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 아프리카 반군

[스크랩] [번역] 해적질과의 기나긴 전쟁사 : 역사적 경향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2010년 / 제 2장.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 (3)

박용수 2014. 10. 27. 16:33

<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30 ~ pp 40 >

 

< 자료사진 및 역주 출처:

[1] (http://en.wikipedia.org/wiki/Master_Commandant)

[2]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Kidd)

[3] (http://www.corbisimages.com/Enlargement/IH1583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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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계속)


 해적들은 남부 식민지들도 은신처로 삼았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경우 처음에는 해적들을 반겼다. 하지만 해적들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상선들을 먹잇감으로 삼기 시작하자 이러한 감정은 급격히 바뀌게 된다. 이 주의 가장 중요 항구였던 찰스턴(Charleston) 항구의 경우 특히 취약했는데, 이곳의 대규모 모래톱 탓에 배들이 입항 전까지 밀물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로버트 콰리(Robert Quary) 판사는 나중에 펜실베니아 주에서 유명한 해적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하지만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몇차례 면직당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와 몇몇 유명 해적들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는 임시 주지사(acting governor)로서, 찰스턴에서 해적들이 공공연하게 지역 상인들과 교역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는 교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난한 지방이었다. 그 결과 이곳 시민들은 해적들의 장물을 환영했으며, 이것들을 싼 가격에 판매하였다. 노스 캐롤라이나에는 수많은 계곡들과 강들이 존재하였으며, 이곳의 낮은 수심은 해적들을 추적하는 전함들을 곤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해적들에게 훌륭한 도피처가 되었다.

 

 비록 수십년의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영국의 정치 개혁 및 영국 해군의 공격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서인도 제도에서의 해적은 마침내 근절되게 된다. 세기 말에 이르러, 악명 높던 총독들의 대다수는 보다 정직한 관리들로 교체되었다. 해적질을 막는 법도 발효되었다. 이로써 식민지의 해사 법정(Admiralty Courts)이 붙잡은 해적들을 재판하고 처형하기가 더 쉬워졌다. 또한 해적들은 사냥터를 카리브해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옮김으로써 제 발등을 찍었다. 20여년간 해적들이 미국 해안을 사냥터로 삼으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상당수가 해적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사정들이 맞물리면서 결국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역시도 해적이 발붙이지 못하는 곳으로 바뀌게 된다.

 

 가장 저명한 해적이었던 캡틴 윌리엄 키드(Captain William Kidd)와 검은수염(Blackbeard; 블랙비어드)의 사연들을 따라가 보면 이러한 상황들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키드의 경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이름을 떨쳤음에도, 사실 해적이라기 보다는 사략선장에 가까웠다.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는 17세기 말의 정책 전환기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그 결과 해적으로 분류되어 그가 하지 않은 일들을 핑계로 교수형당하고 만다. 윌리엄 키드는 9년 전쟁 시기의 성공적인 사략선장이었다. 1690년대 중반, 그는 뉴욕의 저명한 시민이었으며, 이곳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잘 살고 있었다. 1695년, 그는 해적들과 프랑스 선박들을 추격하는 사략선장으로 다시 한번 임명된다. 그의 후원자로는 뉴욕 주 및 메사추세츠 식민지의 새 주지사인 벨로몽 공(Lord Bellomont)도 포함되어 있었다. 벨로몽 공을 통하여 영국 정부의 고위 관료 4명, 즉 총리대신(Lord Chancellor), 국무대신(Secretary of State), 해군성 장관(first Lord of the Admiralty), 법무대신(Chief Justice)이 이 사업의 은밀한 동업자가 되었다. 윌리엄 3세 국왕은 키드에게 세계 어느 곳에서건 프랑스 선박을 나포할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에서건 해적을 체포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획한 물품은 법정에 제출할 필요 없이 모두 가져도 된다는 3가지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마지막 권한에는 특히 중요한 내용이 있었는데, 즉 국왕이 이 노획품 중에서 10퍼센트를 챙긴다는 부분이었다.

