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장작처럼 불타는 전차들 - 러시아인이 본 1차 체첸 전쟁

박용수 2014. 10. 27. 15:50

< 원문출처 : (http://www.voskres.ru/army/publicist/segen.htm) >

 

 이 글은 러시아어로 기술된 1차 체첸 전쟁에 관한 소개글입니다. 원문 홈페이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이것이 러시아 연방의 공식 입장인지, 그냥 동방정교회 관련된 한 광신도(?)의 입장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러시아인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정도의 소개는 될 것 같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러시아어를 직접 번역할 수 없어서, 인터넷 번역기(구글 번역기/야후 바벨피시 번역기)로 '러시아어->영어'로 돌린 것을 비교해 가면서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인터넷 번역기로 '러시아어->한국어'로 돌려보는 방법도 있지만, 지나치게 말이 안되게 나와서 이 방식을 취했습니다. '러시아어->영어' 번역기를 돌려보면 영어로 번역 안되거나 말이 안되게 번역되는 단어도 나오고 하여 (예를 들면 그로즈니를 Terrible로 번역) 일부 경우에는 구글 검색으로 비슷한 의미를 찾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이중 번역이다 보니 원문과 정확한 의미는 닿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작처럼 불타는 전차들 - 10년전 벌어졌던 체첸에서의 전쟁

(Броня горела, как дрова… 10 лет назад началась война в Чечне)

 

 


 밤새도록 총소리가 전국을 들썩이게 하였습니다 - 샴페인 뚜껑을 따며, 휘파람 소리와 폭죽소리가 이리저리 흩어지며 하늘에 진동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년을 축하하였습니다. TV의 모든 채널에서는 즐거움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춤추며 즐겼습니다. 단지 가장 훌륭한 영혼들만이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내 안의 무엇인가가 이 새해를 뭔가 슬프게 만들고 있다..."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예민한 가슴은 또다른 폭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날 밤, 그로즈니 시에서의 놀이는 다른 신년 행사와는 대단히 달랐습니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고 고함을 쳤습니다. 다만 샴페인 거품이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피가 흘러넘쳤습니다.

 

 젊은 국방장관 파벨 그라체프(Павел Грачёв )는 행운을 믿었습니다. 1995년 1월 1일, 그는 47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운명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2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훌륭한 공수부대원으로 활약했으며, 적기훈장(ордена Красного Знамени), 붉은별 훈장(Красной Звезды), 그리고 2개의 레닌 및 소련 영웅훈장(Ленина и звание Геро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을 받은 국가 영웅이었습니다. 이 저주받은 전쟁에서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라체프는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리 여기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루스보루제니에 사(«Росвооружение»; 러시아의 대표적인 무기 수출 기업(역주) )의 주요 군사고문이 되어 부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는 외국 자동차를 좋아한 탓에 일명 "메르세데스 파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91년 여름, 누군가가 메르세데스 파샤에게 힘의 균형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조언을 합니다. 8월 20일, 그는 샤포시니코프 원수, 아칼로빔 장군, 그로모프 장군과 함께 쿠데타 진압 세력에 서게 됩니다. 1993년 10월 3일, 국방장관 그라체프는 모스크바로 병력을 보내면서 이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건물을 공격합니다. 이제 2년 후, 이제 그에게 두번째 별 - 러시아의 영웅 - 을 달아줄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보스인 옐친은 체첸에 대한 전격전을 수행하면 그에게 상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러한 범죄적인 자신감을 갖게 했을까요? 두다예프 장군이 갖고 있던 병력과 장비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어쨌든 1995년 1월 12일 경에야 과거 러시아군 철군 이후 체첸 공화국 지역에 남아있던 무기의 종류와 수량에 대한 문서정보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체첸에는 보병사단에 필요한 거의 모든 표준 무기들이 다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숫자도 상당했습니다. 1992년 체첸에는 3만정 이상의 소화기들 - 즉 돌격소총과 기관총들 -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로써 두다예프는 15000명 가량의 정규군과 그와 비슷한 규모의 자원병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여기에 1995년판 4호 "육군지 부록"에 나와있는 설명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방군이 체첸으로 들어갈 당시의 두다예프 측 군사집단의 구성은: 정규군, 국가방위군, 민병대, 경호대, 몇몇 고급 장교들의 사병부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코카시안 연방 부대("보르즈(Борз)" 특수목적 대대와 압하즈 대대 등), 일부 체첸 내무부 부대(국경경비 및 세관부대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체첸 정규군(체첸 국군)은 1994년 당시: 전차, 대포, 대공포 연대, 산악보병 여단, 무슬림 전사 연대, 2개 훈련항공연대, 특수부대, 몇몇 훈련소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42대의 T-62 및 T-72 전차, 48대의 BMP(이중 12대는 BMP-2 SH) 경전차, 30대의 BTR 및 BRDM 장갑병력수송차, 153대의 화포 (18대의 BM-21 방사포, 30대의 D-30 122mm 곡사포, 5대의 자주포 포함), 44대의 대공시스템 (8대의 "쉴카" 자주대공포 및 6대의 ZU-23 및 57mm S-60 대공포 포함)을 갖고 있었다."

