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번역] 프리먼스 팜 전투, 1777 (The Battle of Freeman`s Farm) (1차 사라토가 전투)
<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Freeman's Farm (http://www.britishbattles.com/battle-freemans-farm.htm) >
< 그림 출처:
[1]~[4] : 미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http://www.dean.usma.edu/history/web03/atlases/american%20revolution/) >
프리먼스 팜 전투 (The Battle of Freeman's Farm) - 1차 사라토가 전투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일시 : 1777년 9월 19일
장소 : 알바니(Albany) 북쪽, 허드슨 강 서안의 뉴욕 주 지역
교전자 : 영국인, 독일인, 캐나다인, 인디언, 왕당파 미국인 vs. 미국 독립군
지휘관 : 영국측은 존 부르고인 소장(Major General John Burgoyne), 미국측은 호라시오 게이츠 소장(Major General Horatio Gates). 게이츠의 주요 부하로는 베네딕트 아놀드 준장(Brigadier Benedict Arnold)이 있었음.
(인디언 추장 복장을 입은 영국군 장교)
병력 규모 : 영국군은 약 6000명의 유효병력 보유. 미군 측은 약 14000명 보유.
영국군 구성:
-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Brigadier Simon Fraser)의 우익 부대:
로드 발카레스 소령(Major Lord Balcarres) 휘하의 경보병 중대들; 제 9,20,21,24,29,31,47,53,62 보병연대 소속 경보병 중대들
애크란드 소령 휘하의 척탄병 중대들; 척탄병 중대들의 소속은 상기 연대들과 동일
제 24 보병연대
브레이만 엽병대 (Breyman's Jagers)
인디언 및 캐나다인들
8문의 포로 이뤄진 포병 여단 (6파운드 및 3파운드 포로 구성)
- 중앙 부대:
해밀턴 준장
제 9, 20, 21, 62 보병연대
존스 대위(Captain Jones) 휘하의 6문의 대포(6파운드 및 3파운드 포로 구성)
- 좌익 부대:
필립스 소장(Major General Phillips) 및 리더젤 남작(Baron Riedesel)이 지휘
리더젤 연대
스페츠 연대(Specht's Regiment)
레츠 연대(Rhetz' Regiment)
포취 대위(captain Pausch) 휘하의 헤세 하나우 포병 중대(Hesse Hanau Company of artillery)
- 치중대 경호:
제 47 보병연대
헤세 하나우 보병연대 (Hesse Hanau Infantry)
("신사 죠니" 존 부르고인 소장)
미군 구성:
- 우익 부대:
게이츠 장군 직속 부대:
글로버 준장(Brigadier Glover)의 대륙군 여단
닉슨 대령(Colonel Nixon)의 대륙군 연대
패터슨 준장(Brigadier Paterson)의 대륙군 여단
- 중앙 부대:
러니드 준장(Brigadier Learned)의 대륙군 여단
베일리(Bailey)의 메사추세츠 연대
잭슨(Jackson)의 메사추세츠 연대
웨슨(Wesson)의 메사추세츠 연대
리빙스턴(Livingston)의 뉴욕 연대
- 좌익 부대: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 지휘
칠리(Cilley)의 뉴햄프셔 연대
헤일(Hale)의 뉴햄프셔 연대
스카멜(Scammell)의 뉴햄프셔 연대
반 코트란트(Van Cortlandt)의 뉴욕 연대
리빙스턴(Livingston)의 뉴욕 연대
코네티컷 민병대
모건(Morgan)의 강선총병대
디어본(Dearborn)의 경보병대
(프리먼스 팜 전투도)
승자: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전장에 남아있긴 했지만 미군에 비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이러한 피해는 영국군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전투는 부르고인으로서는 이겼어야 하는 전투였다. 부르고인이 이기지 못한 것은 아놀드의 탁월한 제너럴십에 기인한다.
