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http://news.bbc.co.uk/hi/english/static/in_depth/south_asia/2002/india_pakistan/timeline/default.stm>
인도-파키스탄 분쟁사 / BBC news
소개 (Introduction)
1947년 영국이 소위 인도제국(Indian empire)을 해체하여 인도 아대륙을 둘로 분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적대관계는 종교와 역사에서 근원되며, 잠무 주와 카시미르 주에 대한 장기간의 분쟁으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최근들어서 이러한 상황은 위험한 핵무기 경쟁으로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1947년, 분리 독립 (Partition and independence)
(분할 직후 폭동과 집단 폭력, 인구이동이 발생합니다.)
요약
1947년 인도가 대영제국으로 독립한 이후, 인도 아대륙은 대부분이 힌두계로 이뤄졌지만 명목상으로는 세속국가인 인도와, 무슬림 국가인 신생 파키스탄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어 여러 차례의 폭동과 인구이동이 발생하였고, 또한 집단간 폭력으로 말미암아 대략 5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또한 약 백만명이 집을 잃게 됩니다. 분리 이후 잠무 주와 카시미르 주 지역이 논란의 대상으로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과 인도 모두 부분적으로 이 지역들을 장악합니다.
(대영제국 시기의 인도)
전문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이 처음 발생한 유래는, 1933년 당시 학생이었던 초두리 라흐맛 알리(Chaudhuri Rahmat Ali)가 북서지방의 무슬림 우세주들 및 이곳들과 인접한 잠무 토후국 및 카시미르 토후국(princely state of Jammu and Kashmir)으로 이뤄진 독립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시작됩니다.
파키스탄(Pakistan)이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P는 펀잡(Punjab)에서, A는 북서 변경의 아프간(Afghanis)에서, K는 카시미르(Kashmir)에서, S는 신드(Sind)에서, Tan은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 단어는 또한 우루두(Urdu)어로는 순수한 땅(land of pure)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대륙 분할 이후, 분리된 펀잡 주와 벵갈 주에서는 수많은 무슬림들과 시크교도, 힌두인들이 심각한 폭동과 인구이동을 겪게되는 원인이 됩니다. 이 두개의 주는 동파키스탄(East Pakistan)이 됩니다. 집단간 폭력으로 약 50만명이 사망하고, 또다른 백만명이 집을 잃습니다.
문화적으로 독특한 지역이었던 잠무와 카시미르의 경우, 19세기 초까지는 명목상 시크교도의 통치 하에 있었습니다. 1846년 영국과 시크교도간의 싸움 이후, 영국인들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대신, 일명 마하라자(Maharaja)라고 불리는 힌두 지배자를 세우게 됩니다.
마하라자가 지배하는 영역으로는 불교계 지역인 라다크(Ladakh), 대체로 힌두 지역인 잠무(Jammu), 대다수가 무슬림인 카시미르 계곡(valley of Kashmir), 그리고 서부에 있는 소규모의 몇몇 무슬림 왕국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대영제국 시절, 잠무 주와 카시미르 주는 영국에 복종하는 560여개의 자치적 토후국들 중 하나였습니다. 인도 독립 시점에서, 각각의 지배자들은 가맹(accession)이라는 형식으로, 지리적 위치 및 주민들의 종교를 감안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가도록 조언받았습니다.
분리일이었던 1947년 8월까지도, 잠무와 카시미르의 지배자는 어느 쪽으로 가입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무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키스탄 사람들은 이곳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카시미르 계곡의 사람들이 대체로 무슬림이기 때문에, 잠무와 카시미르가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 측에서는, 1947년 10월에 마하라자가 인도측에 가맹하기로 했기 때문에, 잠무와 카시미르가 인도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47-1948년의 전쟁 (The 1947-48 war)
(1947년 이전의 카시미르. 카시미르는 5개 지역, 즉 잠무, 라다크, 발티산, 길지트, 카시미르 계곡을 합한 것입니다. 각각은 힌두, 무슬림, 불교의 문화 및 인구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1846-57년간 지배하였던 마하라자인 굴랍 싱(Gulab Singh)에 의해 통합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1947년 파키스탄이 지원한 무슬림 폭동 직후, 마하라자인 하리 싱(Hari Singh)이 인도에 넘기기로 서명하면서 넘어가게 됩니다.)
요약
인도와 파키스탄의 첫번째 전쟁은 1947년 10월, 카시미르에서 발생한 폭동을 파키스탄이 지원하면서 시작됩니다. 인도는 카시미르가 인도로 가맹한다는 조건으로 마하라자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맹이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오랜 기간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1949년 1월 1일,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막을 내립니다.
