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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전쟁외 작전(MOOTW)에서의 야전포병 (3) - 2004,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박용수 2014. 10. 27. 16:51

< 원문출처 :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GWOT_4.pdf) >

 

 


(계속)


그레나다 (Grenada)

 

 1983년 10월, 레이건 대통령은 미군으로 하여금 카리브해의 그레나다로 진공하여, 당시 이 섬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불안정했던 공산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세울 것을 지시한다. 당시 파견된 해병대와 제 82공수사단 소속 2,3여단에는 야전포병도 함께하였으나, 이미 뻔한 결과였던 미군의 승리에 있어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 육군 포병이 실사격을 했었던 경우는 크게 3차례인데, 그 성과의 평가는 좀 애매하다. 첫번째 사례는 공수부대가 어떤 적군 목표를 타격할 때였고, 두번째 사례는 고립된 곳에 갖혀있던 의대생들을 구출하던 당시의 일이었다. 이 2차례의 경우에는 야전포병이 육군항공자산(aviation assets)과 박격포 등과 연계하여 효과적인 준비사격을 실시하였다.

 

 세번째 사례의 목표물은 칼리비그니(Calivigny)에 위치한 그레나다군 캠프였는데, 이곳은 섬의 남단에 있으며, 2일 전부터 미국 레인저들과 공수부대원들이 공격을 시작했던 살리네스(Salines) 비행장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레인저는 30분에 걸친 야포, 함포, 공군 전투기 및 AC-130 건쉽의 사격이 있은 후에 이 캠프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육군의 105mm 3개 포대가 탄막사격을 개시한다. 발사한 500발 중에서 1발만이 캠프에 명중하고, 나머지는 다 바다로 떨어진다. 추후의 조사에 따르면, "포병이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700미터 잘못 측정하였으며, 칼리비그니의 좌표도 잘못 알고 있었고, 게다가 포병 계산척(artillery aiming circles (compasses on tripod))까지도 포트 브래그에 놓고 온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당시 목표물 근처를 날고 있던 헬기에는 화력지원장교(fire support officer)가 전혀 탑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격 수정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함포사격 역시도 여러 이유로 인해 엉뚱한 곳에 떨어진다. 캠프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기와 AC-130의 사격에 의해서였다. 이어 레인저가 공격을 감행했는데, 당시 캠프가 이미 텅 빈 것을 알게 된다. 당시 헬리콥터 사고로 인하여 3명의 레인저가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한다.

 

 어전트 퓨리 작전(Operation URGENT FURY)에서의 야전포병의 효과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한 육군 포병요원은 제 82사단이 "전개 전 단계(pre-deployment phase)에서는 부대 단위(unit level)에서는 적절하게 화력지원기법을 활용하였다"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합동작전 단위에서는 "심각한 실패"가 나타나는데, 이는 미국 태평양사령부(그레나다가 책임지역 내에 있음)의 "부적절한 계획수립"이라는 문제와, 합동과업부대에 "미육군의 간접화력 사용절차 등에 능통한" 육군 요원이 "불충분하게 배치"되어있었다는 점, 해군 항공함포연락중대(Navy air and naval gunfire liason company/ ANGLICO)와 공군 전술항공통제반(Air Force tactical air control parties)이 늦게 배치된 점, 작전보안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계획 수립과정에 핵심 화력지원요원을 참가시키지 않은 점" 등을 원인으로 들었다. 일단 작전이 개시되면서 통신 및 기타 절차상 문제들로 화력지원과 관련된 합동작전에 문제들이 심화되었다. 화력지원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에 걸친 이러한 합동성의 붕괴는 이후 1986년 골드워터-니콜스 법안(Goldwater-Nichols Act)가 통과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법안은 병종간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나마 (Panama)

 

