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이스라엘 독립전쟁, 1948 (2) - 시오니즘 이스라엘 정보센터

박용수 2014. 10. 27. 16:06
< 원문출처 : 시오니즘 이스라엘 정보센터 - Israel War of Independence (http://www.zionism-israel.com/dic/War_of_Independence.htm) >

 

 


아랍 국가들의 침공 (The Arab Invation)

 

 이웃 아랍 국가들의 정부들은 호전적인 선언들을 내놓긴 했지만 실제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별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여론의 압력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싸우는 다른 아랍국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자 하는 생각으로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가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1948년 5월 15일, 다양한 아랍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1948년 5월 14일, 유태인들은 이스라엘국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영국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였다. 이어지는 기간 동안 이웃 아랍 국가들의 군대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상기 지도 참조). 전투는 3개의 짧은 기간동안 이뤄졌으며, 각각은 휴전 협정으로 구분된다 (1948년 6월 11일에서 7월 8일, 1948년 7월 19일에서 10월 15일까지 휴전이 선포되었으며, 10월 22일에도 짧은 휴전이 선포된 바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랍 국가들이 단일 계획에 따라 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들 간에 협조는 전무했다.  아랍 옹호자들은 침공에 관련하여 몇가지 두리뭉술한 주장들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들 중 조금이라도 믿을 만한 것이 있는 것을 예로 들자면,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역을 요르단에 합병시키려는 영국과 요르단의 계획에 대하여 이스라엘 측이 은밀히 합의하였다는 것이다. 골다 메이어(Golda Meir)와 압둘라 국왕(King Abdullah)간 벌어진 비밀 회담 원문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이 계획을 알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분할을 시사한 베르나도트 계획(Bernadotte Plan)을 반대하였으며, 이프라임 카르시(Efraim Karsh)는 이스라엘 측에서 분리된 아랍 팔레스타인 국가 쪽을 더 선호하였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메이어 자미르(Meir Zamir)는 영국이 최소한 초기에는 여러가지 "대 시리아(Greater Syria)" 계획을 지지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영국 측에서 유태인 국가의 창설을 반대한 것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했던 원인 모두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국가에 할당된 잔여 지역이 모두 요르단에 합병되었다.

 

 또 다른 주장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공상적이고 증거가 희박하다: 즉, 아랍 국가들은 단지 아랍 지역만을 방어하고자 하였으며 유태인 지역은 침공하지 않았다거나, 이 지역에 국경선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침공이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유태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 국제 지역에 관한 국경선은 유엔 분할안에서 획정되어져 있었다. 5월 15일 이전에 양측 모두 내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유태인들이 우세해지면서 아랍인들에게 할당된 도시들을 점령하게 된다. 이들 도시들 중에는 특히 야포(Jaffo)가 있는데, 이 도시는 나머지 아랍인 지역들과 고립되어 있었다. 파우지 엘 카욱지의 아랍 해방군은 갈릴리 지역을 감염시켰는데(infested) 이 지역은 유태인들과 아랍인들 모두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그러나 5월 15일, 상황은 바뀐다. "유태인 지역"은 더이상 영국 위임통치령(British mandate) 내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제는 엄연히 유엔 회원국들에게 국경선에 대한 존중을 받아야 하는 주권국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묵인 하에 활동하던 아랍 병단(Arab Legion)은 영국인들이 떠나기 바로 직전에 구쉬 엣지온(Gush Etzion)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의 아랍인 지역을 방어하였는데, 이들은 더 이상 이런 명분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아랍 국가들의 모든 군대들은 국제 국경선을 넘어섰고, 유태 국가의 일부로 지정된 지역으로 진입했다. 레바논인들과 시리아인들은 동부 갈릴리를 공격했다. 시리아인들은 미시마르 하야르덴(Mishmar Hayarden)을 장악하였고, 이어 데가니아(Degania)와 아인 게브(Ein Gev)를 탈취하고자 시도하였다. 트랜스요르단 병단(Transjordan Legion)은 예루살렘을 침공함으로써 국제 지역 경계선을 위반한다. 이들은 5월 말까지 예루살렘의 유태인 지역에 대한 인종청소에 성공하지만, 서예루살렘을 점령하려던 시도에는 실패한다. 이라크인들은 5월 25일 무렵 북-중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크파르 요나(Kfar Yona) 부근의 해안 방향으로 진격하지만 곧 저지당한다.

