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개념, 이론

[스크랩] [번역] 방향성 있는 망원경 / 1985,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 (1)

박용수 2014. 10. 27. 16:18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resources/csi/griffin/griffin.asp) >

 

 

 방향성 있는 망원경(directed telescope)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군사학자인 마틴 반 크레펠트가 만든 용어로 알려져 있으며, 전쟁사 관련 서적들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글들에서는 마틴 반 크레펠트가 쓴 글인 '전쟁에서의 지휘(Command in War)'라는 책을 참조하라고 나와있긴 한데, 실제로 읽어보면 요약되어 있지 않고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가며 대단히 긴 내용으로 논리 전개를 해 나가는 책이라 쉽게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번에 번역하는 글은 이러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잘 요약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되어 자주 인용되는 유용한 사례들에 대해서도 잘 설명한 글입니다. 전쟁사를 실제로 응용할 수 있는 중간 역할을 하는, 대단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번역에 들어갑니다.

 

- 박용수 드림

 


방향성 있는 망원경 : 효과적 지휘에 관한 전통적 요소

(The Directed Telescope: A Traditional Element of Effective Command)

 

저자: 개리 B. 그리핀 중령

 

 

추천의 글(FOREWORD)

 

"전쟁은 우연(chance)의 세계이다. 인간의 다른 활동 중에서 이보다 넓은 범위를 갖는 것이 없다: 전쟁처럼 간단없이 다양한 침략자들을 다뤄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은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며, 사건 전개 전체에 간섭하게 된다." 이는 칼 반 클라우제비츠(Karl van Clausevitz)가 유명한 고전인 전쟁론(On War)에 기술한 내용이다. 전쟁에 내재한 불확실성은 각종 노력과 위험, 우연성 등과 조합되에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전쟁사 전체에 걸쳐 지휘관의 역할은 자기편 쪽의 전쟁의 불확실성은 감소시키는 한편, 적들의 불확실성은 증가시키는 데에 있어왔다. 지휘통제의 기술과 과학에 있어서의 엄청난 진보들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지휘관들은 전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부하들을 자신의 두뇌의 연장선(extensions of their minds)으로 이용하여 전쟁의 안개(fog of war)를 꿰뚫는 데 이용하였다. 이러한 기교는 이후 "방향성 있는 망원경(directed telescope)"라고 불리게 된다.

 

 개리 B. 그리핀 중령이 저술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 효과적 지휘에 관한 전통적 요소'는 1985년 전투연구소(Combat Studies Institute)에서 CSI 보고서(CSI report)로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 글은 출간된 이래로 미육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그리고 몇 개월 전 개시된 페르시아 걸프 작전(Persian Gulf operation)을 통해 이 연구가 특히 유용하고 적시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리핀 중령은 지휘관의 연장물(extensions of the commander)로서의 연락장교(liaison officers), 부관(aides-de-camp), 관찰참모(staff observers)들이 갖고 있던 역사적인 역할들을 조사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몇몇 위대한 지휘관들과 그들의 연락장교들간의 관계들에 촛점을 맞추는 한편, 이들이 사용한 체계와 기술들, 조직들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 연구를 공부한다면,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지휘관들은 새로운 형태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지휘 통제를 편리하게 만드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전문적 분석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7월

로저 J. 스필러, 전투연구소장

 


 CSI 출판부는 다양한 전쟁사학 주제들을 다룹니다. 여기에 소개된 견해는 전적으로 저자 본인의 것이며, 육군성이나 국방부의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차

 

서문(Preface)
I. 소개 (Introduction)
II. 19세기 이전 시기(The Prenineteenth-Century Era)
III. 나폴레옹 시기(The Napoleonic Era)
IV. 현대 시기(The Modern Era)
 - 미국 독립전쟁 (The American Civil War)
 - 제 1차대전 (World War I)
 - 전쟁 중간 시기 (The Interwar Years)
 - 제 2차대전 (World War II)
 - 2차대전 이후 시기 (Post-World War II)

V. 결론 (Conclusions)
주석 및 참고문헌(Notes and Bibliography)

 


 

 

서문 (PREFACE)


 전투연구소(Combat Studies Instutute, CSI)에서 발간한 이 연구는 원래 미육군 조직활성 센터(United States Army Organizational Effectiveness Center and School, OECS)에서 역사부문을 지원해달라고 하여 마련된 것이다. 특히 OECS는 CSI로 하여금, 일련의 전역 및 전투 과정 속에서 지휘관들이 부관(aides), 연락장교(liaison officers), 관찰자(observers), 기타 지휘관의 대리자(other representatives)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해달라고 요청하였다. OECS는 이 연구를 통하여 전투 중의 참모 장교들과 조직의 효과성에 관련된 새로운 교리를 개발하는 데에 이용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제시하였다:

 

 * 이러한 요원들이 전투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 이러한 요원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부대에 대한 지휘통제를 향상시키고(enhance the command and control of units), 주도권을 만들어내며(generate initiative), 신속성과 전문성을 향상시키고(create agility and depth), 전투력 조화에 있어 기여(contribute toward the synchronization of combat power)하였는가?
 * 이러한 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훈련이나 준비는 무엇이었는가?
 * 이러한 요원들이 갖고 있는 특질이나 속성, 특기, 능력 등(qualities, attributes, competencies, capabilities)에는 무엇이 있는가?
 * 이러한 요원들이 누구를 위하여 일했는가?
 * 이러한 요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일하였는가?
 * 이러한 요원들은 어떤 방식으로 선발되었는가?
 * 이러한 요원들을 사용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요원들을 사용한 부대와 사용하지 않은 부대간의 전장 효능(battlefield effectiveness)에 있어서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 이러한 요원들이 갖고 있던 권한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가이드라인 범위 내에서, 이 연구는 19세기 이전의 부관 및 연락장교 시스템에 관한 일반적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 시기와 현대 시기의 전쟁사에 이르는 보다 상세한 평가를 실시하게 되었다. 연구에 대한 광범위한 위임 사항과 함께 가용 시간은 제약된 관계로, 보다 상세한 분석은 제한되었다. 게다가 이 연구 전반에 걸쳐 선정된 역사적 사실들은 지휘참모대학(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내에서 갖고 있던 자료들 속에서만 고른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역사적 사례들은 지휘통제 과정 속에서 부관(aides), 연락장교(liaison officers), 기타 요원(other agents of commander)들의 효과성에 대하여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역사적 증거들에 비춰보았을때,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기능, 권한, 이런 종류의 장교들의 활용내역 등은 대단히 상황에 의존적이었고(highly situational), 그 결과, 시간과 공간에 따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들의 활용과 조직이 정식으로 규정된 예는 드물었으며, 특히 이들의 지휘관과의 밀접한 관계라던가, 상호 신뢰와 확신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수단의 측면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1985년 당시의 OEGS의 요청이야말로 이 연구의 연구 목표이긴 했지만, 실제로 조직 효과성에 대한 교리 발전에 이 연구를 응용하려는 시도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제시된 연구물은 언젠가 OECS가 공지 전장 교리(AirLand Battlefield)에 있어서의 참모 장교들에 대한, 또는 일반적인 연락 장교들에 대한 조직 효과성 교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 연구는 지휘 기법(techniques of command)이라는 주제에 있어서는, 그 자체로도 지식 및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다.

