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출처 : Battle of Fort Anne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Fort_Anne) >
< 사진 출처 :
[1] Battle of Fort Anne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Fort_Anne)
[2] Fort Ann, NY - A Site on a Revolutionary War Road Trip (http://www.revolutionaryday.com/usroute4/ftann/default.htm)
[3] (http://www.fortann.us/Historical-Society-Walking-Tour.pdf)
앤 요새 전투, 1777 (Battle of Fort Anne)
개요
이 전투는 1777년 7월 8일 발생한 전투로서, 타이콘데로가 요새(Fort Ticonderoga)에서 퇴각하던 대륙군 부대와 이를 추격하던 존 부르고인(John Burgoyne)의 영국군 부대 첨병간에 발생한 전투이며, 미국 독립전쟁 사라토가 전역(Saratoga campaign)에서 발생한 일련의 전투들 중에서 초기에 벌어진 전투에 해당한다.
(1780년 당시의 지역지도. 전장들이 별도로 표기되어 있음. [1])
미군이 타이콘데로가 요새에서 도주한 이후, 부르고인은 이에 놀라 최대한 신속하게 이들을 추격하게 된다. 미군 주력은 인디펜던스 요새(Fort Independence)에서 출발하여 허바톤(Hubbardton) 가도를 따라갔고, 부상자와 병자들, 주민들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들은 동 요새를 출발하여 챔플레인 호수(Lake Champlain)의 수로를 통해 스케네스보로(Skenesboro)까지 이동한 뒤, 다시 육로를 통해 에드워드 요새(Fort Edward)로 향했다. 이 그룹에는 무장병력이 약 600명 가량 되었는데, 앤 요새(Fort Anne)에서 휴식하던 도중 부르고인 군의 선발 중대에게 따라잡히게 된다. 이 영국군 선발 중대는 미군에 비해 숫자상 열세였으므로, 증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미군은 아직 숫자상 유리한 상황이었으므로, 영국군을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요새 북방 약 1km 지점에서 영국군 진지를 거의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영국군 증원군이 도달했다는 함성(war whoops; 인디언 등이 지르는 함성) 소리가 들리고 미군은 요새로 퇴각한다. 그러나 이 증원군이란 영국군 장교 1명으로 이뤄진 책략에 불과했으며, 이로써 영국군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결국 부르고인군이 추가로 도착하게 되면서 미군은 앤 요새에서 에드워드 요새로 퇴각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앤 요새에서 영국군이 미군이 사용하던 성조기의 원형을 노획했다고 하며, 이것이 최초로 미군이 성조기를 사용한 전투라고 알려져 있기는 한데, 이는 아무래도 사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배경
7월 5-6일 밤,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지키고 있던 대륙군은 존 부르고인의 8000여명의 영국군이 접근하자, 아서 생클레어 장군(General Arthur St. Slair)의 지시에 따라 요새를 비우게 된다. 부르고인의 병력들이 요새를 감제하는 디파이언스 산(Mount Defiance) 정상에 포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미군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미군은 타이콘데로가 요새 및 주변 방어진지를 벗어나 인디펜던스 요새 및 허바톤 가도를 통해 탈출한다. 대부분 뉴 햄프셔 출신이었던 피어스 롱 대령(Colonel Pierse Long) 휘하에 있던 약 600명의 경우, 5척의 무장 갤리선과 200여척의 소형 수송선박으로 구성된 선단을 이용하여 호수를 통해 탈출하게 된다. 이 선박에는 병자들과 가능한 많은 양의 보급품, 무기 등을 실었다. 롱 대령은 타이콘데로가 요새와 인디펜던스 산 사이에 놓인 통나무 붐과 부교로 인하여 영국군 추격은 충분히 지연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호수 남단 스케네스보로를 향한 항해를 여유롭게 실시하였다.
(현재 관광지가 되어있는 앤 요새 마을(Fort Ann Village)의 한 은행 지점 건물. 당시의 특화점(blockhouse)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2])
추격전
그러나 이러한 수상 방어시설로 인해 영국군의 추격은 별로 지연되지가 않았다. 부르고인은 7월 6일 아침 미군의 도주 소식을 듣자마자 방어 시설물들을 파괴하라고 지시한다. 잘 구축된 포대의 사격으로 인하여 단 30분만에 교량과 붐은 장애물로서의 효과를 상실하고 만다. 이 시점에 이르러, 부르고인은 엄중한 전투 대형 유지를 포기하고 가능한 한 빨리 남쪽으로 적들을 추격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본인 역시 배를 타고 남쪽으로의 추격전에 가세하였다. 순풍에 힘입어 부르고인은 7월 6일 늦은 시각에 이르러 스케스네스보로에서 약 3마일 지점까지 도달하게 되다. 미국인들은 이곳에 단지 2시간 일찍 도착한 상태였으며, 고작 말뚝 장애물(stockade)로 구축한 진지만을 설치한 상태였다. 부르고인은 동 진지를 포위하고 앤 요새로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존 힐 중령(Lieutenant Colonel John Hill) 지휘하에 제 9,20,21 연대의 200여명들 스케네스보로 남단 지점에 상륙시켰다.
