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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한국전쟁에서의 포병 : 화력 집중 및 윤형진의 재발명, 2003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박용수 2014. 10. 27. 16:28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giangreco.pdf) >

 

< 참고사진 및 역주 출처 :
[1] (http://w.mawebcenters.com/Ordnance/ecommerce/105-76-pack-howitzer-firing-lock-1.html?SID=f8ece293dd34c8b32faff432a864acfd)
[2] (http://en.wikipedia.org/wiki/Field_Artillery_Branch_(United_States))
[3] (http://en.wikipedia.org/wiki/Doughboy)
[4]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 군사용어해설 (http://www.jcs.mil.kr/main.html)

[5] (http://en.wikipedia.org/wiki/Pentomic)

[6] (http://www.amazon.com/Soldier-Independence-Military-Biography-Truman/dp/0760332096)
 

 

 


 

 

 

(표지 사진: 제 936 야전포병대대 C포대 포병들이 철원 근처의 중공군 진지를 향하여, 이 전쟁에서의 100001번째 155mm 포탄을 발사하고 있다. (미 육군, 1951년 10월 10일)

 

 


한국전쟁에서의 포병 : 화력 집중 및 윤형진의 재발명

(Artillery in Korea: Massing fires and Reinventing the Wheel)

 

 

저자: D.M. Giangreco,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야간 공격은 예측 불가에 저지 불가였다. '엄청나게 격심한 백병전'이 지역 전반에서 치뤄지는 가운데, 사람의 바다가 화력 지휘소(fire direction center)를 휩쓸고 지나갔다. 최초 전사자 중에 포병 대대장이 포함되었으며, I 포대(Battery I)는 협궤 철로를 따라 G 포대(Battery G) 위치로 퇴각했다. 양개 포대 모두 화포를 작동시키지 못했다. H 포대는 카빈 소총과 기타 가용한 것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진지를 방어했다. 105mm 포탄을 50야드(1야드는 약 91.4cm임, 역자 주) 내에서 폭발하게 하기 위하여 신관 시간을 0.4초로 단축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했어도 충분하지 않아, 적어도 화포 중 한 문은 포신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도탄 사격(ricochet fire)을 실시하였다. 또다른 포반(section)의 경우 화포를 완전 후방 쪽으로 돌려 사격하였으며, 전투가 격렬해짐에 따라 이들 포병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의 포탄에 맞게 되었다. H 포대 좌측의 숲이 우거진 계곡에 만들어진 돌파구 탓에 생존자들은 '난잡한(pell-mell)'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바람에 이들이 두고 간 화포에는 폐쇄기 뭉치(breech blocks)나 공이틀 뭉치(firing lock)가 제거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05mm / 75mm 곡사포 공이틀 뭉치(firing lock)의 모습. 사진에 공이는 제거되어 있다. [1])


 한국전쟁 초반 9개월 동안, 미 육군 야전 포병부대가 자신의 화포를 파괴 혹은 유기한 사례가 약 12회(dozen) 가량 존재한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얇게 형성된 미군 전선을 침투하여 이동 중인 부대를 매복 공격하거나, 포진지를 측후방에서 습격함으로써 자주 끔찍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소련 정규군에 대항하는 유럽에서의 선형 전투(linear war)에서 싸우도록 훈련된 야전 포병 부대들은, 이러한 한국 전쟁에서의 전투에 대비되어 있지가 않았다. 이곳에서는 상호 지원하는 포대들을 통한 사주 방어(all-around defense)가 필요했고, 고각 사격(high-angle fire)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별로 오래 되지도 않은 1944년 당시, 이미 사이판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당시에도 이러한 교훈을 앞서와 비슷한 괴로운 방식으로 얻은 적이 있었다. 태평양 전장에서의 포병 전술은 2차대전 종결 이후에 오류로 취급받아 버려졌었다. 그러나 빨간 다리(Red Legs; 포병을 일컫는 속어. 남북전쟁 당시 포병들이 타병과와의 구분을 위해 붉은 줄이 나있는 하의를 입었던 것이 유래라고 한다.[2])들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들이 자주 반죽 인형(doughboy; 보병을 일컫는 속어. 어원에 대해서는, 1840년대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부터 유래된 표현으로 당시 먼지를 뒤집어 쓴 보병들이 마치 굽기 전의 빵 반죽에 밀가루를 뿌린 듯 했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군 보병 전투복의 단추가 타국 전투복의 단추에 비해 상당히 커서 마치 마늘빵 인형(gingerbread men)같았기 때문에 불리게 되었다는 설 등 여러가지가 존재하고 있다. [3])처럼 싸워야 하고", "포 진지가 공격당할 경우 스스로 상황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 사주방어(四周防禦, All Around Defense) : 방어의 주력은 적의 공격방향에 지향시키고 어느 방향으로부터의 적의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방어편성을 하는 것.
* 전면방어(全面防禦, Perimeter Defense) : 방어지역의 전면에 따라 부대를 배치함으로써 노출된 측방이 없는 사주방어를 말함.

