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8-1994 (Air War over Nagorniy-Kharabakh, 1988-1994) - ACIG

박용수 2014. 10. 27. 15:50

< 원문출처 : (http://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280.shtml) >

 

< 역주출처:

 [1] (http://www.worthpoint.com/worthopedia/german-wwi-spiked-helmet-cocards)

 [2] Shusha pogrom (http://en.wikipedia.org/wiki/Shusha_pogrom)
 [3] Shusha (http://en.wikipedia.org/wiki/Shusha)
 [4] Stepankert (http://en.wikipedia.org/wiki/Stepanakert)
 [5] Lachin (http://en.wikipedia.org/wiki/Lachin)

 [6] Artsakh (http://en.wikipedia.org/wiki/Artsakh)  >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공중전, 1988-1994 - ACIG

( Air War over Nagorniy-Kharabakh, 1988-1994 )

 

 

저자 톰 쿠퍼
2003년 9월 29일

 


 1987년에서 1996년 사이, 과거 소련 소속이었던 여러 공화국들 사이에서 소규모 전쟁들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전쟁들 대부분은 단지 개혁가들과 보수주의 공산주의자들간의 충돌, 또는 동방정교회와 무슬림간의 싸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배경이 의심스러운 인원들도 상당히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모든 분쟁들에는 구소련 내지는 러시아의 군사/정치 기구들이 상당부문 개입되어 있었다.


 아르메니아-대체로 기독교-와 아제르바이잔-대체로 무슬림- 간에 벌어진 전쟁에 관해서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가, 이미 1987년 경 아직 소련 내의 사회주의 공화국일 당시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압제당한 무슬림들이 상대적으로 특권층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폭력 행사를 함으로써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소련 군대가 잔혹하게 개입하기 전, 이미 수백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살해된 상태였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인들은 복수를 요구하게 된다. 이 상황은 곧장 아르제바이잔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의 대규모 피난과, 아르메니아 내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대규모 피난 사태를 빚게 된다. 이는 나아가 양측 모두 "인종 청소"를 실시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내에 있는 약 210 평방킬로미터 넓이의 산악 지대이다. 이 지역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거주지로 완전히 포위되어있다: 이곳 거주지들은 탈출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이들에 동정심을 갖은 소련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1988년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이곳 고립지대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립하였다. 1991년 9월 2일, 이들은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Nagorno-Kharabachskaya Avtonomnaya Oblast (NKAO))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함을 선언하였고, 아르메니아와 합병하길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은 이보다 약간 늦은 1991년 10월에 있었다. 이제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체 민병대들에 대한 통합 지휘체계를 구성하였다 - 즉,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위대(NKAOSDF)를 설치한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이를 "아르메니아인 원정군단"이라고 불렀다.

 

 한편, 아르메니아 남부에 살고 있던 아제르바이잔인들 역시 자체 민병대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달 나히체반 자치공화국(autonomous republic of Nachichevan)을 선포하였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와 나히체반 지역은 곧장 양측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만다. 양측 모두 상대방이 더 우수한 "무기 측면 우세"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긴 하였지만, 일단 지역에 남아있던 구소련군 부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은 아르메니아 측이었다. 장교들이 아르메니아측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인들과 러시아인들이 카라바흐 지역 전역과 아제르바이잔 주변 몇몇 지역을 장악하는 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 카라바흐의 여러 착륙장들 중의 한곳으로 Mi-8이 보급품을 내리고 있다. 러시아군과 민간 소속 헬리콥터들을 통한 보급품 공중수송은 아르메니아 고립지대의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이었다. (미하일 지로코프 제공) )

 

 카라바흐 지역에서의 분쟁 초기 기간(1988-91) 동안, 소련 공군의 수송헬기들은 고립된 아르메니아인들을 지원하고 부상자와 피난민들을 수송하는 데 있어 대단히 빈번히 사용되었다. 또한 Mi-8 헬리콥터와 아에로플롯 사의 아르메니아 지부에 소속된 Yak-40 여객기들 역시 아르메니아에서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수도 스테판케르트(Stepankert)로 무기를 수송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들 군용 및 민간용 항공기 중 일부는 아제르바이잔 지상군 사격으로 격추되었다. 예를 들어, 1990년에는 AN-2기 한대가 격추되었고, 1990년 8월에는 아에로플롯 사의 Yak-40 여객기가 격추되어 승무원 및 탑승자 43명이 사망하였다.


