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73 이스팅 전투, 1991 (Battle of 73 Easting)

박용수 2014. 10. 27. 15:27

< 원문 출처 : Battle of 73 Easting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73_Easting) >

 

< 사진 출처 :

[1] The Battle of 73 Easting, Iraq, 26th February 1991 (http://www.military-art.com/mall/more.php?ProdID=262) >

 

 

 이 전투는 3사관학교에서 후보생 시절 '지휘관 및 참모업무' 를 배울 당시 임무형 지휘의 전형적 사례로 소개받었던 전투입니다. 즉, 70도선에서 적을 발견한 중대장 맥마스터 대위가 상급 부대의 통제를 기다릴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상급부대의 의도를 명찰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과감하게 결심과 통솔을 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둔 사례입니다. (번역해놓고 보니 위키피디아 원문 글의 저자는 이점에 대해서 별로 강조하지 않았군요. )

 

 

 


 73 이스팅 전투 (Battle of 73 Easting)


 73 이스팅 전투는 걸프 전(Gulf War) 당시인 1991년 2월 26일에 발생한 결정적인 전차전으로서, 영미의 기갑부대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Iraqi Republican Guard) 기갑부대간에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알 부사야 전투(Battle of Al Busayyah)가 발생하고 수 시간 뒤에 80km 동쪽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의 명칭의 유래는 주변에 별다른 지형지물이 없는 사막에서 공격 통제선(phase line)을 지정하기 위하여 사용한 "이스팅"("Easting"; UTM 좌표계(Universal Transverse Mercator Coordinate System)의 각 격자 내에서 다시 x좌표를 의미할 때 쓰는 표현. y좌표에 대해서는 northing. 한국군에서는 '편동좌표선'으로 불림.) 값에서 비롯되며, 킬로미터 단위로 표시되는 이스팅은 GPS 수신기로 그 값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의 미군 주력부대는 제 2 기갑수색연대 (2nd Armored Cavalry Regiment(2nd ACR))로서, 제 7기갑군단의 정찰부대로서의 주임무를 띄고 있었다. 군단의 전위부대로는 그 외에도 미 제 3기갑사단(3rd AD)과 제 1 보병사단(1st ID), 영국 제 1 기갑사단(1 AD)이 포함되어 있었다.

 

 2월 23/24일 밤, 제7기갑군단은 노르만 슈와르츠코프 장군(General Norman Schwarzkopf)의 지상 공격 계획인 데저트 세이버 작전(Operation Desert Sabre)에 의거하여 일명 "메리 만세"("Hail Mary")라고도 불린,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이라크로 동진하는 기동 작전을 수행한다. 군단의 목표는 크게 2가지였다 : 첫째,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는 이라크군을 차단할 것, 둘째, 이라크-쿠웨이트 접경지역에 있는 5개의 공화국 수비대 사단들을 격파함으로써 쿠웨이트 남쪽으로 진격 중인 아랍 연합군과 해병대 부대들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 것. 최초의 이라크군 저항은 경미했으며, 2월 25일 전까지는 2기갑수색연대는 별다른 전투에 말려들지 않았다.

 

 

(1991년 2월 26일, 73 이스팅 전투 : 데이비드 펜트란드 작 [1])


 

계획

 

 제 2 기갑수색연대는 동진하여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원거리 교전을 실시하며, 제 1 보병사단의 중기갑부대로 하여금 초월공격하게 하여 이라크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제 2 기갑수색연대의 전진한계는 70 이스팅(편동 좌표선 70도)까지로 지정하였으며, 반면 1보병사단의 경우에는 목표까지 쭉 전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이라크의 중기갑 부대인 타와칼나 사단(Tawakalna Division)과 맞닥뜨렸으며, 이들은 잘 구축된 방어포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적군은 7기갑군단의 공세에 대비하여 서쪽으로 재배치할 수 있는 예비 진지도 준비해둔 상태였다. 미군의 공습과 포격에도 불구하고 타와칼나 사단의 대부분 병력은 무사했다.


 

67 이스팅

 

 전투는 심한 악천후 속에서 개시되었다.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끼었고, 나중에 안개가 걷혔을 때에는 시속 78 킬로미터에 이르는 강풍이 몰아닥쳤다. 폭우와 그에 이어진 모래바람은 시정거리를 100미터 미만으로 감소시켰다. 시계 한도(ceiling)가 너무 안좋아서 전투 시작 당시, 육군 항공 및 공군 근접항공지원이 불가능했다.

