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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역] 제 2~5차 십자군 - Military History Encyclopedia

박용수 2014. 10. 27. 15:52

< 원문출처 : Military History Encyclopedia on the Web
[1] Second Crusade, 1147-114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2nd.html)
[2] Battle of Ramleh, 25 November 117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ramleh.html)
[3] Battle of Hattin, 4 July 118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hattin.html)
[4] Third Crusade, 1189-1192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3rd.html)
[5] Siege of Acre, August 1189-12 July 119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cre.html)
[6] Fourth Crusade, 1202-1204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4th.html)
[7] Fifth Crusade, 1218-122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5th.html) >

 

 

< 사진출처 :

[8] Images from the Salles des Croisades at Versailles (1839-1842) 

 (http://www.brown.edu/Courses/HI0110/gallery3.htm)

 (http://www.brown.edu/Courses/HI0110/gallery4.htm)

[9] (http://www.travelpod.com/travel-photo/lraleigh/youarehere./1207062000/horns_hattin.jpg/tpod.html)

[10] HIST 3613: History of Crusades

 (http://www.hist.umn.edu/courses/hist3613/calendar/saladin/hattin.htm)

 (http://www.hist.umn.edu/courses/hist3613/calendar/saladin/saladin.htm)

 [11] (http://www.timabell.co.uk/Opening/welcome2.htm) >

 



제 2차 십자군, 1147-1149 (Second Crusade, 1147-1149)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십자군 원정이었음. 독일의 콘라드 3세(Conrad III)와 프랑스의 루이 3세(Conrad III)가 지휘했다. 독일군은 아나톨리아를 건너는 과정에서 거의 완전히 전멸당했으며, 루이 3세의 경우 투르크군과의 조우 이후 휘하 부대를 분산시켰다. 루이 3세와 그의 기병들은 해로를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간 반면, 보병들은 단독으로 육상 이동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보병들은 성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전멸당한다. 콘라드와 루이가 이끄는 잔여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의 볼드윈 3세(Baldwin III of Jerusalem)의 다마스커스 공략에 참가하였다. 제 2차 십자군의 실패는 아나톨리아를 통한 지상 통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것이다.

 

(1148년, 다마스커스 공성전을 결정하기 위하여 아크레의 생 장(Saint-Jean of Acre)에서 회합을 갖는 십자군들. 프랑스왕 루이 7세, 독일 황제 콘라드 2세, 예루살렘 왕 볼드윈 3세 및 왕비 멜리센드(Queen Mélisende)가 참석했다.[8])

 

 

Rickard, J. (24 March 2001), Second Crusade, 1147-1149,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2nd.html

 



람레 전투, 1177 (Battle of Ramleh, 25 November 1177)

 

 

 살라딘의 예루살렘 및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초기 공세 시도들을 분쇄한 전투.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는 엉망이었으며, 십자군들 스스로도 다수가 북쪽으로 원정가있는 상태였다. 11월 18일, 살라딘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해안가를 따라 질주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s)은 가자를 방어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이들을 무시하고 행군을 지속하였다. 예루살렘의 볼드윈 4세 국왕(King Baldwin IV of Jerusalem)은 5백명의 소규모 군대를 소집하여 살라딘에 앞서 아스칼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라딘은 이번에도 소수 병력을 남겨 아스칼론의 볼드윈 부대를 고착시켜둔 뒤, 십자군들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때 살라딘은 그의 생애에서 희귀한 실수를 하게 된다. 그와 예루살렘 사이에 이제 더이상 십자군 군대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살라딘은 휘하 병력들이 긴장을 풀고 분산된 채 행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볼드윈은 가자에 있는 템플기사단에게 전령을 보내는 데 성공하였고, 이들이 아스칼론의 왕에게 합류한다. 이들 부대는 살라딘의 견제부대를 격파하고 살라딘을 따라잡기 위해 질주한다. 십자군들은 살라딘의 주력 부대가 람레 부근의 한 계곡을 건너는 과정에서 살라딘 군을 따라잡는다. 이 공격은 완벽한 기습이었다. 살라딘 군대 대다수가 공격을 맞아 도주하였고, 살라딘 스스로도 맘루크 호위대의 도움을 받아 구조되었다. 살라딘은 이집트로 도주한다. 휘하 부대 중에서 십자군들과 맞서 싸웠던 병력들은 전멸당하였고, 살아남은 자들도 이집트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시나이 반도의 베두인들의 괴롭힘을 당했다.