 

 키드의 원정은 처음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1696년 2월, 그가 새로운 선박인 어드벤처 갤리(Adventure Galley)호를 타고 런던을 출항하려던 시점에서, 영국 해군은 그의 가장 훌륭한 선원 중 일부를 징집해갔다. 그는 뉴욕으로 항해해 간 뒤, 이곳에서 부족한 선원들을 보충했다. 이어 1696년 9월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항해를 떠난다. 표면상 해적 사냥꾼이었지만, 키드는 해적을 단 한번도 잡지 못했다. 그 대신, 그가 받은 허가 범위 내에서 합법적인 목표 중의 하나였던 프랑스 통행권(French passes)을 갖고 있던 선박 2척을 나포할 수 있었다. 첫번째 배는 1697년 11월 나포한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두번째 배는 1698년 1월에 나포했는데, 인도 무굴 제국의 고위 관리인 무클리스 칸(Muklis Khan) 소유의 값비싼 화물들을 싣고 있었다. 비록 법적으로는 이 퀘다 머천트 호(Quedah Merchant)를 나포하는 것이 합법적이었다고 하지만, 영국측에 인도 선박이 또다시 나포되었다는 사실에 인도 황제는 분노하게 된다. 인도 황제는 자기 신하의 피해가 변상되는 한편 이 일을 벌인 작자가 처벌되지 않을 경우, 모든 유럽 상인들을 인도에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동인도회사에서는 신속하게 피해 변상조치를 해 주었고, 아울러 인도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제공하였으며, 또한 인도양에서 해적 소탕활동을 벌이겠다고 동의하였다.

 

 한편, 키드는 벌집을 쑤셔놓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드벤처 갤리 호를 불태워 버리고 모든 화물을 퀘다 머천트 호로 옮겨 실었는데, 이는 따뜻한 인도양 바닷물 속에서 어드벤처 갤리 호의 함체가 썩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퀘다 머천트 호는 그에 의해 어드벤처 프라이즈(Adventure Prize)호로 개칭된다. 휘하 선원들 대부분은 해적이 되기로 결심하고 인도양에 남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키드와 함께 고향으로 출발했다. 1699년 4월 키드가 어드벤처 프라이즈 호를 타고 카리브해의 앙퀼라 섬(island of Anquilla)에 도착하자, 그는 작년 11월에 자신이 해적으로 선포되었음을 알게 된다. 불명예를 씻기 위해, 그는 히스파뇰라 섬에 어드벤처 프라이즈 호를 놔 두고 보스톤으로 가서 후원자인 벨로몽 공을 만났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눈치채고 있던 벨로몽 공은 키드를 체포하여 런던으로 압송토록 한다.

 


(교수형당한 캡틴 키드의 모습[2])

 

 키드는 국내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그가 런던에 도착하던 시점에서, 그를 후원하던 사람들은 반대 당파에서 제출한 비난들을 막아내느라 키드를 보호해 주기에는 너무 바쁜 상태였다. 그를 변호해주는 주요 근거는 나포한 선박 두 척 모두 프랑스 통행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받은 왕명의 범위 내에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미스테리하게도, 키드가 벨로몽 경에게 제출한 통행증들이 사라져버린다. 하원(House of Commons)에서의 심리가 끝난 뒤, 키드는 해적질 및 선원 살해죄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를 변호해 줄 증거가 사라진 상황에서, 키드는 1701년 5월 23일 교수형 당하게 되고, 이와 함께 집권당에 대한 위협도 사라지게 된다.

 

 검은수염(Blackbeard; 블랙비어드)는 본명이 에드워드 티치(Edward Teach) 혹은 에드워드 새치(Edward Thatch) 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의 악명은 훨씬 높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단명한 해적이었다. 검은수염은 1716년에서 1718년 사이의 기간 동안 카리브 해 및 아메리카 식민지 동부 해안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탈취한 물품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또한 붙잡은 포로 중에서 그 누구에 대해서도 위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해적선과 노획품들이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가치는 단지 2500파운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들은 결과적으로 버지니아 주지사를 분노케 하였다.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검은수염의 은신처에 원정공격을 실시한다. 검은수염은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이 식민지 아메리카의 무역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협동하였을 때 걸린 것이다.

 

 키드와 마찬가지로 검은수염도 사략선에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1716년, 그는 벤자민 호니골드(Benjamin Hornigold)의 선원이 된다. 호니골드는 검은수염의 능력을 재빨리 알아보고, 나포한 슬루프 선 한척의 지휘를 맞긴다. 둘은 협동하여 1717년 기간 동안 아메리카 식민지 해안 지역에서 총 6척의 선박을 나포한다. 이 해의 늦여름 무렵, 검은수염과 호니골드는 결별하게 된다. 이제 신사 해적(gentleman pirate) 스티드 보넷(Stede Bonnet)와 함께 다니게 된 검은수염은 대서양 연안 지역에 공포를 선사하게 된다. 단 2주일 동안 검은수염은 15척 이상을 나포함으로써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다.

