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글로벌시큐리티 - Second Chechnya War - 1999-2006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2.htm) >
< 사진 및 역주 출처 :
[1] Aslan Mashkhadov (http://en.wikipedia.org/wiki/Aslan_Maskhadov)
[2] Shamil Basayev (http://en.wikipedia.org/wiki/Shamil_Basayev)
[3] Gennady Shpigun (http://en.wikipedia.org/wiki/Gennady_Shpigun)
[4] (http://en.wikipedia.org/wiki/File:Baku_pipelines.svg)
[5] Russian apartment bombings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apartment_bombings) >
제 2차 체첸전쟁, 1999-2006 (Second Chechnya War - 1999-2006)
개요
러시아인들이 1999년 10월 체첸을 침공하였을 때,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체첸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산적들을 제압하는 데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번 체첸 전쟁 2기에 있어서의 러시아인들의 목적이 3년 전에 치욕적으로 당한 패배를 앙갚음하려는 것임이 명확해졌다. 러시아 당국자들은 체첸에서의 전쟁을 테러리즘에 대한 십자군으로 표현하였으며, 최종 목표는 체첸의 러시아 연방으로부터의 탈퇴 저지임을 시사하였다. 지난 1994-1996년간의 체첸 지역에서의 내전 이래로 전투는 가장 격심하였다.
체첸에서의 1차 전쟁이 벌어진 이후의 일들이 1999년 러시아인들의 침공이 벌어진 배경이 된다. 1996년 8월 하사뷰르트 협정(Khasavyurt accord)이 조인되고, 1996년 12월 러시아군이 체첸 영내에서 퇴각한 이후인 1997년 2월, 체첸 주민들은 아슬란 마스하도프(Aslan Mashkhadov)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체첸측에서는 하사뷰르트 협정의 조건을 위반하였다. 범죄와 테러리즘, 국가적/민족적 적대감의 유포에 대하여 체첸 지도부가 싸우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1996년 이래로 체첸 지역의 민족-정치적, 인권적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 직후 악수하는 옐친과 아슬란 마스하도프 [1])
예브게니 프리마코프(Yevgeny Primakov)와 세르게이 스테파신(Sergei Stepahin)은 이 시기의 러시아 총리들이었다. 이들의 전략은 체첸 대통령인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협력하는 데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온건 성향에다가 전직 소련 육군 장교였다. 알렉산드르 레베드 장군(General Aleksandr Lebed)의 주도로 러시아인들이 체첸에서 철수하는 한편 체첸인들의 자주적 결심과 관련된 시간표 설정에 동의하였을 때, 이들은 대규모 원조 또한 약속했다. 1994-96년 기간의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을 보수하는 용도로 약속되었던 원조는 실제로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체첸의 상황을 개선시키기(to moderate)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체첸 지역에는 다소 과격한 자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극단주의 범죄자 갱 그룹들이 지배하는 지역이 점차 늘어났고, 다게스탄의 반란군들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1996년 러시아군이 체첸에서 철군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납치의 물결이 코카서스 지역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무법지대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던 범죄 갱단들의 소행으로 비춰졌다. 러시아 내무부 통계에 따르면,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체첸 지역에서 1300여명의 사람들이 납치되었다고 한다. 상당수 인질들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러시아군 부대에서 징집병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도 보리스 옐친 대통령(President Boris Yeltsin)의 체첸 특사도 납치된 바가 있다. 그는 1998년에 풀려났다. 또한 특히 짭짤한 목표로 지목되었던 러시아 TV 언론인들과 60여명의 외국인들 역시 납치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1999년 3월에는 체첸에 대한 러시아 최고위 특사이자 러시아 내무부 장관이었던 겐나디 슈피군 장군(General Gennady Shpigun)이 체첸 수도 그로즈니 공항에서 납치되었다. 그 대응으로 내무부에서는 체첸 국경 지역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였고, 인질이 풀려나지 않을 경우 무력 대응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그는 2000년 경에 처형당한다). 동월, 북 코카서스 지역의 도시인 블라디카프카스 시(city of Vladikavkaz)의 공공 시장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하여 60명이 사망한다. 블라디카프카스는 북오세티야 (North Ossetia) 지역의 수도이자, 체첸 국경에서 30마일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
(겐나디 슈피군 장군의 묘지. 모스크바의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묘지에 위치하고 있다[3])
1999년 당시의 반군 주요 지도자는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였다. 그가 이끌던 반 러시아 군사 그룹의 명칭은 리야두스 살리힌(Riyadus Salihin)이었다. 나중에 그의 후계자로 도쿠 우마로프(Doku Umarov)가 등장하며, 그는 2000년대의 코카서스 지역을 이슬람 폭란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 외에도 이븐 알-하탑(Ibn Al-Khattab)라는 이름의 무슬림 지도자도 있었다. 그는 다게스탄에서 와하비 이슬람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들은 체첸 반군들을 지원하였다.
