab Liberation Army(ALA)이므로 아랍 해방군으로 번역하였다[1])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유태인 지하군대와 비교하여 볼 때, 이들은 무장은 잘 되어 있었으나 훈련 측면에서는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예루살렘 포위전 기간동안 여러 번의 위기가 닥쳐왔으며, 1948년 3월의 경우에는 하가나 지휘관들이 절망에 빠지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다. 1948년 3월, 구시 엣지온(Gush Etzion)으로 향하던 수송대가 네비 다니엘(Nebi Daniel)에서 매복 공격을당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의 하가나 부대는 보유하고 있던 장갑차량 전부를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군대는 독립 선포 시점까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해서 우세를 점유할 수 있었다.

 

 상황은 영국인들이 떠나면서 바뀌게 되었다. 영국군이 철수한 뒤인 1948년 5월 15일, UN 결의안 181조에 따른 분할안에 따라 이스라엘국(state of Israel)은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아랍 국가들, 특히 이집트, 시리아, 트란스요르단의 경우 즉각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이 3개 국가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라크에서 온 지원군과 함께 침공을 실시했다. 이들은 표면상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침공하였다고 하였지만, 이들 아랍 국가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무의미한 제스처 몇가지를 한 것 외에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성립을 도와주거나 허용하지도 않았다. 1948년 5월 15일 이후의 아랍 정규군의 공식 참전으로 전투력 방정식은 변화를 맞게 된다. 유태인들은 이제 자신들과 같은 비정규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차, 화포, 비행기를 가진 훈련된 병사들로 구성된 진짜 군대와 싸우게 된 것이다. 영국이 떠나감에 따라 유태인들은 공개적으로 모병과 훈련을 실시하고 무기와 이민자들을 들여올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1~2주 만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토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며칠 내로 전토가 함락되는 것도 가능했다. 따라서 독립 선언 이후의 전쟁 초기 단계가 중요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라트룬(Al-Latrun)을 소개하면서 같이 올려놓은 사진. 동 홈페이지에서는 라트룬에서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인종청소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진에는 아무 설명이 없으나 아마 과거 마을이 있던 곳에서 찍은 사진이 아닐까 추측된다. [5])

 

 예루살렘은 UN에 의하여 국제지대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이스라엘에 할당된 나머지 지역과는 고립되어 있었으며, 1947년 12월 이래로 팔레스타인 비정규군에 의하여 여러차례 봉쇄되어 왔다. 4월에는 나흐숀 작전(Operation Nachshon)이 실행되면서 몇몇 촌락들의 아랍 비정규군을 격파하고 수송대열을 통과시킴으로써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개통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봉쇄는 재개되었다. 나흐숀 작전은 아직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상태에서 하가나가 벌인 최초의 의미있는 협조된 군사작전이었다.  마카비 작전(Operation Maccabi)을 통해 잠시 동안 도로가 재개통되고 라트룬 요새지가 이스라엘 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라트룬의 전략적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곳에 대규모 병력에 저항할 만한 수비대를 남겨두지를 않았다. 이 요새지는 언덕 위에 있는 탓으로 주변 지역을 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략적 이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포병이 필요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포병을 갖고 있지 않았다. 독립이 임박하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이 지점을 방치한 채 당시 이집트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네게브(Negev)를 방어하기 위하여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1948년 5월 15일 이후, 트란스요르단 병단(Transjordan Legion)이 도로 봉쇄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이 방어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더라도, 과연 이들에게 요르단인들을 막을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심히 회의적이다. 동 병단은 1~2개 여단에 상당하는 병력과 25문의 대포를 끌고 왔다. 5월 15일 당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인력도 대포도 없었다.