[4]

 

 한편 이들 포병들이 지원해주기로 되어있던 병사들 - 즉 보병들 - 입장에서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포병의 문제점이 있었다. 각급 지휘관들은 모두 근미래 전쟁에 있어서, 최근에 겪었던 유럽 북서부 전장에서만큼 내지는 그 이상의 풍부한 화력 지원 하에 작전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모두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렇게 진행되지가 않았는데, 이는 포병 부대의 숫자 측면에서나 이에 필요한 하드웨어 - 화포 및 탄약 - 측면에서 모두 부족 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1년 가을의 소모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선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 전선이 안정되면서 이후 참고점 조사(surveying of reference points) 및 "정교한 사격구역(elaborate grid of batteries) 설정, 화력지휘소(fire direction centers) 및 화력지원 협조본부(fire support coordination center) 등의 설치" 등이 촉진되었다 - 급속 사격(shooting at unprecedented speed)을 통하여 화력 집중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전술로 말미암아, 소위 '2차대전이 남긴 광대한 잉여 탄약'이라는 것이 사실은 몇몇 구경에서는 부족했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게 되었고, 결국 한국전쟁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생산량이 소요를 맞출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탄약 소비량에 엄격한 제한을 두게 된다.

 

화력지원협조본부(火力支援協調本部, Fire Support Coordination Center; FSCC) : 연대급 이하 제대의 화력지원협조기구로서 모든 형태의 지원사격을 협조하는 데 부수되는 통신시설과 인원이 편성되어 있는 부서. 이는 피지원부대 및 화력지원기관의 대표자들이 화력지원을 계획하고 협조하기 위한 지휘관의 작전기관이며 수단임. [4]


 북한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38선을 건너 덮쳐오던 시기, 미국의 포병 병기고는 과거 2차대전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2차대전 이후로 별다른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었다. 2차대전 이후의 다른 나라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하드웨어와 교리 측면에 있어서는 변화된 것이 없었지만, 전투 준비가 된 야전 포병 대대의 숫자에 있어서는 급격한 감소가 있었다. 여기에는 부대 숫자만 감소된 것이 아니라 부대당 화포 숫자도 감소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세계대전 종결 후, 야전 포병을 위한 다양한 재조직 계획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간에는 몇가지 기본적인 공통사항들이 있었다: 기동성, 사격 지시, 지휘 통제의 향상 및 무엇보다도 화력 자체의 향상에 대한 필요성이 있었다. 특히 화력 측면에 있어서는, 이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쓸지가 논란의 대상이었다 - 대대마다 4포짜리 포대를 하나씩 더 추가할 것인가; 대대별 포대 숫자는 동일하게 하되 포대별 화포 숫자를 6문으로 늘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고 사단 및 군단별로 소속된 포병 대대의 수를 늘릴 것인가. 기본 전제조건은 지난 전쟁을 통하여 육군은 포병의 대량 화력으로 엄청난 이득을 봤다는 점에 두고 있었으며, 근미래의 가장 유력한 적 - 즉 소련군 - 과의 전투를 위해서는 화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리라는 점에 두고 있었다.

 

 육군은 결국 6포 포대체제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이렇게 하는 편이 대대 수 자체를 늘리는 것보다 경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각 사단들은 과거 48문을 갖고 있던 것에서 72문의 화포를 갖게 되는 것으로 그 화포 수를 늘리게 되었으며, 이를 지원하는 군단 포병도 그 규모가 확대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의 실제 상황은 이와는 다소 달랐다. 납세자들과 그들의 의회 대표자들은 고작 10개 밖에 남지 않는 미국의 전투 사단들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포병 야적장에 비록 장비들이 있더라도, 각 사단들은 기존 4포 포대들을 6포 포대로 개편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인력을 배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추가 장비들을 수령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상당수 대대들은 보유한 3개 포대들 중에서도 겨우 2개 포대만을 운용할 수가 있었으며, 이는 특히 일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던 부대들에서 두드러졌다. 편제표 상으로는 각 사단이 72문의 105mm 및 155mm 포를 보유하도록 명시하고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서는 대부분 48문만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한국에 파병된 사단의 경우에는 평시 24문 이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신생 대한민국 군대의 상황의 경우 더욱 심각했다. 한국의 8개 사단들은 고작 105mm 포 15문씩만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탄약 공급량도 토쿄의 극동군 사령부의 통제 하에서 대단히 결핍되어 있었다. 이는 남한이 혹시라도 북한을 침공하지 않을까 하는 미국의 우려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반면, 북한군 사단들의 경우 소련 교리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12문의 122mm 곡사포와 36문의 76mm 포를 갖고 있었고, 특히 이 중에서 12문은 자주포였다. 122mm 포와 76mm 포 모두 한국군의 105mm 포보다 사정거리가 길었다; 76mm 포의 경우 약 2300야드(약 2100m) 정도 우세했다. 또한 북한군 사단들에는 각각 40문씩의 40mm 대전차포가 있었는데 이는 흔히 야포로도 활용하는 장비였다. 150대의 전차들 또한 탑재한 85mm 포를 이용하여 기동성 있는 화력 지원을 실시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처럼 엄청난 화력을 운영함으로써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고, 이는 약 2개월간 지속되었다. 미 제 24 보병사단장은 적에게 생포당하기 전에 휘하 참모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대전 비행장에 떨어지는 정도의 적 포화는... 유럽 전장에서 딱 한번 보았다". 짧은 사거리에 모자란 숫자의 화포, 탄약까지 부족했던 한국군은 추가적인 105mm 포탄 보급을 요청했다. 엄청난 노력 끝에 119톤의 탄약이 토쿄 근방 이케고 탄약창(Ikego Ammunition Depot)에서부터 다치가와 공군기지(Tachikawa Air Base)를 거쳐 수원으로 공수되었지만, 이 탄약은 이곳에서 북한군에 순식간에 유린되고 만다.

