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이스라엘 독립전쟁, 1948 (1) - 시오니즘 이스라엘 정보센터

박용수 2014. 10. 27. 16:06

< 원문출처 : 시오니즘 이스라엘 정보센터 - Israel War of Independence (http://www.zionism-israel.com/dic/War_of_Independence.htm) >

 

 이번에 번역하는 글은 시오니즘-이스라엘 정보센터라는 곳에 올라와 있는 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에 관한 글입니다. 1차 중동전에 대한 이스라엘측 시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 (War of Independence / Milhemet Hashichrur or Milchemet Hashi'hrur)

 

 


이스라엘 독립전쟁 (Israel War of Independence)은 독립 전 시기와 독립 후 시기로 구분된다.

 

독립 전의 내전(civil war)시기는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의 통과 직후 시작되었는데, 이 결의안의 내용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한다는 것이였으며, 특히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하여 국제 지역으로 정한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전토의 약 55%를 갖게 되어 있었지만 여기에는 사막 지역인 네게브(Negev)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측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구 분포에 따라 할당된 아랍과 유태인 지역은 서로 엉켜있었다. 설계상태는 불안정했지만, 만약 양측이 마음만 먹었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랍인들은 분할안에 반대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유태인들을 몰아낼 전쟁을 주장했다. 영국은 예루살렘을 국제 지역화하려는 유엔의 노력을 방해했으며, 아랍인들의 전쟁 기도를 부추기는 한편, 아랍 병단(Arab Legion)(나중에 트랜스요르단 병단(Transjordan Legion)이 된다)에 막대한 수량의 무기를 공급했다. 이는 나중에 미국이 간섭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분할안 소식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제 비극적인 무장 충돌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분할안이 선포되고 얼마 되지 않아 폭동과 테러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는 점차 심각해져갔다. 예루살렘(Jerusalem) 구시가의 아랍인 구역과 야포(Yaffo)에서 이르군(Irgun)의 폭탄들이 터졌다. 예루살렘에서는 아랍인들이 유태인 기관(Jewish Agency)들을 폭파시켰고, 그 직후 2월의 벤 예후다 거리 폭파사건(Ben Yehuda Street Bombing)에서는 60명을 살해했다.

 

 독립 후 시기는 다시 3개의 전투 시기로 나뉘어지며, 이 기간 동안 최소 2회의 휴전이 있었다.


 

 제 1차 전투 시기는 1948년 5월 15일에서 6월 10일까지다.

 제 2차 전투 시기는 일명 "10일간(ten days)"으로 불리는 7월 9일부터 7월 18일까지이다.

 제 3차 전투 시기는 1948년 10월 15일에서 1949년 1월 7일까지이다.


 

 "휴전"기간에는 지속적인 소규모 전투들과 한두차례의 대규모 작전들이 벌어졌었다. "휴전" 기간 동안에도 사람이 죽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정규군은 어느 정도 휴전을 준수했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나 파우지 엘 카욱지(Fawzi el Kawkji) 휘하 아랍 해방군(Arab Liberation Army)과 같은 아랍 비정규군들의 경우에는 휴전을 존중하지 않았다.

 

 유태인들로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독립 전 시기 동안 적당한 전투력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으로서, 이들은 나중에 게릴라 병력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어 이후의 아랍측 정규군의 내습을 저항할 수가 있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CIA) 분석에 따르면 아랍 제국들의 참전을 제외하더라도 유태인 측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숙련된 군인이었던 미국 국무부 장관 조지 C. 마샬(George C. Marshall)은 독립 전날 유태인 부서 외무 보좌관(Jewish Agency Foreign Secretary) 모셰 샤렛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 믿게. 나는 내가 아는 걸 이야기하는 것일세. 자네는 이곳 팔레스타인의 해안 평야에 위치하고 있고, 아랍인들은 산악 지역을 장악하고 있네. 나는 자네들이 일부 병력들과 하가나(Haganah)를 갖고 있는 걸 알고 있네만, 아랍인들은 정규군을 갖고 있네. 저들은 잘 훈련되었고 중무기를 갖고 있네. 어떻게 당신네들이 버텨낼 수 있기를 바라겠나?