 

 


I. 소개 (INTRODUCTION)


 만약 이 직책들을 적합한 장교들로 채울 수 있다면 ... 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를 가진다고 봐도 좋습니다.

 로버트 E. 리 장군, 1863년 3월 21일


 전쟁 기술에 관한 가장 주요한 요소인 지휘에 관한 연구는, 지휘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지휘 기능들(command functions)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이에 필요한 지휘 체계(command system)나 수단들은 수세기에 걸쳐 거의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 결과, 지휘에 필요한 조직, 기법, 절차 등은 점차 세련되고 복잡해져가는 기술(art)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재정립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로 인한 엄청나게 다양해진 지휘 체계들 속에서도  어떤 공통적인 패턴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체계들 간의 유사성의 정도는 놀랄 정도이이다. 많은 지휘 체계들의 특성들(command system characteristics)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 같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동일한 상수(constants)로서 등장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지휘계통 및 참모(line and staff)" 식 조직의 몇몇 특질들은 사실상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수세기에 걸친 조직상의 변화와 기술적인 진보들에도 불구하고, 이론 측면에서나 실제 적용 측면에서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화되지 않은 중요한 지휘 요소들 중 하나는, 역사가 마틴 반 크레펠트(Martin Van Creveld)가 명명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directed telescope)"라는 것이다. 반 크레펠트는 "플라톤 시기에서 나토 시기까지(Plato to NATO)" 전투 지휘는 무엇보다 확실성의 추구(search for certainty)라는 것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였다. 전투에서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지휘관의 끝없는 노력은, 그러나 이제껏 단 한번도 완전히 충족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모든 단계의 지휘관들은 전술첩보를 얻고, 결정적 지휘를 전달하며, 휘하 부대들을 통제하기 위한 가장 신속하고 신뢰성있으며, 효율적인 수단을 개발하기 위하여 긴 역사에 걸쳐 힘들고도 끊임없는 도전들을 해야만 했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특별히 선발한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젊은 장교들을 지휘관을 위한 특수요원 내지는 관찰자로 사용하는 행위는, 앞서 말한 끊임없는 도전들에 대처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젊은 장교들은 통상적으로 지휘관의 "눈"이라고 불렸다. 전쟁사 전반에 걸쳐 이러한 식으로 장교들을 사용하는 것은 지휘관이 전장 첩보를 얻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다. 이러한 특수요원들 - 이들이 부관(aides)이던지 연락요원(liaison personnel)이던지 특별 참모 장교(special staff officers)이던지 -은 수천년의 전쟁 역사를 통해 그 가치를 증명해 왔다. 이러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은 첩보 수집에 있어서의 통신 기술이 계속적으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남았다. 나폴레옹 시대의 충성스러운 부관(aides-de-camp)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영국 지휘 연락 장교(British command liaison officers)에 이르기까지, 종종 간과되기도 하는 지휘기법인 지휘 및 참모 연락 시스템(command and staff liaison system)은 전쟁의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수준에 있어서 성공적인 지휘 및 통제가 이뤄지도록 하는 데 있어서 극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앞서 말한 바처럼, 신뢰할 수 있는 부하들을 경험 많은 관찰자 및 객관적 조언자로 활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지휘 수단이었다. 비록 이 수단이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늘날의 지휘관들과 군사 이론가들은 육군의 공지 전투-미래 지휘 통제(AirLand Battle-Future command and control)의 필수 요건들을 맞출 수 있는 지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을 통해 입증된 방향성 있는 망원경 개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은 군사 참모 자체 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역사상에 기록된 가장 오래 전의 지휘관들 조차도 자신들의 지휘를 수행하는 것을 돕는 일종의 사환(orderlies of some type)을 활용하였다. 그 결과, 참모 장교들을 활용하는 지휘 시스템의 발전에 대하여 일반적인 조사를 실시하게 되면, 오늘날 시기, 특히 제 2차세계대전 시작 시기에서부터 시작된 비슷한 기법들에 대한 유용한 배경지식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3가지의 구분되는 전쟁 시기 - 19세기 이전, 나폴레옹 시기, 현대 시기 - 에 있어서의 부관(aide), 고문관(adviser), 연락장교 시스템(liaison system)의 발전을 추적해 보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 된다.

 

 

II. 19세기 이전 시기 (The Prenineteenth-Century Era)

 

 이 시기의 군대들은 놀랍게도 대단히 높은 수준의 효율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군대들에는 기능 참모(functional staffs)들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부관(aides-de-camp)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관의 제 1 임무는 자신의 지휘관이 군사 업무들을 관장하는 것을 돕고, 지휘관이 지휘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참모 조직(부왕 필립으로부터 물려받은)에 대한 연구는 이들이 보다 현대적인 시스템들과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주고 있다. 알렉산더의 참모들은 알렉산더의 광범위하게 분산된 전역(campaign)을 지원하도록 고안되어 있었으며, 공병 및 공성작전 전문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알렉산더의 직접 명령만 받는 소위 소마토필락스(somatophulaxes)라고 부르는 젊은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장교들이 갖는 여러 임무들 가운데에는 부관(aides-de-camp)로서의 임무와 전령(heralds)로서의 임무가 포함되어 있었고, 밀사(couriers) 및 관찰자(observers)로서 알렉산더의 여러 분산된 부대들에 대한 지휘 통제를 도와주는 책임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실로 이 젊은 그리스 정복자의 "눈"이 되어 주었다. 알렉산더의 부관들은 전령으로서, 적진 지휘관들과의 통신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러한 임무가 갖는 민감성과 중요성 등으로 미뤄볼 때, 명백히 알렉산더의 완전한 신임과 신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더의 참모들 중에는 대단히 고급의 참모 장교들(highly qualified trusted staff officers)로 이뤄진 작은 조언단(a small advisory circle)이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소마토필락스들도 몇몇 끼어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비공식 군사위원회(informal council of war)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주기적으로 특별 임무를 수행하거나 상위의 군사/행정 직위를 담당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더의 참모 위원회(staff council)와 소마토필락스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장교들을 지휘 및 통제 목적으로 사용하는 알렉산더의 사례(아마도 알렉산더 이전부터 시작된 관습이었을 것이다)는 대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Major)(237-183 B.C.)와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100-44 B.C.)에 의해 진행된 로마군 참모 발전을 통하여 지속된다. 알렉산더와 마찬가지로, 스키피오와 케사르는 모두 어린 장교들을 참모들에 포함시켰다. 이들 자원 부관(volunteer aides)들은 콘투베르날레스(contubernales)라고 불렸는데, 관찰자 내지는 1급 임무들(top-priority missions)에 대한 믿음직한 전령으로서 활용되었다. 또한 양 로마 지도자들 모두 식사시에 이들을 참석시킴으로써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both Roman leaders kept a close circle of these subordinates as mess companions). 이 그룹을 이루는 인원들은 주로 부관들(aides-de-camps) 및 밀접한 관계의 정치/군사 고문관들이었다. 이들 콘투베르날레스들의 수행하던 임무는 알렉산더의 소마토필락스들이 하던 임무 - 즉 중요 첩보 수집 및 지휘관의 중요 임무 수행 등 - 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이들 부관들이 가져야 했던 핵심 소양으로서는 올바른 판단력과 군사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휘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심이 중요했다.

