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망각의 철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철도의 쇠락사, 2002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박용수 2014. 10. 27. 17:06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gabel6.pdf) >

 

 


 

망각의 철도: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철도의 쇠락사

(Rails to Oblivion: The Decline of Confederate Railroads in the Civil War)

 

 

 

저자: 크리스토퍼 R. 가벨 박사 (Dr. Christopher R. Gabel)

 

 

 

 

 

 


추천의 글 (Foreword)

 

 군사전문가들은 항상 군사작전에는 병참문제가 핵심이란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소책자는 크리스토퍼 R. 가벨 박사 본인이 저술한 "철도전략(Railroad Generalship)" 논문의 자매논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철도전략"에서는 반대쪽의 시각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바가 있다. "망각의 철도(Rails to Oblivion)"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나 용감한 병사라 할지라도, 보급체계를 경시하고 쇠퇴하도록 놔 둘 경우 장기적으로는 그 효과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금속피로(metal fatigue), 기계적 마찰(mechanical friction), 민간 사업장에서의 사고 등등의 지루한 요소들이 누적되어 합해지면 전쟁의 결과에 엄청나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나 사상이 종이 위에서는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군인들은 반드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죽어야 한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복잡한 사업이다. 이 소책자에서는 이러한 전쟁의 단면들 중에서 장교들이 종종 간과하는 사항들 중 일부를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제리 모렐록 대령(COL Jerry Morelock)이 "철도전략"의 추천의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러한 단면들이야말로 어느 편이 이기고 어느 편이 지는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2002년 9월,
로윈 C. 에드워드(LAWYN C. EDWARDS), 대령, 육군항공
전투연구소장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출판부(CGSC Press)에서는 다양한 군사사학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판물들에서 제시된 견해들은 단지 각각의 저자들의 견해이며, 미 육군성이나 미 국방부의 견해와는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본문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을 다룬는 일반적인 역사책에는 통상적으로 분리독립 당시 북부와 남부의 자원들에 대하여 비교하는 일련의 통계들을 싣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통계들이 원문자료에 따라서 내용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공통적으로 북부가 남부에 비해 인구, 공업능력, 부의 정도, 철도 부문에 있어서 압도적인 강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독자라면, 이러한 통계를 통해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ds of America)이 시작부터 망할 운명이었으며, 남북전쟁의 결과는 첫번째 총성이 터지기도 전에 이미 결판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좀 더 주의 깊은 독자인 경우라도, 이러한 자원상의 차이야말로 남부연합이 패배한 원인이라고 결론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은 실제 남북전쟁이 피비린내나는 4년이나 되는 기간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 흔히 말하는 "총력전"("total" war) 양상을 띄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만약 남부연합의 자원 열세가 통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토록 남부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면, 이 전쟁은 4년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에 종결되었어야 맞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 자원비교에 있어서 철도 또한 자주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통계들을 살펴보면, 분리독립 당시 기준으로, 남부연합은 북부연방에 비하여 철도길이가 단지 1/3에 불과하며, 화물차의 경우 1/3, 기관차의 경우에는 1/5, 철도 종사자의 경우에는 1/5, 철로 생산량에 있어서는 1/8, 전신국 숫자에 있어서 1/10, 총 기관차 생산량에 있어서는 1/24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이 과연 남부연합에 심대한 불리함(crippling disadvantage)을 안겨준 것일까요? 사실은 그 반대로, 남부의 철도망은 남부연합이 이번 남북전쟁(the war)을 이기는 데 충분할 정도였으며, 어쩌면 어떠한 전쟁(a war)에서라도 승리하기 충분한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펴볼 수록 더욱 명확해 질 것입니다.

 

 사실, 분리독립 이전의 미국 남부지역의 철도망은 엄청난 크기의 체계였으며, 또한 급속한 속도로 확장 중에 있었습니다. 1850년대 기간 동안 남부 철도망은 4배로 확장되었으며, 숫자상으로 7000 마일이 증가하였습니다. 비록 남부주들에 속해있던 철도 길이(rail mileage)가 남북 전체 철도의 1/3에 불과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남부주들에 속해 있던 인구의 규모도 전체의 40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인구 1인당 철도서비스의 수준은 북부에 비해서 그리 불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표 1 참조). 게다가 다른 외국들과 비교해 볼 경우, 신생 남부연합은 국내 총 철도길이에 있어서 세계 3위 - 1,2위는 북부연합 및 영국 - 를 차지할 정도였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표 2 참조)

 

(표1. 1860년 경 미국의 지역별 철도 길이)

 

(표 2. 1860년 경 각국별 철도길이의 비교)

 

 좀 더 살펴보면, 남부인들은 전반적으로 철도 및 이의 확장에 대하여 열성적인 지지자들이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남부인들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주정부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철도에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버지니아 주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경우에는 각각의 주 내 철도들의 주식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조지아 주의 경우에는 아예 주요 철도를 직접 보유하였습니다. 다른 남부 주들의 경우에도 자기 주 영내의 철도들에 대하여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주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남부 대부분 지역에 있어서 철도야말로 공공 및 개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남부연합은 출범 시점에서부터 철도라는 측면의 큰 자산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남부연합의 철도망이 군사적 용도로 충분히 활용되기에는 몇가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문제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을 지적하자면, 먼저 남부연합의 철도체계는 사실 여러 소규모 철도들의 집합체에 불과할 뿐, 진정한 "체계(system)"이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남부연합의 철도들의 경우 통상 짧은 지선(feeder lines)들로서, 농업지대와 항구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1 참조). 예컨대 사우스 캐롤라이나 철도(South Carolina Railroad)의 경우 1830년경 미국 최초의 정기 증기기관차를 통과시킨 철도인데, 건설 목적이 배후지의 농산물들을 찰스턴 시의 상인들을 위하여 운반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철도들은 통상 도시-도시 혹은 지역-지역으로서의 운송통로로 활용되기가 어려웠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이러한 철도들은 군사전략에서 요구하는 장거리 운송에는 그리 적합하게 되어있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가 철도가 아닌 남부의 항행가능 수로(navigable waterways)야말로 진정한 남부연합의 전국규모 운송시스템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리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지도 1. 1861년 경 남부연합의 주요 철도)

