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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 1896년 러시아 교관이 본 대한제국군의 모습

박용수 2014. 10. 27. 15:52

< 원문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원문서비스 - 러일전쟁과 한반도(http://www.imhc.mil.kr/imhcroot/upload/resource/HE00002.pdf)

 

 


 

... (전략) ....


2. 러시아 군사교관단 활동

 가. 경비대 창설 및 군사훈련 (제1진)

주한 러시아 군사교관단 (Русские инструкторы в корее в 1896-1898 гг.)


* 생산년도 : 1898년
* 보존기관 : 러시아 군역사 문서보관소
* 문서번호 : 문서군(400), 문서목록(4), 업무분류(317)
* 총면수 : 33면

 

1. 러시아 군사교관들이 교육하기 이전의 한국군
(корейское войско до обучения его русскими инструкторукторами)

 

 

 서울에는 5개 대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보병 3325명, 기병 8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6년 8월 달(이하 구력)에 개교된 군사학교에는 33명의 훈련병이 있었다. 이들은 국왕의 신뢰를 더 많이 받고 있었다. 이 군사학교의 훈련병들은 흐멜례프 중위(Хмелеь, 러시아 공사관 수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장)의 명령에 직접 복종하였다. 군사학교 업무는 흐멜례프 중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한국인 장교 7명이 담당하였다. 군사학교는 러시아 공사관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33명의 훈련병과 한 명의 통역자를 고용하기 위해 국왕의 사비가 매달 200달러씩 제공되었다. 물품공급업자에게도 비용이 지불되었다. 식사는 일반적으로 밥과 김치(발효된 배추와 무우) 그리고 국이었는데 하루 세 번 제공되었다.

 

 훈련병들의 제복은 검고 푸른 색의 짧은 윗도리(동다리 - 편역자)로서 앞은 단추로 여몄다. 바지는 장화 안에 넣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검은 천으로 만든 투구 위에는 쇠구슬과 꽃잎 모양의 오화판(李花章 - 편역자) 모표(кокарда)가 달려 있었다. 오화판이란 오얏꽃 모양으로 만든 하얀 금속제품을 말한다.

 

< 편역주 - 오얏(李)이란 자두의 원종으로서 꽃 모양이 서로 유사하다. 본문에서 이화장의 꽃을 러시아어로는 вишня, 즉 체리로 번역되었으나 오얏꽃에 대한 정확한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못한 채 옮긴 듯하다. 일반적으로 오얏꽃과 자두꽃은 서로 큰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고 일부 전문 서적에서도 자두꽃으로 적고 있으나 이씨 문중에서는 이를 오얏꽃으로 정확히 표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도 오얏꽃으로 한다. >

 

 한국군은 베르당(бердан) No. 2 선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멜빵은 하단의 조립식 고리(у нижного раздвижного кольца)에는 잠금쇠가 있는 일본제였기 때문에 총검술(фехтование)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소총은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걸려서 그냥 던져 넘겨야 했다.

 

 훈련병들은 바닥 밑으로부터 따뜻하게 되는 온돌방의 칸(1 1/2 입방 싸젠 크기의 방(間) - 편역자)에 배정되었다. 소총은 세로로 세워 두었다. 훈련병들은 날마다 표를 받아 집에 다니며 쉬었다. 그러나 이들 훈련병은 제복이 아닌 한국식 평상복(корейский штатсеий)로 다녔다. 학습시간에는 모두가 참석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핑계삼아 몇일이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훈련병 중에서 당직자가 매일 임명되었다. 병영 내 내부 정돈을 시작하면서 각 칸에서는 감춰야할 일이 많아졌다. 의복은 정리되어 있어야 했고, 선조총도 제대로 세워져 있어야 했다. 담배는 꼭 책임자가 있을 때에만 피우도록 하였으나 아직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교육은 11시와 2~4시 사이에 하루 두 번 실시되었다. 훈련병에게 교육을 진행시키는 일은 흐멜례프 중위가 담당하거나 한국 장교 중에서 우수한 자가 맡았다.

 

 벌써 훈련병 중에 몇몇은 교육을 이수했기 때문에 흐멜례프 중위의 요청에 따라 장교로 임관되거나 곧장 2계급 특진되기도 하였다.

 

 흐멜례프 중위는 군사학교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는데, 학교 책임자를 임명하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장교 결원을 보충하였다. 이 때 조직된 한국군의 대대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군 대대는 4개의 중대로 나뉜다. 중대는 다시 2개의 소대로 그리고 소대는 2개의 분대로 나뉘었다.

