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미육군 지휘참모대학 (http://www.cgsc.edu/carl/download/csipubs/wombwell_32.pdf) pp 77~ pp 86 >
(3장 계속)
전쟁 기간동안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이 상호간에는 잔혹한 유혈참극을 자행했지만, 그리스 해적들이 붙잡힌 (다른 나라의) 포로들에 대해서 가혹하게 대한 사례는 드물다. 상선 선원들이 저항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구타까지만으로 제한하였다. 이는 19세기 카리브해 해적들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으로, 카리브해 해적들은 종종 붙잡힌 사람들을 죽이거나 고문하였다.
그리스 육군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해군 역시도 급조하여 만든 조직이었다. 각각의 섬들은 각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 만큼 군대에 지원을 하였다. 각각의 섬들은 자체적으로 선장들과 제독들을 선출하였으며, 각자 자신들의 배의 통제권을 유지하였다. 비록 명목상으로 연합 해군의 총사령관이 존재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섬들의 사령관이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조직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인들에 비하면 바다에서 많은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다. 스페사이(Spetsai), 프사라(Psara), 히드라(Hydra) 등과 같은 그리스 섬들은 독자적인 해상 세력을 구축하였다. 비록 전쟁 발발 시기에 그리스인들에게는 해군이 없었지만, 반군들에게는 약 300척의 무장 상선들과 약 12,000명의 그리스 선원들이 있었다. 이들 배들과 선원들의 반수 이상이 스페사이, 프사라, 히드라 출신이었다. 게다가 지중해에서의 해적 위협 탓에, 이들 상선들은 무장과 선원 훈련 측면에서 우수한 상태였다. 반대로 그리스 섬들의 상실은 오스만 해군에 큰 타격이었다. 기본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육지 중심의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해군 충원 및 운영에 있어 피지배민족,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리스 섬지역의 상실은 전쟁 기간 오스만 해군 요원들을 충원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을 안겨주게 된다. 그 결과 1821년 투르크 함대가 바다에 나갔을 때에 탑승해 있던 요원들은 제국 전역에서 끌어들인, 경험이 부족한 잡다한 출신의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기 초기 몇 년 동안, 그리스인들은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제독들은 그리스인들과 대적하기 꺼려하였고, 주로 항구 내에 틀어박혀 있었다. 투르크 해군에 의한 위협이 거의 없게 되자, 그리스인들은 이제 무역로 습격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들은 다르다넬스 해협과 이집트 사이를 운행하는 연안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비록 이들의 1차 목표는 투르크의 상선들이었지만, 다른 국가, 특히 오스트리아의 상선들도 먹잇감으로 삼았다. 이들은 통상 영국, 미국, 프랑스 배들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이들 국가의 배들도 가끔씩은 그리스 해적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미국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 반란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소규모 해적질에 대해서는 그냥 눈감아줄 의향이 있었다. 1822년 말에 이르르면, 해적질 및 사략선 활동이 너무 수지맞게 되어, 그리스 선박들 상당수는 신생 그리스 해군에 합류하는 것보다 무역로 습격을 더 선호하게 된다.
지상과 해상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1824년 술탄 마흐무드가 휘하 봉신인 이집트 파샤 모하메드 알리(Mohammed Ali, Pasha of Egypt)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급작스레 변하게 된다. 술탄은 그리스인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제해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오스만 해군이 이러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모하메드 알리가 보유한 프랑스에서 건설하고 프랑스가 훈련시킨 함대를 이 임무에 투입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1824년 6월부터 작전을 개시한다. 6월 19일, 200여척의 이집트 군함들과 수송선들이 18,000명의 병력을 탑승시키고 출항한다. 같은 날, 별도의 이집트 전대가 3000명의 병력을 카소스(Kasos)에 상륙시켰다. 카소스는 3년 넘게 그리스인들이 이집트 상선들을 먹이로 삼아왔던 기지였다. 이 섬의 방어 상태는 별로였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이 섬을 신속하게 유린하였고, 500명의 선원들을 살해하고 2000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전과를 올린다. 이집트인들은 이어 프사라로 이동한다. 