 

 잠시 동안 살라딘의 제국은 이집트 쪽이나 다마스커스 쪽 모두 공격에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이 기회를 살릴 입장이 되지 못했으며, 이 전투의 유일한 성과는 십자군 왕국에 10년간의 수명을 더 제공하였다는 정도였다.

 

Rickard, J (12 December 2001), Battle of Ramleh, 25 November 117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ramleh.html

 

(예루살렘 국왕 볼드윈 4세와 술탄 살라딘간에 아스칼론 부근에서 벌어진 1177년의 몽기사르 전투(Battle of Montgisard) [8])

 

 

(※ 위키피디아 및 다른 문헌들에는 1177년의 이 전투를 Battle of Montgisard로 기술하고 있음. 역자주.)

 



하틴 전투, 1187(Battle of Hattin, 4 July 1187)

 

 

예루살렘 왕국의 혼란

 

 하틴 전투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벌어진 가장 큰 재앙이었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의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하틴 전투가 벌어지게 된 전역은 십자군들이 당면했던 최초의 대규모 침공은 아니었으나, 당시 십자군들은 내부에 심각한 분열이 있던 상태였다. 응집성을 저해했던 요소로는 아직 유아였던 볼드윈 5세를 들 수 있다. 게다가 1186년 8월 말, 당시 겨우 9살이었던 볼드윈 5세가 사망하면서 왕국에 크나큰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선왕이었던 볼드윈 4세는 트리폴리의 레이몬드(Raymond of Tripoli)를 섭정으로 임명하였었는데, 귀족들은 만약 새 왕이 어려서 죽게 될 경우, 교황과 프랑스 왕, 영국 왕, 독일 황제가 후계자에 대하여 상의할 때까지 레이몬드가 계속 섭정직을 유지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들은 볼드윈 4세의 누이이자 볼드윈 5세의 어머니인 시빌라(Sibylla)와 아말릭 1세(1174년 사망)의 딸이었던 이사벨라(Isabella)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빌라파는 레이몬드로 하여금 티베리아스로 여행가도록 책략을 꾸몄고, 공식적으로는 왕국의 귀족들을 소환하여 볼드윈 4세의 유지를 받들도록 하는 것으로 하였다. 일단 레이몬드가 사라지자 이들은 주요 항구들을 장악한다. 왕국은 둘로 나뉘어진다. 시빌라는 대중에 별로 인기가 없던 남편 루지냥의 가이(Guy of Lusignan)와 함께 예루살렘을 장악하였고, 레이몬드와 그의 동맹자들은 나블루스를 근거지로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시빌라는 여왕에 즉위하였으며, 그녀는 가이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나블루스에서는 귀족들이 이사벨라 공주와 그의 남편인 토론의 험프리(Humphrey of Toron)를 즉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험프리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도주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가이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은 붕괴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귀족들 중 하나였던 이블린의 볼드윈(Baldwin of Ibelin)이 왕국을 저버리게 되었고, 레이몬드는 가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갈릴리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옮겨갔던 것이다.

 

(살라딘 제국의 판도[10])


샤티용의 레이날드(Reynald of Chatillon)

 

