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장미전쟁

[스크랩] [번역] The Hundred Years of War : Battle of Sluys 1340

박용수 2014. 10. 27. 14:29

< 원본: (http://www.britishbattles.com/100-years-war/sluys.htm) >

 

Sluys 전투 - 1340

백년 전쟁을 시작하게 된 해전으로, 에드워드 3세 휘하에서 영국군이 연승하게 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시기 : 1340년 6월 24일

 

장소 : Zeeland와 West Flanders의 근방인 Sluys항 근처에서 전투 발생. 오늘날 Sluy는 토사로 묻혀있지만, 당대에는 대규모의 함대가 정박할 수 있는 대항구였다.

 

교전 당사자 : 영국 함대 vs 프랑스/카스티야/제노바 연합함대

 

지휘관 : 영국왕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지휘관 Hugues Quieret/Nicholas Behuchet, 제노바 지휘관 Bocanegra

 

해군 규모 : 자료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임. 영국군이 400척의 선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자료도 있음. 프랑스 함대는 약 250척을 가졌다고 함.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토마스 함과 같은 소수의 대형함을 제외하면 다른 선박들은 극히 작아서, 전투원과 승조원을 포함하여 25명 가량만이 탑승하였음.

 

(The Battle Sluys: Froissart의 연대기에 나타난 삽화로서, 당시의 전투 방식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다. 궁수들은 crow's nest, forecastle, aftercastle에서 활을 쏘고, 기사와 보병은 적함에 승함한다. 패배한 측은 현측으로 던져지고 있다.)

 

복장, 무기, 장구류 : 14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공히 전투에 특화된 전함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전시에는 양측의 왕은 신하들의 상선들을 소집하여, 기존 승조원 외에, 궁수 및 보병 병력을 배치하였음. 또한 forecastle, aftercastle, crows nest와 같이 궁수들이 그 안에서 적함을 공격할 수 있는 설비들을 새로 설치하였음.


  이러한 상선들은 Cogs라고 불렸는데, 사각 돛에 돛대는 1개였고, 선미와 선수는 뾰족한 형태, 조타는 노 또는 키로 실시하였다.
  정규 영국 해군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에드워드 3세 시절에 만들어진 한 마을인데, Cinque Port라고 불린 켄트 지역의 마을이다. 무역 특권을 대가로 Cinque Port는 매년 상당수의 선박을 왕실 군사용으로 제공하였다.


  프랑스 선박은 흘수가 낮았고 작았으며, 수심이 낮은 지역에서 특히 기동성이 좋았다. 반면 항양성 위주의 영국의 Cogs의 경우 크고 흘수가 깊어서 느린 기동성을 보였다. 제노바 및 카스티야 함대는 galleys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돛과 노로 전진하며, 전쟁용으로 건조된 것들이었다.


  영국은 1~2척의 배를 대포로 무장시켰고, Sluys의 대형선 몇 척인가에는 2~3점의 화기를 탑재했다.


  전투에서, 선박은 적의 측면으로 나란히 이동하면서 화살과 무거운 돌을 발사하여 적 승조원을 살상했고, 보병이 건너가서 생존자들을 제압하여 배와 그 승조원들을 탈취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몸값을 지불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포로는 현측으로 갖다 던져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자 : 에드워드 3세의 영국 함대가 결정적으로 승리

 

(14세기 중반의 프랑스 함대)

 

전말 :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프랑스왕 필립 4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100년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전쟁은 15세기 중반에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지역에서 영국이 축출되고 영국 왕실이 프랑스 영토에 대한 주장을 철회함에 따라 마침내 종결된다.


  바다에서의 전쟁은 영국에는 불리한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영국해협에서의 격렬한 전투를 통하여 당시 가장 큰 배였을 것으로 판단되는 영국의 크리스토퍼 함과 에드워드 함을 나포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함대는 플리머스를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항구의 선적물을 탈취했다.


  1340년, 북프랑스 해안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 왕위에 대한 요구를 강요하고 플란더스 지방의 대 프랑스 저항 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왕은 함대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영국 해협에 있는 항구인 Sluys에 대규모 함대를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Sluys는 (오늘날에는 토사가 덮여서 잊혀졌지만) 유럽 최고의 항구로 간주되고 있었다. 함대의 지휘관에는 Hugues Quieret 제독과, 필립 왕의 문관(civil servant)이자 변호사인 Nicolas Behuchet가 선정되었다.


  프랑스의 동맹인 카스티야와 제노바도, 제노바 사람인 Bocanegra의 지휘하의 갤리 함대를 Sluys로 파견하였다.


  여러 영국 귀족과 왕실 관료들은 국내의 각각 다른 지역에서 왕의 함대를 만들 상선들을 모집하였다. Robert Morley경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50척을 가지고 왔고, Arundel 백작은 잉글랜드 서부에서 상선대를 모집하였으며, Huntingdon 백작은 켄트의 Cinque Port에서 선박들을 모았다.