 이러한 평가가 내려졌다는 사실은 후세 평가에 있어서 한가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사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전쟁 이후에 여러 사실들을 취합하여, 아무런 중화기도 없던 60만명의 유태인들이 여러 아랍 국가들의 군대들과 120만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무찔렀던 것이 "필연적(inevitable)"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해왔다. 베니 모리스의 경우, "전쟁 직전의 여러 관찰자들 - 유태인, 영국인,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외부 아랍인들 - 모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결코 시오니스트들을 무찌르거나 시오니스트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데 대해 동의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객관적으로 너무 약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베니 모리스가 고려하지 않았던 진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그 숫자와 무장에서 유태인들을 압도했다는 것이었다. 독립 이전 시기, 이들은 카욱지의 아랍 해방군(ALA)과 아랍 병단(Arab legion)의 적극적인 지원도 받고 있었다. ALA는 병력 측면 외에도, 유태인들에게 없었던 화포와 기타 여러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은 1948년 5월 15일 극명해지는데, 이때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군대가 전차, 항공기, 포병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론상 공격자는 승리를 위하여 3~6배의 병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공자는 단순히 자신의 병력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만 하면 이를 달성할 수 있는데 반하여, 방자는 모든 곳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방어의 문제는 특히 심각했다. 충분한 영토 내지 전략적 종심을 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이집트인들의 경우 손쉽게 네게브 사막 전역을 차단했다. 이라크인들의 경우 지중해에서 단지 수 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다. 시리아인들과 ALA의 경우 쉽게 하이파(Haifa)에 도달했다. 10만명의 유태인들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은 나머지 이스라엘 영역들과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난도질 당한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붕괴 직전이었으며, 이는 최초의 휴전이 이뤄진 6월 10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5월 15일 당시와 그 이후의 유태인 군인 명단을 살펴보면 그 숫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최초 휴전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이들 대부분에게 무기조차 없었다. 일부는 이제껏 소총 사격 한번 해본적 없는 이들이었고, 전투에서 뭘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예를 들어 기관총을 분해 또는 조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이들이 직접 하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는 전문가들이 와서 조립 및 수리를 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비록 이스라엘 방위군(IDF)가 1948년 5월 28일 창설되긴 했지만, 6월 10일의 최초 휴전이 이뤄지기 전가지는 대부분 병사들이 거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배에서 갓 내려 총을 건네받은 신규 이민자들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헤브루(Hebrew)어를 하지 못해 명령을 알아듣지 못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IDF에는 대략 10만명의 병력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중요 단계에서의 유효 전투력은 대략 2만~3만명 가량으로 판단된다.

 

 

독립 전 시기

 

 유태인 지하조직들과 아랍 비정규군들 간의 충돌은 유엔에서 분할안을 통과시킨 직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랍 국가들은 침공하지 않았으나, 영국 무기와 영국인 장교들로 채워졌던 소위 아랍 병단(Arab Legion)의 경우 이미 팔레스타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랍 병단"은 예루살렘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5월 14일에는 구쉬 엣지온(Gush Etzion)이 유린되었다. 구쉬 엣지온은 예루살렘 남쪽 팔레스타인 국가(Palestinian state)에 할당되어 있는 작은 주거지였다.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 이전 시기 2개의 아랍 비정규 지원병 부대들이 활동했는데, 이들 중 하나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활동하던 하지 아민 엘 후세이니(Haji Amin El Husseini) 휘하의 부대였고, 또 하나는 갈릴리(Galilee) 부근에서 활동하던 파우지 엘 카욱지(Fawzi El Kaukji) 휘하의 부대였다. 이들은 전사들을 아랍인 마을에 위치시키고, 영국인들의 묵인 하에 유태인 마을들에 대한 다양한 종류의 공세를 감행했다. 카욱지와 그의 비정규병들은 영국인들의 허락을 받고 시리아로부터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으며, 아마도 군사작전은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하고 왔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이 합의를 깨뜨리고 갈릴리 일대를 공격한다. 영국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랍 비정규군들은 시오니스트 지하 군대인 하가나(Haganah)와 마주치게 되고, 또다른 "불일치(dissident)" 지하 파벌인 이르군(Irgun)과 레히(LEHI)와도 마주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외국에서 온 자원병들인 마할(Machal)들이었다. 이들은 인원 측면에서는 많지 않았지만, 숙련된 장교 요원들을 많이 제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 및 신생 이스라엘국에 무기를 밀반입 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마할은 수많은 항공 요원들과 항공기들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전쟁 당시 이스라엘측에 기여한다.

 

 예루살렘에서는 1947년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아랍 폭동이 발생한다. 팔레스타인 아랍 비정규군들은 1947년 후반부터 시작된 장기간의 공성전을 통해 예루살렘에 대한 음식, 물, 연료의 공급을 차단한다. 전국에 폭력과 싸움이 벌여졌고, 여기에는 수송대에 대한 매복공격, 예루살렘 봉쇄, 하이파 제련소 폭동, 구시 엣지온 학살(1948년 1월과 1948년 5월 13일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4월 9일에 유태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하다사 병원 수송대 학살(massacre of a convoy to the Hadassah Hospital)(4월 13일. 의료인원 80여명이 학살당함) 등이 벌어졌다.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은 전쟁을 피하여 자신들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특히 1948년 3월과 4월에는 하이파의 대부분 아랍인들이 피난을 가는데, 이는 유태인들과 영국 관리들이 남아있으라고 부탁하였음에도 벌어진 일이었다. 1948년 4월 22일, 아랍 최고 위원회의 마지막 인원이 떠나면서 이들의 수장은 시오니스트 관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당신들이 떠나게 되면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아랍인들의 피난 행렬은 급격히 불어나 결국 비극적인 피난민 문제로 귀결되게 된다.