 

 이스라엘 독립 10일 후인 1차 라트룬 전투 당시, 이스라엘군은 아직 지하군대인 "하가나(Haganah)"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비전투병력과 훈련이 덜된 병력까지도 포함하여 총 25000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이들 병력 대부분과 이들을 이끌던 대부분 장교들은 정규군에 대항하여 싸워본 경험이나 싸움을 조직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군수조직은 혼돈 속에 있었으며 전술 지식은 드물었다. 이스라엘 독립 직후에 선발된 병사들은, 라트룬에 투입된 징병된 이민자들처럼, 처음에는 전혀 훈련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종종 들려줄 무기조차 없었다. 아랍 침공이 시작된 시점에서 이스라엘에는 전차, 전투기, 폭격기, 화포가 전혀 없었다. 알렉산드로니 여단(Alexandroni brigade)의 "훈련되고" "정예인" 병사들 조차도 이집트군이나 요르단 병단과 같은 정규군과의 실전 경험은 갖고 있지 못했다. 현대 군대에서의 성공 여부는 단지 병사의 숫자나 무기의 수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병참 및 협조, 계획, 규율 등에도 달려있다. 이런 것들에 필요한 훈련과 조직은 이스라엘군에 당시 없었으며, 제대로 된 참모 업무를 수행하고 군수업무를 조직할 충분한 통신장비와 병사, 장교들이 부재했다. 하가나의 전체 조직이나 이들 장교단의 전투 개념은 아직도 테러 공격이나 도적떼들의 공격으로부터 소규모 촌락을 방어하는 사주방어(perimeter defense) 수준에서 머물러 있었으며, 대규모 지역이나 수송로, 도시 등을 조직된 군대로부터 방어 혹은 탈취하는 데에 필요한 전략적 시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 지역 침공 과정에서 네게브 지역을 절단함으로써 이스라엘 영토의 절반을 탈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트랜스요르단 병단이 보다 큰 위협이었는데, 이는 이들의 활동지역이 국가의 중심부였고, 예루살렘을 차단 및 점령할 위협요소였기 때문이었다. 동 병단은 중동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였다. 이 부대는 영국인들의 손에서 아랍 병단(Arab Legion)으로 탄생하였으며, 이후 트랜스요르단의 군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당수 장교들은 영국인들이 맡고 있었으며, 독립전쟁 초기 영국으로부터 다수의 보급물자를 수령하고 있었다. 동 병단의 장교 2/3, 특히 고급 장교 51명 중 49명이 영국인이었다. 5월 30일, 1차 라트룬 전투 이후 영국은 동 병단에 있는 영국인들로 하여금 병단을 떠날 것을 지시하였지만, 이것이 실제로 이행될 때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라트룬 전투 (The Battles of Latrun)

 

 이제 이야기의 초점을 1차 라트룬 전투로 맞추도록 하자. 이 전투에서 가장 유명한 궤주(rout) 사건이 발생한다. 지역 지도 및 전투 배치는 아래 그림과 같다.

 

(1948년 5월 25일, 공격 계획과 실제 공격 상황. 이츠하크 레비의 Nine Measure 268페이지에 나와있는 지도와 알렉산드로니 여단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과 지도를 참조하였다.)


 라트룬 진지는 1941년 및 1942년 영국인들이 건설한 테가트 요새(Tegart fort)(찰스 테가트 경(Sir Charles Tegart)의 이름을 따라 명명됨. 그는 과거 인도 경찰이었으며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 폭동을 어떻게 진압할지에 대하여 영국측에 조언한 바 있다.)와 그에 인접한 트라피스트 수도원(Trappist monastery; Trappist는 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를 부르는 표현으로 성 베네딕트의 규칙에 따르는 로마 카톨릭 수도회이다.)으로 이뤄져 있으며, 언덕 정상부에서 몇몇 전략적 교차로들을 감제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레호보트(Rehovot)와 훌다(Hulda)로부터 예루살렘을 잇는 도로가 텔아비브(Tel Aviv)와 람라(Ramla)를 잇는 도로와 만나게 되며, 마스미야(Masmiyeh)로 가는 교차로를 좀 지나게 되면 라말라(Ramalla)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오게 된다. 이 요새는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그리고 기타 남부지역간을 잇는 중부 이스라엘의 주요 교차로들을 감제하고 있었다. 25파운드 대포와 피아트 대전차로켓, 다수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배치되어있어 이 요새는 이스라엘 수송대열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가 있었다. 이 시점에서 아랍인들이 도로를 장악한 탓으로 예루살렘은 봉쇄되어 식량 및 보급품 사정은 악화되었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 벤 구리온 수상은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이는 전략적 재앙임과 더불어 큰 사기의 손실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중부 전선 지휘관이었던 이갈 알론(Yigal Alon)은 예루살렘이 잘 버텨낼 수 있으며, 아울러 하가나에는 예루살렘 전역 및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협조된 공격을 수행할만한 자원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벤 구리온은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도로가 반드시 개통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라트룬의 테가트 요새. 1936년-39년간의 팔레스타인 아랍 폭동 이후에 영국인들이 지은 경찰용 요새이다.[4])