 

 하지만 운명은 벌써 그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검은수염은 포로들을 통하여 2척의 프리깃함인 HMS 로즈 호(HMS Rose)와 HMS 스쿼럴 호(HMS Squirrel)가 보스톤에 배치되었고, 최근에는 HMS 피닉스 호(HMS Phoenix)가 뉴욕 항에 배치되었으며, 버지니아 곶(Virginia capes) 부근에 있던 HMS 쇼어햄 호(HMS Shoreham) 호에 새로 HMS 라임 호(HMS Lyme)가 합류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게 된다. 또한 1718년 7월에는 우드 로저스(Woodes Rogers)가 바하마 군도에 도착하여 이 섬들에 대한 왕실 지배권을 재수립하게 된다. 바하마라는 해방구를 상실한 상황에서, 해적들이 붕괴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로저스는 부임 전에 국왕을 설득하여 1718년 1월 5일 전에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총 사면령을 내리도록 하였다. 1717년 9월 5일에 선포된 이 칙령에 대해서 어떤 해적이든지 1718년 9월 5일 이전까지 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면령과 더불어, 국왕은 이 사면을 거부하는 모든 해적에 대해서 현상금을 내걸게 된다. 바하마에 거주하던 500여 해적들 중에서 200명 이상이 결국에는 사면령을 받아들인다. 이 사면령에 응했던 해적 중에는 벤자민 호니골드도 있었으며, 그는 나중에 예전 동지들을 저버리고 로저스를 위해 일하는 해적 사냥꾼으로 변신한다.

 

 한편, 검은 수염은 캐롤라이나를 향해 북진한다. 1718년 1월,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지사인 찰스 에덴(Charles Eden)을 만난다. 이들은 금방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짐을 알게 된다. 에덴은 검은수염의 범죄들에 대해서 사면을 제공해 주었으며, 해적들이 장물들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 댓가로 에덴은 검은수염의 사업에 있어서 은밀한 동업자(silent partner)가 될 수 있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휴식 및 재정비를 취한 검은수염은 1718년 3월 또다시 항해를 개시한다. 검은수염은 스티드 보넷과 함께 항해하며 카리브해에서 선박 몇 척을 약탈한다. 1718년 5월까지 검은수염의 함대는 선박 4척에 선원 400명으로 불어났으며, 검은수염은 이를 활용하여 찰스턴 항구를 봉쇄하고 항구를 출입하는 모든 선적을 차단하게 된다. 1주일 후, 도시에서부터 약품 1상자를 받아낸 검은 수염이 예상을 깨고 떠나가게 된다.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로 돌아가 휘하 선박 중에 2척을 난파시켰으며, 이어 보잘것 없는 약탈품을 다수의 사람들과 나눠야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선원 대다수를 저버리게 된다. 이번에도 에덴 주지사는 검은수염에 대해서 사면을 내려 주었으며, 해사 법정을 열어 그의 노획물이 합법적이라고 입증해 준다.

 

 이후 검은수염은 노스 캐롤라에나에 몇달간 머물게 된다. 그는 한 대농장주(planter)의 딸과 결혼하여 사치스런 삶을 살게 된다. 마침내 돈이 거덜나기 시작하자, 그는 또다른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이번에는 설탕을 운반하던 프랑스 선박을 나포한다. 노스 캐롤라이나에 돌아온 뒤, 그는 자신이 바다에 난파되어 버려진 배를 우연히 찾았고 단지 이것을 노스 캐롤라이나로 끌고 온 것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번에도 에덴 주지사가 제 역할을 하였다. 주지사는 해사 법정에 검은수염의 주장을 인정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로써 에덴은 검은수염으로부터 설탕 60통을 선물로 받는다.

