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news/newsBbzView!view.action?id=155696676&curPage=26&strWhere=&strValue=&schWhere=&schDirect=§ionId=add_cate_1_sec_1&sdate=&edate=&category=&mc=NS_01_10) >
호국의지와 평화의 염원이 담겨있는 국방과학기술문화재
금번 발굴이 이루어진 세종로 부근 도심은 조선시대 중앙관청 가운데 하나인 공조와 장예원터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이들 총통들은 건물터 기단 앞에 묻혀 있었는데, 길이와 무게 등이 다른 여러 종류가 뒤섞인 채 출토됐다. 이들 총통들은 조선전기의 소형 화기인 사전총통·신제총통·세총통 세 종류였다.
한편 2009년 11월에도 서울시가 새로운 시청 청사 건물을 계획 중인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일대 옛 서울시청 북편에서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임진왜란 이전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각종 무기류를 제작하던 관청인 군기시軍器寺 관련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의 보유와 끊임없는 군사훈련이 나라를 지키는 요체要諦임을 인식하고 무기 개발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에서는 병력의 규모라든가 전략과 전술, 충분한 물자의 조달, 그리고 훈련된 병사와 장수의 통솔력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사 개개인에게 지급되어야 할 무기였다. 무기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얼마나 우수한 무기를 보유하고 개발했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했다. 역대 전쟁에서 무기가 전쟁의 상황을 결정했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수한 무기의 보유와 뛰어난 성능은 한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구경하고자 원했던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조선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관람하는 관사觀射요, 둘째는 화약을 이용하여 형형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관화觀火이고, 셋째는 금수강산의 대명사인 금강산 관광이다.
이 세 가지는 조선이 가지고 있던 천하제일의 명기이자 자랑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들 관람을 국가 안보와 관련해 엄격히 제한했고, 외국 사신들은 이들을 구경하고자 했으며, 한 가지 구경만으로도 외국 사신들은 최고급 대우로 여겼던 것이다. 이 중에서 관사와 관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기이자 호국병기로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시범을 통해서 조선의 국방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활과 화살, 도검, 창, 그리고 총통으로 대표되는 화약병기로 대표되는 조선의 무기는 우리가 치른 전쟁의 역사를 대변하듯 다양한 형태의 유물로 전해오고 있는데, 이들 국방과학기술문화재에는 분명 선열들의 혼이 깃들어 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분들의 호국의지와 평화를 향한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국가적 사업으로 개발된 화약병기
우리나라에서 화약의 개발은 고려 말에 최무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한반도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은 왜구들을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화약과 화약병기라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또한 여러 화약병기를 제조해서 왜구 토벌전에 사용했다. 이렇게 등장한 화약병기는 무기체계상에 있어서 일대 변혁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전쟁의 양상도 변화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화약병기의 개발은 일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대외 방어전략 측면에서 적극 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무선의 화약과 화기 제조술이 그의 아들인 최해산으로 전승되었고,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개발되었다. 특히 세종은 북방의 4군 6진 영토 개척을 위해 화약과 화기 개발에 주력했는데, 그 결과 조선의 화약과 화기 제작기술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 시대에 제작된 총통이 육군박물관의 세총통(보물 제854호)을 비롯해 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전총통, 팔전총통, 이총통, 삼총통, 주자총통 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세총통은 전체 길이가 14cm, 구경이 0.9cm에 불과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화기 중에서 가장 작은 형태로서 우리나라 권총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 그런데 바로 3월에 세종로에서 세 점의 세총통이 더 발견되어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후 화기 제작기술에 대한 엄격한 관리와 지나친 통제책,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가 유지되는 동안 화약과 화기 기술에 관한 한 선진국이었던 조선은 점차 기술상의 후진국으로 전락해 갔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1592년에 벌어진 임진왜란이다.
당시 조선군은 육지에서 일본군의 조총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해 전국토의 70%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우수한 성능의 대형화포를 거북선·판옥선과 함께 운용하여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별황자총통 등의 대형화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화포의 우수성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이 전술을 펼치는데 강점으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은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사용하였다. 이 전술은 선박 위로 뛰어들어 개인 휴대무기를 이용해 적을 살상하는 단병전술(백병전)이었는데, 주로 약탈 선박의 선원을 살해하고 물품을 빼앗기 위한 왜구의 전술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후 16세기 중반 조총이 전래되면서 기존의 단병전술 외에 조총을 활용한 사격전술이 추가되었으나 전체적인 전술 변화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은 대형 전함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형화포를 바탕으로 함포전술艦砲戰術을 구사하였고, 전함을 이용한 당파전술撞破戰術, 화공전술火攻戰術을 구사했던 것이다. 특히 조선군의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된 지자·현자총통과 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불랑기 자포 등 다량의 화약병기는 모두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무기라 할 수 있다. 국립진주박물관의 가정을묘명천자총통(보물 제647호)·중완구(보물 제858호)·지자총통(보물 제862호)·현자총통(보물 제885호, 보물 제1233호)·만력을묘명승자총통(보물 제648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의 중완구(보물 제859호), 전쟁기념관의 황자총통(보물 제886호)·지자총통, 동아대박물관의 지자총통(보물 제863호),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자총통, 경기도박물관의 현자총통,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총통(보물 제856호) 등은 출토지역이나 시기가 모두 임진왜란과 유관하다고 할 수 있는 유물이다.
이외에도 임진왜란때 사용된 화약병기로 특기할 만한 문화재가 있는데, 바로 비격진천뢰이다.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 고유의 화기 중에서 유일하게 목표물에 날아가서 폭발하는 작열탄炸裂彈으로 병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기이다. 특히 2003년에 창녕 화왕산성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국립진주박물관 소장)는 그 모양이 완전하게 발굴되었는데, 발굴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지역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창경궁에 보존되어 왔던 비격진천뢰(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860호)와 경남 하동 고성지古城址에서 발굴된 유물, 진주성지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 파편, 전남 장성군 석마리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연세대박물관 소장) 등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조선은 무기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일본군이 사용한 신무기, 조총을 비롯해 호준포·삼안총·불랑기 등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그 무기에 맞는 전술을 개발, 운영하였다. 그 후 조선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청나라가 조선에 조총과 우수한 조총병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국방과학기술문화재는 앞서 언급했던 국가지정문화재 17점을 비롯하여 수백여 점이 있다. 이들 군사문화재를 통해서 나라에 충절을 바친 선열들의 체취를 느끼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 / 사진 ㆍ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 사진ㆍ문화재청, 두피디아 포토박스, 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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