 

 라트룬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저지른 첫번째 과오는 1948년 5월 16-17일간 하렐 여단(Harel Brigade)이 점령했던 라트룬 진지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는 협조 부족과 전략 계획의 부재, 자원 부족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48년 당시 하렐 여단장, 1992-1995년 이스라엘 수상 재임[2])은 이에 반대하여 라트룬을 수비할 병력을 남겨둘 것을 주장하였지만, 이 주장은 인정받지 못하였다. 라트룬의 중요성이 명백해지자 벤 구리온은 이갈 알론으로 하여금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진지를 확보하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수송대 행렬을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알론은 하가나에는 이 임무를 수행할 만한 병력이나 장비가 없다고 항의하였다. 공격 계획은 암호명 "빈 눈 작전(Operation Bin Nun)"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이 시점에서 요르단 병단은 라트룬 진지와 주변 촌락들을 점령하였는데, 이 사실을 하가나에서도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최초 공격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떠난지 10일째인 5월 25일 아침에 이뤄졌다. 이츠하크 레비는 저서 아홉 방법들(Nine Measures)에 전투에 참가한 부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해 두었다. 이 병력은 쉴로모 샤미르(Shlomo Shamir)가 인솔하였다. 이스라엘 공격부대는 제 7여단의 1650명과 알렉산드로니 여단 32대대의 450명, 하렐 여단의 300명으로 이뤄졌다. 하렐 여단의 300명은 이 지역에 있긴 하였으나 공격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 공격이 있을지조차도 모르고 있었으며, 나중에 사령부와의 무선 통신을 청취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다. 제 32대대는 라트룬 요새를 공격하고, 제 7여단의 72대대는 라트룬 남쪽의 아랍 진지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 71대대는 예비로 남겨졌으며, 제 73 기갑대대는 일반 기동지원을 하기로 되어잇었다.

 

 이츠하크 레비의 "적의 눈 속에서(In the eyes of the enemy)"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요르단군의 규모는 약 3500명으로서, 2300명은 정규군, 600명은 요르단인 지원병, 600명은 지역출신 지원병이었다고 한다. 정규군은 병단의 제 3여단 소속 2개 대대였으며, 이들은 3여단 4대대와 5월 24일 라말라에서 도착한  2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요르단군은 라트룬, 엠마우스(Emmaus), 얄루(Yalu), 디르 아윱(Dir Ayub), 히르벳 엘 아케르(Hirbet El'Aker), 기타 주변 여러 고지들에 있는 진지들에 분산되어 있었다. 제 2대대가 도착하여 방어선 동쪽편에 있는 얄루에서 디르 아윱까지의 진지들을 맡게 됨으로써 이곳의 제 4대대 병사들이 라트룬을 보강할 수 있게 되었다. 요르단측 기록에 의하면 요르단 병단은 1200명으로 써 6500명의 이스라엘군을 격퇴하였다고 되어 있다. 6500명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당시 중부 전선에 있던 이스라엘군 전병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 숫자가 라트룬 공격에 참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실제 전투는 라트룬과 이곳의 도로, 주변의 고지들에 있던 진지들에서 벌어졌다. 특히 314 고지가 유명하다. 양측 모두 실제 전병력이 정면 전투에 참가한 것은 아니다.