 살라딘의 최종 침공을 불러온 것은 샤티용의 레이날드가 벌인 일들 때문이다. 레이날드는 제 2차 십자군 당시 처음 성지에 도착하였으며, 동방에 눌러앉아 부를 얻고자 결심하였다. 그가 벌인 일들은 십자군 왕국들이 처했던 주요 문제들 중 하나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 성립된 십자군 귀족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주변 무슬림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방으로부터 새로운 십자군들을 계속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고, 이들 새 십자군들은 주변의 무슬림 이교도들과 별로 평화롭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레이날드는 동방에서 다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었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 왕국 남동쪽 변경에 있는 올트레주데인(Oultrejourdain)의 영주가 된지 10여년이 지난 상태였다. 케락에 있는 그의 기지로부터 그는 살라딘과의 협정을 반복적으로 위반하며 무역 대상들을 습격하였고, 한번은 홍해로 해상 습격을 펼쳐 메디나와 메카 항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폭란은 살라딘을 분노케 하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성공적이지 못한 침공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이제 1186년 말에 이르렀을 때, 왕국은 질서를 되찾기 위해서는 당분간 평화로운 기간이 절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레이날드는 또다른 폭란을 일으킨다. 카이로에서부터 출발하여 북상하던 대규모 대상 행렬이 조약의 보호를 받아 프랑크인들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레이날드는 이들을 공격하여 경호대를 살해하고 상품들을 탈취하였으며, 상인들을 인질로 삼았다. 살라딘은 초기에 조약 조건 내에서 행동하고자 시도하였으며, 레이날드에게 대사를 보내 인질과 상품들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레이날드가 거부하자 다시 왕에게 대사를 보낸다. 왕은 대사의 말을 경청하고 이들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왕은 권력을 위해 레이날드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의 주요 동맹이었던 레이날드를 공격해야하는 위험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대사들은 만족하지 못한 채 돌아갔고, 전쟁은 이제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전쟁 준비

 

 일단 전쟁이 임박했음이 명확해지면서, 십자군 국가 내의 약점과 불화가 명백하게 들어나기 시작햇다. 안티오크의 보에몽(Bohemond of Antioch)은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휴전 협정을 재확인하였으며, 트리폴리의 레이몬드(Raymond of Tripoli)는 서둘러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특히 이 휴전 협정은 그의 아내의 영지인 갈릴리 공령(principality of Galilee)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고, 이곳은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였다. 이러한 분열의 실제적 효과는 4월에 나타나게 된다. 가이 왕은 살라딘이 침공을 개시하기 전에 모든 저항세력들을 일소하고자 하는 의도로, 모든 동맹자들을 소집하여 갈릴리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살라딘의 아들은 팔레스타인에 무장 정찰을 실시하기로 결심하였다. 휴전 협정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살라딘의 아들은 레이몬드에게 사절을 보내 자유 통행을 요청했다. 대단히 당황스럽긴 했지만 레이몬드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일, 7천명 규모의 맘루크 기병대가 갈릴리로 진군했고, 이곳에서 일군의 템플기사단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템플기사단은 숫적으로 크게 열세였음에도 돌격을 감행했고, 그 결과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멸당하게 된다.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 레이몬드와 가이 간의 불화가 마침내 봉합되게 된다. 레이몬드는 살라딘과의 협정을 철회하게 되고, 가이에게 복종하게 된다. 가이는 레이몬드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혼란과는 달리, 살라딘은 주의깊게 군대를 모으고 있었고, 마침내 그 규모는 2만명에 달하게 된다. 이는 이제껏 그가 지휘했던 군대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비록 불화가 있긴 했지만 십자군들도 그와 거의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모으는 데 성공한다. 이 시점에서 재앙이 닥칠 것을 예상할 만한 요소는 전혀 없었다. 십자군들은 이제껏 전투의 위험을 피한 채 잘 준비된 진지를 지킴으로써 태양 아래 녹초가 된 적들을 여러차례 무찌른 바가 있었다. 4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며, 당시 살라딘은 전투 없이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라딘 요르단을 넘다

 

 7월 1일, 살라딘은 요르단을 통과한다. 그는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마을을 점령하고 성채를 포위하였다. 아크레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조언들에도 불구하고, 가이는 내륙의 티베리아스를 향해 진격하자는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 재앙을 피할 수는 있었다. 7월 2일, 십자군들은 세포리아(Sephoria)에 주둔하였는데, 이곳에는 훌륭한 물 공급원이 있었고 지형도 전투에 유리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이동할 것을 건의하는 가운데, 그의 아내가 티베리아스를 방어하고 있던 트리폴리의 레이몬드 스스로가 이동을 반대하였다. 즉, 살라딘은 안티오크로부터의 증원군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진지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회의가 끝났을 때, 그의 주장이 먹혀든 것 같았다. 십자군들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가이는 쉽게 설득당하는 사람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난 뒤 템플기사단장(Grand Master of the Temple)이 가이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십자군은 살라딘의 전초부대(skirmishers)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면서 물한방울 없는 황량한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을 실시한다. 십자군들은 곧 갈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오후 한가운데가 되어 십자군들은 하틴의 뿔(horns of Hattin)이라는 곳에 도착하였고, 병력들은 전투를 실시하기에는 지나치게 목마름에 빠져 있었다. 사실 이들이 다음 숙영지로 삼은 곳에는 우물이 있었으며, 이곳을 숙영지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우물은 말라있었다. 살라딘 군대가 물이 풍부한 계곡에서 밤을 보내는 동안, 십자군들은 건조한 고지 정상에서 비참한 밤을 보내야 했다.