 

 그 결과, 철도들 사이에 물리적 연결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존재하였습니다. 1861년 당시, 리치먼드 시에는 6개 이상의 독립적인 철도들이 깔려있었음에도, 이들은 서로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지도 2 참조). 물리적으로는 연결된 경우라 할지라도, 한 철도에서 운영되는 기관차와 화차들이 다른 철도에서도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사항들이 전혀 없었던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한 철도선에서 다른 철도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객들과 화물들이 매번 환승 및 환적을 실시해야만 했습니다. 철도 주주들 - 통상 지역상인들과 지방정부, 주정부 등임 - 은 철도를 사람들과 화물들을 마을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보조수단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들은 운송 자체를 핵심사업이라고 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철도 한쪽 끝에서 다른 반대편으로 움직여 가는 교통량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도 2.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시: 6개의 철도가 있으나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 )

 

 1850년대가 되면, 좀 더 긴, 지역간을 이어주는 철도들이 남부에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아팔라치아 산맥 서부의 몇몇 남북철도들에서 뚜렷하게 보입니다 (지도 3 참조). 남부연합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들 철도들은 대부분의 군사작전들을 지원하기에는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남부연합에게 필요했던 것은 동서의 주요 전장들 사이를 잇는 철도였습니다. 이러한 의도를 가장 근접하게 충촉시키는 철도는 멤피스-테네시-버지니아를 잇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4개의 독립적인 철도라고 봐야 했습니다 (지도 4 참조). 이들 단락 중에서 가장 긴 부분의 경우 "멤피스 및 찰스턴 철도(Memphis and Charleston Railroad)"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멤피스에서 알라바마 주 스티븐슨까지만 철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지도 3. 1850년대 남부지역에서 건설된 주요 철도들)

 

(지도 4. 남부연합의 동서방향 철도 동맥선)

 

 철도간의 연계라거나 장거리 교통문제는 비단 남부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북부의 철도 역시도 대부분 항구들을 위한 지역 지선(local feeder lines)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다수의 철도들이 설치되어 있던 도시들 - 예컨대 필라델피아 - 을 살펴보면 철도간 연결이 없었던 것이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부 해안지역에서 미시시피 계곡지역으로 향하는 교통수요는 반드시 4개 이상의 철도망을 거쳐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북부연방에서는 지역민 주주들이 아직도 철도사업을 장악하고 있던 남부연합에 비하여, 소규모 철도들을 보다 큰 지역-지역의 간선철도로 통합하는 작업이 훨씬 많이 진척되었다는 점이 차이점이었습니다. 1861년이 되면 북부연방 지역에서는 적어도 4개 이상의 주요 동서 횡단철도가 애팔래치아 산맥지역을 관통하여 운영되게 됩니다.

 

 많은 남북전쟁 관련 서적에서 소개하고 있는 철도궤간 차이 문제는, 사실은 남부철도의 환적문제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흔히들 북부 철도들이 "표준 궤간(standard gauge)", 즉 4피트 8 1/2인치의 궤간을 쓰고 있었으며, 반면에 남부 철도들은 여러가지의 다양한 궤간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기관차와 화차들이 다른 철도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전쟁 시기에 있어서는 "표준" 궤간이라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표준" 궤간이 가장 많이 사용된 지역은 북동부 지역입니다. 오하이오 주와 인디애나 주의 철도는 통상 4피트 10인치의 궤간을 사용했습니다. 미주리 주의 철도는 5피트 6인치 궤간을 사용했습니다. 뉴욕 주의 이리 철도(Erie Railroad)의 경우에는 6피트의 궤간을 사용했습니다. 북부연방 지역의 철도에서만도 총 11개 종류의 궤간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남부연합 지역의 철도가 북부에 비하여 보다 궤간이 표준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부연합 지역의 철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궤간은 5피트 짜리었으며, 이는 테네시, 미주리, 루이지애나, 알라바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그리고 버지니아 주 일부 철도들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외 버지니아 주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철도들은 4피트 8 1/2인치 궤간을 사용했습니다.

 

 공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4피트 8 1/2인치 철도궤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우월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궤간의 차이가 열차 차량들이 다른 철도로 넘어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막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수한 5인치폭 바퀴를 달고 있는 철도차량의 경우 "표준" 궤간과 "오하이오" 궤간을 - 그리 안전하지는 않지만 - 모두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궤간 차이가 보다 큰 경우에는 기존 레일 사이에 제 3의 레일을 깔면 보다 좁은 궤간을 갖는 철도 차량도 통행하게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일부 차량들의 경우에는 차축을 따라 바퀴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졌으며, 이 경우에는 차량 스스로가 궤간에 맞게 적응이 가능했습니다. 한편으로, 차량칸만 바퀴부분에서 떼내어 들어올린 뒤, 다른 궤간에 올려져 있는 바퀴 세트로 옮겨 조립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아예 기존 철도의 궤간을 수정하여 재부설하는 것도 흔히들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1871년 당시,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도회사(Baltimore and Ohio railroad)에서는 신시내티에서 세인트루이스 동부를 잇는 340마일 길이의 기부설 철도선을 인수한 바가 있습니다. 이 신규구입한 철도는 6피트 궤간을 갖고 있었으며, 볼티모어에서 오하이오까지의 철로는 4피트 8 1/2인치 궤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부들이 340마일의 새 철도선을 표준궤간으로 전환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단지 8시간에 불과했습니다. 1886년의 경우에는 당시 아직까지도 5피트 궤간을 갖고 있던 모든 남부지역 철도들이 모두 표준궤간으로 재부설되었는데, 그에 소요된 시간은 단지 2일, 총 길이는 13000마일에 달했습니다.