 

 

 소련의 해체(Dissolution of the USSR)

 

 1991년 12월의 소련 붕괴 이후, 기존의 트란스코카시안 군구에 속해 있던 소련군 무기들이 신생국들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고, 양측 -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잔 - 모두 이곳을 떠나가는 소련군 부대들의 장비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다수의 중장비들을 획득했으며, 여기에는 항공기와 헬리콥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91년 12월 말에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14대 이상의 Mi-8 및 Mi-24 헬리콥터를 상가찰리(Sangatchaliy)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부대로부터 획득하였다: 이 장비는 1992년 6월에 공식 조직된 신생 아제르바이잔 공군(AzAF)의 주력 장비가 되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더 많은 헬리콥터들이 입수되었다: 지역 구소련군 장교들은 아제르바이잔인이든 아르메니아인이든 관계 없이 더 좋은 조건을 부른 쪽에 장비를 팔았다. 구소련 장교들 중 상당수는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자체 공군을 건설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못된다. 이들은 초기 25에서 30대의 Mi-24헬기 및 소수의 Mi-8 및 Mi-17, 다른 항공기 몇 종류를 운용했다.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기간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추가적인 항공기 구매가 이뤄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보다는 덜 서둘렀다. 이는 서쪽에 있던 (이제는) 러시아 군대가 이들을 계속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다양한 CIS 국가들에서부터 들어온 30명 이상의 검증된 용병 비행사들을 갖고 있었다 -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훈련도가 떨어지는 예비역들이긴 했다. 어쨌든 이들 역시 예레반(Yerevan)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옛 제 7 GvVP 부대로부터 13대 이상의 Mi-8 및 Mi-24헬리콥터를 입수할 수 잇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공군(ArAF)가 공식적으로 창설된 것은 1992년 8월에 이르러서였다.

 

(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잔 지도. 소련 시절에 남겨진 주요 공군 기지들도 표시되어 있다. (톰 쿠퍼 그림. Encarta 2003 이용))

 


 최초 전투 (First Battle)

 

 1992년 1월에 이르르면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AzAF는 이제 Mi-8과 Mi-24를 동원하여 전선으로 증원군을 수송한다. 전장 상황은 유동적이었고, 통신은 불량했으며, 훈련은 부족하나 열정에 넘친 자원자들이 양측 모두 가득했다. 그 결과 양군 모두 내부에 상당한 혼란이 벌어졌으나, 이는 아제르바이잔 육군 및 공군 쪽에서 좀더 심각했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잘 무장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쉬운 먹이감이 되었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1월 9일이 되면 아르메니아 측에서 처음으로 아제르바이잔 공군 헬리콥터를 격추(주장)하게 되며, 동월 24,28,31일에도 격추(주장)이 이어지게 된다. 이들 모두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 상공에서 벌어졌으며, 마지막의 사례는 후하(Huha) 마을 상공에서 Mi-8을 MANPAD(휴대용 대공미사일)로 격추시킨 것이었다. 같은 날 1월 31일,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첫번째 격추(주장)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들은 아르메니아군의 공세를 지원하는 (러시아군) Mi-8 2대를 격추시켰던 것이다.

 

 최초의 혼란이 지나간 뒤인 다음 2달간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기간이었고, 단지 산발적인 전투만이 보고되었다. 이 시기에 알려진 유일한 보고는 2월 19일에 있었던 AzAF의 Mi-24가 최초 전투 소티를 실시한 사건이다. 구소련군 용병들에 의해 조종된 이들 헬기들 중 2대가 카라갈리(Karagalliy) 부근에 있던 아르메니아군 진지를 공격한 사건이다. 이 기간동안 양측 모두 추가 장비를 확보하고 신규 부대를 창설하며 보급품 집적 및 진지 강화에 힘썼다. 한편 러시아측의 경우 이 기간을 활용하여 자국민들을 이 지역으로부터 대피시켰다. 수많은 마을들이 외부 세계와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헬리콥터를 필요로 하였다. 바로 이러한 구출 작전들이 이 전쟁에서의 최초의 공중전을 벌어지게 한 원인이었다.

 

 1992년 3월 3일, 2대의 Mi-24의 호위를 받은 러시아 공군(RuAF) Mi-26이 20톤의 식량을 카라바흐 지역의 귤리스탄(Gyulistan) 마을로 운반하였다. 복귀 비행 과정에서 동 헬리콥터는 50명의 러시아인 피난민들(대부분 여성 및 아이들)을 스테판케르트에서 예레반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공역에 도착하기 전, 동 편대는 위장도색된 AzAF Mi-8의 요격을 받는다. 그러나 명중탄이 발생하기 전에, 호위 중이던 Mi-24들에 의해서 아제르바이잔 Mi-8은 격퇴된다. 교전 확대를 피하기 위하여 러시아 조종사들은 추격을 단념한다.

 

 그러나 몇 분 후, 아르메니아인들은 세이딜야르(Seydilyar) 마을 상공으로 9K32/SA-7A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한방에 Mi-26을 격추시킨다. 이로써 12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한다. 러시아 공군은 즉각적으로 SAR 작전(탐색 및 구조작전)을 실시하였고, 동 지역에 내린 많은 눈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2대의 Mi-8이 마침내 부상당한 생존자들을 탈출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얼른 보았을 때,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Mi-26을 공격한 것은 민간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즉 2월 23일과 3월 7일 사이에 러시아군 헬리콥터들은 제 366 기계화보병연대 전체를 나고르노 카라바흐 수도인 스테판케르트로 수송한 바가 있었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인들로서는 이들 부대 및 이들을 지원하는 헬기들이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을 돕는 부대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고, 즉 이들이 합법적인 목표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곳에 개입된 3개 당사자들간에는 항상 헬리콥터 식별이 문제가 되어왔는데, 이는 이들이 대부분 비슷한 위장도색 및 마킹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새로운 마킹 역시도 대체로 헬기 조종사들 및 지상 포병 모두에게 생소했다. 또한 러시아 헬리콥터들이 실질적으로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추측이 결과적으로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오늘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러시아 Mi-26은 다른 보급품들 사이에 9K32 스트렐라/SA-7A 휴대용 대공미사일 및 몇몇 ZU-23-2 대공포를 반입하여 스테판케르트의 아르메니아 민병대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ZU-23-2 대공포들 중 2대는 AzAF의 Mi-24들을 상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르다케르트(Mardakert) 언덕 지역에 배치되었다.

