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3장. 지중해에서의 해적 (2)

박용수 2014. 10. 27. 16:36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68~ pp 77 >

 

< 역주 및 참고사진 출처:

[1] (http://en.wikipedia.org/wiki/Presley_O'Bannon)

[2] (http://en.wikipedia.org/wiki/HMS_Leopard_(1790))

[3] (http://en.wikipedia.org/wiki/Edward_Pre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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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계속)

 

 이러한 수순을 미리 예견한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1801년 늦봄 무렵 1개 전대(squadron)을 지중해로 파견한다. 리차드 데일 준장(Commodore Richard Dale)이 이끄는 부대에는 프리깃 함인 프레이던트 호(President)(대포 44문), 필라델피아 호(Philadelphia)(대포 36문), 에섹스 호(Essex)(대포 32문), 스쿠너 함인 엔터프라이즈 호(Enterprise)(대포 12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최근 종결된 프랑스와의 준전쟁(Quasi War)을 겪은 베테랑들이었다. 불행하게도, 미 의회가 전쟁선포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일의 전대는 해적이 미국 선박을 공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해적들에게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데일에게는 적함을 나포하여 노획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호송 임무나 트리폴리 봉쇄와 같은 수동적인 작전만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전대에 단지 4척의 함선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란 곤란했다.

 

 이후의 8개월 기간 동안, 데일의 전대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다. 1801년 7월 도착한 직후, 데일은 튀니지와 알제리를 방문한다. 7월 24일 트리폴리에 도착한 데일은 이곳의 파샤가 협상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됨에 따라 도시를 봉쇄한다. 1주일 뒤, 전대에 필요한 깨끗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말타로 향하던 엔터프라이즈 호가 적함 트리폴리 호(Tripoli)(대포 14문)을 만나 격퇴시킨다. 트리폴리 호를 노획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 지휘관 앤드류 스테렛 대위(Lieutenant Andrew Sterett)은 는 트리폴리 호에서 가치있는 물자를 모두 제거해버린 뒤에 해적들을 석방한다. 비록 봉쇄로 트리폴리 시에 어느 정도 어려움을 가져다 주긴 했지만, 봉쇄 선박들이 물자 보급이나 호송임무 등을 수행하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에 완벽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해적선 3척이 트리폴리 시에서 빠져나와 미국 상선 프랭클린 호(Franklin)를 나포했다. 그 외에도 도시에 필요한 식량이나 기타 물품들을 몰래 들여오는 경우가 많았다. 1802년 2월, 휘하 병력들의 1년 복무기간 시효가 다가오면서 데일은 필라델피아 호와 에섹스 호를 트리폴리 및 지브롤터 순찰을 위해 남겨 둔 채 미국으로 복귀한다.

 

 1802년 5월, 또다른 미군 전대가 지중해로 향한다. 리차드 모리스 준장(Commodore Richard Morris)이 지휘하는 동 전대는, 프리깃 함 체사피크 호(Chesapeake)(대포 36문), 콘스털레이션 호(Constellation)(대포 36문), 뉴욕 호(New York)(대포 36문), 아담스 호(Adams)(대포 28문), 존 아담스 호(John Adams)(대포 28문)으로 구성되었다. 출발 전, 미 의회는 제퍼슨 대통령에게 미 해군을 활용하여 지중해에서의 미국인들의 이익을 보호할 권한을 부여하였고, 이를 통해 직전에 파견되었던 전대에 가해졌던 헌법상의 제약사항들을 제거해 주었다. 모리스 제독에게는 트리폴리에 대한 공세적 작전 수행 및 이들 선박들을 노획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주어진 명령과 새로운 권한에도 불구하고, 모리스 제독은 그리 열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아내와 아들을 동반한 모리스 제독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수많은 항구들을 방문하였고, 이 과정에서 트리폴리까지 도달하는 데에 1년이 넘게 걸렸다. 한편, 전대에 속한 다른 선박들은 약간의 전과를 올린다. 1803년 5월에는 존 아담스 호가 트리폴리 군함 메슈다 호(Meshuda)(본래 미국 상선 폴리 호(Polly)였음)를 나포한다. 같은 달, 데이빗 포터 대위(Lieutenant David Porter)가 일단의 보트들을 인솔하여 해안으로 접근한 뒤, 곡물 호송선단을 박살낸다. 포터 대위는 나중에 서인도 제도에서 미군의 해적 소탕 전단을 지휘하게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모리스의 무성의에 제퍼슨 대통령과 미 국회는 실망하게 되고, 그 결과 모리스가 해임되고 에드워드 프레블 준장(Commodore Edward Preble)이 대신하게 된다.