 그레나다 침공으로부터 6년 뒤인 1989년 12월,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미군으로 하여금 파나마를 침공하여 파나마 방위군(Panamanian Defense Force, PDF) 사령관이자 독재자였던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General Manuel Antonio Noriega)을 몰아내도록 지시한다. 지상군에는 다양한 특수작전부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파나마에 있던 해병 및 육군 부대들; 제 82 공수사단; 제 7 경보병사단(7th Infantry Division(Light)). 마지막 부대의 경우 육군이 "풀 스펙트럼" 위협에 대하여 대응한다는 뜻에서 저강도 전장에 알맞게 1980년대 당시 창설한 경사단(light divisions)들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경사단이 보유한 대포 중에서는 화력과 기동성에 맞춰 새로 디자인되어 배치된 M198 155mm 견인곡사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야전포병은 재래식 부대들과 함께 배치되긴 했지만, 전투 대부분이 인구밀집지대에서 벌어졌고, 또한 PDF가 너무 약한 적이었기 때문에, 야전포병이 간접사격(indirect fire)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대대장급 이상의 고위장교가 승인한 경우에만 한했다. 게다가 실제로 이러한 승인이 떨어지지도 않아다. AC-130이나 공격헬리콥터와 같은 직접사격무기(direct-fire weapons) 들이 PDF 목표물들을 타격하면서 충분한 화력을 가짐을 보여주었고, 더욱 중요한 점으로 이러한 무기들이 매우 정확함(precision)을 보여줌으로써 기대한 효과를 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105mm 곡사포가 직접사격 모드로 포트 아마도르(Fort Amador)의 PDF 보병중대 병영을 사격한 사례는 1차례 있었다. 파나마에서의 전투가 마무리되면서 포병의 필요성 역시도 마무리되게 된다. 그레나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군 야전포병은 전투 이후에 실시된 안정화 작전 과정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냉전이 종식되어가는 시점에서 벌어진 파나마에서의 저스트 코즈 작전(Operation JUST CAUSE)은 미육군으로 하여금 전력투사(force projection)에 다시금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향후 일부는 '새로운 세계질서 시대(new world order)', 일부는 '무정부주의의 시대(coming anarchy)'라고 생각한 미래작전에서 필요한 모델로 이 작전이 사용될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저스트 코즈 작전이 유발한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가 아직 개념화 단계에 머물러 있던 시기,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제 1차 걸프전쟁이 발생함으로써, 이러한 논의는 그대로 파묻혀버리게 된다 (역주: 문헌에 따라서 1990년 전쟁을 2차 걸프전쟁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을 1차 걸프전쟁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관측가들은 미군이 그동안 준비해왔던 종류의 전쟁을 40년만에 마침내 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최신 기술과 압도적인 화력을 사용하여 (적어도 전쟁 전에 이라크군을 평가했던 바에 따르자면) 대등한 수준의 적과 힘-대-힘(force-on-force)으로써 정정당당한 싸움(standup fight)을 벌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야전포병은 이라크 포병을 파괴하는 것을 비롯하여 대단히 중요한 역할들을 실시하였으나, 민감한 정치적 고려 탓에 미군 주도 다국적군은 바그다드 직전에 멈춰야 했고, 이로써 사담 후세인은 권좌를 보전하였고, 이는 이후 따라야 했을 점령작전 및 국가건설(nation building) 과정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 이후 벌어진 작전들은 프로바이드 컴포트 작전(PROVIDE COMFORT)과 같이, 이라크 정권에 반발하여 봉기했으나 사담 후세인의 엘리트 부대 잔당들에 의해 진압되고 학살당한 소수그룹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작전들이었다. 사담 군대는 이러한 미국 주도의 인도적 지원작전에는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야전포병 역시도 여기에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소말리아(Somalia)

 

 199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미국 군사력은 소말리아, 아이티, 발칸과 같은 몇몇 탈냉전기 지역분쟁에 개입한다. 이들 분쟁들은 모두 전쟁외 작전(MOOTW)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야전포병 역시 이들 분쟁 모두에 투입되었다. 1992년 12월, 소말리아에 미군 주도의 동맹군, 소위 통합과업부대(United Task Force, UNITAF)가 투입되었을 때, 이들의 임무는 소말리아 남부 1/3 지역을 방호함으로써 가뭄과 내란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말리아인들을 위해 인권단체들이 지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에 있었다. 연합군 내의 주요 미군부대들은 제 1 해병사단(1st Marine Division)과 육군 제 10 경산악사단(Army's 10th Mountain Division(Light))에서 차출된 부대들이었다. 해병대는 155mm 곡사포를 보유한 1개 포병대대를 가져왔으며, 제 10 경산악사단의 경우에는 해상수송을 통하여 105mm 대대 1개와 155mm 포대 1개를 들여왔다.

 

 남부 소말리아에서 가장 강했던 2개의 군벌이 연합군의 작전을 방해하지 않으리라는 점이 명백해지면서, UNITAF를 지휘하던 한 미 해병대 중장은 야전포병을 "저 우선순위(low-priority)"에 두게 된다. 설령 전투가 발생하게 되더라도, 모가디슈와 같은 인구밀집지대에서 포병을 사용할 경우 UNITAF가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말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해병 포대장 한명의 경우 보유 대포 중에서 M101A 105mm 곡사포 2문만을 상륙시켜 필요시 조명탄 사격만 하도록 조치하였다. 포대 소속 나머지 요원들은 소총수로써 활용되어 주로 모가디슈 경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다른 포대 소속 해병들도 상륙하면서 대포를 배에 남겨두었으며, 급조 보병대대처럼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UNITAF 사령관은 미국에 아직 남아있던 나머지 해병대 소속 포병들의 투입을 취소시켰다.

 

 이어 제 10 경산악사단 소속부대들도 소말리아에 도착한다. 이들의 야전포병의 경우엔 아예 미국으로 다 귀환한다. 당시 공격헬기와 박격포면 화력지원은 충분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해병대와 마찬가지로 포병소속 요원들은 다른 임무에 투입된다. 사단병력 일부가 모가디슈 남쪽에서 키스마요(Kismayo)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단내 지원자산으로 증강된 제 10 경산악사단 포병대의 참모요원들이 키스마요 과업부대(Task Force Kismayo) 사령부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1993년 5월 4일에 UNITAF가 임무종결될 때까지, 미국 야전포병이 소말리아에서 발사한 총 포탄 수는 조명탄 1발에 불과했다.

