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http://www.gendercide.org/case_anfal.html) >
이란-이라크 전쟁(일명 1차 걸프전쟁)의 막바지 무렵인 1988년, 쿠르드인들에게 자행된 소위 안팔 작전(Anfal Campaign)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글이 작성된 곳은 젠더사이드 워치라는 좀 특이한 단체인데, 특정 성(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집중적인 살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권단체 같습니다. 이에 따라 글의 내용도 다소 이 부분을 강조하는 데에 치우쳐 있는 특징이 보입니다. 글의 내용상 작성 시기는 후세인이 붙잡힌 2003년 12월에서 후세인이 처형된 2006년 12월 사이에 작성된 것 같습니다.
안팔 작전은 민간인에 대한 대량살상, 화학무기 공격 등의 주제와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이를 통하여 관련정보를 이해하는 데에 좀 더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례연구 : 안팔 작전, 1988 (Case Study: The Anfal Campaign(Iraqi Kurdistan), 1988)
요약 (Summary)
쿠르드족에 대해 벌어진 "안팔" 작전은 1988년 2월에서 9월 사이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며, 그 속성 상 대량학살(genocidal)과 성학살(gendercidal; 특정 성, 즉 남성 혹은 여성만 골라서 죽이는 학살. 역자 주)의 특색을 띄고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중동 (Human Rights Watch/Middle East, HRW/ME)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안팔 작전에서의 주요 타겟이 된 대상은 "전투 연령층"의 남성들이었다. 이 조직에서 발간한 책인 '이라크의 학살 범죄(Iraqi's Crime of Genocide)'에서는,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에서는 몇몇 지역에서 여성들과 아이들도 사라진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생포된 성인 남성들이 대규모로 실종되었다... 이는 안팔 작전의 주 목적이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교외지역에서 생포된 모든 군복무 연령층의 성인 남성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음이 명백하다" (pp. 96, 170)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처형부대의 손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엇다.
배경 (The background)
쿠르드인들은 자기 국가를 갖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nation)으로 알려져 있다. 약 2천만~2천 5백만명에 이르는 이들의 전통적인 영토는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에 분산되어 있으며, 소수는 구소련 국가들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쿠르드족 중 약 400만명 가량이 이라크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라크 인구의 23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 자결주의(self-determination)" 구호가 널리 퍼져나갔고, 쿠르드인들은 1920년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을 통해 고향땅 쿠르디스탄(Kurdistan)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urk)의 신 터키 정권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영국과 프랑스에 위임통치령(mandated territories)으로 할당된 이라크와 시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게 된다. 그 결과 1923년의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에서는 쿠르드인들에 대한 독립 약속이 철회되었고, 쿠르드인들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로 흩어지게 된다. 아타튀르크는 터키 내의 쿠르드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즉각적으로 시작하였고, 쿠르드 정치 단체들이나 문화적 내용들에 대해서는 명백한 금지책을 취하였다. 2차 대전 직후에는 이란 내의 쿠르드인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잠시 동안 최초의 독립 쿠르드 국가(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the Kurdish Republic of Mahabad))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이란군에 의해 빠르게 무너지고 만다.
1946년, 쿠르드계 이라크인인 무스타파 바르자니(Mustafa Barzani)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민주당(Kurdistan Democratic Party-Iraq (KDP))를 창설한다. 바르자니는 1979년 사망하지만, KDP는 쿠르드 저항 단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조직으로 남게 된다. 이들의 가장 과격한 라이벌 단체로는 1975년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가 설립한 애국 쿠르디스탄 협회(Patriotic Union of Kurdistan (PUK))가 있었다. 1988년 안팔 작전의 표적이 된 것은 PUK였다.
