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 중근세 전쟁

[스크랩] [번역] 아싸예 전투, 1803 (Battle of Assaye)

박용수 2014. 10. 27. 14:49

< 원문: (http://www.britishbattles.com/second-mahratta/assaye.htm) >
< 일부삽화출처: (http://www.war-art.com/assaye.htm) >
 

 

Assaye 전투

 Arthur Wellesley 임시 소장 (이후의 웰링턴 공작)이 마라타 군대를 격파한 중요한 전투로서, 이를 통해 영국이 중부 인도를 정복하는 물꼬를 트게 된다.
 
전쟁 : 제 2차 마라타 전쟁

 

시기 : 1803년 9월 23일

 

장소 : 중부 인도

 

교전 당사자 : 마드라스 관구의 인도 세포이들과 영국 군대 vs 마라타 연합 군대

 

지휘관 : 영국측은 임시 소장 Arthur Wellesley 대령(이후의 웰링턴 공작), 연합측은 마라타 연합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하나인 Madhaji Scindia.

 

병력 규모 : 영국측은 영국군과 마드라스 관구의 인도인 부대, 마이소르 비정규 기병 총 6500여 명에, 대포를 20여문 보유했다. 마라타 측은 병력 최소 4만명에 대포 100문 이상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 무기, 장구류 : 영국군 및 마드라스 보병 연대의 표준 화기는 총검을 사용하는 Brown Bess 머스켓으로, 총구장전식인데다가 유효사거리는 100야드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제 사격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기병 연대의 경우 칼과 총구장전식의 카빈(기병총)을 사용했다.

 

 제 74, 78 하일랜드 연대는 통상 킬트를 입었지만, 인도 전역 기간 중에는 얇은 린넨 바지로 교체하여 입었다. 양 연대 공히 붉은 재킷과 깃털 보닛을 착용하였다. 마드라스 연대는 붉은 재킷과 브리치(일종의 반바지)를 착용했다. 제 19 경-용기병대(Light Dragoons, LD)는 푸른 재킷과 Tarleton 경-용기병 헬멧을 착용했다. 마라타 군대의 구성은, 유럽 용병 장교들에 의해 지휘되는 총검과 머스켓으로 무장한 유럽식 보병대로부터 칼과 방패로 모장한 자유 경기병 떼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병력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양 세력 모두 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승자 : Wellesley 대령의 영국군 세력

 

전말 : 1800년, 영국의 인도 경영 법인인 동인도 회사는 인도 아대륙의 3개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봄베이 항구였다; 또 하나는 마드라스 주변의 지역으로, 동부 해안에 위치한 동 도시의 남과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지역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벵갈 관구를 들 수 있는데, Hoogli 델타 지역에 위치한 무역항인 캘커타를 중심지로 하고 있었다; 이 세 관구들 사이에는 인도인 세력가들의 토지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인도 지협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한 데칸 지역에서는, 영국은 Hyderabad(오늘날 파키스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 페르시아 국경지역의 Scind의 수도인 Hyderabad와 혼동하지 말 것) 공국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바로 남쪽 지역에서는 마이소르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라타 연방은 Peshwa Baji Rao, Daulat Rao Sindhia, Jeswant Rao Holkar, Bhonslar Raja of Berar, Gaikwar of Baroda의 5개의 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몇몇 해안가와 북쪽으로는 네팔 국경, 서쪽으로는 펀잡 지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들을 이으며 영국의 3개 관구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특히 Sindhia의 경우, 과거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델리를 북쪽 영토로서 갖고 있었으며 프랑스가 훈련시킨 수비대 병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1802년에는 연방 내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Holkar와 Berar가 Peshwa와 Sindhia를 패퇴시켰으며, Peshwa의 경우 영토에서 축출되어 동인도 회사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공격적이고 정력적인 영국인 총독인 Mornington 경은 Peshwa에게 수도인 Poona를 되돌려준다는 구실로 연방을 침공할 기회를 잡아, 남쪽으로는 마이소르를, 북쪽으로는 Oudh를 침공하게 된다.

 

 마이소르 방면으로의 침공은 Mornington 경의 동생인 Arthur Wellesley 임시 소장 - 당시 대령, 이후 웰링턴 공작 - 이 지휘하게 된다.