 

 1992년 2월 말, 아르메니아인들은 신편된 2개 기계화여단을 투입하여 아르메니아 국경에서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까지의 통로를 개척하는 신규 공세를 실시한다. 이 공세는 초기 성공적이었으며, 소위 "라친 회랑(Lachin Corridor)"이라고 불리는 도로 연결망이 개척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이 고립된 지역으로 보급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헬기를 계속 날리던 것을 잠시 멈출 수가 있었다. 3월 초가 되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 회랑 여러 지역에 대해 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 작전기간 동안, AzAF는 다시 헬리콥터들을 동원하였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새로 강화된 아르메니아 방공망에 격추되고 만다. 아르메니아군에 상당한 수량의 ZU-23-2와 9K32 스트렐라들이 장비되었던 것이다. 3월 5일, Mi-8 한대가 격추되고, 3월 28일에는 Mi-24 한대가 카프츠반(Kapzchvan) 부근에서 SA-7에 격추된다.

 

(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기간 동안 주요 공정작전들이 벌어진 주요 지역들 (톰 쿠퍼 그림. Encarta 2003 이용))

 

(1990년대 말에 목격된 아르메니아 L-39의 하나. 위장 패턴이 이후에 Su-25나 Mi-24에도 적용된 청록색, 고동색, 연녹색, 연회색 등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국적표기는 6곳에 그려져 있으며, 이 경우처럼 매우 크게 확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체의 경우 상당히 노후된 것으로, 동체 후방 등에 상당한 기름 얼룩이 드러나 있다. (톰 쿠퍼 그림))


 

 Su-25의 탈취 (Hijacking a Su-25)

 

 최초의 3개월간의 재래식 전투를 통해 AzAF에 심각한 손실이 발생하자,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비정규전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1992년 4월 8일, AzAF는 최초의 고정익 항공기를 손에 넣게 되는데, 이는 25세의 상위(Senior Lt.)였던 바지프 쿠르바노프(Vagif Kurbanov)가 시탈 차이(Sital Tchaiy) 공군기지에 있던 러시아 공군 제 80 IBAP의 Su-25 프로그풋 지상공격기를 탈취하여 아제르바이잔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동조자 2명(항공기 정비사 마메도프 중위와 쿨리예프 준위)의 도움을 받아 쿠르바노프는 Su-25를 비행 가능상태로 준비하였고, 이륙하여 몇 분만에 아제르바이잔의 민간 공항인 예브락(Yevlakh)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이 강탈 사건으로 놀라기는 했지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이 항공기를 가지고 그리 의미있는 일은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쿠르바노프가 이 항공기를 가지고 스테판케르트에 대한 전투 소티를 실시하게 되었을 때, 러시아인들은 더 크게 놀라게 된다.

 

 쿠르바노프가 폭격한 여러 아르메니아 측 지역들은 대부분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었다: 대부분 민간인 재산과 인명을 살상하는데 불과했다. 다만 4월 17일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 상공에서 2대의 러시아 Mi-8가 격추된 사건에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이 사건에서 격추된 Mi-8 승무원들은 헬기를 불시착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모두 아제르바이잔인들의 포로가 된다. 또한 며칠 후에 있었던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 소령이 조종하던 러시아군 Mi-8에 대한 공격도 쿠르바노프의 Su-25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5월 9일, 쿠르바노프는 스테판케르트에서 예레반으로 피난민들을 수송하던 민간 Yak-40 여객기를 요격하여 기관포로 동 항공기를 심각하게 파손시키고, 결국 불시착하게 만들었다. AzAF 최초의 고정익 제트기 조종사로서의 쿠르바노프의 경력은 1992년 6월 13일 종말을 맞게 되는데, 그의 Su-25가 므흐닥(Mkhrdag) 상공에서 아르메니아군의 휴대용 대공미사일에 격추되었던 것이다.