 

 남부연합이 남북전쟁에 돌입할 당시, 궤간 문제만이 아닌 철도의 전반적인 환적 및 장거리 운송에 있어서의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체계로서 철도들을 서로 협력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달성 불가능한 목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중앙집권화된 조율이 필요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압도 필요하였습니다. 남부에서 이러한 통제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사실 남부연합 정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북부연방의 경우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62년에 미국 군사철도국(US Military Railroads)을 발족시켰고, 이는 전쟁성 내의 기구로서 북부 철도 전반에 대한 강제권한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남부연합 의회에서 남부연합 행정부에 이에 상당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1863년 5월이 되어서였습니다. 미국 군사철도국은 최종적으로 미국 북부에서 최대의 철도가 되었으며, 행정, 건설, 운영능력을 모두 보유하였습니다. 반면 남부연합의 군사철도기관의 경우에는 단지 남부연합 전쟁성 내의 소규모의 계약, 자문, 조율 부서 이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북부연방과 남부연합의 군사철도기관 사이에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을 들자면, 북부연방 측의 군사철도기관을 운영했던 사람들이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전문성과 권한 모두를 제대로 갖고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군사철도국(USMRR) 국장이었던 다니엘 C. 맥칼럼(Daniel C. McCallum)은 오랜 경험을 가진 철도인이자 철도 조직 분야에 있어서 선구자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War)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기회도 빈번하게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령으로 임관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준장 계급을 획득하게 됩니다. 맥칼럼은 무엇이 이뤄져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뒤에서 국방부 장관이 받쳐주는 상황에서, 그것을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권력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반대편을 살펴보기 위하여 남부연합 전쟁성의 제 1대 철도사무소(railroad office) 소장이었던 윌리엄 S. 애쉬(William S. Ashe)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는 1861년 7월부터 1862년 4월까지 이 직책에 종사하였습니다. 애쉬는 한때 윌밍턴 웰던 철도(Wilmington and Weldon Railroad)의 회장으로 일한 바 있기는 하지만, 실무적인 철도인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정치인 겸 사업가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정치적 신뢰성이야말로 그가 이 직책을 맡게 되는 데 있어서 전문성보다 더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공식 직책이 보조 병참감(Assistant Quartermaster General)이었으며,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War)과의 직접적인 대면권한은 갖지 못했습니다. 애쉬는 소령으로 임관하였는데, 이는 민간인들 사회에 대해서나 군인들 사회에 대해서나 충분한 영향력을 끼치기에는 너무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참모도 없었고, 철도에 대한 강제적 권한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애쉬는 남부연합의 철도들을 조율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애쉬가 자리를 떠난 뒤, 그 후임자를 채우는 데에는 7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어야 하였습니다.

 

 그 후임자였던 윌리엄 M. 와들리 (William M. Wadley)는 남부연합에서 가장 경험 많은 철도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와들리는 뉴 햄프셔 출생이긴 하지만 남부에서 오랜 기간 거주해왔습니다. 전쟁 전까지 와들리는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주의 철도에서 근무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가 임명되면서 전문성 측면의 향상이 있었고, 비록 대령이라는 계급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그가 발휘한 권한의 수준은 전임자의 경우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인하여 와들리 휘하의 철도사무소는 병참감(Quartermaster) 소속에서 부관감(Adjutant General's department) 소속으로 전환됩니다. 애쉬와 마찬가지로, 와들리 역시 남부연합 내의 철도들 간의 협력적 약속을 얻어내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조언과 권유 이상의 권한은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1863년 남부연합 의회가 정부에게 강제력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당시, 이 법안에서는 한편으로 와들리의 대령 계급 임관을 금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사실상의 권한을 잃게 된 와들리는 그해 6월 정부의 일을 그만 두게 됩니다.

 

 그 후임자는 프레드릭 W. 심즈(Frederick W. Sims)였으며, 1863년 6월부터 전쟁 종결시점까지 철도국(railroad bureau)의 수장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철도의 사업측면에 있어서는 약간의 경험이 있긴 했으며, 또한 와들리 밑에서 잠시 일한 경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도관련된 활동들 보다는 출판업과 자선사업 측면의 활동들로 인해 보다 더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중령 계급으로 임관한 심즈는 자신의 부서를 원래 속해 있던 병참감 휘하로 되돌려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정부에서는 그에게 남부연합 의회가 정부에 부여한 강제권한을 절대로 위임해 주지 않았지만, 심즈는 각종 권모술수에 있어 천재성을 보임으로써 앞서 2명의 전임자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이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심즈는 비록 전문성이나 권한 측면에 있어서는 그리 대단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필요한 경우 긴요한 군사적 교통소요를 조율할 능력을 보여주게 됩니다.

 

 앞서의 전임자들뿐만 아니라 심즈에게도 항상 당면하던 지속적인 한가지 문제점으로 군사적 교통소요에 대한 철도요금 문제를 들 수가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당시, 남부 철도회사들은 남부연합군 수송에 대하여 무료 수송을 약속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신속하게 사그러들었는데, 이는 어떠한 사업도 자신의 상품을 무료로 판매해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탓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애쉬, 와들리, 심즈는 정부의 수송소요에 대하여 가능한 한 최저가로 해결할 수 있도록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이들은 군사수송소요에 대한 요금을 민간수송소요에 대한 요금보다 낮게 책정하도록 협상하는데에 성공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철도회사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군사화물을 수송하는 것보다 민간화물을 수소하는 것이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전쟁 막바지로 가면 갈수록 철도회사들은 군사수송소요보다 민간수송소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남부연합 군대는 가격협상으로 할인된 요금을 지불한 대신에, 낮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받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남부연합의 사례와는 반대로, 북부연방 정부의 경우에는 오히려 다소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편을 택했습니다. 게다가 군사적인 필요성이 있는 경우엔, USMRR은 긴요한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데에 필요한 어떠한 철도선에 대해서도 징발하여 운영할 권리를 갖고 있었고 실제로도 징발하였습니다. 군의 징발위협과 군사수송소요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벌 수 있는 돈이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북부 철도회사들은 전쟁노력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자로 변하게 됩니다.

