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번역] 미국 해병대 약사 (Brief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 원문출처 : Brief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http://www.usmc1.us/) >
원문이 게재된 홈페이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록된 내용의 수준이나 그 어투 등으로 보아 미 해병대 공식 홈페이지가 아닌 어떤 미 해병관련 개인이나 단체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미해병대가 대충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라서 번역하였으며, 독자분들께서는 적절하게 판단하여 활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해병대 약사 (Brief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1775년 11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의 대륙 의회가 개최되어 "2개 대대의 해병을 양성"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으로 인하여 대륙 해병대(Continental Marines)가 창설되었고, 이 날이 미국 해병대의 탄생일이 되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복무하는 이들 최초의 해병들은 여러 중요한 작전들에서 명성을 떨쳤다. 예를 들어 최초의 상륙 습격작전이었던 1776년 3월 바하마 공격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지휘관은 사무엘 니콜라스(Samuel Nicholas) 대위(이후 소령이 됨)였다. 니콜라스는 대륙 해병대 최초의 장교였으며, 미국 독립전쟁 내내 고위 해병 장교로 남아 있었으며, 이후 최초의 해병대 사령관으로 간주된다. 1783년 4월의 파리 조약으로 독립전쟁은 막을 내렸고, 해군의 마지막 함선이 매각됨과 동시에 대륙 해군과 대륙 해병대는 해산된다.
독립전쟁이 끝난 뒤인 1798년 7월 11일, 해병대는 재창설되었고, 이어 프랑스와의 준 전쟁 과정에서 해병대는 활약하였으며, 산토 도밍고에 상륙하였고, "트리폴리 해안(Shores of Tripoli)"을 따라 바바리 해적들과 싸우는 많은 작전들에 참가하였다. 해병대는 1812년 전쟁에서 수많은 해군 작전들에 참가하였으며, 워싱턴 D.C 를 지키기위한 매릴랜드 주 블라덴버그 항구 방위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앤드류 잭슨이 뉴 올리언스에서 영국군을 격파할 때 함께하기도 하였다. 1812년 전쟁 이후, 해병대는 전세계에서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였다. 카리브해에서, 포클란드 제도에서, 수마트라에서, 서아프리카 해안 근방에서, 플로리다 주의 세미뇰 인디언과의 작전에서 활약하였다.
멕시코 전쟁(1846-1848) 기간, 해병대는 걸프만과 태평양 해안에 위치한 적의 항구들을 장악하였다. 한 해병 대대는 푸에블로에서 스콧 장군의 육군과 만난 후, 멕시코 시티의 "몬테주마 홀(Halls of Montezuma)"까지 함께 싸웠다. 해병대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 기간 동안에도 해안과 해상에서 복무하였다. 대부분의 복무는 해군과 함께 하는 것이었지만, 한 대대는 불 런에서 싸웠고, 다른 부대들도 하테라스 곶, 뉴 올리언스, 찰스턴, 포트 피셔 등에서 차단 부대로서 활약하였다. 19세기의 마지막 1/3 동안 해병대는 세계 전역에서 수많은 상륙작전을 펼쳤으며, 특히 동양과 카리브해 지역에서 그러했다.
