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Osprey Fortress06 - 미국 남북전쟁 시기의 해안 석조요새 (1)

박용수 2014. 10. 27. 16:46

< 원문출처 : Fortress 06 - American Civil War Fortifications(1), 2003, Osprey Publishing >

 

 이 글은 군사사 전문지로 유명한 오스프리의 Fortress 시리즈 중의 하나를 번역한 것으로, 일단 무단번역이고, 또한 번역한 저의 지식이 얕아 건축관련 용어들이 적당하지 않으므로 취미 목적으로 이 분야를 이해하는 데에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소개 (Introduction)


 18세기 후반, 신생 미합중국이 외국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방향은 육상의 2개 방향, 즉 캐나다 및 스페인령 플로리다 방면과, 해상의 1개 방향, 즉 대서양 방면이었다. 당시로서는 13개 주의 서쪽 국경은 확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단지 미국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과의 애매한 경계선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비록 스페인인들의 경우에는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캐다다인들의 경우에는 달랐으며, 따라서 일련의 소규모 요새들이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건설되었다. 길게 노출된 바다 방향 또한 미국 입장에서 지속적인 위험의 원천이었다. 분명 대영제국이말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외국세력이었지만,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 역시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1790년, 미 의회는 대서양 연안 지대의 가장 중요한 전략지점들이 어디인가를 판정하기 위한 최초의 전국 해안방어 조사를 실시한다. 이 조사에 뒤이은 1794년 초, 미국 최초의 해안요새 건설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최초 이 사업은 취약한 항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요새들만을 건설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지만, 얼마지 않아 미국 연안의 다른 전략지점들까지로 확대되게 된다. 이로써 최초의 일련의 해안방어 프로그램이 시작되며, 이는 잠깐동안의 휴지기를 제회하면 이후 약 160여년간 지속되게 된다.

 

(맥헨리 요새는 볼티모어 항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1800년 무렵에 처음 건설되었으며, 1813년 무렵 맹렬한 영국군의 함포사격에 견뎌내면서 유명해진다. 이 작전은 미국 국가인 "별이 박힌 깃발(The Star Spangled Banner)"의 주제가 된다. 5각형인 제 2차 체계 요새의 외곽에 제 3차 체계 시기의 외부시설들이 보강되어 있는 모습니다. )

(※ 이하 글들의 사진들은 클릭하면 모두 커집니다.)

 

 이러한 해안요새지들의 발전은 몇가지 이유 측면에서 중요성을 띄고 있다. 이들의 탄생과 확장은 이 한세기 반 기간 동안 미국이 느끼고 있던 국방위협에 대한 기록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이 시기의 미국 군사사상의 특징이 방어측면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것도 확인해 줄 수가 있다. 1898년의 스페인-미국 전쟁(Spanish-American War)과 2차례의 세계전쟁을 제외하면, 20세게 중반까지도 미국의 전략사상은 대체로 방어적, 고립주의적 독트린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1794년에서 1898년 사이의 한세기 동안 미국은 북아메리카 전반을 아우르며 태평양까지 서쪽 국경선을 확장하는데 집중했다는 점을 볼 때 이해할만한 일이다. 1783년의 조약에 따른 북서지역(North West Territory)의 공식 취득과, 1796년 테네시 주(Tennessee)의 창설 뒤에는, 보다 극적인 사건인 루이지애나 구입(Louisiana Purchase)(1803) 사건이 뒤따랐다. 미국 군사계는 점점 더 서부의 평정에 집중하게 되었지만, 이는 또한 잠재적 외국의 침략에 대응하여 방어해야 할 해안선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육군이 서부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동안, 동부 해안은 요새진지들이 지켜줘야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멀트리 요새는 1776년 영국군의 찰스턴 항구 공격 당시 유명해진 설리반 요새 자리에 건축되었다. 1860년 12월, 이 요새는 보다 방어가 용이한 섬터 요새로 연방 수비대가 철수하면서 버려지게 된다. 그림은 요새의 저장물들이 분리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태우고 있는 장면이다. )

 

 대서양 연안 지역에 대한 지도를 잠깐 보기만 하더라도, 미국 군사공학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최초 33곳의 요새지가 선정되었으며, 미국과 영국간의 전쟁이었던 1812년 전쟁 개전 당시 이들 상당수가 작동하고 있었다. 약 반세기 이후에 만나게 되는 석조요새(stone fortifications)들과 비교하였을 때, 이들 요새들은 상대적으로 소규모 구조물들이었으며,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심각한 장벽(serious barrier)이라기 보다는 방해물(deterrent) 역할에 가까웠다. 1812년 전쟁 당시, 매릴랜드 주의 3개 요새지는 수도 워싱턴을 함락시키고 불태운 영국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군사 계획가들은 이 체계를 재검토하게 되었으며, 메인 주에서 조지아 주 사이의 해안요새의 수는 18개의 강력한 요새들로 축소되게 된다. 또한 플로리다 주 획득(1819)과 미시시피 주 창설(1817), 앨러배마 주 창설(1819) 등은 멕시코 만과 플로리다 해안 등에 추가 요새들을 건설할 필요성을 야기시켰다.

 

 이 시기 동안의 전쟁기술이 변천해감에 따라, 이들 요새들 또한 예전보다 강력하고 잘 무장될 필요성을 띄게 되었다. 이에 미 의회는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메인 주에서 루이지애나 주에 걸친 일련의 장대한 벽돌구조 요새들을 짓는데 투입하는 것을 승인하게 된다. 이들 대규모의 값비싼 방어시설들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맞게 된 문제점은, 이들 해안 요새들의 디자인과 건설 속도보다 군함들의 디자인 및 탄약의 발전 속도가 더 빨랐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이들 구조물들이 외국 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건축된다는 점도 문제였다. 이들 요새들이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받았던 공격이 대부분 외국 세력이 아닌 자국민 세력(미국 남북전쟁을 의미, 역주)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다. 노예제도와 기타 몇가지 주들의 권리에 대한 논쟁으로 인하여 1861년 11개 주가 분리독립을 선언하게 되며, 이들 몇몇 해안 요새들의 소규모 수비대들은 포위상태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미국 남북전쟁을 발발시킨 신호탄은 1861년 4월 12일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향해 발사되었다. 이어진 기간 동안, 이들 석조요새들의 효율성은 전쟁이라는 도가니 속에서 시험받게 된다.

 

 

 

연표(Chronology)

 

1783
미국이 공식적인 독립을 쟁취하다.

 

1794
프랑스 혁명전쟁에 따른 전쟁 공포(War Scare)가 발생하다.

 

1794-1804
제 1차 해안포대 체계(First System of Coastal Artillery)가 개발되다.

 

1799-1800
미국과 프랑스간에 "준전쟁(Quasi War)"이 벌어지다.

 

1807
레오파드 호 사건(The Leopard)으로 영국과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다.

 

1807-1814
제 2차 해안포대 체계(Second System of Coastal Artillery)가 개발되다.

 

1812-1815
미국과 영국간의 1812년 전쟁이 발발하다.

 

1816
베르나드 위원회(Bernard Board)(축성공학자들의 위원회)가 창설되다.