 

 부사졸(нижные чины) 중 550명의 일반 병사 중에서 과반수 이상(250~290명)은 출장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 출장간 사람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대 명단에 잡힌 나머지 인원조차도 집에 머물면서 대대본부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만큼의 급료를 지불받고 있다. 그러나 부대 검열이 있을 때에는 즉각 나타나야 했다. 제3대대에는 동학(тонхак)군 진압 차 파견 나간 거의 모든 인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 한국군 1개 대대의 구성 상황

 

장교: 대대장(소령) 參領(чам-ен) 1, 중대장(대위) 正尉(чем-уи) 4, 병참장교(대위) 餉官(ханкоан) 2, 부관(대위) 副尉(пу-уи) 1, 소대장(мл, оф., со-таа-тян)(계급에 따라 副尉와 參尉) 12 => 계 20명

 

부사졸: 상사 正校(чен-кю)(중대 4, 서기 1, 경리1) 6, 부교(старщий унт-офицер, пу-кю) 12, 병참부사관 副校(пу-кю) 4, 서기 副校 2, 참교 24, 선임통신수(старший сигналст) 부교 1, 통신수(сигналист рядовый) 20, 장교전령 傳令(вестовой) 53 (대대본부 6, 병참장교 3, 중대본부 2, 부관 2, 소대장 1), 병참장교에 달린 근무병 12, 부대원(строевый рядовый) 550 => 계 665명

 

편역주 - 부사졸(нижные чины)이란 표현은 부사관(과거 하사관)과 일반 병사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장교와 비교하는 개념으로 일반 병사들과 구분되어 사용될 때에는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이라 적었다. >


 부사졸은 일체의 정해진 기간도 없이 고용되었고 아무런 서명되지 않았다. 오늘 현재 소속인원으로 명단에 잡혀있는 사람들도 내일은 아무 거리낌없이 근무를 그만둬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병사로 근무하길 희망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왜냐하면 급료가 매우 높은 반면에 하는 업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장교급료는 매달 다음과 같이, 즉 대대장은 77달러, 말 사육관은 12달러, 중대장은 46.75달러, 부관(副尉 계급)이나 부위는 34달러, 참위는 28달러를 받았으며 병참장교(餉官)는 중대장과 동일한 급료를 받았다.

 

 부사졸이 매달 지급받은 급료는 상사(정교 - фельдфнбель)가 10달러, 부교는 9달러, 참교는 8달러 그리고 일반 병사들은 5.50달러를 각각 받았다. 병사 개인에 대한 급여비는 하루 10.5센트였다. 부가적인 휴가에는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반란군(동학군이나 의병 - 편역자) 진압에 파견된 병사들에게는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작전 지역의 관청으로부터 물자 보급을 받았다.

 

 군부대신은 응당받아야 할 급료를 제대로 다 받았다.

 

 여러 항목의 급여에 대한 관리는 특별히 병참장교(餉官)에게 그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들은 일상업무에서 완전히 열외되었다. 이들은 일반장교(строевые офицеры)들이 착용한 붉은색 모자테(окрлыщ)나 투구 그리고 군복바지의 세로줄무늬(лампас, 縫章 - 역자)가 없는 청색 복장을 하고 다녔다. 병참장교가 작성한 경비 요청서는 대대에 속한 병사들 정규인원에 근거하여 산출되었다. 요청서에는 군부대신의 직인 이외에 부가적으로 한국군 부대장과 한국 군부의 고문(顧問)인 미국인 닌스테트(F.J.H Nienstead)의 증명서를 첨부하여 탁지부에 제출한 후 지급 받았다.

 

< 편역주 - 미국 군사교관단(William Mc. E. Dye, Edmund H. Cumins, John G. Lee, F.J.H Nienstead)은 이미 1888년 4월에 들어와서 6월부터 훈련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889년까지 한국의 근대식 사관학교인 鍊武公院에서 교관으로서 훈련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889년까지 한국군 간부 육성에 노력하게 된다. >

 

 다음으로 하위계급의 급료 중에서 일부는 매달 50센트씩 공식적으로 공제하여, 봉직 후 퇴직자의 수중에 되돌려 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에게서는 공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공제된 비용의 일부는 타인의 것이 되었으며 언제 누구에게도 지급된 적이 없었다. 그 후 병사들 급료에서 제한 공제액은 병영 급식개선 비용을 위한 공식적인 항목으로 하여 30센트씩 산출되었다. 그러나 이 비용 역시 아무데에도 쓴 기록이 없었다.