 

 프레블 제독은 1803년 9월에 트리폴리에 도착한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그는 즉각적으로 동 도시에 대한 보다 강력한 봉쇄를 지시한다. 프레블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는 보다 효과적인 봉쇄를 수행할 만한 군함들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전대에는 프리깃 함 컨스티투션 호(Constitution)(대포 44문) 및 필라델피아 호(대포 36문); 16포 브리그 함 아르구스 호(Argus) 및 사이렌 호(Siren); 12포 스쿠너 선 빅센 호(Vixen), 노틸러스 호(Nautilus), 엔터프라이즈 호(Enterprise) 등이 있었다. 미국은 다른 해적 소탕 작전을 통해서 또다시 배우게 되지만, 해안에 가까운 곳에서의 작전을 위해서는 소형 선박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프레블은 또한 휘하 군함 중에 2척이 상시 트리폴리 해안을 순찰하도록 하였으며, 몰타에 해군 보급창을 설치하여 군함들의 재보급 소요시간을 단축시켰다.

 

* 역주:

 프레블의 아이들 (Preble's Boys) : 프레블이 1차 바바리 전쟁 당시 지휘를 맡은 함대에서는, 가장 연상인 장교가 고작 20살이었고, 가장 어린 장교는 15세였다고 한다. 이에 프레블은 해군 참모총장이 자신에게 '학교에나 갈 애들(just a pack of schoolboys)'을 넘겨주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프레블의 밑에서 근무했던 장교들 대부분은 프레블의 사후, 미 해군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프레블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3]

 

 지중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프레블은 모로코의 술탄을 대하면서 그의 기질을 드러내게 된다. 모로코의 술탄은 당시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프레블은 1803년 10월 초에 5척의 군함을 이끌고 탄지에(Tangier)로 항해하여 술탄과 맞선다. 술탄은 전쟁 선포는 커녕, 조공 요구도 없이 기존 우호 조약을 갱신해 준다.

 

(1803년, 트리폴리 연안에 좌초한 필라델피아 호[3])

 

 그러나 곧 재앙이 찾아드는데, 11월 1일, 필라델피아 호가 트리폴리 연안에서 밀수꾼을 추격하던 중 좌초하게 된다.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Captain William Bainbridge)는 배를 포기한다. 이로써 트리폴리 측은 307명의 미국인 포로를 추가로 얻게 되었으며, 또한 얼마 후에 닥친 폭풍으로 나포한 필라델피아 호가 암초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함대에 강력한 군함 한 척을 추가시키게 되었다. 트리폴리인들은 필라델피아 호의 피해를 보수하여 재 진수하였으며, 또한 미국 선원들이 바다 속에 던져넣은 대포들을 건져올렸다.

 

 프레블은 물러서지 않고 겨울 동안 트리폴리를 봉쇄하며 반응을 살펴본다. 1804년 2월 7일, 스티븐 데카투르 대위(Lieutenant Stephen Decatur)가 노획한 케치 선 인터피드 호(Intrepid)를 타고 트리폴리 항구로 잠입하여 필라델피아 호에 승선하였고, 바바리 해적들의 코 앞에서 이 배를 폭파시킨다. 비록 데카투르와 미 해군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 준 과감한 수훈이긴 했지만, 이 자체는 트리폴리와의 전쟁을 끝내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실 트리폴리 파샤는 이 노획물의 상실에 분노하여 오히려 미국에 대해 평화 협정에 필요한 금액 요구를 인상하였고, 필라델피아 호 선원들을 보다 심하게 감시하게 된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호의 폭파로 인하여 미국측의 전략적 우세가 회복되었는데, 이로써 미국의 소형 군함들에 대한 위협이 제거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컨스티투션 호가 트리폴리에 묶여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프레블은 해군성에 트리폴리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소형 선박을 활용한 대규모 병력 파병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1804년 여름에 그러한 전대(squadron)가 정말로 편성되었다: 6척의 프리깃 함, 6척의 브릭 선 및 스쿠너 선, 2척의 박격포 보트(mortar boats), 10척의 건보트(gunboats) 등으로 구성되었다. 프레블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서열에서 아직 밀려있던 프레블은 새로 확장된 전단(flotilla) 지휘관으로 임명되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는 새뮤얼 배런 준장(Commodore Samuel Barron)이 선정되어 임무부대(task force)의 지휘관이 되었다.

