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개념, 이론

[스크랩] [번역] 방향성 있는 망원경 / 1985,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 (2)

박용수 2014. 10. 27. 16:24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griffin.pdf) >

 

 



제 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쟁 기술에는 기술적 혁신이 벌어지게 된다. 그 결과, 지휘관들 및 군사 이론가들은 기동전(mobile warefare)과 관련된 도전들을 극복할 방법들을 모색하게 된다. 새로운 전술(tactics)과 기술(technology)들은 분명히 더 많은 분권화(decentralization)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분권화는 전장 혼란(battlefield chaos)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분권화 경향을 상쇄시키기 위하여 지휘 및 통제를 향상시킬 효과적이고 예술적인 방법(effective state-of-the-art means)이 절실했다. 기존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초기의 작전 경험은 통상적인 지휘 채널 밖에서 실제 전투 조건에 관한 첩보를 얻을 필요성을 강조시켰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대다수 주요 군대들은 전쟁 수행에 있어서 현대적이되 전통적인 방식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을 활용하게 된다. 독일군의 참모 첩보단(staff information service), 소련의 STAVKA "곡예비행(flying circus)" 관찰자, 미국의 신호첩보 감시(signal information and monitoring, SIAM) 부대, 영국의 팬텀단(Phantom service) 모두 비슷한 임무들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임무 수행 방법에 있어서 조금씩 서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어쨌든 전쟁 초기의 추축국과 연합국의 전문 문헌들은 연락임무(liaison)를 기동전에서 전반적인 지휘 및 통제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강조하였고, 이러한 부대들 모두에서 연락임무는 주요 책무(primary responsibility)였다.

 

 그러나 연락장교(liaison)의 효율성은 전적으로 지휘관이 이 시스템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2차대전 시기 군대에는 모두 연락장교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군대는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어떤 군대는 잘 활용했다. 제대로 활용된 경우, 이들 장교들은 몇몇 유명한 야전지휘관들이 적용한 지휘 및 통제 시스템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각국 군대의 간전기에 서술된 교리들에서의 연락장교 시스템들은 기본 구성 및 이론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야전에서의 실제 활용 측면을 살펴보면, 종종 지휘관들이 이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상대적으로 무능하고 덜 훈련받은 장교들이 연락장교 임무를 맡게 되는 경우에 잘 발생했다. 반면 연락장교 임무의 중요성을 잘 파악한 지휘관들이 유능한 젊은 장교들을 방향성 있는 망원경 임무를 수행하도록 임명한 많은 사례들도 존재한다: 롬멜의 부관들(lieutenants), 만토이펠의 "카우보이들(Cowboys)", 패튼의 제 3군 참모 연락장교(staff and lisison officers), 몽고메리의 제 21 집단군 연락장교(21st Army Group liaison officers) 등을 들 수 있다.

 

 전쟁 초기에 밝혀진 사실 중 하나로, 무전기(radio)를 전방활동의 통제 및 조율을 위한 주 수단으로 삼게 되면, 지휘 및 통제 수단으로서의 연락장교의 전반적인 효율성이 향상된다는 점이 있었다. 연락 순찰대(liaison patrols)는 총사령부로 전술적 상황을 보고하기 위하여 장거리 무전기를 활발하게 사용하였다. 영국 육군의 팬텀단과 미육군의 SIAM 중대는, 보다 적시적(timely)이고 세부적인(detailed) 데이터를 총사령부에 제공함으로써, 통상 통신채널을 통해 오는 첩보들을 보완하도록 설계된 부대들이었다. 양개 부대는 기동 순찰대(mobile patrols)에 지휘연락장교(command liaison officers)들을 포함시켰고, 이들의 일반 책무들은 과거 부관(aides-de-camp)이나 일반참모연락장교(general staff liasion officers)들과 그야말로 동일하였다.

 

 

팬텀단(Phantom)

 

 팬텀단은 1939년 총사령부 연락연대(General Headquarters Liaison Regiment)로 시작되어 1939-40년 기간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적용되었다. 팬텀 순찰대(Phantom patrols)는 통상적인 보고 채널을 우회하여 군단 및 군 사령부에 직접 첩보를 제공하였다. 또한 아군의 부대지휘망 무전을 감청하는 방법으로 첩보를 얻기도 하였다. (당초 이렇게 아군 무전을 감청하는 부대로 "J"단("J" service)이 별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J"단의 감청 부서가 1944년에 팬텀 순찰대로 통합된다.)

 