1968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정권을 잡은 것(비록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1979년의 일이지만)은 처음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인들에게 좋은 징조처럼 보였다. 1970년, 사담의 바트 당(Ba'ath Party)에서는 쿠르드 반군 단체들과 광범위한 협정을 맺으면서 쿠르드인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방송을 할 권리와, 상당 수준의 정치적 자치권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바트 당이 쿠르디스탄의 석유 산지에 대한 아랍화 정책을 펼치면서 깨지게 된다. 이곳의 쿠르드 농부들을 몰아내고 대신 정부군의 호위가 붙은 남부 지역의 가난한 아랍 농부들을 이주시켰던 것이다. 1974년 3월, KDP는 사담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이어 전면전이 발생하였다. 약 13만명의 쿠르드인들이 이 시기 이란으로 도주한다. 칼레드 살리흐(Khaled Salih)가 쓴 바에 따르면, "1975년 3월, 바르자니 부족의 수만명의 주민들이 고향에서 강제 이주되어 이라크 남부의 사막으로 옮겨졌고, 이곳에서 이들은 아무 외부 지원 없이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다"라고 하였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발생한 현대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성학살(gendercidal)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이 바로 이 강제 이주된 바르자니 부족민들이었다. 마틴 반 브뤼네센(Martin van Bruinessen)이 쓴 바에 따르면:
1983년 7월-8월 기간, 이라크 보안군이 아르빌(Arbil) 부근의 4개 재정착촌의 바르자니 부족 남자들을 연행해갔다. 이 사람들은 어떠한 반정부 활동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바르자니족 출신의 2명이 당시 쿠르디스탄 민주당을 이끌고 있었고, 바그다드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에 연루되어 있긴 했지만, 이들과 함께하고 있던 부족민들은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이 집단의 총 8000여명의 사람들이 가족들로부터 떼어져나와 남부 이라크로 이송되었다. 이후 이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내려는 모든 노력들은 허사였으며, 몇몇 유럽 국가들에 의한 외교적 문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 죽은 것이 아닌가 한다. 쿠르드 민주당(KDP)에서는 군대 내부 정보원을 통하여 최소한 이들 중 일부가 다양한 화학무기들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되었다는 보고들을 접하였다. |
한 바르자니족 여성은 이들 남성들을 일제검거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새벽녁 직전, 사람들이 옷을 입고 일하러 갈 준비를 할 때, 병사들이 캠프(camp [Qushtapa])로 몰려들어왔다. 이들은 거리를 걷고 있는 남자들을 붙잡았고, 정신이 이상한 늙은 남자들 조차도 잡아들였다. 이들은 보통 묶였다. 이들은 신도들을 부르러 모스크로 향하던 설교자를 붙잡았다. 이들은 문을 부수고 집에 들어와 남자들을 찾아댔다. 이들은 닭장 안을 뒤지고, 물탱크, 냉장고, 모든 곳들을 뒤졌으며, 13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잡아갔다. 여자들은 울부짖으며 코란을 움켜쥐고 병사들에게 남자들을 데려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1993년, 사담 후세인은 이 바르자니 남성들의 운명에 대한 강력한 힌트를 남기게 된다: "저들은 국가를 배반하였고, 맹약(covenant)을 배반하였으며, 이에 우리는 저들에게 엄중한 형벌을 내렸으며, 저들은 지옥에 갔다." 휴먼 라이트 워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1983년 바르자니 작전은 이후 안팔 작전에서 더 큰 규모로 활용될 기술들을 암시하는 측면이 있다." (휴먼 라이트 워치, 이라크의 대량학살 범죄, pp. 4, 26-27) 칼레드 살리흐는 "의심할 바 없이, 국제적인 비난의 부재로 말미암아 바그다드 정권은 보다 대규모 작전을 펼치더라도 별다른 적대적 반응은 없으리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트 당은 국제적 대응이 없으리라는 계산 및 판단 측면에서 옳았다."(칼레드, "안팔: 이라크의 쿠르드인 대량학살") 라고 언급하였다.