 

 이들의 공식적 명칭이 어찌되었던 간에, 오늘날의 지휘관-참모 연락 시스템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러한 초기의 군사 지휘관들 조차도 전역과 전투간에 있어서의 효과적인 지휘통제를 실시하는 데 있어서의 여러 문제들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중세 시기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3세(King Edward III)의 경우 크레시(Crecy)전투와 푸아트르(Poitiers) 전투에서 휘하 부관(aides)들을 첩보 수집요원 및 전령으로서 대단히 잘 써먹었다. 이들 초기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이 갖고 있던 본질적인 관찰자 및 조언자로서의 기능은 나폴레옹 시기까지 대체로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시기가 되면서 군사 참모 제도는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데, 즉 공식적인 부관 및 연락시스템(formal aide-de-camp and liaison system)이 출현함으로써 발생한 변화들이었다.

 

 

III. 나폴레옹 시기 (The Napoleonic Era)

 

 16세기 화약무기(firearms)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군대 대형은 보다 산개되는 형태를 띄게 되었고, 그 결과 보다 강한 규율을 요구하게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스와 발렌슈타인의 시기(era of Gustav Adolphus and Wallenstein) 동안, 보다 나은 조직과 통제에 대한 강조가 이뤄졌다. 참모들은 그 규모에서나 구조면에 있어서 성장하였으며, 그 직책들이 규정되었다. 부관(Aides-de-camp)는 이제 지휘관의 특별 보좌관(special assistants)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7년 전쟁 당시(18세기 중반) 프레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은 휘하 고위 조언자들이 많이 죽게 된 이후, 전술적 소양과 능력이 뛰어난 어린 장교들을 선발하여 지휘 관찰자(command observers)로서 훈련시켰다. 전쟁의 복잡성이 증가함을 깨달은 프레드리히는 이러한 장교들로 하여금 일선 병력들을 통제하는 것을 돕고, 다른 참모 장교들이 보다 특수한 기능들(행정, 보급, 기타 등등)을 조율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다. 비록 프레드리히는 직접적인 지휘(direct command)에 의존하긴 했지만, 그가 만든 시스템은 이후 1세기가 지난 뒤에 탄생한 프러시아 일반 참모 연락 시스템(Prussian general staff liaison system)의 선구자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이 시기 화약무기(firearms)가 확산됨에 따라 지휘 뿐만이 아닌 전술에 있어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전투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혼란(chaos) 역시도 따라서 증가했다. "전장의 안개(fog of war)"는 포연이 더해지면서 더욱 짙어졌다. 단지 한사람이 혼자 전투 대형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부관(aide-de-camp) 제도는 지휘관의 관찰자 및 전령으로서 최초로 공식 출현하게 된다. 지휘관들은 휘하 부관들을 전투에 대한 통제에 활용하였다. 이들 부관들은 말 그대로 지휘관들의 "눈, 귀, 목소리(eyes, ears and voice)"가 되었으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지고, 산개되고, 분권화되는 군대를 야전 지휘관이 효과적으로 지휘 및 통제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첩보들을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나폴레옹 시기의 주요 지휘관들은 사실상 모두 다 비슷한 방식으로 부관들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이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부관(aides-de-camp)을 연락 임무에 활용한 사례를 나폴레옹 이전의 최고의 사례라고 보고 있다. 공작은 스스로 휘하 군대의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군대의 양익으로 명령을 전파하는 데 있어 부관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일단 전투가 개시되면, 젊은 부관들은 전장을 따라 움직이는 공작에게 최신 첩보들을 전달하였다. 이 조직의 효능으로 말미암아 공작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위치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야 할 기회가 도래하는 시점이 되면, 그는 항상 가장 중요한 장소에 위치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할 수가 있었다.

 

 공작의 부관들은 풍채 좋고 평균 이상의 젊은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전술 상황 및 지형에 대한 판단을 할 줄 알았다. 이 시기의 유명한 군사 이론가였던 F. W. 폰 잔티어(F.W. von Zanthier)는 이들이 "명령을 정확하게 전파하고, 상황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었으며, 결정적인 기회가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보장할 만큼 충분히 진취적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들 장교들이 지휘관의 의도를 휘하 부대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신뢰할 만한 관찰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나폴레옹과 웰링턴, 그리고 1세기가 더 지난 뒤의 버나드 L. 몽고메리 원수(Field Marshal Bernard L. Montgomery)가 갖고 있던 부관 및 연락 시스템의 초기형태(earliest 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시기, 전술 및 전략에 있어서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며, 지휘 기술(art of command)에 있어서도 아마 가장 커다란 혁명이 일어난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지휘 체계에서는 처음으로 완전히 포괄적인 참모 조직(fully comperhensive staff organization)이 적용되었으며, 그가 프랑스 군대(Grande Armee)를 통제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고위급 및 하위급 부관들을 이용한 데에 대해서 기록이 잘 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항상 중요 지휘 첩보(critical command information)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였으며, 그 정도는 그 이전 시기의 지휘관들 그 누구보다도 심했을 것이다. 황제는 직접 관찰(personal observation)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첩보 수집 및 휘하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부관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나폴레옹의 부관들은 단지 전술적, 작전적 첩보들을 수집하는 데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은 전략적 첩보들도 제공하였다.

 