 

1817-1867
제 3차 해안포대 체계(Third System of Coastal Artillery)가 개발되다.

 

1821
버나드 위원회의 첫번째 보고서가 나오다.

 

1844
콜롬비아드 해안포대 체계(columbiad system of seacoast artillery)가 도입되다.

 

1846-1848
멕시코-미국 전쟁이 벌어지다.

 

1860
11월: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다.
12월: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다. 멀트리 요새(Fort Moultrie)가 남부 민병대에게 점령되다. 연방군 수비대가 섬터 요새(Fort Sumter)를 확보하다.


1861
1월: 조지아, 플로리다, 앨러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다. 풀라스키(Pulaski), 매리언(Marion), 잭슨(Jackson), 세인트 필립(St. Philip), 모간(Morgan), 게인스(Gaines), 파이크(Pike), 바란카스(Barrancas), 텍사스(Texas) 요새가 남부 민병대에게 점령당하다. 연방군 수비대가 자카리 테일러(Zachary Taylor), 피켄스(Pickens), 제퍼슨(Jefferson) 요새를 확보하다.
2월: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건국되다.
4월 12일: 남부군 포병이 섬터 요새에 사격을 가하다.
4월 14일: 섬터 요새가 항복하다.
5월: 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사스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다. 메이콘(Macon), 캐스웰(Caswell), 존슨(Johnson) 요새가 남부 민병대에게 점령당하다. 연방군 수비대가 먼로(Monroe) 요새를 확보하다.

 

1862
4월: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메이콘 요새가 포위공격 당한 뒤 항복하다.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가 벌어지고, 미시시피 주의 세인트 필립 요새 및 잭슨 요새가 항복하다. 조지아 주의 풀라스키 요새가 포위공격 당한 뒤 항복하다.

 

1863
4월: 연방군이 섬터 요새에 대해 공격했으나 실패하다.

 

1864
8월: 모빌 베이 전투(Battle of Mobile Bay)가 벌어지고 모간 요새가 항복하다.

 

1865
2월: 찰스턴이 함락되다. 연방군이 섬터 요새와 멀트리 요새를 점령하다.
4월: 남부연합이 항복하고 전쟁이 종결되다.

 

1867
석조요새 프로그램(masonry fort program)에 대한 자금지원이 동결되다.

 

 

 

미국 해안요새의 발달 (The development of American coastal fortifications)

 

제 1차 및 2차 해안요새 시스템 (The First and Second Systems of coastal fortification)

 

 미국 항구들의 요새화는 19세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었다. 소규모의 나무와 흙으로 된 시설들이 16세기부터 미국 식민지의 초기 정착촌들을 요새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1775년의 미국 독립전쟁 발발 직전, 이들 초기 해안요새들의 일부가 보다 강력한 구조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는 스페인인들이 갖고 있던 카스티요 데 산 마르코스(Castillo de San Marcos)로서, 플로리다의 대서양 연안에 있던 세인트 아구스틴(St. Augustine)을 방어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1672년, 세인트 아구스틴을 방어하던 기존의 구조물을 대신하여 장대한 석조 요새가 건축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북아메리카 지역에 최초로 만들어진 실질적 요새였다. 스페인 공학자 이그나치오 다자(Ignacio Daza)에 의해 디자인된 이 요새는, 폭 320피트의 정사각형 구조였으며, 4곳의 귀퉁이마다 능보(bastion)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요새의 막벽(curtain wall; 능보 사이를 잇는 벽. 역주)은 높이가 36피트였으며, 산호 블럭(blocks of coral rock)을 가지고 만들었다. 삼각보루(ravelin) 하나가 요새의 출입구/출격구(entrance/sallyport)를 방호하였으며, 2개의 도개교(drawbridges)가 이들을 해자로 둘러싸인 주 요새와 연결시켜주었다. 이 장대한 구조물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로써 당대의 유럽 요새개념이 미국으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1690년대에는 보스톤 항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비슷한 영국 요새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왕의 이름을 따서 윌리엄 성채(Castle William)로 불렸던 이 요새는, 내항구의 서쪽에 있는 작은 섬에 세워졌으며, 카스티요 데 산 마르코스와 마찬가지의 단순한 다각형 디자인을 띄고 있었다. 1719년, 프랑스인들이 아일 로열(Isle Royale)에 상당히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스버그(Louisbourg)라고 이름 붙였다.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의 섬지역 항구를 방호하기 위해 건설된 자카리 테일러 요새는 제 3차 체계 요새들 중에서 가장 웅장한 요새 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그 디자인 측면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기도 하였다. 건축이 시작된 것은 1846년이었으며, 해안선에서 약간 떨어진 산호바닥 위에 건설되었다. )

 

 다른 곳에서는 축성작업이 보다 작은 일인 경향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입구를 방어하던 설리반 요새(Sullivan's Fort)(나중에 멀트리 요새(Fort Moultrie)로 개명된다)를 들 수 있다. 이 진지가 1776년 영국군에게 공격당했을 당시, 이 요새의 막벽(curtain)에 사용된 모래와 야자나무(palmetto logs)의 조합은 구형탄(roundshot)에 대단히 잘 버텨주었다. 독립전쟁 당시, 다른 임시 해안요새들도 여럿 건축되었고, 유명한 것으로는 필라델피아를 방어하던 머서 요새(Fort Mercer), 허드슨 강을 방어하던 리 요새(Fort Lee)와 워싱턴 요새(Fort Washington), 뉴저지 해안으로부터 뉴욕 항구를 방어하던 파울루스 훅(Paulus Hook) 등을 들 수 있다.

 

(제 3차 체계 시기 동안 해안요새의 성격은 변화하게 되며, 또한 각각의 요새들의 디자인 역시 건설장소의 지리적 제약에 알맞게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 남북전쟁 시기 뉴욕 주 퀸스에 건설된 토튼 요새의 경우 잘 요새화된 아성(citadel)을 둘러싼 낮은 포곽구조를 사용하였다.)

 