 

(하틴 전투 배치도[10])

 

전투의 성립

 

 이제 전투 자체의 결과는 이미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7월 4일 새벽, 십자군들은 자신들이 고지 정상에서 포위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러한 기동은 살라딘 측의 실책으로 간주될 상황이었다. 우선 십자군 군대의 규모가 살라딘 군대와 비슷했고, 따라서 약화된 살라딘 포위망의 한 곳을 타격하여 쉽게 구멍을 낼 수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물 없이 하루 낮과 밤을 지낸 십자군들은 응집성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상태였다. 보병들은 군에서 벗어나 결사적으로 물을 찾아다녔지만, 실패하고 곧 분쇄당하였다. 이제 십자군의 기치는 무너지게 된다. 포위당한 기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점차 고지 정상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트리폴리의 레이몬드가 실시한 돌격은 살라딘군이 그저 길을 열어 이들을 통과시킴으로써 아무런 목적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전장 밖으로 나간 이들은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며, 트리폴리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지에 남겨진 이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웠으나 결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살라딘의 승리는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가이 왕을 사로잡았고, 그 외 샤티용의 레이날드를 비롯한 왕국의 대부분 대 귀족들을 사로잡았으며, 예수의 십자가(Holy Cross) 역시 탈취하였다. 포로들은 샤티용의 레이날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잘 대접받았다. 레이날드의 멍청한 습격들로 말미암아 이러한 패전을 불러일으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살라딘은 모든 증오심을 담아 친히 레이날드를 참수하였다.


 이후의 영향

 

 하틴의 패배는 예루살렘 왕국의 실질적인 붕괴로 이어졌다. 왕을 손에 넣고 그의 군대도 격파한 살라딘은, 도시들을 하나 하나 점령해갔다. 티베리아스는 신속하게 항복하였으며, 7월 10일에는 아크레, 10월 2일에는 예루살렘이 항복하였다. 예외는 티레였는데, 강력한 요새 방어시설과 함께 휘하 군대의 사기가 낮은 탓에 살라딘은 공격을 포기하였다. 비록 새로운 십자국 왕국인 아크레 왕국이 100년 더 유지되긴 하였지만, 왕의 위대한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이었다.

 

 Rickard, J. (12 December 2001), Battle of Hattin, 4 July 1187,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hattin.html

 

 

(오늘날 하틴의 뿔. [11])

 

(오늘날 하틴의 뿔에서 아르벨 지역을 바라본 모습[9])

 

 


 

제 3차 십자군, 1189-1192 (Third Crusade, 1189-1192)

 

 

 제 3차 십자군은 1187년 예루살렘을 포함한 살라딘의 팔레스타인 재정복 사건 이후에 벌어진 십자군이다. 제 3차 십자군을 이끈 것은 독일 국왕 프레드릭 1세 바르바로사(Frederick I Barbarossa of Germany)와, 프랑스 국왕 필립 2세 아우구스투스(Philip II Augustus of France), 영국 국왕 리차드 1세 라이온하트 (Richard I the Lionheart of England)로서,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 왕국들을 이끌던 왕들이었다. 또한 이들 모두 숙련된 군사지도자였다. 다만 필립과 리차드는 십자군 시작 전부터 다소 불화가 있는 상태였다. 십자군들은 2개의 경로로 이동하였다. 바르바로사는 1189년 봄에 독일에서부터 출발하여 육로로 이동하였다. 그의 행군은 십자군 원정 전체에 걸쳐 가장 잘 조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아나톨리아 통과(1090년) 당시 1,2차 십자군 당시처럼 많은 피해를 입지 않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늦여름 무렵 프레드릭 1세가 익사함에 따라 독일군은 흩어지게 된다. 최초 독일을 떠난 3만명 중에서 단지 1000명만이 1190년 말 아크레에 도달하여 당시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아크레 공성전(1189-1191)에 참가하게 된다. 필립과 리차드는 둘다 해로로 이동하였고, 1190-1년의 겨울을 시실리에서 보내게 된다. 이곳에서 이들의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된다.