 

 13:00 경, 제 2 기갑수색연대의 한 부대인 G("Ghost" ; 유령) 중대가 몇몇 이라크 장갑차를 격파했고, 이윽고 15:30 무렵에는 3대의 적 전차를 격파했다.

 

 16:10에 이르러서, 그보다 남쪽이고 UTM 좌표로 00 놀팅(Northing) 부근에서 제 2 기갑수색연대 E("Eagle" ; 독수리) 중대가 이라크 하차보병과 땅속에 매복한 이라크 ZSU-23-4 자주대공포, 그리고 몇몇 이라크 마을 건물들로부터 사격을 받기 시작했다. 미군 정찰대는 보유한 전차와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량으로 응전하여 이라크 군 포대를 침묵시키고 이들을 포로로 한 뒤 동진을 계속했다. 이들은 70 이스팅 지점까지 3킬로미터를 더 진격했다. 또 다른 적의 사격이 개시되었고 이에 즉각적으로 응사가 시작되었다.


 

73 이스팅

 

 제 2 "Cougar" 대대의 선두 중대는 16:22 경 70 이스팅에 도착하였고, 곧장 차장 임무 중이던 이라크군 T-72 전차 8대를 격파했다. 3킬로미터 너머인 73 이스팅에는 준비된 진지 내에 위치하고 있는 T-72들이 보였다. 이곳이 이라크 여단 집결지였다.

 

 기습 효과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한 E 중대장 H.R. 맥마스터(McMaster) 대위는, 이 이라크군을 후속 전차부대가 처리하길 기다려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한다. 맥마스터는 E 중대에게 진격하여 적 전차를 급속 공격(hasty attack)하도록 지시했다.

 

 E 중대에는 13대의 M3 브래들리 정찰장갑차와 2대의 M106 박격포차, 1대의 M577 지휘장갑차, M981 화력지원팀 수송장갑차(FIST-V)가 있었고 추가로 3대대 M("Mike")중대 소속의 10대의 M1 에이브럼스 전차가 있었다.

 

 탁 트인 사막에서의 기갑전은 대단히 빠르게 결정된다; 73 이스팅 전투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제 2 기갑수색연대는 적을 기습했고, 적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적진을 돌파했다. 미군의 우월한 야시장비로 인하여 악천후가 미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E 중대는 73 이스팅 지역의 이라크 전차들을 근접 거리에서 격파하였다. 기존의 교전들과는 다르게, 최초의 이라크 전차의 격파가 이라크 병력 전체의 항복을 불러일으키지를 않았다. 이라크군은 진지를 고수했고, 타와칼나 사단의 전차와 장갑차들은 기동하여 교전을 시도했다. E중대는 최소 20대의 전차와 그 밖의 장갑차량을 격파했으며, 다수의 트럭과 벙커를 파괴하고 다수의 포로를 잡았으며, 반면 피해는 없었다. 20분만에 E중대는 67 이스팅에서 74 이스팅까지 줄곧 적과의 교전 끝에 전진한 것이다.

 

 다른 2 기갑수색연대의 중대들인 I("Iron"), K("Killer"), G("Ghost") 중대들도 73 이스팅 전투에 합류했다. 16:40에 이르러, G 중대는 E 중대의 전투장소에서 북쪽이자 73 이스팅 통제선에 평행한 건천(wadi)을 감제하는 한 능선부에 고정 진지를 설치함으로써, 7기갑군단의 좌익을 방호했다. 전투가 발생한 동안, 공화국 수비대의 타와칼나 사단의 18여단과 12기갑사단의 이동이 서로 엉켜버렸고, 이 양개 적 부대는 모두 2개의 능선 사이를 지나는 좁고 얕은 계곡을 통해 도주를 시도했다. 이 길은 곧장 G중대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18:30 경, 도주 중인 이라크 T-72 및 T-55 전차의 첫번째 물결이 G중대 앞으로 몰려왔다. G 중대를 향해 수많은 전차와 보병들이 제파식으로 돌격해왔기 때문에 전투는 치열했다. 그 외의 중대들은 대체로 땅속에 숨어있는 보병 혹은 전차들과 싸웠기 때문에, 그날 밤의 G 중대처럼 기갑 돌격에 맞닥뜨린 경우는 없었다. 전투는 대단히 격렬하여 포병 지원과 헬리콥터 건쉽의 지원이 없었으면 G중대가 무너질 뻔한 위기도 한차례 이상 있었다. 한때 제 2 기갑수색연대의 군사정보 소대(MI Platoon)와 통제 대대(Control Squadron)가 전투 정보 지원을 중단해야 했던 시점이 있었는데, 이는 한 불타는 BMP 보병전투차에서 빠져나온 온몸에 불이 붙은 이라크 병사들이 군사정보 소대를 향해 돌진해오는 바람에 소대원들이 직접 응사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공화국 수비대 병사들의 결의를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했다. 6시간의 전투 동안 G중대 화력 지원팀은 720발의 곡사포 및 MLRS 사격을 유도했다. 21:00에 이르러 G중대는 탄약이 거의 고갈되어 호크("Hawk") 전차중대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G중대는 이라크 보병전투차의 사격으로 인해 1대의 M3 브래들리 정찰장갑차가 격파당했으며, 해당 차량의 포수였던 넬스 A. 몰러 병장이 전사하였다. 해당 정찰장갑차에서는 TOW 대전차미사일 발사기가 고장나, 승무원들은 단지 25mm 부시매스터 기관포에 의존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장갑차가 적에게 노출되는 동시에 포탄 걸림현상(jammed)이 발생하게 된다. 승무원들이 기관포를 재작동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 이라크 BMP-1 보병전투차에서 발사한 73mm 저압포탄이 명중하게 된다. 몰러는 즉사하였고, 잔여 승무원들은 망가진 장갑차에서 탈출한다.