 

(영국 Cog선. 토마스 함으로 추정됨) 


  1340년 6월 20일, Ipswich에서 에드워드왕은 Cog선 토마스에 탑승하여 영국 해협을 건너는 그의 함대를 이끌었다. Morley의 함대는 플란드르 해안의 Blankenberg 근방에서 합류하였다. 에드워드의 함대는 이제 300~400척의 함선으로 완편되었다. 배들은 작았고, 통상 5~6명의 승조원과 10~15명의 궁수 및 보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Sluys의 북동쪽에 있는 해안에 접근하면서, 한 영국 함선에서 경험많은 병사이자 스코틀랜드인인 Robert Crawley경과 John Crabbe경을 상륙시켜 프랑스 함대를 정찰시켰다. (상륙한 기사들이 Reginald Cobham경과 John Chandos경이었다는 문헌도 있다.) 2명의 기사들은 플란드르 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Sluys로 이동하였다. Crawley와 Crabbe는 귀환 후, 항구 내의 프랑스 함대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이와 같이 좁은 장소에서의 전투는 지나치게 위험하다며 공격을 반대했다.

 

(1750년의 Sluys 항구)

 

  그러나 에드워드는 격분하여 지체 없이 공격할 것을 다짐했다.


  영국 함대는 2개 열의 전투 대형으로 Sluys로 전진했다. 프랑스/제노바/카스티야 연합함대는 해양에서 함대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어대형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함선들은 항구 내에 2열로 위치하고 있었고, 각 열의 함선들끼리는 탑승선(boarding line)으로 서로 묶여있었다.

 

(Sluys 전투도)


  이 기술은 통상 바다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서, 아군 병력들이 함선 사이로 쉽게 이동함으로써 전열 내 선박을 탈취하기 위해 건너온 적병을 격파하러 이동하기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각 선박이 기동의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크리스토퍼 함은 다른 나포된 함선과 함께 첫번째 프랑스 전열의 좌측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국 함을 되찾으려는 열정으로 Robert Morley 경은 프랑스 함대의 좌측면 공격을 주도하였다. 궁수들은 적 승조원들을 쏴죽였고, 보병들은 승함하여 잔혹한 육박전을 거쳐 프랑스 전열의 선박들을 차례차례 점령하였다. 첫번재 프랑스 전열의 함선들은 함께 묶여 있었던 탓으로, 위험에 빠진 부분에 있는 아군을 증원할 수가 없었다.


  두번째 프랑스 전열에 있는 배들이 줄을 끊었고, 일부 선박들은 전투에 참가, 일부 선박들은 탈출을 선택했다. Bocanegra는 프랑스 군이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지키는 동안, 갤리들이 바람을 거슬러 갈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Crabbe가 이끈 추적부대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Sluys 전투에서 적함에 오르는 영국 보병)


  격렬한 전투를 통하여 선박들은 탈취와 수복, 또 탈취 됨을 반복하였으나, 결국 프랑스 측이 압도당해 무너졌다. 프랑스의 기사들과 보병, 일반 병사들과 승조원들은 바다에 뛰어들거나 또는 던져졌고, 대부분 입고 있는 무장의 무게로 인하여 가라 앉아 익사했다. 일부 해안으로 탈출한 자들도 화난 플란더스 인들에게 붙잡혀 대부분 맞아죽었다.


  밤이 오며 전투는 종결되었고, 영국은 완벽한 승리를 얻었다.

 

사상자 : 모든 중세 전투가 그렇지만 사상자는 정확히 계산하기 어렵다. 군대의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특정한 육군 부대나 해군 부대에 얼마나 많은 병력들이 구성되는지에 대한 매카니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Froissart는 '깜짝 놀랄 만한 학살' 이라고 기재했다. 아마도 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리라 추측된다. 프랑스측은 Bocanegra의 갤리 함대를 제외하면 모든 함선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지휘관 Hugues Quieret는 전사하였으며, Nicolas Behuchet는 생포되어 에드워드 3세에게 교수형당했다.

 

(동시대 연대기에 나온 Sluys 전투 삽화)

 

이후의 영향 : Sluys 전투는 이후 수 년간 프랑스 해군이 재기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에드워드 3세로 하여금 북부와 서부 프랑스에 아무 저항 없이 병력상륙이 가능케 하였다.

 

전설과 전통:
-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에 신실성을 보이기 위하여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문장(coat of arms)에 프랑스의 백합을 첨가하였다. 첫번째 그림 좌측을 보면, 에드워드의 기함 토마스 호로 보이는 배의 마스트 끝에 있는 왕실 깃발에 백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 전투에는 유명한 기사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이 중에는 Walter Manny경(Sluys 전투 초기의 소규모 전투에서의 승자), Wake 공, Ferrers 공 등이 있다.
- 영국 함대에는 1337년 Manny가 Sluys를 습격할 당시 수비군 지휘관이었던 Guy of Flanders 경도 있었다. 그 습격 이후에 그는 편을 바꿨던 것이다. Froissart는 Guy경을 "훌륭하고 좋은 기사이지만 bastard(=서자, 잡놈)"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군사 규율에 대한 표현이라기 보다는 그의 출신에 대한 표현으로 보인다.
- 에드워드 3세는 배에 여왕의 가족들도 승선시켰다. 여왕가의 숙녀들 중 한 명이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 프랑스 왕정의 어느 누구도 Sluys의 함대가 전멸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왕에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왕실 어릿광대가 나섰다. 전통적으로 어릿광대는 무례함에 대해서도 용서받게 되어있다. 그가 필립 6세에게 말한다. "우리 기사들은 영국 기사들보다 훨씬 용맹하나이다." 필립 왈 "어찌 그러한가?". "영국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 용기가 없나이다."

 

출처 : Focus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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