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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1947년-48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Indo-Pakistani Conflict of 1947-48) - 글로벌 시큐리티

박용수 2014. 10. 27. 17:11

< 원문출처: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indo-pak_1947.htm >

 

 


1947년-48년의 인도-파키스탄 전쟁(Indo-Pakistani Conflict of 1947-48)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첫번째 전쟁은 1947년 10월에 시작하여 1948년 12월에 종결되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첫번째 전쟁의 원인은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국으로서 탄생한 뒤 발생한 카시미르의 지위 문제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습니다. 영국의 정책은 각각의 대공국들이 지리적 위치 및 인구 구성을 감안하여 파키스탄 혹은 인도 측에 가맹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공국들의 최종 지위는 쉽게 결정지을 수 있었으나, 카시미르와 2개의 다른 대공국의 지위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카시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전략적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또한 지배층은 힌두계인 마하라자가, 인구의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구 중 상당수가 시크교도 및 힌두계였으나, 무슬림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 속에서 마하라자는 어느 쪽에 가입할 지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양국 모두 카시미르 정부를 지배하기 위하여 상당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은 스스로를 남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슬림 국가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카시미르는 인도 대신 파키스탄에 가맹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키스탄에 불행하게도, 비록 카시미르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긴 했지만, 그 인구 대부분은 파키스탄에 통합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국이 되거나 인도 측과 통합되기를 바랬습니다.

 

 파키스탄과 카시미르 정부간의 갈등 정도는, 마하라자가 결정을 미루면서 파키스탄과 카시미르 내 친파키스탄 세력들이 불만을 품게 되며 격화됩니다. 남서 카시미르 지역의 푼치(Poonch)에서 지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1947년 10월 초에 분쟁은 시작됩니다. 10월 20일, 파키스탄군이 이들 부족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합니다. 파키스탄군은 전역 초기에 우리(Uri), 잔가르(Jhangar), 라주아라(Rajuara), 나우세라(Naushera)를 점령하기 위하여 여러 방향으로 진군해 들어옵니다. 파키스탄군은 1주일 내에 카시미르 수도인 스리나가(Srinagar)를 점령하고자 계획하였습니다.

 

 1947년 10월 22일, 부족군대 라쉬카르(Lashkar)는 약 5천명 가량의 병력으로 아보타바드(Abbottabad)로부터 카시미르 계곡을 향해 침공을 개시합니다. 10월 23일, 부족군대와 파키스탄 군대는 카시미르 정부군 대대를 압도하며 첫날 돔멜(Dommel)을 함락하는 등 초반 커다란 성공을 거둡니다. 4일째 되는 1947년 10월 26일, 부족군대와 파키스탄 군대는 스리나가 근방에 도달합니다. 도그라(Dogra) 군대는 격퇴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하라자는 수도 스리나가에서 탈출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잠무(Jammu)로 도주하였습니다.

 

 부족군대와 파키스탄 군대는 우리(Uri)에서 격렬한 저항을 맞이하게 되는데, 비록 무슬림 병력 상당수가 탈영하긴 하였으나, 카시미르 정부군은 격파되기 전까지 약 2일간 파키스탄 군대를 지연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카시미르 군대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교량들을 파괴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이에 따라 파키스탄군의 진격은 하루 더 늦어지게 됩니다.

 

 남쪽 잠무 지역에서의 파키스탄군의 작전은 덜 성공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상당한 저항이 있어서 파키스탄군이 점령하려고 했던 대부분의 마을들과 거점들에 대한 점령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리를 함락시킨 파키스탄군과 부족군대는 바라물라(Baramula)를 점령하고 스리나가를 향해 진군합니다. 파키스탄측 군대는 스리나가로 전기를 공급하는 마후라(Mahura) 지역의 핵심 발전소를 손상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어 침공군은 스리나가 근방에 위치한 비행장의 수마일 근처까지 접근에 성공합니다.

 

 이 시기까지, 파키스탄측 군대는 단지 카시미르 정부군만을 상대하면 되었습니다. 패배에 직면한 마하라자는 인도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인도는 카시미르가 인도에 가맹하고 카시미르 총리가 이러한 가맹에 동의한다면 도와주겠다고 제안합니다. 마하라자와 카시미르 총리가 이 조건에 동의하면서 10월 26일부로 마하라자는 가맹 조약(Instrument of Accession)에 서명하게 됩니다.