 

 UNITAF가 떠나면서 유엔이 소말리아에서의 임무를 승계하게 된다. 소말리아 전토에 걸친 국가건설(nation building)에 해당하는 임무를 UNITAF보다 훨씬 적은 규모의 군사력 - 미국의 신속대응군(quick reaction force, QRF)과 미국의 병참지원이 포함되어 있었음 - 으로 수행하다보니, 금방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가장 주요한 것으로는 소말리아 군벌 지도자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med Farah Aideed)의 저항을 들 수 있었다. 아이디드 쪽 사람들이 6월 5일 유엔군 소속 파키스탄 병력 24명을 살해함으로써, 군벌사냥이 시작된다. 이어진 기간 동안 모가디슈에서는 몇차례의 대규모 군사충돌이 벌어졌으며, 이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태는 10월 3-4일간 벌어진 일명 블랙호크 다운(Black Hawk Down) 전투였다. 당시 한쪽 편은 아이디드의 민병대 및 지지자들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미군 특수부대(US special operations force, SOF)와 QRF가 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로 말미암아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6개월 내로 군부대를 철수시킨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병력 자체에 대한 철수 전까지의 보호를 위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은 소말리아 내의 미군 전투역량을 증강시킨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미 지상군이 2배로 늘어났고, 또한 화력도 강화시킨다. 이러한 자산들은 합동과업부대 소말리아(Joint Task Force Somalia)라는 명칭으로 1993년 10월에 투입되었으며, 여기에는 야전포병이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합동과업부대(JTF) 지휘관은 칼 에른스트 소장(Major General Carl Ernst)이었으며, 모가디슈에 도착하자마자 손아귀에 있는 화력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일련의 훈련 및 작전을 통하여 그는 아이디드와 기타 잠재적인 말썽꾼들에게 만약 미군에게 군사작전을 시도할 경우 어떤 꼴을 당할지를 각인시킨다. 에른스트가 실시한 가장 큰 무력시위(show of force)는 연합상륙작전 형태였는데, 당시 미육군 기계화/전차 중대팀 1개와 미해병 대대상륙팀 1개, 2개 기계화중대 팀, 항공모함 및 항공기, AC-130 건쉽 등, "합동과업부대가 갖고 있는 모든 무기"들이 동원된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 에른스트가 회고한 데 따르면, "우리는 전 지역에 걸쳐 화력지원이 가능하도록 포병을 위치시켰다"라고 한다. "이로써 필요한 경우 모가디슈로 사격할 수 이도록 카퍼헤드탄(Copperhead)의 (?)각도(capture angles)가 제공되었다. 그날 밤, 포병은 정밀 기록사격(precise registration)을 위하여 바다로 사격을 실시했다... 이 작전은 단지 대규모의 화력 시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군이 전투에 말려드는 경우를 대비하여, JTF 소말리아는 적을 압도할 수 있는 보복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에른스트는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여 우발사태계획을 입안하였고, 그 계획 내의 첫번째 단계는 시가전과 무고한 민간인 살상을 피하면서도 모가디슈의 군벌 민병대를 격파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실제 계획이 집행되어야 할 경우, 성공의 핵심은 정밀타격무기에 있었으며, 먼저 훈련된 저격수로부터 시작하여 AC-130, TOW 와이어 유도미사일, 해병대의 레이저유도 헬파이어 미사일, 해병 및 해군 항공기들의 레이저유도 폭탄 순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병기고에는 또한 육군의 레이저 유도 카퍼헤드 포병 탄약도 있었다. 이들 무기 대부분은 대단히 복잡했으며, 따라서 사용부대는 작동시스템들을 제대로 동기화시키기 위하여 매일 훈련과 리허설을 반복해야 했다. 군벌들은 미군이 1994년 3월 말에 철군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JTF 소말리아가 준비한 막강하고도 정밀한 보복을 굳이 유발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이티 (Haiti)

 

 소말리아에서 철수한 해인 1994년 9월, 제 10 경산악사단의 일부부대는 아이티로 향하게 된다. 3년 전, 아이티에서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로 추방당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수백명의 아이티 난민들이 보트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익사하고, 나머지는 입국을 거부당하고 돌아가게 된다. 이들 "보트 피플(boat people)"의 물결이 지속되고, 이들의 고난이 부각되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되며, 여론은 대통령과 참모들로 하여금 이러한 바다에서의 인도적 참상을 끝내기 위해 아이티로 군사적 개입을 하여 민주적으로 당선된 아이티 대통령을 복귀시키도록 압력을 넣게 된다.