 모든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역시 휘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정기 보고서들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이들에 세부 사항들이 부족하여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부대들의 정기 보고서들에서는 부대 상태에 대한 무형적 요소 - 예를 들어 리더십, 사기, 감투정신 따위 - 들이 자주 간과되곤 하였다. 휘하 지휘관들이 이들 중요한 분야에 대해서 보고서에 언급하는 경우에도, 이들은 객관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며, 가끔씩은 완전히 편견에 치우치는 경우도 있었다. 휘하의 다양한 군사조직 내의 중요한 상황들을 확인하고, 부하들의 보고서를 검증하는 수단으로써, 나폴레옹은 휘하 부관들을 정규 보고 시스템을 보완하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으로서 활용하였다. 나폴레옹은 반 크레펠트가 "덜 구조화된 첩보(less structured information)"이라고 칭한 분야를 보고하는 데 있어서는, 정규 참모 시스템이 완벽히 부적합하다고 간주하였다. 황제는 종종 이 망원경을 적에게, 또는 전역이 발생할 지형에 돌리는 경우가 있었다. 나폴레옹의 휘하 참모들 및 정규 보고 절차 시스템을 활용한 리더십 기법이야말로 군사 지휘에 있어서의 총체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2중 시스템 - 즉, 휘하 정규 참모 시스템과, 부관 및 연락 장교 시스템(하급장교 6에서 13명 가량으로 구성됨) -을 활용하여 기존 지휘 채널에서 시급한 첩보를 수집하는 데에 활용하였다. 황제의 장군급 부관들(general-grade aides-de-camp)과 보다 하급의 연락 장교들(lower-ranking liaison officers), 장교급 전령들(commissioned orderlies)은 젊고 적극적이었으며, "정신력 및 신체 능력에 있어 전성기(full flower of their mental and physical power)"의 상태에 있었다. 이들의 책임은 광범위하고 다양하였으며, 전장의 전갈을 전달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지방 전체를 관찰하거나 항복 조건을 협상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정기적으로 부관들은 전략 임무들을 달성하는 데에도 동원되었는데, 예를 들어 외국 수장에게 중요한 외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따위를 들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부관(aides-de-camp)들의 경우,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책무들의 민감성으로 인하여 임기 응변 능력(savoir faire)과 함께 고위급의 지휘관 및 참모 장교들과 어울리고 신뢰받을 수 있는 능력도 갖춰야만 했다. 이들은 잘 훈련받은 전문 군인이어야 했다; 관찰은 정확해야 했으며, 문제들을 구분(isolate)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전술 첩보 중에 결정적인(vital) 것과 중요하지 않은(nonvital) 것들을 구분(discriminate)할 수 있어야 했다. 이들 부관들은 황제의 작전 철학에 대해 마스터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의 의도를 명찰하고, 휘하 지휘관들의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어야 했다. 나폴레옹의 부관들은 종종 황제의 이름을 빌어 이야기하였으며, 그 결과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나폴레옹이 베르트랑 장군(General Bertrand)에게 한 지시야말로 나폴레옹의 부관들이 수행한 임무들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내일 새벽, 귀관은 출발하여 웜즈(Worms)로 이동한다... 내 근위대가 도하하는 데 있어 모든 준비를 완료할 것. 귀관은 이후 카셀(Kassel)로 이동하여 이곳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보급품이 완비되도록 할 것. 적합한 경호 수단을 갖추고서 하나우 요새(fortress of Hanau)를 방문할 것. 기습 공격(coup de main)으로 탈취할 수 있을까?


 부관이 휘하부대 보고서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임무를 맡는 사례로는 레브런(Lebrun)에게 주어진 임무를 들 수 있다:

 

  귀관은 레기스 공작 군단(Corps of the Duke of Regis)를 먼저 방문한 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내게 보고할 것. 귀관은 그의 군단 전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내게 묘사할 것. 귀관은 그의 보병, 포병, 수송대, 탄약, 야전병원의 상태와 군단 내에 돌고 있는 소문들, 쉽게 말해 내가 흥미로워할 모든 것에 대해서 보고할 것.

 

 더 젊은 장교들은 다소 제한된 임무들에 투입되긴 했지만, 목표는 사실상 똑같았다 - 프랑스 군대(Grande Armee)의 전투 상태에 대한 특정 첩보(specific information)를 수집하고, 정보(intelligence)를 수집하고, 전투에서 부대 통제를 돕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보다 젊고 하급의 부관들은 직접 선발(handpicked)되었으며, 종종 군사 전통이 있는 귀족 가문에서 선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선발에 있어 유일한 전제조건은 2년간의 군 복무 경험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장교여야 했으며, 정신적으로 민활하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야만 했다.

 

 나폴레옹의 참모 및 연락 시스템이야말로 당시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잘 조직된 그의 군대를 지휘 및 통제하는 데 있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오늘날 시기의 여러 비슷한 조직들에 대해서도 모델이 되었다. 그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은 그가 프랑스 군대(Grande Armee)의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경우 지휘 피라미드(hierachy)를 우회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다. 부관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그는 휘하 군대의 어떠한 특정 지점에 집중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위하여 필요한 특정 사항에 대한, 종종 무형의 요소에 관한, 그리고 가끔씩은 치명적인 첩보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적수였던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의 부관 활용의 효능을 인식하고 비슷한 시스템을 도입한다. 나폴레옹 시기 영국 육군에서 통상적인 관행에 따르면, 각각의 장군은 최소한 1명의 부관(aide-de-camp)이 허용되었는데, 중장(lieutenant generals)의 경우에는 2명이 허용되었고, 군 지휘관(commanders of forces)의 경우에는 필요한 수만큼 할당되었다. 스페인 전역(Peninsula campaign) 당시 웰링턴은 고급 지휘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6명의 부관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의 계급은 중위(lieutenant)에서 중령(lieutenant colonel)에 이르렀다. 이 유명한 영국 지휘관과 부관들과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했으며, 그는 한번은 퇴역하고 나서도 이들 젊은 부관들을 곁에 둬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웰링턴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의 부하들과 비슷한 기본 임무들을 수행하였지만, 정보 수집 임무(gathering intelligence)는 제외되었다. 웰링턴의 부관들은 나폴레옹 부관들처럼 자군의 상태에 대한 첩보(information)들을 수집하는 것을 도왔다.

 

 19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세계의 군대들은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마련한 부관 및 연락 장교 체계를 답습하였다.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당시의 거대한 군대들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전쟁은 종종 나폴레옹 시기의 마지막 대전쟁으로 간주되는 한편, 현대 시기의 최초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 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의 여러 유명한 지휘관들이 연락 임무에 부관들을 사용한 사례들은 방향성 있는 망원경에 대한 초기의 미국판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IV. 현대 시기 (The Modern Era)

 

미국 남북전쟁(The American Civil War) 


 여러 유명 남군 및 북군 지휘관들은 지휘 절차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율리시즈 S. 그랜트 장군(General Ulysses S. Grant)과 윌리엄 T. 셔먼 장군(General William T. Sherman)의 경우 방향성 있는 망원경 임무로 어린 부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다른 남북전쟁 지휘관들처럼, 이들은 부관들을 자군의 지휘 및 통제를 돕고, 민감한 임무를 수행하며, 적과 아군의 중요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에 주로 사용하였다. 반면, 주요 남군 장군들은 부관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는데, 이들을 철저히 장교급 전령(commissioned courier) 임무에만 한정시켰던 것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개의 예외들이 있다: 롱스트리트(Longstreet)의 "소렐(Sorrels)"과 포레스트(Forrest)의 "갤로퍼(Gallopers)"였다.] 남군이 진정하게 효과적인 지휘관 및 참모 연락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은 종종 남군 측의 가장 위대한 군사지도자 로버트 E. 리 장군(General Robert E. Lee)조차도 실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리 장군이 갖고 있던 전술 정보 수집 수단들이 비효율적이었고 휘하 장군들 상당수가 제대로 규율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아, 남군은 수많은 지휘 및 참모 실패들을 겪어야 했고, 그 결과 리 장군은 남부 연합군 내에 방향성 있는 망원경 일반 참모 시스템(general staff directed telescope system)과 엄청나게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는 장교단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 준장(brigadier general) 직위에 있었던 그랜트는 2명의 대위를 부관(aides-de-camp)로서 데리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존 A. 로린스(John A. Rawlins)는 이후 장관급 지위(general officer rank)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최종적으로 그랜트의 참모장이 되었으며, 이후 그랜트가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에는 짧은 기간 동안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war)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랜트의 계급이 올라감에 따라 그의 부관들의 숫자와 계급 역시도 올라가게 된다. 그랜트가 중장(lieutenant general)이었을 당시, 그에게는 4명의 중령들을 부관으로 쓰고 있었다 (한편 그의 참모들은 모두 합해 14명에 불과했었다). 콤스톡(Comstock), 포터(Porter), 뱁콕(Babcock), 덴트(Dent) 중령은 우수한 판단력과 용기, 직업적 우수함, 타인과의 효과적인 의사소통 능력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들 모두 야전 경험이 풍부하였으며, 젊고 활발하였고, 지휘관이 요구하는 어떤 임무에 대해서도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쟁 전반에 걸친 수많은 사례에 대하여 그랜트의 "눈"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투 간의 임무 역시 특히 중요했다.