 팬텀단의 제 1의 임무는, 과거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군사령부 및 중간 사령부들에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그리고 시의적절한 전방 첩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휘하 주요 지휘단계마다 순찰대(patrols)를 배치시키는 것을 활용했다. 그 결과, 과거의 시스템들과는 다르게, 팬텀단의 경우 사단에서든 군단에서든 똑같은 첩보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첩보는 횡적인 주변 지휘부들로 똑같은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팬텀 순찰대는 사단 사령부나 사단 내의 전방부대에서 활동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소스에서 첩보를 얻은 뒤에, 팬텀 순찰대는 이 첩보를 암호화하여 팬텀 대대본부(Phantom squadron headquarters)로 발송했다. 팬텀 대대본부는 통상 군사령부(army headquarters)와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필요한 경우, 이 정보는 집단군(army group)에 위치하고 있는 팬텀 연대본부(Phantom regimental headquarters)로 재발송되었다. 일단 정보가 해독되고 검증되면, 이는 군사령부의 작전 부서로 곧장 보내졌다. 정보를 대대(squadron)로 보내는 과정이 이뤄지는 동안, 최초 해당 정보가 나온 사단이 속한 군단 사령부에 위치한 팬텀 분견대(Phantom detachment)에서는 이 암호첩보를 감청하여 해독한 뒤에 군단장에게 제공하였다.  팬텀 분견대가 해독한 동일한 전갈 내용은 해당 군단의 나머지 사단들의 사단장들에게도 배포되었다. 이 시스템은 대단히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당시 미군측 팬텀 분견대(Phantom detachments in the U.S. sector)의 활동에 대해 기술한 한 작전 후 보고서(after-action report)를 살펴보면, 해당 사건이 벌어진 시간으로부터 1시간 반정도면 통상 첩보가 "처리 완료(cleared)"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에는 "일상적인" 문제가 좀 있었다 - 종종 상급 사령부에서 이들 팬텀 연락 장교들을 "간첩(spies)"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었다.

 

 과거의 비슷한 시스템들, 특히 일반 참모장교들을 사용했던 시스템들에서처럼, 많은 예하 지휘관들과 참모장교들은 이들 팬텀 연락 장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으며, 종종 이들을 불청객 취급하곤 하였다. 노르망디에 영국 팬텀 연락 장교가 도착하였을 때 한 고위급 미군 지휘관이 보여준 반응은, "도대체 당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What the hell are you doing here?)"와 비슷한 말이었다. 팬텀 장교들에게는 사실상 아무 권한이 없었으며, 특히 과거 시대의 독일이나 프랑스군의 일반참모 장교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하여 해당 지휘관들에게 반복 설명해야 하곤 했다. 팬텀 지휘 연락장교들(Phantom command liaison officers)이 지휘관의 권한을 빼았는다거나, "엿보기(snooping)"를 한다는 잘못된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 이들 장교들의 행동과 이들이 획득한 첩보의 관리에 대하여서 엄격한 규정들이 제정되었다. 예를 들어, 팬텀 장교들은 자기 마음대로 결론내린 사실을 전파할 수 없으며, 모든 전갈에는 그 첩보의 원출처(통상 지원하고 있는 부대의 지휘관이나 참모 장교)를 언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음은 한 미군 부대에서 발송된 전형적인 팬텀 전갈의 사례이다:

 

 1944년 8월 13일
미육군 제 3군

팬텀 메시지 No 7 130630
미육군 15군단
출처 소령 작전장교(MAJ G-3), 제 5기갑사단,
B전투단(CCB) 집결지역의 전방 위치는 06:30까지 변화 없음
Q4630-5630

TS0120952


 상급 사령부의 검열관이라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하여, 팬텀 순찰대(Phantom patrol)로 근무하는 장교들은 면밀하게 선발되었다. 연락 장교들은 통상 같이 일해야 하는 장교들보다 하급자들로 선발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계급과 경험의 부족함을 성격과 몸가짐, 기지와 열정으로 상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작전 경력이나 체력적, 정신적 강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도성 측면에서 우수해야 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판매(sell themselves)"하여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팬텀 순찰대의 가치가 증명되어 감에 따라서, 오히려 대다수 연합군 지휘관들이 이 시스템에 팔려가게 되었고, 팬텀 순찰대와 피지원부대간의 관계에서의 문제들도 급감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팬텀이 하급 사령부에까지 완전히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종종 상급, 하급, 중간급 지휘관들 모두에게 중요한 첩보원천이자 방향성 있는 망원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전쟁 막바지가 되어감에 따라 팬텀 부대의 임무는 상당히 변화하게 된다: 이들은 지휘 첩보(command information)뿐만이 아니라 전장정보(battlefield intelligence)를 중시하는 보다 특정한 첩보를 얻는 임무를 띄게 된다. 예를 들어 캐나다 제 1군의 경우 다음과 같은 명령을 팬텀 분견대에 내리는데, 그 촛점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요약하면:

 

 1. OPS. 진행에 관한 일반첩보를 대대급까지. 의도에서 계획 변경까지.
 2. INT. 확인 및 재확인, 토나올 때까지(ad nauseum). 적에 대한 소문.
 3. AIR. 전방부대의 전선, 또는 그에 대한 추정. 수단 불문.
 4. R.E. 교량 정보.
 5. R.A.F. INT. 적 항공 첩보.
 6. S.D. 대대급까지의 아군 부대 사령부들.
 7. A.Q. 노면 상황 또는 교통 정보.