 

 1191년 봄이 되자 필립은 공성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곧바로 아크레로 항해한 반면, 리차드는 안전한 기지로 쓸 수 있는 사이프러스를 정복하기 위해 멈춰섰다. 리차드는 아크레에 도착한 1191년 6월 8일에 공성전의 지휘권을 장악한다. 아크레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7월 12일 항복함으로써 2년간의 공성전이 막을 내린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필립은 프랑스로 돌아갔고, 십자군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무시하고 리차드의 프랑스 영토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민다. 한편, 리차드는 이제 5만명 규모가 된 십자군을 통제하게 되었고, 8월에는 해안을 따라 전진하게 된다. 리차드는 대단히 잘 조직된 십자군을 만들어 내었고, 해안을 따라 천천히 행진하면서 살라딘으로 하여금 십자군을 각개격파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무산되게 하였다. 마침내 살라딘은 매복작전 (1191년 9월 7일, 아르수프 전투)을 벌이지만, 리차드는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예행연습을 해 둔 상태였다. 결국 매복작전이 벌어졌을 때 투르크인들이 질 수밖에 없었다. 살라딘은 두번 다시 리차드에 대한 직접 공격을 시도하지 않게 된다. 십자군들은 아스칼론(Ascalon)에서 겨울을 보내고, 1192년에는 예루살렘으로 행군한다. 그러나 살라딘은 청야 전략을 사용하였고, 물과 건초의 보급을 저지함으로써 리차드로 하여금 도시를 포위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리차드는 살라딘과 협정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는데, 이로써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특권을 갖게 되었다. 제 3차 십자군을 통하여 리차드와 살라딘 모두 그 명성이 높아지게 되는데, 살라딘은 최고의 이교도이자 명예로운 적으로서, 리차드는 최고의 장군이자 영웅적인 기사로 불리게 되었다.

 

Rickard, J. (24 March 2001), Third Crusade, 1189-1192,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3rd.html

 

(1191년 9월 14일, 술탄 살라딘의 군대를 맞아 사자심왕 리처드와 부르군디 공작 휴 3세가 참전한 아르수프 전투[8])

 



아크레 공성전, 1189-1191 (Siege of Acre, August 1189-12 July 1191)

 

 

공성전의 배경

 

 1187년은 십자군 왕국들에게는 안좋은 시기였다. 십자군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고, 동시에 살라딘은 무슬림 세계의 상당 부분을 통일하여 결국 십자군들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임에도 십자군들은 살라딘과의 휴전 협정을 준수하는 데에 실패하였고, 사라딘은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1187년 6월, 살라딘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예루살렘의 국왕이었던 루지냥의 가이(Guy of Lusignan)는 살라딘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군대를 소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지휘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으며, 십자군들은 하틴 전투(1187년 7월 4일)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맞게 된다. 가이는 사로잡히고 가장 유능했던 십자군 지도자였던 트리폴리의 레이몬드(Raymond of Tripoli)가 전투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 패배로 인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십자군 왕국의 거의 대부분이 종말을 맞게 된다. 살라딘은 수비대를 소진한 대부분의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며, 티베리아스, 아크레, 아스칼론 등이 살라딘 손에 떨어진다. 단지 티레(Tyre)만이 강력한 방어시설과 몬페라토의 콘라드(Conrad of Montferrat)가 이끌고 온 구원병에 힘입어 살라딘을 격퇴한다. 살라딘은 티레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고, 예루살렘은 1187년 10월 2일 항복한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유럽 전역을 놀라게 만들었고, 곧장 제 3차 십자군을 조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티레 시의 방어시설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으며, 도시로 통하는 유일한 육상 통로는 일련의 성벽으로 방어되는 좁은 지협 뿐이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살라딘은 보다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티레를 함락시키러 돌아왔고, 공성장비와 함대들을 대동하였다. 그러나 공성장비들은 티레를 공격하는 데에 부족함이 밝혀졌고, 함대 역시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격파당한다. 살라딘은 십자군들에게 증원병력이 도착할 수 있는 항구를 남겨준 채 퇴각하였고, 이후 크락 데 슈발리에(Krak des Chevaliers) 요새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그들 스스로가 내부에서 반목 상태에 있었다. 루지냥의 가이는 살라딘에게 다시는 그에게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풀려났는데, 곧장 사제를 찾아가 이 서약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한편, 콘라드는 가이에게 티레의 지배권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살라딘은 1189년 3월 전까지는 북부 시리아에 있는 십자군 요새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공성전의 시작