 

 특히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갖지 못하고 있던 전차, 화포, 장갑차, 항공기에 힘입어 네게브 지역 전체를 절단하고 유태 국가에 할당되어 있던 영토를 점령하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2갈래로 진격하였다. 약 5천명으로 구성된 이집트 주력은 가자(Gaza)를 지나 텔 아비브(Tel Aviv)로 향하는 해안 통로로 진격하였고, 이집트 장교들 휘하의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 자원병들로 구성된 2제대는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이스라엘 평화활동가인 우리 아브네리(Uri Avnery)가 쓴 "필리스티아의 평원에서(In the Fields of Phillistia)"라는 책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텔 아비브에 어떠한 대규모 기갑 공세를 펼쳤는지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실제 국가를 세우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도는 이집트와 요르단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공세에 대한 반격은 최근에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구입하여 도착한 소수의 메사슈미트 항공기를 통하여 5월 29일 이뤄진다. 이 공습은 군사적으로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항공기 손실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이집트인들에게는 큰 인상을 남기게 된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기간 동안의 병력 대조 (Balance of forces in the Arab-Israeli-War of 1948)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기간 전개된 병력들

 

 전쟁 기간 동안 병력 규모와 장비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으며, 양측 모두 전쟁기간 내내 물질적으로 자기편 군대를 증원하였다. 또한 초기 단계의 이스라엘 "병력" 숫자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거의 훈련을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측에는 중장갑 장비나 항공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리아, 이집트, 이라크, 레바논 군대 병력은 단지 전장에 배치된 전투 병력만을 나타낸 데 반하여, 이스라엘과 요르단 병력 숫자의 경우 전방 병력과 사령부 병력,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마을에서 민방위 하는 병력까지도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규군과 동등하게 소총으로 무장한 아랍 비정규군들의 숫자를 추산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병력 규모"의 비교란 다소 무의미하다.

 헤르조그와 가짓은 1948년 5월 15일 당시 무장한 이스라엘인의 수를 4만명 가량으로 추산하였다. 아래 숫자들은 헤르조그와 가짓이 2005년 발표한 글에 나온 것으로, 여기 나온 아랍 병력들의 숫자도 대략 1948년 5월 15일 무렵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부대  병력 수
 아랍 해방군(Arab Liberation Army)  10000
 후세이니/살라메(Husseini/Salameh)  2000
 이집트  7000
 요르단  10000
 시리아  8000
 이라크  10000
 레바논  2000
 조직된 병력 총계  49000
 아랍 비정규군  50000
 총 병력  99000