 

 하가나 7여단의 71대대 및 72대대의 구성은 불명확하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들이 대부분 유럽의 집단수용소에서부터 이스라엘로 새로 건너온 이민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어떤 자료에서는 단지 145명만이 이민자라고 한다. 이들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였던 반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없었다. 제 73대대는 상대적으로 경험있는 하가나 부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지휘관도 제 2차 세계대전 경험이 있는 하임 라스코프(Haim Laskov) 대위였다. 이들의 기갑차량은 다양한 형태로 총 15대였으며, 이들 중 절반은 장갑수송차였을 것이고, 일부는 하가나의 작업장에서 만든 즉제 "샌드위치" 장갑차량 및 장갑정찰차였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전차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상대적으로 경험 많은 알렉산드로니 여단의 제 32대대 병력들에게 돌아갔다. 요르단인들은 대포가 장착된 17대의 장갑전투차량(armored battle wagons)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것이 없었다. 요르단인들은 기관총 105정이 있던 반면, 이스라엘인들에게는 53정이 있었다. 요르단 측에는 8문의 영국제 25파운드 대포가 있었고, 이스라엘 측에는 1906년에 생산된 2문의 프랑스제 65밀리 대포(일명 "Napoleonchiks"로 불림)와 자체 생산한 3문의 "다비드(Davidka)" 대포 (사용하지는 않음)가 있었다(역자 주: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다룬 소설인 '엑소더스'에는 이 다비드 포가 일종의 박격포로서, 제원이 불안정한 일종의 테러용 무기라고 소개되어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 측에도 25파운드 대포가 1문 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기바티 박물관에 전시된 다비드포(Davidka mortar).[7])

 

 레비에 따르면, 하가나 정보부에서 당시 라트룬을 점령한 것이 병단(Legion)이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이들은 병단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진지 자체는 약 1000명 가량의 비정규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2대대나 7여단이나 공격 전에 제대로 정찰을 수행하지 않았다. 전투 계획은 과거 비정규군 진지들에 대해 성공적이었던 코만도 습격 방식으로 짜여졌다. 전체 실병력 중 단지 1/4 내지는 1/3만이 라트룬 공격에 실제 투입되었고, 나머지는 엄호 및 방어 활동을 위한 예비로 남겨졌다.

 

 그러나 콜린스와 라피에르에 의하면, 이들은 공격 당일 밤, 라트룬에 상당한 증원이 이뤄졌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한다:

 

 "... 오후 7:30 경, 야딘으로부터 긴급한 통신이 있었는데: '다수의 장갑차 및 건캐리어를 포함한 120대의 적 차량부대가 라말라를 떠났고 분명 라트룬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지도 좌표 154-141에 있다' "

(콜린스와 라페이르, O Jerusalem, 480 페이지)
 
 어쨌든 전투 계획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고, 언제나처럼 예루살렘의 상황은 절박한 탓에 벤 구리온은 전과를 낼 것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미 보급품 문제로 공격이 24시간 지연된 상태였으며, 이는 요르단인 측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요르단인들은 라트룬으로 25파운드 대포 4문을 추가로 반입하였다.

 

 집결시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 지연 탓으로, 공격부대는 계획된 자정이 아닌 새벽 2시에서 5시 사이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요르단측 기록에 따르면, 보름달로 인하여 라트룬으로 향하는 제 32대대의 모습이 요르단인들에게 잘 보였다고 한다. 이들은 요새를 탈취하는 것을 담당한 부대였다. 요르단 경계병은 플레어(flares)를 점화하였고, 병단은 대단히 효과적인 기관총 사격을 실시하여 32대대 일부를 고착시켰다. 이들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결과는 똑같았지만 공격이 이뤄진 시각은 동이 튼 이후였다고 한다. 적의 활동에 따라 32대대의 일부가 고착되었다. 하임 라스코프의 73 기갑대대는 도로를 따라 동진하여 이들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요르단군의 치명적인 대포 사격에 저지된다. 7여단의 72대대 역시 베잇 수신(Beit Sussin)으로 동진하던 도중 요격당하여 최소한 1개 소대가 말 그대로 전멸한다. 심한 더위와 함께 전투가 대부분 주간에 이뤄졌다는 점, 기습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 등은 공격부대로 하여금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몇몇 영웅적인 엄호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군 대부분이 간신히 퇴각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열은 엉망이었고 상당수의 장비를 상실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최소한 73명에서 74명이 사망하였고, 140명이 부상, 6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사망자 중 50명은 제 32대대 소속이었으며, 이들은 공격을 중요한 부분을 맡은 알렉산드로니 여단의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민자 신병들의 경우 제대로 등록 및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마 사상자는 더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7여단의 경험 적은 이민자 병력들로 인하여 궤주가 발생했다는 표현은 맞지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별반 사상자를 내지도 않았으며, 라트룬 탈취 임무도 이들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 7여단장이었던 쉴로모 샤미르에 따르면, 사망자 중에서 19명이 신규 이민자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츠하크 레비에 따르면 패전의 주요 원인은 공격 계획이 마치 라트룬이 비정규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는 것처럼 짜여졌기 때문이며, 과거에 통했던 전술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다른 전술을 썼다 하더라도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전쟁 시작 시점에 있어, 하가나에 알려져 있거나 숙달되어 있던 다른 전술이랄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규군과 싸워본 적이 없었다. 계획의 주 부분은 정면 공격이었고, 기관총 및 화포, 감시병들이 배치된 진지 앞의 평원을 달빛에 의존하여 기어가는 것이 계획이었던 것이다.