 

 북부 철도회사들이 남부 철도회사들이 남부연합의 전쟁노력을 지원한 것보다 보다 효율적으로 북부연방의 전쟁노력을 지원해줬다는 말은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남부연합이 자체 철도체계로부터 북부와 같은 높은 수준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남부연합의 경우 전략적 방어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병참측면에 있어서 대륙규모의 공세작전을 펼쳐야 했던 북부연방 군대에 비하여 훨씬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수준이 단순했습니다. 특히 철도 문제에 있어 보았을 때, USMRR이 투입한 노력의 거의 대부분은 노획철도에 대해서 투입되었지 북부지역 철도에 대해서는 거의 투입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군대가 북부 철도를 징발한 사례는 드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연방정부는 남부연합 정부가 남부 철도들을 다루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북부 철도 회사들과 협상하였으며, 다만 북부 철도회사들의 경우 협조하지 않을 경우 강압적 수단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전쟁 초기 2년간은 남부연합 철도회사들이 적절한 수준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협조가 불비하고 중앙통제가 불비함으로써 다양한 결함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 기간 동안 철도 지원의 부족으로 인하여 남부연합 군대가 패배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861-63년 기간은 남부연합 군사철도부문의 승리의 시기라고 불러도 될 지경입니다. 남북전쟁 최초의 대규모 전투라고 할 수 있는 1861년 7월의 제 1차 불런 전투(the First Battle of Bull Run) 당시, 철도로 수송된 남부연합 병력이야말로 남부연합이 승리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1년 뒤, 남부 철도는 전쟁 기간 전체에서 최대였던 군사 철도 기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는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이 지휘하던 군대가 미시시피 주 투펠로(Tupelo)에서 테네시 주 채터누가(Chattanooga)로 이동했던 사례였습니다 (지도 5 참조). 약 2주간에 걸친 기간 동안 3만명의 병사들이 776마일을 이동하여 켄터키 주 침공에 참가하였던 것입니다. 1863년 9월,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장(Lieutenant General James Longstreet)이 이끄는 12000명의 군단병력이 버지니아 주로부터 조지아 주 북부까지의 800마일을 이동하여 치카무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에 참가하였습니다 (지도 6 참조). 이 기동을 위하여 심즈는 14개의 독립된 철도회사들의 교통흐름을 조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만약 전쟁이 1863년에 종결되었다면, 역사가들은 남부연합의 철도야말로 남부연합이 승리한 결정적 요소라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지도 5. 브래그 장군의 부대가 투펠로에서 채터누가까지 이동한 철도이동 경로)

 

(지도 6. 롱스트리트 장군의 부대가 버지니아 주에서 치카무가까지 이동한 철도 이동로)

 

 그러나 남부연합의 철도 체계는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며, 역사가들은 철도의 실패야말로 남부연합이 패배한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치명적 오류는 사실은 시간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남부연합 철도가 버티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시간이 철도 체계를 망가뜨릴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마모와 파손(wear and tear)이라는 문제가 철로 자체로부터 기인되게 됩니다. 1860년대에 사용된 철로는 오늘날에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작은 것이었습니다 (삽화 1 참조). 철로의 크기는 1야드의 철로가 얼마나 무거운지로 측정됩니다. 오늘날의 철로는 120파운드급 혹은 그보다 무거운 것을 사용합니다. 1860년대에는 교통량이 많은 간선철도에서도 60파운드급 철로를 사용하였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철로는 강철(steel)이 아닌 일반철(iron)을 사용하였기에, 비록 남북전쟁 시기의 기관차와 화차가 오늘날의 것들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웠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철로가 오늘날보다 훨씬 빨리 마모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 시기의 기관차는 대략 30톤 중량인데 반하여, 오늘날의 디젤 기관차는 통상 134톤 이상이다. 1860년대의 화물차는 통상 각각 10톤 가량의 화물을 적재한 반면, 오늘날의 화물차는 100톤 가량을 적재한다. ) 교통량이 많은 노선의 경우 철로가 3년 가량이면 닳아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삽화 1. 과거와 현재의 철로간 비교. 좌측부터: 남북전쟁 시기의 U-철로; 30파운드급 철로이며 남북전쟁 시기 철로에서도 사용되었을 수 있음; 132파운드 급 현대식 철로. 132파운드 급 철로는 약 7 1/4인치의 높이를 지닌다. )

 

 남부연합 전쟁부에서는 단지 닳아버린 철로만을 교체하는 데에도 매년 49500톤의 새 철로가 필요하다고 추산하였습니다. 이는 467마일에 60파운드급 철로를 까는 것에 상당하는 양이였습니다. 1860년경, 남부연합의 제련소에서는 단지 26000톤의 철로만을 생산하였으며, 이는 기존의 철도선을 유지보수하는 데 필요한 양에도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전에는 남부에서는 대부분의 철로를 영국이나 북부로부터 수입해 왔습니다. 북부의 경우 매년 222000톤을 생산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의 철로는 당연히 수입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영국으로부터의 수입 역시도 끊기게 되는데, 부피가 크고 가치가 낮은 화물이었던 철로는 봉쇄선을 뚫고 수입해야 할 만한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국내 철로 생산량도 사실상 0으로 감소하게 되는데, 기존에 철로를 생산하던 공장들이 다른 물건들을 생산하도록 전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전쟁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남부 철도망이 전부 양호한 철로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점은 더욱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이미 오늘날 사용하는 "T-철로(T-rail)"가 널리 사용되고 있던 중이긴 했으나, 남부의 철로 상당수는 아직도 구식 "U-철로(U-rail)"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간혹 이보다도 구식인 "스트랩 철로(strap rail)", 일명 "플랫바(flatbar)"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레일 위에 얇은 철제 띠(야드당 16~22파운드의 중량)를 붙여놓은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림 1 참조.) 리치몬드 댄빌 철도(Richmond and Danvile Railroad)는 전쟁 중 남부의 중요한 철도 동맥 중의 하나였는데, 1861년 당시 47마일 가량의 구간이 스트랩 철로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1. 남부연합 철도에서 사용된 종류의 철로들.)

 

 1863년 무렵이 되면 남부 전역의 철로들이 마모되어버리게 되며, 한편으로 신규 철로 보유량은 거의 0에 가까운 상황이 됩니다. 철로 상태의 악화는 남부 철도시스템 전체에 걸쳐 2차, 3차의 효과를 확산시키게 됩니다. 철로가 마모되었기 때문에 열차들은 느린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운송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열차를 투입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철로 마모는 전체 철도 시스템에 있어서 기관차와 열차의 부족 현상을 야기시켰고, 한편으로 운송되는 화물의 양도 감소하게 됩니다.

