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57~ pp 67 >
< 역주 및 보충사진 출처:
[1] (http://en.wikipedia.org/wiki/Hayreddin_Barbarossa)
[2] (http://en.wikipedia.org/wiki/Dey)
[3] (http://en.wikipedia.org/wiki/Pasha)
[4] (http://en.wikipedia.org/wiki/Bey)
>
제 3장. 지중해에서의 해적
(Chapter 3. Piracy in the Mediterranean)
기원전 78년, 파르마쿠사 섬(island of Pharmacusa)의 해적들이 카리아(Caria)(오늘날의 터키) 해안에서 한 상선과 마주쳤다. 속도가 느린 상선은 해적들의 갤리(galley)선에 의해 신속하게 따라잡혔다. 갤리선은 노예들이 젓는 노로 추진된다. 해적들이 상선에 오르자, 승객 대부분은 공포에 떨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젊은 로마 귀족이었던 단 한명의 승객은 해적들을 무시하고 읽던 책을 계속 읽고 있었다. 그의 무신경한 태도에 해적들은 분노하게 된다. 이어 해적들이 승객들에 대한 몸값을 정하기 시작하자, 해적 두목은 이 귀족에 대해 적정 몸값인 10 탈렌트의 2배인 20 탈렌트를 매겨 본때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에 로마 귀족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오만하게 대답한다, "만약 너희들이 일을 제대로 한다면, 내 몸값이 적어도 50 탈렌트는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젊은 귀족의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큰 돈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결과 해적들은 이 젊은 귀족을 38일간이나 데리고 있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해적들과 우호적으로 지냈고, 해적들과 육상 경주를 하거나, 자신의 시를 읽어주거나, 연설 연습을 하거나 하였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해적들에게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는데, 즉 자신이 일단 풀려나게 되면 다시 팔마쿠사로 돌아와 해적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적들은 이 젊은이를 허풍쟁이로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형을 내리겠다는 위협을 단지 농담으로 생각하였다.
몸값이 도착하고 이 젊은이는 소아시아의 밀레투스(Miletus)로 보내졌다. 젊은이는 즉각 4척의 전투 갤리와 500명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팔마쿠사로 돌아온다. 예상한 바와 같이, 해적들은 젊은이가 도착한 시점에서 최근 벌어들인 엄청난 돈에 취해 축제를 벌이고 있었고, 결코 로마군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귀족은 350명의 해적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불했던 50 탈렌트도 확보한다. 그는 이어 페르가뭄(Pergamum)으로 출발하여 집정관(Praetor)에게 해적들을 처형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한다. 집정관은 머뭇거렸지만, 이 젊은이는 독단으로 형을 집행한다. 한편 해적들 중 30명에게는 자신을 잘 대해 주었던 데에 대한 보답을 해 준다: 이들에 대해서는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전에 목을 그어서 괴로움을 덜어 주었던 것이다.
이 오만한 젊은 로마 귀족은 누구였을까?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였다. 시저는 당시 술라(Sulla)에 의하여 로마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였고, 킬리키안 해적(Cilician pirates)들에게 붙잡혔을 당시에는 웅변술을 공부하기 위해 로도스 섬(Rhodes)으로 가고 있던 길이었다. 그가 붙잡히던 시절,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판치고 있었다. 시저의 가혹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지중해에서는 여러 해 동안 해적질이 계속 벌어졌으며, 로마가 강력한 대책을 취하기 전까지 계속 로마와 기타 민족들의 뱃길을 괴롭혔다.
지중해에서의 해적질은 오랜 뿌리를 갖고 있었다. 고대의 저술가들은 그리스와 로마인들 모두 해적들의 공격으로 고생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중해에서의 해적질 또한 주기성을 갖고 있었다. 지역에 정치적 혼란이 펼쳐지면 해적질이 번성하였다; 강력한 국가들이 지중해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하면 해적질은 사그러들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 해적질도 급증하였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고 스페인으로부터 무어인들이 쫓겨나던 시기가 찾아오면, 북아프리카를 기지로 한 무슬림들에 의한 새로운 해적질의 시대가 시작된다. 보다 이후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봉기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동부 지중해 지역에 해적질이 번성한다.