1980년대 이라크의 쿠르드인에 대한 작전 과정에서 가장 끔찍한 측면은 이 정권이 민간인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화학무기에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1987년 4월 16일, 발리산 계곡(Balisan valley)에 대한 화학 공격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한다; 또한 그 직후 "약 70여명의 남성들이 버스로 끌려갔으며, 바르자니족 사람들처럼, 이들은 두번 다시 목격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여성들과 아이들은 에르빌(Erbil) 밖의 평야로 내팽겨쳐졌으며,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8년 3월 16일, 이란 국경 근방 할랍지(Halabji) 마을 지역에 훨씬 집중적인 화학 공격이 감행되었는데, 이곳은 잠시 동안 쿠르드 반군들과 이란군의 연합부대가 장악하고 있던 곳이었다. 수천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였으며, 공격 이후에도 이란군이 계속 마을을 장악한 탓에 언론인들과 사진작가들이 이 장소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거리에 내뒹굴고 있거나, 입을 벌린 채 누워있는 이들 사진들은 널리 전파되었으며, 사망자의 대다수가 쿠르드 민간인 비전투요원들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이 사건은 안팔 작전 기간 동안 벌어진 것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할랍지 마을 공격 사건은 안팔 작전의 일부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성학살(The gendercide)
남성들은 학살되기 위하여 태어난다.
- 쿠르드 속담
너희 남자들은 지옥에 갔다.
- 1988년 5월의 4차 안팔 작전 중, 카라노 마을(Qaranaw village) 공격 생존자들에게 이라크 병사가 한 말.
1987년 3월, 사담 후세인의 사촌이자 고향 마을 티그리트(Tikrit) 출생인 알리 하산 알 마지드(Ali Hassan al-Majid)는 바트 당의 북부 지역 사무총장(secretary-general)으로 임명되었다. 이 지역에는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알 마지드는 "바트 당 치안 기구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에도... 극히 잔인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알 마지드에 의하여 쿠르드 반란군에 대한 통제 임무는 이라크 군대로부터 바트 당 스스로에게로 넘어오게 된다. 알 마지드가 직책을 차지하게 된지 불과 수 개월이 지난 뒤에 벌어진 쿠르드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에 대한 전조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명칭은 일명 "알-안팔(al-Anfal)"("약탈(The Spoils)")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데, 이 표현은 코란의 제 8장에 나오는 것으로, 선지자 무하마드가 A.D. 624년 최초의 군사적 대승리를 거둔 뒤의 계시 내용을 다룬 것이다. "나는 불신자들의 심장에 공포를 안겨주었다," 라고 첫 문단은 시작된다; "목 위를 강타하였고, 저들의 모든 손가락들을 강타하였다... 불신자들에게 불의 세례를 안겨주었다." 안팔 작전은 공식적으로 1988년 2월 23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실시되었으며, 총 8개 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이 중에서 7개는 PUK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목표로 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공세를 위하여 이라크 측에서는 공군 지원을 포함한 총 2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 이는 쿠르드 게릴라 병력이 수천 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과 대비된다.