 

 프레블은 배런이 부임하기 전까지 트리폴리와의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고 공격을 결심한다. 그에게는 흘수가 낮은 선박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바바리 해적들과 역시 전쟁 관계에 있는 나폴리 국왕(King of Naples)과 협상하여 6척의 건보트와 2척의 박격포 보트를 빌리게 된다. 건보트에는 24파운드 포 1문씩이, 박격포 보트(bomb ketches)에는 각각 13인치 박격포가 무장되어 있었다.

 

 프레블은 1804년 8월 3일 공격을 실시한다. 프레블은 데카투르 대위에게 6척의 건보트와 2척의 박격포 보트를 인솔하여 트리폴리 항구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역풍으로 말미암아 건보트 중 3척이 항구에 진입하는 데에 실패하지만, 데카투르는 굴하지 않았다. 데카투르 대위는 다른 2척의 건보트와 2척의 박격포 보트를 이용하여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다 (건보트가 총 6척이었으므로, 데카투르 대위는 나머지 건보트 1척에서 지휘하였다는 뜻으로 보임; 역주). 여기에 컨스티투션 호의 포격이 가세되는데, 이 포격으로 해안포대와 마을, 그리고 파샤의 궁전이 박살난다. 미군은 3척의 트리폴리 건보트를 나포하고, 1척을 격침시켰으며, 기타 다른 선박들에 피해를 입혔다. 또한 트리폴리인 52명을 죽이고, 56명을 체포했다. 미군 피해로는 스티븐 데카투르 대위의 남동생이었던 제임스 데카투르 대위 1명이 전사하였고, 그 외에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프레블은 전과 확대를 위해 몇차례 추가 공격을 실시하였지만, 파샤는 요지부동이었다. 전투를 종결짓기 위하여, 프레블은 인터피드 호를 폭탄선(bomb ship)으로 개조한 뒤, 9월 4일 저녁에 트리폴리 항구로 진입시킨다. 자원자들이 폭발물로 가득 찬 이 배를 궁전과 트리폴리군 함대 사이로 몰고 가서 폭파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불행하게도 폭발이 지나치게 빨리 이뤄진 탓에 자원했던 선원 전원이 전사하고 만다. 날씨가 악화되고 보급품이 바닥남에 따라, 프레블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말타로 복귀하여 신임 지휘관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한다. 한편 봉쇄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다.

 

 프레블이 해군력을 이용하여 트리폴리를 굴복시키려고 노력하던 동안, 다른 이들은 지상 작전으로 전쟁을 끝낼 계획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배런 준장이 1804년 9월 도착했을 때, 그는 윌리엄 이튼(William Eaton)을 함께 데려왔다. 이튼은 전직 육군 장교이자 튀니지의 고문관(counsel)이었다. 예전에 이튼은 제퍼슨 대통령에게 유수프 파샤의 형인 하멧 카라만리(Hamet Karamanli)를 지원할 것을 건의한 적이 있다. 유수프 파샤는 1795년 당시 다른 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었다. 장자상속권에 따르면 사망한 형을 계승하는 것은 하멧이어야 했지만, 유수프가 왕좌를 찬탈한다. 하멧은 만약 미합중국이 자신의 동생을 축출하는 데에 필요한 4만 달러의 자금과 충분한 군사지원을 해 줄 경우, 영구적인 평화조약을 맺을 의향이 있었다.