 

 그라체프와 옐친이 이걸 몰랐을까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르지 않고서야 그런 멍청한 사태를 벌였을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1994년 여름 내내 반대파에 의한 두다예프 축출 시도가 있었고 - 사실 코미디에 불과했습니다.

 

 11월 30일, 옐친은 체첸에 군대를 보낼 필요가 있다는 칙령에 사인했습니다. 그리고 12월 11일, 정규군과 러시아 내무부(MVD)의 몇 개 연대들이 체첸 국경을 넘었고, 3개 전선에 걸쳐 그로즈니로 진격해 들어갑니다. 최초의 부대들은 잉구세티아에서부터 저항을 받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최초의 러시아군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첫날부터 러시아군 포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다. 다게스탄에서는 하사뷰르트(Хасавюртом) 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내무부 병력들의 이동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체첸 군사집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병사 20명이 두다예프에게 "선물"로 잡혀갔습니다.

 

 12월 14일, 러시아 연방정부의 레오폴드(Леопольд)는 체첸인에게 무장해제를 권유합니다. 12월 17일, 옐친은 "체첸 공화국 행정기관에 대한 연방 영토 복원에 관한 칙령"을 발표합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메르세데스 파샤는 옐친 대통령에게 자신있게 말하길, 1개 공수연대만 투입하면 몇시간 내로 그로즈니를 제압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2개 늑대 사단에 대하여 1개 연대라...

 

 1944년에 태어난 조하르 두다예프 장군 역시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체첸에서의 단지 몇년 동안의 집권기간 동안 그는 진정한 독재정권을 만들어냈습니다. 1991년 10월 27일, 두다예프는 체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1일, 그의 지시에 따라 체첸은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억압하여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점령정책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었음을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1992년에만 해도, 체첸에서 700명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살해당하고 2만 5천여명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옐친은 옐친답게 행동했습니다. 1991년 11월 7일, 그는 제 178호 칙령을 통하여 체첸-잉구쉬 공화국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 칙령이 있은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모든 러시아 정규군이 이 지역에서 철군하였습니다. 사실상 러시아 대통령은 두다예프에게 체첸의 모든 주권을 넘겨주는 칙령을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1993년 6월, 두다예프는 반대파를 억눌렀고, 그로즈니 시장(mayor)을 습격하였으며, 의회를 해산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대하였습니다. 체첸 전역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동시에 전통적인 "알라후 아크바!(알라는 위대하다)"라는 구호에 "조하르 아크바!(조하르 두다예프는 위대하다)"라는 것이 덧붙여졌습니다.