지중해에서는 왜 수천년간 해적질이 번창하였는가? 이 사례에서도 지역이 갖고 있는 특정한 조건들이 해적질을 부추기게 된다. 지중해의 지형 조건은 해적질에 유리했다. 지중해는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이기 때문에, 상선들은 통상 해안가와 가까이 항해하였다. 예를 들어 지브롤터(Gibraltar)에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이르는 300마일 길이의 스페인 해안은 북아프리카로부터 대략 120마일 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다. 카르타헤나의 경우 알제리(Algiers)로부터는 서북서 230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모로코와 알제리의 해적들은 지중해로 출입하는 상선들을 공격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튀니지와 시실리 사이에서 지중해는 100마일 미만의 폭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이로써 튀니지는 지중해 동부로 교역하러 가는 상선들을 노리는 해적들에게 이상적인 항구 역할을 하였다. 시실리 동쪽으로 가면 다시 넓어지긴 하지만, 다시 그리스 섬들과 리비아 사이의 지점에 도달하면 다시 250마일 미만으로 좁아지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의 수많은 군도들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향하는 접근로를 감제하고 있다.
지리 조건은 또한 항해 기술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지중해가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점에서, 발달된 항법 기술의 필요성이 대단히 적어지게 된다. 선원들은 특별한 항법기술 없이 만에서 만으로,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는 방식을 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방향 잡기는 훨씬 간단해졌지만, 대신 해안에 달라붙어 항해하게 되므로 해적들의 공격에는 취약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지중해 국가들간의 빈번한 정치적 혼란도 이 지역에서 해적질이 번창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경우 엄청나게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강력한 중앙 정부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못했고, 따라서 해적질을 근절하거나 제한할 수가 없었다. 헬레니즘 시기 후반부(기원전 323-31년)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쇠퇴하게 되면서, 해적질은 지중해 전체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해적질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수행자이기도 하였다. 초기 그리스인들이 상업을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해적질에 대해서는 별로 불명예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해적질과 습격이야말로 남자다운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에서는 해적질은 흔한 활동이었으며, 이들의 먹잇감은 종종 다른 도시국가의 그리스인들이었다. 19세기에도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해적질은 합법적인 사업으로 비춰졌고, 그리스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해적질에 나서게 된다.
로마 역시도 해적질의 피해자였다. 농업 중심의 육상 국가였던 로마는 해상 무역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고대 로마는 해양 지배권을 카르타고나 기타 국가들에게 그냥 맡겨두었었다. 포에니 전쟁(Punic War)(264-241 BC, 218-201 BC, 149-146 BC)이 남긴 부정적인 영향은, 카르타고가 패망함에 따라 로마인들을 노리는 해적들을 이제 로마가 상대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해상 순찰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 패망 이후 해적질은 급증하게 된다. 이 상황은 로마가 로도스 섬(Rhodes)을 167-166 BC 무렵 정복하면서 더욱 심각해진다. 당시 로도스 해군은 동부 지중해의 해적질을 억제하고 있었다. 100 BC 무렵이 되면 해적질은 로마에게 심각한 위협이되어, 로마로의 곡물 수송까지 차단하게 된다.
