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스크랩] [번역] 카프지 전투 : 개요 및 기초 분석, 1996 (The Battle of Khafji: An Overview and Preliminary analysis) (1)

박용수 2014. 10. 27. 15:33

 < 원문 출처 : The Battle of Khafji: An Overview and Preliminary analysis (https://research.au.af.mil/papers/ay1996/ari/titusj.pdf) 1- 15페이지 부분 >

 

 

 


항공대학 항공우주 교리, 연구, 교육학부

 

카프지 전투(The Battle of Kjafji): 개요 및 기초 분석

 

 

 

공군력 연구소 연구 및 교육 부담당관

 

1996년 9월 앨라배마 주 맥스웰 공군기지.

 

 

 

소개

 

 이곳 항공대학에서는 여러분의 눈을 먼 지평선에 둔채 과거로부터의 교훈을 읽어내는 것이 여러분들의 임무입니다.

대통령 조지 부시, 1991년 4월 13일

 


 1991년 1월 29일 이른 오후, 쿠웨이트 동부와 남부에 있던 이라크 기갑부대 및 기계화 보병부대가 미국 중부군 소속 해병대(MARCENT)와 아랍 연합군 동부사령부(JFC-East) 휘하 부대에 대하여 쿠웨이트-사우디 아라비아 접경지대를 따른 다수의 장소를 통해 공격을 가해왔다. 이라크군의 공세는 약 4일간 지속되어, 2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통괄적으로 카프지 전투라고 불리는 이라크군과 대 이라크 연합군간의 일련의 전투들은 걸프 전쟁(Gulf War)에 있어서의 첫번째의 유의미한 지상전으로 볼 수 있다.

 

 카프지 전투가 발발한 당시에는, 버려진 사우디 국경 마을에 대한 작은 전투로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카프지 전투는 실제로는 중대한 교전이었으며, 이후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을 다룬 매우 유명한 연구서인 "defining monent"에서 잘 묘사되게 된다.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제외한다면, 카프지 전투는 이라크가 수행한 유일한 대규모 공세였으며, 결과적으로 연합군 공군력에 대한 이라크군의 무능력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카프지 전투는 확실히 공군력의 승리였다. 연합군 공군은 공격 및 아군 지상군에 대한 방어 지원 임무를 수행했으며, 효과적으로 전장을 고립시켜 전투 중인 이라크군에게 추가 증원이 이뤄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비록 이라크군이 전술적인 기습을 성취하였고 초기에 몇몇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카프지 전투는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군대의 절망적인 패전이라고 할 수 있다. 2월 2일 전투가 종결되었을 때, 연합군은 이라크 3개 사단을 저지하였고(2개 사단은 쿠웨이트로 혼란 속에 도주하게 하였고, 1개 사단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약 600대의 적 차량을 파괴하고, 최소한의 아군 피해로 모든 상실된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러한 결과들 각각에 있어서 공군력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자체로도 경이롭긴 하지만, 이러한 "지상의 증거들"은 보다 대규모의 연합군 공군의 전략적 작전행동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새로운 '합동 정찰 목표 공격 레이다 시스템'(JSTARS; 대지상 조기경보 항공기 및 관련 체계)에 근거한, 과거 유래가 없었던 탐지-목표선정-타격 능력의 향상으로 인하여, 연합군 공군력은 쿠웨이트 북방 국경선에서 준비하고 있던 적 후속부대에 대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였고, 이라크인들로 하여금 향후 군사적 전망에 대해서 절망하게 만들었다. 야간에서조차 전장에서 이동할 능력을 상실한 쿠웨이트 주둔 이라크군은 다음과 같은 3가지 냉혹한 선택지만을 갖게 되었다: 싸우다가 거의 확실히 죽거나, 항복하거나, 도망가거나.

 

 중요한 공군력의 승리에 대하여 추가적인 멋진 연구가 있기를 기대하며, 이 논문에서는 본 전투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들을 추적하며 공군력의 임무와 효과에 대하여 기초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세가지 이슈들에 대하여 보다 상세하게 다루도록 하였다: 전투 전 기간 동안 공군력의 명백한 영향력이 이라크의 전략과 군사력에 대하여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지역에서의 근접항공지원(CAS) 작전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점으로, 전장을 고립시키고 이라크의 후속부대를 타격하는 데 있어서의 공군력의 사용에 대해서 다루었다. 최종적으로 직업 공군 요원들에 대한 카프지 전투의 영향에 대해서도 약간 다루도록 하였다.