 

 전투 이전에, 그랜트는 그의 전반적인 의도를 부관들에게 알려주었으며, 그가 전투 전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의 기동 계획을 말하였으며, 자신의 명령 전파에 대한 어떠한 지연이라도 극복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랜트는 자신이 밀접하게 대하고 있는 젊은 참모 장교 서클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였다. 예를 들어 피터스버그 전투(Battle of Petersburg) 전야 당시, 그랜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집결한 부관들에게 제공하였다:

 

  본인은 여러분들이 전투 수행에 관련된 명령의 세부사항들에 대하여 나와 언제나 자유롭게 토론하기를 바란다. 가능한 모든 돌발상황(contingencies)에 대응하여 각각 어떤 대책을 취하여야 할지에 대하여 가능한 한 완전하게 내 견해에 대하여 확인할 것. 본인은 여러분들을 전선의 치명적인 지점으로 파견함으로써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즉각적으로 내게 알려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대단히 급박하여 새로운 조치가 즉각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경우, 혹은 갑자기 한 지휘부를 다른 곳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해야 하는데 사령부와 교신할 시간은 없는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내 견해를 해당 지휘관에게 설명하고 설득함으로써 나로부터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도 즉각적인 행동을 통한 협동작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들길 바란다.

 

 그랜트 장군이 이들 젊은 부관들에게 갖고 있던 신뢰의 정도는 이들이 지게 된 책임의 무게만큼이나 명백한 것이었다.

 이들 장교들과 이들의 군사령관간의 관계는, 웰링턴과 웰링턴의 부관들간의 관계처럼 밀접한 것이 분명했다. 지휘관과 부하간의 이러한 강력한 인간적 관계는 상호 존경에 기반하고 있으며, 미래에 성공하는 많은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에서도 핵심적인 공통점이 된다. 그랜트의 부관들은 격의 없는 거의 가족과 같은 분위기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정기 저녁 토의를 통하여, 사령관은 휘하 군대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중요한 시야를 가질 수가 있었다. 나폴레옹처럼, 그랜트의 부관들은 보다 통상적이고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통한 정식 보고서로는 수집할 수 없는 정보들을 종종 제공하였다. 그의 부관들의 관찰은 그에게 병사들의 사기와 감투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상을 제공하였으며, 적과 대처하는 데 있어서의 전반적인 대비상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랜트의 부관들은 보다 전통적인 부관 임무인 전투 명령 전달 임무도 수행하였다. 그랜트 장군은 통상 스스로를 야전 중앙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이렇게 함으로써 장군을 찾기가 쉬워지고, 반대로 장군의 명령도 신속하게 전파가 가능하다), 그의 4명의 부관들은 종종 넓게 분산된 휘하 군대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통제하는 데 있어 중요했다. 그랜트의 부관 활용 방식은 150여년 전의 말버러 공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대리자(proxies)를 활용하게 됨으로써, 전선에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위치할 수 있도록 하게 하였고, 이는 종종 전투의 결과를 결정적으로 바꿔놓기도 하였다.

 

 또다른 유명한 북군 장군인 윌리엄 T. 셔먼은 간결하고 최적화된 그랜트의 참모들을 부러워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소규모 참모들을 그랜트의 것을 면밀하게 본따 조직하였는데, 특히 부관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부분이 그러했다. 사단장으로 재직 당시 셔먼에게는 부관이 2명 있었는데, 둘다 중위(lieutenant)였다. 셔먼은 이들 장교들을 첩보(information) 수집과 관찰(observation), 보고서 검증, 명령 전달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랜트의 부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2명의 중위들도 지휘관과 함께 계급이 올라갔다. 셔먼은 미시시피 군구 사령관(commander of the 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로 재직하던 당시에도 야전에서처럼 소규모의(reduced) 참모들을 유지했다. 사실, 셔먼은 자신의 아틀란타 전역 당시 3명의 대위들을 주요 부관으로 하여 크게 의존하였다. 셔먼의 야전 참모 첩보수집 시스템의 효과와, 어쩌면 셔먼의 전반적인 지휘 철학에 대한 힌트라고 할 만한 점에 대해서, 그가 이 고난의 전역 기간 동안 부하 지휘관들에게 단지 1개의 3개월 단위 보고서만 요구했다는 사실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셔먼이 전신과 같은 기술이 지휘 통제를 향상시킨다는 점을 인정하긴 했지만, 또한 통상 가장 훌륭한 범용의 지휘 통제 시스템은 종이와 펜, 그리고 좋은 부관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또한 그는 여단에서 군(brigade to army) 단위의 군사 사령부에서는 참모진 내에 "젊은 부관 몇명"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이들은 "평소에 여단 이하 제대에서 선발된 요원으로서, 말을 잘 타야 하고, 장군의 지시를 제대로 전달하고 설명할 정도로 똑똑해야" 한다고 하였다. 셔먼의 전역이 그랜트처럼 성공한 것이야말로, 두 장군들의 사실상 동일한 방향성 있는 망원경 및 연락 시스템의 효과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대다수의 북부 연방군 장군들은 자신들의 부관들을 별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은 종종 결과로서 대답받게 되는데, 적절한 정보도 없고 휘하 부대들을 통제할 적절한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적과 만나 교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비록 로버트 E. 리 장군은 참모들과 부관들, 특히 찰스 베나블 대령(Colonel Charles Venables), 월터 테일러 대령(Colonel Walter Taylor), 찰스 마샬 대령(Colonel Charles Marshall), 랜돌프 팰콧 대령(Colonel Randolph Falcott)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긴 했지만, 그 외의 많은 남부 연합 지휘관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작전 지휘관으로서의 성과는 종종 안좋게 나타나곤 했다. 리는 자신의 참모들을 선발하는 기준으로, 프로페셔널한 능력보다는 개인적 성격에 중점을 두었으며, 당대의 다른 지휘관들처럼 젊은 장교들을 골랐고, 종종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인원을 뽑는 경우도 있었다. 리가 비록 개인 성격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그는 휘하 부관들 각자의 재능과 성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판단을 하였다. 북군 쪽의 부관들과 마찬가지로, 리의 부관들 역시도 화력 속에서 침착하고, 명민하며, 재치있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리는 남부 연합 군대에는 "구식 군대(Old Army)"식의 참모장교가 거의 모든 제대의 사령부에 심각하게 부족함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것이 남부 연합 군대의 전술 통제에 있어 중앙 집권적 통제를 곤란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중앙 통제가 없더라도 휘하 부대들이 각자 알아서 협조하여 활동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리는 신속하게 바뀌는 기술적 필요성에 부응할 수 있는 적절한 참모 모델을 개발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단순한 임무지향적 명령(mission-oriented orders)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전기작가 클리포드 다우디(Clifford Dowdy)는 리의 부하 지휘관들에게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지휘기법 이상의 것은 필요 없었다고 언급하였다. 리는 전쟁 초기에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명령이 단순하며, 휘하 지휘관들이 유능하고, 부하들의 전투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장에 없더라도 휘하 장교들이 자신의 명령 범위 내에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효과적으로 활약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리는 자신의 부하 지휘관들 사이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이들의 보고서를 검증하거나, 이들이 벌인 작전의 성과를 면밀히 분석할 필요성 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몇차례 남부군이 전술적 실패를 겪으면서, 그는 자신의 다소 느슨한 지휘통제 시스템의 효율을 증가시킬 필요성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고, 상당수 휘하 지휘관들의 통제되지 않은 활동들에 강력한 통제를 가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븐 데이 전투(Seven Day's Battles) 당시가 되면, 그는 휘하 사단 지휘관들이 총사령부에 맞춰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단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리는 전쟁 초기에 자신의 참모 시스템의 약점을 인식하였고, 휘하 참모들이 정확하고 적시적인 첩보를 제공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전문성에 근거하지 않고 친척들이나 정치적 연관자, 혹은 옛 친구들을 주요 참모직위에 보직하는 것 또한 이미 문제가 있는 남부 연합군의 지휘통제 시스템을 더욱 문제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소위 "후원(patronage)" 관습은 당시의 대다수 군대에 흔하게 존재하는 것이었긴 하지만, 남부 연합군 군대와 북부 연방 민병대의 경우에는 그저 예외가 아닌 상례처럼 되어 있었다.) 1863년 3월, 리 장군은 만성적인 "첩보 진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 내의 중요 직위들을 맡을 별도의 장교단을 창설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는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본인이 발견한 큰 어려움은 명령과 규정이 준수되도록 만드는 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임무를 가르치고, 명령을 이해하게 하고, 모든 기동을 규정되고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장교단을 필요로 합니다... 

