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번역]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1777 (Siege of Fort Stanwix)
< 원문 출처 : Siege of Fort Stanwix (http://en.wikipedia.org/wiki/Siege_of_Fort_Stanwix) >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1777 (Siege of Fort Stanwix)
스탠윅스 요새(Fort Stanwix, 당시에는 Fort Schuyler로도 불렸음)에서의 포위전은 1777년 8월 2일부터 시작되어 동월 22일까지 진해되었다. 스탠윅스 요새는 모호크 강 계곡(Mohawk River Valley)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continental army)이 영국군 및 인디언들에 대항하던 주요 방어지점이었다. 이 요새에는 피터 간세보르트 대령(Colonel Peter Gansevoort) 지휘하의 뉴욕 출신 민병대 중대들이 지키고 있었다. 반면 공격 측의 구성은 영국 정규군들과 미국 왕당파들(American Loyalists), 헤세-하나우(Hesse-Hanau) 출신의 독일군들, 인디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을 지휘하던 것은 영국군 대령 배리 생 레저(Colonel Barry St. Leger)와 이로쿼이족 인디언 지도자 조셉 브란트(Iroquois leader, Joseph Brant)였다. 생 레저의 원정은 허드슨 강 계곡(Hudson River Valley) 장악을 목적으로 했던 존 부르고인 장군(General John Burgoyne)의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서 실시되었다.
(복원된 스탠윅스 요새의 항공사진)
요새 포위전 초기에 실시되었던 한차례의 구원 시도는 니콜라스 허키머(Nicholas Herkimer) 휘하의 뉴욕 민병대에 의해 실시되었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Battle of Oriskany)에서 생 레저 부대의 분견대에게 저지당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비록 이 전투에 요새 수비대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일부 요새 수비병력이 출격하여 당시 거의 텅 빈 상태였던 인디언 및 왕당파 캠프를 습격하였고, 이로 인해 생 레져를 도와주던 인디언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 마침내 포위가 풀린 것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휘하의 증원군이 도착한 다음이며, 당시 아놀드는 책략으로 대규모 지원부대가 온 것처럼 속여 적군이 달아나도록 하였다. 이 속임수에 더하여 개인 물품을 잃어버리거나 공성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인디언 전사들이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생 레저는 어쩔 수 없이 후퇴를 선택하게 된다.
생 레져가 알바니(Albany)로 진격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1777년 10월에 벌어진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 후에 부르고인이 항복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 비록 생 레져가 9월 말에는 타이콘데로가 요새(Fort Ticonderoga)까지 도착하지만, 부르고인을 지원하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도착이 되어버렸다.
(배리 생 레저의 모습을 그린 판화)
배경
스탠윅스 요새는 허드슨 강으로 흐르는 모호크 강과, 온타리오 호수로 흐르는 오네이다 호수 사이를 잇는, 소위 오네이다 운반소(Oneida Carrying Place; 오늘날의 New York주 Rome시 위치)라고 불리는 연수육로(portage, 두 수로를 잇는 육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7년전쟁 당시인 1758년 영국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이후에는 버려진 채로 방치되었었다. 그러나 1776년의 미국 독립전쟁이 뉴욕 주와 퀘벡 주 사이의 변경지대에까지 퍼져나가면서 이 곳의 전략적 중요성이 재부각되게 된다.
영국 식민지 장관(Colonial Secretary) 저메인 공(Lord Germain)과 존 부르고인 장군은 허드슨 강 계곡을 장악할 계획을 발전시켰으며, 이 계획에는 조지 국왕(King George)이 "모호크 강에서의 양동작전(diversion on the Mohawk River)"이라고 부른 원정작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1777년 3월, 저메인은 7년전쟁 당시에도 근무하였던 역전의 변경지역 전사였던 배리 생 레저 중령에게 해당 원정작전을 맡기는 명령을 발령하게 된다.
(L. Flury가 간세보르트 대령에게 제출한 슐러 요새 포위도)
병력의 집결
1777년 4월, 대륙군 장군이었던 필립 슐러(Philip Schuyler)는 피터 간세보르트 대령 휘하의 제 3 뉴욕 연대로 하여금 해당 요새를 점령하고 시설을 복구하도록 함으로써, 퀘벡방면으로부터의 영국군 및 인디언들의 침공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5월 중에 도착하였으며, 즉각 요새 방어지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이 요새의 명칭을 슐러 요새(Fort Schuyler)라고 개명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명칭이 훨씬 광범위하게 쓰이곤 했다. 7월 중순에는 영국인들이 모호크 계곡으로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오네이다족 인디언들의 경고가 확인되면서 축성 작업은 가속화 되었다. 7월 초, 간세보르트는 슐러에게 상황보고를 하였으며, 여기에는 보급품과 탄약이 부족하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슐러는 7월 8일, 요새로 부족한 보급품을 보낼 것을 지시한다.