 베니 모리스는 이스라엘 측이 병력과 장비 측면에서 우세했거나 적어도 동등했다고 주장하는 학자인데, 1999년 다음과 같은 추산치를 내놓았다.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5월 15일 현재 하가나/팔마크 부대는 총 3만명~3만 5천명의 병력을 가졌고, 이르군/레히 병력은 3천명으로써, 이는 헤르조그와 가짓이 예측한 4만명과 대충 일치한다. 6월 무렵이 되면 이스라엘 국방군(IDF)은 4만 2천명, 7월 중순에는 6만 5천명이 되고, 1949년 초봄에 이르러서는 11만 5천명이 된다. 이 시점에 전투는 종결된다. 모리스에 따르면, 이집트군은 최초 5500명이었으며, 병단(Legion)의 경우 6000~ 9000명, 시리아군은 6000명, 이라크군은 4500명, 기타 외국 자원병들과 팔레스타인 비정규군을 합하여 총 28000명이 된다. 이 계산에서 언급된 아랍 국가들의 병력들만 합해도 25000명이므로, 레바논군(4개 대대)과 모로코군(대략 800명이었음), 아랍해방군과 후세이니 군대, 그리고 아랍 비정규군을 다 합한 숫자가 3000명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지나치게 적은 숫자이다. 모리스는 또한 7월 무렵의 아랍 총병력은 4만명이었으며, 10월에는 5만 5천명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리스에 따르면, 2차 휴전이 종결될 당시 이스라엘에는 12개 여단이 있었다고 했다. 이 병력은 36000명의 전투병력에 해당하며, 이는 적군 예상치 55000명보다 적은 숫자다. 어쨌든 10월 경에 이르러서는 이집트 전선을 제외한 전쟁은 거의 종막을 치닫고 있었다. 이스라엘 내각은 9월 26일 경, 요르단인들과는 더이상 교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갈릴리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레바논인들과 ALA를 몰아내는 소탕작전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미쉬마르 하야르덴에서 시리아인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모리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는 약 300대의 장갑차 및 하프트랙이 있었고, 전차 15대, 화포 150문, 스핏파이어와 메사슈미트 109(또는 체코산 복제품인 아비아) 등의 전투기 10여대, 폭격기 16대와 경수송 항공기 50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최소 132대의 경전차와 3대의 셔먼전차가 있었고, 시리아인들에게는 45대의 르노 R-35경전차와 R-39 경전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실제 참전했던 12개 이스라엘 여단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번  여단명  비고
 1  골라니(Golani)  동부 갈릴리
 2  카르멜리(Carmeli)  서부 갈릴리
 3  알렉산드로니(Alexandroni)  샤론 지역 및 북쪽지방
 4  키리아티(Kiriati)  텔 아비브
 5  기바티(Givati)  남부 해안 및 저지대
 6  엣지오니(Etzioni)  예루살렘, 다비드 샬티엘(David Shaltiel) 휘하
 7  제 7 기계화(Seventh Mechanized)  쉴로모 샤미르(Shlomo Shamir) 지휘. 나중에는 벤 덩클만(Ben Dunkleman)이 지휘.
 8  제 8 기갑(Eighth Armored)  -
 9  오데드(Oded)  우리 요페(Uri Yoffe) 지휘
 10  하렐(Harel)  예루살렘 회랑 및 예루살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지휘. 3개 팔마크 대대(약 1500명).
 11  이프타크(Yiftach)  3개 팔마크 대대(약 1500명). 북부 네게브 지역. 삼손의 여우(Samson's Foxes) 부대 -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 코만도 부대(제 54 정찰대)- 보유.
 12  하네게브(Hanegev)  최초 2개 대대의 팔마크 병력 800명으로 시작. 최종적으로 4개 대대(1600명에서 2000명 가량)으로 확대됨. 사령부 대대 및 정예 네게브 비스트(Negev beasts) 짚차 코만도 부대 보유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기간의 군사장비 대조(Balance of Military Equipment in the Arab Israeli War of 1948)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 당시 중장비 부족으로 고생하였다. 모리스의 1999년 글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는 12대의 장갑차가 있었으며, 이들 중 4대에는 화포가 있었다. 그리고 3대의 전차와 3대의 하프트랙, 3대의 정찰차량이 있었다. 5월 말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10대의 전차와 10여대의 하프트랙을 추가로 확보한다. 모리스는 당시 이스라엘군에 "백여대의 장갑 트럭과 장갑병력수송차량"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가 시인한 바와 같이, 이들 대부분은 자체적으로 트럭 위에 금속판과 합판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제작한 차량들이었다. 모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5월 15일 당시 이스라엘군에 4~5문의 "소형" 야포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건 분명히 매우 작은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는 대부분 문헌에서 최초의 이스라엘 화포 운영으로 기록되는 것이 5월 20일 데가니아(Degania) 방어전 당시 사용한 1차대전 이전의 유물인 65mm "나폴레온칙(Napoleonchik)" 포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5월 말에 이르르면 이스라엘군에는 45문의 화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놀라운 화포 보유량에 관한 실상에 대해서는 2005년 헤르조그와 가짓이 설명한다.

 ... 한편 '포병' 부대는 히스파노-수이자(Hispano-Suiza) 20mm 화포 몇 문과 조준기도 없는 프랑스제 65mm 곡사포 몇 문을 입수했는데 이들은 모두 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프랑스제 65mm 포들은 골동품으로서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으며, 일명 "나폴레온칙"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물건들을 가지고 모리스와 기타 일당들은 이스라엘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하가나/IDF에는 75정의 PIAT 대전차 로켓과 700문의 2인치 박격포, 100문의 3인치 박격포(2005년 헤르조그와 가짓의 글에 따르면 195문의 3인치 박격포), 그리고 소수의 "다비드카(Davidka)" 박격포가 있었다. 다비드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억지로 만든 사제 무기로서, 화포와 박격포의 중간 쯤에 해당하고, 그 물리적 효과는 다소 커다란 폭죽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캐논포(canon)"가 제조되었는데, 이는 전시용으로 놓여있었던 옛 터키 대포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스라엘에는 정찰 및 수송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약 28대의 경비행기가 있었다. 이들 중 일부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초보적인 소사 및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스라엘에 첫 본격 전투기가 도착한 것은 5월 말에 이르러서였다. 이것들은 체코 AVIA S199들로서, 이는 메사슈미트 bf 109g의 복제판이었다. 이들 항공기에는 본래 폭격기용으로 고안된 대형 융커스 엔진과 프로펠러가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모리스는 아랍군대에는 75대의 전투 항공기와 40대의 전차, 500대의 장갑차량, 140문의 야포, 220문의 대공포 및 대전차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 중 대다수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사용 불가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야드 모르데차이(Yad Mordechai) 등에서 이집트인들이 실시한 효과적인 포격이나  시리아인들이 미시마르 하야르덴 및 데가니아에서 실시한 포격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설명은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한편 요르단인들은 라트룬에서 영국인들로부터 최상의 상태였던 25파운드 대포를 다수 획득하였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을 포격하였다. 그러나 5월 말 이후로 영국인들이 요르단인들에게 더이상  탄약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르단인들에게 탄약이 부족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1948년 10월 경, 이스라엘 공군(IAF)이 조종사들의 우수한 기량(surfeit)으로 인하여 "즉각적인(immediate)" 공중 우세를 가짐으로써 이집트 전차들을 압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5월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므로, 왜 이러한 사실을 "즉각적인" 효과라고 표현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통계치보다는 실제 참전 용사들의 증언들이 당시의 훈련과 장비에 관해서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 글(Memoirs of a Palmach volunteer, 1948)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제 1차 시기 동안 벌어진 작전들