시저가 해적들을 붙잡았을 시기의 로마는 이미 곡물과 기타 물품들의 해상 수송에 의존하는 교역 국가(trading nation)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전으로 곤란한 상황에, 해적들이 로마로의 식량 공급을 교란할 지경으로 성장해 있었다. 마침내 기원전 74년, 지방총독(Proconsul) 마커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가 해적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마커스 안토니우스가 임무에 실패하자, 폼페이(Pompey)가 보다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아 해적들을 소탕한다. 그는 지중해 전체와, 해안에서부터 50마일까지의 내륙지역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폼페이는 500척의 함대와 보병 12000명, 기병 7000명을 가지고 단지 3개월만에 해상에서 해적들을 휩쓸어버렸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일부 변방 지역에서는 해적들이 살아남았으며, 이로 인해 로마는 흑해 및 기타 지역에 강력한 함대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로마가 장기간 해안선을 장악하고, 이로써 해방구를 제거함에 따라 해적질은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기원후 5세기 무렵 로마의 힘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해적질은 다시 시작되게 된다. 이번에도 정치적 혼란과 여러 해방구의 발생이 해적질을 어업과 해상무역보다 매력적인 직업으로 만들어주게 된다.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해적으로 바바리 해적(Barbary corsair)을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연안의 여러 소공국(small principalities)들을 근거지로 하는 바바리 해적들은 지중해의 선박들을 거의 400여년 이상 먹잇감으로 삼아왔다. 이들은 배를 나포하고, 화물을 빼았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붙잡았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연간 조공(annual tribute)의 형태로 뇌물을 바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교역에 미치는 악영향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때때로 유럽국가들의 해군이 강제력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이들 해적질을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동쪽에서는 베네치아와 말타의 해적들이 그리스 해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비 기독교도의 경우 누구든지 먹잇감으로 삼았으며, 터키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정교회 신도들도 공격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이 단지 희생자일 뿐만은 아니었다; 이들 역시도 해적질을 했다. 그리스 지방 총독들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자기 관할 해역에서 해적질을 용인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도 비슷한 활동들이 지속되었다.
비록 그리스의 섬 지역에서 해적질이 번성했지만, 이들이 바바리 해적만큼의 악명을 떨치는 일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 드문 예외 사례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가 벌인 독립전쟁(Greek War for Independence) 당시의 해적질 급증 시기이다. 1820년대 무렵 그리스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시기, 그리스 군도 지역의 해적질은 대영제국이 프랑스 및 러시아와 연합하여 행동함으로써 반란을 종식시키고, 이들 그리스 반란군들이 벌이는 해적질을 제압하러 나서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바바리 해적들과 그리스 해적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이들은 각각의 주민들의 경제적 삶 속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바바리 제국들에서의 해적질은 이 행위 자체가 갖는 경제성이 낮아진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이는 해적질이 바바리 국가들의 삶 속에 내재적으로 녹아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바바리 해적들 만큼은 아니지만, 그리스인들의 사회 속에도 해적질은 잘 융합되어 있었다.
해적질을 가능케하는 3가지 조건들은 바바리 국가들에서 해적질이 성장하고 장기화되는 데에도 명백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 지역은 해적질에 유리하였는데, 지중해라는 상대적으로 폐쇄된 공간으로 말미암아 해적들이 먹잇감을 찾아 공격하기 용이하였다. 또한 바바리 해적들은 항상 육상의 안전한 해방구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바바리 해적들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해적들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환경 또한 이들에게 유리했다. 또한 주민들 사이에도 해적질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었으며, 주민들은 해적질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유럽측 해군력이 이들 바바리 해적들의 발진기지들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도 이들 해적들의 합법성을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주게 된다.
바바리 해적 문제는 해적질의 정의(定義)라는 점에 있어서도 쟁점이 되는 사안이다. 바바리 해적들은 자신들을 해적이라기보다는 이슬람 전사(soldiers of Islam)로 생각하여, 자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 모든 국가들과 전쟁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특정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게 되더라도, 이는 단지 자신들이 편할 때 철회할 수 있는 일시적인 휴전으로 생각하였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이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였고, 해적으로 대우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바바리 해적들을 공공의 적(universal enemies of society)으로는 대우하지 않았으며,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처럼 처형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유럽 국가들은 바바리 해적들을 잡아 몸값을 받거나, 해적들에게 잡힌 유럽인들과 교환하거나, 아니면 갤리선의 노예로 사용하였다.