원정 기간동안 임시 준장(brevetted a Brigadier General)이 된 생 레져는 다양한 곳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영국 제 8, 34연대 및 몇몇 포병들과 같은 영국 정규군들도 있었고, 헤세-하나우 출신의 엽병(jager) 80명, 뉴욕 킹스 로얄 연대 출신의 왕당파 350명, 버틀러 레인저(Butler's Ranger) 1개 중대, 캐나다 출신 노동자 100명 가량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생 레저의 포병은 2문의 6파운드 포와 2문의 3파운드 포, 4문의 소형 박격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생 레저는 이 정도면 달랑 60명 가량이 지키고 있는 황폐한 요새를 공격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이것이 그가 6월 23일 몬트리올 근방의 라신(Lachine)에서 원정을 출발했을 때 얻은 최신의 정보였다.
상당수의 미군이 스탠윅스 요새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 레저가 알게 된 때는, 세인트 로렌스 강에서였으며, 포로로 잡힌 수비대원을 통해 알게 되었다. 포로를 통하여 생 레저는 스탠윅스 요새가 최근에 수리되었으며, 수비대가 600명에 이르며, 이들이 원정대의 규모와 이동로까지 알고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생 레저의 원정에 따라가고 있었던 인디언 요원인 다니엘 클라우스(Daniel Claus)는 생 레저를 설득하여 인디언들을 많이 모병할 수 있는 오스웨고(Oswego)로 가게 하였다. 원정대는 7월 14일, 뉴욕 주 오스웨고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조셉 브란트와 약 800명의 인디언들이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모호크족과 세네카스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로쿼이 연방(당시 아직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오네이다족과 투스카로라스족은 제외) 출신의 인디언들과 오대호(Great Lakes) 지역 인디언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에 작성된 조셉 브란트의 초상화)
오스웨고를 출발하고 난 뒤, 생 레저에게는 요새로 향하는 보급품에 대한 소식이 도착했다. 생 레저는 브란트에게 인디언 200명과 정규군 30명을 맡겨 이 보급품을 탈취하도록 하였고, 요새 포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란트가 요새에 도착한 8월 2일은 이미 늦은 시기로서, 제 9 메사추세츠 연대의 200명에 의해 호위되었던 보급품 수송대는 이미 요새에 도착하여 보급을 마친 상태였다. 브란트 부대는 단지 수송선박의 선장을 사로잡는데 그쳤고, 메사추세츠 연대원들은 요새 안에 남게 되었다. 생 레저의 주력부대는 그 다음날 도착했으며, 포병은 다시 며칠 더 있은 후에 도착한다.
포위전의 시작
생 레저는 최초 휘하 병력들을 요새 앞에서 행진시킴으로써 요새 수비대를 겁주려고 하였다. 이때 인디언들 역시 고유의 전쟁 의상을 입고 나섰다고 한다. 요새 수비대가 이에도 항복하지 않자, 생 레저는 휴전기를 든 전령을 보내 부르고인 장군이 작성한 선언문을 넘겨줬다; 간세보르트는 여기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생 레저는 포위전을 시작하게 되고, 요새 북쪽의 낮은 언덕에 정규군과 포병을, 인디언들과 왕당파들 대부분을 그 남쪽에 숙영하게 하였다. 또한 모호크강을 따라 인디언들 막사를 늘어놓아 전초선(picket line)으로 삼았다.