(1995년 12월, 1차 체첸전쟁 당시 촬영된 샤밀 바사예프의 모습[2])
초기 사망자 수는 수천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 중에는 민간인 희생자도 수천명 단위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999년 10월부터 11월까지의 공세기간 동안, 러시아군은 187명의 희생자를 내며 적어도 4000명의 반군을 사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체첸 관리들은 이 숫자에 의의를 제기하는데, 반군 전사들은 최소한의 희생 속에서 수천명의 러시아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실제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민간인들이며, 거의 5000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다고 하고 있다. 이들 숫자들 중에서 제 3자에 의해 확인된 것은 없다. 양측 모두 상대방의 피해는 과장하는 반면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하는 경향이 보인다. 2000년 초, 러시아측은 1999년 8월 이후 자국군 1100명 이상이 전사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병사 어머니회(Russian Soldiers' Mothers Committee)의 주장에 따르면, 3000명의 전사자와 6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하고 있다. 체첸 전사상자에 대한 추정치는 훨씬 크고 훨씬 불확실하다. 러시아 국방부 관리의 주장에 따르면, 최소한 10000명의 반군이 사망하였다. 체첸측 자료에는 그 숫자가 반 이하로 줄어드는 대신, 민간인 사상자의 숫자가 훨씬 큰 것으로 나온다. 피난민 숫자는 적어도 23만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일부의 경우 러시아 당국이 체첸-잉구세티아 국경을 폐쇄함에 따라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양측 모두 전투에 쓰기 위하여 화학무기 혹은 독소무기(chemical or toxic agents)를 준비하였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다. 체첸 의원들(Chechen parliamentarians)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그로즈니의 2개 지구에 대하여 1999년 12월 초 화학공격을 감행하였다는 정보를 갖고있다고 한다. 다만 이 보고에 대한 제 3자의 확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들은 러시아군이 그로즈니 외곽에 있는 핵폐기물 저장고를 파괴할 지 모른다고 걱정한다고 하였다. 러시아 군 당국자에 따르면 1999년 12월 10일, 그로즈니 외곽의 한 마을에서 체첸 전투원들이 독소무기가 든 깡통(canisters of toxic agents)을 폭발시켰다고 하였다.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장군(General Alexander Baranov)에 따르면, 그 깡통 내에는 염소 및 암모니아 가스가 들어있던 것으로 보이며, 폭발로 인해 독가스 구름이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러시아 군부가 체첸에서 나오는 정보에 대하여 거의 독점적으로 통제하였기 때문에 이 주장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1999년 12월 초, 모스크바 주재 방위분석가 파벨 펠간하우어(Pavel Felganhauer)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그로즈니에 투발한 폭발물 중에는 "참호와 벙커에 침투하고 민간인을 포함한 내부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소위 에어로졸 폭탄, 혹은 진공 폭탄으로 불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보고는 널리 퍼지긴 하였지만, 이 언급은 기화폭탄(fuel-air explosive)의 효과를 잘못 이해하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화폭탄의 경우 1999년 12월 6일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첸 지역에서 또다시 전면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 서방 정부들은 이 엉망진창 공화국 내의 반군들에 대한 러시아 전술에 관하여 우려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들 외부 세력들은 불만을 제기하는 이상으로 분쟁에 간섭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거꾸로 이러한 비난으로 인하여 이익을 얻었다. 즉, 러시아 지도자들이 아무 손해 없이 서방 측에 대항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준 셈이기 때문이었다. 일부 관찰자들은 전쟁 과정을 1999년 8월 초의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총리의 임명과 연관짓기도 한다. 