바바리 해적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 해적들은 깊숙히 뿌리내린 지방민들의 풍습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해적 역시도 해적질의 3가지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의 섬지방들은 해적질에 이상적이었다. 그리스 해적들은 수많은 섬들 사이에 숨을 수 있었으며, 레판트 지역에서 무역하는 상선들을 급습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해적질은 내재적인 것이었으므로, 이 지역에는 항상 다소간에 해적질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1820년대의 정치적 혼란은 이 지역의 해적질을 급증하게 만든다. 정치적 상황이 안정화되자, 해적질의 정도는 지역 해상 열강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수준까지 빠르게 축소되었다. 그리스 지역에서의 해적질에 내재적인 요소로 또 하나 살펴볼 점은 이들 해적들이 항상 육상의 안전한 해방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해군에서 이들을 제압하고자 했을 때, 해적들은 육상으로 도주하여 주민들에 섞여들어갔다. 지역민들이 해적들의 활동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대부분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동료 시민들을 넘겨주고자 하지 않았다.
바바리 해적(Barbary Pirates)
바바리 해적들이 실시한 해적질은 비슷한 시기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이 실시했던 해적질이나, 그리스 지역의 해적들이 했던 해적질과는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뚜렸한 차이점은 이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은 해적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4개 바바리 국가들의 경제 기반은 해적질에 있었다.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바바리 해적들의 주요 목표는 금은보석 및 경제적 물품이 아닌 사람에 있었다. 이들 희생자들은 몸값 혹은 노예매매를 통해 부를 안겨주는 가치있는 상품이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이곳의 해적질은 강대국들, 특히 대영제국으로부터 외교정책상의 이유를 들어 용납되어왔다는 점이다. 대영제국은 바바리 해적들을 근절할 수 있는 자원을 갖고 있었으나, 바바리 해적들의 활동이 영국의 외국 무역정책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근절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 결과, 다른 지역의 대규모 해적질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근절되었던 것과는 달리, 바바리 해적들은 수백년간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림 5. 바바리 해안 및 지중해 지역)
어쨌든 바바리 해적들도 해적질에 관련된 3가지 필수요소들로 인해 도움을 받았다. 지리적 조건은 분명 바바리 해적들에게 유리했다. 비록 지중해가 꽤 큰 바다이긴 하지만, 분명 폐쇄된 공간이었으며, 또한 몇몇 중요한 병목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대서양측 항구들과의 모든 교역로는 모두 지브롤타 해협(Strait of Gibraltar)을 통과해야 했다. 지중해 내에 들어서게 되면, 동서로의 교역로들은 반드시 북아프리카 연안 지역에 위치한 해적 도시들과 가까이 통과하여야 했다 (그림 5 참조). 지중해는 사르디나, 시실리, 튀지지를 잇는 지점에서 좁아지게 되며, 또한 크레타 섬과 트리폴리타니아 사이 지점에서도 좁아진다. 따라서 이들의 지리적 여건은 지중해의 무역로들을 감제하게 되며, 해적들이 먹잇감을 찾아 공격하기 용이하게 만든다.
이곳의 환경 조건도 바바리 국가들 사이에서 해적질이 팽창하는 데에 일조했다. 여러 세기 이전 카르타고와 로마가 도입한 관개 시스템이 황폐해지면서, 경작에 적합하던 토지들이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18세기에 다다르면, 해안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바바리 국가들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토지가 경작에 부적합한 황무지로 변하게 된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 주민들은 유럽인들과의 교역을 제외하면 먹고 살 수 있는 음식이나 기타 산물들, 자연 자원들이 결핍되게 된다. 이들은 수세기에 걸쳐 유럽의 목재, 금속, 피륙(실크, 양모, 면)과 교역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노예, 말, 물고기, 가죽, 대추야자, 올리브 유 등을 수출하였다.