 

 부관 및 다른 참모장교에 대하여, 리는 같은 서신에 이렇게 적는다:

 

 만약 이 직위들에 적합한 장교들 - 즉, 지휘관의 친척이나 사회 친구들이 아닌 사람들을 뜻하여,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적합하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나, 가장 유능한 사람들은 되지 못한다 - 을 채울 수 있다면,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를 갖게 되리라고 봐도 좋습니다.  


 분명 리는 일종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훈련된 참모 장교와 관찰자로 구성된 별도의 장교단을 만들자는 이 유명한 남부 장군의 제안은 다소 독특한 것(somewhat unique)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World War I)

 

 미국 남북전쟁은 군사사에 있어서 한 시기를 마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기점이었다. 이 시기, 전쟁의 기술은 명백히 변화일로에 있었다. 보다 전문화된 확장된 규모의 참모진을 갖는 대규모 징집군대가 보다 대중화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르러, 부관 임무(aide-de-camp duties) 역시도 급격하게 변화한다. 부관의 전통적 책임은 참모 세분화와 재조직, 그리고 통신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의하여 재정의되게 된다. 많은 선진군대에서의 일반참모 시스템으로 인하여 부관의 전장 기능이 작전과, 정보과 또는 연락과(operations, intelligence, or liasion offices)로 이관되게 된다.

 

 새로운 무기와 대규모 군대의 출현과 함께 전술의 적용 역시도 보다 분권화되었다. 병력과 군수물자의 전략적 이동은 이제 철도와 밀접하게 연결되게 되었으며, 전투력을 전장 근처로 전략적, 전술적으로 집중시키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비록 전보(telegraph)와 철도가 지휘통제의 중앙집권화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벌어진 군대 규모의 증가와 신무기의 등장 등으로 인해 군대는 보다 넓게 분산되는 효과를 내었다. 전보는 즉각적인 통신이 가능케하긴 하였으나, 대단히 보안성이 떨어졌고, 신뢰성도 낮았으며 취약했다. 장기적으로 전보는 군(army) 단위의 지휘통제에는 유용하기는 했지만, 야전 지휘관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 결과 군단이나 사단급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전보는 전방의 통신 시스템으로서는 비실용적이었다. 따라서 이 근대 초기 시기에는 참모 조직과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은 계속 말탄 참모장교들을 활용하여 휘하 지휘관들의 활동을 관찰하여야 했다. 이론적으로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이 현대화 및 재설계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변화하지가 않았다. 19세기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벌인 유럽 전장에서도, 각국에 강력한 일반참모 시스템이 창설되고 기술들이 발전되긴 했지만, 기존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유용성은 다시금 입증이 된다.

 

 이 시기, 진정한 현대 참모 시스템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General Helmuth von Moltke) 역시도 전장정보를 위해서 부관 방식의 연락 시스템(aide-type liaison system)에 의존하였다. 각 프러시아 야전군의 참모 중에서, 몰트케는 신뢰할 만한 부하 - 즉 일반 참모 장교를 지정하여 개인적 사신을 통해 부대의 공식 보고서를 보완하도록 하였다. 몰트케의 장교들은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중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들은 중요한 메시지들을 전달하였으며, 종종 지휘관이 중요 첩보를 수집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되곤 하였다. 전방부대에 배치된 이들 젊은 장교들은 각각의 지휘관의 시선 밖에 있는 전투의 세부사항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 방식의 부관(aide-de-camp)들과는 달리, 이들 장교들은 상당한 범위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신중하게 선택되어 훈련된 이들은 군사 전문가이자 분석적인 관찰자였다. 이러한 전문적 특질들로 말미암아 19세기 말의 프러시아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질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프러시아식 시스템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급 지휘관들이 전방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는 대단히 신뢰성있고 믿을만한 시스템임을 증명하게 된다.