 1783년에 전쟁이 종결된 후,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전쟁(French Revolutionary War)(1793-1802)이 발발하여 점차 세계전쟁화되고 있는 분쟁이 미국이 말려들 기미가 보이기 전까지는, 신생 미국에서는 해안방어를 보완하는 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미 의회에 미국 항구들에 적절한 방어력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해안요새를 짓는 데 최적지가 어디인가를 결정할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이 위원회는 1894년 2월에 미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3주일 후, 미국 최초의 요새를 짓는 데 대한 예산이 승인된다. 이것이 이른바 제 1차 해안요새 체계(First System of coastal fortification)가 되었으며, 이 당시 의회의 추진으로 벌어진 건축작업은 10년간(1794-1804) 지속된다. 이 사업을 연방사업(Federal project)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각 개별 주들이 이들 상당수를 감독하고 비용을 지불하였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건설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외국에서 훈련된 공학자들은 현지 사정에 맞게, 또는 그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특정 건자재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큰 폭으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자금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작업은 가능한 한 저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들 해안요새들은 대부분 동시대의 유럽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극도로 조야하였다. 목재는 대충 깎아서 사용했고, 석재 제방이나 흙으로 만든 제방은 이들 뚜껑없는 포상(emplacement)들에서 가장 흔한 요소들이었다. 바다 방향의 주 포대(main battery)에 덧붙여, 이들 요새들 중 일부는 지상 방향으로부터의 공격에 대응하는 흙으로 만든 각면보(redoubt)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요새로는 미플린 요새(Fort Mifflin)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요새는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를 방호하기 위하여 델라웨어 강의 머드 섬(Mud Island)에 건설되었다. 축성은 1798년에 개시되었고, 총 5년이 소요되었다. 이 요새에는 낮은 다각형 막벽(curtain)이 설치되었고, 2개의 능보(bastion)가 출격구(sally port)를 방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단순한 별모양 돌충부(a simpler star system of salients)가 설치되었다. 거버너 섬(Governors Island)에는 제이 요새(Fort Jay)라고 불린 별모양 요새(star fort)가 뉴욕 항구를 방호하였으나, 1812년 전쟁 시기, 보다 웅장한 구조물을 세울 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철거되었다. 이 시기의 해안 요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요새는 아마도 맥헨리 요새(Fort McHenry)일 것이다. 이 요새는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 항구를 방호하기 위해서 건축되었다. 이 요새의 건축은 1800년에 웻스톤 포인트(Whetstone Point) 자리에 개시되었으며, 제 2차 체계에 도입된 개선사항들을 적용시키기 위하여 1804년 이후까지 건축이 지속되었다. 이곳의 방어능력은 1812년 전쟁을 통해 시험대에 오르게 되며, 1813년 9월, 장시간의 대포와 로켓 공격에 노출되게 된다. 이 사건은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s)가 "별이 박힌 깃발(Star Spangled Banner; 미국 국가. 역주)"을 작성하는 영감을 제공하게 된다. 제이 요새와 마찬가지로, 이 요새 역시 "별모양" 요새("star" fort)였다. 이 용어는 당시 별 모양을 하고 있던 모든 종류의 축성시설에 느슨하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사실 두 요새 모두 진정한 의미의 별모양 요새(true star fort)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미국식 용어는 19세기까지도 계속 사용된다.

 

 루이지애나 구매(Louisiana Purchase)와 관련된 문제로 인하여 미국은 프랑스와의 다소 괴상한 "준전쟁(Quasi War)"(1799-1800)을 치루게 되긴 하였지만, 얼마되지 않아 미국이 외국으로부터의 침공이라는 위험 속에 놓이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 결과 1800년 이후 축성작업은 속도가 늦어지게 되며, 완성된 요새들도 일부는 관리소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신규 건축에 대한 자금 지원은 감소되었고, 각각의 주정부들은 기존의 몇몇 중요 요새들의 유지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미국 해안요새지들의 대비태세가 감소되는 추세는 1807년 6월이 되면서 종말을 고하게 되는데, 당시 영국 프리깃함인 HMS 레오파드 호(HMS Leopard)가 탈영한 영국 선원의 송환 문제에 따른 다툼으로 USS 체사피크 호(USS Chesapeake)에 발포했던 것이다. 제 1차 해안요새 체계의 요새 건설이 멈춰진 것이 이미 3년이 흐른 뒤였지만,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이 건축 프로그램의 즉각적인 재개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의회 위원회가 이 문제를 조사하게 된다. 1807년 11월, 위원회는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결과 미 의회는 신규 요새 건축에 1,000,000달러의 예산을 승인하게 된다. 이번에는 요새들이 나무와 흙으로 대충 지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미국 공병단(U.S. Corps of Engineers)의 조셉 스위프트 소령(Major Joseph Swift)는 일련의 강력한 축성진지 계획을 발전시켰는데, 여기에는 벽돌로 지어지는 아성(citadel)과 포곽이 설치된 포대(casemated gun batteries) 가 포함되었다. 이것이 소위 제 2차 해안요새 체계(Second System of coastal fortification)로 알려진 것이며, 이 작업은 1807년에서 1814년의 7년간 진행될 예정이었다.

 

(1861년 4월 섬터 요새 전투 당시 작전 중인 연방군 포대의 모습. 화가가 요새 구조 및 대포 포가의 디자인과 같은 부분은 실제와 다르게 그리긴 했지만, 다른 측면들, 예컨대 전투 중의 포곽포대의 활동이라든가 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정확한 편이다. )

 

 이 체계와 과거의 체계와의 첫번째 중요한 차이점은 이 방어시설이 미국 공학자들의 손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국무부 장관 헨리 디어본이 설명한 바와 같이, "외국인들을 공학자로 고용해야 하는 불쾌한 일"은 피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들 공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통제는 거의 없었으며, 이로써 이들 요새들의 크기나 형태 등이 서로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게 된다. 제 2차 해안요새 체계의 요새들은 넓게 보아 3종류의 형태로 구분된다. 첫번째 종류는 소규모 해안 포대(small coastal batteries)로서, 이들은 진정한 요새로 만들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곳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볼록한 곡선형태로 배치되는 경향은 있긴 했지만, 크기와 형상에 있어서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들은 모두 지붕이 없는(open-topped) 형태였고, 일부의 경우 소규모 아성(citadel) 혹은 지상 방면으로의 기타 방어시설들이 존재하였다.

 

(매리언 요새와 맥헨리 요새

제 3차 요새체계 이전에 건설된 요새들 중에서 상당수가 이후의 해안방어 개념을 적용시키기 위하여 개조되었다. 윗쪽 그림은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 아구스틴에 위치한 매리언 요새인데, 이러한 개조된 해안요새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 요새는 1672년 스페인인들에 의하여 카스티요 데 산 마르코스 요새로 건축되었으며, 전통적인 보방식 설계로 건설되었다. 현대화 과정에서 외곽 구조물들이 추가되고, 보다 현대적인 포상이 설치되는 등이 이뤄졌다. 아래 그림은 맥헨리 요새로서, 1812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요새이다.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화가 이뤄졌다. )

 

 두번째 종류는 복합형 요새(composite forts)로서, 막벽(curtain) 표면이 벽돌인 흙벽으로 된 요새였다. 이 종류의 방어시설은 이 시기에 건축된 해안축성시설 중에서 가장 많이 지어진 형태이며, 제 1차 체계 당시에 건축된 요새들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 상당수가 형태에 있어서 원형 혹은 타원형을 띄거나, 혹은 잡다한 휘어진 형태의 포대와 다소 평범한 사각형 아성을 결합한 형태였다. 이러한 시설들의 예로는 버지니아의 노포크 요새(Fort Norfolk), 뉴욕 항구를 방어하던 리치먼드 요새(Fort Richmond)와 톰킨스 요새(Fort Tompkins), 매릴랜드 주의 매디슨 요새(Fort Madison) 등을 들 수 있다. 제 2차 체계에서의 3종류의 축성형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종류의 요새는 석조요새(masonry fort)였는데, 이는 나중에 미국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1861-65)시기에 활약하는 제 3차 해안요새 시스템의 요새들의 선구자라고 할 수가 있다. 비록 후대와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이 당시 미국 공학자들은 최초로 석조 포곽(masonry-built casemate)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포곽 디자인이 몰고 온 진정한 혁명은, 이로 인하여 요새 하부에 대형 대포를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요새 디자인시 대포를 구조물 상부에 위치시켜야 했으며, 지붕이 없는 흉벽(open-topped parapet)만으로 방호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엥 바벳(en barbette) 방식의 포상(gun emplacement)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이 체계가 이미 도입되어 있었지만, 벽돌로 만든 포곽이 북아메리카에 도입된 것은 대단한 발전이었다. 사상 최초로 포병들은 박격포와 소구경 화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으며, 포곽식 포대(casemate battery) 위에 엥 바벳 방식의 포대(en barbette battery)를 배치하는 다층식 요새로 향하는 최초의 실험이 실시될 수 있었다.