미서전쟁(1898년) 기간 동안, 해병대는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 괌, 필리핀에서 활약한다. 이 전쟁 이후, 해병대는 확장과 전문성 발전의 시기를 맞게 된다. 해병대는 필리핀 반란(1899-1902)과 의화단의 난(1900)에서 활약하였으며, 기타 니카라과, 파나마, 쿠바, 멕시코, 아이티에서 활약한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해병대는 프랑스 전장에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제 4 해병여단은 1918년 벨로 우드, 수아송, 생 미셸, 블랑 몽, 뮤즈-아르공 공세에서 영웅적 활약을 펼침으로써 "악마의 개(Devil Dogs)"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해병 항공대는 1912년에 창설되었으며, 제 1차 세계대전에도 활약한다. 해병 조종사들은 주간 폭격 임무를 띄고 프랑스와 벨기에 상공을 날아다녔다. 프랑스에서 복무한 해병은 3만명 이상이며, 이들 중 1/3 이상이 6개월여간의 격렬한 전투 기간 전사 혹은 부상 당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전의 20여년 동안, 해병대는 상륙전에 필요한 교리와 장비,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에 열중한다. 이러한 노력의 성공은 최초 과달카날에서 증명되었고, 이어 부갱빌, 타라와, 뉴 브리튼, 콰잘린, 에니웨톡, 사이판, 괌, 티니안, 펠렐이우,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증명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해병대는 6개의 사단과 5개의 항공대, 그리고 기타 지원부대를 거느리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병력 규모는 최대 485,113명에 달했다. 이 전쟁을 통하여 해병대는 약 87,000명이 사망 혹은 부상당하였고,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이 수여된 해병은 82명이었다.
해병대 부대들이 일본과 북부 중국에서 전후 점령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해병대에 "수직 포위(vertical envelopment)" 능력을 부여한느 것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1950년 9월 대한민국에서의 인천 상륙작전을 통하여, 해병대는 상륙 공격 교리가 아직도 적합하고 필요함을 증명하였다. 서울 탈환 이후 해병대는 장진호까지 진격하였으나, 이곳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겪게 된다. 공세와 반격이 이어지는 거의 끝이 보이지 않는 참호전의 시기 및 점령 임무의 수년 간을 보낸 후, 해병대 지상부대는 1955년 3월 철수하게 된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25000명 이상의 해병대원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다.
1958년 7월, 여단 규모의 병력이 레바논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상륙한다.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대규모 상륙부대가 집결하였으나 상륙에 이르지는 않았다. 1965년 4월, 해병대 1개 여단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상륙하여 미국인들을 보호하였고, 이들 중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이들을 귀국시켜 주었다.
1965년 다낭에 제 9 해병 원정여단이 상륙한 것이야말로 해병대가 베트남에 대규모로 개입하게 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적들의 구정 공세 이후인 1968년 여름에 이르르면, 베트남 주둔 해병대의 규모는 최고치인 85000명에 다다르게 된다. 남베트남군이 전투에 보다 많은 역할을 맡기 시작한 1969년이 되면 해병대가 철수하기 시작한다; 해병대 지상군이 완전히 철수한 것은 1971년 6월이다. 해병대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 동안, 해병대는 1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었고, 880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1975년 봄, 해병대는 캄보디아 프놈펜과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에서 대사관 요원들과 미국 시민들, 난민들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후 1975년 5월에는 캄보디아 해안에서 나포된 컨테이너 화물선 SS 마야게즈호 선원들을 구출하는 작전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70년대 중반, 해병대는 북부 유럽에서의 훈련에 제 2 해병사단을 참가시킴으로써 나토의 북방 측면을 맡는 데에 있어 점차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해병대는 신속대응군(Rapid Deployment Force) 창설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전세계 필요한 곳 어디든지 유연하고 신속하게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다병종 조직이었다. 해상사전배치함(Maritime Prepositioning Ships, MPS) 개념이 개발됨으로써, 전투에 필요한 장비들을 지정된 작전지역 근처에 미리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으며, 해병대원들을 공중 이동시켜 MPS 자산들과 결합되게 하는 방법으로 반응시간을 줄일 수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전 세계 미국 대사관들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증가한 시기였다. 미 국무부에 지시에 따라 해병 안전 경비대(Marine Security Guard)는 이러한 도전에 훌륭하게 대처하였다. 1982년 8월, 해병대 부대들이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일부로 레바논 베이루트에 상륙한다. 이후의 19개월 동안 이들 부대들은 임무 수행에 따른 위험들을 용기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헤쳐나갔다. 1983년 10월에는 대단히 성공적이면서도 짧게 주목을 받았던 그레나다 침공에 참가한다. 1980년대 말이 되면서, 해병대는 중앙 아메리카의 불안정 지역에 투입되게 된다. '정당한 이유 작전(Operation Just Cause)'은 1989년 12월 파나마에서 이뤄졌으며, 이를 통하여 미국인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파나마에서 민주적 절차를 복구시켰다.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따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해병대 병력의 이동이 이뤄지게 된다. 1990년 8월에서 1991년 1월 사이에, 약 24개의 보병대대와 40개의 기병대대, 그리고 총 92000명 이상의 해병대원들이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의 일환으로 페르시아 만에 배치된다. 1991년 1월 16일에는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이 개시되어 공중 작전이 벌어졌다. 주요 지상 작전이 시작된 것은 2월 24일로, 해병 제 1사단과 2사단이 이라크군 방어망을 돌파하여 쿠웨이트로 돌격하였다. 지상전이 시작된 지 100시간이 지난 2월 28일 아침 무렵에는, 쿠웨이트 작전구역 내에 있는 거의 대다수의 이라크군이 포위당했으며, 또한 이들은 4000여대의 전차와 42개 사단을 상실 혹은 무력화 당하였다.
