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전역

[스크랩] [번역] 제 1차 십자군, 1097-1099 - Military History Encyclopedia

박용수 2014. 10. 27. 15:51

< 원문출처 : Military History Encyclopedia on the Web
 [1] First Crusade, 1096-109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1st.html)
 [2] Siege of Nicaea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nicaea.html)
 [3] Battle of Dorylaeum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dorylaeum.html)
 [4] Crusader Siege of Antioch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ntioch_crusader.html)
 [5] Kerboga's siege of Antioch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ntioch_kerboga.html)
 [6] Battle of the Oronte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orontes.html)
 [7] Siege of Jerusalem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jerusalem1099.html)
 [8] Battle of Ascalon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calon.html) >

 

< 사진출처:

 [9] (http://www.mifami.org/eLibrary/FirstCrusadeReading.htm)

 [10] (http://warandgame.wordpress.com/2008/07/05/) >

 


 

 

 제 1차 십자군, 1097-1099 (First Crusade, 1096-1099)

 

 제 1차 십자군은 유럽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최초의 대규모 정복전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십자군 직전의 시기는 셀주크 제국이 융성한 시기였다. 1071년, 비잔틴 제국이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패배하고 예루살렘이 정복됨에 따라 순례길은 더욱 위험한 일이 되었다. 기존에는 순례자들이 성지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독교 영토를 내에서 보냈지만, 이제 아나톨리아가 투르크인들 손에 넘어가면서 순례는 훨씬 위험한 일이 되었고, 순례자들에 대한 공격 이야기가 유럽에 나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알렉시우스 콤네누스 황제(Emperor Alexius Comnenus)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교황 우르반 2세(Pope Urban II)가 클레르몽 공의회(the Synod of Clermont)(1095)를 통해 무장할 것을 요청하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었다. 이에 따른 열정은 여러가지 결과를 낳게 되는데, 예를 들어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이 일어난다던가, 독일에서 일련의 반 유태인 유혈폭동 등이 벌어지는 등의 일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구성되지를 않는데, 이는 십자군에 많은 중요 지도자들이 몰려들긴 하였지만, 전반적인 지휘를 맡을만한 자격이라 할 수 있는 국왕급의 인사가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요 지도자들로는 노르만인이었던 타란토 공작 보에몽(Normans Duke Bohemund of Taranto), 그의 조카인 탕크레드(Tancred),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Duke Robert of Normandy), 툴루스 백작 레이몬드(Count Reymond of Toulouse), 로렌 공작 고드프리 드 부용(Duke Godfrey de Bouillon of Lorraine), 그의 형제 볼드윈(Baldwin), 버만도 공작 휴(Duke Hugh of Vermandois), 프랑스 왕의 형제인 블루아 백작 스테판(brother of the king of France, Count Stephan of Blois), 플란드르 백작 로버트(Count Robert of Flanders) 등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들 지도자들 사이에는 알력이 있었다. 그러나 교황 특사(Papal legate)인 아데마르 드 푸이 주교(Bishop Adhemar de Puy)가 죽기 전까지 이들간의 알력이 지나친 문제로 발전하는 것을 조절할 수가 있었다. 여러 그룹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기로 합의하였으며, 각자의 그룹들은 별도로 행군하였다. 일부는 다뉴브 강을 따라, 일부는 달마티안 해안을 따라, 일부는 이탈리아까지 간 뒤에 해로로 그리스까지 갔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모임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 알렉시우스는 기껏해야 수천명의 용병 정도를 예상했지 무려 5만명이나 되는 열성자들이 모일 것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결국 1096-7년 겨울을 지내면서 양측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시우스는 1071년에 상실한 아나톨리아를 재탈환하고 싶어했지만, 십자군들에게는 이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은 합의점을 찾게 되는데, 알렉시우스는 십자군들이 성지까지 가는 행군을 지원하고, 반대로 십자군들은 진군 과정에서 획득한 모든 영토를 비잔틴 제국에 바치기로 하였다. 아마 양측 모두 지킬 생각은 없었을 약속이었을 것이다.