이번 싸움은 보다 격렬하긴 했지만, 프사라의 주민들 역시 이집트인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주민 약 8000명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1824년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일련의 결정적이지 못한 해전들의 결과로 이집트인들의 크레타 섬 침공은 저지된다. 그러나 1825년 2월 24일, 이집트인들은 모레아 반도(Morea) 남쪽 첨단 지역에 대한 상륙에 성공한다. 이로써 전쟁의 향방은 그리스인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항쟁은 지속되지만, 1825년과 1826년에 벌어진 사건들을 살펴보면 이들에게 거의 희망이 없었다. 그리스 전 지역과 그 주변 해역은 말 그대로 무정부상태였다. 1826년 9월, 그리스 해군 함정 6척이 반란을 일으켜 해적으로 돌변한다. 이들은 반군정부의 지원이 너무 부족하여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의 혼란과 오스만 제국의 해상에서의 무능함이 겹쳐져, "동 지중해의 행정상의 무인지대"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그리스 전 국민의 1/4 이상이 해적질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규모 그리스 선박들이 해적질에 연루되었고, 이 지역이 갖는 지리적 영역이 광범위했던 점으로 인하여, 동 지중해의 무역은 완전 중단상태로 몰리게 된다. 비록 그리스인들의 활동이 당시의 국제법에 따르면 분명한 위법행동이었음에도,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무역하는 배라면 여기에 실린 것이 무엇이든간에 합법적인 먹잇감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많은 영국 선박들이 그리스 해적들의 먹잇감에 되었다. 가장 악명높은 해적 기지는 그라부사(Grabusa/Gramvoussa)였다. 이곳의 해적들은 487쳑의 상선들을 납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에서 93척은 영국 배였다. 1825년 3월에서 1827년 10월 사이 동안, 그리스 섬지역 전역에 걸쳐 150척 이상의 영국 선박이 공격당한다. 해적들의 장물 판매로 인하여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상품들의 가격도 덩달아 하락하게 되어, 수많은 합법적인 상인들이 파산하거나 밀려나게 된다.
1820년대 당시, 레판트 지역으로의 미국의 교역은 상당한 규모를 갖고 있었다. 비록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레판트 지역과의 직교역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미국 독립전쟁이 종결되자, 미국 상인들은 신속하게 레판트 지역 상인들과 교역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레판트 지역으로의 교역은 꾸준히 증가하여, 1820년이 되면 연간평균 1백만 달러의 규모에 이르게 된다. 미군 군함 스파크 호(Spark)는 1820년 스미르나(Smyrna)를 방문함으로써 중동지역 항구에 방문한 첫번째 미군 군함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 혁명이 이 지역의 미국인들의 교역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25년 동 지중해 지역에 광범위한 치안공백이 발생하면서 이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해 5월, 그리스 해적들에 의하여 미국 선박 1척이 약탈당한다.
미국의 교역에 대한 우려로 말미암아, 먼로 대통령은 1825년 초, 지중해 지역에 당시까지의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군 부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고자 한다. 상선들은 무장 호송선단 내에 있을 때에만 안전하였으며, 이러한 경우에도 그리스 해역을 통과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이미 미군 전대가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1826년에는 2척의 미군 군함이 추가 파견되었으며, 이로써 이해 말에는 미국 호송선단 시스템이 구축되게 된다. 미 해군 군함들은 스미르나에서 말타까지 상선들을 호위하였으며, 이 호송선단에는 모든 국가의 선박들이 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호송선단조차도 그리스 해적들을 항상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해적들은 이 전술에 금방 적응하였고, 야음이나 악천후로 인해 호송선단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선박을 노리는 등의 방식을 쓰기 시작했다. 1827년 9월의 호송선단에서는 폴포이스 호(Porpoise) 선원들이 선단과 함께 이동 중이던 영국 선박 1척을 구출한 적이 있다. 당시 폴포이스 호는 스미르나를 출발하여 말타까지 11척의 상선과 함께 이동 중에 있었다. 이 상선들 중에서 미국 상선은 5척 뿐이었다. 도로 수로(Doro Passage/ Stenon Kafireos)를 통과하던 중, 바람이 멎으면서 호송선단의 선박들이 조류에 떠밀려 흩어지게 된다. 이 시점에서 5척의 배에 나눠탄 200~ 300명의 해적들이 안드로스(Andros)와 네그로폰테(Negroponte/ Evvoia)에서 뛰쳐나와, 뒤쳐져 있던 코멧 호(Comet)를 공격한다. 해적들이 코멧 호를 끌고가려 하자, 폴포이스 호는 노를 이용하여 추격을 개시한다. 폴포이스 호의 속력으로는 해적들을 따라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해지자, 40명의 선원들이 보트에 탑승하여 추격을 실시하게 된다. 미 해군 선원들은 열심히 노를 저어 코멧 호를 따라잡았고, 이어진 격렬한 전투를 통해 코멧 호를 탈환하는 한편 해적 80~ 90명을 살해한다.