 

 일본에서부터 도착한 미군 야전포병 대대들 또한 한국군과 비슷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비록 멋진 M1 155mm 곡사포가 긴 사거리를 자랑하긴 했지만, 그 숫자는 너무도 적었다. 게다가 전선이 낙동강 방어선(Pusan perimeter)에서 안정되기 전까지는 북한군의 침투 전술 탓에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는 미 제 8군에 보병 전력이 대단히 부족했고, 이에 따라 대단히 위험할 정도로 얇고 넓게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포병 부대들은 끊임없이 차단되거나 직접 공격을 당하기를 반복해다. 40문 이상의 화포가 상실 또는 유기되었으며, 이들 중 11문은 155mm 포였다. 전력이 감소된 포대들은 지속적으로 진지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제한적인 화력 지원조차도 수행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야전 포병 부대들에 닥친 어려움 중에서 가장 심했던 사례는 제 63 야전포병 대대(the 63d Field Artillery Battalion)의 사례였다. 1950년 7월 14일 아침, 공주 남쪽 부도로에 신장되어 있던 동 부대는, 금강 전선의 12마일 구간을 방어하던 2개 미군 보병 중대 및 1개 한국군 기병 중대를 화력지원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군 제 4사단의 1개 연대가 아무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미군에서 2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백주에 도강에 성공하였고, 즉각적으로 공주로부터의 통신로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군 기관총 전초가 유린당한 뒤, 길게 신장된 대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부대들이 최초로 타격당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군 부대를 오인사격할 것을 우려하여 전초에는 공격당하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져 있었으며, 이곳에서 탈취당한 기관총은 이제 대대 지휘소로 총구를 돌리게 된다. 약 250야드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A포대 역시 거의 동시에 타격당한다. 포 진지에 박격포탄이 낙하하였으며, 전투 초반부에 대대 교환기(switchboard)와 무전 트럭이 모두 파괴당한다. A 포대는 갖고 있던 5문의 105mm 포를 파괴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유기한다.

 

(부산항에 도착한 미 제 24 보병사단 소속 화포들. 이들 105mm 곡사포의 도착은 최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입은 손상을 복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장비들 역시도 이어진 몇달간의 전투 과정에서 파괴되거나 노획당하게 된다. (미 육군, 1950년 7월 6일) )

 

 공격 시작 후 45분이 경과된 뒤, B 포대도 공격을 당하게 된다. 45분의 시간은 B 포대가 지상군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주었으며, 동 부대는 화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북한군은 이 진지를 돌격으로 쉽사리 탈취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자, 이제는 사격을 지속하면서 박격포로 105mm 화포 및 취약한 트럭 및 발전기(prime mover)를 노리게 된다. 포대는 박격포에 대응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결국 2문의 화포와 무전 짚차가 파괴당한 뒤 포대장은 퇴각 명령을 내리게 된다. 잔여 화포에서 공이틀 뭉치(firing locks) 및 조준장치(sights)를 제거한 뒤, B 포대 병력들은 탈출을 개시한다. 제 63 야전포병 대대는 공격당한지 고작 1시간 30분만에 10문의 화포와 약 80대의 차량을 상실하였으며, 136명의 실종자(MIA)가 발생한다. 여기에는 대대장과 A 포대장 또한 포함되었다. 제 63 야전포병대대는 3포 포대 2개로 구성되는 대대로 신속하게 재편성하였으나, 6일 뒤 대전에서의 야간 퇴각 과정에서 북한군의 차단에 걸려 또다시 인명과 장비를 손실하게 된다. 당시 B 포대만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한국에 파병된 야전포병 장교들은 대부분 전투 경험을 북서 유럽 전장에서 쌓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주방어(all-around defense)와 인접 보병/기갑 부대와의 연계의 필요성에 대해서 재빨리 이해하기는 했지만, 수년간 선형 전투(linear warfare) 훈련에 젖어있던 입장에서 금방 이에 완벽하게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은 불과 얼마 전인 태평양 전장에서도 이미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공수부대의 야포부대에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였는데, 이는 공수부대의 포병의 경우 포위된 상태에서 사방으로 화력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다리들은 가능한 신속하게 보병들의 방어 전투 기술들을 습득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포병 대대의 독특한 요구 사항들과 융합시키기 시작했다.