 

 영국인들은 분쟁을 막기 위하여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양측 모두 무기와 숙련된 병력이 모자랐으므로 전투의 규모는 제한되엇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명백한 우세를 차지하였다. 1948년 3월의 하가나 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상황이 심각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지역이 문제였다. 1948년 4월이 아랍 군대 개입 이전 시기 전투에서 숫자와 무기가 부족했던 유태인 측으로 승기가 기우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포위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하가나는 성급하게 "D 계획(Plan Dalet)"을 발동시킨다. 이 계획은 영국인들이 떠나고 나서 발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 일반 방어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서는 지하군대가 아닌 정규군 병력과 정규군 전술, 개활지 전투 등이 적용되어야 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회랑(Jerusalem corridor)와 같은 여러 전략적 지역에 있는 마을들에서 "일시적으로" 아랍 민간인들의 소개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유태인 지도부가 이미 아랍 민간인들의 피난과 추방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인용되곤 한다.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유태인들이 아랍인들보다 병력과 무기 측면에서 우세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말기에 IDF에 10만명 병력이 있었고, 전쟁 전에도 하가나(Haganah), 팔마크(Palmach), 이르군(Irgun), 레히(Lehi)에 서류상 등록된 병력이 2만~3만 5천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병력 대다수는 훈련되지 않은 인원들이었고, 무기도 없었다.

 

 유태인측과 아랍측의 병력 및 무장에 대해서 다소 다른 숫자를 내놓는 주장들도 존재한다. 2005년 헤르조그와 가짓이 쓴 글에 의하면, 1947년 당시 하가나에는 450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 중 실제 유효 전투력은 15000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방어 임무에 묶여있었다고 하였다. 1947년 하가나의 전체 무장은 900정의 소총과 700정의 경기관총, 200정의 중형 기관총과 소량의 탄약("3일간 전투를 할 정도의 분량")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가나에는 11대의 민간 경항공기와 40명의 조종사가 있었으며, 이들 중 20명은 영국 공군에서 전투 경력을 쌓은 이들이었다. 수병은 350명이 있었지만 배가 없었다. 이르군과 레히의 인원은 대략 2000명에서 4000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에게는 무기가 거의 없었고 실제 전투 훈련도 받지 않았다.

 

 1948년 2월까지 하가나에는 800에서 3000명 규모에 이르는 다양한 규모의 "여단(brigade)" 6개가 있었다. 동부 갈릴리에는 골라니(Golani) 여단, 서부 갈릴리에는 카르멜리(Carmeli)여단, 남부 해안 및 저지대에는 기바티(Givati) 여단, 샤론 지역에는 알렉산드로니(Alexandroni) 여단, 예루살렘에는 엣지오니(Etzioni) 여단, 텔아비브에는 키르야티(Qiryati) 여단이 있었다. 그 다음달에는 3개의 팔마크 대대들이 여단으로 전환되었다: 북부 네게브에는 네게브(Negev) 여단이, 갈릴리에는 이프타크(Yiftach) 여단이, 예루살렘 회랑 및 예루살렘 지역에는 하렐(Harel) 여단이 위치했다. (2005년 헤르조그와 가짓의 글)

 

 1948년 4월에는 최초의 무기 밀수가 이뤄지면서 하가나는 2만정의 소총을 보유하게 된다. 이들 무기 중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생산된 스텐 기관단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차나 화포는 없었다. 트럭에 철판과 합판을 덧대어 만든 "장갑차(Armored cars)"들은 있었다.

 

 아랍 팔레스타인인들은 조직화된 형태의 병력은 더 적었다. 그러나 수송대 습격이나 구쉬 엣지온에서와 같은 합동 공격을 실시할 때에는 마을 징집병들이나 파자아(Faza'a)에 의지할 수가 있었다. 대부분 아랍 촌락민들에게는 소총이 있었으며, 일부 기관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 무프티 하지 아민 엘 후세이니(Grand Mufti Hajj Amin El Husseini)의 군대는 약 2000명으로 하산 살라메(Hassan Salameh)와 압델 카데르 엘 후세이니(Abdel Khader el Husseini)가 이끌고 있었다. 파우지 엘 카욱지의 아랍 해방군의 경우 3000에서 4000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으며, 1948년 5월 15일 이후에는 만명에 육박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러나 이 독립 전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대는 존 글럽 경(Sir John Glubb)(다른 이름으로 글럽 파샤(Glubb Pasha))이 이끌고 있던 아랍 병단(Arab Legion)이었다. 이 부대는 영국인 장교와 보급품으로 유지되었으며 화포, 포탄, 장갑차, 전차 등을 갖고 있었다. 이 병단은 팔레스타인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으며, 1948년 5월 15일 이전에는 "아랍 병단(Arab Legion)"으로, 그 이후에는 트랜스요르단 병단(Transjordan Legion)으로 불렸다. 이 부대의 규모는 약 7000명에서 만명 가량이었다.