 

 미군의 개입에 대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제 18 공수군단(the XVIII Airborne Corp) 측에서는 사단포병을 동반한 제 82공수사단의 강행입국 방안(forced entry option)을 계획하게 된다. 미국 대표단과 아이티 군사정권간에 막판 합의로 이들이 평화적으로 물러나기로 동의한 시점은, 사실 이들 부대가 이미 공중에 위치하여 아이티에 전투강하(combat drop)을 하기 몇분 남지 않았던 상태였다. 기동 중이던 미군 강습부대는 복귀하였으며, 그 대신으로 허가 속에 입국한 두번째 부대는 제 10 경산악사단 일부를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아이티에서의 미국의 "간섭침공(intervasion)"은 이로써 대단히 엄격한 교전규칙(ROE)에 근거한 안정화 작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사단포병을 가져야 할 심각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며, 이에 대포들은 남겨졌으며, 포병 참모부들의 경우에는 3개 기동부대 중 하나 - 마운틴 과업부대(Task Force Mountain) - 의 사령부를 만드는 데에 투입되었다. 이는 동 사단이 소말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적용했던 조직형태와 유사하며, 아이티에서도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러한 사령부 역할 회에도, 포병요원들과 기타 사격지원요원들은 "독특한 상황에서의 전투기술에 적응해야" 했다. 여단 화력지원부대(brigade fire support element) 요원들의 사례를 보면, 이들은 민군작전(civil-military operation, CMO) 계획수립 및 수행에 도움을 주었고, CMO 센터(CMOC)를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이곳에서 지방정부와의 문제, 주민 문제, 공공 사업, 인프라 보수, 경찰기관 조직 등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이러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외에도, 포병은 다목적 사격장(multipurpose range complex) 건설에 투입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미군이 아이티로 가져올 수 있었던 모든 포병자산에 의한 , 실탄사격을 포함한 훈련들을 실시할 수 있었다.

 


보스니아 (Bosnia)

 

 아이티가 이제 안정화 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였던 1995년 12월 경, 미군은 보스니아에 파병되어 조인트 인데버 작전(Operation JOINT ENDEAVOR)을 수행하는 다국적군의 일원이 된다. 이 작전은 발칸 반도 지역에서 전쟁 중이던 여러 파벌간의 평화협상에 뒤이은 안정화작전/평화작전(stability/peace operation)이었다. 파병된 미군의 중핵은 중사단(heavy division)이었던 제 1기갑사단(1st Armored)이었으며, 동 부대는 사라예보에 사령부를 두고 있는 나토 신속대응동맹부대(NATO Allied Ready Reaction Corps)의 지휘통제를 받는 집행군(Implementation Force, IFOR) 휘하 3개 다국적 사단 중의 하나인, 이글 과업부대(Task Force Eagle)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보스니아의 상황은 대단히 복잡했으며, 평화협정도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다. 비록 IFOR에 할당된 임무는 정보작전(information operation)이나 민사업무(civil affairs), 심리작전(psychological operations, PSYOP) 등에 해당되었지만, 실제로 상황에 따라서는 재래식 전투에 뛰어들 준비도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중사단이 갖고 있는 전투력, 예컨대 155mm 자주포 전력 등은 이들 다양한 보스니아 무장단체들이 함부로 이런 도발을 하지 못하게 할 억제력으로서 기대되어졌다. 따라서 몇몇 포병 자산들이 과업부대의 화력과 결의를 과시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자주포 소대 - 일명 "이동 토치카(mobile pillboxes)" - 가 순찰을 돌거나 혹은 기타 임무수행 중인 IFOR 부대를 호위하게 될 경우, 혹은 잠재적으로 적대적일 수 있는 박격포 진지나 병력 위로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경우 등에는 상당한 위협 효과를 발휘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민감한 지역(hot spot)"에 이러한 무기들이 적시에 도착함으로써, 전반적인 진정효과를 불러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억제효과가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포병부대는 전투로 신속히 이행하기 위한 절차와 기계획 목표물들을 선정해 두었다.

 