 

 

전투의 서막

 

 카프지 전투 이전의 이라크 군사 계획에 대하여 공군력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심도있게 살펴보는 과정은, 우선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하여 공세를 취한 이라크의 의도에 대하여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이라크측 정보원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의도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가지 점은 확실하게 볼 수 있다: 1월 17일 밤에 연합군이 적대행동을 시도하기 전의 사담 후세인은 공군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다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하기 몇 개월 전에 나온 말로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즉, "공군력이 전쟁을 결정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라는 비아냥 거리던 이라크 지도자의 표현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방공능력에 대해 확신했고 미국이 "한 전투에서 10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것을 용인할 리"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확신하였기에, 군사적 문제는 지상전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에 대항하여 배치된 연합군 측이 공습으로서 적대행동을 시작한 것은 사담 후세인으로서는 그다지 놀랄 일이 못되었다. 정말로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그 공습이 심각하게 효과적이었고, 그 기간이 이라크 고위 지휘부에서 생각했던 3일에서 7일가량의 기간보다는 훨씬 길었다는 점에 있었다.

 

 사담의 정교한 방공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전쟁 첫날 밤부터 실질적으로 모든 측면에서 연합군 공군이 전장 상공을 지배했다. 전투가 2주차에 접어들면서 공습은 이라크 군사력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와 군수지원에 막대한 교란을 불러일으켰고 사담의 지휘 통제 기구 또한 거의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그 기간동안 이라크의 공군력은 이란으로 도주하거나 연합군의 "셸터(비행기 격납고) 파괴" 작전을 통해 조직적으로 파괴당했다. 이라크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스커드 공격이 연합군의 정치적 일치성을 전혀 교란시키지 못하게 되자 더더욱 당황하게 되었다.

 

 점차 절망적이 되어가던 이라크인들이 주도권을 잡을 목적으로 오늘날 카프지 전투라고 불리는 지상 공격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약 2주간의 강렬하고 효과적인 공습이 자리잡고 있었다. 걸프 전쟁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사담 후세인이 사우디 아라비아 북동부에 배치되어있던 미 중부군 소속 해병대(MARCENT)와 아랍 연합군 동부사령부(JFC-East) 병력에 대해 대규모 지상전을 시도함으로써, 미군에 대규모 인명피해를 입히려고 기도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긍정한다. 사담이 목적했던 바는 미군에게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힘으로써, 의회와 대중의 여론을 반전여론으로 이끄는 데에 있었다. 또한 공세를 통해 포로를 획득하여 당시 상당히 부족했던 적정보 및 연합군의 의도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특히, 미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발생케 할 경우 아랍권 내에서 하락해 있던 사담에 대한 인기를 올려주는 선전 효과도 기대할 수가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이러한 공세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은 야음을 틈타면 그들의 부대를 전진시켜 공세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며 - 이 전술은 이란과의 장기간의 전쟁에서 잘 써먹었던 전술이다- 이로써 연합군 공군력이 이라크군을 탐지,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라크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연합군이 야음을 극복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며, 야간에 움직이는 대규모 부대에 대하여 엄청난 정확도로 공습할 능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막의 폭풍작전이 2주차에 접어들면서 이라크인들이 깨달은 점은, 군사적으로 계속 가만히 있을 경우 그저 공중 폭격에 희생당하기만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이라크인들에게는 싸우는 길 외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연합군의 공중 작전 효과가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인들에게 있어 큰 작전적 실책이 된 이 전투를 감행하게 만든 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점에 있어서 연합군 내부에서는 이라크군 위협의 성격에 대해서 다소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하고 있었다. 1월 17일에 공군 작전이 시작된 이래, 연합군 지휘부는 이라크군이 대규모 지상 공격을 하리라는 데 대하여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에 따른 조치의 한 예로써, 제 17 공정군단과 7군단을 배치 지점에서 약 300마일 서쪽으로 이동시킨다는 결정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미 중부군 소속 육군(ARCENT)에 대한 취약성을 극히 증가시키는 결정이었다. 만약 이라크군이 지상 공세를 펼치게 될 경우에 대해서는, ARCENT의 전략가들은 그 공세가 쿠웨이트 남부 알 와프라(al-Wafra) 유전지대에서 출발하여, 지형지물이 이라크군의 이동을 감춰줄 수 있는 와디 알 바틴(Wadi al-Batin) 지역을 따라 남서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연합군에 가용했던 정보자산이 적의 임박한 공세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지적해 주었는지 여부를 떠나, 당시 이라크군의 1월 29일 월경 공격 전 1주일간 적의 대규모 병력 이동이 반복적으로 관측되었었다. 적어도 2주 전에 전장 지역에 도착해 있었던 JSTARS는 1월 22일 밤, 쿠웨이트 남동지역 미 중부군 소속 해병대(MARCENT)의 작전지역(AO) 주변을 선회하면서 적어도 70대의 이라크 차량들이 사우디 국경을 향해 이동 중인 거을 관측하였다. 3일 후, JSTARS는 80대의 적 차량들이 사우디 국경 수마일 북방에 위치한 와프라 유전 지대로 진입하는 것을 관측하였다. 공격이 있기 바로 전날, JSTARS는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에 걸쳐 중-대규모의 이라크 차량 행렬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일주일에 넘게 관측된 이러한 현상의 관측이 반드시 사우디 아라비아 침공에 대한 징조가 되었던 것일까? 전쟁에서는 상대방의 의도는 항상 식별하기가 어려우며, 사건이 종결된 뒤의 사건 해석을 통해 당시 지휘관을 예단하는 것은, 사건 당시에는 기껏해야 불분명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보들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현장 지휘관들에게는 불공평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시 미 중부군 소속 해병대(MARCENT) 대변인이 말한 바와 같이, 1월 28일의 이라크군 활동을 훈련 활동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은, 당시 상황에서 알 수 있었던 범위 내에서 그리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러가지의 종합적인 요소들이 알 카프지 전투에서 이라크인들이 전술적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설명해 주게 된다. 우선적으로, 연합군 지도자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쿠웨이트 남부 및 남동부 지역에 있었던 이라크 지상군 활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었다. 미 중부군(CENTCOM) 사령관 노르만 슈왈츠코프 장군 (Gen H. Norman Schwarzkopf)과 워싱턴의 상급자들이 선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JSTARS는 대부분의 비행시간을 서부 전장에 있는 스커드 제압 및 공화국 수비대 사단 공습, 그리고 진행 중인 2개 미 육군 군단 재배치를 지원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었다.