 

(조지아 주의 풀사키 요새의 모습으로, 항복한 뒤의 장면이다. 이 요새는 수리되어 지역 연방군 병력의 사령부로 사용되었으며, 이 대포들은 남부연합 해군의 통행을 막고 사반나 강을 봉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진 앞쪽에 몰려있는 사람들 뒤에 있는 대포는 10인치 콜롬비아드 포로서, 나무로 된 엥 바벳식 포좌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제 2차 방어시설체계의 대부분은 1812년 전쟁 발발 이전에 완공될 수 있었다. 비록 이들 중 일부만이 실전을 겪긴 했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로서 강력했던 영국함대가 주요 미국 항구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외로 들 수 있는 것이 1813년 9월에 공격당한 볼티모어의 사례다. 이 교전 당시, 맥헨리 요새는 강력한 함포사격을 간신히 견뎌내게 된다. 전쟁 직전, 이 요새의 1차 체계 시절 성벽은 벽돌로 보완(addition of brick revetment)되었다. 다만 포대의 경우 여전히 엥 바벳 식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 요새가 격심한 포화에도 견디어냈다는 사실은 앞면에 벽돌을 감싼 디자인(brick-fronted design)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고, 이는 완전석조 요새(all-masonry fort)의 건설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된다. 1813년에서 1816년 사이 기간, 여러 곳에서 완전벽돌식 구조물(all-brick structure)들이 건설된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를 꼽자면 찰스턴 외곽에 있던 멀트리 요새(기존의 설리반 요새)를 들 수 있는데, 이곳은 볼티모어 공격 다음해에 재건축된 것이다. 보다 눈부신 제 2차 체계 구조물을 들자면, 뉴욕 항구에 있는 윌리엄 성채(Castle William)(보스톤 항구의 보다 전시대의 동명의 성채와 혼동하지 말 것)를 들 수 있다. 이 성채는 1807년에서 1812년 사이에 축성되었으며, 주변에 일련의 포곽 포상(casemate gun emplacement)들을 둔 미국 최초의 요새였다. 설계도에 따르면, 직경 약 210피트짜리 적색 사암(red sandstone)을 사용한 원형의 벽돌제 요새였으며, 3단의 포곽 혹은 병영들이 위치하며, 위쪽에는 개방포좌(terreplein)가 위치하고 있었다. 포곽에서 아래쪽 2개 층의 경우, 13개의 총안구(embrasure)를 갖고 있었으며, 그 위에 있는 병영이 위치한 층의 경우에는 필요한 경우 포곽으로 개조할 수가 있었다. 이들 층 위로는 개방포좌(terreplein)가 위치하여 48문의 소형 대포들을 설치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1812년 전쟁 당시, 이는 26문의 강력한 32파운드 대포를 배치할 수 있는 형태로 변경된다. 이 요새는 미국 대서양 연안에 있어서 가장 위압적인 요새였으며, 또한 성공적인 요새로 간주된다. 이에 따라 나중에 제 3차 체계에서 보다 커다란 요새를 건축하게 될 때 이 요새를 기준으로 삼게 된다.

 

(버지니아 주 햄튼 로즈 항구의 먼로 요새에 소속된 해안포대의 모습이다. 요새 방호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교통호(covered way)" 위에 단층으로 건설된 포곽들을 볼 수 있다.)

 

 1815년이 되어 1812년 전쟁이 종결되던 무렵에는 미국의 거의 대부분의 대형 항구들은 제 2차 체계의 요새들로써 방호되게 된다. 한편 그 외의 추가적인 포대들이 이들 상당수를 보조하였다. 예를 들어 맥헨리 요새를 살펴보면, 1813년 이후 강력한 해안포대(water batteries)(상면이 노출된 포대로, 물가 근처에 붙어있었다)들로써 보강된다.

 

(활강포인 콜롬비아드 대포가 쇠로 만든 포곽용 포가 위에 설치된 모습으로, 남북전쟁 직후 버지니아 주 먼로 요새의 해안포대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사진에 보면 요새의 도색 방식이 특이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포곽 벽체의 아래쪽 부분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초기의 2차례의 요새체계들은 전쟁의 위협 속에서, 혹은 유럽과 카리브해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우려 속에서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제 1차 체계의 요새들의 경우 즉각적인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신속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건축되었다. 제 2차 체계 요새들의 경우에는 보다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데, 대부분이 영구적인 사용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이들 중 일부의 경우, 예를 들어 윌리엄 성채 등은 극히 장대한 방어구조물이었으며, 향후의 체계에도 통합되게 된다. 이 양개 시기에 있어서 축성요새의 대부분은 건축이 시작된 때로부터 적어도 4년 내에 완공이 되었으며, 10년을 넘긴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경우 전쟁 위협 내지는 전쟁 자체가 종결되면서 건축 동기 또한 사라진 경우이며, 따라서 이들의 완성여부는 더 이상 중요성을 띄지 않게 된다.

 

(플로리다에서 멀리 위치한 드라이 토르투가에 건설된 제퍼슨 요새의 경우, 포곽의 뒷쪽에는 요새 가장자리의 능보로 이어지는 아치형 복도가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로서 사람이 거주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35마일이나 떨어진 멕시코 만의 무인도 위에 수백만개의 벽돌을 옮겨와 이렇게 복잡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진정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

 

 반면 이후에 이어지는 체계의 경우 평화시에 건축된 경우인데, 공기가 수십년에 걸쳐있곤 하였다. 앞서 2개 체계에서 급작스럽게 만든 요새들은 이후 시기의 수십년에 걸쳐 만든 거대한 구조물들에 비하면 실로 초라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차 해안요새 체계 (The Third System of coastal fortification)

 

 1812년 전쟁 당시 영국군의 약탈행위는 이후의 축성시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전쟁을 통하여 적절한 해안요새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적군이 마음 내키는 대로 상륙이 가능하며, 또한 내륙 깊숙히까지도 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해안 국경선에 보다 양호한 방호수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전쟁 결과에 따라 개발된 제 3차 체계야말로 기존처럼 서둘러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방어 우선순위 분석에 의거하여 실시된 최초의 해안축성사업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잭슨 요새와 맥리 요새

멕시코 만 해안지역의 경우, 지리적으로 요새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도 필요한 경우 요새를 지어야만 했다. 윗쪽 그림은 잭슨 요새의 모습으로서, 미시시피 강변의 늪지대에 건설되었으며, 이 요새의 포곽포대는 강 건너편의 세인트 필립 요새의 포대와 함께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이 강의 접근로를 수비하는 역할을 하였다. 주 요새의 화력은 남동쪽의 소규모 해안포대(Water Battery)에 의해 보강되었으며, 이는 그림의 우측에 나타나 있다. 아래쪽 그림은 맥리 요새의 모습으로, 플로리다 주의 펜사콜라를 방호하기 위하여 건설되었으며, 모래 위에 건설되었고, 이 지역의 벽돌로 지어진 요새들 4개 중의 하나에 속한다. 이 요새의 특이한 타원형 디자인은 총 108문의 대포를 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1817년에 제 3차 체계 작업이 시작되면서, 더이상 급박한 상황이라는 압박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으며, 드디어 영구적이고 항만 방어에 통합된 진정한 시스템을 추구할 수가 있게 되었다.