 

독립전쟁 : 도로를 위한 전투 (War of Independence: The battle for the roads)

 

 고립된 모든 유태인 촌락들은 아랍인들의 수송대 공격에 취약해졌다. 가장 심각하고 악명 높았던 봉쇄는 예루살렘 가도에 대한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하여 10만명에 이르는 유태인 거주민들을 굶겨 쫓아내고자 하였다. 물 공급도 차단되었다. 독특하고 엄격한 식량 배급계획과 기타 여러 수단들이 도시를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영국인들은 도로를 통과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이들에게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의 안녕과 안전에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보급품을 제공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태인 수송대의 통과와 도시 방어를 방해하는 데 갖은 술책을 다하였다.

 

 아랍인들은 수송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변 여러 곳에 있는 마을들에서 전사들을 불러들였다. 처음에 유태인들은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인 람레(Ramleh)와 롯(Lod)을 통과하려고 하였다. 운전자들은 람레 직전의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엔진을 최대한으로 켜고 클러치를 2단 기어로 놓은 뒤 행운이 따르기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무대포식 방법은 나중에 남쪽 훌다(Hulda)를 경유하는 우회로가 생기면서 사라지게 된다. 도로에서 중요했던 지점으로는 좁은 애로지역으로 통하는 입구인 밥 엘 와드(Bab El Wad), 다른 말로 "샤르 하게이(Sha'ar Hagay)" - 계곡의 입구 - 라고 불렸던 지점이었다. 이 다음에 인용하는 습격사건은 콜린스와 라피에르가 "오 예루살렘(O Jerusalem)"에 기록한 내용이다.

 

 

 하룬 벤-자지(Haroun Ben-Jazzi)는 한달 전 빌린 양떼를 몰고 기웃거렸던 바 있던 계곡을 올라가면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낮고 끈질긴 엔진 소리였다. 수시간째 벤 자지와 그의 부하들은 이 소리를 기다리며 밤새 불침번을 서며 떨고 있었다. 유태인 집결지점인 훌다에 숨겨놓은 무전 송신기에서 온 메시지에 따르면, 오늘 유태인들이 밥 엘 와드를 통과하여 대규모 수송대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려 한다고 하였다.

 

 벤 자지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백명의 인원들이 도로 한가운데에 나무와 돌로 만든 바리케이트 사면 위에 숨어있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는 도로변에서 15피트 거리에 있었고, 도로에 숨겨둔 지뢰가 선두 차량을 저지시키지 못할 경우 튀어나와 수류탄을 안겨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도로 양측에는 비커스(Vickers) 기관총이 바리케이트에 맞춰 설치되어 있었다.

 

 모셰 라시케스 소위(Lieutenant Moshe Rashkes)는 밥 엘 와드 협곡으로 가는 수송대를 이끄는 장갑차를 탄 채로 그 뒤를 따르고 있는 트럭 행렬들의 검은 모습들을 응시하였다. 이들 40여대의 차량은 훌다 가도를 따라 거의 1마일 가량이나 늘어져 있엇다. 이들 트럭에는 밀가루 수백포와 정육, 정어리, 마가린 등이 들어있는 수천개의 통조림들이 들어있었다: 패널이 떨어져나간 한 트럭에는 지난 몇 주간 예루살렘 사람들이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물품도 실려있었다 - 즉 오렌지였다. 라시케스의 수송대는 단지 일련의 식량 운반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것은 이들이 의지하고 있는 생명선인 바다로의 가도가 아직 이들의 손이 있다는 의미였고, 이 도로가 아직 이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들을 공급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벤 자지가 최초로 수송대를 본 것은 새벽녘이 어렴풋이 밝아오던 무렵으로, 라시케스의 장갑차가 천천히 전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이것을 본 것은 밥 엘 와드의 입구를 표시하는 펌프장(pumping station)으로부터 약 반마일 가량을 지난 지점이었다. 장갑차 안에서 라시케스는 총성을 들었으며, 이어 지뢰를 밟으면서 발생한 폭발로 벤 자지가 설치한 바리케이트가 밀려올라가는 둔탁한 소음을 들었다. 이 시점에서 라시케스는 차량무전기를 통하여 수송대 지휘관이 훌다로 연락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포위되었지만 계속 진행 중이다."