 

 한편, AzAF는 Mi-24 2대를 추가로 손실하였는데, 1대는 4월 20일에, 또 한대는 5월 18일에 상실한다. 그 결과 동종 헬기 중에서 단 6대만이 운영 가능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전투 소티에 지속적으로 투입된다. 예를 들어 5월 8일에는 4대의 Mi-24가 스테판케르트를 습격하였고, 같은 날 다른 아제르바이잔 헬리콥터들이 아브도어(Avdoor), 크라스니 바사르(Krasniy Basar), 뮤리셴(Myurishen), 노르셴(Norshen)의 NKAOSDF 진지 및 민간인 지역을 공격한다. 3일 후에는 다그라즈(Dagraz)와 아그불닥(Agbooldag)에 대해서도 공습이 가해진다. AzAF의 Mi-24는 마르다케르트에 대한 제 3차 아제르바이잔 군의 반격 공세에도 참가하는데, 이 공세는 아르메니아인들이 5월 18일 라친 회랑을 확보하고 여러 장소에서 이곳을 확장해나간 이후인 6월 23일에 개시되었다.

 


 AzAF에 대한 증원 (Reinforcements for the AzAF)

 

 1992년 6월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공세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상당한 압박감을 주게 되지만, 라친 회랑을 절단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멈추지 않았는데, 이는 이들의 군사력이 상당히 보강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있던 구소련 부대들 대부분이 장비를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는 데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6월 9일, 아제르바이잔 국방장관 라킴 가세프(Rakhim Gasev)는 아직도 아제르바이잔에 남아있는 러시아군 수비대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다: 즉  몇몇 장교들을 납치 혹은 뇌물을 먹이며, 인질을 잡거나 몇몇 기지들을 습격하는 등으로 지역 지휘관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이로써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대량의 중장비들을 획득할 수 있었고, 또한 간자 비행장(Gandzha AB)를 탈취함으로써, 최소 11대의(서방측 기록에는 16대) Su-24MR과 20대의 MiG-25RB, 3대의 Il-76 수송기를 러시아 공군으로부터 탈취하였다. 이 공군기지에서 러시아인들은 무력 저항은 시도하지 않았으나, 최후의 순간에 러시아 조종사들이 8대의 MiG-25RB를 이륙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정비사들도 나머지 MiG-25들에서 "펠렝(Peleng)" 항법-공격 시스템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AzAF가 보강되었다. 다만 MiG-25는 전투용으로는 별로 사용하지 못했다.

 

 사실 이 신생 공군에게 더 중요했던 일은 동월 산차갈리 비행장(Sanchagaly AB)에서 70대 이상의 L-29 델핀 훈련기 및 L-39 제트훈련기를 탈취할 수 있었던 일이다. 이 항공기들과 다른 곳에서 탈취한  헬리콥터들을 통하여 고속 제트기에 필요한 신규 파일럿 양성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1992년 6월 당시부터 전투 자체에도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한대의 L-39가 라친 회랑에서 재개된 전투에서 격추되었고(동월 24일, 조종사 사망), 2대의 아제르바이잔 Mi-24가 격추되었다(한대는 6월 19일에 격추됨). 대다수의 L-29 및 L-39를 조종한 것은 구소련 공군의 다양한 항공학교에 다니던 아제르바이잔인 생도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많은 아제르바이잔 생도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퇴교하였다. 특히 살류안 비행장과 피르사갓 비행장에 있었던 학생들에게 두드러진 일이었다. 다만 L-29들의 주 기지는 산차갈리에 있던 아르마비르 공군 조종사 학교(Armavir Air Force Pilots School)였으며, 이곳은 나중에 AzAF의 훈련센터가 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바쿠 근방에 있던 대형 보급소를 탈취하여 MiG-25에 대한 예비 부속들을 확보하였으며, 달랴르 공군기지(Dallyar AB)에서는 다소 구형인 MiG-21들을 몇대 획득하였다. 또한 아제르바이잔 육군은 T-72전차를 비롯한 많은 중장비들을 획득하였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있던 러시아 장교들이 하나둘씩 아제르바이잔 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하나가 러시아 공군 대령 블라디미르 크라프초프이다. 그는 나소스니 공군기지에 주돈하고 있던 MiG-25PD PVO 연대의 지휘관이었다. 크라프초프 대령은 휘하 부대를 해산시키고 아제르바이잔 군에 합류하여 아제르바이잔 공군 지휘관이 되었다. 또 하나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달랴르 공군기지 부지휘관이었던 알렉산드르 플레시 중령이다. 그는 AzAF의 고정익 전투기부대 지휘관이 된다. 그리고 유리 벨리첸코 대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나중에 수리된 MiG-25RB를 가지고 여러 차례의 전투 소티를 수행하였고, 1992년 8월 20일 9K32/SA-7A에 격추당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생포당한다.

 

 이러한 숙련된 조종사들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인들은 AzAF에 점차 많은 수의 MiG-25RB와 MiG-25PD들을 배치시키게 되며, 8월과 9월 중 아르메니아에 대한 다수의 폭격 소티를 실시하게 된다.