 

 1988년에도 체첸인들의 마음 속에 조국 재독립이라는 열풍이 휩쓴 적이 있었습니다. 반 러시아인 선전이 횡행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체첸인들의 상징으로서 늑대가 선정되었습니다. 늑대는 자기보다 훨씬 강력한 적에 대항하여서도 기꺼이 달려들어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맹수입니다. 늑대는 체첸의 문장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로즈니에서는 이스라엘제 우지 기관단총에 기반한 "보르즈(Борз)" - 체첸어로 "늑대" - 기관단총이 개발되었습니다. 두다예프에게 최초 생산분이 인도된 것은 1992년 1월 6일이었습니다. 이 무기의 품질은 평균 이하에 불과했지만 자국산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저는 1992년 가을에 체첸에 처음으로 방문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두다예프는 대규모로 언론인들을 모아 공화국을 돌아다니며 이츠케리아(Ичкерия; 체첸공화국의 다른 표현(역자 주) )는 러시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체체니야(Чечня)"이란 단어의 사용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이 단어가 욕설과 비슷하게 들릴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체첸인들의 국가적 존엄성을 모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든 단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체첸인들은 "노흐치(нохчи)" 혹은 "이츠케리아 자유 민족(жители свободной Ичкерии)"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다예프 장군이: "우리는 100만명이고 러시아인은 1억명이다. 모든 이츠케리아인은 죽기 전에 러시아인 100여명은 죽일 것이다. 그리고 노흐치가 멸망함과 동시에 러시아 역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 아마 이로 인한 평화로 세계는 좀 더 숨쉬기 쉬워질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명의 정신병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명은 1개 공수연대면 상대방을 몇시간 내에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한 명은 모든 체첸인들마다 러시아인 수백명씩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러시아와 체첸인의 멸망이 가져올 평화가 안도의 한숨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994년 12월 말이 되어서, 3개 방면의 부대가 그로즈니로 접근하여 왔고, 1995년에 가까워질수록 체첸 전역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매 단계는 까다로웠습니다. 그로즈니 서쪽 외곽지역이자 구데르메사 동쪽 외곽지역에 있는 순주(Сунжу) 다리를 건너는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으며, 나찌스와의 전쟁 때처럼 조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어린 병사들의 목숨을 대가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들이 스탈린주의자였건 옐친주의자였건 상관 없습니다 - 조국을 위해 싸운 것입니다. 이들이 이곳 체첸으로 걸어들어온 것은 이곳에 반러시아적, 반인륜적 정권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 새로운 노예주가  폭력과 기만으로 새로이 노예제도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조국의 젊은이 수천명이 매달려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형제가 된 체첸 주민들을 두다예프가 증오스러운 적인 매서운 늑대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동료를 구하기 위하여 전투에 참가했고 용맹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로즈니 돌입 이전에도 러시아 영웅(Героя России) 지위를 얻은 인원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에브게니 오스트로우호브(Евгению Остроухову) 이병의 경우 아군을 엄호하기 위하여 불타는 BTRe 장갑차 속에서 끝까지 적에게 사격을 퍼부음으로써 선정되었습니다.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칙령은 1994년 12월 31일에 서명되었습니다.

 

 짧게 눈이 내렸고, 사람들이 나무들을 장식하고 명절 분위기에 들떠 있던 이날, 기갑부대 병력들이 그로즈니 시로 진입하였습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은 1995년이 올 때까지 살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야! 새해다!" 저는 하루의 어느 때인가는 기억이 나지만 일주일에서 몇 번째 날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낮,밤,낮,밤... 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로즈니에서 대열 선두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제게 지도상의 직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확했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철썩같이 믿었다..." - 이 말들은 알렉산드르 치쿠노바 대령이 여러 차례의 실패한 공격들을 수행하면서 반복하게 되는 말입니다. "나는 바보처럼 철썩같이 믿었다..." - 이들은 모두 명령에 따라 철썩같이 믿었던 것입니다. 교활하고 계산적인 맹수들은 이들을 도심으로 들어오게 놔두었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총탄과 수류탄이 날아들었고, 기관총과 기관단총들이 탄막을 형성하였으며, 저격수들이 정확한 사격을 퍼부어댔습니다. 단지 수 년간에 걸쳐 준비한 두다예프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이곳으로 들어온 사내들에게 지옥을 선사한 것입니다. 바로 미스터 그라체프에 대한 생일 선물인 것입니다!

