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번역] 파올리 전투, 1777 (The Battle of Paoli also known as the Paoli Massacre)
<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Paoli also known as the Paoli Massacre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paoli.htm) >
< 사진 출처 :
[1] War and Game: 2007-12-09 (http://www.warandgame.info/2007_12_09_archive.html)
[2] 구글 맵 검색결과 캡쳐사진.
[3] Paoli Picket Map (http://www.ushistory.org/paoli/history/images/picketmap.jpg)
※ 이 외 출처가 명기되지 않은 사진의 경우 원문 사이트의 사진임. >
파올리 전투, 1777 (The Battle of Paoli also known as the Paoli Massacre)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일시 : 1777년 9월 20-21일
장소 : 미국 펜실베니아주 파올리
교전자 : 미군 vs. 영국군
(1777년 9월 20일, 펜실베니아 사단 숙영지를 공격하는 영국군 경보병 및 경용기병대 병력들 - 1782년 자비에 델라 가타 작)
지휘관 : 미군측은 앤소니 웨인 소장(Major General Anthony Wayne), 영국군측은 찰스 그레이 소장(Major General Charles Grey)
병력규모 : 웨인의 펜실베니아 대륙군 사단에 1500여 명이, 스몰우드(Smallwood)의 메릴랜드 민병대에 1000여 명이 있었음. 그레이의 영국군 여단에는 약 1200명(제 40, 50연대 소속)이 있었고,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약 2마일 거리에 약 500-600명의 추가 지원병력이 위치하고 있었음.
승자 : 이 전투는 영국군의 완벽한 승리였음.
복식, 무기, 장구류:
영국군은 붉은 코트를 착용하였고, 소속에 따라서 곰가죽 모자나 둥근 모자, 트리콘 모자 등을 착용하였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2개 경용기병(light dragoon) 연대인 제 16,17 경용기병 연대의 경우에는 붉은 코트를 착용하고 가죽 장식이 달린 투구를 썼다고 한다.
미군의 경우 거의 아무거나 입었다. 전쟁이 지속되어 가면서 대륙군의 정규군 보병연대들의 경우에는 푸른 색 제복을 입는 경우가 늘어나지만, 민병대의 경우에는 계속 아무거나 입었다.
양측 모두 머스켓과 대포로 무장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기까지 미군에게는 총검이 부족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근접전에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놓이곤 했다.
영국군 연대:
제 16 경용기병연대(16th Light Dragoons)
제 2 경보병대대(2nd Battalion Light Infantry) (13개의 연대들에서 차출한 경보병 중대들로 구성)
제 40 보병연대
제 42 보병연대
제 44 보병연대
제 55 보병연대
미군 연대:
웨인의 펜실베니아 사단:
제 1 펜실베니아 연대
제 2 펜실베니아 연대
제 4 펜실베니아 연대
제 5 펜실베니아 연대
제 7 펜실베니아 연대
제 8 펜실베니아 연대
제 10 펜실베니아 연대
제 11 펜실베니아 연대
하틀리의 추가 대륙군 연대
포병 중대
다양한 연대 소속의 용기병들
스몰우드의 메릴랜드 민병대:
전말:
브랜디와인 크릭 전투에 이어, 워싱턴 장군의 군대는 필라델피아로 퇴각한다. 하웨 중장은 약 5일 가량 브랜디와인 전장에 머무른다. 하웨는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방어진지를 잃고 도주하게 된 워싱턴 군대를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는다. 이에 대하여 하웨는 수송수단의 제약으로 보급품 집적에 시간이 걸렸고, 부상자들을 처리할 필요도 있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하웨는 항상 주의깊고 신중하게 이동했다. 마침내 영국군은 체스터 카운티를 통과하여 슐킬 강(Schuylkill River)로 향하게 되는데, 그 뒤에는 미국 식민지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필라델피아가 위치하고 있었다.
(파올리 전투도)
워싱턴은 강의 동쪽 제방으로 건너면서 2개 부대를 잔류시켜 영국군 후위를 괴롭히도록 하였다. 잔류한 2개 부대는 각각 스몰우드가 지휘하는 메릴랜드 민병대와 앤소니 웨인 소장이 지휘하는 펜실베니아 대륙군 사단이었다.