 

 검은수염의 운수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것은 1718년 11월이었다. 검은수염의 찰스턴 봉쇄는 버지니아 주지사인 알렉산더 스폿우드(Alexander Spottswood)를 불안하게 하였고, 만약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버지지아 주의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1718년 10월, 주지사는 영국의 경비함(guardship)인 HMS 라임 호와 HMS 펄 호(Pearls)의 지휘관들과 만나, 검은수염을 체포할 계획을 논의하게 된다. 양개 함정 모두 노스 캐롤라이나의 얕은 내륙 수로를 항행하기에는 너무 큰 배들이었기 때문에, 스폿우드는 영국 해군이 사용할 2척의 비무장 소형 선박을 구매하는데 동의하게 된다. HMS 펄 호의 부함장(First Lieutenant)이었던 로버트 메이나드 대위(Lieutenant Robert Maynard)가 상륙부대(seaborne contingent)의 책임자가 된다. 메이나드는 1718년 11월 17일, 펄 호의 수병 35명을 자신이 이끄는 슬루프 1척에, 라임 호의 수병 25명을 하이드(Mr. Hyde)가 이끄는 또다른 슬루프 1척에 태우고 출발한다. 한편 라임 호의 함장인 브란드 대령(Captain Brand)은 또다른 수병들을 이끌고 바스(Bath)를 향해 도보로 출발한다. 이들이 바스에 도착한 것은 11월 23일의 일이다. 브란드가 도착하기 전인 11월 22일 드라마틱한 교전이 발생하여, 메이나드 대위는 검은수염과 기타 해적 10여명을 죽이게 된다. 또한 검은수염의 부하 14명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 중에서 13명은 나중에 교수형된다. 영국 해군은 전사 11명에 부상 20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에덴 주지사는 자신이 이에 연루되었음을 숨기고자 시도한다. 검은수염과의 연루문제를 흐리기 위하여, 에덴은 브랜드 대령과 스폿우드 주지사가 불법적으로 노스 캐롤라이나를 침공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메이나드 대위가 검은수염의 주머니에서 나온 편지를 바탕으로 고소장을 마련하자, 결국 자신이 받았던 설탕 60통과 노예 6명을 토해내게 된다. 이러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에덴은 결국 기소를 피하였으며, 또한 검은 수염과의 연락책 역할을 하던 비서 토비아스 나이트(Tobias Knight)도 해적과의 연루 혐의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한다.

 

 서인도 제도 및 대서양 연안 지방에 주둔하는 영국 해군력이 증가함에 따라 해적들의 쇠퇴도 가속화된다. 1717년부터 영국 해군은 아메리카에 점점 더 많은 함선들을 주둔시키게 된다. 1719-1722년 당시 2400명으로 최고조를 기록하던 현역 해적 숫자는 1726년이 되면 200명 미만으로 줄어들게 된다. 비록 해적들 중 상당수가 은퇴하거나 전사하거나, 병들어 죽거나 하여 줄어든 것이긴 하지만, 이들 중에서 500에서 600명 가량은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영국 해군은 마침내 해적들에게 종지부를 찍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1722년 1월, HMS 스왈로 호(HMS Swallow)는 해적 소탕 항해를 출발하게 된다. 2월 5일, 스왈로 호는 아프리카 연안에서 바르톨로뮤 로버트(Bartholomew Robert)가 이끄는 선단을 포착한다. 로버트는 이 무렵 가장 승승장구하던 해적 중에 하나였다. 그는 3년이 채 못되는 해적생활 동안 적어도 400척의 배를 나포한 바 있다. 역풍으로 스왈로 호가 멀어지자, 로버트는 스왈로 호를 해적선단으로부터 도주하려는 포르투갈 상선이라고 오인하고 휘하 해적선 중 한 척인 레인저 호(Ranger)(대포 32문)로 추격케 한다. 스왈로 호는 속도를 늦춰 레인저 호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자신들이 쫓고 있던 배가 상선이 아니라 전함임을 해적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잠깐동안의 교전 끝에 레인저 호는 26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복한다. 레인저 호를 확실히 나포한 뒤, 스왈로 호는 나머지 해적들도 추격하기 시작한다. 2월 10일, 스왈로 호는 로버트가 타고 있던 로얄 포춘 호(Royal Fortune)(대포 40문)를 무찌른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가 사망한다. 해적선원 중에서 54명은 처형되었고, 37명은 영국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 Company)가 운영하는 광산에서 일하는 형벌을 받았고, 74명은 석방되었으며, 흑인 해적 70명은 노예가 되었다.

