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노흐치의 세계사 (A World History of Noxchi)

박용수 2014. 10. 27. 16:03

< 원문출처 : A World History of Noxchi - (www.yale.edu/agrarianstudies/colloqpapers/11noxchi.pdf) >

 

< 원문파일: 첨부파일 11noxchi.pdf>

  

< 사진 및 역주 출처 :
[1] Shashka (http://en.wikipedia.org/wiki/Shashka)

[2] Vladikavkaz (http://en.wikipedia.org/wiki/Vladikavkaz)

[3] Aleksey Petrovich Yermolov (http://en.wikipedia.org/wiki/Aleksey_Petrovich_Yermolov)

[4] Imam Shamil (http://en.wikipedia.org/wiki/Imam_Shamil)

[5] (http://www.circassianworld.com/new/interview/1346-interview-musa-shanib-may-2009.html) >

 

 

 코카서스 지역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이 담겨져 있는 글을 찾다가 보게 되어 옮기게 되었습니다. 원본글 자체가 미완성 판본으로, 여러 모로 정리가 덜 되어있는 부분이 보입니다만,  나름대로 코카서스 지역에 대한 이해를 할 수있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정식문서가 아니고 그냥 흘러다니는 문서의 일종이기 때문에, 내용의 신빙성도 그리 높다고 하기에는 어려우리라는 점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내용이 많다보니 (너무 귀찮아서 ^^;;) 다소 덜 중요해보이는 부분은 생략하고 번역하였습니다. 혹시 생략된 부분이 궁금하신 분은 원문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참조로 노흐치라는 말은 체첸 저항군들이 자기 자신들을 부르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타 코카서스 사람들까지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박용수 드림

 


 


제 3장 역사의 성립

조지 M. 델루지안, 노흐치의 세계사


 

 앞으로 다룰 3개 장을 통하여 역사-사회적으로 3가지 시기를 다룰 것이다: 우선 북 코카서스 민족들의 중세 시작으로부터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정복 시기까지를 다룰 것이고 ... (중략) ...


 

 산악지대와 민족들

 

 코카서스 지역의 눈부신 민족 다양성은 2가지 주요한 역사적 요소들 탓으로 볼 수 있다 : 산악지대라는 점과 지정학적 원인이다.

 

 코카서스 산악지대는 양쪽에 카스피해와 흑해가 위치하고 있으며, 해안지역 역시 좁고 암반지대라 항구로서도, 도로로서도 그리 적합하지 않다. 몇몇 산악 능선은 평행으로 놓여져 있어 자연적 장벽을 이루고 있으며, 북오세티아로부터 그루지아까지 이어지는 좁은 한가닥 길만을 허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지휘관들은 이 오세티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이곳에 요새촌을 건설하였다. 그 이름은 블라디카프카스(Vladikavkaz)로서, '코카서스를 갖는다(Possess the Caucasus)'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엘브루스 산(Mount Elbrus)과 같은 높은 준봉들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속하며,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산악지대에는 깊은 계곡들이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있으며, 보다 낮은 산지에는 통행을 곤란하게 만드는 관목들로 뒤덮인 온대성 숲지대가 가득차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대 근동 제국들과 대 초원지대의 유목민들 사이에 끼어있었음에도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오늘날의 블라디카프카스.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인 북오세티야-알라니아 공화국의 수도이다. [2])

 

 산악지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반면 자원 측면에서 빈곤한 특징이 있다. 이것이 토착 원주민 인구가 대체로 매우 적은 원인이다. 예를 들면, 발카리아인(Balkarians)들은 전통적으로 5개의 마을에 거주했는데, 한 계곡 안에서도 사용하는 언어가 여러가지였다. 산악 지대의 빈곤과 같은 이유로 코카서스 민족들에게 있어서 산 아래 지역의 보다 비옥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노출된 지역으로의 농업 이민은 꿈이자 가장 딜레마로 존재했다.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코카서스 지역은 다른 곳에서 유린당하거나 병합당한 민족들의 잔당들에게 안성맞춤인 피난지였다. 산악 환경은 이들에게 수많은 분리된 소규모 공간들을 제공했으며, 이는 다시 인종적 분열화를 가속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토착 민족의 대다수는 북 코카서스 어족에 속한다. 이들에는 다게스탄 지역의 약 30개 민족 그룹 및 체첸(Chechens)인들, 잉구시(Ingushes)인들, 카바르딘(Kabardins)인들, 기타 아디게(Adyghe)인들 (키르카시안(Circassians)으로도 불림), 이들과 근친인 압하즈(Abkhazes)인들이 속한다. 스페인의 피레네 산맥 지역에 사는 바스크(Basques)인들이 언어적으로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들 민족들의 언어도 세계에 현존하는 어느 곳의 언어와도 연관이 없으며, 인도-유럽 어족(Indo-Europeans), 아프라시안 어족(Afrasian)(과거 셈 어족(Semitic)으로 불리던 것), 터키 어족(Turkic), 카트벨리안 어족(Kartvelian)(그루지아 어족(Georgian)) 등 모두와 완전히 무관한 특성을 갖고 잇다.