 

 양측 모두 당시 실질적인 공군력은 없었다. 당일 2대의 이집트 쌍발 항공기(분명 폭격기였을 것이다)가 훌다 및 근방 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참모총장이었던 이갈 야딘은 이를 이유로 하여(아마 변명라는 표현이 나을 것이다. 이들은 전투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군 지원을 하지 못했다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중지원이 있었다 한들 별 차이가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어쨌든 하가나가 실시한 이후의 3차례의 공격 역시도 실패로 끝난다. 라트룬 전투는 사실 5월 25일에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일부 서술들에서 말하듯이 완벽한 궤주도 아니었다. 제 7여단은 기바티 여단(Givati Brigade)의 52대대(나중에 철수함)의 증원을 받는다. 2차 공격 준비로서 제 72 및 73대대는 5월 27/28일 야간에 베잇 수신을 탈취한다. 이 시기, 이스라엘군은 아랍측 영토에 착륙한 이라크 항공기 한대를 파괴한다. 쉴로모 샤미르는 5월 30일 다시금 라트룬을 함락코자 시도(빈 눈 벳 작전(Operation Bin Nun Bet))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이번 공격에는 하임 라스코프 대위가 고안한 화염방사 장갑차(armored flame-throwers)도 동원되었다. 이 장비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여기서 내는 불빛은 전장 전체를 밝혔기 때문에, 야간에 이들이 완벽한 표적이 되는 효과도 발휘했다. 6월 9일에 있던 3차 공격은 미국인 대령 미키 마커스(Mickey Marcus)가 지휘하였으며, 라트룬을 후방으로부터 탈취하고자 하였다. 이 공격은 이후에 벌어진 7월 16일 공격처럼 실패한다. 7월 18일에 계획되었던 공격은 통신 두절로 말미암아 취소된다. "만일" 한두가지의 결정적 실수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측이 라트룬을 탈취할 수 있었으리라는 상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험은 4~5회 반복되었고 매번 실패하였다. 전쟁의 이 시기에 있어서 이스라엘군이 갖고 있던 무기와 협조능력, 지휘관 능력으로는 라트룬 정복은 불가능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에 벌어진 실패들은 모두 이스라엘군 무적 신화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들이 있다. 라트룬에서의 패배는 과장과 역비난의 주제가 되었다. 그 신화는 자라나서 실패의 원인이 이민자 병사들을 냉소적이고 무정하게 투입한 것에 있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반대파 국회의원(opposition MK) 우지 란다우(Uzi Landau)는 한때 라트룬에서 2000명의 병사가 죽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라트룬 전투와 연관된 실패들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연방군에게 있었던 혼란들을 떠올리게 한다. 정보활동의 부족은 적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실패하게 하였고, 나아가 (이츠하크 레비에 따르면) 하가나가 요르단 병단과 대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싸우도록 만들었다. 최초 전투의 전략 구상도 완전히 부적절했다. 통신, 군수, 조직상 실패가 전투 나머지를 물들였다. 부대가 도착하지 못하거나 늦게 도착, 혹은 무기 없이 도착하는 바람에 24시간 이상의 작전 지연이 생겼으며, 이 사실은 패전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존재하고 있었던 기갑전력 역시도 효과적으로 활동되지 못했다. 5월 30일의 공격 역시도 주간으로 미뤄졌다. 제 3차 공격 당시에는 우연한 선회 실수로 요르단군 사령부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러한 기회를 활용할 만한 유연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증원군은 오지 않았고, 이 지점은 다시 빼앗기게 된다.