 

 6월 10일까지의 1차 시기 전투 중에서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크파르 다롬(Krar Darom)(수비대 30명)과 니림(Nirim)(수비대 45명) 방어전. 5월 15일 대규모 이집트군의 공격을 막아냄.

 

 쩨마크 함락(Fall of Tzemach) -  5월 18일 - 시리아인들이 유태인 영역 내의 촌락을 유린하다.

 

 야드 모르데차이 전투(Battle of Yad Mordechai) - 5월 19일-24일 - 남부 이스라엘의 이 키부츠에는 제대로 무장되지 않은 약 110명의 수비대가 있었고, 때때로 팔마크 1개 소대와 다른 2개 분대의 지원을 받았다. 2개 대대 및 전차, 화포, 항공기를 동반한 이집트군의 대규모 협동 공격을 막아내었다. 5월 24일 야드 모르데차이는 함락되었으며, 거주민들은 도주하였다.

 

 5월 20일 - 시리아인들이 데가니아 키부츠를 전차로 공격하다 :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을 이용한 데가니아 방어 성공으로 이스라엘인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남부 갈릴리에 대한 시리아의 침공이 저지되다.

 

 이라크인들이 게울림을 점령하다(Iraqi capture of Geulim): 이들은 이후 크파르 요나 및 아인 베레드로 진격함. (5월 25-28일)

 

 빈 눈 A 작전(Operation Bin Nun A)(5월 25일) 및 빈 눈 B 작전(Operation Bin Nun B)(5월 30/31일) - 예루살렘 가도에 있는 라트룬(Latrun)을 점령하려던 이스라엘 측의 시도. 실패로 돌아감.

 

 에레쯔 작전(Operation Erez)(5월 28-30일) - 와디 아라 도로(Wadi Ara road)를 개통하고 남부 갈릴리 지역을 석권하다. 나중에는 메기도(Megiddo)와 라준(Lajun)도 포함된다.

 

 예루살렘 구시가의 유태인 구역이 트랜스요르단 병단에게 함락되다(Jewis quarter of Old City of Jerusalem falls to Tranjordan legion): 5월 28일. 거주자들은 강제 제거당함.

 

 이스라엘 공군의 등장(Debut of Israel's Air Force). (5월 29일). 4대의 메사슈미트 109(AVIA S199) 항공기의 "폭격"으로 이집트군의 진격이 텔아비브 가도 상에서 저지되다.

 

 팔레솃 작전(Operation Paleshet)(6월 1일-3일) -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이집트군에 대한 반격작전. 실패로 돌아감.

 

 이츠하크 작전(Operation Yitzhak)(6월 1일-3일) - 예닌(Jenin)을 함락시키고 이라크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려던 것으로, 실패로 돌아감.

 

 네그바 1차 전투 (First Battle of Negba)(6월 1일-2일) - 전차, 보병, 장갑차로 공격한 천여명의 이집트군을 140명의 수비대가 격퇴하다.

 

 북부 갈릴리 지역의 시리아 및 레바논군 공세 (6월 6-10일) - 미시마르 하야르덴이 시리아인들에게 함락되다(6월 10일). 방어하던 주민 몇 명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다. 휴전 협정 당시 미시마르 하야르덴은 이스라엘에 할양되었다.

 

 남부의 니차님(Nitzanim)이 이집트군의 대규모 전차 공격에 함락되다(6월 7일). 수비대 일부는 탈출하였으나, 대부분은 포로가 되다. 한편 빌나 게토(Vilna ghetto) 항쟁 당시의 영웅이자 기바티 여단의 문화장교였던 아바 코브너(Abba Kovner)는 니차님을 지키던 수비대들을 비겁자들의 전형이라고 꼽는다. 이는 나중에 수정된다.