이 지역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는 상황인데, 이는 가맹을 승인하기 위한 주민투표(referendum)가 끝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문
1947년 10월, 파키스탄 북서지방 출신의 무장한 부족민들이 카시미르를 침공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첫번째 전쟁이 개시됩니다. 국내의 반란과 외부 침략에 동시에 봉착한 마하라자는 인도 정부에 군사원조를 요청합니다. 그 댓가로 마하라자는 인도에 가맹하고, 국방과 통신, 외교에 관한 권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인도와 파키스탄 공히 이러한 가맹은 무장투쟁이 종식된 후에 주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잠무와 카시미르의 마하라자가 가맹문서(instrument of accession)에 서명한 정확한 시점이 언제냐를 두고, 그리고 인도군이 언제 지역 내로 들어왔는가를 두고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즉, 마하라자가 감금상태에서 강권에 의해 인도로 가맹하였는가 여부에 대한 논란입니다.
1948년 5월, 파키스탄 정규군이 파키스탄 국경선을 방어하기 위해 소집됩니다. 파키스탄 비정규군과 인도군 사이의 전투가 일년 내내 이어집니다.
국제연합(UN)에 의해 성사된 휴전안에 따라 1949년 1월 1일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국제연합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이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치른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도록 권고합니다. 양측이 전투를 멈춘 지역에서 휴전선이 성립되었고,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민투표는 끝내 열리지 못하였습니다.
1954년, 잠무와 카시미르의 인도 가맹은 주 의회에 의하여 비준됩니다. 1957년, 주 의회는 인도 헌법을 본딴 주 헌법을 승인합니다.
휴전선 서쪽으로는, 파키스탄이 지역의 약 1/3을 장악합니다. 파키스탄은 아자드(자유) 잠무 및 카시미르라고 부르고, 인도인들은 파키스탄에 점령된 카시미르지역이라 부르는 좀 작은 지역은 준 자치권을 갖게 됩니다. 반면, 과거 훈자 왕국 및 나가르 왕국(kindoms of Hunza and Nagar)이었던 일명 북부 지역으로 구성된 더 넓은 지역이 파키스탄의 직접 통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1962년의 인도-중국 전쟁 이후인,1962-3년 동안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과 미국의 후원 하에 카시미르 문제에 대한 협상을 벌이지만 성과는 없었습니다.
1965년 전쟁(The 1965 war)
(국경분쟁이 확대되어 2차 전쟁이 발발하고 카시미르 지역에까지 번지게 됩니다.)
요약
파키스탄 측이 휴전선을 넘어 인도가 통치하고 있던 잠무 및 카시미르 지역으로 특수전 공세를 펼침에 따라, 양국은 다시금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인도는 라호르(Lahore) 지역의 국경선을 넘어 보복을 가합니다.
전문
1965년 4월, 쿠치 소금 늪지대(Rann of Kutch) 일대에서 국경 순찰대 사이에 벌어진 마찰이 전투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지역은 인도-파키스탄 국경 사이의 주민이 드문 지역입니다. 인도측이 철수하면서, 파키스탄은 승리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어 8월, 파키스탄 정부가 휴전선을 넘어 인도 지배하의 잠무 및 카시미르 지역에 특수전 공세를 펼침에 따라 제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9월 초, 인도는 라호르의 국경선을 넘어 보복을 가합니다. 3주 뒤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국제연합에서 주선한 휴전에 합의합니다.
1966년 1월,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타슈켄트(Tashkent)에서 만나 상호간의 분쟁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하는 선언문에 서명합니다.
양측은 또한 8월 이전의 위치로 철군하기로 합의합니다.
1971년 전쟁 (The 1971 war)
(동파키스탄에서의 전쟁으로 수백만명이 말려들게 됩니다. 동파키스탄은 이후 방글라데시가 됩니다.)
요약
동파키스탄이 자치권을 요구하고 이어 독립까지 요구하면서, 파키스탄은 내전에 빠져들게 됩니다. 동파키스탄 주민들 수백만명이 인도로 피난하게 되자, 인도는 이들을 돕기 위해 동파키스탄으로 진군합니다. 1971년 말, 구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방글라데시(Bangladesh)가 건국되게 됩니다.
전문
자치권과 나아가 독립을 요구한 동파키스탄인들과 서파키스탄군이 싸웠던 파키스탄의 내전 발발로 말미암아, 인도-파키스탄 관계 역시 악화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대략 천만명의 동파키스탄 주민들이 인도로 피난하게 됩니다.
12월, 인도는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파키스탄으로 진군합니다. 파키스탄군은 다카(Dhaka)에서 항복하였고, 약 9만명 이상이 인도군의 포로가 됩니다.
1971년 12월 6일,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서 독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1972년 심라 협정(Simla accord of 1972)과 1974년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 승인으로 인해 완화됩니다. 심라 협정에서는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 양측이 모두 참가하여 쌍무적으로 해결하고, 집단그룹이라는 메카니즘으로 해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잠무와 카시미르 지역에 대해서는, 휴전선(ceasefire line)의 명칭을 지배선(Line of Control)으로 개명하기로 양측이 동의하였고, 이는 양측이 상대방의 인정된 지역에 편견을 갖지 않고 존중할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1974년 카시미르 주정부는 인도 정부와의 협정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카시미르 주를 "인도 연방의 구성체"로서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파키스탄은 이 협정을 거부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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