한편 폴포이스 호의 호송선단에서 벗어난 3척의 미국 브리그 선의 운명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모든 상선들이 당면하고 있던 위험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 3척은 키오스(Chios/ Khios) 근방에서 호송선단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직후, 이들 중 한척이 해적들의 공격을 받아 화물을 강탈당한다. 2번째 상선의 선원들은 해적들이 따라잡기 전에 배를 버렸다. 3번째 상선만이 다음 항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9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진행된 워렌 호(Warren)의 항해를 통해 레판트 지역에서의 미 군함들이 수행한 임무를 살펴볼 수 있다. 9월 25일, 워렌 호는 일단의 미국 상선들을 스미르나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실리까지 가는 절반 정도 지점인 케리고(Cerigo/ Kythira) 200마일 서쪽 지점까지 호위하였다. 10월 4일에는 15명의 해적들이 탑승한 보트 1척과, 16문의 대포가 탑재된 해적 브리그 선 1척을 그라부사(Grabusa) 근해에서 나포한다. 이후 3주 동안, 워렌 호는 크레타와 케리고 사이의 바다를 순찰하였으며, 종종 이 지역을 항해하는 상선들을 호위해 주었다. 이때 워렌 호는 2척의 미국 선박인 롭 로이 호(Rob Roy)와 체럽 호(Cherub)가 그리스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찾아 구조하기 위해 움직인다. 체럽 호를 찾는 과정에서 워렌 호는 대포 10문을 탑재한 해적 브리그 선 1척을 아르겐티로(Argenteero/ Kimolos) 근방에서 조우하게 된다. 워렌 호는 공격을 개시하여 이 해적선을 격침시키지만, 해적들은 육지로 도주하여 산속으로 들어간다. 워렌 호는 10월 28일, 시라 섬(Syra/ Syros)에서 체럽 호를 발견한다. 그날 저녁 늦게 렉싱턴 호(Lexington)가 도착하자, 워렌 호는 체럽 호를 렉싱턴 호에 맡기고 기존의 수색을 재개한다. 다음날 워렌 호는 오스트리아 브리그 선 사일런스 호(Silence)가 화물과 돛대를 약탈 당한 채로 표류 중인 것을 발견한다. 워렌 호는 사일런스 호를 시라 섬으로 견인하여 이 역시도 렉싱턴 호가 보호토록 한다. 워렌 호는 10월 30일 미코노스 섬(Mykonos/ Mikonos) 근방에서 노 40개 짜리 대형 해적 보트를 나포한다. 11월 1일 워렌 호가 미코노스 항구에 입항하였을 때, 돛과 삭구, 아편 등을 포함한 체럽 호, 롭 로이 호, 사일런스 호에서 약탈당한 물품들이 발견된다. 돛과 기타 물품들을 시라 섬에 있는 상선들에게 돌려준 뒤, 워렌 호는 안드로스 섬(Andros Island)으로 항해를 시작한다. 11월 7일에는 워렌 호에서 보트들을 보내 섬의 해안지대를 탐험하였다. 보트들은 2일 뒤에 해적 보트 1척을 나포하여 복귀한다. 이들은 또다른 해적 보트 1척도 불태웠다. 워렌호는 11월 18일까지 안드로스 및 유라 섬(Jura/ Yiaros) 근처를 항해하였고, 이어 밀로 섬(Milo/ Milos)의 항구로 향한다. 안드로스 근해에 있던 시기, 일부 주민들이 워렌 호에 체럽 호에서 훔친 보트 1척과 대포, 공구 등을 반납한다. 11월 30일, 워렌 호는 미국 선박 2척과 기타 선박 6척과 함께 스미르나로 향하는 길에 오른다. 이 호송선단은 별 사고 없이 12월 6일 스미르나에 도착한다. 이 항해는 매우 바쁜 항해였다고 할 수 있었다. 2개월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워렌 호는 7척의 해적선을 파괴 혹은 나포하였고, 3척의 상선을 구조하였으며, 이들 선박에서 약탈당한 화물 및 물품 일부를 찾아내었고, 2차례 호송선단을 호위하였으며, 수백마일의 해상을 순찰하였다.