 

 한편 코카서스 중앙에는 또한 참으로 놀라운 유물이랄 것들을 볼 수가 있다: 인도-유럽계인 오세트 인(Ossets)들은 스키타이, 사마티아, 중세 알란 인에게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현재 생존한 이 계통의 언어는 이것이 유일하다; 또한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카라카이스인(Karachais), 쿠믹인(Kumyks), 발카르인(Balkars)의 경우 서로 언어가 밀접한데, 이는 중세 폴로베츠키안인(Polovetskian)(다른 이름으로는 쿠만인(Cuman) 혹은 킵차크인(Qypchak)으로 불림)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고대 훈족(Hunnish)으로까지 기원이 거슬러 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처럼, 발카르인들이나 오세트인들 모두 신체 특성이나 문화적 측면에서 과거의 유목민 조상들과 같지 않고 그저 주변의 다른 코카서스 고원지대 민족들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갖고 있다. 즉 백인종에 대체로 파란 눈을 갖고 있는 유럽계 인종으로, 소위 말하는 '코카서스 인종'이 된다. 이러한 민족들을 신체 인류학자들이 통틀어 '폰투스-코카시안 아인종'으로 부른다.

 

 신체적 인류학 정보에 따라 생각해 보면, 이들 코카서스 고원민족이 과거 어느 시점에 권력 투쟁에 밀려나 이곳으로 쫒겨왔을 초원 민족들의 유산 일부를 흡수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산악지대로 밀려온 유목민들이 이들에게 딱 언어만을 남겨준 것이다. 이 가설은 전통적으로 발카르인들과 오세티아인들이 고원민족들 사이의 계층구조 속에서도 가장 하위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들은 고원 목초지 지역과 빙하 가장자리 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곳은 경치는 매우 아름답지만 농업적으로는 생산성이 극히 나쁜 지역이다.

 

 산악지대의 생태적, 경제적 틈새의 분포는 상대적 힘에 대한 문제였다. 다게스탄계 쿠믹인들과 카바르딘인들, 그리고 몇몇 키르카시안 부족들의 경우 전통적으로 비싼 전투용 말과 갑주를 소유함으로써 이들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민족이 되었다. 이들은 산악 언저리의 가장 괜찮은 토지를 점유했다. 보다 힘이 없는 집단들은 덜 비옥한 환경으로 밀려갔는데, 예를 들어 발카르인들은 산악 높은 지역에 살았고, 체첸인들의 조상들의 경우 숲속 깊은 곳에 살았다. 생존 목적으로, 이들은 산 밑에 사는 보다 강력한 이웃들의 보다 비옥한 토지를 임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는 민족들 사이에서 다양한 불공정한 의존관계들을  만들어냈다.

 

... (중략) ...

 

라이플과 코카서스 민주주의의 탄생

 

 화약 혁명이 코카서스에 도달한 것은 17세기의 어느 한 시점으로, 몇 세대의 지연을 거쳐 일련의 사회 혁명을 유발시켰다. 코카서스에서 화약이 가져다 준 효과는 서구의 것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서구에서 상비군과 대규모 관료제도를 지원할 수 있는 대국 형성을 불러일으킨 것과는 반대로, 코카서스에서의 화약은 귀족 계층구조의 분열과 자영농들의 민주화를 불러일으켰다.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오스만 제국에서 생산된 총포는 크리미아의 타타르 칸국들과 흑해 연안의 시장들을 거쳐 코카서스로 대량 유입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지역 대장장이들도 이 수입 무기들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이들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다게스탄에서는 비옥한 토지가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마을들이 수입의 대부분을 금속 공예품이나 기타 기예들을 통해서 얻었다. 이곳에서 총포 제조 산업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마을별로 업무를 특성화하여 분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초기 공업화가 절정을 이룬 19세기 중반에는 다게스탄 지역에서만도 연간 2만정의 라이플을 생산한 것으로 추산된다.

 

 생산품의 대다수는 강선이 파인 라이플(grooved-barrel rifles)로서 품질과 정확도가 뛰어났다. 유럽에 라이플이 소개된 것은 16세기부터지만, 사냥 목적을 제외하면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총구로부터 라이플을 장전하는 데에 7~10분 가량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재장전 시간 문제로 인하여 총신에 강선이 없는 머스켓이 보다 선호되는 무기였으며, 제국들의 군대들은 정확도 대신에 전쟁터에서의 화력 우세를 선택하였다. 한 에피소드에 따르면, 러시아 장군이 키르카시안인들과의 전투 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 청년들은 내 병사들보다 아마 10배는 더 사격술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100배는 많은 병사들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산악지형으로 인하여 코카서스에서 국가를 만드는 것이 일정부분 방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지형에서는 나무와 바위 뒤에서 저격 - 그야말로 사냥 기술이다 - 하는 것이 대형을 이루고 전장에 대포를 끌고오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 18세기 이래로 코카서스 전사들은 전장식 라이플과 새로 발명된 부싯돌(lighter)이 적용된 피스톨, 그리고 좀 덜 만곡된 세이버(sabre;기병도)로서 유명한 일명 코카서스 샤쉬카(shashka)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샤쉬카는 라이플을 겨냥할 때에는 수직으로 놓음으로써 라이플을 그 위에 기대어 조준을 용이하게 하였고, 사격이 끝나면 근접전 용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이 조합은 대단히 강력한 조합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사들의 전투 복장에 비해서도 훨씬 저렴했다. 18세기 중반의 카바르딘 귀족의 완전 전투 복장(full combat attire)에 순수 혈통의 전투마를 더한 가격을 살펴보면, 귀족들 취향에 따른 장식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700에서 2000 러시아 루블에 해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현지 생산된 잘 만들어진 라이플 가격은 5에서 8루블이었다. 이 역시도 소 여러마리에 해당하는 비싼 값이긴 했다. 그러나 이제 무장을 한다는 것이 좀 잘사는 농부나 운좋은 소작인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었다.

