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제인 맥크레아 사건, 1777 (Jane McCrea)

박용수 2014. 10. 27. 15:30

< 원문 출처 :  Jane McCrea (http://en.wikipedia.org/wiki/Jane_McCrea) >

 

< 사진 및 역자주 출처 :

  [1] (http://en.wikipedia.org/wiki/File:The_Death_of_Jane_McCrea_John_Vanderlyn_1804_crop.jpg)

  [2] Old Fort Edward, NY, A Site on a Revolutionary War Trip (http://www.revolutionaryday.com/usroute4/ftedward/default.htm)

  [3] Fort Ann, NY - A Site on a Revolutionary War Road Trip (http://www.revolutionaryday.com/usroute4/ftann/default.htm)

  [4] A forensic invistigation of Jane McCrea's final resting place(http://www.plymouth.edu/news/magazine/issue/story.html?id=243)

  [5] Jane McCrea (http://www.rootsweb.ancestry.com/~nwa/jane.html)

  [6] (http://www.thefreelibrary.com/Jane+McCrea,+remembered+as+a+victim+of+American+Indian+brutality,+may...-a061907816) >

 

 


 

제인 맥크레아 사건, 1777 (Jane McCrea)

 

 

개요

 

 제인 맥크레아 (1752년-1777년 6월 27일, Jane McCrea 혹은 McCrae, MacCrae; 숨질 당시 연령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르다- 역자주[6])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존 부르고인 중장 휘하의 영국군에 고용된 미국 인디언들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다. 부르고인 군에 근무하고 있던 왕당파 미국인(Loyalists)과 약혼한 관계에 있던 그녀가 살해당함에 따라 미국인들은 격분하게 되었고, 미군 지원자가 급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제인 맥크레아의 죽음', 1804년 존 밴더린 작[1])

 

 이 사건을 둘러싼 선전활동에 있어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부각되었고, 그녀가 왕당파와 연계된 인물(비록 그녀의 가족들은 주로 미군(Patriot)측에 복무하고 있었지만)이었다는 점에서 영국측이 왕당파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인상이 퍼져나가게 된다. 또한 부르고인이 그녀를 살해한 인디언을 처벌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영국군이 전장에서 보다 문명인답게 행동한다고 하는 영국측의 주장 역시도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향후 수 년간 미군측이 뉴욕 주 일대에서 모병활동을 하는데 대단히 수월해지게 된다.

 

 맥크레아의 애인은 이 사건에 비통해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일생과 살해과정

 

 제인 맥크레아는 뉴저지의 제임스 맥크레아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하여 그녀는 뉴욕 주 사라토가 근처에서 오빠인 존(즉, 존 맥크레아 대령 -역자 주[5])과 함께 살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와 약혼하게 된다.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녀의 두 남자 형제들(존 맥크레아(대령)와 사무엘 맥크레아 (일반병) 2명. 반면 나머지 형제인 크레이톤 맥크레아와 로버트 맥크레아는 각각 영국군 장교로 복무 - 역자 주 [5])은 미군에 자원입대하게 되고, 반면 그녀의 약혼자는 다른 왕당파 사람들과 함께 퀘벡으로 달아나게 된다. 1777년 여름, 존 부르고인 장군의 허드슨 강 일대에서의 작전이 이뤄지면서, 존 맥크레아 대령(Colonel John McCrea)은 알바니 카운티 민병대를 이끌고 영국군과 맞서게 된다. 한편,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존스는 부르고인 휘하의 왕당파 민병대 중의 한 곳에서 장교(lieutenant)로 복무하게 되었고, 타이콘데로가 요새 함락 후 이곳에 주둔하게 된다.

 

(1777년 7월 28일 제인 맥크레아가 처음으로 뭍혔던 장소. 이 근처에는 1777년 7월 27일 만들어진 토비아스 반 베흐텐의 무덤이 있으며,  그는 제임 맥크레아 학살사건 당시 맥크레아 대령의 부대에서 복무하던 장교였다. [2])

 

 맥크레아는 남자 형제들의 집을 떠나 타이콘데로가 요새에 있는 애인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에드워드 요새 부근의 한 마을에 도착한다. 그녀는 왕당파이자 영국군 준장 사이먼 프레이저(Simon Fraser)의 사촌이었던 중년 여인 사라 맥네일(Sara Mcneil)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1777년 7월 27일 아침, 와이안도트 족(Wyandot; 다른 이름으로 휴런(Huron) 족) 출신의 와이안도트 팬더(Le Loup or Wyandot Panther)가 이끄는 일군의 인디언들이 부르고인 군의 선발대로서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이들은 한 정착민 가족을 살해하고, 매복을 통하여 토비아스 반 베흐텐(Tobias Van Vechten) 중위와 다른 4명을 살해한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으며, 아무튼 제인 맥크레아와 사라 맥네일은 맥네일 저택에서 끌려나오게 되고 각자 따로 끌려가게 된다. 맥네일은 영국군 진지까지 무사히 인도되게 되는데, 여기서 맥네일 혹은 데이비드 존스가 맥크레아 특유의 머리가죽을 인디언이 들고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2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와이안도트 팬더와 또 한명의 인디언 전사가 맥크레아를 영국군 진지로 호위하던 중, 몸값에 대하여 다툼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한명이 맥크레아를 죽여 머리가죽을 벗겼으며, 최종적으로 와이안도트 팬더가 머리가죽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영국 장교였던 토마스 앤버리(Thomas Anburey)의 저술에 따르면 그녀가 인디언에게 끌려간 것은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끌려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설에는 존스가 인디언에게 그녀의 보호를 요청한 데에 따라 인디언의 호위를 받고 이동 중이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두번째 버전은 와이안도트 팬더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맥크레아는 사실 추격하던 미군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부르고인 전역을 연구하던 사학자 제임스 피니 박스터(James Phinney Baxter)는 그의 1887년 저술에서 이 이야기를 지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 맥크레아의 시체에 대한 사후 검시 결과 탄환 흔적은 남아있지만 토마호크로 인한 부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