 

 기타 병사들의 급료는 부대 경영을 담당하는 대대의 대대장이나 병참장교 그리고 일부는 중대장에게 지급되었다. 중대장에 이르는 모든 계급에 대한 급료가 지급된 후 병사들에 지급할 급료는 현재 존재하는 병사들 인원에 따라(모든 대대에는 항상 10~25명 정도의 결원이 있었다) 상사(정교)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들은 부사졸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이들의 급료 지급 명단은 작성된 바가 없었다. 병사들로부터 아무런 서명도 받지 않았기에 실제로 이들에게 얼마의 급료를 지급했는 지를 말하기는 힘들다.

 

 중대장은 어떠한 결산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한국인) 물품공급업자와 체결한 물품공급에 대한 조건은 아무런 흥정이나 담보도 없이 책정되어 곧바로 전 대대에 걸쳐 공급이 실시되었다. 물품공급업자는 22명이 일하는 커다랗고 견실한 기업으로서 그 대표는 김시종(ким си-джон)이었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의 통역자로서 한국의 차관급 직위를 갖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물품공급은 보다 많은 뇌물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군부는 물품공급업자와 독자적으로 구두 계약을 체결하였다. 병참장교가 날마다 물품을 수령했으며 중대별로 분배하였다. 병참장교를 지원하기 위해 경리하사관과 (중대별로 3명씩의) 병사들이 선발되었다. 식당을 맡을 조합원이나 당직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식은 하루 세 번, 즉 아침 7시, 낮 12시 그리고 저녁 6시 30분에 제공되었다. 제공된 밥은 쌀밥이거나 콩이 섞인 밥이었고(특히 콩밥은 경리장교에게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김치(고추나 파, 양파 등이 섞인 배추김치나 무우김치), 여러가지 콩이나 고추 반찬이 나왔다. 육류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았는데, 다만 한달에 2번 정도 뼈를 곤 국이 나왔다. 뼈는 자른 고기에서 나온 것을 구입했는데 대대가 먹을 분량을 한번 끓이는데 80센트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뼈 국물은 그 외양에서조차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부사졸들은 이를 맛 좋은 진미로 여겼다. 가끔씩 군부대신은 자기 경비로 격려금을 주어 육류를 구입케 한 후 병사들에게 제공토록 하였다.

 

< 역자주 - '한국지'에 기록된 경우를 보면, 훈련대원의 식사는 3회 실시되었는데 아침은 6시(쌀밥과 차), 점심은 11시 30분(쌀밥과 국) 그리고 저녁은 6시(국 혹은 양배추국)에 실시되었다. >

 

 음식은 진흙으로 만든 화덕에 평평한 솥을 올려놓아 끓였다. 식당은 임시적인 야영 아궁이를 연상케 하였고 청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식은 부사졸들이 끓이지 않고 거리에서 떠돌다가 부대에서 먹고 자는 부랑자들이 맡았다.

 

 부사졸들은 1과 1/2입방 싸젠 규모의 칸(кан)에서 7~8명이 매우 비좁게 생활하였다.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은 병사들과 따로 떨어져 배치되었다. 칸으로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어 문지방에 놓았다.

 

 칸의 바닥에는 기름종이를 발랐고 그 위에 짚으로 만든 돗자리를 깔아 놓았다. 바닥 밑에는 온돌이 깔려 있었고 문 밑에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땠다.

 

 부사졸들은 바닥에서 잠을 잤는데 머리 맡에는 베개용으로 나무로 만든 6 주임(дюйм, 이하 인치) 크기의 목침을 두어 사용하였다가 목침은 그 위에 담배를 두어 자르거나 심지어는 못을 박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외투나 모자 등은 못에 걸어 두었다. 칸의 천장은 심하게 그을린 상태였다. 칸 내부에 지방제 양촛불과 자그마한 유리없는 램프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숙소는 장교의 숙소와 떨어져 있었다. 장교 숙소는 나무로 만든 접개식 장지(병풍 - 편역자)로 구분되었고 문에는 더러운 걸레가 걸려 있었다. 접개식 장지는 대대장과 일반 장교들 시야에서 병사들이 보이지 않도록 설치해 놓은 것이다. 한국 관습에 따르면, 병사들이 책임자의 눈에 온종일 비쳐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다.

 

 마당은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그러나 식당 근처는 바로 썩어가는 오물로 매우 불결하였다.

 

 모제르(маузер)와 레밍턴(реминтон)소총은 구석에 모아 두었는데 베르당(бердан) 소총은 못에 걸어 놓았다.

 

 장교들은 병영 내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두 명이 한 칸을 사용했는데 일반 병사들의 건물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났다. 즉 종이로 된 창문 한 가운데에 유리가 있었고 가구에 있어서도 책상은 유럽식으로 만든 것이었으며 편지쓰기용 한국식 탁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비록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꽃무늬 장식을 달거나 수를 놓은 솜방석이 있었다. 이불과 나무베개(목침) 그리고 여행용 손가방도 있었다. 손가방에는 인쇄물, 편지도구, 담배도구 등을 보관하였다. 바닥에는 나무 쟁반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구석진 상자(서랍 - 편역자)가 있어, 우리 러시아는 대개 침대 밑에 두지만, 원통형 파이프(담뱃대 - 편역자)나 주발 용기 등을 놓아두었다.