 

 이튼은 1804년 11월에 카이로에 도착한다. 그가 하멧과 협상을 시작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어중이 떠중이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멧이 이튼과 합의를 본 시점에서, 결성된 군대는 그리스인, 레판트인, 아랍인 등으로 구성된 400명 규모였다. 이 부대에는 해군사관생도(midshipman) 1명과 해병대 중위(Marine lieutenant) 1명, 해병 부사관(sergent) 1명, 병사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튼과 하멧은 1805년 3월 6일 데르나(Derna)로 출발한다. 이동 과정에서 아랍인 650명이 추가로 모병된다. 500마일 가량의 행군에는 6주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수많은 시련 끝에 이들은 4월 27일 데르나 외곽에 도달한다. 데르나 수비대는 이를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지만, 이는 제병연합작전이 벌어질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4월 28일, 아르구스 호, 호넷 호, 노틸러스 호가 항구에 진입하여 마을을 강타하였다. 그와 동시에 프레슬리 오바논 중위(lieutenant Presley O'Bannon)가 한쪽에서 해병대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고, 반대편에서도 하멧이 공격을 실시했다. 수비대는 신속하게 압도당하여 항복한다. 이튼은 트리폴리로의 추가 작전을 계획하던 과정에서 파샤가 마침내 굴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6만달러를 제공하는 댓가로 그는 필라델피아 호의 선원들과 기타 모든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였고, 앞으로 미국 선박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로써 제 1차 바바리 전쟁(the first Barbary War)이 종결된다.

 

* 역주:
 Presley Neville O'Bannon (1776년~ 1850년 9월 12일) - 미해병대 장교로 제 1차 바바리 전쟁 당시에는 USS 아르구스 호에 배치된 해병 중위(first lieutenant)였다. 당시 윌리엄 이튼 장군의 소규모 군대에 파견된 7명의 해병들을 지휘하였다. 1805년 4월 27일, 미해군과의 제병연합 작전이었던 데르나 전투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이후 미해병대가(Marines' Hymn) 가사에 "to the shores of Tripoli"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근거가 된다. 1807년 3월, 소령 계급으로 전역하였으며, 이후 켄터키 주에서 주 하원의원/주 상원의원 직을 수행한다.

[1]

 

 소규모 해군 전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이후 몇년간 강력한 평화가 유지된다. 하지만 1807년이 되면 상황은 또다시 바뀌게 된다. 징집문제와 중립권에 관련하여 미국과 영국 사이의 분쟁이 커지면서, 1807년 6월 22일, HMS 레오파드 호(HMS Leopard)가 체사피크 호(Chesapeake)에 공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미 합중국은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중해 전대를 철수시킨다. 1807년 여름부터 겐트 조약(Treaty of Ghent)으로 영국과의 평화가 재성립 될 때까지, 지중해로 항해하는 미국 상선들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역주:
 Chesapeake-Leopard 사건 - 1807년 초, 체사피크 만에서 프랑스 선박들을 봉쇄하고 있던 영국 군함들에서 일부 선원들이 탈영하여 미군 군함 USS 체사피크 호의 선원이 된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 태생인 인원들도 있었다. 이들 탈영병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영국 군함 레오파드 호의 함장 샐루즈버리 프라이스 험프리 대령은 체사피크 호에 수색 허가를 요청한다. 체사피크 호에 있던 제임스 배런 준장은 이를 거부한다. 이에 레오파드는 포격을 개시하였으며, 준비되어 있지 않던 체사피크 호는 항복한다. 험프리는 체사피크 호에 승선대를 파견하여 탈영병들 - 3명은 미국 태생, 1명은 영국 태생- 을 체포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전쟁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2]

 