 

 장비 측면에서의 기본적인 제약도 해결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대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한 155mm 곡사포 포대의 경우 화포를 3개 방향으로 방열해 놓고 있었다. 이때 한 보병 장교가 와서 진지 남서쪽으로부터 적이 접근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당시 화포가 이쪽으로 지향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포대장은 대대 작전장교의 승인 없이는 화포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응답했다. 한국전쟁 초기의 혼란 속에서 헛소문과 잘못된 경고는 흔한 것이었으며, 포대장 입장에서는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보병 소위의 말만 듣고 13000파운드(약 5.9톤에 해당. 역주)나 되는 대포를 움직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부대에서 155mm 포를 운영했던 한 포병의 말을 인용하면: "'훌륭한 포병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방향을 바꿔서 모든 방향의 적들과 교전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건 보병들이나 아니면 155mm 포를 다뤄본 적 없는 포병들이나 하는 소리다." 그렇지만 이번 사례에서는 보병장교의 말을 듣지 않고 포방향을 그대로 놔 둔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당 진지는 금세 적의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여러 병사들이 전사한다. 이후 보고서에는 "이 포병들은 사격을 받으면서 화포를 재방열할 의지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었으며, 북한군이 이 포대의 모든 화포를 노획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보병 지휘관이 이곳으로 역습 부대를 파견하여 최대한 많은 화포를 회수하였던 덕이었다. 

 

 전면방어(perimenter defense)를 강화시키려는 임시 방편들이 여럿 등장했고 일부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포의 숫자와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점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포병이 겪어야 했던 시련의 예로 제 24 보병사단의 야전 포병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동 부대는 낙동강 전선의 32 마일을 담당해야 했다. 1944년과 1945년을 기준으로 보면, 이 정도의 전선 길이는 약 250문 전후의 사단 및 군단 포병이 담당하는 영역이었다. 1950년 8월 초, 제 24 보병사단은 단지 17문의 105mm 포와 12문의 155mm 포를 활용할 수가 있었다. 교리상으로는 전투시 각각의 보병 대대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약 3~4개의 포병 대대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2차 대전이 끝난지 겨우 5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현실은 그와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미 제 2 보병사단 소속 M4A3 셔먼 전차들. 포병처럼 사용하기 위하여 전개된 모습으로, 상대적으로 평사포의 비행궤적을 갖는 전차포가 보다 장거리로 사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경사지게 굴설한 진지에서 사격하도록 하고 있다. 피아리 지역에서 촬영. (미 육군, 1951년 9월 18일) )

 

 맥아더 육군원수(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는 이러한 포병의 약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며, 7월 8일, 합참의장에게 자신의 휘하 사단들이 "전시 전력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시에 최대 인가된 전력에도 도달하지 못했음"을 주지시킨다. 무엇보다도 그는 본토에서 11개의 완편 105mm 대대들을 신속하게 파견해 줄 것을 원했다. 당연하게도 미 육군에게 이러한 예비 부대들이 6월에 없었다면 7월에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미 육군이 갖고 있던 전투 준비를 갖춘 사단 절반 가량이 이미 투입되었거나 투입될 예정에 있었다. 기존 부대들에서 포대들을 차출하긴 했지만 (예를 들어 미 제 2 기갑사단(2d Armored Division)의 경우 3개 포대를 내놓아야 했다), 선적상의 제한으로 인하여 8월 말 이전까지는 어떤 부대도 당도하지 못할 것이었다. 중포 및 비사단 포병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한국에 파병된 부대에는 군단 소속 포병이 사실상 전무했다. 맥아더는 우선 15개 대대를 수송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이 24개 대대를 갖기 전까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수송해 줄 부대 자체가 존재하지를 않았다. 맥아더의 격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수송해 줄 수 있는 부대라고는 미군 총 예비로 갖고 있던 3개의 155mm 포병대대들과 1개의 8인치 포병대대가 전부였다.

 

 한편, 그동안 미 제 8군 휘하의 사단들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든지 헤쳐나가야만 했다. 광범위한 전선을 커버하기 위하여 미 제 1 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에서는 각개 포대들을 전선 7000야드 후방에 위치시켰으며, 지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서로 비슷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하고도 살아남아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을까? 8월 22일까지도 북한군이 효과적인 대포병 사격(counterbattery fire)을 실시한 사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어쨋든 격심한 초기 1개월간의 전투 기간을 거치면서 공산군의 야포 전력은 아군의 가장 긴 화력투발 수단이던 F4U 코르세어, F-51 무스탕, F-80 슈팅스타에 의하여 꾸준히 녹아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에는 아직도 수많은 우수한 보병을 갖고 있었으며, 광범위한 전선으로 인하여 아군 포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력 집중은 달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격 방향을 전환함을 통하여 2개 내지 경우에 따라 3개의 포대가 단일 목표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은 가능했다. 최종적으로, 감소된 포병 부대 입장에서 적절한 양의 화력을 목표에 쏟아붙는 최선의 방법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격하는 한편 탄약은 지속적으로 보급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8월과 9월의 방어전에 있어서 두드러지는 모습이었고, 한 105mm 포의 경우 전장에 결사적으로 포탄을 퍼붓는 과정에서 포신이 파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Yongp'o(?)에 발생한 적의 교두보를 제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 대포병 사격(對砲兵射擊, Counterbattery Fire) : 적 포병에 관련된 장비, 시설 등 운용체계를 파괴 및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실시되는 사격.

[4]

 

 인천 상륙작전으로 기동전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고, 부산 교두보에서는 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오랜 기간 기다려왔던 중장거리 포병 대대들이 전장에 도착하였고, 미 제 2 보병사단이나 미 제 1 해병사단과 같이 화포를 완전히 갖춘 전투부대들이 전장에 등장하게 된다. 이는 결코 이른 것이 아니었다.