 

 앞서 2차례의 축성시기에 있어서의 설계도면은 국방장관이 발행한 일반 가이드라인에 따라 개별 공학자들이 제각각 만든 것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종의 계획집단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로써 표준을 만들고 신규 건축물에 확실히 최신의 축성요소를 적용하도록 만드는 일이 어려웠다. 이것이 시정된 것은 1816년으로, 당시 공학자 위원회(board of engineers)가 결성되어 프랑스 군사공학자 시몬 베르나드 준장(Brigadier-General Simon Bernard)를 의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4년 전까지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서 공병단장(brigadier of engineers)을 역임한 바가 있었다. 엄청난 재능으로 유명한 조세프 G. 토튼 중령(Lieutenant-Colonel Joseph G. Totten)을 포함한 4명의 육군 및 해군 공학자들이 그를 보좌하였다(나머지 보좌관으로는 조셉 G. 스위프트 준장(Brigadier-General Joseph G. Swift), 육군 공병감 윌리엄 맥리 중령(the Army Chief of Engineers Lieutenant-Colonel William McRee), 엘리옷(Elliot)이 있었으며, 스위프트와 엘리옷의 경우 정부가 외국인인 베르나드 장군을 고용한다는 데에 대한 항의로써 사임하였다.). 이 베르나드 위원회의 4명의 전문가들은 미국해안 전역의 축성도면과 건설장소, 구조물 도면 발전에 대한 책임을 졌다. 사상 최초로 유능한 전문가 집단이 해안축성 전반에 대한 감독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이 집단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 후까지 이 기능을 지속하였다. 위원회 위원들은 2년간 대서양 연안 일대와 신규 획득한 멕시코만 일대를 순시하였으며, 1821년 2월에 국방장관에게 자신들이 발견한 것들을 제출하게 된다.

 

(10인치 로드맨 대포가 완전 금속제 포곽용 포가 위에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판화는 전쟁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버지니아 주의 먼로 요새의 해안포대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최우선적으로 특기할 요소는 미육군이 아닌 미해군에게 해안방어의 우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요한 해군기지들과 조선소, 항구들의 목록을 작성하였고, 이들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을 신규 요새축성으로 보호할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몇몇 해안요새들과 강하구, 내륙수로 입구 등에 대한 축성을 권고하였는데, 이는 해안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들을 방호하는 강력한 방어장벽이 될 것이었다. 위원회에서는 또한 미국 해안지방의 도로 및 수로 교통에 대해서도 논하였으며, 해안지역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을 경우 육군과 해군을 어떻게 배치하여야 할 지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이들이 열거한 40곳의 장소 중에서 17곳은 국가 안보에 극도로 중요한 곳으로 간주되었고, 베르나드 위원회는 이곳들의 보호를 위하여 즉각적인 방어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나머지 장소들은 보다 덜 중요성을 띈 2개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국방장관은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였으며, 신규 축성작업이 벌여져야 할 가장 중요한 곳에 관한 베르나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당면한 조사 및 보고작업이 완료되자, 베르나드와 그 동료들은 이들 핵심 장소들에 대한 다양한 축성시설 발전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작업이 진행된 것은 이들이 최초의 목록의 장소들을 재방문하고, 나머지 23개 장소들에 대한 장기 축성전략을 수립한 뒤의 일이었다. 필연적으로 건설작업은 가용한 예산 내에서 진행되어야만 했고, 주요 항구들과 강하구들은 요새화되긴 했지만, 기타 덜 중여한 장소들은 기존의 낡아 무너져가는 1차 및 2차 체계의 요새들 외에는 무방비상태로 놓이게 된다. 또한 신규 취득 영토인 플로리다와 맥시코만 연안, 루이지애나 등 방어시설이 매우 부족했던 곳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섬터 요새가 1861년 4월 남부연합에 항복하였을 때 이곳을 인수하러 온 남부측 신규 수비대는, 미설치된 10인치 콜롬비아드 대포들 중 1문이 급조 박격포로 쓰기 위하여 급조한 포가 위에 얹혀져 있는 모습을 연병장 한가운데에서 목격하게 된다. )

 

 한편 1821년 베르나드 위원회 보고서에서 기존의 제 1차 및 2차 체계 요새들에 대한 연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기할 필요가 있다. 베르나드는 이것들을 보다 크고 제대로 계획된 제 3차 체계 요새들이 만들어지는 동안에 사용하는 임시용 물건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이 수정된 것은 재정적 압박이 가해지면서부터이며, 이로써 기존 요새들을 신규 건축프로그램에 포함시켜서 제 3차 체계 요새로 전환시키도록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적용된 사례 중에서 일부만 소개하면, 메인 주의 포틀란드, 메사추세츠 주의 보스턴, 매릴랜드 주의 아나폴리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 등을 보호하는 시설물들이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사례이며, 그 외에도 다수가 존재한다. 총 18곳의 제 2차 체계 요새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개축되었다. 또한 플로리다 병합 및 루이지애나 구매 과정에서 획득한 오래된 몇몇 외국 요새들의 경우에도 교체 혹은 개축 대상이 되었다.

 

 제 3차 체계 방어시설물들은 크게 몇가지 구분되는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그 범위는 소규모 단독의 해안포대에서부터 광대한 요새 복합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 중에서 해안포대야말로 가장 쉽고 빠르게 건축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저렴한 시설물이었다. 이것들은 통상 국가 안보 측면에서 덜 중요한 장소에 건설되었으며, 이곳들은 대규모 요새를 지을 만큼의 예산을 투입할 가치는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는 최초에는 임시방편의 목적으로 지어졌다가도, 나중에 근방에 보다 대규모 요새가 건축될 경우 전체 방어체계의 일부로 통합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시대의 해안포대들과는 다르게, 이 시기의 해안포대들의 경우 직선형을 띄는 경향이 있었으며, 석재 흉장(stone parapet)으로 보호되는 최대 20문의 대포들이 일렬로 배치되며, 전방에는 흙으로 만든 경사 제방(a sloping earthen glacis)이 설치되었다. 보다 방호력이 높게 만들어진 해안포대의 경우에는 긴 벽돌로 만든 포곽(long brick-built casemate)을 이용하여 건축되기도 하였다. 이 경우, 박격포 사격으로부터 방어시설을 보호하는 석재 지붕도 설치되었다.

