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자료

[스크랩] [스크랩] 조선시대 신호 체계 - 문화재청

박용수 2014. 10. 27. 16:23

< 원문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cha.korea.kr/gonews/branch.do?act=detailView&dataId=155700216&sectionId=add_cate_1_sec_1&type=news&currPage=1&flComment=1&flReply=0) >

 

 


 

 

 




도성에서 운용된 군호

 조선시대에 암호는 군호軍號라 하였으며, 다른 말로는 언적言的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군호는 도성과 군중軍中 안팎을 순시하는 순라군 사이의 상호 연락 신호로 운용되었다.

 

 도성은 국왕이 있는 곳이므로 주야를 불문하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특히 야간에는 2경(밤 10시)부터 5경(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시행되었다.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2경에 종을 28번 치고 끝나는 5경에 33번 쳤는데 2경의 것을 인정人定, 5경의 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도성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열며,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에 열었다. 통행금지 시간 동안에 수상한 자를 경계하기 위해 순라군 사이에 사용된 신호가 바로 군호였다.

 

 도성의 군호는 매일 신시申時(오후 4시경)에 병조의 참의參議나 참지參知 중 1명이 3자 이내의 군호를 직접 손으로 써서 밀봉하여 국왕에게 올리면 국왕은 이를 본 후 다시 밀봉하여 병조에 내렸다. 병조에 내려진 군호는 다시 각 처소에 전달되는데, 광화문을 지키는 호군護軍과 궁성의 경수소警守所 및 도성의 각 성문의 수직자들이 초저녁에 병조로 와서 군호를 받아 갔다. 그러나 때로는 기강이 해이해져 군호를 받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때는 해당 순장巡將과 이를 감독하는 선전관이 감옥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인정 후에는 정병 2명이 요령을 흔들며 궁성을 순회하는데 파루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군호를 물어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은 통행금지 위반자로 취급되어 다음 날 곤장의 처벌을 받았다.

 

 군호는 대개 병조의 관리가 올린대로 시행되는데, 주로 알기 쉬운 글자로 정하고, 흥망이나 득상得喪 등에 관계되는 문자는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숙종 때에 이러한 관례에서 벗어난 군호를 올리는 관리가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경각심을 부여하기 위하여 군호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생각한 글자를 미리 알려주어 군호로 올리도록 하였다.

 


군중에서 운용된 군호

 조선시대에 군호는 군중에서도 운용되었다. 군중의 군호 운영은 군사 기밀을 유지하고 적의 침투를 차단하는데 긴요하기 때문에 군호 위반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조선의 제5대 임금인 문종이 편찬한 『오위진법五衛陣法』의 진중 군법에 의하면, 진중에서 야간 통행금지를 어기고 군호를 잊어버린 자는 목을 베게 되어 있었다. 대개 용병에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공격작전을 진행할 때면 혼란한 사태를 대비하고 간첩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장主將이 군호를 내려서 병사들이 서로 맞추어 보게 했는데, 그것은 작전의 성패가 기밀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위진법』의 군호에 대한 진중 군법은 육군과 수군은 물론이고 중국에 가는 사신들을 호위하는 호송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군호는 대개 암기하기 쉽도록 알기 쉬운 글자를 택하였다. 왕자의 난 때 정안군(태종)이 발령한 군호는 ‘산성山城’이었고,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첫 출전하면서 발령한 군호는 ‘용호龍虎’였으며, 복병에게는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별도로 ‘산수山水’로 정하였다. 또 인조 때 역모 사건에서 그 주동자들이 사용한 군호도 ‘화목火木’으로 역시 간편한 글자를 취하였다.



발병부의 암호명령 체계

 발병부發兵符는 국왕이 군대를 움직이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암호 명령 체계였다. 그 모양은 원형이며, 한 면에 ‘발병’이라 쓰고, 다른 한 면에 ‘모도관찰사某道觀察使’, ‘절도사節度使’라 쓰며 제진諸鎭은 진호鎭號를 썼다. 국왕은 그 중간을 나누어 우반부는 관찰사, 절도사 및 제진에 주고, 좌반부는 왕궁에 보관하되 만약 군대를 발동하고자 할 때에는 좌반부와 국왕의 명령서를 함께 보냈다. 장수들은 임금이 보낸 좌반부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반부와 맞추어 부합되는 것을 확인한 후 군대를 발동하였다.

 

 만약 사변이 발생했거나 도적을 잡을 때 혹은 나쁜 짐승이 사람이나 가축을 해칠 때에는 발병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군대를 출동시킨 후에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출동하는 군대는 5대隊(125명)을 초과할 수 없었다.

 

 발병부 외에도 국왕이 군국의 긴급사태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선전표신宣傳標信을 사용하여 명령을 전달하였는데, 그 모양은 원형이며 한 면에는 ‘선전’이라 쓰고 다른 한 면에는 어압御押이 찍혀 있었다.