 총사령부, 중간 사령부, 하급 사령부들이 요청한 첩보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팬텀 연락 순찰대는 종종 적진 후방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한번은 한 팬텀 순찰대가 독일군 연대의 대대들 사이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다. 또한 팬텀 순찰대는 연합군이 팔레즈 포위망(Falaise pocket)이 완성되었을 때, 우회공격부대와 접촉한 첫번째 부대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영국 30군단장과 미국 7군단장은 각자의 선두 사단장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서로가 연결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팬텀의 정보(intelligence) 및 지휘통제에 대한 가치는 명백하다. 그러나 통신에 관한 일상 채널은 부적합했음이 드러난다. 참모 장교들은 상급 사령부에 계속 최신 정보를 알리도록 지시받고 있었긴 하였지만, 각자의 임무들을 수행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정보를 올리는 데 제대로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유선(wire)같은 교리적인 통신 시스템이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인 유동적 전투 상황에서는 팬텀이 절대적으로 그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팬텀과 "J"단은 북아프리카 전역 마지막 몇달간의 세계대전 초반기에 이를 경험하게 된 몇몇 미군 지휘관들에게 깊숙한 인상을 남긴다. 1943년 8월의 통합 작전 사령부(Combined Operation headquarters)의 월간 첩보 요약(Monthly Information Summary)에서는 이 시스템이 모든 연합군 지휘관들에게 어떤 가치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 팬텀은 피지원 지휘관이 원하는 첩보를 얻는 데에만 집중하는 임무를 갖는 연대이다. 이는 특수한 통신 부대가 아니다.
 B. "J" 단 순찰대는 지휘관이 통상적인 채널을 통한 것보다 더 상세하고 적시적인 첩보를 얻기 위하여 전투 어느 곳으로든지 집중하도록 할 수 있다.
 C. 통상 G(Ops), G(Int), Air를 지원하지만, 이 연대는 또한 참모 및 근무지원분야(Staff and Service)에 종종 도움을 주기도 한다.
 D. 조직이 유연하여 어느 군종에든 적용이 가능하다.
 E. 연대를 광범위하게 배치시키고, W/T (무전 통화기술(radiotelegraphy)) 세트를 이용함으로써, 장교 순찰대(office patrol)와 "J"단으로 하여금 W/T 망을 감청하게 할 수 있었고, 연대는 우회부대(flanking formations)에 대한 가치있는 첩보를 모든 단계의 지휘관들에게 제공할 수가 있었다. 우회부대가 연합군인 경우 특히 유용하였다.
 F.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9 문단), 가용 첩보 중에서 가끔 그 내용이 대단히 세부적인 경우도 존재한다. 피지원 지휘관은 얼마나 자세한 정도의 첩보를 받아보고 싶은지에 대해서 미리 정해놓을 필요가 있다.
 G. 팬텀 순찰대 장교들이 야전 사령부에 파견되면, 이들은 반드시 사령관이나 그의 주요 참모 장교들과 접촉하여 이들의 상황 판단에 대하여 알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

 


 신호 첩보 감시 부대 (Signal Information and Monitoring, SIAM)

 

 미군의 SIAM 부대는 시실리 섬의 미육군 제 7군에서 처음에는 임시적으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영국의 팬텀단,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 제 8군이 적극 운영한 무전 감청 부서인 "J"단을 따라 만들어졌다. 배속된 사단의 통신 중대 정보 소대(signal company intelligence platoon)에 존재하는 무전 감시 팀들은 군 단위로 통합되어 군 통신 장교의 직접 감독 하에서 운영되었다. 영국측 상당 부서와 마찬가지로, SIAM 부대는 전방 첩보 제공 및 한 곳에서 나온 정보를 검증하는 것, 그리고 정상 지휘 계통을 거쳐 보고되는 보고서를 미리 보게 되는 등의 효과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제 7군의 SIAM 부서의 결과에 감동받은 미국 제 5군 역시도 이탈리아 전역이 시작하기 전에 자체적인 임시 SIAM 단을 조직하게 된다. 1943년 8월, 제 7군에서와 동일한 계통의 부대들로 구성된 제 5군 SIAM단의 경우, 군 통신 사무소의 신호정보 부서의 직접 통제하에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배속된 부대들의 원 소속 사단들(attached divisions)은 해당 부대들의 행정적 통제권은 유지하였다. SIAM 부대들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연말에는 감청 첩보를 보완하기 위한 연락단(liaison service)이 추가되었다. 팬텀단의 연락장교 시스템과 비슷하게, SIAM의 연락장교들은 사단 작전들과 정보부서간을 이어주는 첩보 수집가로서 주로 활동하였고, 수집한 첩보들은 군단을 통하여 군 사령부로 보고하였다.

 

 1944년 7월, 제 5군의 건의와 함께 SIAM의 전투에서의 성공적인 성과에 힘입어, 전쟁성에서는 신호정보 감시 중대를 정식 작동시키는 것을 승인하게 된다. 대략 350명의 장병들로 구성된 SIAM 중대는 8개의 부서로 구성되었다: 본부 소대, 군 소대(army platoon), 2개 군단 소대(two corps platoons), 4개 사단 소대(four division platoons). 제 5군의 신호 자산에서 차출된 신설 제 3151 SIAM 중대는 미군 제 7군이 남부 프랑스를 침공할 때에 따라갔으며, 유럽 전쟁이 끝날 때까지 7군과 함께 하였다.

 

 SIAM의 임무는 사실상 팬텀단과 마찬가지였다. SIAM 중대는 야전군, 군단, 사단에게 적시적이고 정확하게, 연락장교들이 전선 사단의 주요 참모장교들을 통해 면밀하게 취합한 전술 첩보들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첩보들은 접적 중인 부대의 지휘망을 감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획득하였다. 첩보 수집 임무 외에도, SIAM에서는 야전군 내에서 전반적인 무전망의 통신보안(signal security)를 감독하는 수단으로서도 작동하였다. 1945년 1월의 작전 최성기 당시, 제 3151 부대는 인접 군의 우회 군단과의 연락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동시에, 총 3개 군단(총 12개 사단)으로 구성된 야전군을 지원하였다.