부르고인군의 함대가 도착하여 사격을 개시할 무렵, 미국인들은 스케네스보로 폭포 주변에서 우드 크릭(Wood Creek)을 향해 배를 지상운반(portaging)하고 있던 중이었다. 미국인들은 엔터프라이즈 호, 리버티 호, 게이츠 호를 파괴하였으나, 트럼불 호와 리벤지 호는 영국인들에게 빼았겼다. 그 과정에서 미군들의 보급품 다수가 파괴되거나 영국군 손으로 넘어갔다. 미군들은 혼란 속에 앤 요새로 도주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스케네스보로의 시설물들에 방화를 실시하여 결국 이곳 시설물 전체는 불바다로 변하게 된다. 미군들이 앤 요새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헨리 반 렌셀라(Henry Van Rensselaer) 휘하의 400명의 뉴욕 민병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타이콘데로가 요새 실함 소식을 전해들은 필립 슐러 장군(General Philip Schuyler)이 에드워드 요새로부터 파견한 병력들이었다.
힐 중령 휘하의 영국군은 도로로 진입하여 앤 요새 1마일 지점까지 남진하는 과정에서, 미군 본대 뒤에 뒤쳐져있던 미군 보급품들과 병자, 부상자, 미군 지지자들을 노획할 수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 영국군은 제임스 그레이 대위(Captain James Gray) 휘하의 약 170명의 미군 정찰대와 조우하게 된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당하면서 미군은 요새로 퇴각하게 된다.
(현장에 세워져 있는 전투 기념비. [3])
전투
7월 8일 아침, 항복하는 것으로 위장한 미군 간첩 한명이 힐 중령에게 요새에는 병력 1000명이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힐은 숫자상 우세한 적을 공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부르고인에게 상황을 알리는 전령을 보낸다. 부르고인은 20연대와 21연대에게 급속행군(quick-march)하여 앤 요새 공격을 지원하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날씨 문제로 행군이 지연되었고 결국 이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앞서의 간첩은 다시 앤 요새로 돌아가서 영국군의 위치와 병력 규모에 대하여 보고하게 된다.
롱 대령은 추격대의 영국군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영국군에 공격을 가할 것을 결심한다. 미군은 가능한 한 은밀하게 이동하여 아직 도로상에 위치하고 있던 영국군을 포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힐의 병력들은 측방의 미군이 이동하는 것을 눈치채고 일부 부상자들을 버려둔채 고지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버려진 부상자들은 미군의 포로가 된다. 한 영국 장교의 회고에 따르면 이때 미군이 잘 지향된 강력한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지속되었다. 양측 탄약이 거의 바닥난 시점에서 미군은 영국군을 거의 포위한 상태였다. 그 순간 북쪽에서 인디언 전투 함성이 울려퍼졌고, 이에 미군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요새로 도주하게 된다. 이 당시 반 렌셀라는 엉덩이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실제로 인디언은 없었다. 그 곳에 있었던 것은 단 1명의 영국군 장교로서, 부르고인의 부 보급관(deputy quartermaster)이었던 9연대 소속 존 머니(John Money)였던 것이다. 그가 일군의 인디언들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인디언들이 미군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자, 그는 홀홀단신으로 이들 앞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그가 내지른 인디언 전투 함성이 전투를 종결시켰다.
이후의 일들
요새로 돌아간 미국인들은 회의를 열었다. 영국군으로부터 석방된 한 여성으로부터 약 2000명 이상의 영국군이 필립스 장군(General Phillips) 지휘하에 급속 접근 중이라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롱 대령의 병력들은 탄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으며, 결국 요새를 불태우고 에드워드 요새로 퇴각하게 된다. 양측 모두 이 전투를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영국측은 성공적으로 방어했다는 측면에서, 미국측은 적을 거의 항복 직전까지 몰고 갔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고 있다. 사실 미군이 이제껏 벌인 승리들은 보다 대규모인 영국군 본대의 앞에 있던 첨병부대에 대한 승리들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반감되는 측면이 있다.
한 영국군 장교가 이 전투 내지는 미군 철수 과정에서 일종의 연대 깃발을 노획하게 된다. 이들 깃발들 중 하나가 13개의 붉고 흰 줄무늬와 별들로 이뤄진 깃발로서 성조기 형태의 최초 형태를 지닌 것이었다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떨어지는데, 당시 대륙의회에서 깃발 디자인을 승인한 데 대한 소식이 전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에 따라 깃발을 만드는 시간, 그리고 그 깃발이 그렇게 멀리 있는 곳에 위치한 실전부대에게 전해지는 시간 등을 고려했을 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노획된 것으로 전해내려오는 깃발을 보면 오늘날의 미국 성조기와는 거의 유사점을 찾을 수가 없다.
'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번역] 스탠윅스 요새 포위전, 1777 (Siege of Fort Stanwix) (0) | 2014.10.27 |
---|---|
[스크랩] [번역] 제인 맥크레아 사건, 1777 (Jane McCrea) (0) | 2014.10.27 |
[스크랩] [번역] 프리먼스 팜 전투, 1777 (The Battle of Freeman`s Farm) (1차 사라토가 전투) (0) | 2014.10.27 |
[스크랩] [번역] 영국 척탄병 행진곡 (The British Grenadiers) (0) | 2014.10.27 |
[스크랩] [번역] 브랜디와인 크릭 전투 1777 (The Battle of Brandywine Creek 1777) (0) | 201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