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 The Battle of Bunker Hill 1775 (http://www.britishbattles.com/bunker-hill.htm) >
< 동영상 출처
[1] 유튜브 (http://www.youtube.com/watch?v=E1o7BJ0Piu0&feature=related) >
벙커 힐 전투 1775 (The Battle of Bunker Hill, 1775)
전투 : 벙커 힐
전쟁 : 미국 독립전쟁
시기 : 1775년 6월 17일
(벙커 힐 전투도)
장소 : 보스톤 항구 북변의 찰스타운 반도 (Charlestown Peninsula)
교전자 : 영국군 보스톤 수비대 vs. 미국 대륙군 (American Continental Army)
지휘관 : 영국 측은 Howe 소장, 미국 측은 Artemas Ward 장군 및 Israel Putnam 장군
병력 규모 : 영국 측은 2,400명, 미국 측은 1,500명
(벙커힐 전투도)
승자 : 영국 측이 미군을 찰스타운 반도에서 몰아내긴 했으나, 격심한 손실을 입었음. 당대에는 미군의 패전으로 간주되었으나, 이후로 점차 평가가 바뀌어 압제에 대해 영웅적으로 맞선 사례로 간주되게 됨.
(벙커힐 전투도, 2009년 존 매켄지 작)
전말 :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 총사령관 Gage 장군은, 도시의 West 지역의 언덕들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대륙군에 의하여 보스톤 항구에 갖혀있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Gage 장군은 항구 건너편의 찰스타운 반도를 점령키로 결심하게 된다. 영국군이 미처 행동하기 전에 1775년 6월 16일 밤, 메사추세츠 연대와 Putnam의 코네티컷 연대의 1,500명 가량의 미군이 찰스타운 반도의 브리즈 힐(Breed's Hill)과 벙커 힐(Bunker Hill)을 점거한다. 미군은 브리즈 힐에 보루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밤새 미친 듯이 작업한 결과 축성은 아침 무렵 완성된다. 찰스타운 반도의 미군의 존재는 영국 군함 Lively 호에 의하여 관측되며, 동 함선은 이들에게 포격을 가하였다.
점령 계획은 급작스럽게 물살을 타게 되어, 영국군은 미군을 공격하여 현 위치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Gage 장군을 보좌하기 위해 영국에서 보내진 3명의 장군들 중의 하나였던 Howe 소장이 지휘를 맡게 되었다.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미군은 축성진지를 연장하여 보루를 바닷가까지 닿게 함으로써 측면 공격의 여지를 없앴다. 벙커 힐에도 미군 병력들이 증원되었지만 이들 중에서 브리즈 힐의 전방진지까지 간 인원은 별로 없었다.
(전투 막바지의 미군 지휘관 워렌 장군의 전사, 존 트럼불(John Trumbull) 작)
Howe는 병력들과 함께 반도 남반부 연안에 상륙하여 경보병으로 하여금 미군 진지의 해안가와 연한 부분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Gage와 Howe의 영국군은 미군의 후방에 상륙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마 영국 고급 장교들은 미군의 정면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깔보았거나, 아니면 자군의 정면 공격 능력을 과신했던 것이 틀림 없는 듯 하다.
경보병의 공격은 심각한 인명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Howe는 이제 영국군 주력 병력을 가지고 보루에 대한 정면 공격을 실시했다. 이 공격 역시 미군의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인명피해와 함께 격퇴당했다. 이 공격 간에 영국군 좌익은 찰스타운 마을의 미국인들로부터 사격을 받았으며, 마을은 불타게 된다.
이 공격을 하기 전에, 원래는 야전 포병이 포격을 가해 둘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공교롭게도 6파운드 대포에 12파운드용 포탄이 지급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무산되게 된다.
2차 공격은 미군 진지 전역에 걸쳐 가해졌고, 역시 심각한 인명 피해와 함께 격퇴되고 만다.
마지막 공격은 미군 진지 중심부와 보루에 대하여 집중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이미 미군은 탄약이 고갈된 상황이었고, 이 공격으로 보루는 탈취되었으며, 미군은 퇴각하여 찰스타운 반도를 벗어나게 된다. 별다른 추격전은 없었다.
(브리즈 힐에서의 영국군의 공격)
사상자 : 영국군은 참가인원의 절반 가량인 1,150명이 죽거나 다친다. 미군 사상자는 약 450명으로 추산된다.
이후의 영향 :
영국군은 벙커 힐과 브리즈 힐을 탈취하여 요새화하게 되며, 그해 말에 보스톤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점령하고 있게 된다. 이 전투는 대륙군의 첫번째 작전이었으며,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작전이었다. 참호에서 수비하던 병력들이 끈덕지게 싸우고 있던 반면에, 지원병력으로서 응당 응원해 왔어야 할 벙커 힐에 있었던 병력들은 동료들을 돕기 위해 전진하기를 거부했으며, 장교들 사이에서도 누가 선임인지를 놓고 큰 혼란이 빚어졌다.
(찰스타운 뒤에서 본 브리즈 힐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
영국군도 이 전투를 통해 배워야 할 점이 여러가지였다. 고급 장교들은 세부적으로 전투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 지에 대하여 털끝만큼의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Howe는 정면 공격을 실시하는 실수를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이후의 모든 전투에서 그는 가능한 한 우회 공격(flanking assault)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규율이 해이했었으며 조직이 붕괴된 상태였다. 잘못된 탄약이 공급되었던 대포들은, 대대 화기들로서, 왕립 포병(Royal Artillery)이 아닌 일반 보병이 배치된 상태였다.
아래 삽화에서는 척탄병들이 일렬로 정렬하여 전진하고 있는데, 이는 고증상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최후 돌격 전까지는 병사들이 모여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명령으로 밀집대형을 풀고 사격 없이 이동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있는 방식이나, 정교한 퍼레이드 대형의 다른 그림(by even the smart turnout illustrated)의 방식의 전투는 당시 영국군의 훈련 수준으로 보아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브리즈 힐의 보루를 공격하는 영국 척탄병. 고증에는 맞지 않는 그림으로 보인다.)
우회 중대 (flank companies) (척탄병 및 경보병)라는 것이 사용되었던 것 역시, 이들만이 대대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믿을만한 병력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서술들에서 영국군은 실제에 비해 훨씬 더 규율잡히고 유능한 것으로 기술되어있는 편이다. 전쟁이 발발하게 만든 뉴 잉글랜드에서의 일련의 분쟁들의 원인이 영국 정규군의 규율 없음과 폭압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벙커힐 전투 소개 비디오 - 전투 개요, 리인액트 장면, 기념탑 역사 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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