 

 부르고인은 이 살해사건에 대하여 전해듣게 되자, 격분하여 인디언 캠프로 찾아가 용의자를 인도할 것을 요구함과 동시에 범인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때 프레이저 장군과 룩 데라콩(Luc de la Corne)은 그렇게 할 경우 인디언들이 배반하여 떠나게 되며, 북쪽으로 도주하면서 보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부르고인은 참을 수밖에 없었고, 해당 인디언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요새로 가는 길에 서있는 제인 맥크레아의 비석. 여기에 씌어진 글은 많이 지워져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으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는 기원후 1777년 이 근방의 친척을 만나러가던 중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17세 소녀 제인 맥크레아의 시신이 잠들어있다. ...의 명예와 정의를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 중의 하나였던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녀가 ... 했던 영국 장교 ... 떠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을 위한 작은 정성으로 그녀의 조카인 사라 한나 페인이 기원후 1852년 이 비석을 세우다.' [3])

 

 맥크레아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당시 기준으로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 11일에는 펜실베니아에서 이 사건이 출판되었고, 8월 22일에는 버지니아에까지 소식이 퍼졌다. 이런 이야기는 전해지면서 과장이 더해지곤 하는데, 이것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인디언들이 왕당파(Loyalists)와 독립주의자(Patriots)들을 가리지 않고 다 죽인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부르고인은 애초에 인디언들을 이용해 식민지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선전전 형태는 8월 17일 베닝톤 전투(Battle of Bennington) 전투 후에 포로 처우 문제로 부르고인이 미군 장군인 호라시오 게이츠(Horatio Gates)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에 더욱 불붙게 된다. 다음은 게이츠 장군이 부르고인에게 보낸 답장으로서, 광범위하게 인쇄되어 배포되게 된다:

 

 미국 야만인(인디언)들이 전쟁 포로들을 난도질하고 머리가죽을 벗긴다는 사실은 그다지 새롭거나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훌륭한 신사로서 병사들과 학자들을 이끌고 계신 고명하신 부르고인 중장님께서 이러한 야만인들을 고용하시여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의 후손들의 머리가죽을 벗긴다는 사실, 그리고 중장님께서는 그렇게 야만적으로 벗긴 각각의 머리가죽만큼 댓가를 치르셔야 한다는 사실은 영국 본토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사실일 것입니다... 중략 ... 한눈에 반할만큼 아름다운 숙녀이자 정숙하고 우러러볼만한 여성이었으며, 귀하 군대의 장교와도 약혼까지 한 맥크레아 양은 ... [중략] 숲속으로 끌려가 충격적인 방식으로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난도질당했습니다 ... [후략]


- 게이츠 장군이 부르고인 장군에게

 


 소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강조했으며, "그녀가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정숙했으며 지혜로왔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대단히 길고 아름다왔으며, 그 길이가 약 1 1/4 야드 였다"라고 묘사하였다. 당대에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이 진술한 내용은 제임스 윌킨스(James Wilkinson)에 의한 것으로, 그는 그녀가 "평범한 환경의 정직한 가문에서 자란 시골 처녀로서, 특별히 아름답거나 대단할 것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죽음과, 이와 비슷한 다른 습격 사건들에서의 죽음들로 인하여 부르고인 원정에 대한 저항이 증대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라토가 전투에서의 패배가 촉진되게 된다. 이 효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증대되어 1779년 설리반 원정(Sullivan Expedition)을 포함한 이후의 전쟁에서도 이 사건이 계속 선전 도구로써 쓰이게 된다.

 

 데이비드 존스는 이후 결혼하지 않은 채 캐나다에 정착하였다. 포트 에드워드 마을 남쪽 3마일 지점에는 제인 맥크레아가 죽은 장소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이 이야기는 다시 각색되어 유명한 소설인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에도 비슷한 이야기로서 소개되었다.

 

 

사후 유체 발굴

 

 맥크레아의 유체는 3번 옮겨졌다. 우선 1822년과 1852년에 이장되었다. 2003년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시신 발굴이 실시되었다. 이때 무덤 속에 맥크레아와 함께 사라 맥네일의 시신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두 사람의 시신은 대체로 완전한 상태이긴 했지만, 맥크레아의 시신의 경우 머리부분(skull)이 남아있지 않았다. 시신들은 2005년에 다시 한번 발굴되어 검사를 실시했고, 이제는 각각 별도의 무덤에 안장되어 있다.

  

(2005년 4월 23일, 제인 맥크레아 무덤에 대한 발굴 장면. 사진에 보이는 관은 2003년에 새로 교체했던 것이다.[4])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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