 

 이 전투의 패배 원인은

 

 - 요르단군 진지의 우월성 : 이들은 고지에 있었고 요새화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이점을 잘 살렸다.
 - 대포와 장갑차량에 맞서야 했던 이스라엘군에 중포와 공군력이 없었던 사실
 - 트랜스요르단 병단의 숫적인 우세
 - 형편없는 계획
 - 형편없는 정보활동

 

으로 볼 수 있다.

 

 쉴로모 샤미르는 이를 정리하여 말하길:

 

 당신에게는 병력이 없다. 당신에게 병력이 없고 그게 다다. 저들이 당신을 쏘면 당신은 대응할 것이 없다. 사람들을 운송해야 하는데 운송할 수송수단이 없다. 사람들을 구조하고 도와야 하는데 당신에게는 뭐 아무 것도 없다. 자 이제 당신 스스로 물어보시오, 만약 당신이 지휘관인데 당신이 갖고 있는게 전혀 없다면 이게 무슨 종류의 지휘관인가? 자, 이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소.

 

 이스라엘은 라트룬으로 보유하고 있던 최고의 군인들을 보냈다. 이들은 이전과 이후의 전투들에서 여러 차례 무훈을 발휘하였다. 엘리아후 아르벨, 쉴로모 샤미르, 아리엘 샤론 등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신화들에 말하는 것처럼 훈련받지 않은 신규 이민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실패한 것은 단지 이것이 명백히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었다. 일반참모부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작전을 반대하였고, 결과는 이들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따라서 이 실패는 일반참모부의 실패도 아니다.

 

 나세르 대령(Col Nasser)의 불만에서 볼 수 있듯이 1948년 이집트 군대의 능력에 일부 전술적 문제들이 있었음은 명백하며, 1973년 10월의 기습 공격 이후의 이스라엘 군에서의 조직 붕괴 당시에서도 전술적 문제들이 흔히 나타났지만, 이런 것들이 요르단 병단이나 기타 효율적으로 경영되는 군대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훨씬 적으며, 제대로 계획된 작전 과정에서 발생할 확률은 더욱 적을 것이다.

 

 이제 좀 더 큰 전략적 질문인 "왜 전투가 벌어졌는가?"를 살펴보자. 이 전투는 민간인이 군대를 위압함으로써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고전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벤 구리온은 예루살렘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는 아마도 옳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실행 방법을 이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받긴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구원되었다. 즉 일명 "버마 도로(Burma Road)"라고 불리게 된 라트룬을 우회하는 정교한 우회도로망을 만들어서 해결된 것이었다.

 

 

 역사 기술과 신화의 창조 (Historiography and Myth Making)

 

 이상의 이야기로부터 수많은 이민자들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의하여 죽음으로 내몰려졌다는 이야기는 신화임이 분명해졌다. 진실은 라트룬 전투가 값비싸고 회피 가능했던 실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전쟁에는 항상 수많은 회피 가능한 실수들이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사실 회피 불가능한 것일 수가 있다. 1차 라트룬 전투를 재조명하는 데 근거가 된 쉴로모 샤미르의 진술이 사실 편향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는 7여단장으로서의 자신의 행동을 변호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관 역시도 그가 정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지에 관해 의심을 품게 만든다:

 

 나는 모든 공동체의 사람들과 국가, 집단들은 이들이 이성적이든 아니든 나름대로의 유산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 당신이 독립 전쟁 당시로 돌아갈 때, 내 생각에는 우리의 목표는 이것에 피해가 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스러워 할만한 유산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라트룬 전투, 예루살렘 전투의 기록에 있는 것들이다.


