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장미전쟁

[스크랩] [번역] 장미전쟁 보스워스 전투 전장에 대한 발굴 이야기, 2011 - Armchairgeneral.com

박용수 2014. 10. 27. 16:49

< 원문출처: (http://www.armchairgeneral.com/battle-of-bosworth-field-was-fought-here-or-over-there.htm) >

 

 


Battle of Bosworth Field Was Fought Here – Or Over There

 

저자: Steve Wright

 

 

(에이브러햄 쿠퍼 작 "Bosworth Field"에 묘사된 리차드 3세와 헨리 튜더의 모습. 원본은 달라스 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요크의 리차드가 전투에 나섰으나 패배하다(Richard Of York Gave Battle In Vain)" 라는 문장은 영국 어린이들이 무지개 색깔을 외우는 용도로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또한 영국 왕위를 참칭하여 리처드 3세 국왕이 되었던 요크 공작 리차드(Richard Duke of York)의 죽음에 대해서도 외우게 하는 용도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차드 3세(Richard III)는 필자가 고등학교 때 했던 연극이기도 하며, 필자의 역사수업도 리차드 3세가 운명을 달리한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전투는 1485년 8월 22일, 영국의 한 군(county)인 레이체스터셔(Leicestershire)에서 벌어진다. 양편은 각각 리차드와 헨리 튜더의 세력이었으며, 후자의 경우 랭카스터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전투는 영국 국왕(king of England)이 사망한 전투로서는 마지막 전투이며, 또한 장미전쟁에 있어서는 마지막에서 2번째 전투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학자들은 양측 군대의 규모나 사상자의 수, 그리고 실제 전투장소가 어디인지 등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2006년, 실제 전투장소 문제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시도로, 레이체스터셔 군의회(County Council)에서는 전장 고고학자인 글렌 포드 박사(Dr. Glenn Foard)를 고용하여 조사를 맡긴다. 이 조사비용은 2백만달러(130만 파운드)가 넘게 들었으며, 2009년 말에야 종결되었다 - 하지만 이를 통해 나타난 발견은 놀라운 것이었다.

 

 포드 박사와 휘하 팀원들은 대단히 희박한 문헌 증거들을 바탕으로 전장의 지형상태를 재구성하였으며, 또한 지역 지명들의 변천사에 대해서도 추적해 나갔다. 문화담당기자 벤 호일(Arts Correspondent Ben Hoyle)은 2009년 10월 29일 런던 선데이 타임즈에 이를 소개한다. 이들은 늪지대의 흔적을 수색하였는데, 이 늪지대는 이 전투 당시 전술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이들은 토양과 토탄 침전물 등을 분석하였으며, 최신 지질조사기법들과 금속탐지 기법등을 사용하여 약 2평방마일(5평방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지역을 뒤졌다. 끈질긴 현장 답사와 치밀한 구획별 조사 끝에 조사팀은 "노다지(pay dirt)"에 맞닥뜨리게 된다.

 

 과거 실제 전쟁터라고 믿어지고 있던 곳에서 2마일 떨어진 장소에서 조사팀은 늪지대의 흔적을 발견한다; 또한 그 옆에서 조사팀은 멧돼지(boar) 모양을 띈 작은 뱃지를 발견하는데, 이는 리차드 3세의 상징이었다. 리차드 3세는 이러한 뱃지를 대량으로 만들어 지지자들에게 제공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한 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는데, 이 뱃지는 은세공이 되어 있었고, 따라서 왕이 최후의 결사적인 기병돌격을 감행했을 당시 그 옆에서 호위하던 기사가 달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발굴작업이 계속되었고,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납탄환(lead round-shot)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15세기나 16세기의 다른 유럽 전장들에서 나온 납탄환들보다 더 많은 납탄환들이 발굴되었다. 탄환의 크기는 다양했는데, 머스켓 탄환 크기에서 15.5파운드(7.2킬로그램)의 포탄 크기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증거들은 15세기의 화기 사용에 관련하여 현재 군사사 학계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중세포병 전문가인 스티브 월튼은, "(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포병이 기동성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가 1494-95년 시기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번 발견은 당대 유럽 전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 시사점을 던져준 셈이다.

 

 2010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글렌 포드의 조사팀은 이에 관심있는 여러 사람들과 합동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 발견물이 출토된 땅주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이 발굴이 확대되기 위한 더 많은 자금투자를 바라고 있다. 대학 역사학 및 고고학 부서들에서는 이 발견에 열광하고 있으며, 포드 박사는 순회 강연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자, 이 고고학 발견에 있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금 시점에서도 2011년 이스터 무렵에 야외 전시가 계획되고 있으며, 또한 5월에도 새로운 작업이 계획되고 있다.

 

 아래에는 이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나온 탄환 및 멧돼지 뱃지 등에 대해 소개한 비디오를 첨부한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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