(바르바로사 형제들 중 형이었던 Oruç Reis [1])
이러한 교역 시스템은 1492년 스페인인들이 스페인에서 마지막 무어인(Moors)들을 몰아낸 직후인 16세기 초반이 되면서 붕괴하게 된다. 무어인들은 북아프리카로 도주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스페인들이 추격해 와서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정복하게 된다. 1510년, 스페인인들은 바바리 국가들에 가혹한 평화 조건들을 내걸게 되는데, 여기에는 무거운 관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으며, 1534년, 바르바로사 형제(Barbarossa brothers)의 지도 하에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투르크 인들을 통한 승리는 바바리 국가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바바리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 본토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보호를 받기도 어려웠고, 반면에 이제 유럽과의 무역시스템에서도 떨어져나간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바바리의 지배자들은 생존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무역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얻어야 했던 것이다.
바바리 해적들의 전성기는 17세기 전반기에 시작된다. 국가에서는 해적들의 갤리선을 건조해주고 선원들을 채워주었는데, 이는 유럽 해군들의 운영 형태와 상당히 비슷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이들은 기독교측 해군보다 우세하였다. 1622년에서 1642년 사이, 바바리 해적들은 영국 선박 300척을 나포하고, 영국 선원 7000명 이상을 노예로 삼았다. 이 시기 초창기에 바바리 국가들은 상당 규모의 함대들을 운용했다. 튀니지(Tunis)에서는 6척의 대형 갤리선과 14척의 범선(sailing ship)이 활동하였다. 알제리에서는 비슷한 숫자의 대형 갤리선과 100여척의 범선을 운영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럽 해적들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1638년이 되면 베네치아인들에 의하여 이들 바바리 해적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100년 뒤가 되면 알제리인들은 단지 8척의 소형 갤리선과 8척의 범선만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이들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지만, 18세기 말 시점에서 이들 바바리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반 독립적인 통치자들이었다. 모로코(Morocco)는 술탄 술레이만(Sultan Suleyman)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모로코는 신생 미합중국을 승인한 첫번째 국가들 중의 하나였기에, 미국과 모로코의 관계는 각별했다. 알제리 예니체리(Algerian janissaries)의 지휘관이기도 한 알제리 지배자는 상급 군 장교 평의회에서 선출되었다. 평의회에서는 1791년 데이 알리 하산(Dey Ali hassan)을 지도자로 추대한다. 1795년에는 트리폴리 파샤(Bashaw of Tripoli)인 유수프 카라만리(Yusuf Karamanli)가 유혈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차지한다. 튀니지 베이(Bey of Tunis) 직위는 세습 작위로서, 파샤 하무다(Pasha Hamouda)가 갖고 있었다.
* 역주: - 데이(Dey) : 오스만 제국에서 1671년 이후 알제리 섭정국(Regency of Algiers)의 지배자에게 내린 칭호. 1830년 프랑스 정복이 있기 전까지 총 29명이 데이에 재직했다. 휘하에 다시 3명의 베이(Bey)를 두었다.[2] - 파샤(Pasha, pascha, bashaw) : 통상 총독, 장군, 고위성직자 등에게 주어진 오스만 제국의 고위 칭호. 영국의 lord에 상당한다. [3] - 베이(Bey) : 터키에서 족장에게 내리는 칭호. 오스만 제국 초기 3명의 국왕은 베이라는 칭호를 썼으며, 1383년 무라드 1세 때가 되어서야 술탄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베이는 이제 파샤의 아래, 이펜디(effendis)의 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가 된다. 나중에 19세기 말이 되면 오스만 제국에서도 그냥 영국의 sir에 상당하는 수준의 평범한 존칭이 된다. [4] |
정도는 다르지만 바바리의 지배자들은 모두 해적질로 발생하는 수익을 정권 유지를 위해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해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신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모든 국가들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권력 유지를 위해 해적질이 필요했기 때문에, 해적질을 국가가 지원하는 시스템이 발전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적질은 지역 경제의 주요 동력원이 되었다. 노획한 화물들은 지역 상인들에게 값싼 상품을 제공해 주었다. 붙잡은 선원들과 승객들은 노예가 되어 갖고 있는 기술에 따라 다양한 일들을 수행하였다. 붙잡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운명은 갤리선 노예가 되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해적선에서 노를 저어야만 했다.