 바바리 해적들을 견제하는 해군 전대가 없어진 상황에서, 이들 바바리 국가들이 미국 선박에 대해 공격을 재개하고 더 많은 조공을 요구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알제리인들은 1807년 후반기에 3척의 미국 선박을 나포하였다. 이 3척의 상선 중 하나였던 매리 앤 호(Mary Ann)의 선원들은 반격을 실시하여 알제리 해적들로부터 배를 되찾아온다. 이 역시도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는데, 이 사건 당시 미국 선원들이 알제리 해적들을 바다에 던져넣은 것을 빌미로, 알제리의 데이(Dey)가 미국에 16,000 달러를 배상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807년의 무역금지 조례(Embargo Act; 미국이 영국과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하여 아예 모든 외국과의 무역을 중단시킨 조례. 그러나 결국 영국과의 관계 악화로 1812년 전쟁이 발발한다. 역주)로 말미암아 미국인들에 의한 무역이 거의 0에 도달하게 되면서, 바바리 해적들의 미국 상선에 대한 공격 사례도 사라지게 된다. 1807년 이후로 지중해로 간 미국 선박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이 종결되면서 미국은 다시 바바리 국가들과의 관계를 해결할 기회를 잡게 된다. 미 합중국은 1815년 3월 3일, 알제리에 전쟁을 선포한다. 몇주 내로, 강력한 미군 전대 2개가 지중해로 향한다. 테카투르 준장의 전대가 먼저 출발하였다. 그의 부대에는 프리깃 함 게리에르 호(Guerriere)(대포 44문), 마케도니안 호(Macedonian)(대포 38문), 콘스털레이션 호(Constellation); 슬루프 선 이페르비어 호(Epervier)(대포 18문), 온타리오 호(Ontario)(대포 16문); 14포 브리그 선 파이어플라이 호(Firefly), 스파크 호(Spark), 플람부 호(Flambeau); 12포 스쿠너 선 토치 호(Torch), 스핏파이어 호(Spitfire)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로 베인브리지 준장(Commodore Bainbridge)이 신예 전열함(ship-of-the-line)인 인디펜던스 호(Independence)(대포 74문); 프리깃 함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호(United States), 콩그레스 호(Congress), 자바 호(Java)(대포 44문); 그외 소형 선박 8척을 이끌고 뒤따랐다.

 

 데카투르는 1815년 6월 15일 지중해에 도달한다. 2일 후, 그의 전대는 알제리군 기함인 마쇼다 호(Mashouda)(대포 46문)과 마주친다. 콘스털레이션 호, 게리에르 호, 이페르비어 호가 마쇼다 호를 고철로 만드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데카투르의 부대는 6월 19일 또다른 알제리 선박인 에스테디오 호(Estedio)(대포 22문)를 나포한다. 지중해에 들어온 지 겨우 며칠 만에 데카투르는 2척의 선박과 500여명의 포로를 나포한 것이다. 그는 이제 우세한 입장에서 알제리인들과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판단한다.

 

 미군 전단(flotilla)은 1815년 6월 28일 알제리 근방에 도달한다. 데카투르는 양국이 전쟁 상태이지만 미국은 만약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되는 조건이라면 언제든지 평화적 관계를 재개할 의향이 있다는 미국 대통령의 편지를 알제리의 데이(Dey)에게 전달한다. 또한 데카투르는 조공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조약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절대 수락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양국이 전쟁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과 조우하는 모든 알제리 선박은 격침시킬 것임을 알제리인들에게 주지시킨다. 알제리인들이 휴전 협상을 시도했지만 데카투르는 거부한다. 알제리인들은 결국 굴복하여 붙잡혀있던 10명의 미국인들을 석방하고, 브리그 선 에드윈 호(Edwin)의 선주에게 보상금 1만 달러를 지불하며, 앞으로 미국 시민들을 절대 노예로 삼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 된다. 데카투르가 끌고 온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말미암아 튀니지와 트리폴리와의 협상도 만족스럽게 종결된다. 튀니지인들은 1812년 전쟁 당시 베이(Bey)가 나포하여 영국인들에게 인도한 2척의 미국 선박에 대한 보상으로 46,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한다. 트리폴리의 경우 벌금 25,000달러를 지불하는 한편, 기독교 노예 10명도 석방하기로 한다. 베인브리지 제독이 도착함에 따라, 바바리 해적들을 강제력으로 해결하려는 미 합중국의 의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써 바바리 전쟁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은 종결된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 바바리 국가들의 해적질이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카투르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국가들도 바바리 국가들과의 기존 조약들을 재협상하고자 하였다. 가장 처음 반응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바바리 국가들이 타국들의 무역을 억제해 주는 데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게 낮아졌다. 또한 1814년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의 주요 의제 중의 하나가 노예제의 종결 문제였다. 비록 이 토의에서의 주요 쟁점은 흑인 노예 문제였지만, 이 과정에서 북아프리카인들이 백인들을 노예로 삼는 문제도 관심을 끌게 된다. 이에 따라 영국은 이 상황을 교정하기 위하여 엑스머스 공(Lord Exmouth)인 에드워드 펠로우 제독(Admiral Edward Pellow)을 파견한다.