 

 라쉬카르 군대가 카시미르 수도에 진입하려 준비하던 시점에서, 인도 총독이자 임시 방위위원회 의장이었던 마운트 배튼 경(Lord Mountbatten)은  인도측을 위하여 엄청난 속도로 반응하였고, 부족군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인도군을 공중수송을 통해 투입하였습니다.

 

 잠무 주와 카시미르 주에 인도군이 개입하자, 카이드 이 아잠(Quaid-e-Azam)은 신속하게 반응하여 1947년 10월 27/28일에 그레이시 장군(General Gracy)(파키스탄군 총사령관) 에게 명령하여 이곳에 병력을 투입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 영국인 장군은 총독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습니다. 정황상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그가 카이드의 지시를 대놓고 무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반역행위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이 당시 해당지역 4개 주지사 전부와 발루치스탄 지역 총독 대리(Agent to the Governor General), 그리고 파키스탄군 3군 총장 모두가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레이시 장군은 "합법적인 지휘권자" 보다는 오히려, 뉴델리에 위치하고 있는 인도 및 파키스탄군 합동 총사령관인 오친렉 원수(Field Marshal Auchinleck,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Joint Command of India and Pakistan Armed Forces)의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오친렉 원수는 이 사태에 대해서 런던의 육군 총참모장에게 보고하였고, 그는 즉각 이 사태를 "진정시키라(stand down)"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러한 런던측의 지시에 힘을 얻은 오친렉은 라호르(Lahore)로 날아가 카시미르에 대한 "침략행위"는 파키스탄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영국인 장교들이 자동적으로 철수하게 되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카이드를 위협합니다. 이 최종통첩은 파키스탄군 지휘구조를 최하위 전투조직에 이르기까지 붕괴시킬 것이었습니다. 당시 파키스탄군 장교 대부분은 영국인이었기에, 이들이 철수할 경우 파키스탄군의 전투력은 급감할 것이었습니다. 카이드는 육군 동원령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도는 히말라야의 카시미르 주에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네루의 친구였던 마운트배튼 경은, 파키스탄이 손해를 보게 하고 인도를 돕는 상황에서는 거의 기회를 놓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도군 161 보병여단이 파병되어 부족군대의 진군을 격퇴합니다. 1947년 11월 초, 161여단은 장갑차를 동원하여 역공격을 시도, 파키스탄군을 기습하여 이들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161여단은 스라나가 비행장으로 날아가서 이곳에서부터 파키스탄측 군대를 격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러한 초기의 성공을 바탕으로, 인도군은 비행장을 확보하고 스리나가에 전력공급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군의 역공격 모멘텀으로 말미암아, 파키스탄군은 총 퇴각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에 161여단 일부는 바라물라와 우리를 탈환합니다.

 

 이러한 초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47년 12월에는 인도군이 패배를 겪게 되는데, 이는 보급상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인도 병력 대부분은 카시미르와 잠무의 산악지대에서 싸우는 데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고지대 전투나 추위 속에서 견디는 경험을 갖고 있는 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파키스탄측 군대가 국경지대로부터 인도군을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심각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1948년 봄이 되면 인도군은 상실한 곳 일부를 탈환하기 위한 또다른 공세를 개시합니다. 이 해의 말이 되면 파키스탄 정규군도 투입되어 잠무 시(city of Jammu)로 지향됩니다. 1948년 봄부터 12월까지의 전투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벌어져, 파키스탄군은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작전하게 됩니다.

 

 분쟁의 강도가 심화되고, 인도측이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여 파키스탄군을 몰아내지 않는 한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인도 지도자들은 국제 연합에 호소하게 되었으며, 국제연합은 1948년 6월에 옵저버(Observer)를 파견하게 됩니다. UN에서 주선한 휴전은 1949년 1월 1일 부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양측 합하여 1500명의 병사가 사망하였으며, 파키스탄 측에서는 카시미르의 약 40% 가량을 차지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는 자유 카시미르라는 의미를 갖는 아자드 카시미르(Azad Kashmir)가 세워지게 됩니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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