1987년 6월 20일, 안팔 작전에 대한 지시서인 SF/4008이 알 마지드의 서명과 함께 공포되었다. 중요한 조항은 5절의 내용이었다. 이 지역들을 "금지 지역(prohibited zones)"으로 언급하면서, 알 마지드는 "이 마을들에서 생포된 모든 인원들은 억류되어 치안부서에 의해 심문되도록 해야 하며, 15세에서 70세 사이의 인원들은 일단 적당히 유용한 정보를 얻어낸 뒤에는 처형하도록 한다." 다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 이들 "15세에서 70세 사이의 인원들"이라는 표현이 "15세에서 70세 사이의 '남성들'"이었음은 분명하다. HRW/ME에서도 이 조항을 언급하면서 "5절의 명령은 모든 성인 남성들을 죽이라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1987년 6월의 알 마지드의 지시서대로 하자면, 안팔 지역에서 무기를 들 수 있는 연령대의 남성들은 무조건 사형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어져 1987년 9월 6일에 나온 지시서 역시도 이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사보타주 참가자들의 친척들이 사는 지역에 있는 가구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단, 12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들은 강제 이주시키지 말고 억류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붙잡힌 쿠르드 주민들은 억류 지역(특히 키르쿠크 시(city of Kirkuk) 근방의 톱자와 수용소(concentration camp of Topzawa)가 유명하다)으로 이송되면 고전적인 성학살 절차에 놓여지게 된다: 성인 및 청소년 남성들을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HRW/ME에 따르면,
미세한 차이점들을 제외하면... (톱자와에 오는) 신규 도착자들을 분류하는 표준 패턴은 다음과 같다. 트럭이 기지의 연병장에 도착하자 마자 남성과 여성들은 현장 분류된다. 그 절차는 잔인했다... 그 직후, 남자들은 다시 연령별로 분류되었는데, 꼬마들은 엄마들에게 돌아갔으며, 노인들은 별도 구역으로 이송되었다.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연령대로 간주된 청소년 및 어른 남성들은 함께 수용되었다. 대충 이야기하자면,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들이었다. 하지만 신분증 검사 따위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 기준은 엄밀한 연령이라기 보다는 겉모습에 따른 것이었다. 건장한 12세 소년이 걸려들어갈 수도 있었고, 키가 작은 16세 소년이라면 나머지 여성 가족들과 함께 남아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젊은 남성들을 분류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들은 보다 작은 그룹들로 분류되었다... 일단 등록된 뒤에는 수감자들은 커다란 방으로 떠밀려 들어갔는데, 각각은 단일 거주지역 출신 사람들로 채워졌다... 비록 톱자와의 조건이 고통스럽기는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가장 심각하게 과포화되어 있던 곳은 남성 수감자들이 잡혀있던 곳이었다... 남성들에게는 구타 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
며칠 동안 이러한 대우를 받은 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남성들은 대량 처형장으로 트럭 이송되었다. HRW/ME에 따르면, 이들 성학살의 "표준 운영 절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s)"는 "동유럽 나찌 점령 지역에서 아인자츠코만도(Einsatzkommandos), 다른 말로 기동 처형대가 했던 활동들과... 끔찍하게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일부 수감자 그룹들은 일렬로 세워져 앞에서부터 사살당했고, 이어 미리 파놓은 집단 무덤으로 끌려들어갔다; 어떤 경우에는 살해되기 전에 마치 정어리들을 채워놓는 것처럼 먼저 죽은 시신들 옆에 차곡차곡 누워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묶여진 다음 구덩이 가장자리에 서 있도록 한 뒤, 등쪽에서 사격하여 구덩이 속으로 넘어지도록 하였다 - 처형자 입장에서는 아마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후 불도저가 시신 위로 흙이나 모래를 대충 덮었다. 일부 매장 지역에서는 수십 개의 구덩이들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마 각각 수천 구의 시신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