 

 엑스머스 공의 임무는 바바리 국가들로부터 모든 유럽인 노예들을 석방하도록 협상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무력을 사용할 권한은 부여받지 않았다; 그에게 가능했던 것은 포로들에 몸값을 지불하는 것 뿐이었다. 그가 1816년 3월 24일, 5척의 전열함과 7척의 기타 소형 함정을 이끌고 알제리에 도착하자, 이 광경에 데이는 겁에 질려 협상에 응하게 된다. 그는 모든 유럽 국가들과 평화상태에 들어가는 데에 동의하였으며, 자신이 붙잡은 포로들에 대한 몸값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엑스머스 공이 알제리에게 해적질을 금지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제리의 데이는 가까운 미래에 해적질을 재개해도 되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영국인들이 튀니지인들과 만났을 때에는 좀 더 까다로웠다. 거의 전투 직전 상태까지 간 상황에서 베이는 노예 524명에 대해서는 몸값을 받고 풀어주며, 257명은 무상으로 풀어주는 데에 합의한다. 그리고 이후에 붙잡게 되는 인원들은 노예가 아니라 전쟁포로(prisoners of war)로 대우하기로 합의한다. 트리폴리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리는 보다 우호적이었다. 그는 468명의 노예에 대해서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로 했으며, 또한 앞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겠다고 동의하였다. 엑스머스 공이 알제리로 돌아와 데이로부터 비슷한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으나 이는 퇴짜를 맞는다.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무력을 사용할 권한은 갖고 있지 않았던 엑스머스 공은 1816년 6월 24일 영국으로 귀환한다.

 

 엑스머스 공이 귀환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협상 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보여지고 또한 이탈리아 어부 200명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론이 들끓게 되면서, 알제리로부터 보다 나은 협상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무력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명령이 엑스머스 공에게 떨어지게 된다. 엑스머스 공은 1816년 7월 28일 알제리로 출발한다. 휘하 전대에는 2척의 3층 전열함(triple-deck ships-of-the-line)인 퀸 샬롯 호(Queen Charlotte)(대포 100문), 임프레그너블 호(대포 98문); 74포 전열함(74-gun ships-of-the-line)인 알비온 호(Albion), 민덴 호(Minden), 슈퍼브 호(Superb); 프리깃 함 리안더 호(Leander)(대포 58문); 40포 프리깃 함 글래스고우 호(Glasgow), 세번 호(Severn); 36포 프리깃 함 헤브루스 호(Hebrus), 그라니쿠스 호(Granicus); 슬루프 선 5척; 폭탄선(bomb ship) 4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8월 9일 지브롤타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4척의 40포 프리깃 함과 1척의 30포 프리깃 함, 1척의 18포 슬루프 선으로 구성된 네덜란드 전대가 항구에 정박 중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네덜란드 지휘관은 영국군 작전에 동참하기를 자청하였으며, 이로써 공격군은 더욱 강화되었다.

 

 연합 함대는 8월 27일에 도착한다. 엑스머스 공은 데이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었지만, 알제리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연합군은 공격을 개시한다. 포격은 14시부터 22시까지 8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19시에 이르르면 알제리측 대포의 대부분이 침묵하게 되었고,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으며, 조병창과 창고들이 파괴되었고, 알제리 군함 대부분이 격침되었다. 연합군 탄약이 거의 고갈되면서 연합군은 22시 무렵 항구를 벗어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연합군이 공격을 재개하려고 준비하던 중, 데이가 굴복하여 영국측의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 알제리의 지도자는 1642명의 노예를 석방하였으며 여기에는 영국 시민 1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동의하였다; 나폴리와 사르디나에 인질 몸값 382,500달러를 반환하였다; 이 며칠간의 잘못에 대하여 영국 공사에게 사과하였다; 네덜란드와의 평화 조약에 합의하였다. 이 성공의 댓가 역시 작지 않았다: 영국군은 128명이 전사하고 690명이 부상당했으며, 네덜란드군은 13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이 발사한 포탄은 4만발, 네덜란드 군이 발사한 포탄은 1만발 이상인 것으로 추산되며, 이로 인해 알제리측에서 입은 사상자 규모는 4천명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바바리 국가들의 해적질은 1830년대 무렵 프랑스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1817년 경에는 산발적인 몇몇 사건들이 있었고, 스웨덴, 덴마크, 포르투갈, 나폴리 등의 유럽 소국들은 1827년까지도 바바리 국가들에 계속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1827년 프랑스 공사와 알제리의 데이 간의 불화가 프랑스를 자극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처음에 프랑스는 봉쇄로 자신의 반응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1829년 8월 데이가 프랑스 공사를 추방하고 휴전 깃발을 내걸고 떠나는 배에 발포함에 따라,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1830년 6월 13일, 37,000명의 병력을 탑재한 프랑스 함대가 알제리에 도착한다. 몇주만에 강력한 프랑스 지상군이 알제리군들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한다. 알제리는 7월 4일 함락된다. 마침내 바바리 해적들은 소멸된다.