해적질이 사회 깊숙히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해적질은 사기업 형태로도 발전하였다. 정부 관료들과 대상인, 상점주, 선원, 소상인들의 신디케이트가 형성되어 갤리선에 투자하였다. 이 신디케이트는 붙잡은 포로들로부터 나오는 몸값 뿐만이 아니라 노획 물자로도 이윤을 냈다. 바바리 지배자들은 약소국들로부터 그들의 상선들을 공격하지 않는 댓가로 조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 사설 신디케이트들의 이익으로부터도 일정 부분의 세금을 받았다. 따라서 바바리 국가들에서의 정치적 환경은 해적질에 극도로 호의적인 상황이었다.
바바리 해적들은 국가가 지원한다는 특징 탓에 육상에 안전한 도피처를 가질 수가 있었다. 국가와 민간기업 모두 해적질에서 나오는 이윤에 의존했다. 해적질에 대해서는 불명예가 따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가 사실이었다. 갤리선을 타고 항해하는 것은 명예로운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해적들이 이교도들을 먹잇감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익 외에도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효과도 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로서, 바바리 해적들이 외부 위협에 거의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유럽 해군력을 모두 통합하는 경우 해적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제거할 수 있는 형편이었으나, 실제로 유럽인들은 단 한번도 협조하지 못한다. 비록 각개 국가들이 해적들을 제거하려고 독자적으로 공격을 가한 적은 있었지만, 이들 국가들은 해적들의 항구나 해적들의 지상 해방구를 제거하려고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럽의 군사력이 물러나면 주민들은 해적질을 재개했다.
하지만 어떤 국가들은 바바리 해적들에 모종의 영향을 끼치긴 하였다. 알제리는 1682년 영국과 평화 및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역시도 알제리와 비슷한 조약을 맺는다. 바바리 해적들은 이들 국가의 선박들은 그냥 놔 두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바바리 해적들은 약소국들, 예를 들어 네덜란드 공화국이나 오스트리아, 덴마크, 이탈리아계 공화국들과 같은 경우에는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경우에 이들의 배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머지않아 지중해의 무역 대부분은 영국 선박 및 프랑스 선박에 의해서 이뤄지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와 영국은 바바리 해적들을 일종의 준-동맹자 쯤으로 간주하게 된다. 프랑스는 "너무 많지는 않지만, 라이벌들을 제거할 정도의 수의 해적"들을 원하게 되었다. 프랑스 지도자들은 만약 바바리 해적들이 완전 소탕될 경우, 자국의 위상이 약소 경쟁국들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하락할 것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영국 관리들도 바바리 해적들이 존재함으로써 자국에 제공되는 전략적 이점을 인식하였으며, 이는 특히 영국으로부터 새로 독립한 식민지 부분에 있어서 그러하다고 보았다. 1784년, 셰필드 공(Lord Sheffield)은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하였다:
미 합중국이 지중해에서 자유 무역을 수행할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지역에서 미국 상선들을 바바리 해적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어떤 해상 강대국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바바리 해적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미국인들은 해군을 운영할 수 없다. |
즉, 바바리 해적들은 보다 강력한 유럽 국가들의 암묵적 지원 속에서 유지되었던 것이다. 바바리 국가들의 해적질이 종말을 고하는 것은 1830년, 알제리인들의 범죄 행위에 신물이 난 프랑스인들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점령함으로써 비로소 이뤄질 수 있었다. 1847년까지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바바리 국가들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일소된다.