 

 차량들은 곧 가깝게 접근하였고, 벤 자지는 차량들의 철판 총안구 사이의 스텐 기관단총들이 언덕쪽으로 사격하는 것까지 볼 수가 있었다. 벤 자지는 호각을 불어 도로변 도랑에 숨어있던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이들은 차량들에 수류탄을 던쳐 창문들을 닫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차량 안은 이제 숨막힐 정도로 더워졌다. 라시케스의 장갑차에 부딛히는 총알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좁은 총안구를 통하여 라시케스는 간신히 공격자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라시케스는 그의 앞에 대형 폭탄이 있는 것을 보았고, 지뢰의 힘에 의해 배수로 쪽으로 튕겨졌다. 그 뒤를 따르던 두번째 트럭도 다른 지뢰에 당했다. 차량이 도로 축에 직각으로 회전하면서 예루살렘으로의 길이 차단되었다. 종대 전체에 걸쳐 타이어가 터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침 해가 뜨는 가운데, 라디에이터를 피격당한 대략 6~7 대의 차량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라시케스의 '샌드위치' 차량(후미를 방호하던 장갑차를 의미하는 듯함 - 역자 주)이 전방으로 불려와 파괴된 차량의 승무원들을 구조했다. 전복된 차량에서 5명이 간신히 기어나와 이 차량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이어 두번째 트럭으로 향했다. 이 차량은 옆으로 누워있었으며, 장갑화된 운전석쪽 문은 닫혀있었다. 라시케스는 문 아래로 검은 핏줄기가 흘러나와 도로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화물칸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이 불길은 운전석과 그 밑에 있는 연료통으로 향하고 있었다.

 

 라시케스는 2명의 트럭 운전수들에게 외치면서 문을 열라고 하였다. 응답이 없었다. 불은 점차 가까워졌다. 누군가 "이들은 죽었어"라고 말했다. 이제 그의 장갑차는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는 순간, 라시케스는 운전석 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장갑차에서 2명이 비상 출구로 기어나가 트럭으로 기어갔다. 아랍인들이 이들에게 총알 세례를 퍼부었지만, 이들은 문을 열기 위하여 분투했다. 이들 중 하나가 "누군가가 안에서 두들기고 있다!"라고 외쳤다. 라시케스는 이들이 고장난 문과 씨름하는 동안 이들 얼굴에 비친 공포와 실망의 모습을 보았다. 운전석 아래로는 작은 적갈색 방울들이 계속 도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화염은 더욱 거세졌고 이제 기름 탱크 가장자리까지 도달했다. 마침내 라시케스는 2명의 부하들에게 불에서 떨어지라고 명령하였다.

 

 장갑차 내의 모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전복된 트럭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계속 도로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문 손잡이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순간 화염이 연료통에 도달하였고, 운전석은 오렌지빛 화염 속으로 삼켜졌다.

 

 이제 수송대는 완전히 고착되었다. 6~7대의 트럭들이 배수구에 처박혀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벤 자지가 설치한 도로 차단물과 2대의 전복된 차량들로 인하여 이제 전진할 수 있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총성을 듣고 수많은 촌락민떼가 몰려나와 벤 자지 일당에 합류하였다. 위에 있는 나무 등걸로부터 여자들의 끔찍한 전투 함성이 울려댔다. 라시케스는 엉터리 헤브루말로 외치는 비명소리가 언덕 전체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다 : '이츠하크, 이츠하크, 오늘 너희들은 모두 죽었다!'

 

 한시간, 두시간, 6시간이 흘렀다. 더위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장갑차 안에서 사람들은 내복까지 벗어야 했다. 라시케스의 장갑차에서는 탄약이 거의 다 떨어졌다.

 

 마침내 무전을 통하여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움직일 수 있는 트럭들은 후진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상당수는 타이어가 총알에 맞아 터진 채로 움직여야 했다. 장갑차는 이들의 퇴각을 엄호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트럭들은 배수구로 밀어내어 길을 열었다. 라시케스는 그의 장갑차가 훌다로 향하는 도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아랍인들이 언덕 아래로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승리에 겨워 함성을 질렀으며 버려진 트럭들 위에서 날뛰었다. 이들은 미친듯이 밀가루와 정어리, 고기 통조림 등을 가져갔다. 망가진 목걸이에서 흘러나온 진주들마냥 오렌지들이 언덕 사면을 따라 굴러갔다. 이들의 근면한 선조들이 선사시대 성채를 만들 때 돌들을 가지고 가던 것 마냥, 약탈물들을 한아름 안은 촌락민들의 긴 행렬이 언덕 위로 이어졌다. 도로 위의 주디안 고원(Juedan heights)에 인접한 가난한 마을들인 베잇 마쉬르(Beit Mahsir), 사리스(Saris), 카스텔(Kastel)의 촌락민들은 이날 밤 예루살렘의 굶주린 유태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음식들을 가지고 성대한 파티를 벌였다.

 

 하가나는 도로에 19대의 차량을 유기하였으며, 이는 훌다에서 출발한 차량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 수송대는 3월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 중에서 마지막에서 2번째 수송대였다. 그 다음날에는 60여대로 구성된 수송대가 무사히 통과하였는데, 아마도 아랍인들이 승리를 축하하느라 놓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26일에는 아랍인들이 오늘날 가자(Gaza) 지구에 해당하는 네게브 지역 촌락들에 대한 해안 도로를 차단하였다. 3월 27일에는 북부 이스라엘의 예히암 키부츠(Kibbutz Yehiam)으로 향하는 수송대가 습격당하여 탈취당했다. 같은 날, 예루살렘에서 구쉬 엣지온으로 향하는 수송대도 습격당했다. 이 수송대에 예루살렘 사령부가 갖고 있던 거의 모든 장갑차들과 최근 텔아비브에서 온 모든 차량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예루살렘의 유태인 지도자들은 정부에 예루살렘의 상황이 더이상 유지 불가능하다고 불평하였다.