 

(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최소한 70대의 L-29 및 L-39 훈련 제트기들을 산챠랄리 공군기지의 구 97 IAP로부터 입수하였다. 12대의 L-39는(이 그림에 있는 기체 포함) 곧장 아르메니아와의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주 Su-25로 오인되었다. 이러한 항공기들의 위장 패턴은 아제르바이잔 공군에 입수된 이래로 변경된 적이 없다. cocards(?; 위키 사전에는 '늙은 수탉'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음. 인터넷 검색 결과 일종의 장식품 종류를 뜻하는 표현으로 추정 됨[1])가 6곳에 적용되어 있다. (톰 쿠퍼 그림))

 


 피의 가을(Bloody Autumn)

 

 1992년의 늦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전황은 양측 모두 대단히 불안정했다. 7월 19일, 아르메니아 정규군으로 보강된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위대(NKAOSDF)는 마르다케르트 주변의 고지들을 공격하여 몇몇 중요 고지들을 점령한다. 이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은 BM-21 방사포를 이용하여 고지들을 포격하였고, MiG-25, L-39, Mi-24를 동원하여 공습을 실시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향하는 회랑을 개통된 채로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이는 AzAF의 전투기들과 헬기들이 빈번하게 아르메니아 수송행렬을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고립지역 내의 아르메니아군에 유류 및 탄약, 기타 보급품이 결핍되는 현상을 낳게 된다. 반면에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이러한 작전을 펼치느라 지상 및 공중 공히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고, 완강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을 분쇄하지도 못했다.

 

 8월 20일, 체브란 부근에서 벨리첸코 대위의 MiG-25PD가 격추된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같은 날 쇼흐이 부근에서 MiG-21 한대를 격추당한다. 이 항공기를 조종하던 것은 알렉산드르라고 불리던 러시아인으로서, 아르메니아에서 포로 생활 중 사망한다. 8월 31일에는 또다른 AzAF의 MiG-21이 쇼흐이 부근에서 소구경 화기에 의해 격추당한다. 9월 5일, 러시아인 세르게이 시뉴시킨 소령과 예브게니 카를로프 대위가 조종하던 Mi-24 헬기가 격추당하여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다. 9월 18일에도 아스케란 부근에서 Mi-24가 또 한대 격추당한다.

 

( 1990년대 후반에 목격된 아르메니아 공군 소속 Mi-24P "42"호기. 적용된 위장 패턴은 Mi-24를 도입한 다른 국가들, 특히 소련군으로부터 하인드를 물려받아 쓰는 국가들의 것과 매우 다르다. 2종류 녹색과 갈색의 조합으로 된 이 위장 패턴은 오늘날 ArAF의 모든 전투 항공기 및 헬리콥터들이 적용하고 있는 패턴이다. (톰 쿠퍼 그림))

 


무산된 협상 (Spoiled Negotiations)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모스크바는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아르메니아를 지원하였는데, 이는 그루지아와 체첸에 투입되어있는 러시아군의 후방을 안전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9월이 되면 러시아인들이 협상을 제의하게 된다: 9월 19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러시아 국방장관들이 소치(Sochi)에 모여 2달간의 휴전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전선에 위치하고 있던 양군 지휘관들과 병력들은 이러한 휴전에 대해서 거의 듣지 못하였다.

 

 아르메니아 공군(ArAF)에는 아직도 전투항공기가 없었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 공군은 공중에서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10월에는 회랑 지역의 보급소 및 교통로에 대한 일련의 공습을 시작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방공능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예를 들어 8대의 S-60 57mm 대공포를 라친 회랑에 추가 배치한다. 이들 중 2문은 마르다케르트를 감제하는 고지들에 배치되었고, 곧 격추 기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 중 1문은 최초 AzAF의 Mi-24 공세에 격파되는데, 초저공 고속으로 접근한 하인드 헬기에게 기습당한 것이었다.

 

 10월 10일, 아르메니아인들은 또 한대의 Su-25를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에서 격추했다고 주장한다.  그날 실제로 AzAF의 전투기 한대가 MANPAD에 의해 말리베일리 마을 부근에서 격추된 것은 사실이며, 탑승한 러시아인 조종사도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사망하였다. 그러나 격추된 비행기 자체는 Su-25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추가로 Su-25를 구할 곳도 없었으며, 구매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그루지아 트빌리시에는 Su-25를 조립하는 항공기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샘플용으로 공급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 그루지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 이상으로 Su-25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들은 남오세티아와 전쟁 중이었다). 따라서 이때 격추된 항공기는 아제르바이잔 L-29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1992년 당시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 항공기를 격추할 때마다 "Su-25"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10월 15일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노비이 아폰 지역에서 Su-25를 격추했다는 주장은 사실이긴 한데, 이건 러시아군 소속 기체였다.

 

 마침내 10월 말에 이르러,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여 회랑 양측면을 기갑부대로 타격한다. 비록 거친 지형으로 인하여 그 진군 속도는 느렸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공세를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방공부대는 계속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10월 30일과 11월 1일, 아르가자르 상공에서 AzAF MiG-21이 각각 1대씩 격추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분명히 우크라이나로부터 MiG-21 몇대를 구입하였다). 또한 스르카렌드 상공에서 MiG-25 1대가, 나고르노 카라바흐 상공에서 L-29 1대가 격추된다. 2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 및 러시아인 조종사가 사망하고, 1명의 러시아인 조종사 아나톨리 크리스티야코프가 생포된다. 아르메니아인들 역시 지상에 자체 기갑 전력을 전개시키지만, AzAF MiG-21과 MiG-25가 R-60 미사일을 이용하여 대전차 임무에 투입되면서 상당수의 T-72와 BMP-1을 상실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친 회랑과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의 전투는 나머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국경 지역으로 확대되게 된다. 여기에 AzAF는 집중적인 지원 및 수송 임무를 수행한다: 헬리콥터들은 산악 능선으로 병력 수송에 사용되었고, 최소 이들 중 1대의 Mi-8이 11월 1일 격추되었다.