 

 병사들의 군장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해마다 25달러 80센트씩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경비는 일본인과 계약을 체결한 군부가 받아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병사들 군장품 구입 경비 :

 

군복과 바지(常衣, 常袴) 2달러 90센트, 셔츠와 양복바지 내의 속옷 2벌 1달러 80센트, 무명 조끼 1벌 30센트, 각반 1벌(гетры-гамаши) 40센트, 소매동(넥타이 대신 단 하얀색 물품) 4센트, 긴 무릎 양말 2벌 12센트, 장화 3켤레(1년한)(개당 1달러 40센트) 4달러 20센트, 외투(3년한) 1벌 7달러, 모포(3년한) 1벌 3달러 10센트, 여름옷 2벌 2달러 20센트, 모자 80센트 => 계 23달러 06센트 >


 위에 언급한 가격이 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군부가 지급한 선불 경비 중 남은 비용인 25달러 80센트 내지 23달러 6센트는, 말할 필요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사졸의 복장에 대해 언급하자면, 검고 푸른색의 군복은 일본풍을 따라 가슴 가운데로 호크를 물려 여미게 하였다. 대대 부호는 붉은색의 아라비아 숫자로 소매와 어깨 하단에 꿰매어 표시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특히 '4'자의 경우, 올바로 달아놓지를 않아서 되돌려 주어 다시 달도록 하였다.

 

 바지(常袴) 역시 군복 상의(常衣)와 동일한 재질로 만들었는데 1과 1/2인치 넓이의 세로줄무늬(лампас, 縫章)를 달았다. 바지 역시 일본풍으로 매우 좁게 만들었는데 하얀색의 뼈로 만든 단추와 각반으로 꼭 끼게 만들었다. 각반은 실로 꿴 가죽 신발을 덮었다.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과 상사(정교)들은 웬일인지 각반을 차고 다니지 않았다.

 

 겉옷은 마치 넓은 환자복처럼 생겼는데 매우 좁게 만들어서인지 사람 형상을 펼쳐놓은 듯 했다. 겉옷의 옷깃에는 방한용 두건을 달았으며 대대부호(No.)는 달지 않았다. 겉옷은 뼈로 만든 단추로 여몄다. 복장의 모든 장식품에 따른 비용은 비록 많이 들었지만 구입할 것은 다 구입하였다. 그러나 질 나쁜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용 연한을 버티지 못하고 두세 달이 지나 옷 끝부분이 떨어져 너덜너덜하게 다녀야 했다.

 

 머리부분의 장식물인 모자는 뻣뻣하게 풀먹인 검은 양털로 만들었는데 영국식 투구와 유사하나 그 크기는 매우 작았고 모자 앞쪽의 차양(前庇)이나 모자 뒤쪽의 늘어진 것이 없었다. 머리에는 머리털로 만든 심형(상투 - 편역자)같은 것이 없어서 모자가 잘 써지지 않았다. 모자는 턱밑으로 묶은 검은 끈(턱끈(이紐) - 편역자)으로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였다. 모자 테두리에는 검은 실로 1인치 넓이의 천을 둘렀다. 부사관은 그보다 2배 넓은 천을 댓다. 제모의 모표로는 하얀 금속제의 오얏꽃 모양의 오화판(李花章 - 편역자)를 달았으며 투구 위에는 빨간 양털로 된 (중국식) 구슬을 달았다.

 

 내의로는 개인적으로 마련한 무명옷을 입었다. 그 위에 무명조끼를 입은 후 제복을 착용하였다. 한국의 바지 하단 속옷은 넓어서 끝을 조여 맺는데, 이럼으로써 병사들은 보다 군인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부사관은 일반 병사들과는 달리 붉은 실로 만든 좁다란 테두리가 있었으나 흰 복장에는 노란 테두리가 둘러졌고, 제복 상의의 접은 소맷 부분은 반을 그대로 두었다. 이것은 첫해 근무를 시작한 병사(兵卒, 이등병 - 편역자)를 뜻했다. 2개의 테두리는 이등병조(солдат 2-й статьи, 일등병 - 편역자), 3개는 삼등병조(러시아로는 상등병(ефрейтор), солдат 3-й статьи : 상등병 - 편역자)를 의미하였다. 넓은 붉은색(하복에는 노란색) 테두리는 3/4인치 넓이로서 하나의 좁은 테를 둘렀는데 이것이 바로 참교(參校, млд. унт-офицер)이며 넓은 천 3개로 만든 좁은 테두리는 상사(정교)를 뜻했다. 병참관은 청색천을 둘렀다.