 

 다음 문제로는 새로운 중요 전장 자산의 사용 제한성에 있었다. 전장에 JSTARS E-8A가 단지 2대 뿐이었으며, 둘 다 모두 아직 기술적 개발 과정에 있었던 상황에서, 연합군 측은 매일 밤마다 최소 한대만이라도 공중 정찰을 하도록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엇다. 또한 슈왈츠코프 장군이 정기적으로 한대뿐인 E-8A를 스커드 및 공화국 수비대 사냥에 내보냄으로써, 특정 지역에 대한 커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상이 자주 벌어졌다. 이로 인해 이라크군은 사우디 국경지대로 상당수의 병력들을 들키지 않고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이라크군이 1월 29일 오후 월경하여 미 중부군 소속 해병대(MARCENT)와 아랍 연합군 동부사령부(JFC-East) 병력을 공격했을 때, 공중에 있었던 유일한 JSTARS는 훨씬 서쪽에 있는 미 중부군 소속 육군(ARCENT) 지역 상공에 있었다.

 

 우리는 공중 작전이 시작되면 군사적 주도권이 언제까지나 아군에게 있을 것이라고 믿은 연합군 지휘자들의 과도한 자신감과 타성의 효과 역시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중에 한 미군 장성은 이와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저들이 아무 짓도 안했기 때문에, 저들이 뭘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전투

 