 게다가 파페가 언급한 신규 이민자들을 전장으로 보낸다는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전혀 근거없는 것도 아니다. 샤미르의 말에 따르면:

 

 우리에겐 사람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이민자들이 온다. 대 토론이 벌어졌고, 새 이민자들이 전투에 참가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였다. 신께 맹세하건대 이들을 전쟁에 투입시키지 않았더라면 단일한 유태 민족의 재탄생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필요성인가 이데올로기인가? 그는 애매하게 표현하였고, 아마도 그 스스로도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미르의 언급은 다른 참전용사들의 언급과 일치한다. 이들 언급들이 얼마나 서로 영향을 주었을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신규 이민자들이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며, 이들이 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공 책임을 졌다거나 대규모 사상자를 냈다거나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에 대하여 일란 파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망한 이민자들의 숫자에 관한 라트룬의 신화는 사실 정말로 숫자와 연관된 것은 아니다. 상당수 현학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역사가들은 숫자에 관해 논하기 위하여 수많은 잉크를 낭비한다. 이들은 숫자가 신화를 만드는 데 정말로 중요한 것처럼 여기며, 마치 정확한 숫자를 알면 신화를 무찌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나는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것은 라트룬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충분히 죽었느냐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파페에 따르면, 세속적인 창조물이자 소위 말하는 "부르주아 과학"의 산물인 실험적 방법들과 사실, 숫자들에 대한 논의는 사실 넘어가도 좋다라고 하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올바른"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하고 있냐라는 사실이다.

 

(1946~47년 당시 하가나에서는 불법적으로 유태인들을 이스라엘로 밀입국시키는 운동을 펼쳤다. 1942년까지는 정치단체 혹은 개인 독지가들이 운영하던 이민운동들이 합법적이었으나, 이후 활동을 멈췄었다. [6])

 


 전쟁에서 병력의 부등성과 이스라엘군의 능력발휘 (Inequality of Forces and Israeli Performance in the War)

 

 이 전투에 관한 자세한 조사 및 기타 다른 자료들은 보다 커다란 문제에 대하여 빛을 비춰주게 된다 - 독립 전쟁에서 어느 쪽이 병력 숫자 및 장비 측면에서 절대 우세하였는가? 이스라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객관적 자원 - 인원 및 장비 - 측면에서 이스라엘 측이 우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전쟁 말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측이 군 내에 10만명을 보유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 및 기타 은밀한 무기상들을 통하여 무기를 수입했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이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 이전에는 하가나와 팔마흐(Palmach) 모두 합쳐 25000명의 병력 뿐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장비가 없었다. 1948년 2월 당시, 알렉산드로니 여단에는 휘하 병력을 모두 무장시키기 위한 소총 및 스텐건 550정 보다 약간 적은 숫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보급 상황은 1948년 5월까지 나아지지만, 라트룬 전투가 벌어지는 시점까지도 알렉산드로니 여단에는 소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제 32 대대를 7여단으로 배속시키는 과정에서 병사들로부터 소총을 반환받는다.

 

 병사들 숫자 비교 역시도 함정이 있는데,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병사들은 모두 전투병(front line soldiers)으로서 추가적인 보급 및 군수지원 요원들은 후방에 있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을 셀 때에는 군 내의 모든 병사들을 포함하였으며, 전투병력 외에도 예비병력, 군수지원병력,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청소년 준군사조직 가드나(Gadna) 병력들과 후방 인원들까지 포함시켰다. 이스라엘군이 자택에 거주하는 자원병들로 이뤄진 지하조직으로부터 징집병으로 구성된 정규군으로 변신하고 부대 규모도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비전투 병력의 규모는 증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시 방위대 "헤일 하미시마르(Heyl Hamishmar)"에는 1948년 1월 경 893명의 병사가 있었고 이 중에서 750명이 전투병력이었다. 이 숫자는 5월 23일 4673명으로 증가하지만, 이 중에서 전투병력은 2700명에 불과했다.

 