 

 다른 승전보도 뒤따랐다. 1722년 5월, HMS 라운스톤 호(HMS Launceton)(대포 40문)는 히스파뇰라 섬 인근에서 스페인 해적선 한 척을 나포한다. 해적선원 58명 중에서 41명은 자마이카에서 처형당한다. 다음 해인 1723년 5월, HMS 윈첼시 호(HMS Winchelsea)가 토바고 호(Tobago)의 해적선장 핀(Finn)과 선원 8명을 체포한다. 이들 중 6명이 안티구아(Antigua)에서 교수형당한다. 다음 달인 1723년 6월 10일, HMS 그레이하운드 호(HMS Greyhound)가 롱아일랜드(Long Island) 해안 부근에서 잔인하기로 소문난 해적 에드워드 로우(Edward Low)의 해적선 2척과 교전을 벌인다. 비록 로우를 붙잡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이후 로우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바다 속으로 사라졌거나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레이하운드 호는 로우를 호위하던 배는 붙잡았으며, 1723년 7월 19일 26명의 해적들이 처형된다.

 

(여자해적 앤 보니와 매리 리드를 묘사한 그림. [3])

 

 영국 정부는 또한 해적 사냥꾼을 임명함으로써 영국 해군의 노력을 보강하였다. 1715년 11월 및 12월, 자마이카 총독은 해적 사냥을 위해 10척의 배를 내보낸다. 이들 중 한척은 조나단 바넷(Jonathan Barnet)이 이끈 타이거 호(Tyger)로서, 1720년 11월 캘리코 잭 랙햄(Calico Jack Rackham)을 체포한다. 랙햄은 여자 해적 앤 보니(Anne Bonney)의 애인으로서도 유명하다. 또 다른 여자 해적 매리 리드(Mary Read) 또한 랙햄의 배에 있다가 체포되었다. 1720년 11월 27일 랙햄은 처형되었지만, 보니와 리드는 자신들이 임신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처벌을 면하게 된다.

 

 검은 수염이 찰스턴을 공포에 몰아넣은 지 몇 개월 뒤, 2척의 다른 해적선들이 항구 입구에 나타나 상선 몇척을 나포한다. 식민지 무역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에 경각심을 갖게 된 주지사는, 2척의 사략선 헨리 호(Henry)(대포 8문)와 시 님프 호(Sea Nymph)(대포 8문)를 고용하여 해적들을 붙잡도록 한다. 비록 이들은 자신들이 추격하던 두 해적들은 붙잡지 못했지만, 그 대신 1718년 10월 8일, 검은수염의 동료였던 스티드 보넷을 붙잡게 된다. 교전 과정에서 사략선원 18명과 해적 9명이 사망한다. 보넷과 휘하 해적 34명이 붙잡힌다. 신사적이었던 보넷을 사면해주자는 여론이 비등했음에도, 사우스 캐롤라이나 관리들은 다음 달 보넷과 29명을 교수형에 처한다.

 

 1722년 10월, 사략선 이글 호(Eagle)가 한 무인도에 좌초된 배 한 척을 발견한다. 해적선일 가능성에 유의하며 이글 호는 이 배로 접근하였다. 해적들이 이글 호로 사격을 개시하자, 이글 호는 멀찌감치 이동하여 취약한 해적선을 향하여 포격을 실시하였다. 비록 해적 몇몇은 정글로 도주하였지만, 대다수는 해적선에 남아있다가 포로가 되었다. 사략선원들은 도주한 자들을 추격하였고, 최종적으로 5명을 붙잡아온다. 수색 과정에서 해적선장 조지 로우더(George Lowther)가 옆에 피스톨을 둔 채로 죽어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이후 해적 11명이 처형되었다.

 

 카리브 해에서의 해적질은 마침내 해적질의 2개 기둥이 사라지면서, 즉 정치적 혼란과 안전한 해방구가 사라지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선 너머에서는 평화가 아님(no peace beyond the line)" 정책의 철회와,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 발급을 어렵게 만든 정부 조치로 인하여, 해적들이 합법성이라는 겉치례를 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일단 해적들이 모든 국가들의 적이 되면서, 이들은 영국 해군과 같이 너무 강력한 적들과 상대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해적들을 지원하던 것이 해적질을 반대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이들이 이용하던 해방구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휴식과 재정비, 장물들을 판매할 장소를 잃은 해적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해적질을 금하는 새 법령, 사면령, 해적들에 대한 현상금, 신속한 재판 및 처형 등 또한 해적들이 사라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730년 무렵에는 서인도 제도의 해적질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해적질은 이제 19세기 1/4분기가 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는 잠잠해지게 된다.