 

 십자군 증원부대가 티레에 천천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1188년 초에는 2백명의 시실리 기사들이 도착했으며, 1189년 4월에는 피사로부터의 원정대가 합류했다. 이들은 곧 콘라드와 마찰을 빚게 되고, 가이의 지도권을 인정하게 된다. 이들은 티레 외곽에 주둔한다. 이러한 증원군에 자신감을 얻은 가이는 수도를 탈환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결심하게 되며, 8월 말에는 아크레로 진군하게 된다. 이 원정은 완벽한 재앙이었다. 아크레 수비대는 가이의 군대의 2배에 달했으며, 살라딘과 그의 주력부대 역시 이 지역에 있었다. 질병 및 주변의 신중한 조언들로 인하여 살라딘은 공격을 자제하였으며, 가이가 아크레에 1189년 8월 28일 도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아크레는 십자군 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의 왕이 좋아하는 거주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서쪽과 남쪽은 바다, 북쪽과 동쪽은 성벽으로 이뤄진 강력한 방어설비가 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살라딘 역시 이 도시 점령 이후 여러 차례 방문한 바가 있으며, 수비대를 두고 보급을 실시했다. 가이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도착한지 3일만에 직접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증원군의 도착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가 아크레에 도달하기 전에 공격하지 않은 것이 살라딘의 큰 실책이었음이 분명해지게 된다. 예루살렘 함락에 자극받아 이뤄진 새로운 십자군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가이의 아크레 공성전은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9월 초에는 덴마크 함대가 도착하여 해상 봉쇄에 기여했고, 플랑드르와 프랑스인 분견대가 도착했다. 9월 말에는 독일인 분견대도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소규모 병력들이었고, 십자군 주력은 1191년이 되어서야 도착한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도 살라딘을 놀라게 하는 데에 충분했고, 살라딘은 9월 15일 가이의 숙영지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 공격 자체는 실패하긴 했지만, 아크레 수비대와 연락을 취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이 공격이 있은 직후, 가이는 몽페라트의 콘라드와 일종의 휴전을 맺게 되었고, 그가 가이에게 복종하지는 않는다는 조건 하에 가세하면서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증원을 통하여 십자군들은 살라딘의 주둔지에 공세를 펼치기로(10월 4일) 결심한다. 무슬림 군대 내에서는 혼란이 벌어졌고, 십자군들은 거의 대승을 거두기 직전까지 이른다. 우익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의 조카 타키(Taki)는 위장 후퇴를 실시함으로써 템플기사단(Templers)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살라딘 역시 이 후퇴에 현혹되어 중앙 병력을 조카를 돕기 위해 전환시켰다. 살라딘의 우익과 중앙이 붕괴되었으며, 십자군은 추격을 감행했다. 살라딘은 나머지 좌익을 통해 반격을 실시하였고, 이로써 십자군들은 그들의 요새화된 숙영지로 퇴각했다. 이 전투는 살라딘의 승리였지만 공성전을 벌이는 십자군들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교착상태

 