 베트남에서와 비슷했던 점 몇가지를 꼽자면, IFOR이 고정된 화력진지(fixed firebase)를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이곳 기지들에 대한 보호임무에 자주곡사포들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약 한 기지가 지상군 공격을 받게 되면, 주변을 둘러싼 곡사포와 기타 무장차량들이 적에게 직접사격을 가하게 된다. 또한 포병은 대포병사격을 실시할 잠재 목표물(likely counterfire targets)을 선정해 두고 반응시간 연습을 함으로써, 기지가 박격포나 포병의 간접사격에 노출되는 경우에 대비하였다. 대포병레이다(counterfire radar)는 IFOR에 충분하게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이러한 목적에 활용될 수 있는 자산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자산은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저격수 탐지임무에 종종 활용되게 된다). 또한 아군 병력이 여러가지 임무 수행을 위해 기지 밖으로 나갔으나 기갑, 항공, 포병의 호위를 받지 못하는 경우, 포병 참모장교들이 근접방호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순찰나가는 보병들은 아군 포병이 이미 순찰로 근처의 잠재적 매복위험지대 좌표를 미리 따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무장단체와의 교전 발생시 근접항공지원과는 달리 단지 몇 분 내로 포병화력지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전의 수많은 작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포병부대는 대포와 무관한 여러가지 임무들에 병력을 지원하였다. 보스니아에서는 포병요원들이 지뢰조사(mine strike investigations)라던가, 무기저장소 사찰, 순찰 및 경비임무, 호송임무, 식당관리 임무(KP) 등을 수행하였다. 매우 특이한 사례 하나로, 포병장교 2명이 비살상 임무 - 예를 들어 경찰업무, 민사업무, 인도적 지원, 심리 및 정보작전 등 - 를 수행하는 아군 및 민간인들을 영접하고, 이들에게 포병의 사격계획 방식 및 절차들을 가르쳐 줌으로써 보스니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그들의 업무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았던 일을 꼽을 수 있다. 이 논문이 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 임무의 경우 계속 진행되는 중이다.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야전포병의 역할 (The War on Terror and the Role of Field Artillery)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들이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와 펜타곤(Pentagon)을 타격한 이후, 미국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테러리즘에 대한 글로벌 전쟁(Global War on Terrorism)'이라고 부른 싸움을 주도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의 첫번째 주목된 군사목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었는데, 이들은 9/11 테러공격을 계획하고 수행한 알 카에다 조직을 지원하며 은신처와 훈련장을 제공한 바 있었다. 최초 인듀어링 프리덤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으로 불린 작전기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특수부대(SOF)를 파견하여 당시 탈레반과 싸우고 있던 느슨한 연합군인 북부동맹(Northern Alliance)을 지원하게 된다. 이어 미군의 공중전력과 동맹측의 자체 화력으로 탈레반은 주요 도시들과 기타 방어거점들에서 쫓겨나게 된다. 2002년 초, 제 10 산악사단과 제 101 공수사단이 주축이 된 재래식 미 지상군이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하여, 특수부대와 아프간 전사들과 함께 아나콘다 작전(Operation ANACONDA)을 개시하여 샤에콧 산맥(Shah-e-Kot) 지역으로 탈레반 및 알카에다 전사들을 몰아넣게 된다. 이 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계속 재래식 전쟁 단계였다. 그러나 적군의 전술들과 "구조화되지 않은(unstructured)" 적의 조직형태, 산악지형 조건 등은 이 작전에 분명한 비정규전적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적들은 화력과 병력이 열세였으나, D-30 포와 박격포 등을 활용하여 격렬한 저항을 실시한다. 잘 구축된 참호에 틀어박힌 적들에 대항하여 대테러 연합군은 막강한 화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다양한 많은 무기체계들이 투입되었음에도, 한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야포들이 빠졌던 것이다.

 

 이러한 생략은 의도적인 것으로, 미국 중부군 사령관이었던 토미 프랭크스 대장(General Tommy Franks)의 결정이었다. 당시 미육군의 크루세이더 자주포(Crusader howitzer)를 투입하고자 원했던 육군참모총장 에릭 신세키 장군(Eric Shinseki)과의 논쟁에서, 프랭크스 장군은 이 지역에서 대포의 공중수송(airlift)이 곤란하고 고도 문제로 사격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 결과 제 10 산악사단과 제 101 공수사단과 함께 투입된 곡사포 요원들은 대신에 120mm 박격포를 사격하는 훈련을 받게 된다. 120mm 박격포는 4400파운드가 나가는 M119 105mm 곡사포보다 보다 기동성있는 무기인 반면, 사거리와 정확성 면에서는 뒤쳐지는 무기였다. 그 결과 샤에콧 산맥에서의 전투에서는 박격포와 항공기가 보병에 대한 근접지원을 수행하게 된다. 그 결과는 본토에 있는 대포들을 유지할 필요성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게 된다.

 