그 밖의 많은 다른 나라들도 동부 지중해에 상당 규모의 해군부대를 주둔시켰고, 이들 국가로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르디나 등을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해군 부대들이 그리스 해적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결코 연합하지 못한 데에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비록 이 지역에 배치된 군함들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그리스 해적들을 제대로 억누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둘째, 해적들을 소탕하도록 임무부여받은 해군 장교들 대다수가 그리스 측의 대의에 경도되어 있어, 그리스인들의 활동에 가혹하게 반응하는 것을 꺼려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경우 해적들을 소탕하는 것을 별로 내키지 않아했는데, 이는 해적들의 존재야말로 이들이 장차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핑계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문화적, 지리적, 외교적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리스 해상에서 해적질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방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를 지지하지 않는 몇 안되는 유럽 국가들 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그리스 해적들에 공격적으로 대처하였다. 오스트리아가 그리스 혁명을 반대하는 원인은 크게 2가지 고려가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러시아가 그리스인들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자연스럽게 오스만 투르크를 지지하게 된다. 둘째 더 중요한 원인으로, 오스트리아는 그리스의 민족주의를 수많은 민족들이 혼재되어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오스트리아인들이 오스만 투르크인들과 한패라고 본 그리스인들은 오스트리아 상선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대규모 해군부대를 레판트 지역에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1826년 당시, 그리스 및 터키 해역에서 22척의 오스트리아 군함이 활동하였다. 그리스인들과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의 적대감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인들은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다른 국가들의 해군에 비해, 해적질 방지 활동이나 해적들을 지원하는 마을들에 대한 보복 활동 등에 있어서 더욱 자주 무력에 의존하였다. 예를 들어 1826년 7월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미코노스 섬(Mykonos)에 상륙하여 해적질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였다. 오스트리아인들은 3척의 보트를 불태우고, 집 한채를 불태웠으며, 주민들에게 벌금을 내도록 강요하였다. 며칠 후인 7월 22일, 같은 오스트리아 부대가 티노스 섬(Tinos)을 공격하여 그리스인들의 코르벳과 브리그 선 각 1척 씩을 나포한다. 1개월 후, 오스트리아인들은 오스트리아 선박들에 대한 2차례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나소스 섬(Naxos)에 대해 포격 및 공격을 실시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계속 오스트리아 선박들을 공격하였다.
오스트리아 해군은 사실 1826년에는 영국 해군보다도 더 많이 배치되었다. 1826년 영국의 지중해 함대(British Mediterranean Fleet)에는 단지 13척의 군함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13척 중에서 8척은 슬루프 선이나 소형 프리깃 함이었으며, 해적 소탕작전에 적합한 배들이었다. 카리브해의 해적들을 소탕할 때의 패턴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해적들과 교전시에 소형 보트들을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1826년 4월, 슬루프 선 알라크리티 호(Alacrity)의 보트에 탑승한 선원들은 프사라 근방에서 3척의 해적선을 파괴하고, 40명의 해적들을 죽였으며, 70명 이상의 해적들을 체포하였다. 비록 알라크리티 호의 피해는 5명 부상에 그쳤지만, 이러한 작전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프리깃 함인 시빌레 호(Sibylle)가 1826년 6월, 크레타 근해에서 2척의 해적선에 의해 납치된 말타 선박을 구조하러 보트를 파견하였을 대, 영국 선원들은 큰 인명 피해를 입고 쫓겨나야만 했다. 영국인들이 해적들이 도주한 골짜기로 접근하였을 때, 몇몇 해적들이 매복 공격을 가하여 14명의 영국인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을 입는다. 카리브해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원들은 소형 보트에서 해적들을 수색 및 추격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휘하 선원들이 5척의 해적선을 추격하느라 거의 20마일을 따라간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에게는 해적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만큼 충분한 배가 없었다. 그 결과 영국의 슬루프 선들과 프리깃 함들은 얇게 흩어져야 했고, 그 결과 큰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몇몇 그리스인들은 해적질이 더욱 격심해질 수록 연합군이 개입해줄 가능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생각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1827년 봄,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에는 전쟁에 개입할 조건에 대한 협상이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한편 1827년 2월에는 에드워드 코드링턴 경(Admiral Sir Edward Codrington)이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을 맡아 해적질을 누그러뜨리라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그가 도착한 뒤 얼마지 않아 근느 나폴리 드 로마니아(Napoli de Romania/ Nafplio)에서 그리스 지도자들과 만나, 만약 "불쾌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서 해적질을 끝내야 한다고 경고한다. 코드링턴은 또한 추가적인 함선 지원도 받았기 때문에, 1827년 말에 이르르면 휘하 함대 규모가 2배가 된다.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점이 코드링턴의 보유 함정 중 19척이 슬루프 선 및 소형 프리깃 함이었다는 점이다.