 

 중공군 포병은 초기 개입 당시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중공군 포병이 대규모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거나 보병들처럼 쉽게 숨어다니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들이 아군의 "뒤로의 진격(retrograde movement)"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는 점도 중요했다. 서부전선을 구성하고 있던 미 제 1 기병사단과 여러 한국군 사단들, 미 제 2 보병사단 (제 2 보병사단 자체에서만도 곡사포 64문을 상실함)은 모두 합하여 약 200문의 야포를 상실하게 된다. 동부전선에서는 해병들이 스스로 공격이라고 주장하는 퇴각을 실시하였으며, 막판의 몇 차례의 지독한 불운이 아니었다면 보유한 155mm 포 전부를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극심한 혹한으로 인하여 이들의 주 발전기들의 엔진들은 도로 상에서의 지연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가동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공중 투발해준 디젤 연료는 부족하게 되었다. 빙판길에 미끌어진 한 문에 더하여 8문의 중포가 추가로 상실되었다.

 

 중공군의 내습 기간에 이처럼 많은 화포를 상실한 점은 심각한 타격이긴 했지만, 어쨌든 무기는 보충이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한 아이러니한 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실한 105mm 곡사포 중에서 최대 약 150문 가량이 거의 아무 손상 없이 중공군의 손에 떨어졌다. 북한군의 경우에는 지난해 여름 내내 남한 전역을 휩쓰는 과정에서 노획한 미제 화포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는 북한군이 전적으로 소련제 무기로 장비한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50년 무렵 중공군 의 야포는 주로 일본제 75mm 야포 및 105mm 곡사포, 소련제 76mm 포, 그리고 "미국제" 105mm 포로 이뤄져 있었다. 당연히 중공군은 기쁘게 노획 무기들을 자신들의 무기고 안에 포함시킨다.

 

(신흥 부근에 있던 미 제 7 보병사단 소속 155mm 자주포들로서, 미 제 1 해병사단이 장진 호수에서 퇴각하던 시기, 항구도시인 함흥시 근방을 방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 육군, 1950년 12월 2일) )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면서, 이들은 약 6000문에 달하는 일본군 화포들을 두고 가는데, 이들은 70mm에서 150mm에 달하는 다양한 종류였으며, 엄청난 양의 탄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격심해진 국공내전 과정에서도, 이들 군수물자 중에서 상대적으로 일부만이 파괴되었으며, 게다가 1947년에서 1949년 사이에 격파되거나, 흩어지거나, 집단 변절한 국민당 군대를 통해 유입된 미제 장비들은 이보다 훨씬 대량의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간 장비의 정확한 수량은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비겁한 양키 제국주의자들"로부터 105mm 화포를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노획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 수비대를 강타했던 베트민 제 351 중포병 사단(이 부대는 소련식 포병사단 교리에 따라 편성되었다)에는 48문의 105mm 포가 존재했다.

 

(운산 지역에서의 중국군 병력들의 모습으로, 배경으로 미 제 1기병사단 혹은 한국 제 2군단 소속의 105mm 포 및 트럭들이 나타나 있다. 이 사진은 연출된 사진일 가능성이 높은데, 1950년 10월 27일에서 11월 2일 사이에 상실한 대부분의 화포들은 새벽 어둠 속에 벌어진 전투 과정에서 잃었기 때문이다. (육군성 회람지, 1955년) )

 

 하지만 중공군들이 대규모 예비 화포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 곧바로 이 전력이 한반도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51년의 1월에서 10월까지의 밀고 당기는 전투로 말미암아 중공군 포병은 한반도에서 기동성과 보급 측면에서의 약점으로 제한적인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정치문제로 인하여 전선이 안정되는 이해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포병의 증강 문제는 화포 자체를 직격 외에는 안전한 각개의 깊숙한 벙커에 위치시켜야 하는 필요성에 밀려 느리게 진행되었다. 또다른 요소로는 미 공군이 실시한 차단 작전(interdiction campaign)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도 훨씬 큰 효과를 발휘했다. 유엔군 측에서는 1952년 5월까지 약 710문의 작동하는 화포가 약 102000발 가량을 사격할 수 있었으며, 1953년 7월 전투 종결 직전까지는 약 900문에서 375000발 이상을 사격할 수가 있었다. 비록 이것이 그리 높은 사격율 (일일 평균 화포당 16발에 해당) 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주목해야 할 점은 포격이 대단히 집중적이었으며, 당초 미 제 8군이 과거 겪었던 것에 비하여 훨씬 격렬했다는 점이었다. 한편 1951년 7월의 전선이 아직 유동적이던 당시를 살펴보면, 중공군은 곡사포와 박격포 합해서 8000발 미만을 사격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항공차단작전(航空遮斷作戰, Air Interdiction Operation; AIO) : 적의 군사잠재력이 우군의 지·해상군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를 교란, 지연, 파괴하거나 우군의 지상군에 대하여 단기간에 효력발휘가 가능한 위치에 있는 적을 공격하여 적 전력의 증원, 재보급 및 기동성을 제한함으로써 전투지역 내의 적을 고립케 하는 항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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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미 제 8군 사령관으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Lieutenant General Matthew Ridgway)가 취임하면서 더 이상 주도로를 따른 사단 규모의 대규모 진격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리지웨이 중장은 보병들을 고지에 위치시켰고, 1951년 1월부터 시작된 일련의 섬세하고도 제한된 목표의 작전들을 벌이면서, 공습과 전차지원, 대규모 포병 준비사격 등을 활용하는 정교한 작전을 펼치며, 말 그대로 대대 단위로 진격시키게 된다. 이 시점에 이르면 군단에는 당초 갖고 있어야 할 모든 중포병 전력이 거의 갖춰지게 된다. 이들 부대들은 부분동원(partial mobilization)을 통하여 예비군(Reserve) 및 주방위군(National Guard) 자원으로부터 동원된 부대들이지만, 이에 상응하여 전쟁에 필요한 공업 동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는 한반도에서 가용한 탄약 측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 부분동원(部分動員, Partial Mobilization) : 적 공격전 위기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필요한 지역과 자원종류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말함. 전면전시 총동원을 하기 전에 동원하는 것으로서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연한 동원방법이라고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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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기는 공격과 반격의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전선을 보다 밀접하게 통제함으로써, 대규모 중공군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야포들이 적으로부터 입는 피해는 감소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중공군의 2월 공세 당시를 살펴보면 10군단 지역에서만도 총 28문의 105mm 포와 6문(a half dozen)의 155mm 포를 상실하게 된다.  1개월 후 동 지역을 탈환하였을 때, 당연하게도 이들 중에서 105mm 화포들은 몽땅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155mm 포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공습을 통해 파괴하지 않았으며, 10군단은 이 중에서 5문을 회수할 수가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전쟁 기간 동안 미 야전포를 적에게 상실한 뒤에 되찾은 마지막 사례였다.