 


 군 첩보단 (Army Information Service, AIS)

 

 SIAM의 가치를 인식한 또다른 미국 야전군에는 조지 S. 패튼 장군(General George S. Patton) 휘하의 미국 제 3군이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7개월이 지나기 전까지는 SIAM 중대를 배속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 군사령관은, 임시방편으로 제 6 기병단(6th Cavalry Group) - 제 6 기병대대와 28 기병대대로 구성 - 을 SIAM 중대를 배속받을 수 있을 때까지 첩보 수집 부대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이 부대의 임무는 군사령관과 휘하 참모들을 위하여 특수 연락 및 감시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수단들이 활용되었고, 연락장교 역시 그 중에 포함되었다.

 

 SIAM과 팬텀단과 마찬가지로, 제 6 기병단 역시 군사령관과 전선 사이에 직통 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시스템들과는 달리, 첩보들은 중간 지휘 채널들을 건너뛰어 전달되었다. 제 3군에서는 또한 팬텀단이나 SIAM 부대와 비슷하게 대대, 연대, 사단, 군단의 정찰망(reconnaissance nets)을 감시하는 감청 시스템을
조직하였으며, 이렇게 감청한 첩보는 군사령부로 직통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했던 점은, 제 6기병단이 지휘 연락 장교 순찰대를 활발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수함이 입증된 젊은 장교들이 이끄는 제 3군 연락 순찰대(liaison patrols)는 정기적으로 접적중인 부대의 지휘소 및 감시소를 방문하였으며, 휘하 사단의 정보장교(G2) 및 작전장교(G3)들과 첩보를 교환하였다. 이러한 임무들 모두가 인력과 무전장비가 보강된 1개 단일 대대(sqadron)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두번째 대대는 보다 전통적인 임무인 지상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 3군에서는 시스템을 통하여 첩보가 전달되는 속도야말로 성공의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전선의 연락 순찰대가 획득한 필수 지휘 및 통제 첩보들은, 군의 전방 지휘소(advanced command post)와 함께 위치하고 있는 기병단 사령부로 직접 전달되었으며, 이로써 중간 단계를 제거하였다. 에드워드 W. 피켓 대령(Colonel Edward W. Fickett)이 이끄는 제 6 기병단은 공식적으로는 제 3군 첩보단(Third Army Information Service)이라고 불렸지만, 통상적으로는 패튼의 "가신 기병대(Household Cavalry)"라고 많이 불렸다. 그 명칭이 어땠든지 간에, 이 부대는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였으며, 의심할 바 없이 제 3군의 많은 성공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른 방향성 있는 망원경 부대들처럼, 제 3군의 연락장교 순찰대 역시 "엿보는 자(snooper)"라는 인상을 갖는 문제가 있었다. 군이 군단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게 된다는 사실도 연락 순찰대의 평을 좋게 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특히 사단이나 군단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강했다. 지휘관들은 상급 사령부의 관찰자가 자기 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정보들을 수집해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연락 장교들은 종종 편협한 일반 참모 장교들로 간주되거나, 더 심한 경우에는 지휘관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게슈타포(Gestapo; 나치 독일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 역주)" 요원 쯤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들 연락 장교들이 해당 부대의 작전장교(G3)나 그에 상당하는 책임있는 작전부서 요원의 확인과 승인이 없는 한 어떠한 전갈도 보낼 수 없도록 명령받았다는 점을 알게 되면, 보통 이러한 의심은 잦아들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 참모들 또한 머지 않아 제 3군 사령부의 순찰대를 최신 정보 수집수단으로 활용하게 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몇몇 사례들을 살펴보면, 사단에서 이들 순찰대가 종심 침투(deep attack)하는 기갑부대에 배속되도록 요청한 사례가 나타난다. 어떤 휘하 지휘관들은 이들 순찰대를 아예 자신의 참모단의 일부로 받아들여서, 이들 순찰대 연락 장교들은 배속 부대 지휘관 및 다른 참모 부서들에게 일일 브리핑을 하기까지 하였다. 비록 이들 순찰대가 모든 지휘단계들에 봉사하도록 설계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군사령부에 책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제 3군 사령관에게 꾸준히 전술적, 작전적 첩보들을 제공하게 된다. 한 패튼의 전기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가신 기병대의 순찰대(patrols of the Household Cavalry)야말로 패튼의 신비스런 상황 인식능력의 배경이다"라고 할 수 있다.

 

 

군 전술정보단(Army Tactical Information Service, ATIS)

 