 

 

 

(Assaye 전역도)

 

 Wellesley는 마이소르 전쟁에서 몇몇 중요한 시기를 지낸 뒤에, 잠시 동안 필연적인 마라타 연방으로의 침공을 위한 계획을 짜는데 시간을 보내게 된다. 광범위한 정보망을 통하여, 지역 특성 및 그가 마주쳐야 할 촌락과 방어 거점등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Wellesley는 형에게 어떻게 전역이 진행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즉, 전역은 몬순 시기에 진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하여 불어난 강물이 적의 경기병의 빠른 이동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전에 있어서는, Sindhia와 Berar의 마라타 군대 - 이들이 Wellesley가 담당해야 할 세력이었다. 북부의 델리지역에 있는 Holkar의 군대는 Lake 장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 는 대규모의 보병 세력으로 인하여 그 기동성이 심각하게 저해받고 있었다. 1803년 3월, Wellesley는 마이소르 지역에서 연방 국경을 넘었고, Poona로 진격하여 Peshwa에게 공국을 돌려주었다.

Stevenson 대령이 이끄는 두번째 부대는 Hyderabad에서 월경하여 Hyderabad를 각종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Wellesley는 영국 및 마드라스 원주민 연대들을 인솔하여, 이격된 Stevenson의 부대와 협동하여 마라타 군대를 북동쪽으로 추적하였다. 1803년 8월 23일, Wellesley는 Naulniah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마라타 군대가 단지 6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시 움직이려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이때 적의 기병 수가 상당하였기 때문에, Wellesley는 마라타 군의 위치를 정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병 여단 전체를 투입하였다. Wellesley가 마라타 군에 도달하여 관찰한 결과, 마라타군은 더 이상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훌륭한 장애물인 제방이 가파른 Kaitna강 뒤쪽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우익에는 기병 3만명이, 좌익에는 프랑스 장교들에 의해 훈련받고 지휘받는 16개 대대의 보병 1만 2천명이 100문의 대포와 함께 섞여 배치되어 있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Wellesley는 공격을 결심했다.

 

 Wellesley의 병력에는 기병 연대가 4개 있었으며 이들은 HM(His Majesty) 제 19 경-용기병대(Light Dragoons, LD)와 3개의 마드라스 원주민 연대(Madras Native Cavalry, MNC)들이었다; 보병은 총 7개 연대였으며 HM 제 74, 78 하이랜더 연대와 5개의 마드라스 원주민 연대(Madras Native Infantry, MNI)들이었다; 이 외에 마이소르의 비정규 기병들이 있었으며, 총 병력은 6500명에 대포가 22문이었다. Wellesley는 기병 여단을 이끌고 강가를 따라 도섭 가능한 지점까지 이동하였으며, 이곳은 마라타 군대의 좌측방이자 강 양측방의 마을이 도섭 가능한 지점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주력 부대가 도착하자, Wellesley는 4문의 12파운드 포와 함께 보병이 여울을 도섭하여 마라타군의 측방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건너편 제방에 이르러서 Wellesley의 보병은 2줄로 정렬하게 되며, 영국 연대들은 외곽 측면을 맏았고, 이 중에서 74연대는 Assaye쪽을 맡았다. 제 10 마드라스 원주민 보병연대(MNI)는 첫번째 줄의 중앙부에 위치했고, 제 4, 12 마드라스 원주민 보병연대(MNI)는 두번째 줄에 위치했다.

 

( 1803년 9월 23일 Assaye 전투에서의 제 74th 하이랜드 연대, David Rowlands 작) 

 

 제 19 경-용기병대와 3개의 마드라스 기병 연대들은 예비대가 되었다. 마이소르 기병은 Kaitna 강의 가까운쪽 제방에 위치했다. 일단 Wellesley의 의도를 알아채자마자, 마라타군의 지휘관들은 병력을 이동시켜 Kaitna강과 Juah강이 이루는 지협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전열을 형성하였으며, 이 전열의 좌측방은 Assaye 마을에 닿게 되었다.

 

 영국군이 도하하고 진격하는 과정 내내, 마라타 군의 포대는 지속적으로 강력한 포화를 선사했으며, 특히 제 2, 8 마드라스 원주민 연대의 산병(skirmisher) 장막 뒤를 따라 전진하고 있는 74 하이랜더 연대에 포화가 집중되었다 (후일, Wellesley는 인도에서 여지껏 이렇게 강력한 포화는 받아본 적이 없다고 술회하였다). 전투 후의 수훈보고서에서, Wellesley는 74연대가 산병들을 돕기 위하여 우측으로 선회했고, 이로 인해 74연대와 10연대간에 간격이 벌어졌다고 하였다.

 

 어떤 지점에서 영국/마드라스 부대의 전열은 산마루 끝자락에 도달하게 되고, 공격을 지속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전진이 중단된다. 