 

 요람 작전(Operation Yoram) - 라트룬을 탈취하려던 이스라엘의 3번째 시도. 실패로 돌아감. (6월 8/9일)

 

 버마 가도(Burma Road)가 개통되다 (6월 10일) - 라트룬의 요르단군 진지를 우회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이 도로가 완성됨으로써 예루살렘 봉쇄가 풀리게 된다. 이 작업은 단순한 도로 포장 작업이 아니었으며, 이 지역을 감제하는 여러 아랍군 진지들을 소탕해야 했고, 가끔씩 병단(Legion)의 화포 및 정찰대가 작업장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의 1차 기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루살렘 봉쇄와 이집트군의 텔아비브로의 진격으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공세에 더하여, 아랍 병단은 라트룬의 요새화된 진지를 활용하여 유태인측 예루살렘에 대한 수송대 이동을 차단하였다. 트랜스요르단 아랍 병단은 유태인측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하여 시도하긴 하였으나, 노틀담 호스피스(Notre Dame hospice) 부근에서의 격전을 통하여 격퇴당한다. 예루살렘은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와 303호에 근거하여 국제지역화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라트룬의 요르단군 진지는 탈취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하가나나 IDF로서는 예루살렘으로의 통로를 무력으로 개통할 능력이 없었다. 이 문제는 결국 우회도로인 "버마" 도로로써 해결된다. 이 도로는 아랍 특화점을 우회하여 6월 10일 완공된다. 이는 절망적 상황에서 탄생한 창의력의 발휘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6월 10일 1차 휴전 이전의 유태측 군대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구원은 벤 구리온이 선포한 전쟁의 주요 목표였다. 아랍인들이 만든 장애물들이나 아랍 병단에서 라트룬에 설치한 요새지는 사실 별게 아니었다. 항공력과 포병 지원을 동반한 2개 여단이면 회랑 지역의 아랍인들을 쓸어버리고 도로를 개통할 수 있었다. 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하가나/팔마크 부대는 이런 진지들을 뺐고 뺐기기를 거듭하는데, 이는 이들을 유지할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2만, 3만, 6만명의 하가나 병사들이란 것은 단지 서류상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라트룬을 탈취하기 위한 3천명의 훈련된 병력 내지는 예루살렘 가도를 방어하기 위한 6000명의 병력도 조달할 수가 없었다.

 


 1차 휴전과 알타레나호 사건 (The first cease fire and the Altalena)

 

 6월부터 1개월 가량 실시된 휴전으로 양측 모두 재편성의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시기는 전쟁에서 결정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아랍측이 이 휴전을 받아들인 것은 큰 실책이었는데, 이는 아랍측으로서는 추가 무기 도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측은 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병력들을 모병하고 훈련시켰으며, 재조직을 실시한다. 이스라엘은 협정 조건과는 어긋나지만 이제 대량의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으며, 6만명의 실제 전투병력을 양성할 수 있었고, 이로써 병력과 무장에 있어서 처음으로 우세에 놓이게 된다. 휴전으로 예루살렘 역시 구원받았는데, 당시 예루살렘은 아사 직전이었다. 긴 휴전 기간 동안, 지하군대였던 하가나, 팔마크, 이르군, 레히가 통합되어 이스라엘 국방군(IDF)가 탄생한다. 이르군의 수정주의 운동가들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알타레나(Altalena)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반입하고자 하였다. 이르군 지도자인 메나헴 베긴(Menahem Begin)이 여기에 실린 무기들을 양도하기를 거부하자, 이스라엘 수상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방군(IDF)으로 하여금 알타레나 호를 격침시키도록 지시한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은 이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향해 가던 대량의 무기 수송선들은 IDF/하가나의 방해로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아랍 국가들은 전쟁에 더 이상의 인력과 자금을 사용하기를 꺼려했다.

 


10일간 (The Ten Days) 

 

 최초의 휴전 기간이 종료된 것은 7월 9일이다. 7월 10일에서 7월 18일 사이에 벌어진 이스라엘의 큰 승리로는 다니 작전(Operation Dani)를 통하여 롯 공항(Lod airport)와 람라 지역을 포함하는 "회랑" 지역을 탈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IDF는 네게브로의 진격이나 북쪽의 시리아 침략자들을 몰아내는 것, 예루살렘 구시가를 탈환하는 것 등에는 실패한다. 7월 17일 저녁에 2차 휴전이 발효된다.