 전투 후에 이뤄진 여러 평가들에 근거하여 이라크 계획을 추측해 보았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제 1 기계화 사단이 공격부대의 서쪽 측면을 방호하는 한편, 제 3 기갑사단과, 제 5 기계화사단이 주공 역할을 맡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 3 기갑사단의 임무는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을 건너 남쪽 와프라(Wafra)로 이동한 뒤, 동쪽으로 선회하여 페르시아 만의 사우디 항구인 미샵(Mis'hab) 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한편 서쪽으로 30마일 떨어져 있는 제 1 기계화사단의 경우, 남-남서쪽으로 향하여 쿠웨이트와 사우디 국경간에 북서쪽으로 튀어나온 "팔꿈치" 및 "발뒤꿈치" 지역 사이를 차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동과정과 더불어 제 5 기계화사단은 곧장 해안을 따라 공격을 실시하여 국경지대에 위치한 사우디군을 격파하고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미샵 항 부근에서 제 3 기갑사단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 5기계화사단을 지원하기위하여, 일군의 이라크 특수부대가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남진하여 연합군 후방에 침투 및 혼란을 유발할 계획이었다. 일단 전투가 개시되면 선두 대대들에 의해 이뤄진 초기 성공들을 확대하기 위한 증원부대가 남쪽으로 속행할 것이었다. 지상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남부 쿠웨이트 작전지역에서는 이라크인들이 방어선 뒤로 퇴각하며 미군 지상군을 살상지대 안으로 끌어들인 뒤, 이라크 포병과 역공격을 이용하여 미군에게 대량 인명피해를 강요할 계획이었다.

 

 제 5 기계화사단의 공격로는 쿠웨이트 국경 남쪽 8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페르시아만 연안의 석유 및 휴양촌인 라스 알 카프지(Ra's al Khafji)로 곧바로 지향되었다. 카프지는 이라크 침공 당시 완전 버려진 곳에 불과했다. 이 마을이 남부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포병 사거리 내에 있었기 때문에, 사우디 정부는 전쟁 첫날에 마을 거주민 15,000명을 모두 소개시켜버렸다.

 

 이 전선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연합군 병력들은 각각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미국 소속 군대로 이뤄져 있었다. 연합군 동부 지역의 책임은 1차적으로 JFC-East에 지워져 있었다. 카프지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방어는 사우디 아라비아 국가 방위대(SANG)의 1개 대대와 카타르의 1개 전차대대에 맡겨져 있었다. 1월 후반이 되어서는 소규모 미 해군 및 해병 정찰부대와 항공함포연락중대(ANGLICO) 팀이 추가로 카프지 주변 지역을 정찰하게 되었다. 서쪽으로 약 30마일 지점에는 제 2 해병 경장갑보병(LAI) 대대와, 제 2 해병 사단이 와프라 남쪽 지역을 차장하고 있었다. 제 2 LAI의 작전기지는 2번 관측소(OP-2)였는데, 이곳은 쿠웨이트 국경선상을 따라 15마일 간격으로 위치하고 있던 일련의 옛 사우디 경찰 초소들 중의 하나였다. 보다 서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지점에는 제 1해병사단에서 차출되어 셰퍼드 특임대(Task Force Shepherd)에 편성된 대대 규모의 해병 LAI가 차장 임무를 띄고 쿠웨이트 발꿈치 지역 밑의 움 흐줄 지역(Umm Hjul sector)의 OP-4를 점령하고 있었다. 셰퍼드 특임대 소속의 또다른 소규모 분견대는 30마일 더 떨어진 쿠웨이트 팔꿈치 지역 근처의 OP-6를 점령했다.

 

 1월 29일 저녁, 이라크군은 각각 대대 내지는 그보다 좀더 큰 총 3개의 제대로 국경선을 넘었다. 가장 서쪽에 있던 제대는 제 1 기계화사단 소속의 1개 T-62 전차 대대와 장갑병력수송차(APC)들로 이뤄져 있었다. 쿠웨이트 팔꿈치와 발뒤꿈치 지역 사이에서 나와 남서쪽으로 진행하면서, 이 부대는 곧장 셰퍼트 특임단의 해병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으로 직행했다. 중앙 제대는 제 3 기갑사단 휘하의 부대들로 이뤄졌으며, 이 제대는 와프라로부터 남쪽을 향했다. 이 선봉부대의 구성은 약 50대의 전차와 30대의 APC로 이뤄졌으며, 얼마 진행하지 않아 OP-2에서 공군 지원을 받는 연합군 해병대와 격돌하게 된다. 동쪽 제대는 40여대의 전차 및 APC로 이뤄졌으며, 곧장 카프지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이라크군은 동쪽 제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앞서 언급했던 특수전 부대를 해상 침투시켜 연합군 전선 뒷쪽을 타격하고자 시도했다. 이 상황은 이들 특전부대가 15척의 소형 순찰선을 타고 쿠웨이트를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저지되었다. 미군 및 영국군 해군 소속의 고정익 항공기와 헬리콥터들이 이들을 발견하여 격파 혹은 분산시켰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 중의 하나는, 이 당시 이라크군의 공중 지원이 전혀 없었는데, 이는 앞서의 기간동안 연합군의 공중 우세가 완벽하게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1월 29일 저녁, 지역시간으로 약 20:00 부근에 카프지 전투는 개시되었으며, 이때가 OP-4의 해병들이 어스름 속에서 진군하고 있는 이라크 제 1 기계화사단의 선발대를 발견한 시점이었다. 경무장 상태였던 해병들은 즉각 TOW 대전차 미사일로 이라크군과 교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공군 지원을 요청했다.