생 레저의 포병 역시 타이콘데로가 요새 함락 후에 부르고인 군대가 당했던 방식으로 전진에 방해를 받았다. 간세보르트와 휘하 병력들은 원정대가 오는 길목의 숲속 길을 따라 나무들을 조직적으로 넘어뜨려 놓았고, 생 레저는 포병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길을 일일히 다 고쳐놓아야 했다. 이 업무에 생 레저 소속의 백인 250명이 동원되면서, 요새 포위 병력에는 실질적으로 인디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8월 5일, 생 레저는 조셉 브란트의 누나인 몰리로부터 미군 구원부대가 모호크 강을 따라 접근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리스카니 전투
트리온 카운티 안전위원회 (Tryon County Commitee of Safety)는 7월 30일 생 레저 군대의 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추가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8월 4일, 위원장 니콜라스 허키머(Nicholas Herkimer) 휘하의 약 800명의 민병대가 데이톤 요새(Fort Dayton; 오늘날 뉴욕 주 허키머(Herkimer) 마을에 위치)에 소집되었다. 다음날 늦을 무렵이 되어 이 부대는 스탠윅스 요새로부터 10마일(16킬로미터)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의 접근 소식을 접한 생 레저는 허키머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존슨과 브란트를 파견한다. 존슨은 소수의 정규군과 레인저들을 지휘했으며, 브란트는 대다수의 인디언들을 인솔했다. 이들은 매복을 실시하여 오리스카니 하천(Oriskany Creek)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양군 모두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허키머 역시 다리에 중상을 입는다. 허키머 부대는 생 레저가 파견한 분견대를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대규모 사상자로 인하여 데이톤 요새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허키머 역시 부상으로 인해 끝내 사망한다. 이 전투를 위해 생 레저 부대가 분산된 틈을 타서, 포위된 스탠윅스 요새 수비대는 간세보르트의 부지휘관이었던 마리누스 윌렛(Marinus Willett) 휘하의 250명을 출격시켜 거의 텅 빈 상태였던 인디언 숙영지를 약탈한다. 이 과정에서 존 존슨의 전령서(John Johnson's orderly book)와 원정 계획서, 그리고 예전에 영국군이 탈취했던 간세보르트의 약혼녀 편지를 탈취하게 되었다. 웰렛 부대가 물자들을 탈취해 수레에 꽉 채워왔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The tale of this party recovering actual wag[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s of materials is probably untrue). 이 이야기는 마리누스 윌렛이 만년에 회상하면서 남긴 글에 나타나는데, 작전 당시의 사람들의 증언이나 문헌에는 수레가 필요했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타나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군이 오리스카니로부터 돌아왔을때, 이들은 인디언 담요와 기타 개인 물품들이 약탈당한 숙영지에 도착하게 된다. 인디언들은 당초 백인들이 다 싸우고 자신들은 별 피해가 없으리라 들은 상태였음에도 백인들이 별로 안싸웠다는 사실에다가, 오리스카니에서 많은 인디언들이 사망했고, 숙영지마저 이 모양이 되자 상당히 기분나빠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디언들과 생 레저간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결국 포위전이 실패하는 원인이 된다.
생 레저는 이 승리를 핑계로 다시금 요새에 항복을 권유하지만, 간세보르트는 또 다시 항복을 거부하였다. 다음 날 생 레저는 세번째로 항복 권유 메시지를 보내는데, 이번에는 부르고인이 알바니에 이미 입성했다는 가짜 소식과 함께 항복하지 않으면 모호크 계곡 주변의 수비대원들의 고향 마을들에 대해서 인디언들을 통해 학살을 벌이겠다는 협박 또한 전달한다. 이에 윌렛 중령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당신 복장으로 보건대 당신은 영국 장교로군요. 하지만 당신이 가져온 메시지는 영국 장교가 보내기에도 저질의 것이고, 영국 장교가 전달하기에도 불명예스러운 메시지입니다."
당시 수비대는 화약 보유량이 많지 않았고, 간세보르트는 영국 휴전단이 3일간의 휴전기간을 제안한 것을 이용하여 8월 10일 윌렛을 내보내 슐러 장군에게 상황을 전하고자 하였다. 윌렛은 영국군 전선을 통과하여 모호크 계곡을 따라 이동했고, 마침내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 휘하의 구원군과 만나게 된다.
포위의 붕괴
슐러는 8월 8일 오리스카니 전투 결과에 대한 초기 보고를 접수하였고, 그 다음날 에베네저 러니드(Ebenezer Learned)의 제 4메사추세츠 연대를 파견하여 요새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직 윌렛이 도착하기 전인 8월 12일, 슐러는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허드슨 강으로 접근한 생 레저와 부르고인군의 위협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였다. 아서 생 클레어 장군에 의해 벌어진 타이콘데로가 요새 포기와 같은 일이 스탠윅스 요새에서도 벌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으로 스탠윅스 요새에 대한 구원군을 보내지 말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회의 결과에 반대하여, 슐러는 구원군을 보낼 것을 주장했고, 이 구원군에는 아놀드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슐러의 결정에 더하여, 뉴욕 주 픽스킬(Peekskill, New York)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 푸트남 장군(General Israel Putnam)은 8월 14일에 2개 연대(제 1 캐나다 연대 및 제 2 뉴욕 연대)를 파견한다. 이 연대들은 당시 이미 모호크강 계곡에서 경계임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이 2개 부대들은 아직 이동 중인 과정에서 포위가 풀렸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가게 된다.