 유럽 전역이 진행되면서, 미육군의 기술 지향적 첩보단들(SIAM 및 제 3군 정보단)은 통괄하여 군 전술정보단(ATIS)으로 통칭되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유럽에서는 패튼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는 일반 위원회(General Board)가 설치되어 유럽 전장에서의 전반적인 작전에 대한 사실 분석을 준비하게 되었고, ATIS의 경우 이 위원회가 연구한 제 18번 과제의 핵심이 된다. ATIS가 획득한 모든 첩보들이 현장 지휘관이나 선임 참모장교에 의해 우선 정리된 후에는 직통으로 상급 사령부로 보내진다는 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전쟁 후 보고서는 연락장교들이 "모든 제대의 지휘관들을 위한 종복이기는 하나, 중간에 간섭하려 하거나 하급 제대에 조언을 하려는 참모장교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위원회에서는 현대전에서 ATIS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결론지었고, 또한 아군 통신망을 감시하는 임무는 ATIS가 아닌 기존의 별도 통신 부대의 임무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위원 단 한 명의 반대를 빼면, ATIS가 평시에도 미육군의 조직 내에 존재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게 된다. 이 위원회의 발견에 관하여 아이젠하워 장군(General Eisenhower)은 이 시스템이야말로 "대단히 가치있는 조직이며, 모든 단계의 지휘관들이 곧 그 가치를 알게 될 조직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이러한 찬사에 한가지 단서를 달았다; 그는 이 시스템이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고, "이 조직이 주의 깊게 다뤄지지 않을 경우 매우 논란의 소지가 많은 조직이 될 것이다. 즉, 여러 제대의 지휘관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들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팬텀단과 ATIS는 전장 지휘관들이 끊임없이 요구해온 첩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현대적이고 기술 지향적인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훌륭한 사례이다. 기존의 많은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정기 보고 채널은 부적당함이 입증되었다. 그 결과, 지휘관들의 확실성에 대한 영원한 도전(commanders' eternal quest for certainty)인 첩보 문제는 현대적 시스템 - 즉 무전기(radio) -과 전통적인 교리 및 관행 - 즉 연락장교 - 가 결합되면서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보다 고전적인 첩보 입수수단들 또한 사용되었고, 이는 패튼 장군의 참모 장교 활용이나 몽고메리 원수의 개인 연락장교(personal liaison officers)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참모 시스템 (Staff Systems)

 

 패튼은 전투 상황 첩보를 수집하는 데에 있어서 제 3군 첩보단(Third Army Information Service)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측면에 있어서 휘하 참모들도 활발하게 활용하였다. 제 3군 참모단의 구성원들은 매일 전선 부대를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고, 종종 야간에도 방문하였다. 이를 통하여 최신 첩보를 모으는 한편 동시에 이들을 격려하는 효과도 내었다. 이러한 참모 방문은 지휘계통간에 일종의 이해심과 응집성을 만들어내었는데, 여러 사람들에 따르면 이는 다른 미국 야전군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패튼의 이러한 효율적인 참모 활용은 휘하 지휘부에서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의 숫자를 줄이는 효과도 내었다. 사실 제 3군은 유럽 전장의 다른 어떤 야전군에서보다 적은 보고서를 요구하였다. 패튼 직속 참모들의 휘하부대 방문 외에도, 제 3군 예하 군단과 사단에 있는 지휘관 및 참모들 또한 매일 전선을 방문하도록 독려하였다. 패튼에게 있어서, 지휘관 책임의 95퍼센트는 명령 시행을 감독하는 것이며, 단지 5퍼센트만이 계획이나 명령을 구상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패튼의 지휘 및 참모 방문은 결정적인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효과를 내었다. 실질적으로 제 3군의 모든 참모장교들이 지휘 관찰자로서의 전통적인 부관(aide-de-camp)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패튼 장군의 정보 수집 시스템 - 즉, 제 3군 첩보단, 참모 방문, 정기 보고서, 그리고 패튼 스스로의 직접 방문과 사령부를 매우 전방쪽으로 위치시키는 일 등 - 은 그를 제 2차 대전의 지휘관들 중에서 가장 정보에 밝은 지휘관 중 하나로 만들게 되었다. 패튼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은 그가 북아프리카와 시실리, 중부 유럽에서 만든 많은 성공들에 크게 기여하였다.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는 다른 어떠한 주요 연합군 지휘관들보다도 연락 장교들을 지휘관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라는 편협된 임무(provincial role)로써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었다. 몽고메리의 젊은 연락 장교들은 각자의 다양한 지휘관들과 인간적 관계를 유지하여, 마치 나폴레옹 시기의 전통적인 부관(aide-de-camp)와 유사하였다. 웰링턴 위인전에서 한장을 빼온 것마냥, 몽고메리는 자신과 밀접한 관계의 개인 연락 장교들을 옛 영국 지휘관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기술과 전쟁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했음에도, 이들 젊은 장교들을 활용하는 몽고메리의 원칙과 이론은 거의 고전적인 것과 똑같았다. 이들은 과거의 부관(aide-de-camp)과 마찬가지로 그의 "눈과 귀(eyes and ears)"가 되었다. 울트라단(Ultra; 제 2차 대전 당시 적국의 고도로 암호화된 통신을 해독하던 영국기관) 의 정보와, 팬텀단의 감청 첩보, 휘하 젊은 연락장교들의 통찰력있는 보고서등을 통하여 몽고메리는 자신의 제 21 집단군의 전투 및 전역 상황에 대하여 엄청나게 잘 파아갈 수가 있었다. 그가 제 1차 대전 당시 맹세했던, 결코 전방 상황에 무지하지 않겠다는 서언은, 그가 고위 지휘관이 되었을 때 완벽히 실현되었다. 그의 연락장교 시스템은 그에게 정확하고 적시적인 접보를 전달함으로써, 다른 어떠한 별개의 정보시스템들보다도 더욱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몽고메리의 연락 장교들은 몽고메리 원수와 함께 전술 지휘소에서 지내면서, 고대의 소마토필락시스나 콘투베르날레스와 같이 밀접한 고문이자 지기들의 집합체 역할을 하였다. 이들 장교들은 몽고메리에 대하여 대단한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종종 그를 "주인님(Master)"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몽고메리 역시 이들을 "아이들(the boys)"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밀접한, 거의 온정주의적(paternal) 인간관계는, 그랜트와 그의 부관들과의 관계처럼 이들 장교들이 자신의 관찰 및 의견들을 지도자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비록 몽고메리는 부하들을 대단히 존중하였지만, 그렇다고 연락장교들의 관찰들에 반박을 가하지 않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관찰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포괄적이어야 하며, 간결해야 했다. 한 연락 장교에 따르면, "주인님"의 심문이야말로 끔찍한 시간이라고 하였다.