 

(샤쉬카의 모습. 한손 검으로 날은 한쪽에만 나 있으며, 손 보호 가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상 베기와 찌르기 모두가 가능하다. 샤쉬카는 코카서스 지역에서 유래되었으나 이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코삭들에게도 전파되며, 코사서스 샤쉬카와 코삭 샤쉬카로 나뉜다. [1])

 

 사회 구조에 끼친 총의 영향은 물론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귀족 전쟁문화에서 비롯된 오랜 기간의 문화적 전통은 19세기에도 한동안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며, 산악의 왕자들은 빛나는 체인메일(chainmail; 쇄갑)을 착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여기에 역사적 변화가 일어난 1760년대의 한 설화적 사례를 소개하도록 한다. 귀족의 가혹한 수탈을 항의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카바르딘 평민 수천명이 목초지에서 전례없이 회합을 가졌는데, 이는 분명 두려움을 가져다 줄만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도말레이의 반란(rebellion of Domalei)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도말레이는 "너무 많은 어깨(too much shoulders)"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도말레이가 신체적 힘이 대단히 강했음을 암시한다. 성공적인 습격을 하고 돌아오던 한 카바르딘 귀족은 노획한 여러 말들을 앞세우며 돌아오던 중, 도말레이와 합류하려고 걸어가고 있는 일군의 농민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 귀족은 이들의 목적을 듣고 나서 비웃기를: 너희 벌거벗은 종자들이 고작 냄새나는 총들을 가지고 도대체 고귀한 내 세이버와 체인메일에 대항하여 뭘 할 수 있겠는가? 이에 한 농부가 등에서 라이플을 꺼내서 말했다: 이제 보게 될 거요. 자신 만만하던 이 귀족의 무덤은 1960년대에 산악 고속도로가 확장공사를 하면서 포장될 때까지 도로변에 서있었다고 한다.

 

 싸고 잘 만들어진 라이플의 확산으로 코카서스 소규모 공동체들은 말을 타고 공물을 걷으러 다니는 귀족들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이제 용감하거나 또는 절망적인 평민이 값비싼 체인메일을 입은 토착 귀족들이 세금을 걷으러 오는 데 대하여 총알을 박아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산적들처럼 야간의 이점을 살리지 않는다면 이렇게 당할 가능성이 컸다. 북 코카서스 지역의 변경지대에 배치된 18세기 러시아 관리들의 전체 보고서 중에서 최소한 1/4 이상이 이렇게 새로운 힘을 얻은 농민들에 의한 소규모 반란들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열받게 된 귀족들은 제국 요새들로 달려갔고, 자신들이 러시아의 동맹자임을 주장하며 무례한 신민들을 벌주기 위한 병사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점차 사유 총기의 확산이 늘어나고 이에 따른 전쟁의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북 코카서스 농부들은 자체적인 힘으로 해방을 얻게 된다. 물론 이는 무정부적이고도 위험한 사회 환경을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많은 마을들이 요새화되었고, 사람들이 상호 보호를 추구하게 되면서 이 크기도 점차 커져갔다. 또한 사람들이 그룹 내 연대를 강조하게 되면서 부족 구조도 점차 더 대두되었다. 새로운 '민주적' 마을들과 마을들로 이뤄진 자치 연맹들은 준영구적인 민병대를 만들게 되었고,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젊은 남성이 주도하는 전통적 의식이 부활하여 방어와 적에 대한 습격과 관련된 군사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 출신의 참피온 전사라는 새로운 구분이 생겼는데, 이들은 명성에 따라 당시 많은 마을들에서 용병으로 일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 유명 이슬람 설교사들이 나타났다.

 

 새로운 화약 기술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정통 마르크스 이론에서 주장하는 일방향 사회진화 설명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형상이었다. '산악지대 봉건주의'가 절대 왕정으로 이행하고 다시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신에, 북 코카서스 사람들의 사회조직은 18세기에 다시 원시시대의 부족 형태로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고자 소비에트 역사학자들은 여러가지 설명을 내놓았다. 소련 시대의 코카서스 인류학 이론을 보면,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후진적' 민족들의 경우 원시적인 특성을 더 잘 나타낼 수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북 코카서스 민족들, 특히 체첸인들에게서 부족 조직화 경향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긴 했지만, 이들의 그리 멀지 않은 조상들은 적극적으로 산아래 지역을 경영하고 그 과정에서 귀족 지배를 타파한 바가 있다. 어쨌든 이런 부족들을 고대의 것이라거나 '전통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중략) ...