(피터 간세보르트 대령의 초상화, 길버트 스튜어트 작)
8월 20일, 아놀드, 윌렛, 그리고 700명의 대륙군 정규군이 데이톤 요새에 도착한다. 아놀드는 병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추가로 트리온 카운티 사람들을 모병하지만, 단지 100명만이 응하게 된다. 아놀드는 오네이다족 및 투스카로라스족이 합세하거나 슐러에게 요청한 1000명의 증원군이 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포위전이 이제 막바지에 다달아 요새가 함락 직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짐에 따라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다. 생 레저는 보유한 대포가 원거리에서는 요새 벽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되자, 포대를 요새 근처로 접근시키기 위한 참호를 굴착하기 시작했다. 간세보르트는 공성호가 요새 보루 한곳에 대단히 가깝게 접근했다고 보고했다.
아놀드는 휘하 병력이 적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기에 일종의 기만작전을 쓰기로 결심했다. 데이톤 요새에 있는 동안 상당수의 왕당파들을 검거했는데, 그 중에는 혼요스트 슐러(Hon-Yost Schuyler)도 있었다. 혼요스트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은 이를 경멸한 반면, 상당수 인디언들이 보았을 때에는 위대한 혼령(Great Spirit)이 깃든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놀드는 혼요스트를 설득하여 생 레저의 부대원들 사이에 "검은 독수리(The Dark Eagle)"가 지휘하는 대규모 미군병력이 생 레저의 주둔지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리도록 하였다. 혼요스트를 설득시키는 데에는 체포된 인원들 중에 섞여있던 혼요스트의 형제를 인질로 삼은 것 또한 주요하였다.
(베네딕트 아놀드의 초상. 아래 캡션에는 '몽고메리 장군 휘하에서 식민지 군대를 이끌고 캐나다의 황야를 지나 퀘벡을 공격하다 부상당한 아놀드 대령' 이라고 되어 있다.)
아놀드의 책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생 레저는 8월 21일, "아놀드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속도로 진군 중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놀드는 아직도 데이톤 요새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날 생 레저가 회의를 열었을 때, 이미 200여명의 인디언들이 부대에서 탈주한 상태였고, 회의에 참가한 나머지 인디언들도 개인 물품들의 손실과 포위전에 염증을 느껴 포위를 그만두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하는 상태였다. 8월 22일, 생 레저는 숙영지를 파하고 온타리오 호수로 복귀행군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상당량의 장비들을 유기하게 된다. 생 레저의 부대원 중에서 상당수가 탈영 혹은 수비대에게 체포당하는데, 이들 중에는 혼요스트 슐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의 일
아놀드는 우호적인 인디언들로 병력을 보충한 뒤 스탠윅스 요새를 향해 약 10마일 정도 전진하던 중, 간세보르트로부터 생 레저가 떠났다는 것을 전해듣게 된다. 아놀드는 계속 전진하여 그날 저녁 무렵 요새에 도착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놀드는 50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생 레저를 추격하게 한다. 당시 생 레저의 부대는 그전까지 우호적이었던 인디언 동맹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군 선발대가 폭우 속을 뚫고 오네이다 호수 연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생 레저 부대의 마지막 보트가 떠나고 있는 찰나였다. 아놀드는 요새 수비대 일부와 모호크강을 따라 설치한 소규모 전초들을 제외한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력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길을 서두른다.
생 레저는 오네이다 호수를 항해하는 과정에서 인디언 전령을 통해 아놀드 부대의 실제 규모에 대해 알게 된다. 8월 27일, 오스웨고에서 생 레저는 부르고인에게 챔플레인 호수를 통해 이동하여 부르고인 부대와 합류할 계획이라고 편지를 쓴다. 생 레저는 9월 29일에 타이콘데로가 요새에 도착하게 되며, 이는 부르고인을 돕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부르고인은 자신의 전역 실패 원인의 일부가 생 레저가 모호크 계곡을 돌파하지 못한 것과 왕당파들이 충분히 도와주지 않은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왕당파들이 뉴욕 주 윗쪽 지방에서 제대로 들고 일어난다면 미군 전력이 분산되면서 그와 생 레저 부대가 충분히 전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생 레저가 타이콘데로가에 도착하면 그가 퇴각하는 것도 충분히 엄호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 레저가 타이콘데로가에 도착한 시점에는 이미 부르고인 군대는 포위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버미스 하이트 전투(Battle of Bemis Heights; 2차 사라토가 전투)를 치르고 나서는 항복하게 된다. 부르고인은 항복 후에 상황을 분석하면서, 윌리엄 하웨 장군이 그를 지원하지 않음에 따라 워싱턴 장군이 뉴욕 시 주변의 전투력을 스탠윅스 요새 구원과 사라토가 전투에 돌려쓸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전설과 유적
스탠윅스 요새는 19세기에 해체되었다. 이 장소는 1935년 미국 국가 유산(U.S. National Monument)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이 장소는 국가 역사 사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고, 1966년에는 국가 역사 사적지 목록(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포함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립공원 관리국(National Park Service)에 의해 요새가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