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http://www.armchairgeneral.com/the-battle-of-guilford-courthouse.htm) >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 (The Battle of Guilford Courthouse)
- 마크 H. 워커 저
("1781년 3월 15일 벌어진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도". 제 1 메릴랜드 연대가 직전의 총검돌격을 끝내고 나다니엘 그린 장군 앞에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모습이다. 뒷쪽에서는 윌리엄 워싱턴의 경용기병대가 제 5 메릴랜드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급히 이동하고 있다. 미육군 군사학센터 소장 그림.)
이른 새벽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고, 철로 된 말편자로부터 진흙이 튀어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들은 서둘러 각자의 말을 집어타면서 욕설을 내밷어댔다. 이들의 코트는 원래 녹색이었지만, 진흙이 직물 속에 침투해 들어간 지금은 얼룩덜룩한 갈색이 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칼을 휘둘렀고, 일부는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전방, 그러니까 일명 대 샐리즈베리 길(the Great Salisbury Road)라고 불리는 시골길 굴곡 너머에는 적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굽이길 근방에서는 용기병들이 죽음의 품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녹색 코트를 착용한 탈튼의 레지온 부대 기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기병 해리" 리 중령의 부대원들이었다. 미국인들은 치명적인 일제사격을 퍼부어 영국군의 인마를 살상했다. 이 사격은 이날 하루종일 벌어질 일제사격 중에서 그 첫번째였으며, 또한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라 불리게 될 전투의 서막이었다.
양편 군대
우리들 대부분은 미국 독립전쟁의 북부 전역의 유명한 전투들 - 벙커 힐 전투, 브랜디와인 전투, 몽모쓰 전투, 사라토가 전투 등등 - 에 대해서는 읽거나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콘왈리스 경이 요크타운에서 항복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은, 1780~81년 기간 동안 남부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규모 전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일련의 전투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이 바로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였다.
1781년 3월 15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는 찰스 콘왈리스 경 휘하의 약 2000명의 영국 정규군이, 나다니엘 그린 소장 휘하의 약 4000명의 잡다한 병력들과 맞서 전투를 벌였다. 콘왈리스는 직업 군인이자 훌륭한 지휘관이었으며, 또한 1765년 인지조례(Stamp Act)가 발효될 때 반대표를 던진 불과 5명의 영국 하원의원 중 하나였다. 한편 나다니엘 그린은 당초 일개 민병대 병사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들 중 하나로 인정받게된 사람이었다.
비록 양측 지휘관의 군사적 탁월함은 엇비슷 했지만, 그 휘하에 있던 병력들의 질은 대단히 상이했다. 콘왈리스의 군대는 영국 정규군 베테랑 병력으로 이뤄져 있었다. 병력 대부분은 미국에서 5~6년 가량 근무한 인원이었고, 그 이상 근무한 인원도 있었다. 콘왈리스의 소규모 군대에는 또한 독일 용병부대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엽병중대(a company of jaegers), 또 하나는 폰 보제 연대(Von Bose regiment)였다. 영국군 병사들의 평균 나이는 대략 28세였으며, 대부분은 최소 10년간의 군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일반보병의 경우 유명한 브라운 베스 머스킷 - 0.75 구경의 무강선 무기였다 - 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브라운 베스는 신뢰성이 높고 튼튼하기도 했지만,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가장 주목받을만한 특징은 18인치짜리 소켓형 총검을 장착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총검은 머스켓의 총열에 장착할 수 있었다. 미국 민병대의 경우 대체로 이러한 머스켓과 총검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별다른 반격수단이 없이 영국군의 총검공격에 직면하게 될 경우, 대체로 붕괴되곤 하였다.