 

 1차 대전 극초반부의 짧은 기동전 시기가 끝나고, 정적인 참호전 시기로 전환되면서, 많은 사령부들은 곧장 전선 멀리 후방에 위치하게 된다. 안락하고 준영구 내지 영구적인 시설에 위치하여, 방대한 원격통신 시스템(전보, 야전 전화기, 무전기 등)으로 상호연결된 이들 사령부들이 곧 전쟁 전반을 통제하게 된다. 이들이 전선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탓에, 상급 지휘관들은 곧장 전투의 잔혹한 실상과 괴리되게 된다. J. F. C 풀러 소장(Major General J. F. C. Fuller)은 전쟁 후에 집필한 저서 '제네럴십: 그 병리와 치료책(Generalship: Its Diseases and Their Cure)'을 통해 이 시기의 지휘에 대하여 기술한다:

 

 장군이 점점 더 그의 사무실에 묶여있게 되고, 그 결과 휘하 부하들과 이격되게 됨으로써, 장군은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전보 및 전화라는 기계적인 접촉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수단은 접촉을 가능케 하기는 했지만, 휘하 지휘관들을 전장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가능한 접촉이었으며, 상급자가 원하는 때에 언제는 접촉할 수 있도록 대기하기 위해서 아예 전장으로 가지 못하게 되는 효과까지 종종 만들었다. 세계전쟁에서 목격된 것으로 가장 끔찍했던 것은 대대장부터 군사령관에 이르는 일련의 사람들이 각각의 전화기 박스에 앉아서 지휘하고, 지휘하고, 지휘할 시기에, 말하고, 말하고, 말하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강조표시가 있음)

 

 사령부들은 전술적 작전들을 과도하게 중앙집권화하려는 유혹에 과도하게 넘어가게 된다. 통제가 강조되면서 작전적인 유연성이 희생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예를 들어 영국군에서는, 지휘가 유선으로만 이뤄지도록 되어 있었다. 영국 연락장교들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자리에 앉아 각자 사령부의 "관심사항"만을 대변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연락체계(liaison)의 비효율적 활용과, 전화 및 전보, 후기에는 무전에 대한 과도한 의존으로 말미암아, 영국군의 지휘 유연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그 결과 많은 주요 참모 및 지휘관들의 작전사고에도 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주도성은 상실되었으며, 후방에 있는 사령부의 사고 수준은 전방의 참호선이 정체되는 것만큼이나 정체되게 되었다. 전술적 첩보가 나올 수 있는 원천은 단지 사단 사령부일 뿐이었으며, 이곳 역시도 전방 부대의 상황을 제대로 알기에는 너무 후방에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기술에의 지나친 의존으로 말미암아, 상급 사령부에서는 전장 상황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이는 곧장 연이은 재앙으로 이어졌다. 유명한 솜 전투야말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전투에서 각각의 통신 시스템은 전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실패한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솜 전투의 영국군 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General Sir Douglas Haig)은 고집스레 자신의 계획을 유지했으며, 실제 전장 상황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하였다. 현실을 전혀 모르는 총 사령부의 명령을 수행하느라, 예하 지휘부들에서는 전선으로 영국 보병들의 제파를 던져넣었다. 단 하루의 전투로 약 6만명의 인원이 상실되었다. 솜 전투의 패배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파악하는 데에도 며칠이 걸렸다는 점 또한 당시 통신 체계가 얼마나 부적절했는지를 보여준다.

 

 비슷한 현상이 다른 전투에서도 벌어졌다. 파샹달 능선(Passchendaele ridge) 전투도 그 중 하나였으며, 여기서는 주 유럽 영국군 총참모장이 전투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신이 한 말이 병사들을 이런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었나요? 왜 제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요?" 당시 젊은 참모장교였던 버나드 L. 몽고메리 소령(Major Bernard L. Montgomery)는 참모장의 이 말을 귓결에 듣고는, 만약 자신이 앞으로 최고 지휘관이 된다면 결코 전방 상황을 무시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한 세대가 지나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몽고메리는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을 발전시키게 된다.

 

 독일의 경우, 1870년 경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이 1차대전에서야 비로소 뒤늦게 배운 수많은 참모 관련 교훈들을 얻었다. 1차대전에서 독일인들은 이미 효과적으로 입증된 일반 참모 연락 시스템을 잘 활용하였다. 상급 사령부의 일반 참모 장교들은 주단위로 전선을 시찰하였다. 각각의 장교들마다 특정 지역이 할당되었으며, 사기, 보급, 축성, 기타 일반적 상태의 평가를 위한 질문지들을 갖고 다녔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에는, 정보 수집에 관한 보다 기술적 수단들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들 장교들이 현장으로 파견되어 직접적인 전투에 관한 인상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관찰자들은 전선의 할당된 구역의 부대 지휘관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들은 외부인이 아닌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보다 결정적이고 솔직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게 된다. 영국인들과는 달리 독일인들은, 몰트케가 약 50여년 전에 최초로 만든 독일식 연락 시스템이, 지휘관들로 하여금 기존에 공식화된 계획에 따라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실상에 근거하여 적시적인 결심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전쟁 초반에 인식할 수가 있었다.

 

 보다 균형있는 접근방식을 추구하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동맹자인 영국인들처럼 중앙 집권화된 통제를 고집한다. 프랑스군 사령관 조셉 조프르 원수(Field Marshal Joseph Joffre)의 경우, 전화와 전보, 무전이 정보 전달 및 명령 전파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보다 면밀하게 사령부가 감독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조프르는 유명한 수직 연락 시스템(vertical liaison system)을 개발한다.

 

 조프르의 연락 장교들은 일단의 젊은 장교들로서 대개 대위들이나 소령들이었다. 이들은 신중하게 선발되어 휘하 사령부들의 작전 부서에 배속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부대들을 시찰하고, 지시를 전달하고, 총사령부에서 할당한 명령을 수행하는지를 감시하는 데에 있었다. 임무기간이 끝나 돌아오게 되면, 이들 장교들은 사령관에게 직접적으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앞서의 시스템들처럼, 이 시스템의 가장 큰 가치는 정규 보고 채널로는 보고되지 않는 무형의 정보들을 사령부에 도달하게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독일식 시스템처럼, 조프르의 연락 장교들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진 데에 따른 지휘관계 문제들이 발생하곤 했다 (많은 지휘관들이 연락 장교들의 부정적인 보고 탓에 해임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스템이 완벽하게 성공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이러한 간헐적인 권한 남용 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수직 연락 시스템은 지휘 체계 내에서 명령이 위와 아래로 제대로 이해되게 도와주는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였다.

 

 지휘 및 통제 문제에 있어서의 영국군의 실패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성공을 관찰한 한 미군 장교는 자기 나믈의 다소 독특한 지휘 및 통제 시스템을 개발한다. 당시 미군 원정부대 제 1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First Army)의 작전부장(chief of operations)이었던 조지 C. 마샬 대령(Colonel George C. Marshall)은 일단의 젊은 육군 장교들 - 대위 및 중소위들 -을 모아서 전투 관찰자(combat observers)로 활동하게 하였다. 마샬은 이들에게 사단들에서 어떤 첩보를 수집해야 하는가에서부터 누구에게 보고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말해주었다. 사단 공격 대형에 동행하는 이들 장교들은 각각 6마리의 전서구를 휴대하고 07:00, 09:00, 15:00에 각각 비둘기를 날리도록 지시받았다. 대개의 경우 이들 장교들은 전선의 위치와 함께 전투 상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샬은 미국의 제 1차대전식 방향성있는 망원경 시스템이었던 이들 장교들이 제공한 첩보들이야말로 큰 가치가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지휘 및 통제에 관련되어 얻어진 교훈들은 수없이 많다. 기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휘 연락 시스템(command liaison)은 실용적인 참모 원칙으로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효과적인 연락 시스템이 부재하였던 영국의 경우에는 누구보다도 가장 괴롭게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풀러는 전쟁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옛날에는 일반 참모가 존재했다. 이는 사환 업무나 맡아 하는 말쑥한 젊은 장교들이 아니라, 장군의 지시를 전달하고 이 전달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경험많은 사람들인 부관(aides-de-camps)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러한 접촉 및 통제 시스템은 나폴레옹 시기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중단되게 된다; 오늘날의 연락 장교(liaison officer)는 과거의 부관(aides-de-camps)과는 크게 다르다.