 아나콘다 작전에서는 많은 적들을 사살하긴 하였지만, 또한 너무나 많은 적들이 도주에 성공하였다. 이 작전이 있은 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제 10 산악사단장 프랭클린 하겐벡 소장(Major General Franklin Hagenbeck)은 105mm 곡사포를 배치하지 않은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105mm 곡사포 없이도 임무 완수가 가능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논리를 살펴보면 공중수송(airlift) 가능성이 더 중요했고, 박격포쪽이 105mm보다 이 측면에서 훨씬 유리했다는 논지였다. 덧붙여서 만약 곡사포가 배치되었을 경우, 고지대라는 문제 때문에 헬리콥터 수송에 대한 "제약조건"들이 발생하고, 거친 지형조건 탓에 대포와 탄약을 위치시키는 과정에서 위험 요소가 존재하며, 현지에 흔했던 기상 조건들도 이에 악영향을 미치며, 곡사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할당해야 하는 공중전력과 지상군 병력이 낭비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만약 곡사포가 이 전장에 가용했더라도, 자신이라면 첫날에는 이것을 전장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중간 타협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는 105mm가 없었기에 상관없었다." 라고 하였다. 이어 하겐벡은 아파치 AH-64 공격 헬리콥터와 A-10 공격기, AC-130 건쉽 등이 제공한 화력지원에 대해서도 찬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절차상 문제로 근접항공지원 요청이 있은 후부터 수시간 뒤에야 지원이 실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항공기가 접근할 때 발생하는 소음으로 인하여 적이 동굴 속으로 숨을 수 있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2천파운드 폭탄이 정확히 직격하는 경우를 빼면 별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야전포병 커뮤니티에 속한 많은 장교들 역시도 아나콘다 작전 당시의 근접항공지원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며, 만약 곡사포였다면, 특정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항공기보다 적시에 동등한 효력의 화력지원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프랭크스 장군과 하겐벡 장군이 제시한 포병을 투입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반론은 우선 전개(deployment) 문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야전포병 포대를 전개시키는 데에 필요한 공중수송(airlift)의 양은 박격포 부대를 전개시키는 데 필요한 양보다 오히려 적게 든다는 주장이었다. 이 관점의 지지자들은 박격포가 분명히 곡사포보다 훨씬 가볍고 기동성이 우수하긴 하지만, 반면 곡사포가 사거리, 화력, 정확도에서 훨씬 우수하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을 상쇄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박격포의 경우에는 적군을 사거리 안으로 넣기 위해서 훨씬 가깝게 적에 근접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간과 지원자산이 소모된다. 박격포 포판(baseplate)를 지상에 고정시키는 과정에서도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박격포가 적과 근접한다는 점은, 적군의 박격포가 아군 박격포에 대하여 대포병사격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되며, 실제로 아나콘다 작전에서 문제점으로 드러난 바 있다. 또한 베트남전에서도 지적되었던 곡사포의 강점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박격포의 경우 교전이 발생중인 착륙장("hot" landing zone)에 대하여 곡사포만큼의 소탕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착륙장에서 적의 화력을 뒤집어쓰고 있는 아군에게 곡사포만큼의 신속한 화력지원을 하지 못함으로써 수많은 아군의 인명피해를 유발했다는 것이었다. 곡사포 지지자 측에서는, 곡사포가 근접화력지원 능력이나 적의 포병을 격파하는 능력에 있어서나 박격포에 비하여 월등하게 우수한 무기였다. 따라서 이들 주장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곡사포가 배치되어야 했으며, 또한 아나콘다 작전에도 투입되었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곡사포 요원들을 120mm 박격포에 배치시킨 결정이야말로 "포병에 있어서 잘못된 방향으로의 한걸음"이었다고 평가된다.

 