 

73 이스팅 이후

 

 22:30 무렵에 이르러, 제 2 기갑수색연대 전방인 74 이스팅에서 벌어진 전투는 종료되었고, 이라크군 대부분 전투력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한편 제 1 보병사단은 초월 공격을 개시했다. 제 1 기병사단은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제 2 기갑기병연대를 통과하여 목표지점 노포크(Objective Norfolk)로 진격을 계속했다. 목표지점 노포크는 IPSA 파이프라인 도로 교차로와 여러 사막 도로, 그리고 대형 이라크 보급기지 한곳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이제 이라크 제 18, 37 기갑여단은 3개 기갑기병대대 대신에 6개 미군 중전차 및 보병전투차 대대와 6개 155mm 야포 대대와 상대하게 되었다. 이라크군은 그러나 도망치거나 항복하지 않고 전진하는 미군에 맞서 병력을 배치한다. 이어진 전투에서 상당수 미군 부대들은 많은 이라크 전차들과 승무원들을 그냥 지나치게 되는데, 이들은 아직 대피소에 있었거나 아직 엔진조차 켜지 않은 상태라 미군 열상장비에 위협으로 비춰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미군 선두부대가 그냥 지나친 뒤에 적군 전차들과 대전차팀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일종의 혼란이 발생했고, 몇차례의 아군 오인사격까지 발생했다. 여단장이었던 데이빗 바이스만 대령(Colonel David Weisman)은 대대를 퇴각시키고 공격적인 이라크 보병들을 포병 사격으로 해치우기로 결심했다.

 

 이라크군은 1보병사단의 전진을 단지 잠시 동안만 멈출 수 있었을 뿐이었다. 2월 27일 00:30에 이르러, 1보병사단의 2개 공격 여단은 75 이스팅을 따라 위치했다. 이후에 노포크 전투(Battle of Norfolk)라고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향후 3시간만에 목표지점인 노포크까지의 10킬로미터를 달려가게 된다. 새벽이 되자 제 1 보병사단은 목표지점 노포크를 점령하게 된다. 전투는 73 이스팅 지역에서 2월 26일 20:00에 시작된 1기갑사단의 북쪽으로의 공격으로 옮겨가고, 이어 1사단 남쪽으로 3기갑사단의 공격이 이어지게 된다.


 

사상자

 미군 12명이 전투 중 전사하며, 아군 오인사격으로 57명이 부상당했다. 이라크군은 600명 가량이 전사 혹은 부상당했으며, 다수의 전차를 잃었다.


 

73 이스팅 전투의 의의

 제 2 기갑수색연대는 이라크 제 12기갑사단과 타와칼나 사단 사이로 진군하였으며, 미군 지상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숫적으로나 화력 면에서나 열세한 상태에서 싸웠던 부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 기갑수색연대 휘하의 3개 대대는 1보병사단의 2개 선두 여단과 함께 이라크 타와칼나 사단의 2개 여단(제 18 기계화 여단 및 제 37 기갑 여단)을 격파했다. 제 2 기갑수색연대 혼자서 85대의 전차와 40대의 장갑차, 그리고 30대 이상의 장륜차량, 여러 대의 대공포를 격파했다. 이라크 여단급 규모가 73 이스팅에서 격파된 것이다; 이는 공화국 수비대의 지상전 첫 패배였다. 24시간 이내에 다른 이라크 여단 대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 73 이스팅 전투를 다룬 다큐멘터리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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