 

 '10일간' 기간 이전에 주어진 1개월간의 회복기를 통하여 탄약과 병력을 획득하는 데에는 충분하였으나, 군대를 제대로 훈련시키기에는 부족했음이 드러난 것이엇다. 이스라엘 공군이 실체를 갖게 되긴 하였지만, 실질적인 큰 도움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였으나, 이것들을 사용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이들을 적진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이런 무기들을 사용할 줄 알게 된 병사들을 집중시켜 협조된 공격을 이뤄내도록 하는 것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아랍 군대들은 네게브 지역과 북부 지역, 예루살렘 지역에 대하여 통제 내지는 접근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시리아인들이 미시마르 하야르덴을 유린하였고 생존한 수비대원들은 포로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휴전 조약까지 미시마르 하야르덴을 돌려받지 못했다. 아랍 해방군은 아직도 북부를 돌아다니며 교통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팔루자(Faluja) 포켓을 장악했으며, 후방에서 적들을 괴롭히고 있던 크파르 다롬(Kfar Darom)과 같은 이스라엘 거주지들을 공격했다. 우측 지도는 대략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분할안을 통해 주어진 영토의 상당수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8년 6월 당시 유엔 중재자였던 폴케 베르나도트 백작(Count Folke Bernadotte)이 전쟁 종식을 위하여 처음 제시한 중재안은 이러한 군사적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네게브 지역 대부분을 절단하였고, 시리아인들은 북서 갈릴리 지역의 유태인 거주지 및 영토들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요르단인들은 예루살렘에 쫓겨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스라엘이 사전 계획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신속하고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냈다는 이야기는 단지 헛소리에 불과하다.

 

 "10일간"의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작전들이 있었다. 다니 작전과 데켈 작전을 제외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랍인들을 몰아내려던 실패한 작전들이었다.


 가자(Gaza)의 크파르 다롬(Kfar Darom)이 휴전 종료 전에 소개되다. (7월 8일)

 

 다니 작전(Operation Dani)(7월 9일-18일). 중부 이스라엘에 있는 롯 공항(Lod airport)과 람라를 정복하다. 대부분 지역에서 거주민들은 도주하거나 추방시켰다.

 

 데켈 작전(Operation Dekel)(7월 9일-18일). 나자렛(Nazareth)과 남부 갈릴리를 탈취하다. 나자렛의 아랍 주민들은 남아있었다.

 

 브로쉬 작전(Operation Brosh)(7월 9일-18일). 북서 갈릴리 지역의 미시마르 하야르덴에 있던 시리아인들을 몰아내려던 시도가 실패하다.

 

 아브 피어 작전(Operation Av Peer)(7월 8일-12일). 이집트인들을 몰아내고 이라크의 엘 수이에단(el Suiedan)을 함락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하다.

 

 베텍 작전(Operation Betek)(7월 11일-12일). 서부 갈릴리에서 알렉산드로니 여단이 로시 하인(Rosh Ha'ayin)을 이라크인들로부터 되찾다.

 

 2차 네그바 전투(Second Battle of Negba)(7월 12일). 다시 한번 소규모 수비대가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다. 이 전투는 "10일간"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과의 싸움에 있어서의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마지막 라트룬 공략시도 실패(7월 15/16일). 이 전투는 다니 작전의 일부였다.

 

 케뎀 작전(Operation Kedem)(7월 16/17일). 예루살렘 구시가의 유태인 지역을 탈환하려던 마지막 계획적 공격. 실패로 돌아갔다.

 

 '침략자에게 죽음을' 작전(Operation Death to the Invader)("Mavet Lapolesh")(7월 17-18일). 이집트인들을 네게브에서 몰아내려던 작전. 실패로 돌아감.

 


 국제 정치 상황은 별볼일 없었던 군사적 성과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그리 유리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를 옹호했던 반면, 영국은 유태인 국가의 크기를 줄이거나 아예 없애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들은 유엔 중재자였던 폴케 베르나도트에게도 반영된다. 6월 당시, 베르나도트는 유태국가와 아랍국가의 구분을 없애자고 제안하였다. 즉 유태인들이 요르단 영토의 일부에서 자치령을 갖고 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민자 유입은 제한되며 네게브와 예루살렘은 아랍측 손에 넘어간다. 아랍인들은 이런 제안을 거부할 만큼 군사적으로 자신감이 있었고, 유태인들 역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베르나도트는 1948년 9월 16일 두번째 계획을 제안한다. 즉 유태국가의 존재는 인정하되, 과거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지역의 75%를 트랜스요르단에 할양하며, 이를 통하여 트랜스요르단으로 하여금 지중해로의 통로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이는 영국의 과거 "대 트랜스요르단" 계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베르나도트는 이 전쟁을 통하여 아랍 피난민 36만명과 유태 피난민 7천명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에게 배상을 해 줘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 계획에 대해서도 아랍과 유태인측 모두 거부하였으며, 베르나도트는 결국 레히 측에 의하여 암살당한다. 한편 9월 말에는 가자(Gaza)와 서안 지구(West Bank)에 각각 별도의 경쟁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 시도가 있게 된다.