 

(민중 십자군을 이끄는 은자 피터[9])

 

 마침내 1097년 봄, 십자군은 처음으로 무슬림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십자군들은 아나톨리아 재정복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었고, 투르크인들이 이곳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십자군의 최초 목표는 니케아(Nicaea)로서 콘스탄티노플에 대단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니케아 공성전은 1097년 5월 14일에서 6월 19일까지 이어진다. 마침내 십자군들이 방어를 무너뜨리고 도시를 약탈할 수 있게될 찰나, 알렉시우스는 도시와 항복협상을 벌여 군대를 진입하게 함으로써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과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된다. 십자군들은 이제 아나톨리아를 따라 2개 대열로 진군하였는데, 전반적인 지휘는 존재하지 않았다. 1097년 7월 1일의 도릴레움 전투(Battle of Dorylaeum)에서 보에몽 부대는 훨씬 대규모의 투르크 군대를 맞아 거의 학살당하였고, 고드프리와 레이몬드가 도착하여 구조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처음으로 십자군을 떠나는 부대가 생기는데, 볼드윈이 에데사(Edessa)에 자기 자신만의 공국을 세우기 위해서 떠났던 것이다. 한편, 십자군 주력은 안티오크(Antioch)에 도착한다. 이어 1097년 10월 21일부터 1098년 6월 3일까지 안티오크 공성전이 벌어진다. 십자군은 다시금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번 경우는 굶주림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뒤늦게 도착한 영국과 피사 함대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며, 마침내 6월 3일 투르크인 반역자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함락시킨다. 한편 단지 2일이 지난 뒤에 75000명 규모의 대규모 투르크 군대가 도시에 도착하고, 거꾸로 십자군을 도시에 가둬둔채 공성전이 벌어진다. 이 공성전은 6월 5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다. 6월 28일, 십자군은 15000명의 전투원 전원이 출격하여 압도적인 수의 적군과 대적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공성전은 막을 내린다. (오론테스 전투. battle of the Orontes). 이 시점에서 아데마르 주교가 숨지는 재앙이 닥치므로써, 지도자간의 알력이 격화된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러 갈 때, 보에몽과 노르만인들은 안티오크에 남아 자신들만의 공국을 창설하게 된다.

 

(1092년 무렵의 비잔틴 제국의 판도. 니케아 및 안티오크 등 주요도시가 비잔틴 영향권 밖에 있다. [9])

 

 나머지 십자군들은 이제 새로운 적인 파티마 왕조(Fatimids)와 대적하게 된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재정복했던 것이다. 나머지 12000명의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긴 하였으나, 안티오크에서와 같은 종류의 공성전을 하기에는 너무 허약해져 있었다. 1099년 6월 9일에서 7월 18일에 이르는 예루살렘 공성전 기간 대부분은 성공적인 공격을 하기 위한 준비에 소비되었으며, 마침내 이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파티마 왕조 수비대를 격파하고 도시를 함락시킨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십자군들은 도시를 약탈했으며, 인구 대부분을 학살하였다. 이것은 무슬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당대 사람들 조차도 이 약탈의 폭력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이용의 고드프리(Godrey of Bouillon)가 예루살렘의 수호자(Guardian of Jerusalem)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파티마 왕조의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다시금 위기를 맞는다. 파티마 왕조군은 십자군의 5배의 숫자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투르크 군에 비해서도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십자군들은 1099년 8월 12일 아스칼론 전투(Battle of Ascalon)에서 대승을 거둔다. 십자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궁극적인 실패의 씨앗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십자군들은 4개의 공국 - 예루살렘, 에데사, 트리폴리, 안티오크 -을 설립했는데, 이들은 종종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되었다. 승리 이후 많은 수의 십자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동방에서의 십자군 전력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왕국들은 1291년 아크레 함락때까지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Rickard, J. (25 March 2001), First Crusade, 1096-109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1st.html

 

 


 

 

니케아 공성전(Siege of Nicaea, 14 May-19 June 1097)

 

 

 십자군 최초의 대규모 공성전이다. 셀주크 투르크 세력이 니케아에 있음으로써 비잔틴 제국에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단지 50마일 거리에 있는 대형 요새 도시였다. 이 도시는 4마일 길이의 벽으로 방호되었으며, 호수 옆에 있다는 위치 조건으로 인하여 봉쇄하기도 대단히 곤란했다. 십자군들은 최초 도시에 대한 돌격이 실패한 이후 비잔틴인들의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십자군들은 마침내 제대로된 공성전을 하기 위해 눌러앉게 된다. 그러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판 터널이 지나치게 일찍 붕괴하는 바람에 수비대로 하여금 성벽을 보수할 기회를 주게 된다. 수비대가 항복 협상을 결심하게 된 것은 비잔틴인들이 니케아와 인접한 호수로 함대를 들여온 이후의 일이다. 십자군들은 잠에서 깨어나보니 어느새 도시가 비잔틴인들의 손안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고, 십자군들이 평소처럼 도시를 약탈하려는 것을 알렉시우스가 거부하자 십자군들은 분노하게 되었다. 이 다툼에는 양측 모두 근거가 있었는데, 십자군 측으로는 공성전을 하느라 수고한 바가 많았다는 것이 근거였고, 알렉시우스 측으로서는, 이 도시는 잠시 투르크인들에게 빼았겼을 뿐 제국의 일부이며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근거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이미 나쁜 상태였던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과의 관계는 더 악화되게 된다.