 일란 파페는 라트룬 전투를 비정형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내 생각에는 라트룬 신화가 여러가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들 중 하나로는 이것이 소수가 다수를 대항한다는 신화에 대한 증거로 쓰인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힘의 균형은 라트룬 전투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유태인 국가에는 매우 중요했으며, 집단적 기억에서 라트룬을 전쟁 자체로 만든 사람들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힘의 균형에 있어서 힘의 균형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다른 신화, 그러니까 도덕적 우세라는 신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작은 다윗이 어떻게 거대한 골리앗을 이겼겠는가, 만약 그가 작아서 모든 군사적 측면에서 허약했다면 못이겼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대단히 명백하다. 즉, 여기에는 도덕적 우세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대결에서 정의의 편이 이기는 것이고, 역사는 정의의 편을 들며, 신이 당신편을 들게 하려면 어쩌구저쩌구 해야 한다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실제 벌어진 사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고 있다. 라트룬 전투는 이스라엘군이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목표물의 방어를 위해 쏟아부은 당시 가용했던 최고의 노력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당대의 이스라엘 전투력에 대한 과장도 담겨져 있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힘의 균형이 반영되어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힘의 균형 자체는 더 안 좋았다. 이 고도의 유태인 지역은 방어병력이 부족하여 항복해야만 했다. 남쪽에서는 이집트군에 대항하여 한동안 희망이 없어보였다. 만약 라트룬에서의 병력들에게 전차와 화포, 항공지원이 없었다면 이는 하가나 자체에 전차와 화포, 항공력이 1948년 5월 25일 시점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학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이슈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1948년 5월과 6월에서 이 부분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리고 6월 10일의 최초의 휴전 이후 시기에도 이스라엘군은 아랍 군대에 의해 유린당할 여지가 충분하였고, 아랍군은 규모와 훈련, 장비 측면에서 우월했다. 이것은 실제 벌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스라엘측의 승리의 원인을 신이나 도덕성의 우세에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숫자와 사실을 무시하고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숫자와 사실은 단지 실험론자(empiricist)에게만 중요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곤란하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식의 신화 만들기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기록이 보여주는 바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아랍 정규군대와 맞붙었을 때의 결과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하가나와 이스라엘군은 트랜스요르단 병단 측에서 공격을 선택한 경우의 전투에서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전쟁에서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병단은 서부 예루살렘을 유린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만델바움 문(Mandelbaum gate)에 대한 "공격"이 아마도 실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전쟁 동안 라트룬 전투라던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태인 구역 함락과 같은 계획과 협조 측면에서의 재앙이 있었는가 하면, 전쟁 막바지에 이집트군이 지키고 있던 이라크 항구 엘-수웨이단에 대한 공세 실패 같은 보다 사소한 실패도 있었다. 또한 구시 엣지온 전투와 같이 용감하면서도 무익한 저항도 있었으며, 네그바와 야드 오르데차이와 같은 극히 모험적이면서도 좀 성공적이었던 사례들, 그리고 네게브 정복과 같은 훌륭한 성공들도 있었다.

 

 이스라엘 측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 초기 시기의 성취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유린당하지 않은 것 자체를 들 수가 있다. 이 원인의 일부는 보다 우세한 동기 부여에, 일부는 트랜스요르단 병단이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할당된 지역 외의 지역을 공격하기 꺼려한 데에, 일부는 아랍 군대들 사이의 협조 부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성공의 비밀 중 일부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끈질김에 둬야 할 것이다. 라트룬을 탈취하려는 정면 공격이 성공할 수 없게 되자 우회도로를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을 이라크의 엘 수웨이단에 있는 요새지에서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결과적으로 팔루자의 고립된 포켓 지역 내로 밀려가서 우회 가능하게 되었다. 게릴라 병사들의 전투 의지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2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가나는 지하 게릴라 군대였다. 사실상 게릴라 군대였던 이스라엘인들이 아랍 군대를 이긴 원인이 숫자와 장비의 우세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게릴라 군대는 보다 약한 상황에서도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응급조치, 현장대응, 긴밀한 동지의식 등 팔마크와 하가나를 특징짓는 이러한 요소들이 경험과 장비, 조직의 결여를 만회해 주는 요소가 된 것이다. 이는 사실 결국에는 이스라엘군의 비법이 되었는데, 이런 것들을 뿌리뽑고 엄정한 군기와 조직을 갖는 정규군으로 만들려던 시도가 벌어진 후의 일이긴 하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결국 중단되었고, 50년대 초의 여러 가지의 잘 알려진 실패들 이후에 군은 재조직된다. 먹혀들어가지 않은 접근방법이 성공의 원인들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쟁 후반부의 이스라엘 측 성공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측 장비와 훈련, 병력 규모의 우세가 큰 원인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는 이는 사실이 아니며, 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이 조직, 보급, 훈련을 이룬 것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성과이다.

 

아미 이세로프 (Ami Isseroff)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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