 양측 모두 계속 증원군이 도착했으며, 십자군들은 지상에서의 공성전을 완료할 수 있게 된 반면, 살라딘 역시도 십자군들을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해상에서는 살라딘 측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최초 10월의 돌파를 시작으로 1189년 12월 26일, 이집트 함대가 포위된 도시와의 통신을 재개통하였다. 겨울 내내 그다지 큰 충돌 없이 지나갔지만, 십자군들의 보급 상황은 3월 콘라드가 티레에 가서 보급품을 가져올 때까지 좋지 않았다. 양측 모두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고, 1190년의 주요 사건이라고는 예루살렘의 왕비 시빌라(Queen Sibylla of Jerusalem)가 죽었던 일 정도이다. 그녀를 통해서 가이는 왕위를 주장했었다. 이제 십자군 귀족들은 콘라드를 왕으로 인정하고 싶어했고, 티레의 콘라드와 아크레 외곽 진지의 가이 간의 왕권 다툼으로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열의 상황은 이제 절망적인 상황으로 흘러갔다. 1191년 초, 이미 십자군 진영 내에 굶주림과 질병이 만연한 탓으로 살라딘은 굳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사자심왕 리차드

 

 1191년 3월, 아크레 밖에서 최초의 식량 수송선이 도착한다. 식량 외에도 환영할만한 소식은 영국의 리차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립 2세가 드디어 동방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1191년 4월 20일 필립이 아크레에 먼저 도착하였고, 8주 뒤인 6월 8일 리차드가 도착하였다. 리차드에게는 일종의 행운이 작용했다. 필립은 공성장비를 만들고 성벽을 타격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지만, 결정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리차드가 갖고있는 일종의 군사적 배경과 군사들을 선도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심각한 병세에도 불구하고 리차드는 금방 십자군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다만 도시를 함락시키려는 모든 공세들은 살라딘군의 반격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새로 도착한 십자군 함대가 제해권을 되찾았고, 아크레 수비대는 항복 직전에 몰리게 된다. 7월 4일 최초의 항복 권유는 거부되었지만, 그 다음날 살라딘의 공격이 실패하고 7월 11일 최종 전투와 함께 다시 항복 권유를 하자, 그 다음날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항복 조건은 명예로운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조항으로는 아크레에서 포로가 된 2700명의 사라센인들과 1600명의 기독교인 포로, 그리고 살라딘이 탈취한 예수의 십자가(true cross)를 교환하는 것이었다. 리차드의 명성은 공성전 이후의 행동으로 얼룩지게 된다. 아직 아크레에 도착하지 않은 일부 유명 기독교 포로들이 나타나지 않자, 리차드는 잡고 있던 사라센인 포로들을 처형하기 시작한다. 8월 20일, 사라센 포로들은 십자군들에게 학살당한다.

 

 아크레 재탈환은 십자군 왕국들의 생존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정복작전의 기세가 뒤바뀌었으며, 새로운 십자군 성공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곳이 새로운 십자군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상징적으로, 아크레는 이 사건 이후 100년 뒤인 1291년 최종 함락당할 당시 팔레스타인에 십자군이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보루였다. 

 

Rickard, J (12 November 2001), Siege of Acre, August 1189-12 July 119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cre.html

 

 



제 4차 십자군, 1202-1204(Fourth Crusade, 1202-1204)

 

 