 

 OP-4 전방에 해병과 공군의 근접항공지원(CAS)이 시작된 것은 지역시간 기준 약 21:30 무렵이었다. 23:00이 되었을 무렵에는 3대의 AC-130 건쉽과 2대의 F-15E 전폭기, 2대의 LANTIRN(저공항법 및 야간적외선조준시스템) 장비 F-16C 전투기, 4대의 A-10 공격기가 OP-4의 전투에 참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추가로 2대의 A-10 공격기가 리야드(Riyadh) 외곽 킹 파드 국제공항(King Fahd International Airport)에서 비상대기 중이었다.) 이라크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쿠웨이트를 향해 북쪽으로 도주할 때까지 OP-4에서 수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 이 초기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부군 사령부 공군(US Air Force, Central Command: CENTAF)의 전술항공통제센터(Tactical Air Control Center: TACC)에서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선을 따라 심각한 교전이 전투가 발생하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 최소한 4시간이 걸렸다. 당시 스커드 미사일 제압 업무, 공화국 수비대 문제, 그리고 민감한 항공임무명령서(ATO) 문제에 주로 신경쓰고 있는 상황이었고, 한 증언에 따르면 전술항공통제센터(TACC) 요원들은 이 상황에서 처음에는 "별다른 특별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증언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중부군 사령부(CENTCOM) 연합공중구성군 사령관(JFACC) 찰스 A. 호너 중장(Lt Gen Charles A. Horner)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정이 좀 지나 전술항공통제센터(TACC)에 나타났고, 곧장 이 기회야말로 이라크군이 개활지에 있을 때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감지했다. 호너 중장은 곧장 주변 지역에 있던 다른 항공기들의 임무 변경을 지시하여 이 이라크 제대들을 공격하고 있는 해병 및 공군 항공기들을 지원토록 하였다 (When he reached the TACC shortly after midnight, Horner quickly sensed an opportunity was at hand to attack Iraqi forces in the open and promptly ordered additional diversions of theater air to support the Marine and Air Force "shooters" already attacking the Iraqi columns.)

 

 중부군 사령부(CENTCOM) 지휘관들은 최초부터 이 이라크 침공을 보다 대규모 공격의 전조로 간주했다. ARCENT는 위치 이동 중인 7군단에 대한 보다 야심찬 후속 공격이 있을 것을 걱정했고, 중부군 사령부 소속 해병대(MARCENT)의 경우 키브리트(Kibrit)의 노출된 군수기지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 걱정했다. 실시간 지시 및 경고를 위한 방책으로, 호너 장군은 매 40분마다 중부군 사령부 소속 해병대(MARCENT) 작전지역(AO)에 대하여 20분씩의 JSTARS 사용시간을 제공하기로 했다.

 

 OP-4에 대한 이라크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있어서 1월 29/30일 밤의 공습은 필수적이었다. OP-4에서의 승리는 아군 오인사격으로 2대의 해병 경장갑차량(LAV)이 파괴되는 바람에 다소 빛이 바랬다. LAV 1대는 아 지상군의 오인사격으로 파괴되었다; 또 한대는 A-10 공격기에서 발사된 고장난 매버릭 미사일에 피격되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에서 첫번째로 발생한 이 오인 공격으로 인하여 총 11명의 해병이 사망했다.

 

 OP-4에서의 공격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라크 제 3 기갑사단 선두 제대는 와프라를 벗어나 OP-2로 향했다. OP-4에서의 해병들과 마찬가지로, OP-2의 해병들도 TOW 대전차미사일과 자동포(automatic cannon fire)로 응사했고, 공군 지원을 요청했다. 22:40이 되기 조금 전 시각, 포위된 전초기지로 약 50대의 이라크 전차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술항공통제센터(TACC)에 도달했다. 해병대 소속 F/A-18 전폭기, A-6 전폭기, AH-1 공격헬기, 공군 소속 A-10 공격기, F-16전투기들이 해당 지역으로 유도되었다. 23:00으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3시간 동안 해병대와 공군 항공기들은 OP-2 전방의 이라크군들을 공격했다. 02:00에서 잠시 지난 시각, 이라크군은 교전에서 물러나 와프라로 퇴각했다.