 

 철로의 마모와 손상 문제, 구식의 스트랩 철로와 U-철로를 교체해야 하는 문제 외에도, 남부연합으로서는 자체 철로망을 확장시킬 철로가 남아있지 않다는 문제도 안고 있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북부는 대략 4천마일 길이의 철로를 추가시켰는데, 이는 사실 전쟁 전 기간 동안의 신규 건설속도보다는 훨씬 느린 것이었습니다. 반면 남부연합의 경우 기존 철도망 사이의 좁은 공간끼리를 잇는 것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지도 7 참조). 이러한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철로는 통상적으로 기존 다른 철도에서 동류전용(cannibalizing)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종종 해당 철도소유주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남부연합 정부는 교통량이 적은 철도의 철로를 징발하여 중요한 노선의 마모 철로를 교체하는 데에 사용하게 됩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주요 철도 도선들은 계속 개통상태를 유지하지만, 교통량이 낮은 시골 공급노선(feeder lines)들의 경우에는 사실상 축소되게 됩니다. 전쟁 막바지에 남부연합 도시들과 군부대들에 전반적인 식량부족 현상이 발생한 것도 아마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당시 남부연합에는 기존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이는 과거 면화를 생산하던 농장들이 이제는 식량작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산된 작물이 모두 운반되지 못한 것은 시골 철도노선들이 다른 곳으로 동류전용되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 7. 전쟁시기 남부연합에서 건설된 철도들)

 

 철도 위를 굴러가는 물건들도 역시 마모와 손상 문제를 겪어야 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기관차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규모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증기기관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기력 개념은 근본적으로 물이 증기로 변하면서 부피가 1600~ 1800배로 팽창한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림 2 참조). 이로 인한 팽창력이야말로 증기기관차에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림 2. 증기의 팽창력)

 

 증기기관차의 핵심 부품은 화로(firebox), 보일러(boiler), 피스톤(pistons)입니다 (삽화 2 및 그림 3 참조). 연료(1860년대에는 통상 나무였음)는 화로 내에서 타며, 보일러 안의 물을 가열합니다. 뜨거운 연소가스는 보일러 내부의 파이프들을 통과하며, 굴뚝(smokestack)을 통하여 기관차 밖으로 나갑니다. 가압된 보일러 내부의 물은 증기로 변하며, 이어 "텐더(tender)"라고 불리는 작은 열차로부터 뽑아진 물로써 보충이 이뤄집니다. 텐더는 기관차 뒤에 붙어있게 됩니다. 증기는 보일러 상부의 돔 안에 모이게 되며, 기관차 전방에 있는 실린더를 향해 가압된 상태로 파이프를 통해 이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일련의 밸브들이 증기를 피스톤 앞뒤로 교대로 뿜어주게 되며, 이로써 피스톤들을 앞뒤로 밀어주게 됩니다. 전후방으로의 움직임은 이어 일련의 막대(rod)들을 통하여 구동휠(drive wheel)로 전달됩니다. "편심"으로("eccentrics" (off-center hubs)) 휠들에 연결된 막대들은 전후방으로의 움직임을 원형의 움직임으로 전환시켜줌으로써, 철로 위의 기관차를 전진하게 만들게 됩니다.

 

(삽화 2. 남북전쟁 시기의 일반적인 기관차)

 

(그림 3. 증기기관차의 주요 구성품들)

 

 따라서 증기기관차의 작동에는 물, 열, 압력, 그리고 수많은 가동부품들간의 마찰을 수반하게 됩니다. 이들 모두는 철과는 상극입니다. 증기기관차가 매번 가동될 때마다 점차 파괴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증기기관차는 따라서 정기적 주기로 창정비(rebuilding)가 필요한데, 이 과정은 완벽한 분해 및 주요 구성품, 예컨대 화로와 염관(flues)(보일러 내로 뜨거운 가스를 전달해 주는 파이프) 등의 교체를 수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기관차는 몇년에 한번씩은 창정비를 해 줘야만 했습니다. 창정비 사이에도 타이어(tires)(구동축 위에 끼우는 특수하게 경화된 금속 밴드)같은 것은 종종 마모되면 교체해 줘야만 했습니다. 염관의 경우에는 정기적으로 청소해 줘야만 했습니다. 차체와 트럭의 볼트들은 다시 조여줄 필요가 있었고, 피스톤의 밸브기어들은 정기적으로 조정해 줘야만 했습니다. 통상적인 가동시의 통상 정비내용에는 구동 연결부에 대한 윤활제 도포나, 화로의 청소, 몇시간 만에 한번씩 보일러의 증기를 배출해주기("blowing down") 등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가족용 미니밴이 증기기관차 수준의 정비소요를 갖고 있다면, 차주는 연료와 윤활류 주입을 위하여 몇시간에 한번씩은 서야 할 것이며, 몇달에 한번씩은 타이어를 갈아줘야 하고, 2년에 한번씩은 엔진과 변속기를 완전히 교체해 줘야할 것입니다.