 

 뒤늦은 이슬람화의 지정학, 사회적 패턴

 

 18세기의 평민 사회 혁명과 더불어 기존의 다양한 토착 신앙 및 혼합 신앙들이 과격한 이슬람 신앙으로 대체되었다. 농민 민주화와 그 직후의 러시아 정복에의 저항, 그리고 북 코카서스에 최근 적용된 수피 이슬람 신비주의와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이전의 북 코카서스에는 이슬람이 존재했던 흔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예외로는 다게스탄의 카스피해 해안 지역에 있던 몇몇 마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과거 아랍 칼리프국 시절에 주요 이슬람 중심지들의 위성 마을로서 생겼었다가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왔던 것들이었다. 이 지역 지도를 잠깐만 살펴보면 이러한 이유가 명백해지는데, 지정학적으로 다게스탄 해안지대는 대초원의 유목민 지역과 남쪽의 중동지역간의 유일한 좁은 통로였다. 이곳을 제외한 내부 산악지대에는 지역적 토착 신앙(pagan belief)이 거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

 

 잉구세티아와 오세티아의 산지에는 중세 비잔틴과 그루지아 왕국의 선교 노력에 따라 일부 기독교적 유산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성직자나 제대로 작동하는 교회가 없었다. 그 결과 1770년대 이래로 오세티아인들은 다시 기독교화 되게 된다. 이 이유는 이들이 우연히 새로운 식민 마을이자 블라디카프카스(Vladikavkaz) 근처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계곡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오세티아인들이 같은 종교를 갖게되었다는 끈 때문에 러시아 당국은 오세티아인들을 특별대우하게 된다.

 

 그 옆에 사는 잉구시인들은 오세티아인들과 그 입장이 그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이들의 문화적-언어적 특성이 반골 기질의 체첸인들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들의 충성심은 의심받았다. 잉구시인들은 점점 러시아 당국 및 오세티아인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게 되었고, 결국 19세기 중반에서 후반 무렵에는 어쩔 수 없이 과격 이슬람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1992년, 오세티아인들과 잉구시인들 사이에는 격렬한 영토 분쟁이 벌어졌으며, 여기에는 지저분한 종교적, 인종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종교 개종에 관련된 지정학적 요소는 이제 무역과 외교, 군사동맹 및 적대관계의 네트워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귀족주의 전통의 카바르딘족과 기타 키르카시안 민족들의 지역에서는 표면적인 이슬람과 희박한 개별 기독교 특성, 그리고 토착 신앙의 유물들이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곳은 전쟁을 벌이던 세력가들이 정치적 기회주의에 따라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러시아 등등 여러 쪽에 붙었다 떨어지느냐를 반복하면서 종교의 선택도 이리 바뀌었다 저리 바뀌었다 했던 지역이다.

 

 압하즈인의 대다수는 오늘날까지도 사실 토착신앙을 믿고 있다. 이들은 성스러운 나무와 선조들의 무덤을 숭배하며, 이는 본인이 2002년에도 직접 목도한 사실이다. 이러한 토착신앙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압하지야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과 불과 배로 수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이곳에서는 비잔틴 시기 수 세기 동안 표면적으로 기독교화가 진행되고, 이어진 투르크인들의 지배 기간에 명목상으로는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음에도 토착신앙이 꾸준히 유지되었다. 압하지아에 토착신앙이 유지된 것에 대한 2가지 원인으로는 이곳의 가난함과 지정학적 문제를 들고 있다. 압하지아가 레몬 수출과 준 열대의 해안 휴양지로 인하여 부유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다. (이것들은 1992년-93년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전의 압하지아는 항구가 발달하지 못하는 해안과 말라리아가 득실거리는 늪으로 인하여 외부와 단절된 지역에 불과했다. 산쪽에는 가시덤불 숲이 있었고, 그 뒤로는 통행이 불가능한 빙하지대가 능선을 덮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토착민들은 자신들 스스로 겨우 먹고 살 정도만을 생산할 수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들이 무역 식민지를 만든 이래 1830년대 러시아 해군이 해상 봉쇄를 실시할 때까지, 이곳의 주요 수출품은 노예였다. 고작 노예 사냥이나 할 수 있는 이런 땅은 대제국들이 차지하려고 다툴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18세기의 사회 변화와 그 뒤에 이어진 약 50여년간의 러시아 제국에 대항한 게릴라전으로 인하여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 심각한 격변이 몰아친다. 오늘날 이 지역의 다양한 이슬람화 수준은 대체로 약 2세기 전의 사회 투쟁의 결과물로 연관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북 코카서스의 정치 구성을 과거 농민들이 자유를 얻은 지역과 지주들이 승리한 지역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결과 자체 역시도 거꾸로 지정학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이슬람 종교화가 가장 심한 지역은 누가 뭐라고 해도 체첸지역(이곳에서도 산악지역에서 더 심하고,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저지대는 좀 덜하다)과 다게스탄의 산악 지대이다. 잉구세티아에서는 좀 덜한 편이고, 카바르디노-발카리아 지역과 카라차이-키르카시아 지역에서는 훨씬 낮다. 오늘날의 아디게아(Adygheia) 지역에서는 이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카바르디노-발카리아로부터 아디게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러시아 지배가 빨리 진행되거나 토착 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대중의 이슬람화 과정이 억제되었었다.