 

(국공내전 장시 노획한 미제 M2A1 105mm 곡사포로 무장한 중공군 포병의 모습. 중공군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주로 노획한 미제 무기와 일제 무기를 사용했지만, 소련제 화포 역시도 이 기간 꾸준히 유입되고 있었다. (육군성 회람지 30-51, 중공군 핸드북, 1952년 9월) )

 

 1951년 봄에 이르게 되면, 중공군의 전술은 지난 몇 달 전 중공군 앞에 놓인 미 제 8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 제 8군에게 쉽게 예측당하는 상황이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5월에 10군단 지역에 두번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음이 명백해지자, 새로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된 제임스 밴 플리트 중장(Lieutenant General James Van Fleet)은 기존 계획된 공세 계획을 취소하고, 아군에 유리한 장소에서 적의 공격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된다. 그가 보기에는 제 2차 세계대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휘하의 8군에 약 70개의 포병대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다가올 중공군의 공세는 한반도에서 중공군 보병의 상당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인 것 또한 명백했다. 따라서 밴 플리트는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은 짧고 명확한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강철과 불을 소비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 포탄 구멍마다 한발씩 딛을 수 있을 정도로 빽빽하게 포탄 구덩이가 생기기를 바란다."

 

(미 8군 포병들이 중공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8인치 포를 재장전하고 있다. (미 육군, 1951년 6월 10일) )

 

 밴 플리트와 휘하 참모들은 다가올 전투에 있어 부대들에 공급할 수 있는 최대 탄약량을, 미 8군 주 보급소에서 10군단 보급소, 그리고 각각의 포병 부대에까지의 60마일을 왕복하며 탄약을 운반할 수 있는 가용 트럭의 총 숫자를 제한요소로 보고 계산하였다. 만약 모든 종류의 보급 수송 수단이 마비되는 한편, 최대속도로 사격이 진행될 경우 대략 7일간 사격을 실시할 수 있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 7일은 대략 중공군이 실질적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을 정도의 기간이 되는데, 이 기간을 지나게 되면 미 공군력에 의해 과부하가 걸린 중공군의 보급 시스템으로 인해 재정비를 필요로 하게 된다. 물론 밴 플리트 장군에게는 중공군이 이 정도까지 버티게 허용할 의도도 없었다.

 

(만주에서 불어오는 눈폭풍도 이 155mm 곡사포 반원들이 중부 전선의 공산군대를 강타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미 육군 1952년 2월 21일) )

 