반대로, 그린 장군의 군대 75% 가량은 복무경험이 3~6개월 가량에 불과한 민병대였다. 이들은 영국 정규군과 대등하게 선형대형으로 맞서기에는 규율과 훈련도가 부족하였으나, 잘 지휘할 경우에는 때때로 잘 싸워주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몇몇 정규 대륙군 연대들도 그린과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델라웨어 중대와, 제 1 메릴랜드 연대가 유명하였으며, 이들은 어떤 영국군과도 대등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윌리엄 워싱턴 중령의 용기병대와 리 중령의 기병대의 경우에는 영국군 기병대보다 오히려 훨씬 우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미국인들이 평소 말 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강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린에게는 버지니아 라이플 부대가 있었다. 찰스 린치 대령과 윌리엄 캠벨 대령의 라이플 부대는, 그린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장거리에서 (250야드) 공격이 가능한 보병부대를 갖춰준 것이었다. 양군은 대체로 비슷한 수량의 포병전력을 갖고 있었는데, 미군은 4문의 6파운드포를, 영국군은 4문의 6파운드포와 2문의 3파운드 포를 배치하였다.
전투의 시작, 리의 지연행동
첫번째 총성은 아침 7:30분 경, 탈튼의 영국 기병대가 대 살리즈베리 도로를 따라 진격하던 중에 발사되었다. 이들은 길이 좁아지는 지점에서 리의 기병대와 조우한다. 짤막한 교전 후, 탈튼의 병력은 뉴 가든 미팅하우스로 퇴각한다. 리의 보병들과 캠벨 라이플부대의 1개 중개가 이들을 추격하였으나, 곧바로 영국 근위대(Guard)의 경보병들 및 독일 엽병들, 제 23보병연대의 선두병력들과 맞닥뜨려 전투를 벌이게 된다. 영국군 전열은 신속하게 신장되어, 붉은 코트의 보병들이 리의 병력들의 측면을 위협하게 된다. 이를 본 리는 교차로 근방의 나무가 무성한 능선으로 보병을 후퇴시키도록 지시하는데, 이 지점은 대략 처음 전투가 발발한 곳과 이어 벌어진 뉴 가든 미팅하우스 전투지점의 중간 쯤 되는 곳이었다. 리의 기병대가 이 퇴각을 엄호하였다.
이 교차로에서의 전투는 제병협동보다는 사실상 보병전투로 볼 수 있는 전투였는데, 이는 이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숲으로 인하여 기병들의 기동이 크게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양군은 리가 약 3마일 북쪽에 있는 미군 주전선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약 30분간 교전을 벌였다. 이러한 초기 차장작전 덕분에, 그린은 영국군 공격에 대비하여 미군병력들을 배치할 2.5시간 가량을 확보하게 된다.
계획
그린의 병력배치 및 작전계획은 대체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카우펜스에서 다니엘 모건이 거둔 승전에서 많이 따온 것이었다. 카우펜스에서 모건은 대륙군 배치지점의 한참 전방에 민병대를 일렬로 위치시켰다. 민병대는 사격으로 영국 정규군을 소모시킨 뒤에 퇴각하였고, 이어 대륙군이 본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비슷한 원리로 그린은 자군 병력을 3개 방어선에 배치하였다. 첫번째 방어선에는 노스 캐롤라이나 민병대를 배치시켰다 - 대 살리즈베리 도로 북쪽에 토마스 이튼 준장의 여단을, 그 남쪽에는 존 버틀러 준장의 여단을 배치시켰다. 이 민병대 여단들의 측면은 리의 부대와 워싱턴의 기병대, 버지니아 라이플 부대, 그리고 델라웨어 및 버지니아 대륙군의 소규모 분견대가 방호하였다. 중앙에는 싱글톤의 6파운드 대포 2문을 배치했다. 민병대는 울타리 뒤에서 적당한 엄폐를 받을 수 있었으며, 밭에 길게 자란 수확물 위로 양호한 사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두번째 방어선에는 버지니아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 로버트 로슨 준장의 병력이 도로 북쪽에, 에드워드 스티븐스 준장의 병력이 도로 남쪽에 배치되었다. 이들 병력은 숲속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보다 좋은 엄폐물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시계를 제한하는 원인도 되었다. 이번 계획도 역시 일제사격을 몇차례 실시한 뒤에 퇴각하는 것이었다.