셰필드 공의 말은 일부는 맞는 말이었다. 독립으로 영국의 보호가 철회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상선들은 바바리 해적들의 먹잇감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 상선들이 바바리 해적들의 먹잇감이 된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다. 미국 독립 이전에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한 말에 따르면, 미국의 지중해 국가들과의 무역은 대단히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건조 및 염장된 물고기의 1/4과, 밀 및 밀가루의 1/6이, 매년 약 80~100척의 배에 실려 지중해 국가들로 수출된다고 추산하였다. 1783년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이 체결되자, 미국 상인들은 기존의 무역을 재개하려는 희망으로 상선들을 지중해로 파견하였다. 1790년 무렵, 지중해로 항해하는 미국 배는 약 100척에 달했다.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바바리 국가는 모로코였다. 미 합중국과의 협상 교섭이 진척되지 않는 데에 실망한 모로코의 술탄은 휘하 해적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다. 1784년 10월 11일, 해적들은 무장 브리그 선인 베치 호(Betsey)를 나포한다. 비록 술탄은 이들 선원들을 노예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미국에 이들에 대한 몸값과 우호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1785년 7월 9일, 술탄은 신의의 표시로 포로들과 선박, 화물들을 댓가 없이 풀어준다. 다음해 여름, 미국 사절단이 도착하여 단지 며칠 내로 미국 선박이 지브롤타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조약을 맺게 된다. 미국 의회는 당초 사절단에 위임한 2만달러 한도 내에서 조약이 맺어진데 따라 기뻐하였다.
바바리 해적들과의 다음 번 만남은 그리 잘 돌아가지는 않았다. 1785년 여름, 알제리인들은 놀랍게도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 알제리 주재 영국 공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알제리인들은 대서양까지 나가 미국 상선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1785년 7월 25일, 알제리 해적들은 스쿠너 선인 마리아 호(Maria)를 나포한다. 이어 1785년 8월 1일, 또다른 미국 선박인 도팡 호(Dauphin)를 나포한다. 모로코인들과 달리, 알제리인들은 이 2차례 공격에서 생포한 미국인 21명을 노예로 만든다. 알제리 군주(Dey of Algiers)는 친선조약 댓가로 1백만 달러를 요구한다. 연합규약(Article of Confederation)에 따라 과세할 권한이 없었던 미 합중국으로서는 돈으로 평화를 살 능력도, 해군을 건설하여 이를 돌파할 능력도 없었다. 비록 포르투갈과의 적대관계가 다시 시작되면서 알제리 해적들의 대서양으로의 진출은 금방 중단되었지만, 이미 붙잡힌 21명의 미국인들은 알제리인들의 노예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후 몇 년간, 미 합중국은 알제리 및 트리폴리에 대하여 선원들에 대한 몸값 지불 및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 그러나 연합규약 체계 하에서의 미국 중앙 정부는 선원들의 몸값을 지불할 돈도, 바바리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맺을 돈도 없었기 때문에, 두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정부 지원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 상선들은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의 수송선단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지중해로 항해를 지속했다.
마침내 연방정부(Federal Government)가 수립된지 2년 뒤인 1791년, 미 의회는 행동을 개시한다.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과는 달리 미국헌법(Constitution)은 미 의회(Congress)에 바바리 해적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능력인, 국가 상업에 대한 전권, 과세할 권한, 해군을 건설할 권한, 전쟁을 선포할 권한 등을 부여하였다. 1791년, 상원 위원회(Senate committee)에서는 미국이 지중해에서의 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군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선포한다. 다음해 미 의회에서는 알제리 및 기타 바바리 국가들과 평화 교섭을 실시할 평화 사절단을 임명한다. 의회에서는 사절단에 평화 협정을 위해서는 10만달러, 연간 조공으로는 13,500달러, 미국인들을 구해낼 몸값으로는 27,000달러까지 쓸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다.