 

 이제 영국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기 전이지만 하가나가 공세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서게 된다. 하가나는 주기적으로 갱신되는 작전 계획을 갖고 있었다. 계획이 개정될 때마다 A 계획(Plan A/ Plan aleph), B 계획 (Plan B/ Plan bet)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개정된 것은 1948년 3월의 것이었고, 명칭은 D 계획(Plan D/ Plan Daled)이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모두 영국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난 이후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으며, 선포될 것으로 상정된 국가를 방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국인들이 떠나기 전에 D 계획을 발동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랍 주민들이 도로 차단과 습격,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이 계획에서는 주요 전략 지점 부근에 사는 아랍 주민들을 일시적으로 추방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생각되었다. 예루살렘의 사례를 보자면, 이것만이 10만명의 사람들을 굶주림 내지는 항복으로부터 구할 유일한 길이었으며, 이는 군사적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일란 페페(Ilan Peppe)와 같은 수정주의자 역사가들은 이 D 계획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계획이라고 왜곡 설명하고 있다.

 

 이제 노력의 중심은 예루살렘으로의 도로에 맞춰졌다. 하가나는 1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사상 최초의 여단 규모 작전인 나쉬혼 작전(Operation Nachshon)을 발동했다. 이 시점의 유태인 방어자들의 상태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작전을 위하여 여러 다른 부대들에서 병력들을 긁어모아야 했으며, 신병들을 동원했음은 물론, 소녀들을 동원하면서 이들에게 전쟁터에 꽃과 시집(poetry books)들을 가져오면 안된다고까지 당부해야 했다. 하가나 사령부에서는 훨씬 적은 규모인 400명 정도를 예상했다.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은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예루살렘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정규군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공세 준비 과정에서 벤 구리온은 당시 하가나를 위한 무기 구매를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가 있었던 에후드 아브리엘(Ehud Avriel)에게 연락(cable)하여 영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이들 무기의 일부만이라도 들여올 방법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4월 1일 밤, 하가나는 남쪽 지방의 한 버려진 영국군 비행장을 접수한 뒤, 전기를 들여와 급조 "관제탑"을 만들었다. 작은 발신기가 설치되어 "하시다(Hassida)"라는 암호를 어둠 속으로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이는 프레디 프레드켄스(Freddy Fredkens)가 대여하여 몰고 오고 있던 DC4 (증언에 따라 기종에 대한 설명은 다르다)를 위한 것이었다. 이 항공기는 임시 활주로에 착륙하여 대량의 체코제 소총과 박격포, 기관총들을 내려놓았다.

 

 나쉬혼 작전 자체가 발동하기 전에, 하가나와 팔마크는 2차례의 중요한 작전을 벌인다. 람레에서는 하가나가 하산 살라메(Hassam Salame)(무프티의 알 푸투와 군대의 사령관)의 사령부를 폭파시켰다. 이 공격으로 살라메 군대가 해안 평야 지대에서 벌어진 하가나의 준비작업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예루살렘 지역에 대한 지원을 못하게 만들었다. 이어 4월 3일에는 하가나-팔마크 군대가 카스텔(Qastel) 마을의 아랍 진지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 카스텔은 예루살렘과 키리앗 아나빔(Kyriat Anavim) 사이에 위치한 아랍인 마을로서 예루살렘으로의 출입을 가로막는 전략 요충지였다. 다마스커스에 있던 무프티 군대의 군사지도자 압델 카데르 알 후세이니(Abdel Khader al Husseini)는 카스텔 공격 소식을 듣고 급거 복귀하였다. 그는 다마스커스에서 무기를 확보하려던 중이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나쉬혼 작전 자체는 4월 6일 라트룬(Latrun)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하가나 군대는 와디 알 사라르(Wadi al-Sarrar)의 캠프와 아랍측 훌다(Arab Hulda), 데어 무헤이신(Deir Muheisin)을 탈취하였다. 밥 엘 와드(Bab el Wad) 지역의 베이트 마흐시르(Beit Machsir) 마을을 팔마크 부대가 공격하였고, 이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산악 도로가 개통되었다. 이제 도로가 개통되었다. 60대의 팔마크 트럭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보급품을 싣고 출발하였으며, 이후 총 5회의 수송대가 통과하였다. 4월 7일과 8일, 아랍 군대는 못자(Motza) 지역에 대하여 반격을 실시하였고, 카스텔의 유태인 군대를 압박하였다. 하가나는 당시 여단 규모의 작전을 실시하고 있었음에도, 카스텔에는 당시 60명의 수비병력만을 남겨둘 수가 있었다. 아랍인들은 수백명의 병력으로 반격을 실시하였고, 유태인들을 마을 외곽으로 몰아냈다. 4월 7일, 압델 카데르 엘 후세이니는 팔레스타인에 돌아온다. 카스텔이 유태인 부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채 그는 자신있게 언덕에 오른다. 발코니에 있던 한 보초가 그를 발견하고 영어로 외쳤다: "거기 당신 누구요?(Who is there?)". 압델 카데르는 대략 "나흐누, 엘 셰밥(Nahnu, el Shebab)" - 이봐 우리들이야 - 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보초는 그를 사살했다. 사살된 자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가 실종된 이후 수천명의 아랍인들이 압델 카데르 엘 후세이니를 찾아 카스텔을 공격해 왔다. 이들이 압델 카데르 엘 후세이니의 시신을 찾은 순간, 조그만 유태인 수비대를 압도하기 직전이었던 이들의 공격은 순간 멈추고 만다. 압델 카데르 엘 후세이니의 시신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화려한 장례식 속에서 매장된다.