(격렬한 전투 장면)
전말:
1777년 8월에 이르러 존 부르고인 소장의 군대는 캐나다로부터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를 따른 통로를 따라 허드슨 강가의 에드워드 요새(Fort Edward)로 진격을 실시했다. 슐러 장군(General Schuyler)은 뉴욕 주도인 알바니를 방호하기 위하여 그 남쪽에 미군을 배치시켰다. 최초 장미빛 전망을 띄고 있었던 부르고인의 미국 식민지 침공 작전은 시간이 갈 수록 점차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독일군(Brunswicker) 대령 바움(Baum)이 실시한 베닝톤(Bennington)으로의 군수품 및 군마 조달 작전은 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스타크 준장의 뉴햄프셔 민병대가 올린 승리로 인하여, 미국인들은 대단히 고무되었다. 이제 허드슨 강의 모호크 분기점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미국 북부군 주력은 끊임없이 증원군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영국군에 대한 증원군은 거의 없었으며, 보급품 역시도 챔플레인 호수 통로 및 앤 요새(Fort Anne)로부터의 원시적 도로를 거쳐야만 전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777년 8월 해임될 때까지 미군 지휘관이었던 슐러 장군은 휘하 부대를 허드슨 강 서안을 감제하는 버미스 하이트(Bemis Heights; 버미스 고원)의 요새화된 진지에 위치시켰다.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상실한 데에 따라 슐러는 해임되고 이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로 소환되었다. 그 후임으로는 호라시오 게이츠 소장과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이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이 맞지가 않았다. 게이츠는 신중한 전직 영국 장교 출신이었다. 아놀드의 경우 1776년 퀘벡을 공격했던 2명의 미군 지휘관 중 하나였으며, 상당히 활발한 사람이었고, 휘하 병력들을 북돋아 전투에서 맹렬히 싸우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공격적이면서도 전술적 이점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었다.
(1차 사라토가 전투(프리먼스 팜 전투) 개략도 [1])
1777년 8월 19일, 부르고인은 버미스 하이트의 미군 요새지에 대한 포위기동을 실시한다. 부르고인의 의도는 먼저 미군 진지의 서쪽 고지들을 장악하고, 이후 고저차의 장점을 이용하여 미군들을 측면에서 포격한다는 계산이었다.
영국군 우익의 프레이저 준장은 깊은 계곡 북편을 따른 숲속으로 진군하여 들어갔다. 해밀턴은 영국군 중앙을 이끌고 이를 따라갔으며, 여기에는 부르고인도 함께하고 있었다. 리더젤과 휘하 독일 병력들은 배(bateaux; 바닥이 평평한 작은 배)와 보급품들과 함께 강가에 남아있었다. 위치에 도달한 3개의 분견대는 이제 미군을 향해 전진할 태세였다.
게이츠에게는 이러한 영국군 이동에 맞설 공세적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버미스 하이트의 요새화된 진지에서 적이 공격하기를 기다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아놀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전진하는 영국군과 싸우기를 원했고, 특히 휘하 병사들이 숲속 전투에 유리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다.
아놀드는 게이츠에게 전군을 기울여 공격하자고 압박했다. 게이츠는 끝내 아놀드가 휘하 사단을 이끌고 영국군과 맞서 싸우러 가는 것을 허용했다.
오후 일찍 무렵이 되었을 때, 부르고인의 군대는 계곡을 지났고 전진을 시작할 위치에 도달했으며, 전진 시작은 대포 발사소리를 신호로 시작되었다.
(13시 무렵 [2])
모건의 강선총병대가 공격을 실시한 최초의 미군부대였다. 이들은 프레이저 준장의 우익에 있는 캐나다인과 인디언들의 소규모 부대를 습격했다. 모건 부대를 뒤따라 아놀드의 뉴햄프셔 대륙군 사단이 공격에 들어갔다. 모건의 강선총병대는 추격전에 들어갔으나, 적의 반격으로 분산되었다. 대륙군 병력들은 프레이저의 척탄병들과 경보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부르고인과 해밀톤이 이끄는 중앙군은 프리먼스 팜으로 접근했다. 이로써 이들과 프레이저 부대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아놀드는 휘하 병력들을 집결시켜 이 영국군 중앙군과 우익간의 간격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15시 무렵[3])
아놀드 사단 휘하의 미군 연대들이 추가로 합류하여 공세에 가담했다. 부르고인의 측위 부대였던 제 21 보병연대는 제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62연대가 사선상에 놓이게 되어 심한 사격하에 놓이게 된다.