 

( 격파된 아르메니아 BMP-1 보병전투차량에 대한 희귀한 사진이다. 정면과 측면에 있는 마크(백색 십자가)에 주목할 것. (이타르-타스 제공))

 

 한편, 러시아인들은 이 지역에서 자국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노력을 가중시켰고, 이런 임무에 중수송 항공기까지 동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1992년 11월 11일 An-22(CCCP-09331) 수송기 한대가 미갈로보에서 이륙 중 추락하는데, 아마도 화물을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동일 아르메니아인들은 슈심스키 상공에서 AzAF 전투기를 또 한대 격추하였고, 다음날에는 아르제바이잔인들이 아르메니아 Mi-24를 카자크 부근에서 격추시킨다. 이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육군은 몇몇 지역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가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몇몇 마을들을 탈환한다. 그리고 고립지역에 대한 회랑을 재개통하여 최소한 야간 통행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성공은 지상군 및 아르메니아 공군의 큰 희생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11월 23일, 2대의 Mi-8이 모 아제르바이잔 진지 상공을 날다가 격추당한다: 1대는 즉시 떨어졌고, 1대는 아르메니아군 진지 후방으로 불시착하는 데 성공한다. 12월 30일에도 Mi-8이 1대 격추당하며, 동일 AzAF 항공기들은 스테판케르트를 공습하여 10여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아르메니아의 전쟁 피로(War-Weariness in Armenia)

 

 길고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인하여 아르메니아 정부에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다. 즉, 아르메니아 정부가 터키와 러시아로부터 추가 지원을 받는 데에 성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페트로시안(Petrosian) 대통령의 인기가 급강하하였던 것이다. 이 상황은 1993년 1월 초, 아르메니아 국방부가 1992년 가을에 있었던 아제르바이잔 항공기들에 대한 격추 실적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았다. 이 문서에 따르면 AzAF는 MiG-21 1대, MiG-23 1대, MiG-25PD 1대, MiG-25RB 2대, L-29 3대, Su-25 2대를 상실하였다. 이 문서는 Su-25 외의 다른 항공기에 대한 격추 내용을 담은 최초의 아르메니아측 공식 문서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염전 분위기를 이용하여, 아제르바이잔 인들은 일련의 평화협상을 벌이는 한편 1993년 1월 1일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번에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가장 중요한 아르메니아 진지를 직접 목표로 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공세는 성공하였고,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을 거의 분쇄하는 데 성공하였다. AzAF는 작전 첫날 2대의 전투기를 상실하지만, 1월 2일이 되자 나고르노 카라바흐로 향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회랑은 다시 절단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일부 증원을 실시하여 1월 7일 반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이날 아르메니아 공군은 심각한 손실을 입게 되며, 최소한 1대의 Mi-8, 1대의 Mi-24를 상실하고, (러시아군 소속인지 아르메니아 소속인지 불확실한) Su-25 1대가 격추당한다. 급조된 아르메니아군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아제르바이잔군이 아르메니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몇몇 부대를 격파하면서 아르메니아군은 붕괴 위기에 놓이게 된다. 지상군 후퇴 과정에서 ArAF는 지원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1993년 1얼 10일에서 15일 사이의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최소한 10대의 아르메니아 헬리콥터 및 전투 항공기들을 격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확인된 것은 헬기 2대의 격추 사례- 하나는 1월 12일의 벤질리 상공에서, 하나는 2일 뒤 아크스타파 상공에서의 사례- 와 1월 15일의 MiG-21 1대의 격추 사례 뿐이다. 이달 말까지 ArAF는 Mi-8을 또 한대 상실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공세도 마침내 멈추게 된다. 같은 기간 동안, AzAF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에서 2대의 L-29와 1대의 MiG-21, 그리고 미상 항공기 1대를 손실한다.

 

 전투가 격화되는 것을 우려한 터키, 미국, 러시아는 새로운 협상을 제안하게 되며, 이는 1993년 1월 28일에 개시된다. 이번에는 결론이 신속하게 났는데, 양측 모두 가혹한 겨울 날씨 속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크게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휴전 협상에 따라 모든 "외국(즉 러시아)" 군대들은 120일 이내로 양국 영토 내에서 철수하며 나고르노 카라바흐 및 나치체반에 가해진 모든 봉쇄조치들을 해제하도록 하였다. 이어진 2달 동안,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비엔나 소재) 역시 추가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마침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에 일종의 평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극심한 겨울 날씨와 통신망의 붕괴, 보급품 부족으로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르메니아인들은 구소련 공군의 Su-25를 상당수 획득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시탈 차이 공군기지에 있었던 것들이다. 이들의 원래 위장 무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근에 이것들은 Mi-24들과 같은 패턴으로 도장되었다 - 즉 2종류의 녹색과 갈색의 혼합무늬 및 아래쪽에는 연청색. 이 기체를 운영한 부대에 대해서는 슬프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적표기는 6곳에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일부 아르메니아 프로그풋의 경우 날개 상면에 이것이 없는 것이 목격된 경우도 있다. (톰 쿠퍼 그림))