 

 이 아랍 영웅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랍 저항군은 일시적으로 전체적 붕괴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간 도로를 감제하는 콜로니아(Qolonia)와 벳 익사(Bet Iksa)는 4월 11일 별다른 저항 없이 함락된다. 그러나 에밀 고리(Emil Ghory)의 영도 하에 아랍인들은 4월 20일 다시금 예루살렘으로의 도로를 차단하기에 이른다. 이번에는 촌락에서 동원한 대규모 "파자(faza)" 공격 대신에 바리케이트와 지뢰, 매복에 의존한다.

 

 이 무렵, 데이르 야신(Deir Yassin)에 무분별한 비극이 발생한다. 여러 증거들로 비춰볼 때, 이르군과 레히가 이곳에서 무계획적이고도 무분별하게 학살을 진행한 것으로 보이며, 전투병력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민간인들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격은 시오니스트 집행부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하며, 공격자들도 학살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시오니스트 단체는 데이르 야신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지만, 이로써 이미 손상은 입은 것이었다.

 

 데이르 야신 공격 사건에 연루된 일부 인원들의 경우, 1930년대에 발생했던 데이르 야신 공격에 대한 복수 개념으로, 또는 1월에 있었던 구쉬 엣지온으로 향하던 수송대에서 발생한 35명의 희생, 또는 3월에 있었던 네비 다니엘이나 예히암에 있었던 매복에 대한 복수 개념으로 했던 것 같다. 데이르 야신에 대한 공격은 D 계획에도 없던 것이고, 나쉬혼 작전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소위 말하는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정책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나쉬혼 작전에서 하가나와 팔마크가 점령한 마을 중 어느 곳에서도 학살은 벌어지지 않았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것들이야 말로 데이르 야신에 대한 진실이다.

 

 데이르 야신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로 아랍인들은 2차례의 천인공로할 유태인 학살의 핑계를 얻게 된다.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이르 야신 이전에는 아랍인들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데이르 야신 이후의 "보복"의 규모는 대단히 크고 추악했다. 최초로 벌어진 일은 4월 13일의 하다사 병원 수송대 학살사건(massacre of a convoy to the Hadassah Hospital)이다. 영국측의 묵인 하에, 의료진과 환자들이 실린 수송대가 매복 공격당했고, 병원장을 포함한 80여명이 살해당했다. 하다사 수송대 학살사건은 명백히 계획적인 것으로서, 매복이란 것 자체가 다른 의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측이 이 공격 계획을 미리 알았으며 의도적으로 이것이 벌어지도록 방치하였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두번재 학살은 1948년 5월 13일에 구쉬 엣지온(Gush Etzion)에서 벌어진다. 이번 경우는 비정규군에 의한 무계획적 학살일 가능성이 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모두 공격자들은 "데이르 야신! 데이르 야신!"이라고 외쳤었다.

 