 

 종종 몽고메리의 "행상인(Walkers)" 혹은 몽고메리의 "전서구(Homing Pigeons)"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던 몽고메리의 연락장교들은 모두 젊은 전투병과(combat arms) 장교들이었고, 통상 계급도 낮았다(대부분 소령). 보통 한번에 6~8명 이상의 장교들이 보고하는 일은 없었으며, 이들 집단 내에는 몇몇 미군이나 캐나다군 장교들도 포함되어 영국 제 21 집단군에 배속된 미군 및 캐나다 사단들과의 연락 임무에 활용되었다. 모든 연락 장교들은 인격이 훌륭하고(great strength of character), 주도적이고, 독립적이며, 용기가 있었다. 몽고메리는 이들을 직접 선발하였으며, 그의 선발기준은 대단히 높았다. 이들 젊은 장교들은 모두 전투 베테랑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부상 경험이 있었으며, 대다수가 전투 중의 용기로 인해 수훈받은 인원이었다. 이들의 전투 경험은 이들이 보고서를 중요한 전술적 상황에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작성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놀랍게도, 이들 대다수는 전쟁 전이나 후에 전혀 군사 커리어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몽고메리의 "아이들"은 모든 측면에서 대단한 장교들이었다. 종종 분개 대상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소중했던 이들은 제 21 집단군 참모진 내에서 엘리트 집단(corps d'elite)을 형성하였다.

 

 몽고메리의 젊은 연락장교들은 어쨌든 그의 특수 요원들이었으며, 몽고메리가 인정한 "눈과 귀"였고, 매일 그에게 솔직하게 직접적인 대면보고를 하였다. 이들은 제 21 집단군 작전지역 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몇몇 몽고메리의 전기작가들이 말한 것처럼, "정기적으로 몽고메리의 지휘소(CP)에 방문하는 많은 고위 지휘관들과 중요 정치가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nodding term)"였다. 과거의 많은 관찰자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ATIS에 대해 아이젠하워가 전후 평가에서 했던 말처럼, 몽고메리의 시스템 역시도 남용될 소지가 컸다. 이 시스템이 잘못 적용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이 영국 지휘관과 휘하 연락 장교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스템이 집단군의 간첩망(spy ring)으로 변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은, 대체로 이들 선발된 장교들의 성격들 탓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하급 장교들이었으며, 상급자가 존재하는 경우 겸손하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뒷공론(gossip)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고메리와 집단군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이들 연락 장교들은, 요청된 첩보를 얻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죽음도 무릅썼다. 사실 이들은 높은 비율로 전사하였다. 이들이 휘하부대 지휘관과 참모장교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던 점, 이들의 프로정신, 이들의 성격과 용기, 그리고 집단군 사령관의 이들에 대한 신뢰 등이 최종적으로는 이들의 존재가 몽고메리의 휘하 부대 사령부들에게 완전히 인정되는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 시스템의 간결성 또한 그 성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침 브리핑 이후, 연락장교 팀들은 첩보를 얻기 위해 전선으로 떠나가곤 하였다. 다음 내용은 몽고메리가 캐나다군 연락장교 딕 말론 소령(Major Dick Malone)에게 요구한 첩보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부대의 형태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사항 없이 정확한 세부사항들을 알아올 것. 이 부대가 실제 전선(frontline trace, FLT)에서 얼마나 멀리 정찰하는가? 이 부대의 대대 사령부(HQ)와 중대 지휘소(CP)의 위치는 어디인가? 전선에서의 탄약 사정은 실로 어떠한가? 전투의지(Esprit)는? 얼마나 많은 포로(POW)를 잡았나? 사상자는 얼마나 되나? 이날 지휘관은 뭘 했으며, 다음날 그의 계획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지휘관을 만나고, 그에게 귀관의 보고서를 제공하게.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쓴 제 2차 세계대전사 책 중의 하나인 '승리와 비극(Triumph and Tragedy)'에서는 몽고메리의 연락장교 시스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반적인 묘사가 나타나 있다. 처칠은 이 시스템이 발전된 수단들과, 이 시스템이 현대 지휘에 있어서 어떠한 가치와 효험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과거의 시스템들과 놀랍게도 동일한 부분들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거의 2시간 동안 일련의 젊은, 대략 소령 계급의 장교들이 연달아 출석하였다. 각자는 각각 다른 전선 지역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이들은 총사령관의 직접적인 개인 대리인들이었으며,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볼 수 있었으며, 어느 지휘관에게든지 사단 사령부에서건 전방 병력들과 함께 있을때건 간에 어떤 질문이든 할 수가 있었다. 반대로 이들은 각각 보고서를 작성한 뒤, 그날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관하여 총사령관에게 구석구석 질문들을 받게 되었다. 이를 통해 몽고메리(Monty)는 대단히 유능하고 개인적으로 잘 알며,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는 휘하의 각종 사령부들이나 지휘관들로부터 오는 보고서들을 비교대조 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을 제공하였다. "본인은 이 시스템이 찬탄할 만하며, 현대의 총 사령관이 전방 모든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진정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몽고메리 원수는 자신의 연락장교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회고록이나 그에 대한 수많은 전기들을 살펴보면, 그의 거의 고전적인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이 그의 제 21 집단군 지휘 및 통제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주 언급되고 있다. 스스로의 눈과, 그가 신뢰하는 연락장교들의 눈을 통하여, 몽고메리 원수는 전술적 상황이나 휘하 병사들의 "마음과 생각(hearts and minds)"을 확실하게 붙잡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젊고 품위있으며 용감한 연락 장교들을 활용한 사례는, 그의 개인적 리더십 특성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증명된 완전히 전통적인 효과적 지휘요소라 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Post-World War II)