 

 장교 군장품은 일본군과 동일한 형태의 제복으로 만들었다. 천의 매듭은 오얏꽃으로 장식하였다. 넓은 바지는 2 1/2인치 크기의 세로줄 무늬를 단 것으로 밖으로 내었다. 일본도 형태의 군도(軍刀)는 제복 밑에 푸른 어깨띠를 둘러 허리춤에 찼다. 머리에 쓰는 도구는 부사졸의 것과 동일한 형태로 만들었으나 천이나 머리털 혹은 대다무 등으로 만들었다. 투구 위의 넓은 곳에는 금색 칠을 한 금속쇄를 쓸데없이 정교하게 달았다. 그 둘레에는 2인치 넓이의 붉은 테를 둘러 계급에 따라 꼬아 만든 검은 색의 끈을 꿰매었다. 소위(млд. лейтенант - 참위)는 1개, 중위(старщий лейтенант - 부위)는 2개, (부대장 직책의) 대위(капитан, 정위)는 3개 그리고 대대장 소령(참령)은 네 개를 달았으며 군부대신은 8개를 달았다. 그리고 모표(表章)로는 금색칠을 한 금속가지를 매단 오얏꽃으로 마무리하였다. 투구가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옻칠을 한 띠(턱끈 - 역자)로서 턱 밑에 묶었으며 투구에는 오얏꽃 모양의 귀단추를 부착시켰다.

 

 제복에서 드러난 계급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위관장교는 옷깃에 금속 별표 하나를 달았고 1 1/2인치 넓이의 금색 견장에도 역시 하나의 별표를 달았다. 그리고 소매의 실은 계급에 따라 둘, 셋 등을 달았다.

 

 대대장의 경우 제복의 옷깃에 2개의 별표를 달았고 견장에도 두 개를 달았다. 견장은 위관의 견장보다 좀더 넓어 2 1/2인치 크기였다. 장군은 세개의 별표를 제복 옷깃에 달았으며 견장에는 매우 반짝이는 은제 단추를 아나나 두개 달았다. 더욱이 장군의 견장 넓이는 2 1/2인치 넓이여서 1/8인치 넓이의 금색실로 테를 부쳤다. 행진시의 복장은 술이 달린 빨간 혁대와 희고 붉은 깃털로 만든 일본식 장식물이 달린 것이었다. 제복 외투는 일본식으로 두 줄 단추로 만든 것으로서 단추는 은색의 반짝이는 제품이었다.

 

 대대는 다양한 형태의 선조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최초로 생산된 제품인 모제르 소총과 레밍턴 소총 그리고 베르당 소총이 있었다. 한국 군인들은 이들 총기류를 잘 다룰 줄 몰랐다. 대대에 분배된 베르당은 벌써 고장이 나 잠잠했다. 총기 청소는 이루어졌으나 총 꽂는 곳에 두지 않았다. 선조총은 부사졸 모두가 예외없이 정돈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떼어가서는 안되는 총기 부품을 병사들이 떼어가기도 하였다.

 

 총기 청소 임무는 군부에 있으나 그 곳은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다. 모제르와 레밍턴은 상태가 나빠 격발시 아전하지 않았으며 레밍턴 소총 자물쇠는 소대가 보관하고 있지 않아 대부분 폐쇄기에서 꺼내질 않았다. 소총 개머리판은 몇몇 개의 베르당을 제외하고는 소유자의 성명인 중국식 문자표기가 떨어져 나갔거나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격은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탄은 대부분 군부가 보관하고 있었고 그 일부만이 대대의 하위계급의 수중에 배분되어 제복 하단의 아마포 혁대에 달고 다녔다. 탄약은 뒤섞여 있어서 자주 모제르 소총에서 베르당 탄약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상사(정교)들은 모두 손잡이에 금속제 흠이 없는 군도로 무장하였다. 검은 가죽으로 만든 혁대(黑革製)에 구리 잠그개가 달렸다. 미국식으로 만든 탄약합(彈藥盒)은 혁대 뒤춤에 달고 다녔다. 혁대는 배를 압박하지 않도록 가슴에 걸쳐 둘렀으며 가슴 뒤쪽에는 허리 밑까지 축 벌어져서 몹시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손가방을 뒤에 매었다. 총검집이 없어 총검을 허리띠에 곧바로 차도록 되어 있었다. 모제르 소총에 부착된 단검은 칼집에 넣어 다녔다

 

 하위계급은 휴가를 보내면서 선조총과 탄약합 등을 지니고 다녔다. 선조총은 등 위의 혁대에 달고 다녔다. 몇몇의 부사졸들은 일본제 금속 수통의 물을 쏟아내어 그 무게를 줄여 다녔다.