 

(니케아 공성전. 13세기 십자군 관련 문헌에 나타난 작품이다. 십자군들이 적의 머리를 성 안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9])

 

Rickard, J. (30 August 2001), Siege of Nicaea, 14 May-19 June 109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nicaea.html

 

 



도릴레움 전투 (Battle of Dorylaeum, 1 July 1097)

 

 

 이 전투는 1차 십자군에서 발생한 전투로 십자군들이 대패한 전투이다. 십자군들은 과거 비잔틴인들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상실했던 아나톨리아 내륙 지방을 2개 종대로써 지나가고 있었다. 고원지대라는 지형 조건은 투르크의 경궁기병들에게는 완벽한 장소였으며, 십자군으로서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 7월 1일, 행군 1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보에몽 휘하의 좌측 종대는 투르크 군대와 조우하였고, 전투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십자군들이 완전히 전투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룸의 셀주크 술탄인 킬리즈 아슬란(Kilij Arslan, Seljuk Sultan of Rum)이 이끄는 5만명의 군대에게 포위공격을 당한다. (병력 규모에 대해서 십자군들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15만명에서 35만명으로 되어 있다.) 투르크 군대 전원은 기마궁수들로 되어 있었으며, 스웜(swarms) 전술로 공격하여 십자군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보에몽은 십자군들을 제지할 수가 없었으며, 십자군 일부는 투르크인들을 공격하려 돌격을 감행하다 학살당했다. 수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십자군들은 숙영지로 후퇴하였고 끝내 전멸당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전령이 반대쪽 종대에 도달하여 고드프리 공작이 전장에 당도하게 되었다. 그는 투르크인들이 보에몽의 숙영지 근처의 좁은 지역에 몰려있음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그는 뭉쳐있는 투르크인들을 향해 돌격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이로써 투르크군 좌익과 중앙에 큰 손실을 입히게 된다. 이 뜻밖의 공격으로 투르크군의 사기가 떨어졌고, 투르크군 다수가 전장을 이탈했다. 반대편 종대는 보에몽의 종대가 진정 심각한 피해를 입기 전에 적시에 도착하였고, 킬리즈 아슬란은 두번다시 십자군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로써 십자군에게는 아나톨리아를 통과하는 통로가 열린 셈이었다. 또한 십자군은 투르크군 숙영지를 그대로 접수할 수 있었고, 당분간 식량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Rickard, J. (3 April 2001), Battle of Dorylaeum, 1 July 109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dorylaeum.html

 

 



십자군의 안티오크 공성전 (Crusader Siege of Antioch, 21 October 1097-3 June 1098)

 

 