1990-91년 페르시아 만에서의 일들에 덮여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해병대의 유연성과 신속 대응능력을 보여준 다른 중요한 배치 사례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 중에는 라이베리아와 소말리아에서의 비전투원 탈출 작전들이 있었으며, 방글라데시와 이라크, 북부 이라크에서의 인도주의적 구원 작전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92년 12월, 해병대는 기아와 내전으로 찌든 소말리아에 상륙하여 2년간의 인도주의적 구원 작전에 돌입한다. 세계의 또 다른 곳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해병대 항공기들이 비행금지 구역 상공에서의 '비행 거부 작전(Operation Deny Flight)'을 지원하였다. 1994년 4월에는 미 해병대가 또 한번 세계의 격오지에서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는 능력을 입증하였는데, 이 당시 내란에 빠져있던 르완다에서 미국인들을 구출했던 것이다. 1994년 9월에는 고향과 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국가 아이티에 해병대가 상륙하였으며, 해병대는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미군부대의 일환으로서 활동하였다. 같은 기간 동안 해병대는 국내의 마약 근절 작전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미국 서부 지역에서의 대형 산불을 진압하는 과정이나, 홍수 및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구호하는 작전에도 도움을 주었다.
1990년대 후반부에는 해병대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인 라이베리아,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자이르, 에리트리아에 파병되어 이곳 국가들에서 벌어진 정치적, 국내적 불안정 속에서 미국 시민들을 보호하고 구출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1998년 해병대가 인도주의 및 재해 관련 구호 작전을 벌인 곳으로 케냐와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 과테말라를 들 수 있다. 1999년에는 해병대가 코소보에 파병되어 '연합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을 지원하였다. 뉴욕 시와 워싱턴 D.C.에 자행된 2001년 9월의 테러 공격 직후 해병대는 아라비아 해에 배치되었으며, 11월에는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의 일환으로 남부 아프가니스탄에 전진 작전 기지를 설치한다.
해병대는 새로운 세기의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혁신을 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해병대 전투 연구소(Marine Corps Warfighting Laboratory)가 1995년 창설되어, 변화를 평가하고, 새로운 전투관련 기술들의 영향력을 평가하며, 해병대의 작전부대들에 새로운 능력들이 접목되도록 촉진시키는 임무를 띄게 되었다. "사냥꾼 전사(Hunter Warrior)"나 "도심지 전사(Urban Warrior)" 같은 훈련들은 미래의 전술 개념들을 탐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며, 이를 통하여 도심 환경에서의 군사 작전들의 특이사항들을 연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해병대는 벨로 우드와 이오지마, 장진 호수, 케산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자랑스런 전통들을 이어갈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조국에 대한 충성스런 봉사라는 길고 자랑스런 유산과, 미래의 도전을 극복하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합쳐짐으로써, 해병대는 언제까지나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