안팔 작전의 단계별로 대량학살 혹은 성학살의 촛점은 변화하였다. 제 1차 안팔 작전(1988년 2월 23일- 3월 19일) 기간에는 민간인 대량학살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팔 작전 마지막 단계(1988년 8월 25일- 9월 6일) 기간에는 남성 인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 작전은 이란과의 휴전이 조인된 직후에 벌어졌는데, 휴전으로 인해 남부전선으로부터 대규모의 병력 및 군수물자를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전은 "가파르고 좁은 계곡인 바디난(Badinan) 지역"에 이뤄졌으며, 이곳은 "4천 평방 마일 넓이의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 지역으로 동부는 대 잡 강(Greater Zab River)이, 북쪽은 터키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이곳 안팔 작전에 대하여 HRW/ME에 생존자들이 제출한 "실종자" 명부에는 "단지 성인 및 청소년 남성들만이 포함되어 있었고, 단지 예외라면 (부수적인 학살 대상이 된) 아시리아인들과 칼디아 기독교인, 예지디 쿠르드인들 뿐"이었다. 바디난 족 남성들 상당수는 이러한 "처리" 장소까지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저 지역군 장교들의 직권에 의해 붙잡힌 현장에서 일렬로 세워져 처형부대의 손에 사살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코레미 마을(village of Koreme)의 경우인데, 1992년 6월, 미들 이스트 워치(Middle East Watch)와 인권을 위한 의사들(Physicians for Human Rights)에서 공동으로 수행한 법의학 조사 과정에서 8월 28일 처형된 27명의 성인 및 청소년 남성들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대단히 조직적인 남성 및 소년들에 대한 학살 와중에 "수백명의 여성 및 아이들" 역시도 사망했다. 다만, 이들의 사망 원인은 다른 것이었는데, "칼라쉬니코프 총탄이 아닌 가스와 굶주림, 추위, 방치 등으로 인하여" 사망했던 것이다. 안팔 기간 동안의 나머지 쿠르드 공동체들이 겪었던 운명에 대해서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여성과 노인, 아이들에 대한 대량학살 (Genocide against women, the elderly, and children)
HRW/ME에서는 이라크인들의 쿠르디스탄에서 벌인 대량학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쿠르드족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의 죽음과 연관된 결정들에 대해 "안팔 작전의 매우 커다란 수수께끼"라고 규정하였다. 이 기관에서는 "수천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사망"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지역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특히 3차 및 4차 안팔 작전에 연관된 2개 거주민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하였다. 분명 이러한 차이가 난 요소 중의 하나는 "이라크 군대가 해당 지역에서 무장저항을 받았는지 여부"라고 볼 수 있으며, "대부분 지역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살해되긴 했지만, 일부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지역은 남부 게르미안(Germian) 지역으로 보이는데, 이곳은 이라크의 아랍인들 거주지역과 밀접해 있는 곳으로, 제 3차 안팔 작전(1988년 4월 7일-20일) 기간 동안 타격당했다. 남부 게르미안은 특히 이 대량 학살의 핵심 지역이었는데, 이는 이곳이 PUK의 심장부인 동시에 PUK 반군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HRW/ME에서 기록한 바에 따르면, "게르미안 전역에서 15세에서 50세 사이 남성들이 정기적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이곳 남부에서만이 상당한 수의 여성 및 아이들의 실종이 발생했다. 이들 상당수는 다오우디(Daoudi) 및 자프-로기야지(Jaff-Roghyazi) 부족 인원들이었고, 이들이 해당 지역 '실종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티크리트 시와 키르쿠크 시 사이에 위치한 함린 산맥 지역의 한 장소에서 "약 2천여명의 여성 및 아이들"에 대한 대량 처형이 이뤄졌다.
이러한 처형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타이무르 압둘라 아흐마드(Taimour Abdullah Ahmad)였다. 그의 증언은 서구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그가 묘사한 내용은 남부 게르미안 지역의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살해하기 앞서 "전투 연령"의 남성들에 대해 아인자츠그루펜 방식으로 이뤄진 학살과 실로 동일했다. 보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을 보고 싶으면 (http://www.fas.harvard.edu/~irdp/taimour.html)를 참조하라.
"전투 연령"의 남성들이 "사라진" 뒤에 남은 대부분의 쿠르드 사람들은 남쪽의 재정착촌으로 트럭 운송되었다. 집단 처형된 여성, 아이들, 노인들은 통상 이러한 캠프에 먼저 한동안 억류되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도살당하지 않은 인원들의 경우에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재정착촌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천명의 사람들 - 대개 아이들 -이 결핍과 무관심 속에서 죽어갔다.