 

19세기의 해적 (19th-Century Piracy)


 1818년 12월 19일, 산타렌 해협(Santaren Channel)에 있던 엠마 소피아 호(Emma Sophia)를 향해 한 스페인 사략선이 접근하였다. 선회포(a swivel gun)와 선원 30명이 탑승한 사략선을 맞아 비무장 선박이었던 엠마 소피아호는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배를 탈취한 해적들은 엠마 소피아 호를 플로리다 키(Florida Keys)로 몰고 가 항구에 있던 다른 배로 화물들을 능숙하게 옮겨 실었다. 화물 환적이 완료된 후, 해적들은 이어 배를 수색하여 숨겨진 재물이 없는가 확인하였다. 별로 가치있는 물건들을 찾지 못해 화가 난 해적들은 엠마 소피아 호의 선원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위협에도 별 소득을 얻지 못하자 해적들은 엠마 소피아 호의 장교 한명을 돛대 한켠에 목매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해적들에 의해 목매달리기 직전 장교는 배 옆으로 뛰어들었지만, 옷에 걸려 도로 붙잡히고 말았다.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해적들이었지만, 더 이상 선원들에게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사략선은 떠났고, 텅 빈 엠마 소피아호도 갈길을 계속 가게 된다. 이 장교는 이후 "쿠바 근해는 우리 정부가 해적 시스템을 근절하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위험 해역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경고하게 된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 합중국 정부는 조치를 취한다. 1819년 3월 3일, 미 국회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President James Monroe)에게 해적들을 처리하기 위한 해군 부대를 파병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들 해적들을 제압하기란 쉽지 않은 것임이 밝혀졌는데, 해적질을 부추기는 3가지 조건들이 만족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시기의 카리브해 해적질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 지형은 해적질에 적합했다. 많은 해적들이 쿠바 북부 해안 혹은 푸에르토리코에서 활동하였는데, 이곳은 낮은 수심과 위험한 산호초 지대 등으로 보호되는 계곡과 하천이 많아서 프리깃이나 대형 군함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섬의 짙은 숲 또한 해안가 바로 옆에서부터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해적들이 배를 숨기기에도 매우 쉬웠다. 게다가 해안 가까이에는 깨끗한 물과 열매, 물고기 등이 풍부했기 때문에 해적들이 생존하기에도 대단히 용이했다. 이 시기는 또한 정치적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아이티 혁명(Haitian Revolution),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Wars for Latin American Independence) 등은 사략선들의 활동을 급증하게 만들었다. 비록 미 합중국은 외형상 중립이었지만, 미국 상선들은 언제 해적으로 돌변할 지도 모르는 사략선들에게 취약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쿠바 및 푸에르토리코의 육지에 안전한 해방구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상인들과 지역 관리들은 종종 암묵적으로, 혹은 종종 공개적으로 스페인 해적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였다.

 

 해적질을 진압하는 과업은 해적질이 1820년-1830년 사이에 1만명의 인원을 끌어들일 정도로 수지맞는 사업이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 해적들은 이 시기 동안 카리브해 지역에서 대략 500여척의 배를 나포하였는데, 대략 2천만 달러 가량에 상당한다. 비교 기준을 삼기 위하여 1821년 미 합중국 정부의 1년 전체 예산을 제시하자면, 이자 지불 및 공채 상환 금액까지 포함하여 1978만 5천 달러였다.

 

 비록 수지맞는 사업이긴 했지만, 해적질은 분명 위험한 사업이었다. 동시에 활동하는 해적의 수는 2000명을 넘지 않았지만, 1820년대 기간 동안 미 해군이 교전한 해적들의 수는 3000여명에 이르르고, 이 과정에서 해적선 79척과 해적 1300여명을 붙잡았다. 영국 해군의 경우에는 해적선 13척 및 해적 291명을 붙잡았다. 스페인 해군은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해적선 5척 및 해적 150명을 붙잡았다. 해적소탕작전 과정에서 사망한 해적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바가 없지만, 이 숫자 역시도 상당한 숫자였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미 합중국 해군은 1819년에 의회가 결의하기 십수년 전부터 이미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1800년 1월 1일, 대포 12문을 장비한 스쿠너 선(schooner) 익스피리먼트 호(Experiment)가 상선 4척을 호위하고 있던 중, 바지선(barges) 10척에 타고 있던 아이티 해적들의 공격을 받는다. 비록 수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익스피리먼트 호는 바지선 3척을 격침시켰고, 나머지 해적들을 몰아냈으며, 상선 중에서 2척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다행히도 해적들에게 붙잡힌 2척의 상선 선원들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영웅이었던 데이비드 포터 대위(Lieutenant David Porter)는 부상당하긴 했지만 목숨을 건졌고, 이후에도 카리브 해에서 다시금 해적들과 싸우게 된다.