세번째 방어선에는 그린의 대륙군 부대가 배치되었다. 이들이 군대의 핵심이었으며, 2개 버지니아 대륙군 연대와, 6파운드 포대, 제 2 메릴랜드 연대, 정예 제 1 메릴랜드 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린은 이들 병력이 콘왈리스의 군대를 무찌르길 바랬지만, 또한 늘어진 전투를 통해 이들이 붕괴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린은 대륙군이 없어지면 군대 전체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첫번째 방어선에서의 전투
약 20분간의 효과없던 포병 사격이야말로 첫번째 방어선에 대한 영국군의 공격에 재뿌리는 징후였다. 실제 공격은 대략 정오 무렵에 시작되었다. 도로 북쪽으로 제 33보병연대와 제 23보병연대가 제임스 웹스터 중령의 지휘에 따라 거친 벌판을 가로질러 이튼의 민병대로 진격해 나갔다. 남쪽 측방에서는 제 71보병연대와 본 보제 연대가 알렉산더 레즐리 소장의 지휘에 따라, 최근 밭갈이가 이뤄진 벌판을 가로질러 버틀러의 여단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근위 척탄병과 제 2근위대대는 중앙에 위치하여 제 23보병연대와 71보병연대의 뒤에 위치하게 된다. 한편 좀 더 남쪽에는 제 1 근위대대가 본 보제 연대를 지원했다. 예비로는 엽병대와 근위 경보병대, 탈튼의 기병대와, 제 17경용기병대가 할당되었다.
민병대 방어선으로부터 대략 100-150야드 떨어진 2번째 나무 울타리를 건너간 뒤부터 영국군은 사격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 거리는 머스켓의 일반적인 유효사거리보다는 훨씬 먼 거리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 사격을 미군 전열 측면에 배치된 린치와 캠벨의 라이플부대원들이 사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병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는 와중에도, 영국 보병들은 진격을 계속했고, 총검은 겨울 햇살에 빛을 발하였다.
40야드 거리에서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가 사격을 실시했고, 이들의 머스켓에 장전된 탄환이 영국군 전열을 가로질렀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 대부분이 멈춰서 사격을 가했다. 이 사격은 대체로 중대단위로 이뤄졌다. 몇몇 기술에 따르면, 영국군은 대략 3회 가량 발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사격은 미군 민병대의 것에 비해 좀 덜 효과적이긴 했지만, 역시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이러한 사격 교환 직후, 영국군은 총검을 앞세워 돌격을 감행했고, 민병대는 퇴각한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도망쳤고, 지시한 2번째 일제사격이 실제 이뤄졌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는 도주했으나, 일부는 실제로 2번째 사격을 실시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서레이 카운티 민병대와 같은 경우와 같이 도주를 거부하고, 리의 부대에 붙어서 전투 마지막까지 열심히 싸운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첫번째 방어선은 분해되었다. 양 측방의 정규군들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했으나, 대다수의 민병대는 그야말로 궤주했다.
두번째 방어선에서의 전투
두번째 방어선에서는 버지니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숲이 너무 울창해서 이들은 첫번째 방어선에서의 전투를 볼 수는 없었으나, 이들이 머스켓 총성을 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어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원들이 일부는 부상당한 채로, 대부분 얼굴이 먼지투성이인 채로 버지니아인들의 대열을 지나 퇴각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는 영국군이 나타났다.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제 33보병연대였으며, 로슨은 1개 연대를 전진시켜 이들과 맞서게 한다.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미군 연대 측방으로 근위 척탄병대가 나타나 연대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밀어내게 된다.
도로 북쪽에서의 전투는 수많은 소대 내지 중대단위의 전투로 이뤄지게 되는데, 이는 도주하지 않은 버지니아인들이 영국군과 총격전을 벌인 곳이 숲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사격이 한동안 지속되었고, 일부 연대의 경우 인당 20발씩 사격한 곳도 있다고 한다. 결국에는 영국군이 우세를 점했고, 로슨의 버지니아 부대원들은 궤주한다.