 하지만 미 육군이 일일 인가 사격율 (daily autohrized rate of fire) 개념을 갖다 버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계획되고 실행된 것들을 살펴본다면 그리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105mm 포의 화포당 일일 사격율은 기존 50발에서 300발로 증가되었고, 155mm 포의 경우에는 33발에서 250발로, 8인치 포의 경우 20발에서 200발로 증가되었다. 5월 16일 저녁부터 공세는 시작되었지만, 모든 공산군 부대의 정확한 위치와 접근로가 밝혀진 것과 동시에 10군단 포병이 "밴 플리트 사격량(Van Fleet loads)"대로 사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은 다음날 늦게가 되어서의 일이었다. 10군단 동쪽에 있언 한국군에 대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5월 20일 중공군은 갑자기 공세를 중단하였으며, 신속하게 포병 사거리 밖으로 퇴각을 시도하게 된다. 미군의 보급 시스템은 엄청나게 신장됨에 따라 큰 고통을 겪긴 했지만 어쨌든 야전포병은 적 6개 사단들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1953년 전까지는 가장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중공군의 이 대규모 공세는 막을 내렸고, 유엔군은 약 40마일을 북진하면서, 방어에 적합한 오늘날의 비무장지대와 거의 일치하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어진 기나긴 정체기 동안에도 포병은 많이 활용되었다. 전선의 일부를 직선화하거나, 미 8군의 주요 방어선의 핵심 지역들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전초들을 방어하는 등의 목적을 가진 제한된 작전에 있어서도 엄청난 양의 탄약이 소비되었다. 기동전 시기에서 반복적으로 입증된 바와 마찬가지로, 노출되고 고립된 전초의 붕괴를 막는 데 있어서는 집중 화력이야말로 결정적 요소였다. 게다가 지상군 공세 작전이 중단되고 한편 공군은 이 새로운 소모전 양상에서 치고 나오는 상황에서, 육군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는 사실상 포병 밖에 없었다. 그러나 16개월간의 격심한 전투가 지속되고 앞으로도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던 1951년 10월 시점에 있어서, 신규 탄약 생산량이 제대로 증가되지 않는다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잔여 탄약 보유량으로는 견뎌 내지 못할 것임이 명백했다. 또한 유럽에서 새롭게 제 2의 지상전이 발발하게 된다면, 아군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비록 아군의 사격율이 공산군의 사격율에 비하여 훨씬 높긴 했지만, 지휘관들이 원했던 수준에 비하면 훨씬 낮았는데, 이는 탄약 보급량이 엄격하게 규제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포격량이 양과 정확도 면에서 향상됨에도 1952년 여름까지 이것이 지속되었던 탓이다. 사실 1953년 초반이 되어서야 여러 해 전에 승인된 예산에 힘입어 마침내 한반도 전장에서 탄약 비축량이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생산 증가를 위한 장비가 가동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문제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전선 부대에는 탄약 소모규제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진격하지 않고 육군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은 화력 뿐이다." 그는 전선의 군사활동 증가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재보급 압력을 가하게 되며, 이들로 하여금 취약한 주간에 인원 및 물자를 운반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한다고 믿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만약 육군이 제대로 탄약 공급을 받아 지금보다 더 많은 화력으로 적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에게 더 많은 병력과 보급물자를 소모케 하여 곤란에 빠지게 만들게 되며, 한편으로는 아 공군의 작전에도 기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일단 중공군과 북한군이 참호에 파고들어갈 수 있게 되자, 미 육군의 105mm 포의 효용성은 상당히 감소하게 되는데, 이는 105mm 포로는 벙커에 별다른 효과가 없으며, 단지 전선에 근접하는 적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적의 공세시에 화력 집중에만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벙커에 숨어든 적 포병을 제거하는 데에는 중포, 특히 8인치 곡사포가 필요했는데, 105mm 포는 이러한 작전에는 대체로 쓸모가 없었다. 1952년 가을에 이르러, 미 8군은 1개 105mm포 대대가 8인치포 대대로 전환되면서 총 36문의 155mm 곡사포와 44문의 8인치 포를 보유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155mm 포의 경우에는 탄약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방어 사격의 경우 항상 제대로 지원되긴 했지만, 또한 장기적으로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유용한 제한된 작전들, 예를 들어 한국군 제 2사단의 철의 삼각지대(Triangle Hill complex) 공격 계획 등은 취소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미 육군이 438 파운드 240mm 탄약을 충분하게 보유하게 되는 시점이 되는 1953년 5월, 2개 대대가 155mm 포 대대에서 전환되어 강략한 240mm 곡사포를 운용하게 된다.

 

('롱 톰' 155mm 자주포가 서부 중앙 전선 무네마(?) 부근에서 미 제 25 보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사격을 퍼붓고 있다. (미 육군, 1951년 11월 26일) )

 

 밴 플리트의 상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자신의 공격적인 미 8군 사령관을 위하여 자주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는 포병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믿었으며, 1951년 가을에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군 작전들에서 본인이 받은 인상은, 포병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리는 데 있어 최고였고 앞으로도 최고라는 것이다. 포병은 미군과 동맹군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준다. 탄약 보급소의 탄약 더미의 양과 영현 수집소의 시체 무더기의 양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전자가 증가하면 후자는 감소하며, 그 반대도 성립한다." 라고 하였다. 6개월 후에도 예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리지웨이는 완강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병사들의 생명을 내던지는 방법 뿐이다."

 

(젊은 짐꾼들이 지게를 이용하여 105mm 포탄들을 산지에 위치한 포병부대를 향해 운반하고 있다. 1952년 여름 무렵의 모습이다. 단장의 능선- 펀치볼 지역에는 제대로 된 도로망이 없었기 때문에, 미 8군은 공중 투하 외에도 수천 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여 보급품을 전방 수송해야 했다. (미 육군, 1953년 1월 19일) )

 

 추후 이 전쟁에서 멀찍이 안전하게 떨어져 있던 군사 연구가들 입장에서는 과연 미 육군이 한국 전쟁에서 이후 전쟁에도 적용할 수 있는 소모전이란 점 외에 "올바른" 교훈을 얻었는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이 지역과 전 세계에 있어서 입지를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1953년,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접도록 기여한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이 해의 3월 스탈린이 사망하였고, 이후 들어선 새로운 소련 지도부는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둘째, 한국전 참전으로 인하여 중공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아군이 북한의 관개 댐을 파괴한 직후인 5월, 만주의 중공군 보급기지를 타격하겠다고 경고를 보냈던 점이다. 새로 들어선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미 소위 "대량 보복(massive retaliation)"이라고 불리는 핵카드로 위협을 시작하고 있었으나, 고작 한반도에서의 정체 상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이 중공 도시 몇 개를 지워버릴 것이라고는 중공 측에서 걱정했을 리가 없었다. 한편 280mm "원자포(atomic canon)"를 살펴보자.