 

 장거리 출장을 나설 경우 병사들은 모든 군장 재물을 모포에 감고 아마포로 만든 멜빵에 마치 환자처럼 둘러메었다.

 

 중대에 필요한 모든 필수품은 병참장교(향관)가 구입하여 중대에 나눠주었다. 중대 재물은 밥그릇, 반찬그릇 그리고 국그릇 주발과 칼, 포오크 대용의 젓가락, 중대초소 식사배급용 그릇(식판 - 편역자), 양동이, 짚 돗자리 등 중대 재물들이었다. 중대에서는 매일 당직장교가 병참장교에게 당일 제공되었던 모든 사람의 인쇄물 목록을 작성하여 건네 주엇다.

 

 병참장교는 요리사에게 식품을 제공한 후 이를 장부에 기재했으며 이 장부는 증명 기록으로서 당직장교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이 급식에 관한 총결산 내용이었다. 대대 차원의 재정보고는 실시되지 않았으나 군부가 자체적으로 탁지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물품공급업자와의 정산은 군부에서 직접 처리하였다. 중대장은 부대경영에 대한 통제를 전혀 하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교육은 오전에만 2시간 진행되었고 나머지 시간에 부사졸들은 순번으로 집에서 가족과 보냈다. 장교들은 전혀 교육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단지 일본 군대를 잘 아는 몇 명의 장교나 부사관들이 이끌었으며 나머지 장교들은 구경꾼 행세를 하거나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대대장은 하루에 한번 (상부에 있다가) 다녀갔다. 그것도 대부분은 교육시간 이 외의 다른 시간에 병참장교를 만나기 위해 왔으나 대화를 마친 후 곧 되돌아갔다. 대대장이 대대에 나타날 때는 주로 정복 차림이 아닌 한국의 평상복 차림을 하였다.

 

 대대장은 전령이 소총을 들고 항상 동행토록 했으며 말은 마부가 재갈을 물려 끌게 했고 말머리 근처에는(у стремени) 한국인이 여행용 손가방을 들고 재촉걸음으로 따라오게 하였다. 대대장은 이동시 자신이 높은 고관임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처럼 황옥(топаз) 안경을 꼈다. 모든 장교는 병영에서 나오면서 자기를 수행할 (무장할) 전령을 데리고 다녔다. 이들 전령 중 한 명은 필히 주인의 손가방을 챙겼는데 이것이 바로 신임 한국 장교가 처음으로 구입하는 물건이었다.

 

 병사들이 '차렷자세(стойка)'를 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들은 머리를 앞으로 내밀거나 배를 내밀어 마치 의기소침하고 심신이 극도로 피곤하며 기가 죽은 존재처럼 서 있었다. 손은 일본식으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잡고 있었다.

 

 대열에 서있을 때 소총은 착검하지 않은 채로 들었고 총검은 혁대에 차고 있었다. 중대 교련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열을 맞춰 세우는 것 뿐이었다. 흩어졌다 다시 대열을 맞추는 일은 뒤죽박죽이었다. 장교가 이들을 어찌 대할 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장소에서 일부의 부대 인원을 이동시키는 중에는 한 개의 부대가 없어지곤 하였다. 사람들은 그 중대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서 두 줄이 만들어졌다. 소총은 오른쪽 어깨에 메고 다녔다. 그러나 부대에게 '제자리에 서(стой)'란 구령을 내리자, 전면을 향해 서서 총을 어깨에서 발 쪽으로 내려놓고 열을 지었다.

 

 행군은 잘 하지 못했다. 부대가 한쪽으로 흔들거려 거의 일렬로 다니지 못했다. 구보는 잘하여 반듯한 대열을 이뤘다.

 

 경례는 반쪽 돌아서서 손을 모자의 차양에 갖다대고는 머리를 숙였다. 하위계급이 지휘관(начальник) 뒤에 걸어갈 경우에는 앞질러 가서 멈춘 후 거수 경례를 부치고 지나갔다. 일반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에 대해서 경례는 하지 않았지만 두 손을 서혜(鼠蹊, 사타구니) 부위에 대고 공손히 인사를 나눴다. 지휘관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모자를 쓴 후 손을 들어 거수경례를 부쳤다. (모자를 쓰면 머리를 받쳐주고 있는 때묻은 두건을 가릴 수 있었다.)