러시아에서는 전쟁이 2000년 중반에 벌어질 대통령 선거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옐친의 지지율이 거의 2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푸틴이 다른 방법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대중들은 체첸 문제가 해결되기를 정말로 고대하였으며, 이 침공은 모스크바의 거의 모든 정파들의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전 러시아 재무장관인 미하일 자도르노프(Mikhail Zadornov)의 추산에 따르면, 체첸 공세로 월 1억 1500만 달러에서 1억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인권 그룹에서는 반복적으로 러시아군이 야만적 전술을 펼쳤다고 비난하였고, 전쟁 기간동안 외국 전사들이 유입되었다는 징후도 보이고 있었다. 크레믈린 당국은 주요 방송 미디어들을 엄히 통제함으로써, 거의 매일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함에도 대중들의 시선을 대체로 딴 곳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체첸 분리주의 지도자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협상 가능성을 배제하다. 강경주의자들이 계속 러시아와 싸울 것이기 때문에, 아마 온건 체첸 분리주의자들과 대화 시도를 했더라도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모스크바 측의 관점으로 보자면, 카스피해 석유의 경유지이자 중동 및 중앙아시아로의 러시아 영향력의 발판이 되는 코카서스를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남아있음으로써 이란이나 터키와 같은 다른 세력들이 코카서스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었다. 체첸에서의 러시아 정책은 코카서스 전역의 다른 민족들을 붙잡아두고 러시아 영향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보다 넓은 러시아 정책의 일환이라고 봐야 한다. 러시아는 체첸 재정복을 통하여 또한 미국에게 러시아가 코카서스에서 후퇴하기를 멈췄으며,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 계획을 분쇄하겠다는 뜻을 펼친 셈이 된다.
역사적으로, 카스피해 지역의 에너지는 북쪽으로만 이동했으며, 러시아를 거쳐서만 세계 시장으로 운반되었다. 1995년, 국제 회사들의 컨소시엄이 아제르바이잔에서 시작하는 2개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루지아 숩사(Supsa, Georgia)로 향하는 서쪽 파이프라인은 1999년 4월에 개통되었다. 흑해의 러시아령 항구인 노보로시스크(Novorossisk)로 향하는 파이프라인도 개통되었으나, 체첸에서의 사태들로 말미암아 다시 차단되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에너지 회사들과 국가들은 다수의 파이프라인 시스템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99년 11월,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터키, 미국은 긴 협상 끝에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판매하기 위한 상업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파이프라인은 또한 카스피해의 석유를 러시아나 이란을 거치지 않고 지중해로 보내는 통로가 될 수도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막대한 석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터키 방향으로의 수출 통로가 갖는 목적은 이 구소련 공화국이 모스크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에 있었다. 이 협상은 중앙아시아에 대하여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갖고 있던 이권에 대한 장기전략적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제 2차 체첸 전쟁은 바쿠로부터 터키로 향하는 대체 파이프라인을 짓는 데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큰 구실이 되었는데, 이는 반면에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코카서스 지역을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두려고 하는 미국이 체첸으로 인해 이익을 얻고 있다는 가정을 확신시켜주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출발하는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들. [4])
체첸 지역에서 러시아 주요 군사 작전이 2002년에 종결되었을 당시 전쟁은 끝났다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재발하여 2002년에서 2006년간의 전환기를 맞았고, 이 기간 동안 군사집단들은 자신들의 구조 및 지도부를 재구축하였다. 러시아군에 의하여 이전 지도부들이 계속 살해당함에 따라, 지도부는 더욱 과격하고 더욱 광신적인 자들로 바뀌어갔다. 군사그룹들의 생각은 당초의 독립 체첸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에서, 코카서스 공화국들 전체를 아우르는 자치적 이슬람 지역을를 만들기 위한 저항노선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작전 범위는 더 이상 체첸에 한정되지 않으며, 다게스탄과 잉구세티아 역시도 이들 군사그룹들이 활동하는 범위 내에 속해있다.