그러나 미국에게 불행하게도, 1793년 미국 평화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 영국의 중재로 포르투갈과 알제리 간에 휴전이 성사됨에 따라, 알제리 해적들이 다시금 대서양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최근의 영국 추밀원령(order-in-council)으로 인해 카리브해 지역에서 미국 상선 250여척이 나포되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어있었고, 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바바리 해적들이 미국 선박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휴전을 고의로 중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미국의 교역에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휴전이 성사된지 불과 2개월이 지난 1793년 11월 말까지 미국 상선 11척과 선원 105명이 알제리인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미 합중국은 바바리 해적들의 행위를 차단할 힘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재앙으로 말미암아 미 의회는 1794년 초 더욱 서두르게 된다. 미국 외교관들은 영국과 바바리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맺거나 최소한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하여 활동하게 된다. 존 제이(John Jay)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하게 된다. 미 의회는 알제리와의 평화 협상 및 미국 포로 송환을 위해 1백만 달러를 승인한다. 미국 평화 사절단인 데이비드 험프리(David Humpery)는 알제리 군주의 최초 요구사항이었던 일시불 2백만 달러를, 일시불 60만 달러에 매년 21,000 달러 상당의 해군물자 제공 및 36포 프리깃함 크레센트 호(Crescent) 제공으로 줄이는 데에 성공한다. 동 군함은 1798년 2월에 전달된다. 1797년 당시 조약 비용은 대략 1백만 달러로 추산되었다. 1796년 11월 트리폴리와의 평화 협상 비용(56,000달러)과 1797년 8월 튀니지와의 평화 협상 비용(107,000 달러)은 훨씬 적게 소요되었다.
한편 1794년 3월 미 의회는 6척의 프리깃 함 건조를 승인하게 되며, 이는 이후 21년간 프랑스, 바바리 국가들, 영국과의 전쟁에서 미 해군의 중핵 역할을 하게 된다. 해군 건설에 대한 논쟁은 길고 뜨거웠다. 결국 해군건설 반대론자들은 해군 건설법안 속에, 만약 알제리와의 평화협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군함 건조를 중단한다는 조항을 끼워넣었다. 1796년 3월, 알제리와의 평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프리깃함 건조는 중단된다. 하지만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미 의회는 6척 중 3척의 건조는 재개하도록 승인한다.
평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지중해 국가들과의 교역은 급성장하게 된다. 1799년, 스페인과 이탈리아와의 교역은 약 880만 달러 수준에 다다른다. 다음 해 이들 국가들과의 교역은 약 1200만 달러가 된다. 그러나 미국의 교역 규모가 확대되면서, 바바리 국가들의 조공 요구도 증가하게 되며 이는 특히 트리폴리가 심했다.
트리폴리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리는 1795년 유혈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다. 비틀거리는 트리폴리의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해적질을 해서 조공을 쥐어짜내는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지중해에서 교역하는 모든 국가들과의 조약들을 "개정(revising)"하기 시작한다. 스페인, 베니스, 프랑스의 경우 파샤가 요구하는 돈과 선박, 기타 "선물"들을 제공하였다.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공화국, 나폴리의 경우 이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의 상선들은 수많은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굴복하고 트리폴리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한다.
1800년 4월, 트리폴리 파샤는 알제리를 질투한 나머지, 미국에게 자신에게도 프리깃함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9월, 그는 2척의 미국 상선인 베치 호(Betsy)와 소피아 호(Sophia)를 나포한다. 비록 소피아 호의 경우 여기에 알제리 군주에 대한 조공이 실려있던 탓에 석방하긴 했지만, 베치 호의 경우에는 배는 해적선으로 쓰이게 되고 선원들은 노예가 된다. 파샤는 1801년 2월 미국과의 기존 조약을 무효화하고, 새 조약을 맺는 데에 일시불 25만 달러 및 매년 2만달러를 조공으로 요구하게 된다. 결국 1801년 5월, 파샤는 미 합중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3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