 

 병영 내에서 모든 병사는 장교가 들락거릴 때 그에게 다가가 손을 모자 차양에 대고 거수 경례를 하였다.

 

 소총이 없이 대열에 섰을 경우에는 명령에 따라 모자 차양에 가져가 거수경례를 한 후 다시 명령에 따라 손을 내렸다. 대체로 경례를 할 경우 병사들은 머리를 숙여야 했다. 경비초소에 가기 위해 총을 든 채 대열에 서 있을 때에도 머리를 숙였다. 하위계급이나 장교들이 상관과 대화를 나누과 있을 대에는 두 손을 사타구니 부위에 갖다대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으며 상관의 모든 말 한마디에 존경의 표시로서 "예(з)"로 대답하였다.

 

 장교들에 대한 처벌도 있어 명령 불이행에 대한 질책이나 최고 한달 간의 체포 구금 그리고 직무 해고 등이 주어졌다. 체포된 장교는 그 기간 동안의 급료를 받지 못했다. 대대 내에서도 체포가 이루어져 그 기간 동안에는 어떠한 임무도 수행할 수 없게 하였다. 또 다른 처벌로는 죄를 지은 장교가 연병장 한 가운데 서서 1시간에서 2시간 동안 "차렷자세(смирно)"로 서 있어야 하였다.

 

 부사졸에게는 체포, 태형 등의 처벌이 주어졌는데 이는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이나 상사(정교)를 모두 망라하여 적용되었다. 일반 병사들을 처벌할 권리는 일등병조(рядовые 1-й статьи : 상등병 - 편역자)에 주어졌는데 때리는 숫자에는 제한이 없었다. 체포는 단순체포로서 음식이 제공되는 처벌과 족쇄나 칼을 차고 구금되는 처벌이 있었다. 절도죄로 체포된 자에게는 음식이 제공되지 않았고 동시에 10대 내지 50대의 태형을 가한 후 해고시켰다. 교육 도중에 실시되는 처벌로는 초소에 붙잡아 두고 총들고 서 있기를 시켰다. 이는 일본인이 고안해 낸 처벌 방식이었다.

 

 대대에는 각 중대별로 병영 밖으로 나갈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당직 장교가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중대 내의 질서를 돌보는 일이었다. 게다가 대대 전체의 당직장교가 중대 본부에서 한명 임명되었다. 당직 장교는 어깨 뒤로 솔이 달린 띠를 마치 스따니슬라프 훈장을 받은 것처럼 달고 다녔다.

 

 부사관(унт-офицеры) 중에는 당직자가 없었다. 당직장교는 병영 출입문 열쇠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저녁 9시부터 새벽까지 출입문을 잠궈두었고 국왕의 지시가 있을 경우에만 열었다. 밤 중에는 병영 안팎으로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거나 내보내지 않았다. 이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대대 내에는 대문 근처에 네 군데 그리고 감옥에 한 군데의 초소가 있었다.

 

 초소에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앉아 있을 수 있었고 잠을 자거나 같은 보초병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초소에서 벗어나 한국식 여관에 들르면서 총은 거리에 두고 가기도 하였다. 비가 오는 날에는 막사를 떠나기도 하였다. 위병사령이 없이도 교대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비가 오면 총구 부분을 천이나 종이로 틀어막았다. 대체로 경비근무라는 것은 무엇이다라고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초소에 서 있으면서 총은 혁대에서 어깨 너머로 걸은 채로 있었다.

 

 국왕에게 제출할 장교 명단은 군부대신의 추천에 따라 작성되었다. 장교에는 군부대신의 친인척이나 다른 고관들 측의 인사들 혹은 군부대신에게 직위를 얻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이 선발되었다. 대대장은 자신의 직위를 위해 거금인 1000 내지 2000달러를 지불했으며 5~6개월이 지난 뒤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가 기간 동안에 대대장은 자기가 지불한 1000 내지 2000달러를 보충했으며, 더 나아가 임의로 사복을 채우기도 하였다.

 

 대대장은 8개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지나칠 정도로 직위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거금을 들여 직위를 샀던 것이다. 직위 해제된 한국인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해당 직위의 의복을 계속 입고 다닐 수 있었다.

 

 군부대신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처음 시작했던 일은 대대장을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장교 직위를 새로 임명하였다. 이럼으로써 군부대신의 재정 사업은 곧바로 나아졌던 것이다.

 

 대대장은 병사들의 대오(строй)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교육 도중에 나타났을 때에는 병참장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일에 한해서였다.