 야전포병이 저강도 적대세력(low-intensity hostilities)을 상대하는 데 있어 부적절하다는 명제에 대하여, 아프가니스탄 전역 초기의 대규모 전투들은 많은 이들에게 이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논란은 아나콘다 작전이 끝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비정규전적 게릴라전으로 전환되면서도 계속되었다. 2002년 7월에 제 82 공수사단 소속 1개 여단이 아프가니스탄에 입성하였을 당시, 이들과 함께 M119 105mm 곡사포 1개 포대가 들어왔으며, 이로써 이후에 교대로 들락날락한 후속 재래식 여단들에 대해서도 선례가 되었다. 이 새로운 전쟁단계에 있어서 포병은 주로 3가지 종류의 임무에 투입되었다: 대규모 전투작전, 화력진지(firebase) 및 전방작전기지(forward operating base) 지원, 보급작전(logistics operation) 등이다. 일부 포병부대의 경우 인력이나 장비가 부족하였다; 이들은 또한 분권화된 작전(operations that were decentralized)에 빠져드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는 베트남에서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포대 소속 장교들과 화력지원요원들은 "여러 작전에서 비전통적이고 비교리적인 방법으로" 작전수행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전투작전은 이곳 저곳에서 수시간 내지 수주간 지속되었고, 박격포와 야포들은 지상수송 혹은 공중수송으로 투입되었다. 수송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동성 문제는 자주 제기되었고,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거친 계곡을 따라 지속적으로 이동이 이뤄졌기 때문에... C 포대(105mm)는 지상의 대전차 중대나 기타 공중공격자산의 속도를 따라잡는데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곡사포에 필요한 대량의 탄약은 트럭들을(우리는 단지 2대만을 가져왔다) 과부하에 걸리게 했다. B 포대의 박격포 소대의 경우에도 고작 수송용 게이터(gators)만으로는 진지 변경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따라서 기동대대의 보급수송소대(supply and transport (S&T) platoon)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들 외에도, 상기한 부대들은 수많은 전투 임무에 투입되었음에도 "사격이 제한적"이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곡사포는 대부분 조명탄을 쏘는 경우, 혹은 고폭탄이라도 "현시(presence)"효과를 위해서, 혹은 "가끔 반항적인 지역주민들에게 강한 결단력을 보여주기 위한" 위력시위를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부분의 화포는 화력기지(firebase)에 위치하였으며, 이곳에서 기동부대나 특수부대, 기타 우방군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사격을 실시하였다. 적군이 순찰대를 매복공격할 경우, 잘 무장된 보병화력과 지원포대의 고폭탄 사격이 조합된 "제병협동식 접근법(combined arms approach)"이 효과적인 대응임이 증명되었다. 적이 실시하는 가장 주요한 위협은 화력기지에 발사하는 107mm 다연장 로켓이었다. 미군 포병들은 Q-36 파이어파인더 레이다(Q-36 Firefinder radars)를 활용하여 이들 로켓들이 발사된 위치를 역추적하긴 하였으나, 대포병사격을 실시하는 것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레이다는 이들 로켓들이 어디서 발사되었는지는 알려줄 수 있었으나, 이곳이 황량한 공터인지 인구밀집지대인지는 알려줄 수가 없었다. 또한 엄격한 교전규칙에 따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상 위험이 있는 경우엔 치사성 반격은 할 수가 없었다. 포병은 조명탄을 발사함으로써 적군 박격포 혹은 로켓 팀에게 그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고 위협할 수는 있었지만, 이는 역으로 적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통상적인 반격방식은 레이다로 확인된 지역으로 순찰대 혹은 공격헬기를 보내어 적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포병이 적의 위치를 확인할 수는 있으나 해치우지는 못한다는 점은, 다시금 저강도 전장에서의 포병의 유용성 논란을 제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포병부대는 보급작전(logistics operations)도 수행하였으며, 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타 수많은 잡다한 임무, 예컨대 기지방호(base security)(이 경우 종종 포병요원들을 대포에서 빼내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정보작전(information operations, IO), CMO, 비행장 지원 등등을 수행해야 했고 이는 전통적인 포병 임무들과 경쟁하게 된다. 비록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된 감편 포병부대들이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해야 했음에도, 이곳에서 복무한 장교들은 포병이 탈레반을 몰아내고, 탈레반 잔당들과 알 카에다 전사들을 몰아붙이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비관론자들이 계속 주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미 육군이 보다 경량의 고기동 화포를 개발하기 전까지는 "비재래식 전장에서의 포병의 실용성"문제는 계속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2003년의 제 2차 걸프전쟁(the Second Gulf War), 즉 이라크 프리덤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은 이러한 논란을 잠시 뒤로 밀려나게 만들게 되는데, 이 중강도 분쟁에서 야전포병은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상황이 전쟁에서 안정화 작전으로 전환됨에 따라서, 포병들은 다시금 거의 훈련받지 않은 분야의 과업들을 수행해야 했다. '야전포병지(Field Artillery)' 최근판에서는 전쟁 종료 후의 포병부대의 임무들에 관한 몇몇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 목록에는 자체방호(force protection), IO, CMO, PSYOP, 도보순찰(dismounted patrol), 석유시설 경비, 은행경비, 감옥 관리, 선거지원 및 지방정부 수립 지원, 건물수색 및 무기수색(clearing building and weapon caches), 비정부기관(NGO) 접견장 설치, 훈련 등이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패배한 이후 폭도(insurgencies)들이 들고 일어난 상황에서, 이들이 주로 도심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야전포병이 전투활동에 가담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었다. Q-36이 종종 목표물을 잡아내긴 했으나, 대대지휘부 혹은 여단지휘부에서는 먼저 그 지역에 우방군이나 민간인이 있는지 여부부터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격명령 혹은 사격 금지명령을 받을 때까지 종종 수분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실제 사격을 한 뒤에도, 그 효과에 대해서 제대로 피드백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일선부대에서는 포병이 폭도들의 히트-앤드-런 전술에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실망감과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만 2004년 후반 팔루자에서의 폭도진압작전에서 포병이 수행한 역할은 다소 만족스러웠다. 미군과 이라크 지상군이 이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미군 항공기와 포병, 박격포가 폭도들을 타격하였다. 지상 공격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육군의 M109A6 팔라딘 155mm 자주포와 해병소속 화포들, 박격포 등이 요새화된 진지와 기타 항공감시 및 현장요원들에게 확인된 목표지점들을 타격하였다. 대다수의 사례에서 포탄은 목표물에서 5야드 거리 이내에 낙하하였다. 화포로 이 정도의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항공기나 기타 무기체계들이 종종 동원되었다. 대체로 야전포병이 작전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결론 (Conclusion)

 

 중세 후반에 원시적인 형태로 출발한 야전포병은 오늘날까지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통해 진화하였다. 13세기~ 14세기의 거추장스럽고 부정확하며,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던 직사 공성무기는, 오늘날 훨신 가볍고 빠른 사격이 가능하며, 기동성이 있고 간접사격이 가능한 견인 및 자주 형식의 대포로 변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과거 수세기 동안 발사되었던 돌 혹은 구형탄(stone and solid shot)은 이제 저 멀리 사라지고, 이제는 정밀유도탄약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병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것이 활용되는 전쟁터의 양상도 달라져왔다. 오늘날 점차 늘어나는 수많은 무기체계들이 적에게 강력하고 정확하게 탄약을 투발할 수 있게 되었다. 임무 수행을 위하여 필요한 화력지원을 조율하는 문제는 이제 최신의 컴퓨터 기술과 함께 이를 절차에 맞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장교들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일이 되어버렸다. 또한 다양한 군사작전들이 그 유형 측면(typologies)에서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포병은 더이상 과거처럼 재래식 군대간의 고강도 분쟁에서만 쓸 수 있게 제한되지 않는다. 미군의 경험들만 살펴보아도 화포는 미국이 관여한 고강도, 중강도, 저강도 분쟁에서 두루 활용되었다. 이 기다란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이 세가지 종류의 분쟁 중에서 마지막 종류 - 즉 오늘날 전쟁외 작전(MOOTW)으로 분류되는 것 - 에서의 야전포병의 역할이 나머지 2종류의 분쟁에서의 역할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면에서 같은가에 관한 것이다.