 남부연합에게 불행하게도, 남부 철도망에는 기관차 정비에 필요한 것들 - 예컨대 윤활유, 공작도구, 증기 게이지, 구리, 주석, 강철(타이어에 쓸), 심지어 줄(files)까지도 - 이 사실상 모두 다 부족했습니다. 일부 물자에 대해서는 대체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 한 철도회사에서는 기존에 윤활유로 사용했으나 독립 이후 입수가 불가능해진 고래기름 대신에 베이컨 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들은 전혀 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관차가 점차 손상되어감에 따라, 성능 역시도 악화되어 갔습니다. 속도는 줄어들었고, 따라서 동일한 운송량을 수송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기관차가 투입되어야 했으며, 이는 더욱 정비문제를 악화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신규 기관차를 도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관차 생산문제는 사실상 기관차 정비문제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관차를 창정비하는 설비들은 사실상 기관차를 제조할 수도 있는 설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전에 기관차를 생산하던 시설들은 버지니아주에는 리치몬드와 피터스버그, 조지아 주에는 아틀란타, 테네시 주에는 내쉬빌에 있었습니다. 리치몬드의 트레드거 철공소(Tredegar Iron Works)는 남부에서 가장 큰 기관차 생산시설이었으며, 1850년대에는 매년 최대 10여대씩을 생산하였습니다. 1860년에는 남부에 있는 시설들이 도합 19대의 기관차를 생산하였습니다. 이는 이해 북부에서 총 451대를 생산한 것과 비교한다면 보잘것 없는 것이며, 특히 북부 최대 시설인 필라델피아의 볼드윈 기관차공장(Baldwin Locomotive Works)에서만 생산한 83대와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전쟁 전, 그리고 전쟁 기간 중에서 남부에서 사용된 기관차의 거의 대부분은 북부에서 생산된 것들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남부의 기관차 생산량은 0으로 감소됩니다. 트레드거 철공소는 무기 생산에 집중하였으며, 다른 기관차 생산시설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 중에 노획한 소수의 기관차들을 제외한다면, 남부연합 철도는 전시 수송이라는 어려운 책임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 전쟁 시작 당시 갖고 있던 기관차만으로 수행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기관차들은 당연하게도, 전쟁이 지속되면서 망가져갑니다.

 

 1863년이 되면 기관차 정비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이해, 버지니아 테네시 철도회사(Virginia and Tennessee Railroad)에는 총 40대의 기관차가 명부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9대는 "쓸모없음"으로 분류되었고, 다른 9대는 "정비 대기중"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모 상황은 적군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마모 및 손상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관차라는 것이 표준화되지 않은 수작업으로 만든 제품이기 때문에, 버지니아 테네시 철도회사로서는, 한 기관차의 부품을 떼어 다른 기관차를 고치는 등의 활동은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열차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서 망가져갔습니다. 이 당시의 열차는 사실상 전적으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통상적으로 7~8년 가량의 수명을 갖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열차를 수리하려면 이것을 실제 운용에서 빼내야만 했고, 이는 전시 수송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남부연합에서 열차의 나무부분을 교체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주철로 된 휠 부분이나 단조철로 만든 액슬 부분을 만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철도에서의 휠은 사실 대단히 정교한 제품이었습니다. 철도 운송에서의 장점은 사실 접촉면, 다른말로 휠과 철로간의 실제 접촉면적이 매우 작음에 따라서 마찰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 4와 5 참조). 철도의 휠은 점감되는 형상(tapered)을 갖고 있는데, 이는 액슬 양편의 휠들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커브구간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휠에 조그마한 결함이 있더라도 열차는 속도가 줄어들며, 철로에 손상이 가며, 심한 경우 탈선하게 됩니다. 마모된 휠은, 철로와 기관차의 마모와 마찬가지로 열차 속도를 감소시키고 운송량을 감소시킵니다.

 

(그림 4. 철로 위에 올려진 휠의 모습)

 

(그림 5. 철로 위에 올려진 휠의 모습)

 남부연합에서는 사실 새로운 휠을 생산할 능력은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철도 체계가 황폐해져 감에 따라, 휠의 생산량도 감소하게 됩니다. 조지아 주 아우구스타(Augusta)에 있는 철공소들은 하루에 50개의 휠을 생산할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1863년이 되면 단지 하루에 15개만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최대 생산량을 유지할 만큼의 재료를 철도가 운반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휠의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원자재의 수송량도 감소하게 되며, 이는 다시금 휠의 생산량을 감소시켰던 것입다. 게다가 1861년 당시에는 열차용 휠의 원가가 15$였던 것이 전쟁 말기가 되면 500$에 육박하는데, 이는 철도부문 뿐만이 아닌 남부연합 경제 전반을 흔들어놓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에서 기인합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감소된 또다른 자산으로는 철도 요원들을 들 수가 있습니다. 1860년대의 철도 운영은 대단히 인력중심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열차는 대략 100톤의 화물을 운반하면서 5~7명의 승무원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화물열차의 경우에는 10000톤의 화물을 운반하는 데에 2명의 승무원만이 필요합니다.) 승무원에는 기관차를 운전하는 엔지니어 1명과, 화로에 연료를 공급하고 물의 수준과 증기 압력을 감시하는 화부(fireman) 1명, 그리고 열차 전체의 운영을 감독하는 차장(conductor) 1명이 포함됩니다. 기타 승무원으로는 브레이크맨(brakemen)이 있는데, 이들은 화차에서 화차로 옮겨다니며, 열차가 감속하거나 멈춰야 할 경우 수동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켰습니다. 철도에는 열차 승무원들 외에도, 철로 유지를 위한 궤도 요원(track crews)들도 필요로 하였습니다. 교통량이 많은 노선의 경우에는, 단지 유지보수를 위해서만 마일당 4~5명의 요원이 필요했습니다. 그 외의 추가 인원으로는, 역무원(station agents), 전신 조작수(telegraph operators), 스위치맨(switch-men) -  열차를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환시켜주는 수동 스위치 조작 -, 열차를 유지시키기 위한 전문기술자(craftsmen) 및 노동자들, 장부를 기록할 회계사 등등이 있었습니다.