 비잔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옆길로 샌 것으로 악명 높은 십자군 원정이다. 십자군은 85000 마르크와 정복을 통해 얻은 약탈품의 절반을 댓가로 베네치아 함대를 빌려 이집트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개입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된다. 비잔틴 황제 이삭 2세 앙겔루스(The Emperor Isaac II Angelus of Byzantium)는 10년간의 재위 기간 중 1195년 형제 알렉시우스 3세(Alexius III)에 의하여 퇴위 당한다. 알렉시우스 3세 치하에서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삭 2세의 아들 알렉시우스야말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가도록 결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202년, 십자군은 베니스에 도착하지만, 배삯을 낼 돈이 없는 상태였다. 일종의 협상이 있은 후, 십자군들은 통행료 대신으로 한때 베니스 소유였으나 지금은 헝가리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자라(Zara)시를 점령하기로 동의한다. 이 사건은 교황을 격분시켜 십자군 전원을 파문시키기에 이른다. 1202-3년 겨울 동안, 알렉시우스는 십자군들을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20만 마르크와 함께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간의 통합을 제안하였다. 6월 23일,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곧 기지를 설치하였다. 이 기지로부터 이들은 7월 17일 격렬한 공격을 실시하였다. 특히 95세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Doge Enrico Dandolo of Venice)가 도시 일부를 함락시키면서 사기가 오른다. 이날 밤 알렉시우스 3세가 도주하였고, 이삭 2세가 감옥에서 풀려나 복위되고 아들 - 이제 알렉시우스 4세 - 과 공통 통치를 하게 되었다. 만약 돈을 제대로 지불했더라면 이 일이 심각한 재앙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불할 돈은 없었고, 1204년 1월, 비잔틴 귀족들은 이삭을 폐위시켜 감옥으로 보내고, 알렉시우스 4세를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 알렉시우스 3세의 이복형제를 알렉시우스 5세로서 옹립하였다. 십자군은 도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고, 1204년 4월 11-13일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을 실시하였다. 도시 함락 이후, 3일간 약탈이 이뤄졌으며, 이후 짧은 기간동안 지속되는 라틴 제국(Latin Byzantine empire)이 성립된다. 나중에 그리스인들이 지배하는 비잔틴 제국이 재건되긴 하지만 두번 다시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는 못하게 된다. 결국 제 4차 십자군의 유일한 결과는 유럽의 투르크인들로부터의 유일한 방패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Rickard, J. (25 March 2001), Fourth Crusade, 1202-1204,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4th.html

 

 

(1201년, 몽페라트 후작 보니파스 2세가 수아송의 노틀담 대성당에서 여러 성직자들과 민중 앞에서 제 4차 십자군의 지휘자로 선포되는 장면. [8])

 

(베네치아-프랑크 십자군에 의해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가 쫓겨난 뒤인 1204년 5월 16일, 플란드르 백작 보두앵 9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방 라틴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다. [8])

 



제 5차 십자군, 1218-1221 (Fifth Crusade, 1218-1221)

 

 

 목표 달성에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교황 특사였던 펠라기우스 추기경(Cardinal Pelagius)의 간섭으로 실패한 십자군 원정이다. 독일 황제 프레드릭 2세(Frederick II)는 십자군을 이끌 것을 약속하였지만, 실제로는 종군하지 않았고, 실제 십자군들이 성지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예루살렘 국왕 브리엔의 존(John of Brienne, king of Jerusalem)의 지휘를 받게 된다. 예루살렘 자체는 이 당시 이집트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십자군들의 계획은 이집트를 공격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을 내놓도록 압박하는 데에 있었다. 1218년 초, 십자군은 마침내 이동하여 다미에타에 상륙한다. 여기서 십자군들은 장차 미래의 술탄이자 당시 술탄의 아들이었던 말릭 알-카밀(Malik al-Kamil)이 이끄는 7만명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당시 십자군들의 2배 규모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다미에타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며, 1년 반이 지난 1219년 11월에 함락된다. 한편, 펠라기우스 추기경이 도착하는데, 프레드릭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지휘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군은 당시 증원되어 병력이 46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이집트인들이 협상에 나서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1221년 펠라기우스는 여름 더위와 나일강의 범람을 뚫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할 것을 결심한다. 십자군은 1221년 7월 만수라(Mansura) 부근에서 아슈문 수로에 의해 길이 막힌다. 이 시점에서 십자군은 원래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맞는다 - 이집트인들이 다미에타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다른 기독교 지역들을 넘겨줄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브리엥의 존을 당황시키며 더 많은 영토를 요구했고, 협상은 지연되어 마침내 실패로 돌아간다. 이집트인들은 이제 십자군들의 다미에타로부터의 보급선을 차단하려는 기동을 하였고, 아슈문 수로를 돌파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돌려받는 대신 이집트측의 협상 요구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다미에타를 반환하고 무사히 해안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대신, 무슬림 이집트인들에게는 별 가치가 없었던 몇몇 성물들을 돌려받는 것으로 끝마치게 되었다.

 

Rickard, J. (25 March 2001), Fifth Crusade, 1218-1221,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wars_crusade5th.html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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