 데이르 야신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데이르 야신 학살사건 이전에도 아랍인들은 상당 규모로 팔레스타인을 떠나가고 있었지만, 이 사건이 이들의 유태인들의 의도와 전쟁의 성격, 그리고 고향에 남아있는 것에 대한 위험에 대한 선입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소설 '엑소더스'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고향을 떠난 것을 유태인들이 이들의 토지를 접수하게 된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 역자 주). 오늘날까지 아랍인들은 4월 9일의 데이르 야신 사건을 추모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를 확산시키는 데에 이용하고 있다. 인도주의 및 도덕적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를 통하여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얻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아랍측의 경우 거의 가능한 모든 경우 이러한 학살들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이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을 모두 학살하지 못한 것은 단지 이들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의 마지막 몇주 동안, 하가나는 아직 영국인들이 국내에 남아있음에도 D 계획 실행을 결심하여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는 소구경 화기의 밀수로 인하여 촉진되었다. 특히 4월 3일에는 노라 호(SS Nora)가 1만정의 소총을 반입하였다. 북부에서는 파우지 엘 카욱지의 "해방군"이 1948년 4월 4일-15일간의 미시마르 하에멕 전투(Battle of Mishmar Ha'emek)을 통해 격퇴되었다. 이러한 성공들로 말미암아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유태인들이 아랍인들에게 유린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예전에 유엔에 제출했던 신탁통치안을 철회하게 되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유태인 군대는 텔아비브와 하이파, 동부 갈릴리와 예루살렘 회랑 지역에서 상황을 조금 더 양호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많은 경우, 이들은 영국인들이 버린 진지들을 아랍인들이 차지하기 전에 차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예루살렘 전선에서는 나쉬혼 작전의 성공 이후, 하렐 작전(Operation Harel)과 마카베 작전(Operation Maccabee)이 발동되어 예루살렘 회랑을 개통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렐 작전은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로 말미암아 영국인들이 포기할 것으로 알려진 진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하렐 여단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마카베 작전을 통하여 예루살렘 회랑의 많은 진지들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아랍 비정규군들은 5월 15일 이전까지 라트룬(Latrun)을 점령하고 있었다. 하가나는 이 중요한 전략 요새지를 아랍인들이 포기했던 잠시 기간동안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라트룬을 포기해야만 했다. 영국인들이 떠나고 나서 이들의 진지를 점령하려던 예부시 작전(Operation Yevussi)은 성급하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킬숀 작전(Operation Kilshon)은 동일한 의도의 작전이었으며, 독립 직전에 시작되어 전반적으로 성공하였다. 이 작전을 통하여 서예루살렘의 유태인 지역(West Jerusalem for the Jews)의 남부지역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슈피폰 작전(Operation Shfifon)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점령하기 위한 여러 비극적 실패 중의 첫번째였다.

 

 갈릴리 지역에서는 유태인 촌락들이 역시 여러 곳에 퍼져있는 아랍 촌락들에 위치하고 있는 아랍 해방군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분할안에 따라 성립할 유태 국가의 일부가 될 예정이었다. 유태인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촌락들 외에도, 영국인들이 버리고 갈 경찰 요새들과 군사기지들을 접수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마을들을 수비하기 위한 병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베이산 마을과 같은 몇몇 경우에는 가옥 내에 다량의 무기가 발견된 뒤에 거주민들이 떠나야만 했다. 더 자주 일어났던 것은 하가나가 마을을 접수하면 아랍인들이 도망치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피난민들에게 버스를 제공하는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동부 갈릴리에서는 4월 18-19일 경 하가나가 티베리아스(Tiberias)를 점령한다. 이프타크 작전(Operation Yiftach)을 통하여 5월 10/11일에는 사페드(Safed)를 함락시킨다. 아랍 거주민들은 하가나가 들어오기 전에 도주했다. 기데온 작전(Operation Gideon)을 통해 베잇 셰안(Beit Shean) 지역을 소탕했으며, 5월 13일에는 베잇 셰안을 함락시켰다. 마타테 작전(Operation Matateh)을 통하여 티베리아스로부터 부쪽의 메툴라(Metulla)로 향하는 도로가 개통되었지만, 많은 소규모 촌락들은 여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아랍 해방군은 아랍 마을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부 갈릴리에서는 미스파라임 작전(Operation Misparayim)으로 4월 말에 하이파를 함락시켰다. 유태인 지도자들이 남아 있으라고 간청하였음에도 아랍 거주민들은 도주한다. 벤 아미 작전(Operation Ben Ami)을 통해 서부 갈릴리가 청소되었고, 5월 17일에는 아코(Acco)를 함락시킨다.

 

 텔 아비브 지역에서는 챠메츠 작전(Operation Chametz)가 발동되어 텔 아비브와 야포(Jaffo) 동쪽에 있는 아랍 촌락들을 정복하였다. 이곳에는 이라크 자원병 부대가 존재하면서 교통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하가나는 처음에는 야포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랍 국가의 일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파에 있던 아랍 군대가 텔 아비브를 공격하였고, 이르군은 하가나와 별도로 자체적으로 만시예(Manshiyeh)를 공격하였다. 이르군이 곤경에 빠지자 하가나는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4월 말에는 야포를 함락시키게 되었다. 메디나 작전(Operation Medina)을 통하여 아랍측의 크파르 사바(Kfar Saba)를 함락시켰으며, 이로써 5월 13일에는 유태인측 크파르 사바에 대한 위협이 일소되게 되었다.

 

 

아랍 국가들의 침공 (The Arab Invation)

(계속)

 

 

 


 

< 보충자료 : 이스라엘 독립전쟁 다큐멘터리 (영문) >

 

 

(총 10편으로 이뤄졌으며, 주로 이스라엘측 시각으로 1차 중동전쟁을 서술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임.)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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