 

 흐멜례프가 교육하는 훈련병을 장교로 양성하는 일이란 군부대신에게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장교들이 완전히 문맹이었는데, 심지어 이들은 한국어조차 모르기도 하였다. 대다수 장교들은 위로 꼬아 올린 머리(상투 - 편역자)를 하고 다녔는데 짧은 머리가 흩으러져 내려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머리 그물망(탕건 - 편역자)으로 조였으며 이 그물망 위로 머리 모자(волосяной колпачек)와 투구를 차례로 썼다.

 

 머리에 쓴 모자는 절대 벗지 않았다. 머리를 자른 사람은 겨우 몇 명의 장교 뿐이었다. 사전에 대대장은 결원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100 내지 150명의 예비대상자를 뽑았다. 이들 대상자들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군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대장에게 10 내지 12달러를 일시에 지불하여야 했다. 수입이 생기는 직위인 행정, 서기, 병참전령 등으로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자는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야 했다.

 

 그같은 선발 체계로 인하여 젊고 건강한 그러나 뇌물을 제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부대에 매우 적었으며 나이가 많고 농민으로서 일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입대하게 되었다. 하위계급 중 대다수는 한국어(언문)를 익숙하게 구사하였으나 한문은 겨우 일부 비율의 병사들만이 구사할 줄 알았다.

 

< 편역주 - 한글이라는 말이 대중화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의 주창 이후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명칭되고 있었으나 본서에서는 그냥 한국어로 사용키로 한다. >

 

 만일 병사들이 무엇인가로 인해 죄를 지어 해고됐다면, 그 해고는 바로 그 시간에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이 지나길 기다려 그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은 채 해고시켰다.

 

 만일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군부에 자신의 복무 전기간에 걸쳐 저축한 급료의 절반을 청구할 수 있었다. 이때 그에게 내려온 대답은 "꺼져라. 너는 국왕을 위해 잘 근무하지 못했으므로 돈을 박탈한다"였다. 그리고 만일 해고가 개인의 독자적인 희망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그에게 "너는 국왕을 위해 근무하고자 하지 않으니 돈을 박탈한다"고 말하였다.

 

 부사졸 대부분은 혹같이 꼬아놓은 머리(상투 - 편역자)를 하고 다녔다. 일본 때문에 머리를 깎은 사람들은 긴 갈기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이들의 제복 옷깃은 색갈이 바랬고 더러움과 기름으로 반들거렸다. 한국인 장교와 마찬가지로 부사졸들도 머리 위는 불결하고 단정하지 못했다. 매일 빗지도 않는 거대한 머리로 인하여 옷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이(насекомка)들이 우글거렸다. 하얀 물체(이)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려 있었다. 장교 제복의 끝 매듭에는 빈대가 살고 있었다. 한국인 병사들이 씻는다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 같았고 목욕을 즐기지도 않았다.

 

 국유재산이나 국고에 대한 절도가 부사졸에서 뿐만 아니라 장교들(특히 병참장교) 사이에서 매우 심각하게 일반화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를 사소한 일로 바라본다는 것에 있었다.

 

 장교나 부사졸 간의 수준은 거의 동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견상 보았을 때 부사졸은 보다 젊어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부는 완벽할 정도였다. 상관에 대한 비굴함과 부하들에 대한 우월감은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성 같았다.

 

 군부의 고문인 미국인 닌스테드(F.J.J Nienstead)에 대한 일반적인 통제는 거의 불가능해 졌다. 그는 거북이 모양의 차양이 달린 케피(kepi)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 사람은 군사업무에 관해서 모호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상급 지도부는 군부대신과 군부대신 협판(товарищ военного минмистра)들이지만 이들은 대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부대신은 항상 가마를 타고 다녔는데, 주위에는 무장된 소대 병력의 많은 병사들과 하인들로 에워쌓였고 뒤에는 말을 탄 부관 (말은 하인이 재갈을 물려 끌고갔다)이 걸어갔다. 하인 중 한 명이 여행용 손가방과 직인이 든 상자를, 그리고 뒤에는 말을 탄 부관(말은 하인이 재갈을 물려 끌고 갔다)이 따랐다. 그 상자는 구리를 입힌 거으로 한쪽 길이가 10인치 정도되는 크기였는데 동제 맹꽁이 자물쇠(висячной зфмок)로 잠겨 있었다. 또 다른 하인은 줄로 만든 그물에 요강(урыоьник)을 들고 따랐다가 두 사람은 가마 양쪽에서 뛰어갔다. 군부대신이 가마에서 내릴 때면 두 명의 하인이 손으로 대신을 받들었으며 대신은 마치 업무로 인해 힘이 없고 몹시 지친 모습으로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한국인들은 그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관직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더 힘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2. 러시아 군사교관단의 한국군 교육

(중략)
....


아파나씨에프 1세(Афанасьев 1-й)

 

 

(후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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