 

 몇 년 뒤인 미 합중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지방을 구입한 직후,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미시시피 강 입구 지역에서 난잡하게 벌어지는 밀수행위 및 해적질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이곳에서는 프랑스 및 스페인 사략선들과 해적들이 아무 제재 없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805년 12월 3일, 그는 연두 교서(annual message)를 작성하면서 "우리 해안 지역에는 (해적들이) 들끓고 있으며... 이들은 먼 바다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항구 바로 입구에서 우리 우방국의 선박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선박까지도 납치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마침내 제퍼슨 대통령은 뉴올리언스에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한 해군 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1806년, 존 쇼 대령(Captain John Shaw)이 포함(gunboat) 20척 및 수병 400명을 지휘하게 된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이 해적들과 밀수꾼들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쇼의 부대가 발휘할 수 있는 효과는 미지수였다. 민간 당국에서는 해적들을 법정에 기소하기를 꺼려하였으며, 윌리엄 C.C. 클레본 주지사(Governor William C.C. Claiborne)의 경우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지원을 얻어야 했으므로, 도와주기를 꺼려하였다. (그림 3에 멕시코만 지도가 나타나 있다.)

 

 

 

 

 이 상황은 1808년 뉴올리언스로 데이비드 포터 중령(Master Commandant David Porter)가 도착하면서 금세 바뀌게 된다. 포터 또한 처음에는 쇼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지역민들의 적대감에 맞서야 했으며, 휘하 포함들의 엉망인 물자 상태를 개선해야 했고, 선원들의 부족문제도 겪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황열병(yellow fever)에 걸린 상태였다. 한편 장 라핏(Jean Lafitte)이 이끄는 해적들 및 밀수꾼들은 바라타리아 만(Barataria Bay)의 그랜드 테레 섬(Grand Terre Island)에 있는 본거지를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1809년 말 시점에서, 그랜드 테레 섬을 중심으로 선박 30여척 이상 및 그 외 수많은 소규모 보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 역주 : master commandant(중령)이란 계급은 미해군의 초창기 계급이다. 이 계급은 lieutenant(대위)보다 약간 높은 계급으로 captain(대령)이 지휘하기에는 좀 작은 배를 지휘하는 함장에게 부여되었다. 이 계급은 1838년에는 commander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초창기 미해군에서 배를 지휘하는 장교의 계급은 3종류였는데, captain(대령)/ master commandant(중령)/ lieutenant, commanding(지휘대위)이다. 'lieutenant, commanding'의 경우는 사실 별도 계급은 아니었고, lieutenant(대위)가 배를 지휘하는 경우 부여하는 직책명이었다. 이 형태는 오늘날의 미해군에도 이어져서 captain(대령)/ commander(중령)/ lieutenant commander(소령)으로 구분되게 된다. 이 계급은 또한 대략 1794년 이전의 영국 해군 계급인 'Master and Commander' 계급에 상당한다. [1]

 