 

 18세기 경, 평민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개종이 열풍을 일으켰고, 이는 다게스탄에서 체첸지역, 그리고 보다 서쪽 지역까지 널리 퍼져나갔다. 최초 근원지는 다게스탄의 수피 신학교였다. 직설적으로, 이러한 종교 센터들은 전통적으로 부유한 무슬림 상인들이나 지주, 공식 모스크에 근거하는 정통 사제들이 존재하는 해안 구 촌락들이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피즘 자체는 이슬람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이단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가장 활발하게 수피즘의 가르침을 전파했던 그룹은 다게스탄의 산악지대에서 준 도시화된 민주 마을들에서 나타났다. 지중해의 도시국가들에서 예술, 공공건축, 철학 등등의 상징적 경쟁이 벌어졌던 것과 유사하게, 다게스탄의 대형 마을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종교 교사들을 초빙하거나 자체 코란 학자들을 양성하는 경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개종 열풍은 수피즘 교사들 및 사도들 사이에서 느슨하게 결성된 종교 형제단 네트워크를 따라 확산되었다. 수많은 편력 수피 신비주의자들이 돌아다니면서 평등과 도덕적 질서, 자제, 자선, 상호 부조, 같은 신앙을 믿는 다른 인종간의 연대 등의 미덕들을 설교하였다. 이들은 도덕적 부패, 원한, 탐욕, 이기심, 귀족들의 거만함을 비난하였다. 수피 설교사들 중에서 가장 과격한 사람들의 경우 이교도 세력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의 초기 침입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오늘날이나 19세기 당시에나 많은 러시아인들은 북 코카서스의 무슬림들이 터키 특수요원이나 사우디에서 지원하는 테러리스트들에 사주되어 종교적 저항을 펼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음모이론들과 마찬가지로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18세기 말에 이르렀을 무렵, 이미 지쳐있고 포위 당한 상태에 놓여있던 터키로서는 코카서스 산악지대에 그와 같이 대규모 운동이 벌어지도록 유도할 만큼 군사적, 재정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투사할 여건이 못되었다. 다게스탄과 체첸 저항군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터키 사절단이 오더라도 이들을 대하면서 조롱과 멸시를 숨기지 않았다.

 

... (중략) ...

 

가자왓(Ghazawat), 농민들의 성전

 

 19세기경 북 코카서스는 다른 변경지대들과 같은 방법으로 현대 세계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었다 : 유럽 군사력에 정복된 것이다. 이 과정은 대단히 길고 유혈 속의 과정이었는데, 이는 코카서스 고원지대 사람들의 기술적, 지리적, 사회 조직적 특성이 이들이 대단히 강력한 무장 저항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항운동은 상비군을 가지는 중앙집권화된 이슬람국가의 창설로 절정을 이루게 되며, 이는 러시아 제국에 격파되어 흡수될 때까지 25년간 지속된다.

 

 역사학자들은 코카서스 전쟁(Caucasus war)의 시작 시점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고 있다. 1740년대 이래로 러시아 변경 수비대 병력들은 일종의 식민지 간접 통치자 역할을 하는 카바르딘과 다게스탄의 귀족들을 위하여, 이들에 대항하여 종종 벌어진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북 코카서스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계급 투쟁에서 한쪽을 지지한 셈이 된다.

 

 러시아의 행동은 1770년대 이후에 보다 단호해지는데, 크리미아 타타르 칸국을 없애고 흑해 북쪽 해안의 비옥한 토지들을 병합하였다. 지정학적으로 남쪽 바다로 진출하려고 한 것과, 제국의 영광을 보이겠다는 고려등이 있었다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러시아의 절대 왕정은 이 정복을 통해 얻을 경제적, 계급적 이득이 있었다. 2세대 이전인 표트르 대제(tsar Peter the Great)의 개혁을 통하여, 러시아는 당시 서구 절대 왕정들과 군사력 및 세금 관리 측면에서 엇비슷해졌다. 이제 예카테리나 대제(Catherine the Great)의 '황금기' 동안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표트르 대제 개혁의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 즉, 우크라이나 남쪽의 광대한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였고, 러시아는 새롭게 유럽화된 늘어난 귀족들에게 풍부한 보상을 해 주었다. 예카테리나 시기의 토지 분배와 이곳에 대한 중앙 지역 출신 농노들의 정착은 아마도 봉건 식민지화(feudal colonization) 과정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벌어질 일은 최근 터키계 및 몽골계 유목민들을 해치우고 획득한 북 코카서스 초원지역에 대한 봉건 식민지화가 될 것이었고, 그 다음은 페르시아와 부유한 인도가 될 것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서구와 동등한 위엄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1815년 나폴레옹의 최종 패배 이후, 러시아 군대는 코카서스 지역에 재배치되어 페르시아와 터키인들에 대하여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제국의 진격은 뜻밖에도 산악 민족들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된다. 상 페테르부르크 당국에서는 이것들을 단지 작은 소사건들로 치부했으며, 군사력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평화와 질서가 가져오는 이익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항하는 무지한 야만인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가 코카서스 전쟁에 말려들고 붙잡혀있게 된 데에는 그 외에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이유도 있다: 서구 유럽이 점차 폭압적 왕정을 혐오하는 데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러시아는 무식한 원주민들에게 계몽과 진보를 가져다 주고 있다는 선전을 펼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상 페테르부르크의 전략가들이 코카서스 고원지대 사람들의 결의와 군사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러시아 제국으로서는 단지 먼 변경지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소한 징벌 작전에 불과하던 것이, 예기치않게도 대단히 비용이 많이 들고 격렬한 정복전쟁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1818년 이후, 러시아의 코카서스 총독이었던 예르몰로프 장군(General Yermolov)는 산악민족들을 조직적으로 압살하고 굶겨죽이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현대 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대반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르몰로프는 일련의 요새선을 건설하였고, 이들 중의 하나는 오늘날 체첸의 수도인 그로즈니 (Grozny)(공포의 요새(Fort Terrifing)라는 의미를 갖는다)가 된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산악민족들은 산아래에 있는 들판과 겨울 목초지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다. 체첸과 키르카시아 내부로 향하는 길을 내기 위하여 숲이 잘려져 나갔으며, 이곳에 있는 반군 마을들과 이곳의 작물들은 국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불살라졌으며, '도적'들은 공개 처형되었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 장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쟁영웅이었으며, 코카서스에서는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된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코카서스 사람들 사이에서는 피에 굶주린 제국주의적 악마로 묘사된다. [3])