 로마 및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안티오크는 1085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무슬림들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안티오크 점령이야 말로 1차 십자군의 핵심 목표 중의 하나였다 - 안티오크를 통제하지 못할 경우 십자군은 예루살렘까지 이동할 수가 없었다. 공성전은 7달 반동안 이어졌으며, 십자군들의 상황은 도시 내에 포위된 자들보다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도시는 산악 지대인 오론테스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시 자체는 계곡 바닥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아성(citadel)은 도시 위에 있는 산에 있었지만, 이곳 역시도 도시 성벽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십자군들은 봉쇄를 실시하고 3개의 공성탑을 만들었으며, 장기간 공성전을 실시하였다. 시리아인들은 2차례 도시 구원 시도를 하였는데, 하렌크 전투(1차 전투는 1097년 12월 31일, 2차 전투는 1098년 2월 9일)를 통해 격퇴당했다. 도시가 함락당할 당시에도 모술의 에미르 케르보가(Emir Kerboga of Mosul)가 이끄는 75000명 규모의 대규모 구원군이 접근 중에 있었다. 도시의 함락은 내부의 반역자에 의해 이뤄졌다. 산 아래에 있는 쌍둥이탑(Tower of the Two Sisters)은 베니-자라 가문(Beni-Zarra family)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 수장인 피루즈(Firuz)가 개인적인 이유로 프랑크인들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한편 이들의 침입은 마침 이날 밤 투르크인들이 의심스러운 기독교인들을 죽이려던 계획과 맞물려 더욱 용이해졌는데, 십자군들이 침입하면서 발생한 소음을 기독교인들을 죽이느라 발생한 소음으로 오인하였던 것이었다. 피루즈는 보에몽에게 자신의 제안을 제시하였고, 보에몽은 마침내 나머지 십자군들이 보에몽에게 안티오크를 줄 것을 승락하게 만들었다. 보에몽은 자신이 안티오크로 들어가는 사다리에 가장 먼저 올라간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쌍둥이탑으로부터 십자군들은 성채로의 뒷문을 열 수가 있었고, 도시의 주 성문 중 하나인 다리 문(Gate of the Bridge)을 장악할 수가 있었다. 도시는 곧 십자군의 손에 떨어졌으나, 산 꼭대기에 있던 아성(citadel)은 투르크인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단지 2일 뒤에 투르크군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케르보가의 안티오크 공성전이 시작된다.

 

Rickard, J. (2 April 2001), Antioch, crusader siege of, 21 October 1097-3 June 1098,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ntioch_crusader.html

 

 



케르보가 군대의 안티오크 공성전 (Kerboga's siege of Antioch, 5-28 June 1098)

 

 

 십자군의 안티오크 공성전이 끝난지 불과 2일 후, 십자군들 스스로가 모술의 에미르 케르보가의 군대에 75000명 군대에 의해 포위당했음을 깨닫게 된다. 십자군들은 스스로 끔찍한 상황에 처했음을 자각하게 되는데, 안티오크의 아성은 아직도 무슬림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식량도 대단히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군들의 사기는 바닥을 친다. 한편 안티오크를 넘겨받으러 오던 비잔틴 군대는 케르보가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안티오크를 잃어버린지 단지 13년만에 되찾으려던 비잔틴 측의 입지는 약화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십자군에 종군하였던 설교자인 피터 바르톨로뮤(Peter Bartholomew)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성창(Holy Lance)이 도시 내의 한 교회 밑에 뭍혀있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대규모 발굴이 이어졌고 창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발견되어 군대에게 바쳐졌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각종 유물들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성창(Holy Lance)이 콘스탄티노플에 전시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중에는 아직도 의심의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고, 이에 피터는 불의 수난(ordeal of fire)을 감당하여 증명하기로 하였다. 그는 단지 며칠 밖에 생존하지 못했지만, 이 기간은 십자군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6월 28일, 십자군들은 도시 밖으로 출격한다. 그리고 오론테스 전투를 통하여 케르보가 군대를 격파하였고 십자군 원정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 광경을 본 아성의 무슬림 수비대는 항복하였고, 안티오크는 십자군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

 

(뾰족모자(mitre)를 쓴 아데마르 주교가 1차 십자군 과정에서 성창(Holy Lance)을 들고 있는 모습[10])

 

Rickard, J. (2 April 2001), Antioch, Kerboga's siege of, 5-28 June 1098,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ntioch_kerboga.html

 

 



오론테스 전투 (Battle of the Orontes, 28 June 1098)

 

 십자군의 안티오크 정복을 확고하게 해 준 1차 십자군 당시의 전투. 도시 점령 직후인 6월 5일, 도시를 점령한 십자군들은 모술의 에미르 케르보가가 이끄는 구원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들은 십자군들이 금방 내버려둔 포위 진지를 접수한다. 또한 도시의 원래 수비대들 역시도 아성 내에 남아 있었고, 케르보가와 연락을 취하였다. 십자군과 케르보가 사이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시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보에몽은 십자군들이 공성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전투에 기대를 걸기로 하였다. 아마도 보에몽은 무슬림 군내 내에서도 내부 갈등으로 분열이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케르보가의 동맹군들 중 상당수는 십자군 못지 않게 케르보가의 성공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쨌든 십자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지치고 일부는 장비까지 형편없는 15000명에 불과했고, 상대 무슬림 군대는 75000명에 달했다.