 

간전기 (The Interwar Years)

 

 제 1차 세계대전사는 효율적인, 혹은 비효율적인 지휘 통제 시스템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거의 모든 교전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전투 정보 시스템이 활용되었고, 통상 규정된 지휘 및 참모 연락 네트워크에 따라 구성되었다. 다행히도,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괴롭게 얻은 지휘 및 통제 기법들에 관한 수많은 교훈들은 전쟁 후의 군사 교육 속에서 상실되지 않았다. 간전기의 야전 규칙 및 야전 교범, 전문 저널, 기타 전문적 문헌들에서는 현대전에 알맞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 방식의 연락 시스템이 개발될 필요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풀러가 주창한 "접촉 및 통제 시스템(system of contact and control)" 요구 및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수많은 영국군의 지휘 실패사례들을 연구한 결과, 전쟁 후의 영국군 야전 규칙에서는 "전투시에는 모든 단계의 지휘관들이 전투 병력과 밀접하고 연속적인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동 규칙에서는 또한 현대전에서의 지휘관이 갖는 가장 큰 어려움이 정확한 전장 실상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반 크레펠트가 말한, '전쟁에서의 도전 목표(the quest of war)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다(being a search for certainty)'라는 격언이 다시금 확인된다. 영국군의 이 규칙에서는 연락 장교(liaison officers)들이 자신의 지휘관에게 모든 전투 상황에 대해서 알게 만들도록 요구하고 잇다. 그 결과 영국 육군에서의 연락 임무는 엄청나게 확장되어으며,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연락장교의 임무는 (상하) 사령부들 사이에 다른 수단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가까운 접촉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즉 상급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상급 지휘관의 의도를 예측하여 예하 지휘관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전방 지역의 상황 정보를 상급 지휘관에게 빈번한 주기로, 특히 작전의 각 단계의 끝부분 시기에 전달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연락장교 교리 역시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다듬어졌다. 필립 페텡 원수(Marshal Philippe Petain)가 이끈 상급 군사 위원회에서 대규모 부대에서의 지휘 통제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24년 프랑스 육군에서 발간된 '대규모 부대의 전술적 전개에 관한 임시 지침(Provisional Instruction for the Tactical Employment of Large Units)'이야말로 이 위원회의 연구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레벤워스 요새(Fort Leavenworth;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등의 교육/연구기관들이 위치하고 있음. 역자 주)에서 영역한 이 지침에서는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 방식의 필요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매뉴얼에서는 프랑스 일반 참모부(French General Staff)의 기능과 특징이 지휘의 보조수단임을 설명하면서, 일반 참모 연락장교들이 "기지와 헌신, 절제에 있어서 광범위하고 전문적인 지식과 특성"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지휘관들은 실제 전투 조건과 병사 및 장비들의 상태, 전투의 진행상황 등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므로, 반드시 예하 지휘관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야 한다고 하는 사고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규정에서는 일반 참모 장교들을 예하 지휘관들에게 빈번하게 파견하여 전투 상황에 대하여 점검하거나, 상황을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위원회에서는 효과적인 연락장교 없이는 주요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하고, 여러 노력들을 단일하고 강력한, 연속적인 힘으로 조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소 놀랍게도, 연락 장교들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 임무에 관한 책무에 관함 가장 심도있는 묘사가 나오는 책으로 1937년 지휘참모대학에서 발간한 미육군 '지휘관 및 참모 원칙(Command and Staff Principles)'과 2차대전 이전 시기 교범인 FM 101-5 '참모장교 야전 교범(Staff Officers Field Manual)'에 나와 있다. 이 두 권의 미군 교범에서는 외국 책들처럼 연락장교 시스템(liaison system)이 지휘관이 전술 상황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묘사되어있다. 그러나 이 작은 1937년판 교과서에서는 현대 군사사를 활용하여 이 시스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휘관 및 참모 원칙'에서는 연락 장교의 목적 2가지가 적시되어 있다. 첫째로 연락 장교의 주요 임무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교범에 따르면, 연락 장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지휘관이 통상 보고를 통해서 얻을 수 없는 예하부대의 상태를 계속 알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궁극적으로 지휘관의 결심 수립 과정에서 결정적 효과를 내게 된다. 두번째 연락장교의 임무는, 모든 단계에서의 연락들을 완전히 원활하게 함으로써 이들이 "협조된 노력(concerted effort)"을 달성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하고 전반적인 지휘 통제를 원활하게 하는 수단으로서의 연락 장교의 필요성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이 레벤워스 출판물은 1세기 넘게 전에 나폴레옹이 지적한 사항에 대하여 강조한다. 즉, 정기 보고서들은 망각 및 스트레스, 또는 단순한 통신문제 등으로 인하여 부주의하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훌륭한 연락 장교의 전문적, 성격적 특질들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지휘관 및 참모 원칙'에서는 이들이 다음과 같은 7가지의 특질들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 좋은 판단력(Good judgement)
 * 끝없는 기지(Unfailing tact)
 * 주도성(Initiative)
 * 동감. 즉 비판하기보다는 도와주려는 것. (Sympathy, which implies a desire to help rather than to criticize)
 * 정확한 상황인식 및 결정적 사실들을 확인하는 데 있어서의 정확성 (Acute perception, coupled with exactness and accuracy in determining facts)
 * 자기 표현능력 및 불확실한 보고를 명백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바꿔 전달하는 능력 (Ability to express themselves and deliver impatial reports in the clearest and most concise terms)
 * 훌륭한 전술적 지식 (Good tactical knowledge)

 

 제 1차대전을 통해 얻은 교훈들과 이에 따라 간전기 동안 등장한 연락장교 교리는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방향성 있는 망원경 시스템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간전기의 지휘관 및 참모 연락장교 교리가 제 2차대전으로 완전히 사장된 것이 아니다. 연합군과 추축국의 많은 야전 사령관들, 예를 들어 몽고메리, 패튼, 롬멜, 만토이펠 등이 연락장교 시스템을 활용하였다. 제 1차대전에 근거한 간전기의 연락장교 시스템을 새롭고 극도로 기동성있는 전격전에 맞도록 서둘러 개선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전혀 독특하고 다른 시스템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이 새로운 시스템들 역시 기존 것들과 대단히 유사했다. 새로운 시스템들은 핵심 특성들에 있어서 서로 비슷했고, 과거의 것들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 - 새로운 기술들과 새로운 전술 등 - 로 인하여 새로운 방향성있는 망원경 시스템에서는 독특한 기술적, 전술적, 참모적 성격들이 발전되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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