 

 예르몰로프의 야만적인 '평정'은 단기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당시 유럽 성직자들이나 러시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를 아시아 민족들을 계몽하기 위한 회초리로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며 오히려 이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전략은 산악민족들로 하여금 러시아인들이 윤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공공의 위협임을 확인시키고 저항을 강화하고 통합시키게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군사적 통합과 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램들은 지난 세대에서 이슬람을 전파했던 수피 신비주의자 네트워크를 통해 제공되었다. 이게 어불성설인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민주적 전사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설교자들 역시 코란 만큼이나 총과 세이버에 능란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란은 1780년대에서 1820년대 사이에 들불처럼 일어났고, 1830년대에는 드디어 대규모 농민전쟁이 다게스탄과 체첸의 산악지대에서 발발하게 된다. 코카서스 서쪽 지방의 민주적 키르카시안 부족들의 영토에서도 비슷한 반란이 확산되었다. 이 운동을 가자왓(ghazawat)- 일종의 이슬람 성전(지하드)으로 부르며, 이슬람 전사(ghazi)에 의한 이교도 영토에 대한 습격을 승인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엥겔스가 봉건 생산 체계 단계에서 최고 수준의 계급 투쟁이라고 묘사한 '농민 전쟁'의 개념은, 오늘날의 많은 유럽 수정주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데, 이는 농민들 스스로는 조직이나 계급의식, 군사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탓으로, 상층 계급 내에서의 자체 분쟁으로 인하여 성직자나 실업상태의 용병과 같은 자들이 농민들의 지도자 역할을 해 주지 않는 한, 지주들을 뒤엎기 위하여 독자적으로는 단 한번도 봉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북 코카서스에서는 이러한 엘리트 계급이 없이도 봉기에 필요한 조직과 이데올로기, 군수측면의 요소들이 모두 갖춰졌기 때문에 가자왓 전쟁을 순수하게 농민전쟁으로 불러도 무관하다 할 수 있겠다.

 

 일반 역사에서는 코카서스 전쟁을 단순하게 러시아 제국과 산악민족 반란군과의 대결로 도식화시킨다. 이 일반화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데올로기적 성향에 따라 편가름하게 된다. 1834년 다게스탄의 설교사(preacher)인 샤밀(Shamil)이 이맘(imam)(신앙있는 자들의 지도자)으로 선포되던 당시, 반란측은 거의 진 것처럼 보였다. 이맘 샤밀은 모든 측면에서 대단히 유능하고 매우 카리스마적인 대중 지도자였다. 그는 몇 차례의 결정적인 승리들을 거둠으로써 산악민족들에게 카리스마를 증명하고 러시아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저항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가장 정점을 이룬 1840년 경에는 다게스탄과 체첸 산악지역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샤밀은 기존에 거의 무정부적 균형 속에서 유지되고 있던 수백개의 소규모 정치 집단들을 휘하의 군사-신학 정권하에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맘 샤밀. 북 코카서스의 중요한 정치-종교지도자로서 코카서스 전쟁을 통하여 러시아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였으며, 코카서스 이맘국의 이맘이 된다. [4])

 