 

 발병부나 선전표신은 역모 사건이 빈번했던 조선시대에 군사 지휘권을 임금이 엄격하게 통제함으로써 반역에 이용되는 군사 동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효과적인 암호체계라 할 수 있다.

 


군사 지휘의 신표

 전근대사회에서 군사 지휘관이 예하 부대를 수족처럼 부리기 위해서는 명령의 전달 체계가 보장되어야 했다. 조선시대의 군사 지휘관은 문서 또는 구두 명령을 예하 지휘관에게 하달할 때 명령 전달자에게 미리 정해 놓은 신표信標(암호)를 소지시킴으로써 명령 전달자의 신원 보증과 명령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군사 지휘관이 국왕일 경우에 명령 전달자는 신표로서 홍령기紅令旗 또는 신전信箭을 소지하였다. 홍령기는 붉은 바탕의 천에 청색 글씨로 ‘영令’자를 썼으며, 신전은 마름모꼴의 동판으로 된 화살촉에 역시 ‘영令’자를 뚫을 새김하고 화살대 중간에 ‘신信’자가 쓰여진 삼각형의 비단천을 매달았다.

 

 군사 지휘관이 장수일 경우에 명령 전달자는 영기令旗, 영전令箭 또는 관이전貫耳箭을 소지하였다. 영기는 청색 바탕의 천에 붉은 글씨로 ‘영令’자를 쓴 깃발이며, 영전은 영자 모양의 화살촉 한 면에 ‘모영대장某營大將’을 다른 한 면에는 ‘영令’자를 쓴 화살이다. 관이전은 길이가 짧고 뾰족한 촉을 가진 화살인데, 원래 법을 어긴 자에게 이 화살로 그 귀를 꿰어서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명령 전달자가 이 세 가지 물건 중 하나를 갖추지 않으면, 비록 주장이 직접 와도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며, 영내에 출입할 수도 없었다.

 


전술 신호 체계

 각종 기치와 음향신호 도구로 이루어지는 전술 신호 체계를 현대적 의미의 암호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들이 등장했던 초기에는 암호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술 신호 방법은 시각신호와 음향신호로 구별되었다. 시각신호는 기치를 이용하여 부대 단위를 표시하고 전술 명령을 실행하며 또 연기나 불빛을 이용하는 봉수 신호로 적의 침입을 국왕에게 알리는 제도였다.

 중국의 무경칠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병법서로 알려진 『육도六韜』에 의하면 신호용구로 징·북·기치가 등장한다. 잘 알려진 『손자병법』에는 형명形名 즉 기치와 금고로 많은 부대를 적은 부대처럼 지휘하게 되는데, 말로 지휘하면 들리지 않으므로 징과 북을 사용하고, 눈에 서로 보이지 않으므로 기치를 사용하며, 야간 작전 시에는 불빛과 북소리를 주로 사용하고, 주간 작전 시에는 기치를 주로 사용한다라고 형명의 운용에 대한 원칙이 언급되어 있다. 이후 형명의 운용은 시대마다 병법가들마다 약간씩 변형시켜 운용되어 왔으나 기본적인 운용원리는 모두 같다. 즉 북을 치면 전진하고, 징을 울리면 후퇴하며, 각 부대는 방위에 따라 오방기를 사용하는데 좌군은 청룡기靑龍旗, 우군은 백호기白虎旗, 전군은 주작기朱雀旗, 후군은 현무기玄武旗, 중군은 등사기蛇旗를 사용하며 초요기招搖旗로 이들 모두를 지휘한다. 또 깃발이 좌측을 가리키면 병사들은 좌측으로, 우측을 가리키면 우측으로 전환한다.

 

 조선시대의 형명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오위진법』의 제도에 따라 운용되었는데, 그 종류를 보면 대개 오방색을 띤 각종 기치들과 큰 나팔·작은 나팔·북·징·방울·기병용의 작은 북인 비,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작은 북인 도 등과 같은 음향신호 도구가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저술한 『기효신서』를 모방한 『병학지남』의 제도에 따라 형명이 운용되었는데 인기認旗와 오방기가 등장하고, 음향신호 도구로서 삼안총·태평소·나발·바라·라·북·솔발·징·종 등이 있었다. 조선 전기와 후기의 형명제도는 이처럼 서로 다르고 특히 기치의 운용법은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통제사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로 예하 장수를 호출했으나 조선 후기에 대장은 인기認旗를 이용하여 호출했다. 또 나발을 불고나서 기치로 명령을 내리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삼안총으로 호포號砲를 쏜 후 기치로 명령을 내렸다.

 


글·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 겸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연합콘텐츠, 한국콘텐츠진흥원, 국립민속박물관  

 

풋터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