 

 이러한 소규모 해안포대의 변형 중의 하나가 마르텔로 탑(Martello tower)인데, 이 시설의 명칭은 코르시카의 마르텔로(Martello in Corsica) 근방에 기존에 존재하던 원형 축성물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유럽에 많이 존재했던 해안요새 구조로서, 이 구조물은 마치 둥글고 높다란(가끔 높이가 낮은 것도 존재했음) 성채 본성(castle keeps)과 유사한 모습이었으며, 위에는 무거운 탄약을 사용할 수 있는 포상이 설치되었다. 이런 종류의 방어시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은 중포 단 1문만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체계가 미국에 도입되던 시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보다 복잡한 형태로 발전한 상태였다. 이러한 보조 축성설비의 디자인이나 스타일은 크게 다양했다. 조지아 주의 티비 섬(Tybee Island)에 건설된 마르텔로 탑의 경우, 높이가 낮고 원형이었으며, 위에는 작은 대포 1문을 수용할 수 있는 포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텔로 탑 중에서 가장 컸던 것은 키 웨스트(Key West)에 건설된 것인데, 여기서는 동쪽과 서쪽의 마르텔로 탑이 각각 중앙부의 사각형 탑 주위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상부에 4문의 대포를 수용할 수 있는 포상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모두 탑들은 보다 대규모인 요새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이들 요새들은 12-14문의 대포를 보유한 경사포곽포대(angled casemate battery) 및 후방의 방호시설들로 이뤄졌으며, 이는 마르텔로탑의 주변부를 감싸주고 있었다. 이들 2개의 요새들은 키웨스트(Key West)에 주둔하던 연방군 수비대에 의하여 남북전쟁 발발 직후에 건설되었으며, 미국 해안요새 분류의 소그룹 중 한 분야에 있어서의 절정으로서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마르텔로 탑은 상대적으로 드문 시설물이기도 하지만, 몇가지 이유 탓에 이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남부 지역에 건축되었다 (6개 중에서 5개가 플로리다 주, 루이지애나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세워졌으며, 마르텔로 탑 중 나머지 하나는 뉴햄프셔 주에 세워졌다).

 

(1863년 12월 초, 박격포 공격을 당하고 있는 섬터 요새의 내부 장면. 이 시점에는 요새의 상부구조물 대부분이 이미 파괴된 상태이며, 남부연합 수비대측에서는 그 잔해들을 활용하여 아래층 포곽들을 보강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

 

 비록 이들 소규모 해안 방어시설들도 인상 깊긴 하지만, 제 3차 체계에 있어서 중요했던 부분은 대규모의 석조요새(masonry-built fortification) 건축에 있었다. 남부 주들의 해안가에 건설된 이 종류의 대규모 요새들은 나중에 미국 남북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위치가 어디었던 간에, 이들 대규모 요새들은 몇가지 공통점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단단하고 대규모인 구조물이었으며, 잘 요새화된 포곽으로 보호받는 다수의 대포들을 설치할 수가 있었다. 이들 대포들은 통상 다층의 포곽(tiered casemate)에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는 커다란 중앙 연병장(central parade)과 함께 개방포좌(terreplein)가 있었다. 이들은 값비싼 구조물이었는데, 건설비용이 막대했던 것은 물론, 수비대를 배치하고 이들의 준비태세를 유지하는 등의 유지비용도 많이 들었다. 지속적인 자금과 인력의 부족 문제는 나중에 남북전쟁으로 제한이 풀리게 되기 전까지는 이들 거대한 구조물들의 효용성을 제한시켜왔다. 자원부족 문제는 베르나드 위원회에서도 어느 정도 고려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구조물들의 내구성을 가능한 한 좋게 만들고자 하였으며, 계획 및 건축 과정에서도 해안 침식이나 염수부식, 보수 용이성 등의 잠재적 문제들도 고려하여 진행하였다.

 

 이들 축성시설에 있어서의 또다른 중요한 특색으로 꼽아볼 수 있는 것은 건축재로서 석재(masonry)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축성에 있어서 석재를 사용하게 된 것은 사실상 윌리암스 성(Castle Williams) 건축이라는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근접거리에서의 구형탄 사격(solid shot fired at close range)에 대하여 요새의 90피트 두께의 곡선 막벽(curtain)은 단지 표면에 흠집만 나는 정도였으며, 관통 깊이는 통상 2인치 미만이었다. 따라서 석재는 구형탄(solid shot)에 있어서 사실상 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유럽에서 실시된 비슷한 실험결과 또한 석재요새는 중포의 장기간의 포격 외에는 사실상 무적이라는 믿음을 지지해 주고 있었다. 석재를 사용하게 되면 갖게되는 부가적인 장점으로, 바닷물에 대한 침식효과에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도 있었다. 베르나드 위원회에게 있어서 이것들은 충분한 근거들이었다. 제 3차 체계 해안요새들은 석재로 건설될 것이었다.

 

 석재는 다목적 자재였다. 석재는 과학적으로 디자인된 포곽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각각의 대포와 총안구는 각각의 아치형 격실 내에 위치하게 된다. 여기서의 아치는 또한 다층의 포곽을 지을 수 있는 역할도 하였으며, 이러한 다층 포곽은 이 시기에 등장한 대규모 요새의 중요한 특색이 된다. 다층 포곽을 갖는 요새를 짓는다는 개념을 처음 착안한 것은 1807년 윌리암스 성(Castle Williams)의 디자이너에 의해서이며, 이 기술이 표준이 되기 전에도 몇몇 소수의 다른 요새들에도 적용된 바가 있다. 이 디자인의 장점은 최대 숫자의 대포를 배치할 수 있다는 점에 있으며, 이로써 어떤 크기의 목재선박이라도 이 요새 또는 요새가 방어하고 있는 항구를 포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론상 이는 억지력(deterrence)의 극단적인 사례가 되는데, 포대의 규모 측면에 있어서나 포대를 방호하고 있는 벽돌 구조물의 방어력 측면에 있어서나, 요새를 무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 구조물들은 자체의 힘만으로도 함대 전체를 상대할 수 있게 디자인 되었다. 비록 디자이너들이 예측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군함의 방어력과 대포, 탄약에 혁명적 변화가 있었던 남북전쟁 시기에도 이들 요새들은 군함들에 대항하여 양호한 실적을 보여주었다.