(Assaye에서의 제 19 경-용기병대의 돌격, David Rowlands 작) 

 

 74연대가 Assaye로 진격하는 동안, 동 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할 위기에 처했는데, 마라타 경기병들이 연대 잔존병력의 전방과 좌측의 간격을 향하여 몰려나왔던 것이다. 이에 제 19 경-용기병대와 제 4 마라타 원주민 기병대가 뒤에서부터 돌진하여 마라타 기병들을 몰아냈고, 이어 마라타 주력 위치를 향하여 공격을 이어나갔다.

 

 포격이 심하지 않았던 영국군 좌측면에서는 78 하이랜더 연대와 마드라스 원주민 보병연대가 마라타군의 전열을 강습하여 전열을 밀어내었으며, 전방에 위치한 마라타 대대들을 지휘하던 프랑스 장교들이 병력들을 버리고 후방으로 도망침에 따라 여러 대대들이 붕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마라타군의 포병들의 경우, 진지가 유린당했을 경우, 대포 및에서 죽은 체 하고 적이 통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적이 통과하면 그 뒤에서 포격을 다시 개시했다. 이 방법으로 이들은 후열의 영국 및 마드라스 연대에게 포격을 반복할 수 있었다. 제 78연대는 뒤로 돌아서서 제 7 마드라스 원주민 기병대와 함께 적 포병 진지를 재 점령 후, 이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들이 진짜로 죽었는지를 반드시 확인했다.

 

 비록 74연대의 손상이 심각하긴 했지만, Wellesley의 공격은 성공으로 돌아갔고, 이로써 마라타군은 붕괴되어 북동쪽으로 퇴각하였으며, 제 19 경-용기병대와 마드라스 기병 연대들의 제한된 추격을 받아야 했고, 98문의 대포를 전장에 유기해야 했다.  Stevenson의 Hyderabad 병력을이 추격 임무를 맏게 되었다.

 

사상자 : 마라타군의 사상자는 대략 5천명 가량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영국/인도인 부대의 손실은 전사자 장교 22명에 병사 386명, 부상자 장교 57명에 병사 1526명이다. 제 74연대는 총병력 500명 중에서 4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74연대의 장교 전원이 이 전투를 통해 사상자가 되었으며, 이 중에서 전사자는 11명이었다. 제 19 경-용기병 연대의 지휘관이자 기병 여단 전체 지휘관이었던 Patrick Maxwell 중령 역시 전투 과정에서 전사했다. Wellesley의 부대 1/3이 전투를 통해 사상자가 되었다.


이후의 영향 : Stevenson 대령의 부대는 1803년 11월 중순에 평화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패배한 마라타 군대를 추격하였고, Asirgarh 요새를 탈취하였다. 제 2차 마라타 전쟁의 마지막 단계가 같은 달에 발발했다. 마라타인들은 1818년 제 3차 마라타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에 비로소 최종 격파되었고, 이로써 영국의 중부 인도에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Wellesley의 형이자 벵갈주의 총독인 Mornington경은 승리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Assaye 전투는 영국이 중부 인도에 영향력을 확고히 세우는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또한 Wellesley의 인도에서의 명성을 확립해주는 전투이기도 하였다.

 

전설과 전통 :
- 웰링턴 공작이 만년에 이르러, 평생 가장 어려웠던 전투가 무엇이었냐고 질문받았을 때, 그 대답은 "Assaye"였다고 한다.
- Wellesley 대령은 이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타고 있던 말이 2마리나 죽었으며, 그의 전령 역시 바로 옆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참모 전원이 말을 한두마리씩 잃었다.
- Wellesley는 Assaye 전투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내가 적과 싸우지 않는다면, 내게는 천막 기둥에 스스로 목을 매는 외에는 남은 일이 없을 것이다"
- 전투가 끝난 뒤, 74연대는 "Assaye 연대"라고 불리게 된다.
- 보급관(Quartermaster)이었던 James Grant는 제 74연대의 장교들이 전부 사상당하자, 자신의 위치인 후방의 탄약이 있는 곳에서 뛰쳐나와 연대의 전열에 가담하였고, 당시 부상당한 채로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장교인  Swinton 소령을 도와 나머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연대를 이끌었다. James Grant의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연례 Assaye 전투 기념 퍼레이드에서는, 보급관이 Assaye 깃발을 휴대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있다.
- 총독은 세 영국 연대들과 마드라스 연대들에게 특별 깃발을 수여했다. 1882년부터 하이랜드 경보병 2대대(the 2nd Battalion of the Highland Light Infantry)가 된 제 74연대의 경우, 매년 Assaye 기념일마다 이 깃발을 분열식에 내세웠었다. 제 78연대의 경우, 깃발을 이런 식으로 사용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가 끝난 뒤, 각 연대들은 그 상징으로써 코끼리 한마리씩을 수여받았다.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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