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제2차 영국-이집트 전쟁(아라비의 반란), 1882년

박용수 2014. 10. 27. 14:52

<원문 소스 : (http://www.wartimesindex.co.uk/infopage.php?menu=wars&display=EgyptAndSudan) >

<기타 사진 소스:

 [1] Lesseps 1869 at the Opening of the Suez Canal at Port Said (http://www.canalmuseum.com/documents/panamacanalhistory023.htm)

 [2] (http://www.youregypt.com/ehistory/history/mohamedali/tawfik/)

 [3] (http://ar.wikipedia.org/wiki/%D8%A7%D9%84%D8%AB%D9%88%D8%B1%D8%A9_%D8%A7%D9%84%D8%B9%D8%B1%D8%A7%D8%A8%D9%8A%D8%A9)

 [4] In the Suez Canal - LIFE (http://www.life.com/image/89653147)

 [5] (http://www.flickr.com/photos/14351154@N02/1474145468)

 [6] (http://www.gutenberg.org/files/14644/14644-h/images/451.png)

 

 


 

영국-이집트 전쟁, 1882년
(Anglo-Egyptian War, 1882)

 

 

배경

 

 실전이 벌어진 시기는 1882년이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가게 되면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초 영국 측에서는 운하의 가치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점차 동양의 여러 식민지와의 통상로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실제 1875년 무렵에는,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함께 운하 소유권의 40%를 갖게 되었다. 영국의 이집트 개입의 그 밖의 원인들로는, 이집트 정부의 영국에 대한 대규모의 부채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는 점이 있고, 그보다 작은 이유로, 이집트 정부가 눈감아주고 있던 수단인 노예 상업에 대한 것도 있었다.

 

(1869년의 수에즈 운하 개통 축하 행사. [1]) 

 

 국가로서의 이집트는 실상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법적으로는 터키 제국의 한 주였지만, 터키 제국은 내부의 부패와 쇠락으로 인하여 이집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거나 하지를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이집트 지역 지배자인 Khedive에 의하여 통치되면서 엉터리로 관리되며 수탈당하는 상태였다. 그 결과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1875년 이래, 빌려준 자금을 받아낼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이중 통제(Dual Control)' 체제를 통하여 이집트의 재정과 내정을 공동관리하기 시작했다.

  

 (Khedive인 Tawfik Pasha에게 내정개혁을 요구하러 Abdeen 궁전으로 진군한 Ahmed Arabi [2])

 

 1881년에 이르러, 이집트인들은 유럽인들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 육군의 장교단 내에서 이 불만은 심각했는데, 장기간의 불만 고조기간을 거쳐 결국에는 대중적인 민족주의자인 Ahmed Arabi 대령이 이끄는 반란 사건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요 촌락에서는 유럽인들을 공격하고 방화하는 폭력 소요사태가 발생한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한번에 이민자 50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상황은 악화됨에도 정부 통제는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Arabi 대령은 실질적인 이집트의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 1881년 9월 9일, Khedive인 Tawfiq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하러 Abdin 궁전으로 진군하는 Ahmed Arabi와 이를 환호하는 군중들 [3])

 

 반란이 격화될 것을 직감한 영국 정부는 몰타, 사이프러스, 지브롤터, 인도, 영국에 각각 위치한 함선 61척을 이집트로 이동토록 하였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자신의 식민지인 알제리와 튀니지에서 벌어진 문제로 인해 이미 곤경에 빠져있었으므로, 이집트 문제에 개입하길 거부했다. 이에 따라 영국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1882년 7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던 영국 군함 Ancona 함의 갑판 모습. H.G. Mainwaring 대위 작. [4]) 

 


침공

 

 영국 함대가 해안가에 나타나자, Arabi 군대 역시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2백문의 포대를 설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포대를 모두 철수시키라는 영국측의 최후통첩을 7월 11일 거절하자, 19척의 지중해 함대로 구성된 영국 함대는 10시간의 포격전을 통하여 이집트군 포대 전부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Arabi는 영국 침공에 대한 최후 방어지대로, 카이로와 수에즈 운하 사이에 위치한 Tel-el-Kebir에 새로운 진지를 설치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포격전) 

 

(영국 함대에 의해 파괴된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군 대.  [5])

 

(알렉산드리아 포격전 상황도 [6])

  

 침공의 전반적인 지휘는 Sir Garnet Wolseley 중장이 담당했고 총 4만명의 정규군을 이끌고 있었다. 제 1차 목표는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는 것이었는데,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수행되었다. 영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나머지 공세에 소요된 기간은 2달을 약간 넘기는 정도였다.

  

( Ismaila에 상륙하는 영국군 [5] )

 

 수에즈 운하를 안전하게 장악한 상태에서, 1882년 8월 28일 지상 작전이 개시되었다. 영국군 주력은 Tel-el-Kebir 동쪽이자 수에즈 운하로부터 반쯤 내려온 Ismailia에서부터 공세를 시작하였다. Tel-el-Kebir 서쪽의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2천명의 별동대는 양동작전을 수행하면서 Arabi를 혼란시켰다. 침공군은 Mahuta와 Kassassin에서 각각 미약한 저항을 받았다. 제 1차 Kassassin 교전에서는 왕실 기병대 (Household Cavarly)의 돌격과 기병도 공격으로 이집트군을 간단하게 박살내 버렸다. 제 2차 Kassassin 교전은 9월 9일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제 13 벵갈 창기병대(13th Bengal Lancers)가 그 위용을 보여주었다. 영국군의 전진을 막지 못한 Arabi 군대의 잔여부대들은 Tel-el-Kebir로 퇴각했다. 이곳은 강력한 방어준비가 되어있었고, 총 2만명의 정규군과, 6천명의 비정규군, 각기 다른 구경의 대포 75문으로 채워져 있엇다.

 

 결정적 전투는 9월 12일, 13일 밤에 이뤄졌다. 영국군 주력은 총 17,500명의 병력과 대포 60문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 Tel-el-Kebir로 이동했다. 영국군은 첩보에 의하여 이집트인들이 해가 진 뒤에는 경계 태세를 낮춘다는 것을 알았기에 야간 진군을 시행한 것이었다. Arabi가 영국군이 계속 Kassassin 근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영국군은 나지막한 속삭임 이외의 소리는 모두 죽인채 5마일의 사막을 건너 기습을 기도했다.

 

 새벽에 시작된 공격은 좌익에 Highland Brigade가, 중앙에 Guards Brigade가, 우익에 Royal Irish Guards가 위치하면서 실시되었다. 이들은 신속하게 외곽 참호를 점거하고 착검한 상태로 백병전을 벌여, 얼마 안가 이집트군 방어병력을 압도하였다. 영국군 손실은 339명이었으며, 이들 중 243명은 Highland Brigade 소속이었다. 한편 이집트군 손실은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Arabi와 잔여 이집트군 병력들은 카이로로 도주했으나, 다음날 Arabi는 영국 기병대에게 체포당했다. Arabi는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실론 섬 (오늘날 스리랑카)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Arabi가 체포당하면서 모든 이집트인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사후 경과

 

 Arabi 대령이 제거된 이후, 이집트는 72년 뒤에 다른 분쟁이 발생할 때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집트 점령으로 인해 곧장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이집트의 속령이었던 수단도 함께 얻게 된 탓이다. 이집트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이는 더 큰 수단 문제에 빠져드는 원인이 된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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