 

 마지막 전투(Final Round)

 

 1993년 봄까지 ArAF와 AzAF 모두 심각한 소진 상태에서 회복하고자 시도하였으며, 공중 이동에 관해서는 극소수 사례만이 보고된다. 그러나 1993년 3월 25일, 아르메니아인들은 "켈바다야르(Kel’badjar)" 작전을 발동하여 지상군으로 하여금 켈바다야르 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육군 제 2군단을 포위하여 격파한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카라바흐 협곡을 통하여 간자로 도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5대의 멀쩡한 T-72를 유기한다. 4월 16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샤우미얀 상공에서 1대의 아르메니아 Mi-8을 격추하였다고 주장한다: 동 헬기는 부상자들을 후송하던 과정에서 피격당하였으며, 탑승자 12명 전원이 사망한다.

 

 1993년 여름과 가을에 로마에서 새로운 평화회담이 2회 개최된다. 그러나 모두 제한적인 결과만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그 결과 전선에서의 전투는 끊임없이 재개되었다. 1993년 6월 4일, 제 709 아제르바이잔 여단 사령관 슈렛 구세이노프 대령(Col. Suret Gooseiynov)이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아불파즈 엘키베이(Abulfaz Elchibey)가 제대로 나라를 지도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쿠데타를 일으킨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스테판케르트 북동쪽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도시인 아그담(Agdam)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였다. 여기에는 18대의 전차와 방사포, 보병, 지원 Mi-24들로 구성된 1개 여단을 파견하였다. 전투 2일만에 아그담은 포위당한다. AzAF는 즉각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하나 1년 전처럼 강력한 효과는 갖지 못했다. 반면 1993년 6월 5일 AzAF의 L-29 1대가 마르다케르트 상공에서 격추당했고, 이후부터는 AzAF 헬리콥터가 아그담 시로 지원부대 및 보급품을 나르는 일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약 1달간의 아그담 시 포위가 이어진 뒤인 7월 22일, 아르메니아인들은 최후의 공세를 개시하였다. AzAF 전폭기들이 이 공세를 저지하려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최소 7대의 항공기들을 격추시켰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단지 MiG-21 1대와 Mi-24 2대의 격추만이 확인되었다. 1993년 7월 24일-25일 밤 사이에 아그담은 아르메니아군에 의해 함락된다.

 

( 마르다케르트 지역에서 격추된 아제르바이잔 MiG-25RB의 잔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대한 수송 및 지상군 지원에 대한 차단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잘 준비된 아르메니아군 방공망에 상당수의 항공기를 손실한다. 특히 SA-14는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드러난다. (미하일 지로코프 제공))

 

 아그담에서의 패전은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엘치베이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사임한다. 이후 몇달간 새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인 마메드라피 마메도프(Mamedrafi Mamedov)가 이끌게 되며, 이들은 대규모 반격을 준비한다. 군대의 규율과 훈련에 중점을 두어 준비하였으며, 연말까지 전투에 대한 추가 보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아서 마침내 양쪽 모두 현 위치를 고수하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4년 1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라친 회랑에 있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위대에 대한 최종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고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간 주간 도로 통행이 다시금 차단된다. 아르메니아인들 역시 반격했다. 그러나 AzAF는 이제 다수의 무유도 로켓과 경폭탄이 장착된 L-29를 투입했다. 전투는 격렬했으며 양측 피해 역시 격심했다. L-29 역시 어떤 종류의 장갑도 없었던 탓으로 소화기에 의한 타격에 취약했다. 1994년 1월 27일, 소틴 근처에 있던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위대를 공격하던 2대의 L-29기가 ZU-23-2와 S-60으로 이뤄진 대공포화 속에 휘말렸다. 1대는 즉각 격추당하여 조종사가 사망하였고, 나머지 1대 역시 심한 손상을 입은 채 귀환하였다.

 