 

 연락장교 분견대의 가치에 대해 기술한 대전 후의 모든 종류의 공식 보고서(육군 지상군 관찰자 보고서, 일반 위원회 문서, 작전 결과 보고서, 기타 등등)와 전문 잡지의 기사들, 아예 이것만 다룬 책들까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면서 이러한 연락장교 부대는 금방 사라지고 만다. 전시에는 필수적이었던 이들의 존재는 평시에는 그저 사치로 여겨졌다. 대규모 병력 및 장비 편제의 감축으로, 유능한 장교들과 값비싼 무전 장비들은 다른 보다 중요한 용도에 할당되었다. 미육군 예비군(U.S. Army Reserve)이나 주방위 육군(Army National Guard)에 팬텀단이나 SIAM 식의 대대를 만드려는 몇몇 제안 - 한번은 1958년에 있었다 -이 있었다. 이러한 제안들은 이것이 현대 전장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거부되었다. 미육군이 작전상에 있어서의 촛점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육군의 군단과 군에서의 연락장교 부대의 중요성 또한 덜 중요하게 비춰졌다.

 

 1970년의 책 '아마게돈의 대안(Alternative to Armageddon)'에서는 몇몇 유명한 군인들, 즉 미국 장군인 리만 L. 렘니처(Lyman L. Lemnitzer)와 I.D. 화이트(I.D. White), 독일 장군 폰 만토이펠(von Manteuffel) 등이 미육군이 몽고메리 식의 연락장교 시스템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여러 제대들의 부지휘관이나 보조 지휘관들을 감독관으로 활용하여, 대단히 능력있는 장교 관찰자 그룹을 몽고메리의 "행상인들(Walkers)"과 같은 식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장군들의 제안은 각자의 경험은 물론 집단적인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상급 사령부로부터의 외부 관찰자가 군 사령관에게 결정적이고 종종 무형의 첩보를 제공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적이고도 적시적인 측면에 있어서, 대단히 효과적이고 "조용한"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최근의 전쟁에서 나타난 제 2차 대전의 시스템에 상당하는 유일한 연락장교 시스템은 이스라엘 방위군에서 적용한 팬텀단 방식의 지휘 연락 순찰대 시스템이다. 1967년과 1973년의 중동전쟁의 시나이 전역에서, 소령들이 이끄는 이들 순찰대는 하프트랙이나 장갑차를 타고서,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합동 부대들로부터 전선의 정보를 육군 사령부에 직통으로 제공하였다. 이스라엘군의 사례를 제외하면, 수 많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지휘 연락 시스템들이 그 효율성의 정평에도 불구하고, 현대 군대의 지휘 및 통제를 향상시키는 수단으로서는 거의 완벽히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V. 결론 (Conclusions)

 

 본 연구에서는 미래에 활용될 수 있는 여러가지 전장 지휘 및 통제 시스템들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투의 지휘 및 통제에 관한 전통적인 수단 및 독특한 수단들을 간단히 분석함으로써, 몇몇 결론들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히 미육군의 새로운 교리 측면에서 그러하다.

 

 군사사 전반을 살펴보면, 시대의 흐름이나 군대 형태의 변화, 기술의 발전, 새로운 참모 구성, 이러한 변화들에 따른 전쟁 기술의 혁명 등에 전혀 관계 없이, 전장 지휘관이 전투 상황에 관련하여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노력(battlefield commanders' driving quest for certainty concerning battle conditions)은 전혀 변하지 않는 역사상의 상수(constant)였다. 전반적인 확실성 추구라는 범위 내에서, 지휘 및 통제 기능에 대한 일종의 연속체가 존재한다 (표 1 참조).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저서 '전쟁론(On War)'에서, 불확실성이야말로 노력과 위험, 기회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핵심요소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지휘관은 스스로가 항상 잘못된 정보와 올바른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게 됨을 알게 된다"라고 자주 강조하였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지휘관은 종종 "즉시 가용한 재능(talents at hand)"이나 단순한 운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지휘관들이 자신의 연락 장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에 따라, 본 연구에서 설명된 수많은 정보 시스템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표 1. 지휘 및 통제 기능들의 연속체 (Continuum of Command and Control Functions)

 

 객관적이고 정확하며 적시적인 전장 첩보에 관한 지휘관의 끝없는 욕구는 여라가지 다른 방법으로 충족되어 왔다: 고대 시기와 나폴레옹 시기에는 부관(aide-de-camp) 제도로, 현대 전쟁에서는 연락장교나 일반참모 관찰자, 혹은 통신감시로 이뤄졌다. 여러가지 형태의 첩보 수집자의 존재는 수천년간 지휘에 있어서 줄곧 사활적인 역할을 해 왔다. 전장 지휘 및 통제의 실상은 완전한 참모 제도가 탄생한 이후에도 부관(aides-de-camp)이나 연락장교들을 첩보 수집자로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이르기까지, 이들 첩보 수집 시스템들이 방향성 있는 망원경 역할로 제대로 활용되었을 경우에는, 이것들이 전투에서 효과적인 지휘 및 통제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가 됨을 증명해보인 바 있다.