 그러나 이러한 봉기는 초기 지역만으로 한정되게 되는데, 이는 샤밀의 원정대가 카바르딘 영토를 건너 북 코카서스 서쪽에서 활동하던 키르카시안 반란군과 연계하는 데에 실패하였기 때문이었다. 카바르딘 지방의 서쪽에는 또다시 산악 지형이 위치하여 러시아 군사 지배에 대한 강력한 장애물이 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키르카시아 부족들은 한세기를 더 독립상태로 있을 수가 있었다. 샤밀은 군대 전체는 아니지만 소규모 사절단은 서부 코카서스에 보낼 수가 있었다. 이들은 키르카시아 반란군들을 조직화하였고, 어느 정도는 다게스탄과 체첸의 이맘국(imamate state)이 벌이는 전쟁과 공동 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박약한 연계로서만 유지되었으며, 이는 북 코카서스의 양쪽 지역 사이에 기독교계인 오세티아인들의 땅과, 무슬림이긴 하지만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일반적으로 러시아에 복종하는 카바르딘인들의 땅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바르딘인들이 러시아 침략에 대한 저항에 불참하였는지 여부는 오늘날 학자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떤 사람의 특성 여부에 달려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강력한 구조적인 원인으로 볼 필요가 있다.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 야망이 많아 위험하다며 니콜라스 1세에 의해 장기 은퇴상태에 있던 예르몰로프 장군은, 지속적으로 코카서스 전역에 대하여 진언을 올렸으며 또한 샤밀이 실패할 것임을 정확히 진단하였는데: "만약 카바르딘인들이 감히 반역을 꾀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진압하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저지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는 풍부한 가축들 자체가 이미 인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카바르디인들은 자신들의 부유함과 특권 자체로 인하여 인질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코카서스 산 아래 지역의 최고의 토지를 소유하는 이득을 누려왔지만 이로 인하여 러시아의 군사적 압력에 취약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제국의 지배는 전 코카서스에 확립되었다 : 제국 당국은 숲과 고산지대의 '야만적'인 인구들과는 달리, 계곡과 산아래 지역의 보다 '문명화된' 인구들로부터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저항을 했다가는 도망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 역시 저항과 협조의 차이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종종 남용되는 '문화적 요소'라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에 담겨진 계급적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중략) ...

 

 이슬람은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유태교와 기독교와는 달리, 최초 이슬람이 일어난 곳은 아랍의 분열된 부족들이 살고 있는 변경지대였다. 이곳의 사회구조는 19세기 초반의 북 코카서스 지역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경전 (즉 코란(al-Quran))과 예언자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들 (하디타(haditha)), 초기 아랍 칼리프들의 이야기, 이슬람의 신학 법률(샤리아(sharia))들을 종합하면 이맘 샤밀이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군사적 승리들과 스스로의 경건한 신앙심이 유명해지면서 샤밀은 권위를 얻게 된 한편, 의식화된 수피 교사-사도들의 범 민족적 네트워크에서는 독립적인 부족이나 마을들의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국가인 샤밀 이맘국(imamate)은 러시아 제국 지배에 대항한 대중 반란을 통해 얻은 성과들을 종교적으로 승인된 형식으로 제도화하였다. 이 이맘국에서는 마을 장로들과 성직자, 저명한 전사들을 정기적으로 소집하여 회의를 통해 중앙 정부를 선출하였다; 이 정부에서는 외교를 실시하고, 지역 관리자들과 판사들을 임명했다; 또한 샤리아 법에 근거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중앙 비축용 곡물을 준비했다; 전략 도로와 교량, 요새들을 만드었으며 무기 산업을 발전시키고 자체 화포 주조를 시도했다. 러시아인과 터키인들을 흉내내어 이들 북 코카서스 이맘국에서는 훈장도 수여했다. 이 이맘국의 권력을 지태아는 핵심에는 신앙심 깊은 전사들로 구성된 엘리트 상비군이 있었다. 이들은 무르타젝(murtazeks)이라고 불렸으며 마을 민병대를 조직하고 이들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맘 샤밀의 성취들로 인하여 서구에서는 그에 대한 경외심이 널리 확산되었다. 러시아 지휘관들 조차도 자신들의 적에게 경의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 마르크스는 샤밀을 '자발적 민주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엥겔스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열성적으로 코카서스 뉴스들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이러한 성취들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또한 지나치게 로맨틱화된 측면도 있었다. 샤밀의 노력은 국가 창건자가 흔히 겪게되는 딜레마들과 성공적인 혁명가가 특히 겪게되는 문제들에 부딪히게 된다: 전쟁 기간동안 대중의 열정과 규율 사이를 잘 조율하는 한편으로 중앙 집권과 자원 수집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1840년대 중반 이래로, 샤밀은 휘하 지방 책임자들의 분열주의 및 부패와 함께 군사 지휘관들의 불복종에 마주치게 된다. 이맘국의 전쟁 양상이 전문직업화됨에 따라, 작전 통제가 중급 지휘관들 손으로 넘어갔으며, 이들은 일상적인 마을 방어나 대규모 협동 작전보다는 보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 러시아 지배지역으로의 습격을 보다 선호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세금과 노동, 끝없는 러시아의 보복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투들로 인한 인명 희생으로 점점 환멸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맘국의 군대는 매복전과 반격전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으로 러시아 침략자들을 괴롭혔지만, 이들이 징벌 원정을 벌이면서 일으키는 파괴 행위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게다가 샤밀의 이슬람에 대한 열성적이고도 군사적인 해석은 또다른 불만을 낳게 되었는데, 다른 종류의 보다 인내심을 요구하는 종류의 수피즘이 1850년대에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850년대 말에 이르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와의 싸움이었던 크림 전쟁에서 돌아온 러시아군은 신속하게 증강 및 재무장되었고, 북 코카서스에서 강력한 공세를 펼치게 된다. 놀랍게도 1859년, 샤밀은 가까운 가신들과 함께 항복한다. 이맘국은 그 급작스런 붕괴가 있기 전에 이미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 붙잡힌 샤밀은 놀랍게도 대단히 너그러운 대접을 받았다. 그는 상 페테르부르크로 불려가 차르와 만났으며, 차르는 그에게 너그러운 연금을 제공함은 물론 나중에는 샤밀이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것도 허용한다. 샤밀은 메카에서 평화롭게 사망한다. 이맘국의 상당수 관리들은 샤밀이 항복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항복하였고, 기존과 대등한 직책을 수여받은 채 러시아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특히 마을 관리는 대체로 동일한 관리들과 지역 원로들의 손에 남겨졌다. 토착 귀족들은 다게스탄과 체첸의 산악지역에서는 더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는 지난 반란의 세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귀족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맘국의 국가 건설 과정의 유산이야말로 러시아 당국이 마침내 북 코카서스에 가장 골치아픈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실현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자왓을 끈질기게 이어가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특히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 많았으며, 이들은 최후까지 전투로서 저항하면서 죽거나 아니면 오스만 제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다. 패배의 여파 속에서 많은 산악 마을들이 조직적으로 소각당했고 이곳의 주민들은 강제로 가까운 식민 마을로 이주되었다. 반란의 분쇄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절망감과 종말론적 패닉 현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흑해를 건너 오스만 영토로 탈출하려는 혼돈의 대탈주가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전염병과 난파, 기아, 그리고 심각한 심리적 고통으로 인하여 수 많은 생명이 손실되었다. 이러한 인구상의 대이변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수치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 지역에서 인구의 1/3에서 1/2가량을 상실한 것은 확실해 보이며, 어떤 지역에서는 러시아인들이 좋아하게도 토착민들이 모두 사라진 곳도 있었다. 1860년대의 코카서스 피난민들을 무하지르(muhajeers)라고 부르며, 이들은 터키, 시리아, 요르단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된다.