 

 이 무기의 개발은 이미 널리 공포되어 있던 것이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국방장관은 이 무기의 혁명적인 잠재력에 대해서 떠들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을 포함한 고위 군사 관계자들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무기가 "대규모 지상군"을 해치울 수 있으리라 이야기하였다. 이건 소모전이었다. 물론 무기들에 대해서 온갖 환상적인 주장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관개 댐을 폭격한 상태에다, 전쟁이 중국으로 확대되리라는 경고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일명 "핵 애니(Atomic Annie)"라는 이름의 280mm 원자 포탄이 개발되어 널리 공표되었다. 중공의 정책 수립가들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을까? 최근 중공 정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대량의 문서들은 주로 중공이 전쟁에 참가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약 2년간에 걸친 판문점 휴전 협상 기간의 전투에 있어서의 결심들과 관련해서는 별로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분명한 점은 중공인들이 대규모 화력 지원이라는 미 육군의 오랜 정책을 잘 이해했으리라는 점이다. 저들이 종종 미국과 세계 여론을 오판해 오긴 했지만, 공중 투발 핵무기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확전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것에 비교하여, 공격에 '반격하기' 위하여 화포에서 발사된 - 따라서 명백히 전술적인 - 핵무기라면 서방 세계에 있어서 훨씬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리라는 점은 분명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수년간 협상에 있어 질질 끌었던 사안들이 순식간에, 그리고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7월에는 중국의 마지막 대공세가 펼쳐졌는데, 이는 한국군에게 마지막으로 기억할 만한 타격을 안겨다 주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전장에서 승리하여 유엔의 굴복을 얻어내었다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이 마지막 공세에서 중공군은 약 705000발의 포탄을 발사하였으며, 여기에는 국공 내전 당시 노획한 잔여 105mm 탄의 상당수가 소모되었다. 한편 유엔군은 총 4711120발을 발사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 22:00를 기하여 양측의 화포는 침묵한다.

 

 양군의 화포가 침묵한 거의 직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앞으로 더 이상 미국이나 그 동맹국의 이해에 대해 추가적인 공격이 가해질 경우 대규모 핵보복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미 육군의 많은 이들은, 소위 미국 군사 정책의 "신 개념(new look)"이라고 불린 내용에 대하여, 과거 트루만 행정부가 갖고 있던 한국전쟁 이전의 구 개념, 즉 핵억제라는 이름 하에 미 육군이 10개의 감편된 사단 규모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과 불쾌하리만치 똑같다고 느끼게 된다. 1950년대 말까지 미 육군은 11개의 현역 사단을 갖는 규모로 감축되게 된다. 비록 이번에는 감축이 다소 천천히 이뤄지긴 했지만, 이러한 감축 및 기타 정책 문제에 있어서의 의견 불일치로 인하여 수많은 고위 장교들이 사임하거나 조기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는 한국 전쟁 기간 미 8군을 지휘했던 모든 생존 장성들이 포함하게 된다: 즉, 밴 플리트, 리지웨이, 맥스웰 타일러 등이다. 야전 포병은 한편으로 핵전장에 관련되어 제기된 문제들에 붙잡혀 있게 되며, 전투 사단들이 광범위하게 소산되도록 재조직되는 상황에서의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이론적으로 핵공격을 당했을 때 전투 사단에 어느 정도의 생존성을 제공하긴 하였지만, 반면에 화력 집중에 있어서는 완벽한 방해가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태평양 전장에서 활용된 사주 방어 전투 기술들 - 또한 한국 전쟁에서 힘들게 다시 배운 - 은 이후의 "펜토믹(pentomic; 1957년, 미 육군이 전술 핵무기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입한 보병 사단 구조[5]) 개념 및 그 이후에 미 육군에서 도입한 사단 개념들에는 활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포대들이나 포병대대 전부가 유린당한 경험을 갖고 있던 빨간 다리들은 이걸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전쟁 후반이 되어 두꺼운 주 방어선 및 전초 시스템 뒤에 위치하는 소모전으로 변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포병 부대의 정교한 전면 방어(perimeter defense of artillery unit) 체계는 지속적인 공세나 대규모 침투 공격과 같은 테스트를 겪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테스트가 있게 된 것은 다음번 대규모 아시아 전쟁 - 즉 베트남 전쟁 -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저자 소개

 

 D. M. Giangreco served as an editor at Military Review,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Fort Leavenworth, Kansas, for twenty years and has lectured widely on national security matters. An award-winning author of nine books on military and sociopolitical subjects, he has also written extensively for various national and international publications and news agencies. Giangreco's work has been translated into French, German, Spanish, Russian (pirated), Japanese, and Chinese. His most recent books are Dear Harry on the correspondence of "everyday Americans" with the Truman White House (2000), Artillery in Korea: Massing Fires and Reinventing the Wheel (2003), Eyewitness D-Day (2004), and Eyewitness Vietnam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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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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