 

 바바리 해적들에 관련된 활동들을 통해 해적 문제는 궁극적으로 지상에서의 문제임을 알 수가 있다. 미국과 영국의 강력한 해군 작전에도 불구하고, 바바리 국가들에 만연한 해적질은 프랑스 육군에 의하여 정복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바리 국가들의 사례에서 보면, 해적질의 3가지 주요 근간인 지리, 정치적 불안정, 해방구 등이 해군작전만으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조건은 당연히 똑같은 상태로 유지된다. 또한 해군력으로는 3개 공국들의 정치적 상황을 바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 해적들은 지상작전에는 반응을 보였다. 트리폴리에 대한 이튼의 침공은 결국 파샤가 조약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미국과 영국 해군이 바바리 지배자들로 하여금 해적질을 포기하는 조약을 수용하도록 강요할 수는 있었지만, 다른 국가들의 해운에 대한 해적질이 종결된 것은 프랑스가 육지를 영구 점령함으로써 육상의 해방구를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스에서의 해적(Greek Piracy)

 

 그리스 혁명은 1821년 3월 25일 시작되었다. 혁명이 발발하자마자, 그리스 거의 전 국민이 오스만 지배자에 대항하여 궐기하였다. 며칠만에 모리아(Morea) 전역이 반란에 동참하였고, 반군들은 6주만에 동 지역에 거주하던 25,000명의 투르크인 거의 대부분을 학살하였다. 이해 말이 되면, 모리아 대부분 지역에서 투르크인들이 완전 소멸되고, 이 봉기는 이제 그리스 본토로 확산된다.

 

 초창기의 반란군 지도자 상당수는 도적 출신이었다. 클레프츠(klefts)라고 불리는 도적단은 오랜 기간 동안 오스만 지배자에게 복무해온 비정규 민병대(irregular militia)(armatoli)에서 비롯된 조직이었다. 18세기 말, 이들에 대한 술탄의 후원이 중단되면서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술탄에게 버림받은 이들 민병대들은 생존을 위해 도둑질에 의존하게 된다. 이들은 클레프토코리아(kleftochoria)라고 불리는 도적 마을에 살았는데, 이 마을들은 투르크인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산간 고지대에 위치하였다. 그리스 전토의 4/5가량이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도적들은 외부 간섭을 거의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전국에서 도적질은 해볼만하고 흔한 직업이 된다.

 

 이들의 불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인들은 클레프츠들을 존경하였다. 이들의 투르크에 대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인들 상당수는 이들 도적들을 악당이라기 보다는 영웅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이교도 압제자에 대항하는 기독교 정교회와 주민들에 대한 수호자였던 셈이었다. 그 결과 클레프츠들이 봉기하자 대부분의 그리스 농부들은 이들을 뒤따르게 된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전국민이 도적떼가 되었다. 도적들의 전술과 습관이 지상전의 양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해상에서의 그리스인들의 노력도 곧 해적질로 변질된다. 육상에서의 도적질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의 해적질 역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직업으로 간주되었다. 신생 그리스 해군의 지휘관 상당수는 전직 해적들이었다. 게다가 그리스 정부는 만성적인 현금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에, 선원들과 함선들에 지급할 봉급과 보급품을 지불하기가 어려웠다. 자금과 음식, 보급품이 항상 부족했던 그리스 해군은 상업적 사업에 눈을 돌려 이를 통해 이익을 내고자 하였다. 약탈 없이는 해군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약탈할 기회가 없으면 해군은 싸우려 들지 않았다.