 

(앨러배마 주 모빌 베이의 모건 요새의 광경으로, 1864년 8월 경 북부연방군에 항복한 직후에 근방의 등대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연방군 함대의 포격으로 인한 요새의 피해는 주로 상부구조물과 남서편 바다쪽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다. )

 

 디자이너들이 계획 과정에 고려해야했던 점들 중 하나로, 시간이 지나면서 장차 요새에 설치되는 무장의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대포는 점점 크고 무거워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한편으로 이들 대포들이 발사될 총안구(embrasure)는 공격군이 쏠 탄약이 뚫고들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작게 만들어야 했다. 베르나드 위원회의 포곽 디자인 전문가가 된 조셉 G. 토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폭이 4피트 미만인 틈을 갖는 소형 총안구를 디자인하였다. 나중에 그는 무거운 철제 셔터도 디자인하였는데, 이는 대포를 재장전하는 동안에 적탄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는 용도였다. 그의 포곽 디자인은 양 측면 30도 범위 내에 있는 목표물에 대하여 사격할 수 있게 하는 구조였다. 포곽 및 총안구의 제약범위 내에서 대포가 회전할 수 있는 범위가 크면 클 수록, 특정한 목표물에 대하여 동시 사격할 수 있는 대포의 수는 증가하게 될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1864년 시점에서 섬터 요새는 요새라기보다는 그저 거대한 잔해더미에 더 가깝게 보이게 된다. 수비대는 갑작스런 박격포 공격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야간에만 요새복구작업을 실시하였다. 멀리 하층 포곽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베르나드 스스로도 베르나드 위원회의 요새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인 공학자였던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군사공학자였던 세바스티앵 르 프르스트르 시그뇨 드 보방(Sebastien Le Prestre, Signeur de Vauban)(1633-1707)의 기하학적인 요새 체계들을 연구한 바가 있었다. 이들 장엄한 요새들은 이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유럽 방어시설물들의 기초가 되었으며, 사이먼 베르나드 역시 보방식 디자인(Vaubanesque design)에서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예산제약 및 해안지형에 알맞게 요새 규모를 조절해야 했다. 이러한 스타일의 축성방식, 즉 방어용 능보(bastion)와 해자(moats), 삼각보루(ravelins)과 개방포좌(terrepleins), 해자옹벽(counterscarps), 교통호(covered ways) 등에 매료된 초기의 신봉자로서 조셉 토튼을 들 수 있다. 그는 뉴잉글랜드 출신 공학자로서의 천재성을 살려, 베르나드가 구상한 장대한 기하학적 방어체계에 자신이 제창한 신형 포곽 디자인을 융합시킬 수가 있었다. 1832년 베르나드가 프랑스로 돌아가자, 토튼은 그를 대신하여 위원회의 수뇌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미국 공학자들이 사격각도를 과학적으로 고려한 다각형 요새들을 설계하는 데 있어 이러한 프랑스의 영향은 지속된다.

 

 한편 이 위원회에서 초기에 만든 요새들은 대칭성(symmetrical)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요새들이 건축되어야 하는 장소의 개별적 지형조건에 맞추어 설계되었다. 버지니아 주의 햄튼 로즈(Hampton Roads)를 방어하던 먼로 요새(Fort Monroe)의 경우 불규칙한 모습의 6각형에 가까운 구조물이었으며, 한쪽에 철각보(redan)가 있고, 포곽이 있는 해안포대(water battery)가 설치되어 방어력을 보강해주고 있었다. 건축이 시작된 것은 1822년이었으며, 1823년부터 10년 후 완공될 때까지 수비대가 배치되어 건설현장을 방호하였다. 최초 300여문의 대포를 설치할 수 있게 설계되었으나, 이후 해안포대를 추가시킴으로써 442문으로 증가한다. 로드 아일랜드 주의 뉴포트(Newport)를 방호하는 애덤스 요새(Fort Adams)의 경우 비슷한 구조물로서 1825년부터 1838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대부분에 있어 토튼이 직접 건축을 감독하였다.

 

(섬터 요새의 내부 모습으로, 1865년 2월에 버려진 뒤의 상황이다. 북부연방군 병력이 요새를 점령하였을 때, 이 요새가 아직도 방어에 쓸만한 상태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남부연합군 수비대는 이 포곽을 대단히 많이 수리하였다.)

 

 이들 초창기 프로젝트들이 시작된 이후, 디자인에 있어 일종의 유사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825년 이후에 베르나드와 토튼이 디자인한 요새들은 대칭성을 띠고 다층의 포곽을 갖고 있었다. 한층의 포곽 위에 다른 포곽의 층을 배치하는 체계는, 먼로 요새와 애덤스 요새 이후 전체적인 요새의 높이가 증가하는 경향을 만들게 된다. 베르나드 위원회에서 디자인한 초기 요새들은 보방식의 능보(bastion)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 토튼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 토튼의 견해에 따르면, 요새의 포병 화력이 근접전투를 거부할 만큼 충분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통적인 요새체계(예를 들어 카스티요 데 산 마르코스(Castillo de San Marcos) 성채와 같은)는 이제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능보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해자의 길이방향으로 발사되도록 고안된 소형 대포로 구성된 측사포대(flanking batteries)가 보다 소수의 대형 대포로 교체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뉴욕 항구로의 접근로를 방호하기 위하여 1833년에서 1841년 사이에 건축된 슐러 요새(Fort Schuyler)의 디자인에서 확연히 들어난다. 이 요새에서는 능보가 축소되었으며, 대칭적인 형상을 갖고 있고, 2개 층의 포곽구조를 갖고 있다. 전반적으로 1825년에서 1832년 사이에 디자인된 대형의 3차 체계 해안요새들의 경우, 능보의 사용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육각형 막벽(hexagonal curtain)의 5개의 모서리마다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육각형인데 왜 모서리는 5개냐는 것은, 뒷쪽 문장에서 설명하듯이 중요성이 낮은 한쪽방향이 직선화되어 모서리 하나가 없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역주). 육각형 형상은 간단한 산수의 결과였다. 포곽 내의 대포는 최대 60도까지(중심점으로부터 좌우로 30도씩) 회전이 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요새 각 측면이 서로 72도를 이루게 된다면, 적군이 요새의 구석을 이용하여 사각지대(dead zone)을 찾을 수 있는 범위는 12도가 된다. 개방포좌에 설치된 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대포가 이러한 사각지대의 적들을 상대해야 된다. 실제로 요새들이 진정한 정육각형으로 건설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요새의 육지쪽이나 위협이 적은 방향의 경우 두 측면의 길이를 줄이기 위해 그냥 직선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요새에 분명한 전방, 측방, 후방이 존재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찰스턴을 보호하는 섬터 요새나, 조지아 주의 사바나를 보호하는 풀사키 요새 등에서 나타난다. 양개 요새의 건축은 1829년에 시작되었으며, 베르나드가 위원회 위원장 임기를 끝내는 시기까지 지속된다. 이들 요새들의 디자인에는 또한 토튼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던 점도 반영되어 있는데, 양개 요새 모두 돌출된 능보(projecting bastions)가 없었다는 점으로, 풀사키 요새에는 단지 육지쪽 막벽의 양측 모서리 부분에 2개의 약식 능보가 있을 따름이었다. 토튼은 이들 요새들이 지리적 위치상 직접적인 강습(direct assault)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보았다 (섬터 요새의 경우 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풀사키 요새의 경우 늪지대 섬에 지어졌다). 만약의 강습 가능성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풀사키 요새의 경우 일련의 철각보와 기타 구조물들이 요새의 육지쪽 방향에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전의 구조물들과 비교하여, 이들 요새들은 보다 소규모였고, 적은 수비대만 가지고도 방어할 수가 있었다. 섬터 요새를 관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특색으로, 아랫층 포곽의 총안구가 해수면과 밀접해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포를 가능한 한 낮게 위치시킴으로써, 소형 보트가 대포 사격각도 아래로 침투해 들어올 가능성을 줄였던 것이다. 이는 또한 도탄사격(ricocheting fire)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여주었는데, 발사된 구형탄(roundshot)이 바다 표면을 돌멩이처럼 통통 튀며 나아가는 것이다. 적당히 조건이 맞아들어갈 경우, 이는 포탄의 사거리 및 효과를 증대시켜주게 된다. 이것 역시 토튼이 구상해낸 디자인 혁명이었다.