다게스탄 침공, 1999년 8월-9월(Dagestan Incursions - August-September 1999)
1999년 8월에서 9월 사이, 체첸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며, 체첸 정부와는 별개인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2회에 걸쳐 이웃 러시아 연방 공화국인 다게스탄 공화국에 무장 침공을 감행하였다. 침공한 병력 숫자는 수백명에 달하며, 다게스탄에 독립 이슬람 국가를 건국하고자 하였다.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반군에 무장을 공급하는 한편, 친히 다게스탄에 방문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반군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는 1994-1996년간의 체첸 전쟁 당시 두드러진 야전 지휘관이었다. 고향사람들 사이에서 바사예프는 대 영웅 - 로빈 후드와 조지 워싱턴의 조합 쯤인 - 으로 취급받았다. 바사예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5년 6월로, 당시 그와 소수의 체첸 전투원들은 부데노브스크 시영 병원(Budennovsk city hospital) 내에 약 1500명의 러시아 민간인들을 인질로 잡아두었었다. 러시아군이 체첸 저항군을 격파 직전까지 몰고간 것이 적어도 여러 차례였지만, 바사예프는 끝내 체첸인들의 저항의지를 강화시키고 러시아인들의 아픈 곳을 파고들었다.
샤밀 바사예프는 1997년 11월 체첸 총리로 임명되었다. 바사예프의 임명식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 날짜가 과거 다게스탄과 체첸의 3대 이맘이자 지난 세기의 민족 운동 지도자이며, 코카서스의 많은 민족들에게 대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동명의 위인의 제 200주기 기념일의 전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사예프는 이후 정부 행정부를 감축하고 몇몇 부들을 철폐하였다. 그러나 세수는 감소하고 체첸 국영 은행의 잔고는 축소되었으며, 석유 산물에 대한 도둑질은 심각하게 증가하였다. 1998년 초에 이르러, 바사예프는 당시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으로 돌려놓자"는 의견이었던 당시 체첸 대통령에 대한 유력한 정적으로 떠올랐다. 1998년 3월 31일, 바사예프는 러시아와의 대화 종결을 선언한다. "그로즈니와 모스크바 사이에 체결된 거의 모든 약속들이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러시아측은 이 조약의 의무들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일관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1998년 7월 7일, 샤밀 바사예프는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에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1998년 7월 19일,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바사예프를 공화국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바사예프는 체첸과 다게스탄의 이슬람 마즈리(Islamic Majlis; 이슬람 국회)의 수반이 되었고, 바사예프 및 하탑(Khattab)에게 충성하는 병력 수는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가니스탄 용병들을 포함하여 5천~7천명에 이르렀다. 러시아 내무부 차관 이고르 주보프(Igor Zubov)에 따르면, 남부 러시아의 이슬람 폭도들을 재정지원하기 위하여 오사마 빈 라덴이 체첸 게릴라 지도자들에게 3천만 달러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 말, 북 코카서스에는 공격적인 수단판 와하비즘(Sudanese version of Wahabism)이 번지기 시작했다. 