한편 연합국 측은 1827년 7월 6일, 상호 합의에 도달하여 런던 조약(Treaty of London)을 체결한다. 이 조약을 정당화 시킨 핑계로 명시된 것 중의 하나가 해적질을 억누르고 가맹 3개국, 즉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교역을 보호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 조약은 그리스의 독립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터키 치하의 속국으로서의 그리스를 건국하자는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비밀 조항(secret article)의 내용에 따르면, 만약 양자 중에서 이에 따르지 않는 쪽이 있는 경우 연합국 측이 무력으로 휴전을 이끌어내도록 한다는 부분이 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해군 제독들에게 발송된 지령에서, 각 제독들은 그리스인들이 휴전에 동의할 경우 우방으로 간주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또한 투르크인들이 이 조약에 따르지 않을 경우, 투르크 및 이집트군의 재보급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오스만과 이집트의 사령관들이 연합국 측이 가한 제약에 저항하려 하자, 연합국 측은 1827년 10월 20일, 나바린 만(Navarin Bay)에서 이집트 및 투르크 함대를 박살내어 버린다. 이 함대를 상실한 상황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해권 없이는 그리스에 위치한 군대를 재보급 및 증원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마린 만의 결과는 그리스 정부로 하여금 해적질을 중단하라는 연합국 측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인식하게 만들었다. 추가 활동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리스 대통령은 연합국측에 가장 심각한 해적 소굴인 그라부사 섬(island of Grabusa)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그라부사 섬은 완벽한 해적 소굴이었다. 이곳의 아성(citadel)은 거의 난공불락이었고, 항구는 바람과 조류 탓에 봉쇄하기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곳은 1825년 8월, 크레타 섬에서 투르크 인들에 의해 쫓겨난 60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몰려들기 전까지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삶을 이어갈 수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들 난민들은 해적질에 의존하게 된다. 이들의 첫번째 약탈은 1826년 2월 프랑스 선박 1척으로부터 5000달러를 강탈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2년 넘는 기간 동안, 그라부사 섬의 해적들은 486척 이상의 선박을 나포한다. 이들은 얼마지 않아 대단히 정교한 조직을 형성하게 되며, 장물을 분배하는 데 있어 마치 합영주식회사(joint stock company)와도 같았다. 각자 주민들은 사업에 대한 주식지분(shares)을 갖고 있었으며, 수익은 이에 따라서 분배되었다. 공동체는 전체 약탈품의 1/5을 분배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 섬에서는 20척의 브리그 선 및 스쿠너선, 그리고 60여척의 보다 작은 선박들이 활동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약탈과 이익을 쫓아 그리스 해군에서 이탈한 최신 그리스 군함 몇 척도 이들에 가세하게 된다.
영국 프리깃 함 3척, 영국 슬루프 선 2척, 프랑스 코르벳 함 2척으로 구성된 연합 전대가 1828년 1월 31일 그라부사 항구로 향한다. 이곳에서 이들은 14척의 그리스 선박과 2척의 나포된 배를 발견한다. 연합군의 보복 소문으로 인하여 나머지 해적 대다수는 그라부사에서 도주하였다. 토마스 스타인스 준장(Commodore Sir Thomas Staines)은 해적들에게 즉각 항복하도록 요구하였다. 해적들이 거부하자 연합군 함대는 사격을 개시하여 해적선 대부분을 격침시킨다. 비록 이로써 이 섬의 해군력을 무너뜨릴 수는 있었지만, 스타인스에게는 아직도 아성을 공격하여 해적 지도자를 생포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이어진 1개월 반 기간 동안, 협상과 속임수 등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전투 없이 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스타인스의 병사들은 일단 요새를 장악하고 모든 주민들을 소개시킨 뒤, 아성을 파괴하여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스타인스 준장이 그라부사를 끝장내고 있던 무렵, 그리스 해군은 스포라데스 섬(island of Sporades)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1828년 3월 초, 그리스 프리깃 함 헬라스 호(Hellas)는 2척의 건보트와 함께 이 섬에 있던 78척의 무장 선박을 충돌 없이 압수하였다. 그리스 정부는 보트 중 37척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파괴하였다. 하지만 해적들 중에서 정부에 의해 기소된 인원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동부 지중해에서 산발적으로는 계속 해적질이 발생하긴 했지만, 이 두 작전으로 인하여 사실상 그리스 해역에서의 해적질은 종결되게 된다. 다른 시기 및 장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해적질도 해적질을 조장하는 3가지 요소에 의하여 번성하였다: 우호적인 지리조건, 정치적 혼란, 지상의 해방구. 일단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고 그리스 정부가 해적들의 섬지역 해방구를 무력화시키자, 해적질은 용인 가능한 수준까지 감소하게 된다. 하지만 해적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제거하고, 주민들에게 해적질보다 다른 생계수단을 갖는 것이 더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데에는, 그라부사 섬 점령이나 스포라데스 섬의 해방구 제거와 같은 지상 작전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해군력 단독으로는 그리스 섬지역의 해적질을 끝장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3장 참고문헌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