한편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내의 사회간접자본들은 안팔 작전 및 이후의 작전들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다. "대량학살의 광기가 끝나는 시점에 이르르면, 90%의 쿠르드 마을과 20여개 이상의 도시 및 읍들이 지도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교외지역에는 1500만개의 지뢰들이 깔렸고, 농업 및 경작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150만명의 쿠르드 농민들이 캠프 내에 억류되었다... 쿠르드인 총 인구 중에서 10% 가량이 사망한 것이다"
얼마나 많이 죽었나? (How many died?)
HRW/ME에 따르면, "최소 쿠르드 농촌 인구 5만명이... 순수한 안팔 작전 기간 동안 사망했고, 실질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그 두 배에 가까울 것으로 본다... 아마 바르자니 남성들이 고향에서 끌려나간 시점부터의 10여년간 기간 동안 살해당한 쿠르드 사람들의 총 숫자는 대략 6자리 정도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심한 쿠르드 연구가인 쇼레시 레소울(Shoresh Resoul)에 따르면, "쿠르디스탄 지역에서의 인터뷰 결과와, 가용한 이라크 문헌들을 살펴본 바로는 ...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6만에서 11만명이 마지드의 쿠르드 지역 담당 기간 동안 - 즉, 안팔 작전 직전에서부터 안팔 작전 종료 직후 기간 - 사망하였다" 라고 한다. 쿠르드인들에 의한 다른 추정치는 그보다 훨씬 크다. "1991년 봄의 봉기의 여파 속에서 이라크 정부 관리와 대면하게 된 쿠르드 리더들은 안팔 작전으로 인한 사망자 문제를 제기하면서 18만 2천명이라는 숫자를 언급하였다 - 이는 파괴된 마을들의 수를 기초로 한 대략적인 어림 수인 것으로 본다. 이 회담 과정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알-마지드는 격노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18만 2천이라는 수는 엄청나게 과장된 숫자이다. 그 숫자는 많아 봐야 10만명 정도 밖에 안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이라크 내 쿠르드인들이 그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겪어야 했던 재앙의 정도를 과연 얼마나 덮어줄 수 있으리라 보았는지는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안팔 작전의 희생자들 중에서 과연 몇 퍼센트가 성인 남성 및 청소년 남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기가 어렵다. HRW/ME에서 한 조사가 가장 면밀하게 실시한 것이었는데, 약 350명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양한 안팔 작전 단계에서 발생한 "실종자"의 숫자를 정리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1255명의 남성과 184명의 여성, 359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확보할 수가 있었는데, "단지 안팔 작전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자면 처형당한 성인 "실종자"들의 대략 87퍼센트가 남성이었으며, 총 "실종자"의 70퍼센트 가량이 "전투 연령" 남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은 화학무기에 의해 무차별 살상당한 쿠르드 민간인들과 기타 총공세 당시 사망자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가 없다.
휴먼 라이트 워치의 의장인 케네스 로스는 최근 "1988년 안팔 대학살 과정에서 10만여명의 쿠르드 성인 및 청소년 남성들이 총살당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누구 책임인가? (Who was responsible?)
HRW/ME에서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 이러한 수만명의 안팔 희생자들은 군사용어로 '간접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하는 전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희생자들이 아니다. 또한 이들은 일부 과격하지만 상부의 감시에서는 벗어난 지휘관들이 벌인 탈선행위에 의한 희생자들도 아니다. 이들 쿠르드인들은 바그다드의 이라크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조직적으로 수일, 혹은 수주일간 특정 마을에 억류되어 공격당하거나, 또는 군대의 공격을 받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대량으로 살해당했다... 이라크 정보부에서 노획한 문서 자료들을 통하여 안팔 작전 및 기타 1987-89년간 쿠르드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작전들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 살상, 실종, 강제 이주 등이 주도 면밀하게 계획되었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비록 이러한 작전들의 원동력은 중앙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성공하게 된 것은 지역에서부터 국가 단위까지의 수많은 기관들이 협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라크 공화국 대통령에서부터 가장 아래 단계의 자흐시(jahsh; 친 이라크 쿠르드인) 부대에 이르기까지.