 

 만약 과거의 시스템들이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이 안에서 복무한 장교들 간에도 유사성이 있다. 통상적으로 방향성 있는 망원경 기능은 비슷한 성격들을 가진 부관들(aides), 연락장교들(liaison officers), 일반참모 장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들은 보통 젊고 대단히 카리스마적이었으며, 열정적이고 용감하며, 독립적이고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정신적으로 깨어있고,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았다. 군사사의 보다 최근 시기를 살펴보면, 이들은 전문적 기술이 뛰어나고 잘 훈련된 관찰자들의 집단이 되었으며, 종종 별도의 엘리트 장교단 - 즉 일반 참모(general staff)-에 속해 있기도 하였다. 이들의 성격과 판단, 기지, 신뢰성은 상급자나 부하 모두에 있어서 높게 존중되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지휘관 및 고위 참모 장교들과 밀접한, 종종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된다.

 

 비록 이들 장교들의 임무가 실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달랐지만, 이들은 원칙상에 있어서는 동일하였다. 기본적으로 이들 장교들은 전방의 전장 상황을 관찰하였고, 때로는 개인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기적으로 이들은 무형의 첩보를 추구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어 사기나 감투정신, 응집력 같은 통상적인 지휘체계를 통한 보거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임무에만 한정되지 않았는데, 이들은 명령의 수행 여부를 검증하거나, 정책을 따르는지를 확인하는 일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들은 지휘관의 의도가 이행되고 있는지를 보장하였다. 이들은 엄격하게 전령 임무로 제한되었을 때 가장 성과가 낮았다. 연락장교들은 자신의 지휘관의 대리자로서, 종종 상급 지휘관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 이들 역할 중에서 종종 상당한 불만을 자아내게 한 측면이며, 때에 따라서는 합리적인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휘체계를 깨뜨리는 것은, 그 결과에 관계 없이 정식 지휘체계 쪽으로부터 부정적인 특성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역사는 항상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이 시스템이 상급 지휘관과 예하 지휘관 간의 적절한 관계를 깨뜨리게 된다는 염려를 증명한 사례가 많다. 지나친 권한을 부여받은 부관, 관찰자, 연락장교에 의해 벌어진 수많은 남용 사례들이 있다. 더 나쁜 사례로는, 지휘관들이 종종 이들 장교들의 관찰들을 액면 그대로 믿었는데, 그로 인한 지휘 결심이 전투 실패로 이어진 경우이다. 이 시스템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칙에서의 예외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시스템의 가치는 이러한 민감한 활동과 연계된 다양한 문제들을 훨씬 압도한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적용된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전반적 가치를 받아들인다면, 현대 지휘 및 통제 교리의 발전을 고려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혹은 어떠한 기술적 요소가 이러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게 되었는가 등이 흥미로운 요소가 될 것이다. 분명 오늘날의 공지 전투 교리(AirLand Battle doctrine)는 특유의 종심타격(deep-attack) 측면으로 인하여 효과적인 지휘 및 통제 발전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도전을 제공하고 있다. 현 미군 교리에 수반되는 리더십 형태의 근본 특성은, 모든 제대의 모든 작전들은 반드시 지휘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 뒤에 이뤄져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지휘관의 의도를 습득, 명료화,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부관 및 지휘 연락장교 시스템의 고전적인 역할이었다.

 

 오늘날의 기능 참모 장교들(functional staff officers)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참모들 보다도 더욱 자신들의 업무에 짓눌려 있다; 이들은 중요한 전술적, 작전적 정보를 전달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전장에 대하여 감시하는 것을 점차 대단히 어려워하게 될 것이다. 공지 전투 교리는 참모 장교들로 하여금 시공에 앞서 작전적으로 집중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능케 하는 기술들과 결함하여, 더욱 대량의 전투 첩보를 접하게 만들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SIAM, 팬텀단, ATIS는 눈에 띄는 정보들을 뽑아서 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지휘관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법으로, 엄청나게 과부하가 걸려 있는 통상 보고 시스템을 보완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결과, 제 2차 세계대전식 시스템들은 상급부대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이 전술적, 작전적 주도권을 획득 및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지휘관이 특별히 요청한 신속하고 정확한 중요 전장 첩보를 얻는 것을 통하여, 지휘관은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작전 전반의 민첩성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 시스템의 수평적, 수직적 연락 기능들은 또한 전반적인 작전들을 조율하는 분야에 있어서도 엄청난 지휘 통제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몇몇 현대 시스템들(팬텀단과 패튼 장군의 "가신 기병대")에서의 정찰 임무는 지휘관에게 적에 대한 정확하고 직접적인 정보를 얻는 추가 수단을 제공하였으며, 적의 능력을 평가하고 적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분명 이들 과거 시스템들의 성취는 오늘날의 지휘 및 통제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