 

 도시에 단지 100명만을 남긴채 보에몽은 십자군들을 이끌고 도시에서 출격하여 오론테스를 가로질렀다. 케르보가는 이들이 강을 건너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아마도 십자군의 위협을 단판 전투로 끝장내려던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십자군은 전투 시작 전에 완전한 전투대형을 갖출 수가 있었다. 케르보가는 전통적인 투르크 전술인 적전 후퇴 전술을 사용했다. 즉 적으로 하여금 화살비 속으로 진군하게 만드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전장은 이러한 전술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결국 십자군들은 투르크군과 근접전을 벌이는 데에 성공하게 되고, 이는 십자군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케르보가의 동맹군들은 다마스커스의 에미르 두칵(Duqaq, emir of Damascus)을 선투로 하여 케르보가를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동맹군들이 도주하면서 케르보가 역시 도주하게 된다. 십자군들은 추격전을 펼쳐 도주하는 군대의 상당수를 살해했으며, 그보다 많은 도망병들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케르보가는 모술로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 전투 이후 두번 다시 전과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반면 십자군들은 이제 완전히 안티오크를 장악하게 되었다.

 

Rickard, J. (30 August 2001), Battle of the Orontes, 28 June 1098 (First Crusade),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orontes.html

 

 



예루살렘 공성전 (Siege of Jerusalem, 9 June-18 July 1099)

 

 

 1차 십자군의 정점인 전투. 투르크인들과의 전투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들은 이제 이집트 파티마 왕조 군대와 대적하게 된다. 이들은 투르크인들이나 십자군들에 비하여 훨씬 허약한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벽에 보호를 받는 대규모의 군대였다. 게다가 수비대는 주변에 단 하나밖에 없는 급수원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십자군의 식량은 곧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십자군 병력 규모는 도시를 제대로 봉쇄할 만한 규모가 되지 못했다. 십자군 진지는 다소 접근이 용이한 예루살렘 북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십자군은 돌격을 계획하게 된다. 군내 불순분자들(some of the more disruptive elements in the army)을 안티오크에 남겨두고 왔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단번에 적당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십자군들은 공성탑을 만들었고, 성직자들을 앞세워 도시를 한바퀴 돈 다음, 부이용의 고드프리와 형제인 볼드윈의 지휘로 북쪽 벽의 성 스테판 성문(St. Stephen's Gate)에 주공을, 레이몬드 백작 지휘로 서쪽 벽의 자파 성벽(Jaffa Gate)에 조공을 가하였다. 양측 공격 모두 성공적이어서 도시는 신속하게 함락되었다. 그 이후 학살이 뒤따랐는데, 그 가혹한 정도는 당대 기준으로도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다만 일부 기록에는 당시 도시가 원래 거의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무슬림, 유태인,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도 최초의 피의 향연 속에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티오크에서처럼 무슬림 구원군이 당도하였지만, 이번에는 십자군들이 공격을 실시하였고, 아스칼론 전투를 통하여 1차 십자군은 성공은 확고해지게 된다.

 

Rickard, J. (2 April 2001), Siege of Jerusalem, 9 June-18 July 109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jerusalem1099.html

 

 



아스칼론 전투 (Battle of Ascalon, 12 August 1099)

 

 1차 십자군의 마지막 전투.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1개월 뒤에 벌어졌다. 예루살렘은 이집트의 파티마조 칼리프의 손에 있었으며, 이집트 재상(vizier of Egypt) 알 아프달(al-Afdal)은 도시 탈환을 위하여 5만명의 군대를 소집하였다. 이 소식은 곧 부이용의 고드프리 - 이제 예루살렘의 수호자(Guardian of Jerusalem)가 된-에게 도달하였고, 그는 흩어진 십자군들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8월 11일 아스칼론에 집결하였다. 십자군은 1만명으로서 이집트군의 1/5에 불과했지만, 파티마조 군대는 수세기 전의 아랍인들과 비슷한 구식 군대로서 십자군이나 투르크 군에 비해 훨씬 열등한 수준이었다. 8월 12일 아침, 십자군은 대형을 갖추고 신속하게 돌격하여 알 아프달 군대를 완전 기습 공격할 수 있었다. 파티마조 군대는 거의 저항조차 못한 채 해산되었다. 십자군들은 이집트인들을 아스칼론까지 추격하였으나, 십자군 내부에서의 질투들로 인하여 도시는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알 아프달은 이집트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 전투로 인하여 1차 십자군의 성공과 예루살렘 지배는 확고해졌다.

 

Rickard, J. , Ascalon, battle of, 12 August 109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calon.html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