체첸 전쟁 이전에는 다게스탄에서 그 세가 특히 강했으며, 나중에는 저항군 외에도 체첸 정식 군대와 치안 기관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와하비즘은 북코카서스 민족 중의 하나인 레즈긴족(Lezgins)이 거주하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도 발판을 마련한다. 와하비즘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이들은 새로운 개종에 관한 열망 속에 이슬람에 복무하였다. 매우 놀랍게도, 체첸 저항군 야전 지휘관들이 소규모 병력들과 함께 북 그루지아의 산악 지대인 판키시 협곡(Pankisi Gorge)에 출몰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은 체첸 당국에 대항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또한 그루지아에 대한 언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극단적 와파비 분파 지도자들은 다게스탄을 독립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한 테러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다게스탄에서 와하비 분파는 급격한 성장을 나타내는데, 이 지역은 러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4퍼센트에 달하는 약 8만명의 다게스탄인들이 청교도적 이슬람 분파(puritanical Islamic sect)의 일원이라고 한다. 체첸에서와 달리, 다게스탄 봉기(uprising)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데에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이 이웃 지역들간의 민족적 구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양쪽 인구 대다수가 무슬림이긴 하지만, 체첸은 단일 민족 공화국이다. 반면, 다게스탄은 30개 이상의 민족 공동체들로 이뤄졌으며, 이들은 종종 서로 일치단결하지 않는다.
1999년 8월 7일, 200~500명의 무장 괴한들이 아침 일찍 다게스탄 국경을 넘어 3개 산악 마을에서 진지를 구축한다. 무슬림 폭도들은 신속하게 남부 다게스탄 지역의 산간지역 마을 여럿을 점령하였다. 8월 10일, 이 지역의 이슬림 지도자 회의가 열리고 다게스탄의 독립을 선포한다. 이 선언은 다게스탄과 체첸의 무슬림들에게 모든 이교도들이 무슬림 영토에서 쫓겨날 때까지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임명된지 며칠 후, 2주 내로 다게스탄의 폭도들이 쫓겨날 것임을 예측하였다. 인구가 희박한 다게스탄 산악지대에서 러시아군은 폭도 진지로 의심되는 지역에 대하여 공군력과 중포 사격에 의지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 항공기와 중포의 무자비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반군들은 초기 거의 밀려나지 않았다.
8월 25일, 러시아군은 자신들이 남부 다게스탄 지역에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했던 모든 산간 마을들을 탈환하였다고 말하였다. 2주 반에 걸친 꾸준한 공습 및 포격 이후, 러시아 군사 관리는 체첸 국경 지역 다게스탄 산간지역의 무슬림 반군이 모두 소탕되었다고 하였다. 국방부 대변인에 따르면, 폭도들이 점령한 6개 마을 중에서 2개가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양측 모두 2주간의 전투기간 동안 자신들이 40에서 5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였으며, 반면 상대방의 사상자는 훨씬 많다고 주장하였다.
8월 26일, 러시아군은 다게스탄 지역에서 퇴각하고 있는 무슬림 폭도들이 숨어있는 2개의 체첸 마을을 공습하였다.
다게스탄 마을인 카라마키(Karamakhi)에서는, 1998년 지도자들이 러시아 지배를 거부하고 이슬람 법을 선언하였다. 카라마키는 다게스탄 이슬람 근본주의의 심장으로 간주되었다. 샤리아 법이 선포된 이래, 주민들은 음악 감상이나 사진 촬영을 금지당했으며, 여성들은 얼굴과 팔, 다리를 가리는 이슬람 의상을 입도록 강요당했다.