 

(조지아 주 풀라스키 요새의 개방포좌에 나타난 패럿 라이플포의 모습. 이 강선형 무기는 화강암 토대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비록 1832년 베르나드가 은퇴하고 나서는 실시된 대형 프로젝트 거의 없긴 했지만, 해안방어 체계에서의 빈 곳들은 존재했고, 격오지에 대한 요새 건축이 이어지게 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키 웨스트 서쪽 68마일 지점의 드라이 토르투가(Dry Tortugas)에 건설된 제퍼슨 요새(Fort Jeffers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디자인은 조셉 토튼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 있어서의 구조물 측면, 보급상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토튼이 해당 시대의 가장 위대한 군사 공학자의 한명으로서 꼽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들 후기 요새들에 토튼이 끼친 영향은 막대하며, 방호 수단으로써 집중화력의 효용을 강조한 그의 견해는 이들 후기 요새들에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의 특징은 다층의 벽돌제 포곽에 설치된 대규모 포대로 대변되지만, 몇몇 소수의 사례에서는 물리적 제약 탓에 이러한 밀도를 구현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미시시피 강을 보호하는 잭슨 요새(Fort Jackson)의 경우, 질퍽한 늪지대 토질로 말미암아 3층 포곽 구조를 건설할 수가 없었는데, 중량이 심할 경우 땅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이었다. 콕스퍼 섬(Cockspur Island)에 풀라스키 요새를 짓던 건축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는데, 진흙 토양 문제로 인하여 보다 크고 무거운 요새를 짓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토튼이 마음대로 요새를 지을 수가 있었다. 플로리다 주의 키웨스트를 방호하던 자카리 테일러 요새(Fort Zachary Taylor)의 경우 산호석 기반암(coral bedrock) 위에 지어졌는데, 여기서 토튼은 3층포곽을 갖는 요새를 지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를 방호하는 포인트 요새(Fort Point)와 뉴욕 스테튼 아일랜드를 방호하는 리치몬드 요새(Fort Richmond)의 경우 둘다 거대한 3층짜리 구조물들이다.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1846-48) 종결 직후, 베르나드 위원회는 해안가의 요새화 지역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계획을 입안하는데, 이로써 보다 소규모인 항구들과 해안포구들도 방어계획에 포함되게 된다. 이러한 야심적 프로그램에는 총 182개의 별도의 프로젝트들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로써 메인 주의 캐나다 국경지대로부터 텍사스 주의 거의 모든 미국 항구들을 방호하게 되었고, 미시시피 강 일대를 방호하고, 태평양 해안의 19곳을 방호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말미암아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전까지는 이들 중에서 실제 개시된 작업은 전혀 없었다.

 

(복원된 포곽용 목제 포가 위에 올려진 콜롬비아드 활강포의 모습. 사진에서는 상부 슬라이드 포가가 하부포가의 쐐기부(chock)까지 후퇴되어 있는 상태이다. 포곽 바닥부분을 살펴보면 대포 회전을 위한 레일 설치를 위하여 나무바닥이 파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제 3차 체계의 대규모 해안요새들 또한 완벽하게 완공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자금 문제 및 인력 혹은 무장 문제 등이 진척을 방해하였다. 예를 들어, 1840년대에 시작된 요새들 중에서 상당수는 10-15년이 지나 남북전쟁이 터지는 시점에서도 충분한 대포와 수비대가 배치되지 않아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 요새들은 본래 외국 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방호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실제로 테스트 된 것은 분노한 동포들에 의해서였다.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앨러배마, 루이지애나 등의 남부 주들에 건설된 요새들은 모두 전쟁 과정에 있어서 남부연합의 해안가 장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짧은 기간 동안에는 이들이 전쟁의 핵심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1861년 4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 요새들의 상당수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 주변에서 발생한 살인적인 분쟁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토튼과 그의 동료 공학자들은 이들 요새들을 해상방향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에, 지역 분리주의 민병대에 의한 지상군 공격에는 대부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가 못했다. 더욱 곤란했던 것은 전쟁 발발 직전의 몇개월 동안, 정부 측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 남부지역 요새들을 보강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만 무장되고 병력이 부족했던 요새들은 급작스러운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들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들은 전쟁 발발 시점에서 단지 4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부연합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의 서쪽 마르텔로 탑에 있는 포곽포대의 내부 모습. 비록 수리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옛 전쟁시기의 벽돌제 포곽 건축의 우수성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이 건물은 이제 소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키웨스트 아트 앤 히스토리컬 소사이티의 전시물들이 드러나 있다. )

 

 비록 토튼이 1860년대에 미국을 휩쓸 전쟁의 성격을 예측할 수 없었긴 하였지만, 그와 그의 동료들은 대포의 디자인에 있어서의 기술적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은 잘 예측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스스로의 석조요새의 위력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또한 이것이 활강포에서 발사된 구형탄(solid roundshot)에 대한 실험 결과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 구조물들이 장차전에서 겪게 될 무기는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즉 고속 라이플포로서, 구형탄(solid shot) 또는 폭발탄(explosive shell)을 다 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이들 요새들과 남부연합 항구를 장악하는 데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이들 요새의 문제점이라면, 이들이 상대적으로 가볍고 부정확한 화포로 무장한 느린 목제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상대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공성포(siege artillery)와 철갑군함(ironclad warships), 강선포(rifled guns)를 상대하게 된다. 이들 장대한 해안요새들은 이러한 신형 대포에 극도로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며,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공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국 구식의 흰코끼리(white elephants)에 불과함을 드러내게 된다.

 

(클린크 요새

플로리다 주 아멜리아 섬에 건설된 클링크 요새는 5각형으로 건설되었으며, 탑모양의 능보 5개가 설치되어 있다. 조셉 토튼의 디자인에 의해 지어졌으며, 별도의 해자옹벽(detached scarp)이 포함되어있다. 해자내벽은 일명 "카르노의 벽(Carnot's Wall)"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으며, 이는 나폴레옹의 전쟁장관이었던 라자르 카르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특이한 구조물은 성벽 외곽과 그 뒤에 있는 개방포좌(terreplein) 부분을 보호하였다. 또한 저격수를 방호하기 위하여 총안구를 갖고 있다. 클링크 요새 위에는 좁은 통로가 있으며, 여기 들어가는 통로는 4군데로, 흙으로 된 누벽(earthen rampart)에 터널로써 존재한다. 이 디자인은 보다 대규모의 포곽형 요새로서는 부적절하며, 따라서 클린크 요새의 경우 주요 포대는 개방포좌에 집중되어 있다.)

 

 

 

제 3차 체계 요새들 둘러보기 (A tour of a Third System fortification)

 

(계속)

 

 

 


* 보충자료 - 유럽식 요새에서의 각부 명칭

(출처: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media/4034/Profile-of-the-European-fortress-wall-from-the-16th-century)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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