 

 비록 전쟁 초기에는 해적질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아무튼 당분간 유럽 열강의 해군력은 이를 견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함에 따라 곧장 그리스인들의 오스트리아 해운에 대한 보복이 개시된다. 1824년 무렵이 되면, 반군 정부로부터의 재정 지원 부재와 해적질을 통해 상대적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점, 또한 이집트 함대의 등장으로 해상에서 그리스측이 크게 불리해진 상황 등으로 말미암아 상당수의 그리스 해군 선원들이 해적으로 변하게 된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대다수 그리스 해적들은 자신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대의 역사가의 기술에 따르면, "이들이 터키, 이집트, 바바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 중이라는 말이 공공연했다". 하지만 해적질은 그 자체적인 관성을 갖게 마련이고, 1825년이 되면 영국, 미국, 기타 국가들의 선박들까지도 공격대상으로 삼게 된다.

 

(그림 6. 그리스)

 

 지상에서의 도적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지형조건은 동 지중해에서의 해적질의 성공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림 6 참조). 그리스에 위치한 수많은 섬들은 해적들의 기지로서 완벽한 장소였으며, 이곳에서 해적들은 숨어서 범위 내에 들어온 먹잇감을 신속하게 낚아챌 수 있었다. 프사라(Psara)를 예로 들면, 이곳은 터키의 교역과 해군 작전을 모두 교란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중부 에게 해(central Aegean)에 위치한 프사라는 터키의 중요한 상업 항구인 스미르나(Smyrna)(오늘날의 터키 이즈미르(Izmir) 지역)와 단지 80마일 거리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타르다넬스 해협(Dardanells)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은 이 섬에서 50마일 내 거리의 통로를 통과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스키아토스(Skiathos), 스키로스(Skyros), 스코펠로스(Skopelos) 섬의 선원들 역시도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는 배들을 마음껏 공격하고, 이들을 저지하려는 그리스 정부의 요구를 무시했다. 스페차이(Spetsai) 출신의 많은 선원들이 독립 전쟁 당시 무공을 자랑했지만, 이곳 역시도 해적 소굴로 악명 높았다.

 

 그리스 해적들은 미스티코스(mistikos)라고 불리는 쾌속의 마스트 3개짜리 선박을 이용했다. 각각의 미스티코스에는 40명이 탑승하며, 뱃머리측에 대포 1문이 탑재되었다. 미스티코스는 흘수가 얕았기 때문에 해적들은 해안가의 골짜기나 작은 하천에 숨기가 용이했다. 너무 밀접하게 추격당하는 경우, 그리스 해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상으로 도주하여 지역민들 사이로 녹아들어갔다.

 

 일단 지상으로 들어서면 그리스 해적들은 지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바다에서의 해적질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지원은 지상에서의 도적질에 대한 인정과 동일 선상에 있었다. 그리스 시민들은 해적들에게 안전한 도피처를 제공하고, 장물을 처분해주고, 해적선을 수리 혹은 교체해 주고, 해적들에게 보급품과 해군물자를 제공해 줌으로써 해적질에 동참하였다. 이들의 도적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야말로 그리스 해적들을 근절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동 지중해에서의 이 해적질 이야기에도 3개의 해적질 지원요소가 작용하게 된다. 그리스의 섬들이 갖고 있는 지리적 요소는 해적질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곳 섬들이 이스탄불, 스미르나, 이집트, 기타 레판트 지역의 도시들과의 해상 교역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해적들의 기지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들 섬들은 먹음직스런 먹잇감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고, 또한 숨기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스 혁명 은 또한 상당한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해적들은 이를 잘 활용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그리스  지역 해역을 순찰하지 않았으며, 그리스 혁명정부는 의미있는 통제를 가하기에는 너무 허약했다. 그 결과 전쟁 대부분 기간 동안 그리스 해적들은 전혀 제재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해적들은 육상의 안전한 해방구의 잇점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의 도적질 전통은, 육상에서든 해상에서든 이들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게다가 그리스 경제가 흔들리면서 해적질야말로 그리스 선원들과 상인들에게 가장 수지맞는 사업으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해적질에 참가하는 동포들에 맞서고자 하는 그리스인은 극소수였다.

 

(3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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