 1994년 2월 중순, 아르메니아인들이 새로이 9K34 스트렐라3/SA-14 휴대용 대공미사일을 입수하면서 항공전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뛰어난 무기체계는 기존까지 AzAF의 Mi-24들에 배치된 플레어들에 대한 저항력이 뛰어났고, 곧 아제르바이잔 헬리콥터들과 항공기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SA-14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는 AzAF MiG-21로서, 2월 17일 정찰 임무 중이던 Su-24MR를 호위하던 중 바르데니스키 상공에서 격추되었다(일부 러시아 문헌에서는 이 MiG-21이 아르메니아 혹은 러시아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 격추되었다고 하고 있다). 같은 날, L-29 한대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생포되었다. 2일 후에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상공에서 AzAF L-29 한대가 추가 격추되었다. 또한 아제르바이잔 Su-22를 격추하였다는 최초 주장도 발간되었으나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AzAF의 이 지역 목표들에 대한 최후 대규모 공격은 1994년 4월 23일에 있었던 스테판케르트 공습이다. 이 공습의 목표물이나 그 결과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밝혀진 바가 없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은 1대의 L-29를 격추시키고 2대 이상에 피해를 입힌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다음날, 유럽안보협력기구의 노력이 마침내 성과를 거두어 5월 12일, 휴전 협상이 체결된다. 이 휴전 협상은 이후에도 간헐적인 전초전들이 벌어지곤 하긴 하지만, 오늘날까지 대체로 준수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95년 9월, 중무장한 아제르바이잔 부대가 아르메니아 국경선을 침범하여 바간 마을을 점령하였는데, 점령기간은 단시 몇시간에 불과하여 아제르바이잔인들은 2대의 격파된 T-72를 남겨두고 국경선 너머로 격퇴당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 기간동안 성립된 양측의 신생 공군은 이후 사실상 동원해제된다. 그리고 자금 부족에 허덕이게 된다. 이들의 전력 규모에 대한 예상치는 크게 다양하지만, 러시아로부터 추가 헬리콥터를 구매한 1995년 12월 당시에 아르메니아 공군에는 적어도 13대의 Mi-24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AzAF 측은 10대의 MiG-21과 10대의 MiG-25를 포함한 53대의 제트 전투기와 6대의 Mi-24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 긴장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카스피해 밑의 대규모 원유와 천연가스를  기반으로 한 석유 산업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줄어들지 않았다.

 

( 1993년 3월 27일 아르메니아 공세의 주 방향을 나타내 주는 지도. 라친 회랑은 2개의 평행한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주 공세는 회랑 양쪽 끝에서부터 고라디즈를 향하여 지향되었으며, 회랑을 확장하여 최종적으로 동 지역의 2번째 지상 통로인 고라디즈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까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3번째 공세는 켈바쟈르 지역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그림에 나타난 지역보다 북쪽에서 이뤄졌다.  (톰 쿠퍼 그림. Encarta 2003 이용))

 

 

 전투 서열, 위장, 색상, 번호, 마킹 등

(생략)

 


 알리는 글(Notes)

 

 이 기사의 일부분은 미스터 미하일 지로호프와 미스터 올레 니클라센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직접 연구한 부분 외에도 여러 OECD 보고서들과 오스트리아 군사 잡지(Osterreichische Militar Zeitschrift) 1993년 3집에 나타난 자료들을 활용하였다.

 

 


<역자 추가자료 : (1) 구글 어스로 살펴본 전장 지도>

 

( 구글 어스를 통해 확인해 본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잔 지역 위성사진.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법적으로는 아직 인정된 국가가 아니라서인지, 구글어스 상에 국경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 원문의 지도 설명들이 명확하지 않아 구글어스로 검색해 본 것인데, 이곳에도 지역 명칭에 대한 설명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다. 양국의 수도 예레반과 바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격전지였던 라친 회랑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 앞서 사진에서 라친(Lachin) 지역 일대를 확대한 것이다. 몇몇 지역은 전쟁 이후 지명이 변경된 것이 확인되는데, 특히 라친 지역의 경우 이 지역을 점령한 아르메니아인(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들에 의하여 베르조르(Berdzor)로 명칭이 바뀌었다. 라친을 지나며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향하는 노란색으로 표시된 도로(M12/A317도로)가 있는데, 구글어스에 표기된 것들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예레반-스테판케르트 가도(또는 베르조르-스테판케르트 가도), 아제르바이잔 인들은 라친-수샤-바쿠 가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위키피디아 설명에 의하면 수샤 시는 1920년의 폭동으로 파괴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르메니아 지역의 문화중심지 중의 하나였으며, 18세기 당시에는 아르메니아 공국의 2대 도시 중 하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오늘날 그루지아 수도인 트빌리시 시). 이후 소련은 수샤 대신 근처의 칸켄디(Khankendi) 지역을 스테판케르트로 개명하여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지주의 지역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구글어스에는 스테판케르트 지역이 아직도 한켄디(Xank?endi)로 표시되어 있다. [2-5])

 

 

 


<역자 추가자료 : (2) 유튜브에 올라온 양측 선전 영상 등>

 

 

(아르메니아인 측 시각에서 본 동 전쟁 소개 비디오. 여기서 Artsakh는 과거 아르메니아 왕국 시절의 행정구역 명칭으로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이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 지역을 지칭하면서 사용한다고 한다.[6] )

 

(아제르바이잔인 측 시각에서 본 동 전쟁 소개 비디오. 그다지 별다른 내용은 없다. 대체로 아제르바이잔측 관련 유튜브 영상은 자국어 아니면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된 영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2007년 무렵 프랑스 TV (France24)에서 만든 나고르노 카라바흐 군대에 관한 취재 영상. (이 동영상이 올려진 시기가 2007년이고, 영상 내에서도 분쟁이 시작된지 20년째가 되었다고 나와서 2007년 무렵으로 추정) )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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