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퍼플하트 훈장(=상이용사 훈장)과 조지 워싱턴과의 관계 - Armchairgeneral.com

박용수 2014. 10. 27. 16:52

< 원문출처: (http://www.armchairgeneral.com/george-washington-and-the-purple-heart.htm)>

 

 



퍼플하트 훈장(=상이용사 훈장)과 조지 워싱턴과의 관계

(George Washington and the Purple Heart)

 

 

 


(퍼플하트 훈장(Purple Heart)은 "모든이가 수여받을 수 있으나, 반면 모든이가 받게되기 꺼려하는" 훈장이다. 이 훈장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어 왔으나, 어쨌든 이 훈장은 부상당하거나 부상 후 사망한 미군들에게 수여된다. 2008년 이후부터는 전쟁포로생활 중에 사망한 이들에게도 수여되게 된다.)

 


저자: Steven Schultz


 미군에서 최초로 전투훈장을 수여받은 군인은 조지 워싱턴 장군(General George Washington)이다. 1776년 3월 25일, 대륙의회는 보스톤에서 영국군을 몰아낸 공로로 워싱턴에게 의회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을 수여한다. 그러나 이 메달은 오늘날에 생각하는 정복에 다는 방식의 훈장은 아니었다. 수여받은 인원이 달고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된 전투훈장을 최초로 미국에서 고안한 사람은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워싱턴은 전투부대에서 사기와 단결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일반 병사들의 영웅심과 용기를 인식해 주는 것이야말로 군 전체에 있어서 이러한 특질들을 고양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워싱턴은 진급과 현지임관(field commission)을 통하여 이러한 용기와 명예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1782년, 대륙의회는 워싱턴의 이러한 행위에 제동을 걸었는데, 이는 워싱턴이 병사들을 진급시켜주는 데 따라 발생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상으로 진급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자, 워싱턴은 용기의 표시로서 옷에 달고 다닐 수 있는 표식을 병력들에게 수여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 결과 1782년 8월 7일, 워싱턴은 군사공로배지(Badge of Military Merit)를 제정한다는 일반명령을 발령하게 된다. 이 일반명령의 일부를 추려보면:

 

 장군은 그동안 휘하 병사들의 도덕적인 야심과 기타 모든 종류의 군사적 미덕을 고양시키기 위한 바램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특출나게 명예로운 행동을 취한자는 누구나 자신의 왼쪽 가슴 앞면에 보라색 천이나 비단으로 만들어지고 가장자리는 레이스나 바인딩으로 되어 있는 심장 형태의 것을 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바이다. 특출한 용기를 발휘한 경우 뿐만 아니라, 특출난 복종심이나 기타 방법으로의 특별한 기여를 한 경우에도 이러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가 된다. 이렇다고 인증된 자의 이름과 소속연대는 수훈자 명부(Book of Merit)에 기록될 것이며, 이는 당번병실(orderly room)에 보관될 것이다... 이러한 명예로써 구분되는 자는 장교들만 통과할 수 있는 초병선 또한 통과할 수 있게 허용된다. 이 명령은 전쟁 초기의 일까지로 소급 적용되며, 또한 영구적인 효과를 지닌다... 독립군(patriot army)과 자유국가의 영광으로의 길은 이제 모두에게 열려있다.

 

 이 훈장의 형상과 색상이 오늘날 알려진 명칭 - 퍼플 하트(the Purple Heart) - 의 연원이 된다. 이 명령에서는 장교 위원회(Board of Officers)가 이 상을 수상할 후보자들의 사례에 대하여 평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워싱턴은 명령서에 이 상이 영구적이 될 것이라고 언명하였지만, 실제 장교 위원회가 모임을 가진 것은 단 1차례, 1783년 4월 24일이었다. 위원회에서는 2명의 수상자를 승인하였다. 워싱턴 장군은 1783년 4월 27일, 일반명령을 통하여 이를 승인하였고, 이 상이 수여된 것은 1783년 5월 3일이었다.

 

 군사공로배지가 수여된 인원은 Sergeant Elijah ChurchillSergeant William Brown 이었다. Sgt. Churchill의 경우 제 2 경용기병 연대 4중대 (4th Troop of the 2nd Regiment of Light Dragoons) 소속이었고, 수여 근거는 롱아일랜드의 포트 조지와 포트 슬롱고의 영국군 보급창에 대한 공격 당시의 "특출난 용기와 단호함, 솜씨"에 있었다. Sgt. Brown의 경우에는 대륙군 제 5 코네티컷 연대의 사무엘 콤스톡 중대(Captain Samuel Comstock’s Company, 5th Connecticut Regiment of the Continental Line) 소속이었으며, 수여 근거는 1781년 10월 14일 요크타운의 영국군 보루에 대한 "선발대(forlorn hope)" 공격을 이끌었던 공로였다.

 

 이후 군사공로배지를 수여 받은 병사는 Sergeant Daniel Bissell 뿐이었는데, 그는 대륙군 제 2 코네티컷 연대의 데이빗 험프리 중대(Captain David Humphrey’s Company, 2nd Connecticut Regiment of the Continental Line) 소속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Sgt. Bissell의 "충성심과 강인함, 좋은 센스"에 대하여 전해듣고 1783년 6월 10일에 이 뱃지를 친히 수여한다.

 

 미국 독립전쟁이 종결되면서, 육군은 1000명 이하로 감축되었고, 따라서 군사공로배지의 용도도 사장되게 된다. 전투시의 용기를 인정하는 목적으로 미군이 훈장을 다시금 수여받게 된 것은, 남북전쟁과 이로인한 의회무공훈장(Medal of Honor)의 제정이 이뤄진 뒤의 일이었다.

 

 군사공로배지에 대한 내용이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전쟁부(War Department)가 조지 워싱턴 탄신일 200주년을 맞아 기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전쟁부 명령 3호는 1932년 2월 3일부로 이 훈장을 퍼플하트라는 명칭으로써 부활시키게  된다. 최초 명령에서는 이 훈장을 육군 인원들에게만 수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2년 12월 3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령 9227호에 서명하면서 해군과 해병대 인원들에게도 이 훈장이 수여될 수 있게 된다.

 

 최초 퍼플하트는 1차 세계대전 및 앞서 시기의 전쟁 기간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육군 인원(soldiers)에게 수여되었다. 1941년 12월 6일부터 1942년 9월 2일 기간에는, 훌륭한 기여를 한 육군 인원에게 수여되었다. 1942년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이 제정되면서, 퍼플하트 훈장은 오늘날 방식의 대상자들, 즉, 적군의 활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군인(military personnel)들에게 수여되게 된다. 이후 "평화유지(peace keeping)" 임무와 국제 테러리즘의 부상으로, 퍼플하트 수훈자 범위는 이러한 활동과 연관되어 부상당하거나 죽은 군인들에게로 확대된다.

 

 퍼플하트 훈장은 미국 군사훈장 중에서 건국 초창기까지 연원이 올라가는 유일한 훈장이다. 일반 대중 상당수는 퍼플하트 훈장을 전투에서 부상당하거나 죽은 병력들에 대한 명예로 인식하고 있다. 워싱턴 장군은 자신의 발명품이 아직도 "독립군과 자유국가의 영광으로의 길이 모두에게 열리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에 흡족해 할 것이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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