미군 공격부대와 영국군 중앙 연대들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베테랑 영국 병사들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치열했던 전투라고 기억되는 이 싸움 과정에서 필립스 장군(General Phillips)(민덴 전투에서 유명해진 포병 장교임)은 20 연대의 총검 돌격을 이끌어 62연대가 퇴각하여 재편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직도 미군 진지에 남아있던 게이츠는 그 외의 미군 병력을 전투에 투입하자는 것을 거부했다. 후세 사가들은 만약 게이츠가 미군을 추가 투입했더라면 영국군 중앙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17시 무렵[4])
게이츠가 아놀드의 증원 요청을 거부한 반면, 영국 좌측방에 있던 리더젤은 사태의 급박성을 깨닫고 신속하게 반응한다. 영국군 47연대에게 치중대 방어 임무를 맏기고, 리더젤은 휘하 연대들을 언덕 쪽으로 진군시켰다. 그는 언덕에 도착하여 심각한 위기에 빠진 영국 보병들을 목격하였고, 이에 지체없이 휘하부대가 미군 측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리더젤의 보병과 포병 사격은 영국 보병들에 대한 압력을 줄이는 데 성공하였고, 미군으로 하여금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무렵이 되었을 때 밤이 찾아오게 된다.
미군은 다소 혼란스런 상태에서 버미스 하이트의 진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상자:
부르고인의 군대는 중앙군의 연대들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600명이 전사, 부상, 포로가 되었다. 이 중 350명은 20, 21, 62연대 소속이다. 62연대는 전투 중대 소속 340명 중에서 285명이 사상자가 되었다. 미군측은 35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후의 영향:
부르고인의 부하들은 버미스 하이트의 미군 진지에 대해서 다음 날 공격을 속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들은 프리먼스 팜에서의 아놀드의 공격이 실패함에 따라 혼란 상태였고, 즉각적인 공격을 실시할 경우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부르고인은 더 이상의 공세적 작전을 벌이기 전에 허드슨 강을 따라 뉴욕으로부터 클린턴(Clinton)이 와줄지 여부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혹시 있었을 지 모르는 이 찬스는 결국 사라지고 만다.
프리먼스 팜 전투는 미국 독립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의 하나로서, 부르고인이 항복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부대 전통 및 비화:
1776년, 모건 대령은 퀘벡 공격 당시 버지니아 강선총병대(Virginia Riflemen)를 이끌던 중 포로가 된다. 영국군과의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모건은 다시 부대를 양성했다. 이번에는 주로 펜실베니아인들로 병력을 구성했다; 스코틀랜드인, 아일랜드인, 장로회 신자, 독일 이주민 등. 그의 부대는 강건함과 유능함으로 유명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하루에 40마일을 행군할 수 있었고,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서로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놓고 사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데, 머리를 맞출 위험성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일로 사과를 낭비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강선총(라이플)의 가장 큰 약점은 재장전 속도가 늦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조지 워싱턴 장군의 경우 가능한 강선총 대신 머스켓을 사용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모건과 아놀드는 퀘벡 전역에서부터 가까운 친구였다. 이들은 프리먼스 팜 전투 이전에 여러 시간동안 주연을 벌였다. 이들은 입을 모아 게이츠에게 버미스 하이트의 진지에서 숨어있지 말고 숲속으로 나아가 영국군과 맞서싸워야 한다고 압박했다. 때때로 게이츠는 이들이 그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마침내 게이츠는 아놀드의 공세적 행동을 승인했지만, 그의 휘하 부대 외에는 어떠한 부대도 증원하는 것은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