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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전쟁의 기억 근대의 기록 / 2010년, 문화재청

박용수 2014. 10. 27. 17:12

< 원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news/newsBbzView!view.action?id=155542872&curPage=45&strWhere=&strValue=&schWhere=&schDirect=&sectionId=add_cate_1_sec_1&sdate=&edate=&category=&mc=NS_01_10) >

 


 

 





전쟁의 상처 문화재로 기억되다

근대는 ‘문명’과 ‘야만’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들은 한국 근대사를 ‘문명의 시대’로 기억하기 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지배당한 ‘야만의 시대’로 기억한다. 한국근대는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싸운 민족운동의 시기 즉 독립전쟁의 시기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인들은 이제 야만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분단시대가 시작되었다. 근대가 끝이 나고 현대사로 전환하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야만’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근대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895년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 의병전쟁, 일제 강점기의 독립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까지 모두 7번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펼쳐졌다. 2010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해이다. 문화재청은 한국 근대 군사문화재 7점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 한국전쟁 개전 초 대한해협 전투에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킨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의 마스트, 창군 초기 육군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육군기’, 최초의 공군기인 ‘L-4 연락기’, ‘휴전협정 조인 시 사용된 책상’ 등 한국전쟁 군사문화재 4점. 그리고 근대사가 시작되는 시기인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 군인들이 방탄복으로 착용한 ‘면갑綿甲’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 군복, 20세기 초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전쟁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현이 사용하던 창의검倡義劍’이 그 대상이다.

19세기 중엽 ‘면갑’에 담긴 조선의 모습

19세기 중반 서양의 근대문화는 폭력적인 모습으로 조선에 다가왔다. 1866년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조선에 나타난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군대에 패하고 철수하였다. 병인양요를 겪은 대원군이 면포가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면으로 된 방탄복인 ‘면갑’을 개발하였다. 포군에게 ‘면갑’을 입히고 한 여름에 훈련을 시켰는데 군인은 훈련 중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면갑’이 너무 무겁고 더웠기 때문이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면갑’을 착용하고 전투에 임했으나 미군에 크게 패하였다. 조선군이 전통적인 무기를 사용한데 반해 미군은 근대과학무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면갑’도 미군의 칼로부터 조선군인을 지켜 주었으나, 총탄은 관통하여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인류 역사상 하나의 문명이 새로운 문명을 만날 때 평화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19세기 중반 조선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 서양 문명도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선은 그들의 개항 요구를 전쟁을 치루면서 물리쳤다. 그러나 미국과 프랑스라는 ‘야만’을 물리친 조선은 불과 4년 뒤인 1875년 포함을 이끌고 나타난 ‘더 야만스러운’ 일본에 굴복하여 개항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의 주관심 국가는 중국이었고, 조선은 부차적이었으나,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은 조선 침략이 1차적 목표였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개항은 44년 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불행으로 이어졌다.




단아하면서 날카로운 김도현 의병장의 창의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노골적으로 침략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안동지역 의병장 김도현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907년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고, 풀려난 후 교육 사업에 힘쓰다가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살한다. 아마도 김도현은 국권상실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친을 모시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로서는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자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도현은 사회 지도자로서 충과 효라는 당시대 사회 윤리를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의병장 김도현은 의병 전쟁 시 사용하였던 ‘창의검倡義劍’을 유품으로 남겼다. 창의검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그러면서도 단아하고 날카로워 김도현 의병장의 성품을 나타내 주는 듯하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무장병력에 의한 투쟁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 펼쳐졌다. 그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있던 광복군 군복이 1972년 서울시청 내 금고에 서 발견되어 육군사관학교에 기증되었다.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광복군 군복이다.

상징적 문화재로 남은 한국전쟁의 흔적들

많은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육지만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에서도 전투가 있었던 것을 잘 알지 못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공군은 연락기인 ‘L-4 연락기’도 출격시켰다. 그런데 ‘L-4 연락기’는 폭격장치가 없어 조종사 뒷좌석에 앉은 관측사가 폭탄을 가슴에 안고 출격하여 폭탄을 투하하였다. ‘L-4 연락기’는 1948년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이다. 당시 미군으로부터 10대를 도입하였으나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유일하게 1대가 남아 있다.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하면 오른편으로 해사 반도海士 半島가 보인다. 해사 반도에는 1949년 10월 17일 해군 장병의 헌금으로 미국에서 구입한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마스트가 있다. 함포를 갖춘 600톤급 전투함인 백두산 함은 한국전쟁 개전 초 대한해협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많은 작전에 참여하였다. 1959년 퇴역하였으나, 해군의 상징적인 전투함이기에 마스트가 해사 반도에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근대사 시기에 일어난 전쟁 중 가장 야만적인 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민간인 200여만 명을 포함하여 45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이다.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회담은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되었으나 협상은 2년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날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쌍방 회담 수석대표인 유엔군의 해리슨제독과 조선인민군의 남일 중장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남일은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의 서명을 받았다. 해리슨 제독은 문산 극장에 대기 중인 클라크 대장에게 가서 서명을 받았다. 클라크 대장은 유엔군 참전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휴전협정은 발효되어 이날 22시를 기하여 쌍방 간의 전투는 ‘중단’되었다. 당시 클라크 대장이 서명할 때 사용한 책상이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군사문화재의 범위 확대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 육군기’가 육군을 대표하여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대한민국 육군기’는 1946년 제작된 육군 모표를 표상으로 제작되었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육군기로 육군을 상징하는 군사문화재이다. 군사문화재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민간인은 물론이고 군인들조차도 군사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육·해·공군은 사관학교 야외전시장에 군사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최첨단 무기도 많은데 왜 오래되고 낡은 장비를 전시하느냐며 최첨단무기로 교체 전시하라는 웃지 못 할 지시를 내린 사관학교 고위 장교도 있었다 한다. 현재 군 관리 하에 있는 오래된 무기를 조사해보면 이력 관리가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는 경우를 더러 발견하게 된다. 특히 무기 개체 수가 많은 육군과 해병대에서 이런 상황은 도드라졌다. 한국전쟁 개전 60주년이 되는 해에 한국근대사를 상징하는 군사문화재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은 근대 100년 전쟁사를 정리한다는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군과 민간 모두 군사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 지금부터라도 군사문화재의 범위를 확대하고 대대적으로 조사, 발굴하여야 할 것이다.


글·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소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제공·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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