 

 전쟁 시작 당시, 남부연합에는 약 16000명의 철도 종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즉각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북부 주들에서 온 일부 철도 종사자들은 분리독립 시점에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또한 일부 인원들은 군복무를 자원합니다. 어떤 인원들은 징병되기도 합니다. 1862년에 발효된 남부연합 징병법은 처음에는 철도 종사자들은 대상에서 제외하였지만, 징병 관리 중에서는 이를 무시한 사람들도 존재했습니다. 게다가 1862년 10월에 이 법이 개정되면서, 면제 대상 범위가 숙련공과 관리자로 좁아지게 됩니다. 1864년 개정시에는 면제 범위가 더욱 줄어듭니다. 다른 산업 - 예컨대 무기 산업 -과의 노동력 확보 경쟁이 격화되면서  숙련된 철도 노동자의 숫자는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남부 철도의 비숙련 노동의 경우 상당부분이 전통적으로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이들 노예들은 철도 자체에서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대농장주의 노예를 고용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노동력원도 감소하게 됩니다. 철도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 비하여 탈출하거나 북부연방군 습격대에 의해 해방될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따라서 노예 소유주들은 점차 자신들의 노예들을 이런 일에 투입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가중된 문제들을 빼더라도,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철도 노동자들의 소모도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1800년대의 철도일은 분명 위험한 사업이었습니다. 대략적 추산에 따르면, 이 기간 '매년마다' 2~4퍼센트의 철도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고의 1/3에서 1/2가량이 철도 화차들을 서로 이어주는 커플러(couplers)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너클(knuckle)" 커플러는 남북전쟁 시기에는 아직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너클 커플러는 화차들이 서로 밀게 되면 자동적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1860년대 무렵에는, 화차들이 링크-핀 체계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기술에서는 노동자가 화차 사이에 서서 (당연히 화차 한대는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손으로 링크를 유도하여 접근하는 화차의 포켓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포켓을 통해 핀을 떨어뜨려 넣어야 했습니다 (그림 6 참조). 말할 필요도 없이 사고가 빈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연하자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너클 커플러를 발명한 사람은 남부연합의 참전용사였던 엘리 H. 재니(Eli H. Janney)였습니다. )

 

(그림 6. 철도 커플링 체계)

 

 철도 산재를 당하는 보다 드라마틱하면서도 드문 사례는 보일러 폭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기관차 보일러 안의 물 온도는 화씨 212도를 초과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압 탓에 액체 상태로 존재합니다. 남북전쟁 시기의 기관차들은 평방인치당 140파운드 (140 psi)가량의 보일러 압력하에서 작동하였습니다. (20세기가 되면, 보일러 압력이 200 psi를 초과합니다.) 만약 보일러 안의 압력이 갑자기 빠지게 되면, 보일러 안의 모든 물들이 동시에 기체로 변하게 되고, 부피가 1600배 증가하게 되며, 마치 폭탄과 같은 폭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20세기에 발생했던 한 보일러 폭발사고에서는 150톤짜리 기관차가 공중 131피트까지 치솟았으며, 엔지니어가 즉사하였고, 화부는 206 피트까지 던져지게 됩니다 (화부도 나중에 죽습니다). 폭발력은 약 300만 psi 로 추산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일러 폭발의 가장 흔한 원인은 보일러 내의 낮은 수위에 있습니다 (그림 7 참조). 승무원이 방심하거나, 물 공급로가 막히거나, 또는 게이지가 고장난 경우 등의 원인으로 보일러 내의 수위가 낮아져서, 소위 말하는 "크라운시트(crownsheet)", 즉 화로의 상면부를 덮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습니다. 보일러 쪽에서 열을 뺏어갈 물이 없게 된 상황에서, 크라운시트는 점점 가열되며, 결국에는 약해지고 파손되게 됩니다. 이는 곧 보일러 안의 압력을 방출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비록 파열부가 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크게 발생하지 않더라도, 승무원실 내부로의 증기 유입은 승무원을 살상하거나 부상시키기에 충분한 겄입니다.

 

(그림 7. 보일러 폭발 원인 중 가장 흔한 것.)

 

 훈련 정도가 부족하거나 과로로 지친 철도 종사자라면 더욱 더 이런 산재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남부연합의 철도 노동력 부족 현상은, 더욱 더 사고율을 높이게 되고, 이는 다시 노동력 부족현상을 심화시켰으리라는 점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인력 부족 현상이 가장 심했던 부문은 사실 운영요원 부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심각했던 문제는 기관차 정비를 위한 "정비공(mechanics)" 및 기계가공원(machinists)의 부족 현상이었습니다. 남북전쟁 시기의 기관차들은 대량생산으로 만들어 진 제품이 아니었습니다. 한 부속품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은 종종 새 부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띄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정비공들은 자신의 기술을 마스터하기 전에 충분한 도제기간을 거친 숙련된 장인들이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시기, 남부연합은 이러한 숙련공들을 단지 소규모로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도제들을 숙련된 기계가공원 혹은 금속 노동자로 탈바꿈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철도산업은 무기산업과 이들 중요한 인력자원들을 대상으로 경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남부연합 철도에서의 정비공 부족은 또다른 악순환을 불러일으킵니다 - 숙련공 부족으로 정비가 연기됨에 따라 추후 더욱 심각한 문제점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전쟁 마지막 해가 되면, 철도가 적절한 수준의 보급을 해주지 못함에 따라 남부연합 군대는 굶주림을 겪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 캠프에서 굶주리며 앉아있는 수천명의 병사들은, 철도 노동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철도 능률을 저하시킨 바로 그 철도 노동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 인원들이 보급품을 소모하는 대신에 보급품을 수송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더라면 더 나은 쓰임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부연합 철도의 쇠락에 기여한 마지막 요소로는 북부연방군의 습격대(Union raider)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철로를 찢어발기고, 교량을 불태웠으며, 열차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북부연방군의 습격이 실질적으로 효과를 발하게 되는 1864년이 되면 이미 남부연합의 철도는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습니다. 습격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마멸을 좀 더 촉진시켜주었을 뿐인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의도적으로 철도에 지속적인 피해를 끼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단 여러분이 북부연방군의 습격대원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카빈총 한정과 소수의 수공구만을 들고서 말에 올라 남부연합 철도에 달려갔을 때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습격대원으로서 무려 30톤에 달하는 기관차의 충격을 견디도록 제작된 인프라를 파괴하기 위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입힌 손상은 아마도 그가 이 손상을 입히기 위해 소모한 노력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노력으로 충분히 수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1864년 무렵 아틀란타 근방에서 활약한 북부연방군 기병 습격대원들은, 자신들이 하루 종일 걸려 "파괴"한 철도가 2~3일이면 복구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철도 교각은 통상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화재에 취약했습니다. 하지만 습격대로서는 가연물들을 긁어모아야 했으며, 또한 화염이 쉽게 소화되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조절해 줘야만 했습니다 (삽화 3 참조). USMRR의 헤르만 하웁트는 교각을 훨씬 신속하게 파괴할 수 있는 폭발물, 일명 "토피도(torpedo)"를 개발합니다. 이 장치는 흑색화약이 충진된 주석 깡통으로 만들어졌고, 깡통 끝에서 끝까지는 볼트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볼트 머리부분이 한쪽 끝을 막았으며, 너트가 반대편 끝을 막았으며, 깡통 밖으로 퓨즈가 삐져나올 공간이 남아있었습니다 (삽화 4 참조). 간단한 손 송곳을 이용하여 습격대원은 교각의 나무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토피도를 삽입한 뒤, 이를 기폭시키면 되었습니다. 만약 습격대원이 폭파시킨 위치가 적절했다면, 단지 몇 분 내로 교각은 주저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치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삽화 3. 리치먼드, 프레드릭스버그, 포토맥 철도의 파괴된 철도 교각)