 

 북서쪽에서는 OP-6가 01:00에서 잠시 지난 시각부터 사격을 받기 시작했다. 수십대의 이라크 전차와 APC에 맞선 해당 초소의 LAV 중대 지휘관은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해병대와 공군의 야간 근접항공지원(CAS)이 공격자들을 쓸어내버렸다. 동이 텄을 때, 전투의 잔해만이 남아있었다: 파괴된 이라크 기갑차량들과 항복하는 적병들이었다.

 

 OP-2와 OP-6의 해병들은 더 이상 위협받지 않았으나, OP-4에서는 야간 내내 간헐적으로 전투가 재발했고, 쿠웨이트 발뒤꿈치 지역 부근의 적 집결장소에 대한 공습이 반복되었다. 약 15대의 전차로 구성된 이라크 기갑부대가 07:20 무렵 OP-4 전방에 나타나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A-10 공격기들의 몇차례 비행과 해병대 F/A-18들의 비행 1회가 실시되었다. 이어진 1시간 동안, 공습과 대전차 미사일들로 인하여 적의 피해는 누적되어갔다. 마침내 퇴각하기로 결심한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공습을 받아가며 달아나야 했다. 마침내 사격이 끝난 시점에서 해병 지상군은 총 22대의 파괴된 전차를 식별할 수 있었고, 수백명의 전쟁포로들을 긁어모으느라 며칠을 소비해야 했다.

 

 비록 연합군이 이라크군의 서부 및 중앙 제대를 완벽하게 격퇴해 버리긴 했지만, 해안가를 따라 전진한 이라크 제 5 기계화사단의 작전의 경우에는 다소간의 성공을 거뒀다. 이들이 23:00 무렵 사우디 국경을 넘자마자, 이들은 AC-130 건쉽 1대와 해병대 AH-1헬리콥터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라크군은 약 13대의 차량을 손실했지만, 차장임무를 맏고 있던 제 2 사우디 아라비아 국가 방위대(SANG)로부터의 저항은 미약했다. 00:30 무렵, 이라크군은 카프지 외곽에 도달했고, 마침내 마을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3일간에 걸친 일련의 전투들을 통해 이라크군은 카프지의 자군을 증원하려 노력했고, 반면 연합군은 이 증원군들을 격퇴하고 국경선상의 방어선에 위치한 이라크군을 공격하고, 카프지 마을을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카프지가 해방된 것은 1월 31일 오후가 되어서이며, 이는 증원하려는 이라크군에 대하여 효과적인 공습이 이뤄짐에 따라 고립된 이라크군이 사우디 및 카타르 지상군에 항복한데 따른 것이었다.

 


카프지에서의 CAS (근접항공지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OP에 전개한 경무장한 해병 차장부대들은 이라크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것을 보자마자 즉각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연합군 공군은 4일간의 전투 내내 전투 중인 지상군 부대에 대해 대규모의 CAS 지원을 실시했다.

 

 CAS 작전의 지휘 통제 절차들은 전반적으로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사항들로 인해 화력 지원 협조선(FSCL)을 사우디-쿠웨이트 국경 훨씬 북쪽에 선정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FSCL 내에 있는 공습 목표물들은 전방 항공 통제사(FAC)의 지시 하에 다뤄져야 한다. FSCL이 멀리 있게 되면 FAC와 ANGLICO 팀에게 가장자리 근처의 목표물들을 다루는데 있어 폭넓은 안전범위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카프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FSCL은 사우디 국경선으로 후퇴했고, 한 사례에서는 국경선보다 밑에 있었다. 이 결과 국경선에는 자유 사격 지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연합군이 이라크군이 병력들을 집결시키고 있는 해당 지역에 대한 공습 횟수를 늘릴 수 있게 만들었다.