 

 내무부 특수부대의 한 연대인 "스콜피온(Скорпиона)" 부대의 병사들은 어떻게 그들의 장갑병력수송 차량들이 마당으로 유인되어 2층과 3층에 매복한 RPG에게 공격을 당했는지에 대하여 회상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전국에 있는 아늑한 아파트들이 마치 TV 선전 노래처럼 "헤이, 거기 위에 당신! 다시는 자비란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전까지는 RPG-7을 박격포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즈니 공격 당시의 체첸인들은 이걸 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이들은 가옥들 주변에 둘러친 높은 울타리들 탓에 가옥들 뒤에서 RPG-7을 발사했습니다.

 

 전쟁 초기의 진정한 영웅은 레브 로흘린 중장(Лев Рохлин)이었습니다. 이 분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2년간 싸운 적이 있습니다. 북코카서스 군구의 제 8근위군단 사령관으로서, 그는 체첸 그로즈니에서의 연방군 북부 그룹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동 부대는 그로즈니에 대한 봉쇄를 실현시켰고, 두다예프의 전사들을 시외로 몰아내었습니다. 그는 모즈도크에 있던 그라체프처럼 안전한 장소에 앉아있기를 거부했으며,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치열한 적 사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지상의 불길과 연기 속에 함께하면서, 이곳에 군인들을 던져넣은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들을 교정해 나갔습니다. 이미 12월 31일 아침에는 로흘린 사령부가 깡통 제조 공장에 입성합니다.

 

 그리고리 비소첸코 시장은 그로즈니에서 자랐습니다. 일군의 특수부대 병력과 함께 그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가지를 점령하러 왔습니다. 12월 31일, 그는 레르몬토프 교차로에 있는 한 도시 병원에 대한 공격을 지휘하였으며, 이곳에서 난리법석이 납니다. 이 병원은 두다예프의 막강한 요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이 점령되었을 때, 모든 환자 운반용 카트에는 RPG 탄약들이 가득했습니다.  비소첸코 시장의 신년 회상에 대한 것을 인용합니다: "이들은 기지 - 즉 깡통 공장 - 으로 돌아왔다. 적을 수 있는 만큼 기록하겠다: 2대의 장갑차 사이에 커튼을 치고 테이블을 놓고 빙 둘러모였다. 음식은 고작 건조식과 소세지, 깡통공장에서 모은 마요네즈 병에 담긴 유아용 이유식들 뿐이었다. 우리에겐 술이 2병 있었는데, 각자에게 50그람 정도씩 돌릴 수 있었다. 모두가 형제들이었다: 장교들이나, 바바코프 용병(контрактник Бабаков) 들이나, 일반 병사들이나 모두 한모금씩 마셨다. 새해였다.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던 사격은 딱 자정이 되어 10분간 조용해졌다. 마치 우리편이든 아니든 간에 축하하는 것 같았다. 다시 전투는 재개되었다..."

 

 "전차는 장작처럼 불탔지만 우리는 아니라네!" 라는 노래가 새해의 첫번째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들보다 숫자, 무장, 탄약, 최초 위치, 보급 측면에서 훨씬 강력한 적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사기가 더 높았습니다. 새해 첫째 주의 전투 기간 동안, 우리 병사들은 형편없는 건조식으로인해 반쯤 굶어가면서 반쯤 몽롱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하고 치욕적인 1월을 동시에 영웅적인 1월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이나, 나폴레옹, 비스마르크와 히틀러의 장군들을 매료시킨 러시아 영웅들의 기개를 그대로 갖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로즈니의 시가지에서 싸우던 병사들에게 따뜻한 음식이 처음으로 제공된 것은 1월 7일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유혈의 새해 첫 주였습니다. 이 거리는 우리가, 옆 거리는 두다예프가, 그 다음 거리는 다시 우리가 차지하는 것이 전 도시 전역에서 벌어진 현상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스탈린그라드를 기억하자!"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천천히, 1미터 1미터씩 우리는 싸움의 핵심지역인 대통령궁으로 나아갔습니다.