 

(삽화 4. 하웁트의 "토피도" )

 

 북부연방군 습격대원들은 철로를 공격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소비하였습니다. 철로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 뜯어낼 수가 있었고, 불타는 침목더미 위에 옮겨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철로가 붉게 가열되면, 습격자들은 이것을 휘어버렸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나무에다 감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도 많은 시간이 들었고, 많은 노동력을 소비하여으며, 특히 가볍게 장비한 기병 습격대원들로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처리한 철로는 통상 그리 어렵지 않게 도로 펴서 재부설할 수가 있었습니다. 종종 바로 그 현장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USMRR에서는 철로를 망가뜨릴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해내게 됩니다. 하웁트의 부하 중 하나였던 E. C. 스미드(E. C. Smeed)는 철로를 신속하게 뜯는 동시에 꼬아버릴 수 있는 휴대용 장비를 발명합니다. 이렇게 할 경우 철로는 영영 못쓰게 됩니다. 이 스미드 장비(Smeed device)는 마치 커다란 편자처럼 생겼으며, 습격대원들이 쉽게 말을 타면서 휴대할 수 있었습니다. 전신용 폴대나 펜스, 철로 따위를 이 장치에 삽입하면 곧 거대한 쇠지레가 탄생하게 됩니다. 단지 근육의 힘과 지렛대 원리만을 활용하여, 습격대원들은 철로를 신속하게 들어올려 꼬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삽화 5 참조). 그러나 이 장비가 실제로 얼마나 많이 활용되었는지 여부도 역시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삽화 5. 스미드 철로 파괴장비)

 

 1864년 초기부터 전쟁 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남부연합측이 북부연합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할 역량은 점차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1864년 2월부터 시작된 미시시피 지역의 윌리엄 T. 셔먼 소장의 대규모 원정으로 인한 피해는 복구에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해 말 셔먼이 조지아주 일대에 대규모 파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을 때, 이에 영향을 받은 철도선의 일부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예 운행이 중단됩니다. 이러한 습격에 따른 교란이 영속성을 띄게 된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파괴의 정도가 증가했다는 점도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남부연합이 이것들을 재건하기 위하여 자재와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쇠퇴하였다는 점에도 기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부연합 정부는, 원칙상으로는 전쟁 활동으로 인해 발생한 철도 손상에 대해서 거의 혹은 전혀 원조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제한정부에서의 "주들의 권리(states rights)" 철학의 사례로서 설명되는 이러한 무조치는, 반면 정부가 철도 노동자들을 징집하고 철도를 징발하는 것과는 상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남부연합 정부는 가져가려는 것은 있었지만 주려는 것은 없었습니다.

 

 1864년 말에 이르르면, 남부연합의 철도는 이제 쇠퇴에서 붕괴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12월에는 로버트 F. 호크 소장(Major General Robert F. Hoke)이 이끄는 1개 사단이 버지니아 주 피터스버그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을 향하여 철도 기동을 실시합니다. 그 여정에는 피에드몽 철도(Piedmont Railroad)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철도는 전쟁 중에 건설 된 몇몇 신규 철로 중의 하나였습니다. 호크의 선두 여단은 48마일에 이르는 피에드몽 철도를 통과하는 데에 무려 3일을 소모합니다. 이는 철로와 열차의 상태가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잔여부대는 결국 48마일 거리를 도보로 이동합니다.

 

 1865년 2월이 되면, 남부연합 정부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일대의 일부 철도를 4피트 8 1/2인치 궤간에서 5피트 궤간으로 변경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광궤 기관차 및 열차가 사우스캐롤라이나로부터 소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였던 제불론 밴스(Zebulon Vance)는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열차들은 모두 상실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1865년 3월에는, 새로 임명된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이었던 아이삭 M. 생 존 준장(Brigadier General Isaac M. St. John)은, 기타의 군사 및 민간 교통수요를 더한 채로 일일 500톤에 달하는 군용 식량을 리치몬드로 수송할 수 있을지를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보고합니다. 이번에도 낡아빠진 기관차와 화차가 문제였습니다. 엄청난 양의 식량이 버지니아 주 시골지역 창고에 쌓여가고 있었지만, 철도는 단지 하루에 5대의 열차에 해당하는 양도 수도로 수송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 존 장군의 보고서는 남부연합 철도 체계에 대한 적합한 묘비명이라고 할 만 했습니다. 남부연합 철도는 전쟁 시작시에는 강력한 군사적 도구로 역할하였으며, 전역의 양상을 결정짓고 전투를 이기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1863년 기간 동안 남부연합 철도는 유능하게 활약하여 그렇지 않았다면 신속한 패배를 맛봐야 했을 남부연합이 전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철도가 잘 작동하고 있던 기간동안 남부연합이 군사적으로 잘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철도가 쇠퇴하고 궁극적으로 붕괴하면서 남부연합의 쇠락도 동시에 이뤄졌습니다. 남부연합의 철도 자체가 아니라, 남부연합이 철도를 장기간 지속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야말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철도는 무신경 속에서 쇠퇴하게 되었고, 남부연합은 결국 망각의 철도(rails to oblivion)에 탑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조문헌

 

(생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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