 

 2세기가 넘는 기간에 걸친 전쟁외 작전에서의 미군 야전포병의 경험들을 요약하면서, 우리는 안정화 작전에 해당되는 종류의 많은 작전에서도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는, 야전포병이 고강도 분쟁, 무제한 전쟁, 재래식 전쟁에서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종 안정화 작전은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유도되며, 이는 제약조건 - 특히 제약적인 교전규칙 - 들을 우방군에 부과하게 된다. 미군 야전교범 3-07 '안정화작전 및 지원작전(Stability Operations and Support Operations)'에서는 전반적인 화력지원에 관해서, 특히 야전포병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으며, 관련사항으로 포병이 지휘관에게 선사하는 강력한 파괴적 전투력을 언급하면서도, 또한 화포가 갖는 억지능력, "필요한 최소한의 힘"만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조건, 간접피해(collateral damage)를 피해야 한다는 요구사항 등도 강조하고 있다.

 

 미국 야전포병의 역사적 경험들은 이러한 교리 내용들을 지지하고 있다. 인디언 전쟁에서 현대의 발칸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까지의 사례를 살펴보면 비정규전 전장에서의 포병의 역할은 패턴이 존재하며 그것이 계속 반복됨을 보여주고 있다.

 

 - 전투시, 화포는 공세 및 방어에 공히 유용하며, 이는 특히 적대적인 비정규군이 공격을 위해서 혹은 요새진지에서 방어하기 위해서 뭉쳐있을 경우 효과적이다.

 

 -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거나 충족될 가망이 없는 상황이라도, 몇몇 지휘관들은 만일을 대비하여 화포를 준비시켰는데, 이는 이 글에서 "화력 보험(firepower insurance)"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 전투에 못미치는 상황들에 있어서도, 포병은 종종 억제전력, "현시"효과, 또는 무력시위의 효과를 제공한다.

 

 - 마지막으로, 미군 포병은 200여년간에 걸쳐 광범위한 범위의 잡무들을 수행하는 법을 배웠는데 - 통상 "현업훈련(on-the-job training)"을 통해서 - 이것들은 대포를 쏘는 것과는 무관한 것들이었지만, 어쨌든 해당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인디언 전쟁 기간 동안, 커스터와 같은 여러 미군 장교들 중에는 야전포병이 비정규전이나, 기타 적대세력이 없는 환경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믿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의 군사개혁 과정에서도 다시 등장하였다. 미군이 탈냉전 시기와 테러와의 전쟁 시기에 맞게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미육군전역계획(Army Campaign Plan)에서는 포병과 기갑, 방공, 공병, 보급부대를 줄이고 헌병, 수송, 민사작전, 군사정보, 특수부대 쪽을 강화시키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야전포병을 감축해야한다는 논리의 중심에는 기동성과 정밀도, 그리고 무기체계의 과다성 문제가 놓여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보다 쉽게 투입할 수 있는 다른 무기로 야포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느냐의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는 그 초점이 주로 재래식 전쟁에서의 포병의 역할에 맞춰져 있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이 그 논란의 범위를 전쟁외 작전까지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야전포병을 방어목적으로 사용하는 부분에 한정한다면, 미군의 안정화작전에 있어서 그 용도가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다소 성급한 면이 있다. 적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부대가 근접화력지원을 요청하는 경우, 포병의 반응 속도는 대부분의 항공기에 비해 훨씬 빠르며, 이는 비정규군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고도로 정교한 정밀유도탄약의 경우 그 가격 문제로 인하여 다른 무기체계에서는 사용이 많이 제한된다. 또한 포병용의 정밀탄약들이 계속 개발되면서 요새화된 적진이나 또는 민간인 지역 내부에 위치한 목표물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만큼 정밀도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포병이 더 이상 지상에서의 무력시위 무기로서의 지위는 차지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조명탄 사격 및 고폭탄 사격은 적대세력이나 불안정한 주민들에 대하여 꾸준히 억지효과를 발휘한다.

 

 요약하면 야전포병은 본래 재래식의 고강도 전장에서 주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서, 특히 미국 군사적전사를 통해 보면, 야전포병은 비정규전과 기타 폭력이 존재할 위험이 존재하는 다양한 안정화 작전에 적응해 왔다. 이러한 점은 대체로 전쟁외 작전에 부합하는 내용이며, 이 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비록 기동성 문제와 기타 안정화 작전에서의 제약사항들이 문제가 되어왔긴 하지만, 앞으로의 근미래에도 전쟁외 작전에서 포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임을 확신해도 괜찮을 것이다.

 

 

(끝)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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