노암 촘스키는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를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일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국가 조직의 정점에는 살인광 독재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적(patrimopnial)" 방식으로, 사담은 야만적인 1당 독재 체제를 만들었으며, 대부분 티크리트 및 주변 지역의 친척들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라크령 쿠르디스탄에서 벌어진 최악의 유혈사태 기간 동안 바트 당의 "포인트맨" 역할을 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알리 하산 알-마지드였다. 안팔 작전 이후, 그는 다른 직책으로 영전하였는데, 그 자리는 1990년 8월의, 이라크가 점령한 쿠웨이트 총독이었던 것이다.
사담의 독재 체체는 바트 당과 이라크 군대, 보안군 등을 통하여 이라크 사회의 풀뿌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모든 단계에서 이 정권의 폭력성은 가부장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조나단 랜달은 이것을 1979년 사담이 수행한 내부 숙청에서 비롯된 "남성적 유대감의 변태적 형태"라고 묘사하였는데, "살아남은 장관들과 고급 당 관리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처형부대에 참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지휘사슬을 거쳐 반복되었으며, 가장 하위 계층의 비밀 경찰 요원에서부터 위로 조금씩 처형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게 됨으로써, 결국 사담 후세인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테러와 잔혹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가진 사람 누구든지 겁먹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국제 사회 역시도 이라크 지역 쿠르드인들에 대한 사담의 대량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 이 기간 역시 쿠르드인들에게는 악몽의 시기였다 - 사담은 중동의 전략적이고 기름 많은 국가들을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로부터 방어하는 중요한 방패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서방 세계는 그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중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결국 이란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1988년 8월, 안팔 작전이 거의 종료된 시점이자 민간인에 대한 1년 반에 걸친 잔혹한 화학무기 공격이 끝난 이 시점에서 벌어진 유엔 인권 위원회 투표에서, 11대 8로 이라크에 대한 인권 위반 비난 결의안이 부결되었다. 이라크에 분명한 비난 의사를 표시한 곳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정도였고, 기타 단체들로 유럽 의회와 사회주의 인터네셔날 정도가 있었다.
그 이후(The aftermath)
1990년 8월, 이라크 정권은 이웃 국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기어코 넘고 말았다. 그 결과 걸프 전쟁이 발발하여 미국이 이끈 연합군이 이라크 점령군을 몰아낸다 (2차 걸프전쟁). 이 전쟁의 막바지인 1991년 3월, 북부 이라크에 거주하던 쿠르드 주민들은 이라크 정권에 대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고, 짧은 기간 동안 이라크 정권을 해당 지역에서 몰아낸다. 이라크인들은 반격했고, 결국 약 50만명에 이르는 쿠르드인들이 주변 터키와 이란으로 도망쳤다; 이어진 인도적 재앙 문제는 연합군 소속국들이 이라크령 쿠르디스탄 북부 지역에 "안전지대(safe haven)"를 설정하도록 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이때 7개의 쿠르드 정당 연합들이 해당 해방구에 대한 권한을 쥐게 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94년 5월에는 PUK와 KDP간에 심각한 전투가 발생하여 1000여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1998년 9월, 미국의 중재에 따라 이 2개 반군 조직은 새로운 권력 분점 합의에 이르른다.