도로 남쪽에서는 스티븐의 여단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었다. 콕과 모펫의 연대가 제 71보병연대에 대항해 격전을 벌였으며, 이들 스코틀랜드 인들과 6~7차례의 일제사격을 교환한다. 스티븐스가 도로 중앙부 근처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전선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티븐스의 전열 남쪽 부분은 한동안 전투를 지속하였다. 이곳에서는 사무엘 맥도웰이 굳건히 서서 몇분간 전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두번째 방어선 남쪽에서는 별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버지니어 민병대와, 윌리엄 캠벨의 라이플부대, 헨리 리 중령의 부대, 앤드류 월레스 대위의 대륙군 부대가 제1근위대대와 본 보제 연대, 탈튼 기병대에 맞서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주 전장에서의 전투가 끝날때까지, 영국군 주력으로부터 1마일 가량 떨어져서 지속되었다.
세번째 방어선에서의 전투
이제는 오후 1:30분이 되었고,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될 시점이었다. 그린의 대륙군은 이미 1시간 가량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점차 가까워지는 전투소음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첫 2개 방어선의 생존자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며, 영국군 보병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다.
세번째 방어선에 처음으로 도달한 영국군 병력은 제 33보병연대였으며, 제임스 웹스터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즉시 대륙군 전열로 돌격을 감행하였다. 대포에 반쯤 도달하였을 무렵, 이들은 제 1 메릴랜드 연대와, 핀리의 포대, 그리고 양개 버지니아 대륙군 연대의 사격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들 부대들은 고지사면 뒷쪽에 부분적으로 은폐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격은 영국군 정규병력들을 뒤흔들어 놓았고 결국 대륙군 반대편에 위치한 능선에 있는 적절한 위치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이어 제 2 근위대대가 도착하였고, 이들 역시 33보병연대와 똑같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과 달랐다. 제 2근위대대는 핀리의 포병대와 제 2메릴랜드연대를 향해 직행하였다. 메릴랜드 연대는 회전하려 했으나,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근위대가 도달하자 붕괴되고 말았다. 근위대는 추격하였고, 만약 정예부대였던 제 1 메릴랜드 연대가 아니었다면 이 전투를 여기서 끝장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제 1메릴랜드 연대는 후방에서 근위대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뒤로 돌아섰고, 근위대를 향해 강력한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근위대는 충격을 받았으나, 패닉에는 빠지지 않았다. 이들은 방향을 전환하여 대륙군을 향했고, 이어 효력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 순간, 윌리엄 워싱턴의 기병대가 근위대의 뒷쪽에 나타난다. 영국군은 자군의 전선을 향해 퇴각하였고, 그 과정에서 혼잡한 근접전이 벌어지며 영국군 전열로 접근하게 되었다. 콘왈리스는 인접한 3파운드 포대에 지시하여 접근하는 미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 이는 그 과정에서 일부 근위대원 또한 사격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격이 실시되며 근접전은 중단되었고, 제 1 메릴랜드 연대와 워싱턴의 기병대는 미군 전열로 퇴각하였다.
이 시점에서 제 71보병연대 및 콘왈리스의 나머지 연대들이 세번째 방어선에 도착하게 된다. 그린은 오늘의 전투로 더이상 얻을 것은 없다고 판단하고, 전 병력에 후퇴명령을 내린다.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 전투는 영국측의 전술적 승리로 평가되고는 있으나, 영국측이 기뻐할 수는 없는 승리였다. 보급품은 부족하고 25% 가량의 병력이 사상당한 상태에서, 콘왈리스는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으로 후퇴하여 증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맞게 될 운명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 이 글은 마크 워커가 암체어제네럴에 기고한 미국 독립전쟁전투 4부작의 첫번째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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