하웨의 군대는 스웨디스 포드(Swede's Ford; 스웨디의 도섭장) 근처에 있는 트레디프린(Tredyffrin)에서 숙영한다. 웨인의 사단은 영국군 후위 근접지역으로 접근하여 도로 교차로 지역에서 숙영한다. 그곳은 옆에 제네럴 워렌 태번(General Warren Tavern; 워렌장군 선술집)이 있었고, 근처에는 화이트 호스 태번(White Horse Tavern; 백마 선술집)과 제네럴 파올리 태번(General Paoli tavern; 파올리 장군 선술집. 이 이름은 한 코르시카 도적(a Corsican bandit)의 이름을 따 지었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웨인은 영국군이 슐리킬까지 이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의 치중대 행렬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파올리 전적지 공원에 위치한 전투지역 지도[3])
펜실베니아에서는 왕당파들의 세력이 상당히 강했으며, 이곳의 전역 수행 기간 동안 영국군은 정보 수집 측면에서 상당히 유리한 상황에서 진행할 수가 있었다. 또한 18세기의 전쟁은 상당히 많은 측면에서 일종의 사업(a casual business)에 가까운 점이 있어서, 양측 소속 병사들 모두 근처 선술집을 자주 들락거렸고, 특히 이곳에서는 양군 숙영지 중간에 있는(lay part way between the camps) 파올리 선술집이 그 중심이었다. 하웨는 웨인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 병력 규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777년 9월 20일 야간, 하웨 장군은 그레이 소장을 파견하여 웨인의 사단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레이는 휘하 병력들과 함께 오후 10시에 출발하여 무어스 홀 가도(Moores Hall Road)를 따라 진군하여 애드미럴 워렌 교차로(Admiral Warren cross-roads; 워렌 제독 교차로)로 향했다. 영국군 선두에 있던 경보병이 교차로에 접근하였을 때, 미군 전초병(picquet)에 의한 사격이 가해졌다. 이 총성으로 교차로 남쪽의 숲에 위치하고 있던 펜실베니아 사단에 경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군 경보병)
영국군은 애드미럴 워렌 교차로 옆에 있던 대장간의 대장장이를 붙잡아 안내원으로 삼았다. 영국군 제 1파는 제 2경보병 대대로서, 숲속을 질주하며 미군 숙영지를 공격했다. 경보병 뒤에는 제 44 보병연대가 따라붙었고, 제 3파로서는 제 42 하이랜더 보병연대가 뒤따랐다. 소수의 제 16 경용기병대 인원들도 경보병과 행동을 함께했다.
("부싯돌 없는" 그레이. 이후 1790년대에는 프랑스 혁명군대와도 싸웠으며, 서인도제도에서도 활약한다. 만년에 하윅 후작(Viscount Howick) 및 제 1 그레이 백작(1st Earl Grey)이 됨. [1])
그레이 장군은 우발적 총성으로 미군에게 미리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 병력에게 화승총에서 부싯돌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 공격은 총검으로써 이뤄지도록 할 것이었다. 이 전투로써 그레이 장군은 '"부싯돌 없는" 그레이("No flints" Grey)'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영국군의 돌격에 펜실베니아 병력들은 분산되어 숙영지를 벗어나 서쪽으로 밀려났다. 다수의 영국군이 미국인들과 섞였고,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 이르기까지 혼란 속의 전투가 지속되었다.
스몰우드 장군의 병력이 서쪽으로부터 접근한 것은 전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이들 역시 화이트 호스 선술집을 지날 때 공격을 당한다. 훈련 수준이 낮고 조직 상태도 형편없었던 메릴랜드 민병대는 혼란속에서 붕괴되고 만다.
사상자: 미군 사상자는 약 200명이 전사, 부상, 포로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 사망자는 55명 가량이다. 다수의 미군들이 혼란 속에서 탈영했다고 한다. 영국군 사상자는 2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의 영향:
파올리 전투는 펜실베니아 대륙군 부대에게 큰 치욕적 사건이 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영향은 없었다. 이 전투는 파올리 학살극(Paoli Massacr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군 사상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명칭이 합당한 것인지에는 수긍하기가 어렵다. 일설에는 영국군이 포로를 잡지 않고 다 죽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 양측 모두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자주 해온 것들이다.
("미치광이" 웨인 앤소니 준장)
한편 웨인 장군에게도 숙영지가 기습당하게 허용한 데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웨인은 이에 군법회의를 요청하였고, 군법회의에서는 웨인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무죄를 선언했다. 웨인이 제대로 경계하였던 하지 않았던 간에, 이 공격은 잘 실행되고 크게 성공한 작전이었다. 이 승리로써 하웨는 조지 워싱턴의 미군 주력부대로부터 더 이상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필라델피아를 며칠 내로 함락시킬 수가 있었다.
부대의 전통 및 비화:
이 전투 이후, 미국인들은 영국 경보병대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맹세하게 된다. 영국 제 49, 46보병연대의 경보병 중대들은 이에 모자의 깃털을 붉게 염색했다라고 하는데, 이는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이 경보병이라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조롱의 의미로서 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제 49보병연대를 1대대로서 흡수한 로얄 버크셔 연대(Royal Berkshire Regiment)의 경우 아직도 모자 뱃지 뒤에 붉은 천쪼가리를 다는 전통(tradition of wearing a piece of red cloth behind their cap badges)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전장의 위치. 붉은색 A로 된 곳이 파올리 전장임. 동쪽에 필라델피아가 보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