 

 

 2차 휴전 이후의 전쟁의 재개(Resumption of the war after the second cease fire) 

 

 1948년 10월 15일, 2차 휴전이 종결된다. 이집트인들과의 전쟁은 정적으로(static) 진행되었으며, 팔루자 포켓 지역에 있는 이집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이스라엘인들의 치열하고도 또한 실패로 돌아간 공세들로 특징지어진다. 이 무렵, 이스라엘 군대는 명백히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요압 작전(Operation Yoav)(10월 15-22일)을 통하여 베르셰바(Beersheba)를 함락시켰고, 네게브 북부 및 서부의 이집트 군대의 상당수를 몰아냈다. 10월 22일 유엔에 의해 선포된 휴전은 준수되지 않았다. 10월 28일, 이집트인들이 이스도드(Isdood)를 포기하였으며, 11월 6일에는 마즈달(Majdal)에서 퇴각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아사프 작전(Operation Assaf)(12월 5-7일)을 통하여 이집트인들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이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간의 전쟁은 이집트 영토로 번져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게 된다. 이스라엘군은 영국군 항공기와 교전하게 되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1949년 1월의 공중전에서는 이후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에제르 바이즈만(Ezer Weizman)이 조종하던 이스라엘 공군기가 영국인이 조종하던 스핏파이어를 격추시킨다. 하이람 작전(Operation Hiram)(10월 28-31일)에서는 파우지 알 카욱지가 이끄는 아랍 해방군이 마침내 갈릴리 지역에서 축출되었고, 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이제껏 점령했던 영토 대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제 레바논으로 진격한다.

 

 우브다 작전(Operation Uvda). 이 작전은 3월에 벌어졌으며, 이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실행된 작전이다. 이 작전 결과 에일랏(Eilat)을 함락시켜 깃발을 휘날릴 수 있었다. 휴전 협정으로 향후 19년간의 이스라엘 국경선이 결정된다. 이는 우측 그림과 같다. 아랍 국가들은 이러한 "녹색선(green line)" 국경선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타 국가들도 이스라엘이 추가 영토를 확보한 6일 전쟁(Six day war) 이전에는 상당수 인정하지 않았다.

 


 아랍의 패배와 난민 문제의 발생(The Arab defeat and the birth of the refugee problem)

 

 최초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조직과 정보 측면에서의 승리 및 시의적절한 무기 밀수를 통하여 유태인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었다. 아랍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조직화하고 뭉치는 데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당초의 우세를 상실하게 되었다.

 

 유엔에서는 1948년과 1949년 당시 아랍인들과 유태인들 사이에 일련의 휴전 협정들을 주선하였었다. 유엔 총회 결의안 194호에서는 적대 행위의 중단과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난민들의 귀환을 촉구하였다. 이 결의안은 1948년 12월에 통과되었으며, 베르나도트 백작의 암살에 따른 침통함도 반영하고 있다. 이 결의안에는 베르나도트 백작이 주장했던 난민들의 귀환 요구도 반영되어 있다. 안보리 결의안 62호에서는 휴전 협정의 적용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영구적 평화로 이어질 것이었다.

 

 1949년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당초 유엔 분할안에서 제시된 경계선 이상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 요단강(Jordan river) 서쪽의 총 78% 영역을 갖고 있었다. 유엔은 예루살렘을 국제지역화 하기 위한 노력을 더이상 진지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 지역은 이제 요르단과 이스라엘에 의해 분할되었고, 철조망과 무인지대를 통해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랍 국가로 할당되기로 했던 나머지 영토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이 나눠갖는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Gaza Strip)을 갖고, 요르단은 서안지구(West Bank)를 갖는다. 약 72만 6천명의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에서 도주 혹은 추방당하여 주변 아랍국들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된다.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기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휴전 협정으로 확정된 이스라엘 국경선은 국제적으로 합법적인(de jure) 국경선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국경선은 1949년 휴전 협정의 "녹색선(green line)"을 따라 획정된다. 이러한 국경선은 아랍 국가들에게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인정하기 거부하였다. 적대행위는 중단되었지만, 난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10만명이 넘는 난민들의 귀향을 거부한 한편으로, 아랍 국가들도 유태 국가의 인정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협상은 깨지게 된다.

 

 휴전 협정에는 여러 비무장지대들의 설정도 포함되어 있다. 시리아 북쪽 국경을 따라 존재하는 이 지역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이 지역을 경작하려고 시도하면서 지속적인 분쟁의 원천이 되었다. 아랍 문헌들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이 이 지역들을 "합병"하려는 시도를 하였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베니 모리스에 따르면, 이 비무장지대들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영토에 속한다.