1991년 3월 봉기 기간 동안, 쿠르드 군대는 지역내 이라크 기관에 있던 약 4백만점의 문서들을 노획하게 되고 이들을 안전지대로 운반한다. HRW/ME 및 기타 단체들이 쿠르드 지역에서 벌인 조사들과 함께 이 문서들은 안팔 작전 당시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상세한 재구성이 가능하게 하였다. HRW/ME에서 언급한 바처럼, "인권 유린 사건의 생존자들을 면담할 기회를 갖고, 그 사건의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며, 이 사건을 벌인 정권이 아직도 권좌를 유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에 대해 기록한 공식 기록들을 읽는 경험이란 인권 연구의 역사상 정말로 특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더미 같은 문서들과, 목격자들의 증언, 법의학 증거들을 마주한 이 단체에서는 "1987년-89년 기간에 대하여... 이라크 정권의 대량 학살 의도에 대해 입증할 증거는 매우 충분하다"라는 "확신"을 선언하였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르완다, 코소보의 사례에서처럼 헤이그에서 전범재판을 열 것을 촉구하게 된다.
몇몇 관찰자들은 북부 이라크의 쿠르드 인구 사이에는 아직도 성학살의 흔적이 역력함을 언급하고 있다. 1988년 9월, 공식적으로 안팔 작전이 종결되고 있던 시점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였던 에이프릴 글래스피(April Glaspie)는 "술레이마니야로부터 서쪽으로의 여행을 회상하면... 슬픈 표정의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길가에서 잡다한 짐들을 가지고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들 중에는 남성(menfolk)이라고는 없었다. 나는 정권 측에서 내가 저걸 보도록 일부러 의도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1999년, 크리스챤 에이드(Christian Aid)에서는 "수많은 쿠르드 가정들의 가장 역할이 과부에게 돌아가 있다. 이들의 남편들은 실종되었다." 라고 하였다. 1993년-94년간 벌어진 구원 작전(relief campaign)인 "Operation Provide Comfort"을 지휘했던 미군 퇴역 준장 제프리 필킹턴은, 쿠르드 지역으로의 여행 후의 보고에서,
완벽한 경제 몰락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들판은 거의 텅 비어있었다 - 비료도 없었고, 살충제도 없었으며, 재배한 밀을 팔 시장도 없었고, 그걸 살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수백명의 근로자들이 일했을 공장도 지금은 버려져 있다... 많은 마을들에서 주민들은 단지 여성들과 아이들 뿐이었다. 대다수의 남성들은 억류되거나 살해당햇다.
마찬가지로, 영국 내무부 국토정보조사과(Country Information and Policy Unit of the British Home Office)에서 2000년 4월 실시한 이라크 조사에 따르면, "쿠르드 지역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으며, 이는 안팔 작전 당시 수만명의 쿠르드 남성들이 사라진 데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특별 조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안팔 작전 희생자들의 과부, 딸, 모친들은 친척들이나 다른 주민들에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상황인데, 이는 실종된 가족원들로부터 적절한 재산 혹은 자산을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2003년 3월, 오랜 기간 위협만 하던 미국 정부가 마침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이라크 침공/ 3차 걸프전쟁). 비록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게릴라 저항은 계속되고 있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사담 정권이 무너지자 전국의 이라크인들은 사담 정권에 의해 처형당한 자들의 대규모 매장지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볼티모어 선 지의 보도(2003년 5월 6일)에 따르면, "인권 단체들의 추정에 따르면, 지난 23년간 약 30만명에 달하는 이라크인들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성인 남성 및 청소년 남성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 지의 기자 토드 리치슨은 기사 제목에 초기 발굴 결과로 미뤄보면, 사담의 광풍은 여성들에게도 미쳤다고 쓰고 있다. 안팔 문제에 있어서, "이라크 독재자가 쫓겨난지 8개월이 지난 2003년 12월 시점에서, 1988년의 안팔 작전 당시 실종된 사람들 중에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라는 점은 참으로 통렬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2003년 12월, 미군은 봉두난발 차림의 사담을 붙잡았다고 선언하였다. (사진 참조). 그는 과거의 대통령 궁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티그리스 강가의 한 농가에 있는 구덩이 속에 숨어 있던 것이었다. 그의 범죄들에 대해 어떠한 재판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일으킨 수많은 유혈사태들 - 이라크령 쿠르드인에 대해 벌인 안팔 작전을 포함하여 -에 대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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