 

 1월의 이 끔찍한 나날들 속에서도 그로즈니에 가수 유리 셰브추크(Юрий Шевчук; 평화주의 및 반독재 활동으로 유명한 러시아 록 가수임(역주) )가 도착하여 병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떠나면서 "여러분! 저는 여러분 앞에서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같은 이들은 생전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월 9일, 러시아 정부는 불법 무장집단 일원들에게 무장 해제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월 8일에서 10일간을 전투 지역에서 전사자 및 부상자들을 후송시키기 위한 휴전 기간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자 전투는 재개되었습니다. 예수 공현 축일인 1월 19일, 마침내 연방군은 대통령궁을 점령합니다.

 

 그 이후에도 약 600일간에 걸친 제 1차 체첸전쟁이 지속됩니다. 이 전쟁은 배반 - 즉 그라체프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그로즈니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 - 으로 시작하여 배반 - 즉, 또다른 아프간 참전용사인 레베드 장군이 수천명의 우리 용감한 병사들과 장교들의 피와 땀으로 얻은 것들을 적에게 넘겨준 것 - 으로 끝납니다. 이 전쟁은 하사뷰르트에서 20명의 우리 전우들이 생포당한 것으로 시작하여, 하사뷰르트에서의 치욕적인 협상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로즈니가 완전히 함락된 것은 2월 20일이 되어서의 일입니다. 그 뒤로는 아르구나(Аргуна), 구데르메사(Гудермеса), 샬리(Шали), 사마셱(Самашек), 아시노브스코이(Ассиновской), 바무타(Бамута), 베데노(Ведено), 샤토야(Шатоя), 노자이-유르타(Ножай-Юрта), 우루스-마르타나(Урус-Мартана), 알레로야(Алероя), 첸토로야(Центороя), 게히(Гехи), 마흐케찌(Махкеты)... 등등의 촌락들을 함락시키기 위한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부패한 언론들이 두다예프를 고귀한 자유의 투사로 미화하고 우리 전사들은 코카서스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잔인한 백정들로 묘사하는 비참한 나날들이 이어집니다.

 

 여기에 체첸에서 죽어간 우리 러시아 병사들을 위해 씌어진 블라디슬라브 아르테모프(Владислав Артёмов )의 시를 적습니다. 

 

 당신은 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Вы ж меня прославили)
 장례식이 끝나고 (После похорон —)
 개들이 짖더라도 (Словно псы облаяли)
 사방에서 (Словно псы облаяли)

 

 이후에 샤밀 바사예프의 부데노브스카(Будённовска) 사건과 살만 라두예프의 키즐랴라 및 페르보마이스코보(Кизляра и Первомайского)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이 "고귀한 자유 투사들"이 어떻게 반 죽은 임산부들과 늙은 할머니들을 방패로 숨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아직도 바사예프와 라두예프는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작자들에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난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 아프가니스탄의 영웅으로서 남을 수도 있었던 두다예프 장군은 1995년 2월을 기점으로 범죄자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한 성공적인 특수공격을 통해 그는 사망합니다.

 

 그라체프 장군은 재임기간 내내 심각한 비난에 시달립니다만, 1996년까지도 러시아 연방 국방장관 지위를 고수합니다. 러시아의 영웅(Героя России ) 칭호는 결국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무용을 보여준 로흘린 장군에게는 러시아 연방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지만, 본인은 고사합니다. 그는 자국 영토 내에서의 군사작전으로 이러한 상을 받는 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강대한 정규군에 대한 붕괴 음모에 대하여 용감하게 반대 주장을 내놓던 레브 야코블레비치(Лев Яковлевич)는 1998년 7월 2-3일 밤 사이에 시골의 저택에서 비열하게 살해당합니다.

 

 한편, 체첸 대통령 두다예프를 고작 안다르비예프로 바꿔치운데 그친 레베드(Лебедя) 장군은 엉뚱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외 북코카서스의 끔찍한 유혈 사태들을 벌인 많은 범죄자들이 이와 유사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며 아직 살아 있습니다.

 

 끔찍한 이 과거의 신년 명절은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 외의 명예나 치욕, 영웅주의와 불명예에 대해서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 알렉산드르 세긴(Александр Сегень )
2005년 7월 1일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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