역사적 기억에 관한 정치

 

 코카서스의 샤밀에 관한 대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지난 한세기 반동안의 정치적 변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 비망록 작가들과 군사 사가들은 샤밀을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으로 묘사하였으며, 그가 궁극적으로 투항한 것이야말로 야생의 성격과 미신을 유럽의 질서와 진보 앞에 길들인 것의 상징인 것으로 보았다. 볼셰비키 혁명이 있은 뒤에도 샤밀은 잠시 동안 근대 이전 시대의 혁명 영웅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나 캄파넬라, 푸카초프와는 달리 이 이맘은 아직 역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라서, 1920년대에는 그의 이슬람 사도들이 종종 적극적으로 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숙청 기간 동안, 샤밀은 터키와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서 격하되었고, 종교적 반동분자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 말에야 그는 부분적으로 복권된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북 코카서스의 소련 자치공화국들 내에서 새로운 국가 인텔리겐치야의 성숙과 인종-관료적 네트워크가 형성됨과 더불어 일종의 민족주의의 원형(proto-nationalism)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지역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민족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샤밀을 내세우고자 노력하기 시작한다. 다게스탄인들에게 있어서 샤밀은 명백하게 가장 거대한 영웅이었다. 매우 다른 내부 권력 균형 조건 속에서, 체첸 학자들은 지역 러시아 관리들의 심한 질책과 학문적 검열을 마주쳐야 했는데, 이는 샤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민족간의 우의를 저해하는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세티아 학자들은 역사적 목적성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면서 샤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며 '균형'을 추구하는 한편 자신들의 조상들이 러시아인들과 동맹을 맺은 것을 애국주의의 발로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현명함이라고 추켜세웠다. 카바르딘과 키르카신 학자들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며, 자신들의 영웅적인 왕공들의 삶에 집중하는 편을 선호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이후로, 샤밀은 지역 전역에 걸쳐 범 국가적인 영웅으로 격상되었는데, 여기에는 무사 샤니보프(Musa Shanibov)가 미친 영향이 컸다. 코카서스 전쟁에 대한 기억,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선택적인 기억 속에서 국수주의적 전설의 지역화 버전이 탄생하였고, 이는 이러한 전설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조상들의 영웅주의와 외세의 손에서의 희생 등을 다루고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산지사람들과 이를 정복하려는 제국이라는 2분법적 이미지가 지난 1989-91년간의 정치적 위기 기간동안 지역내 과격 정치 강연 속에서 만연했다. 이러한 버전의 역사적 기억은 사실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걸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대단히 심각한 정치적 투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빈틈들이 수없이 드러나 있다. 샤니보프 스스로도 한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한 바 있다.

 

(무사 샤니보프. 코카서스 민족 연합(CPC) 회장이면서 카바디노 민족 의회 의장이다. 1935년 카바디노-발카르 자치공화국(ASSR; 소련의 자치공화국)에서 태어났다. 1992년 9월 당시 인종간 갈등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체포된 적이 있다. [5])

 

... (후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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