 

 수많은 아랍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존재와 함께 역사에 대한 창의적인 조작들로 말미암아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아랍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하려고 계획했다는 비난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다비드 벤 구리온과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관한 조작된 몇몇 언급들을 제외하고는, 이를 뒷받침할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난들에서 자주 언급되는 D 계획(Plan Daled)의 경우 전략적 위치에 있으며 점령이 불가능한 마을들에서 일시적 소개 작전을 계획한 바는 있다. 대다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발적으로 떠난 것이다. 이는 특히 하이파(Haifa)에서 잘 나타났는데, 이곳에서는 유태인 지도자들이 주민들에게 남아있으라고 간청까지 했었다. 또한 티베리아스(Tiberias)나 기타 아랍 해방군이 점령했던 북부 여러 촌락들을 봐서도 알 수 있다. 베르셰바와 사페드 지역에서는 유태인 군대가 도달하기도 전에 모든 아랍인들이 도주하였다. 이스도드와 마즈달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철수함과 동시에 대부분 주민들이 달아났다. 특히 이스라엘에 저항하지 않거나 오히려 협조하기까지 했던 아부 고쉬(Abu Gosh)나 나자렛(Nazareth), 갈릴리 지역의 여러 드루즈 족(Druze) 마을들은 무사했다. 만약 주민들이 추방된 사례가 있다면, 이는 인종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안보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쫓아낸 것이었다. 비록 목격자라는 것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목격자 증언을 통해서 특정한 추방이나 학살에 관한 것이 증명된 바는 하나도 없다.

 

 반면에 아랍측에서는 조직적으로 인종청소를 실시하였다. 아랍 군대가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는 유태인들이 남아있지 못했고, 전쟁 후 귀향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이는 구쉬 엣지온과 예루살렘, 그리고 가자 지역 마을들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1947년 당시, 아랍 연맹(Arab League)에서는 모든 아랍 국가 내에서 유태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려는 계획을 준비하였다. 이 계획 내의 조항들을 살펴보면, 특별 세금의 징수나 재산 압수, 시민권 박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계획은 여러 아랍 국가들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 국가로부터 대규모 유태인 이민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80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아랍 영토에서 탈출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당초 분할안에서 제시된 영토보다 22% 많은 영토를 얻는 대신, 민간인 1천명을 포함한 6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사상자를 낸다. 이집트인들은 공식적으로 1400명의 사망자를 인정하였으며, 요르단과 시리아의 경우 수백명을 잃었고, 레바논인들은 수십명 가량을 잃었다. (모리스의 1999년 글)

 

 아랍측의 군사적 패배는 이들이 나중에 겪을 1956년의 시나이 전역(Sinai Campaign)(2차 중동전쟁)이나 6일 전쟁(Six day War)(3차 중동전쟁)에 비하면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당초 비무장한 유태인들 쯤은 몇 주 내로 유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한다면 진정 재앙, 다른 말로 "나크바(Nakba)"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온 아랍 난민들을 흡수하는 데 거부하고, "시오니스트 일당"들을 말살시키는 데에 지속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진정한 비극과 재앙이 발생하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인들에게 인종청소당한 지역에서 탈출한 소수의 유태인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반 유태주의를 피해 도망온 수많은 유태인 이민자들과 아랍 국가들에서 조직적으로 추방당한 유태인들을 받아들인다. 아랍 국가들은 패배를 인정하기를 꺼렸으며, 팔레스타인 내의 유태 국가를 인정한 유엔 포고를 받아들이는 것도 꺼려하였다. 아랍 연맹(Arab League)의 탄생 동기들 중 일부에 불과하였던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제 아랍 정치의 핵심적인 요소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 원동력이 된다.

 

 아랍 국가들이 1948년 전쟁에 참가했던 주요 원인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용하여 여론이 지배층에 호의적이 되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정작 행동할 시기가 되자, 이들은 스스로의 언사에 묶여버리는 셈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대중들이 이들을 변절자라고 비난하며 전복시켰을 것이다. 1948년 패배 이후,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아랍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문제를 민족주의 열망을 유지시키는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혁명이 벌어져 실패한 지도자들을 권좌에서 몰아냈으며, "시오니스트 일당들"을 소탕하고 "1948년의 결과를 뒤집는" 것을 약속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하여 대립을 조장하였고, 시오니스트에 대한 증오 측면에서 서로 경쟁하였다. 그러나 1967년 나세르가 했던 것처럼, 이들은 다시 이들로서는 관리할 수 없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스스로의 언사에 의해 스스로를 얽매게 되었고, 군중들은 이제 행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생략)

 

헤브루/아랍어 발음 표기법
(생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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