러시아 및 다게스탄 당국은 카라마키에 대한 무슬림 샤리아 적용에 대하여 무시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1999년 8월의 체첸인들에 의한 다게스탄 서쪽 산악지대 공격을 격파한 연방군은, 이제 반군들이 숨어있으리라고 의심되는 다른 지역들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비 분파의 아성으로 알려진 카라마키는 제 1차 목표였다. 지역 수도 마하크칼라(Makhachkala)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카라마키에는 당초 1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1주일 전 연방군이 도착하자 대부분이 달아났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력으로 마을을 탈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폭도들을 국제적 용병들이 지원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러시아군은 다게스탄의 반군들을 신속하게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반면 다수의 병력들은 자신들에게 이에 필요한 무장과 인력이 부족하다는 불평을 하였다. 1999년 9월 4일, 러시아 국방장관이 다게스탄의 이슬람 반군들에 대한 군사작전에 있어서의 모든 권한을 내무부 장관으로부터 이양받는다. 겐나디 트로셰프 중장(Lieutenant General Gennady Troshev)이 통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99년 9월 5일, 수백명의 총잡이들(어떤 이들은 2천명 가량으로 추산하기도 한다)이 체첸으로부터 다게스탄으로 넘어와 노보락스키 지구(Novolaksky district)의 4개 마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전투를 벌인다. 전투는 다게스탄의 카라마키 지역으로도 확산된다. 러시아군은 여러 마을들을 탈환하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위치한 기존 진지들에 대하여 공습을 강화한다. 9월 8일에 이르러, 러시아 내무부는 다게스탄 수도 마하크칼라 북서쪽 50킬로미터 지역인 노볼락 지역의 11개 마을 일대에서 지상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린다. 소규모이지만 잘 무장된 반군들은 참호 속에 자리잡아 연방군의 공습과 포격, 그리고 몇배에 달하는 지상군 공격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버틴다.
1999년 9월 중순, 저항군들이 장악했던 몇몇 마을들에서 저항군들이 격퇴당한다. 러시아 군사 관리들은 다게스탄 이슬람 저항군들이 장악했던 차반마키(Chabanmakhi)와 카라마키의 2개 마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바사에프는 휘하 저항군들이 서부 노볼락스코예 지역 진지들에서 철수하였다고 말하였다.
테러 공격, 1999년 8월~9월 (Terrorist Attacks - August-September 1999)
1999년 8월 31일, 다게스탄의 한 군사주거지역에 대한 폭탄 공격으로 65명이 사망하였다. 이들 사망자 대부분은 이곳의 무슬림 폭도들과 싸우고 있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었다. 모스크바에서도 3차례의 테러리스트 폭탄 테러 - 한번은 8월 31일 한 쇼핑몰에서, 또 한번은 9월 9일 한 아파트에서, 또 한번은 9월 13일 또다른 아파트에서 - 가 발생하여 260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조사관들에 따르면, 모스크바 아파트 폭발사건 당시 1층(ground floor)에 위치한 빈 상점 및 사무실에 대량의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9월 16일에는 코카서스와 가까이 있는 남부 러시아 도시인 볼고돈스크(Volgodonsk)에서 또다시 아파트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최소한 17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부상을 입는다. 폭발은 모두 밤에 일어났다.
(1999년 9월 9일, 모스크바 남동부 구랴노바 거리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이로 인하여 9층 건물이 무너지고 인근 15개 건물에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94명이 사망하고 249명이 부상을 입는다.[5])
러시아 당국자들은 이 폭발들을 체첸 및 다게스탄의 이슬람 반군들의 소행으로 생각하였지만, 이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치안 당국자들은 일명 "회오리 작전(Operation Whirlwind)"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폭탄 테러범 수색 작전에 돌입했다. 모스크바 신문들에는 폭탄 테러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찼으며, 모두 이 테러가 "러시아와 이슬람 근본주의"간의 "전쟁"의 일환이라고 묘사하였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샤밀 바사예프를 포함한 체첸 관리들은 러시아 폭탄테러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러시아 당국자들은 체첸이 이웃 다게스탄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고 마을들을 공격하는 이슬람 반군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999년 여름에 모스크바와 볼고돈스크의 아파트에 감행된 폭탄 공격으로 러시아인 약 30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폭발사건 이후로, 러시아 여론은 지난 전쟁의 결과를 뒤집기 위하여 새로운 전쟁을 벌이자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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