 포터는 휘하 병력이 바라타리아 해적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적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1810년 초, 그는 해적선 3척이 미시시피 강 입구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맞서러 나서게 된다. 포터는 이들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해적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한다. 해적들은 거꾸로 연방 지방검사(Federal district attorney)인 P. 그라임스(Mr. P. Grymes)에게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포터에게는 해적들을 잡아들일 권한이 없다고 알리게끔 하였다. 분노한 포터는 해적들이 당장 항복하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고 경고한다. 해적들이 일단 뒤로 물러서 항복하긴 했지만,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해적들이 그라임스가 운영하고 있는 지방 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해적선원들이 자신들은 곧 석방될 것이라고 떠벌이며 도시 주변을 유유자적하며 다니는 동안, 포터는 뉴올리언스 시민들로부터 위협과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해적들은 오히려 포터를 상대로 자신들을 억류한 것에 대한 소송을 걸기까지 하였다. 결국 재판정에 해병대(marines)를 투입하고 나서야 해적선 중에 가장 큰 배인 몬테벨로 호(Montebello) 호가 유죄 판결을 받고 경매 대상으로 팔릴 수가 있었다. 이 사건이야말로 해적들이 육상의 해방구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경우, 해적들과의 전쟁에 있어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비록 이 후에도 장 라핏과 바라타리아 해적들은 계속 그랜드 테레 섬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긴 했지만, 포터의 활약이 있은 후에는 다소 덜 뻔뻔해지게 된다. 마침내 1814년 9월, 포터의 후임자인 다니엘 T. 페터슨 준장(Commodore Daniel T. Patterson)이 라핏 해적들과 대적하게 된다. 패터슨은 제 44 보병연대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들은 9월 16일 해적 소굴을 공격하지만, 해적들은 작전에 대한 소식을 미리 눈치채고 도주한 상태였다. 비록 이 과정에서 해적선 10척과 50만 달러 상당의 장물들을 압수하긴 했지만, 섬에 살던 800에서 1000명에 이르는 악당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패터슨의 작전이 가져다 준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군인들이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라타리아 해적들은 섬으로 돌아와서 해적질을 재개했던 것이다. 패터슨의 작전이 일시적인 효과만 거두었다는 점은, 육상의 해적 해방구를 영구적으로 제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패터슨 준장은 1815년 4월, 해군 장관에게 쓰는 편지를 통하여 이 점을 강조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과거의 생활 습관으로 금새 돌아갔다는 점이야말로, 평화시에도 이곳에 소규모 해군 부대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많은 사략선원들은 자신들의 합법성이라는 가면을 상실하게 된다. 이들 중 일부는 그냥 해적으로서 기존의 활동을 지속한다. 일부는 1810-1811년 기간에 스페인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구 스페인 식민지들로부터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을 획득하게 된다. 이들 신생국가들 상당수는 봉기한 직후부터 사략 허가증들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 합중국이 이들 신생 공화국들에 우호적이었음에도, 사략선 중에서 일부는 미국 상선들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더 골치아팠던 문제는 이들 라틴 아메리카 반란자들의 성공에 대응하여 스페인이 취한 행동들이었다. 스페인은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대부분 국가들에게 봉쇄를 취하였다. 하지만 스페인으로서는 봉쇄를 수행할 만한 충분한 전력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단지 스페인 군함들과 사략선들이 봉쇄를 위반하는 중립 선박들을 나포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한 사례를 살펴보면, 단지 3척의 스페인 군함이 1200 마일에 해당하는 해안선을 담당하도록 할당되기도 하였다. 스페인 해군의 취약점 탓에, 스페인 관리들은 봉쇄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략선들을 활용한다. 이들 사략선들 대다수는 라틴 아메리카 혁명가들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선박들을 집중적인 목표로 삼았다. 미국 선박들을 노리는 것이 참으로 수지맞았기 때문에, 다른 스페인인들도 대놓고 해적질을 일삼게 된다.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해안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해안 지역을 운행하는 선박들을 먹이로 삼았다. 지역 당국에서는 정치적 보호를 해 주었으며, 스페인 상인들은 저렴한 가격의 이들 장물들을 처분해 주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미국 해운은 곧 영향을 받게 되고, 단지 1년만에 보험료가 100퍼센트가 뛰어오르게 된다. 상인들과 상점주인들, 보험회사들은 도움을 요청한다.

 

 연방정부가 이 위협에 대응한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의회에서 먼로 대통령으로 하여금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과 싸우기 위하여 해군부대를 배치하도록 승인한다. 둘째, 1819년 여름, 이리 호수 전투(Battle of Lake Erie; 영국과의 전쟁인 1812년 전쟁 당시의 전투임, 역주)의 영웅인 올리버 해자드 페리 대령(Captain Oliver Hazard Perry)을 외교관으로써 남아메리카에 파견한다. 페리의 임무는 남아메리카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과 이들 국가들간의 선린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이들 국가들의 사략선 활동을 제한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베네주엘라였다. 비록 페리의 임무가 성공하여, 베네주엘라가 사략선 활동을 제한하는 한편 과거 발생한 손실들에 대한 보상까지도 약속하긴 했지만, 페리 자신은 황열병에 걸려 귀국길에 사망하고 만다. 그 결과 남아메리카로의 외교노력은 중단되게 된다.

 

 

(2장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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