 

 공군과 해병대 고정익 항공기, 해병대 회전익 항공기들과 함께 새로운 JSTARS 시스템은 이라크군 공격을 격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자신임이 증명되었다. JSTARS는 항공 탑재 레이다를 이용하여 야간에 적 차량 이동에 대하여 대단한 선명도로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여, 연합군 항공력의 효과적이고도 효율적인 사용이 가능하게 하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당시 시제형 상태였던 JSTARS는 1월 29/30일 밤의 이라크군 배치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였으며, 공중전장 지휘통제센터(ABCCC)와 연계되어 이들을 타격할 공습 항공기들을 유도하였다. JSTARS는 이후의 기간에도 그 가치를 계속 증명하였다. 쿠웨이트-사우디 국경지역 이라크군 이동에 대한 실시간, 전장 규모(real-time, theater-wide)의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JSTARS는 지휘관들에게 전략 수립과 공습 할당에 있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카프지 전투를 통해서 지휘관들이 배웠던 점으로서, JSTARS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흥미로운 측면이 있었다. 비록 JSTARS의 주 임무가 어디서 적의 차량들이 이동하는 가를 보고하는 점이긴 했지만, 연합군 지휘관들에게는 반대로 어디서 적의 이동이 없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 것이다.

 

 비록 연합군에게는 대량의 근접항공지원(CAS) 자산이 존재했지만, 이들 항공기의 상당수- 특히 미 공군의 A-10 공격기-는 야간에 그 능력이 제한되었다. 지상과 공중의 전방항공통제사(FAC)들이 이 문제를 감소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제한된 야간전 능력이 분명 여러 오인사격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카프지 전투의 초기 기간의 공중 오폭으로 인하여 OP-4에서 7명의 해병이 사망했다.

 

 몇몇 비극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잘 조율된 1월 29/30일의 야간 공습이야말로 미 해병대와 사우디 부대가 대규모의 이라크 부대를 만나 저지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임은 분명하다. 호너 장군의 부탁에 힘입어, 1월 30일 이른 아침, 비행 기획자들은 더 많은 수의 공습 소티들(sorties)을 연합군 지상군 지원을 위한 근접항공지원(CAS)를 위해 재할당했다. 1월 31일까지 카프지 마을 및 주변지역에 대해서만 약 260 소티가 실시되었다.

 

 카프지 마을 근접 지역에 대해 실시된 근접항공지원(CAS)의 경우 대부분 해병대 소속 항공기에 의해 실시되었다. 카프지는 해병대 직접 항공 지원 센터(DASC)가 담당하는 구역 내에 있었고, 나중에 호너 장군이 설명한 바와 같이, 해병 통제사들은 해병대 항공기와 함께 업무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한편 공군의 경우에는 남부 쿠웨이트에 있는 이라크 후속부대에 대한 차단 임무(interdicting)에 집중하여 포위된 카프지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대대규모 이라크군을 구원하러 오는 것을 방지했다. 공군의 공격은 매우 격심하고 효과적이어서 카프지 북방에 묶여있던 이라크군이 절망적인 시도로 하늘에 대전차로켓을 발사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군사적인 이유 못지않게 정치적인 측면에 있어 이라크군이 카프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우디 측에게는 심각한 관심사였다. 연합군의 아랍측 선임 지휘관이었던 사우디의 칼레드 빈 술탄 왕자(Saudi Prince Khaled bin Sultan)는 1월 29일 이라크군의 최초 공격 당시 해병대가 아랍 연합군 동부사령부(JFC-East) 부대에 대한 근접항공지원(CAS)을 하지 못한데 대하여 이미 화가 나 있는 상태였고, 1월 30일 15:00에는 미 중부군 공군 전술항공통제센터(CENTAF TACC)에 있던 호너 장군을 호출하여 카프지에 대한 기 계획된 반격에 대하여 공중 지원을 해 줄 것을 개인적으로 요청하였다. 한시간이 지나도록 약속된 공습이 이뤄지지 않자, 칼레드 왕자는 화가 나 모든 사우디 공군 자산을 연합군 통제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 순간 호너 장군이 이미 전환시켰던 항공기가 사우디-카타르군 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 도착했다. 카프지에 대한 최초의 아랍 연합군 동부사령부(JFC-East)의 반격은 1월 30일 18:00에 이루어졌다.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2차 공격은 성공했으며, 이어진 오후 무렵에는 사우디가 카프지를 탈환할 수가 있었다.


 

(계속)

출처 : FocusWar
글쓴이 : 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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