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제 2차 체첸전쟁, 1999-2006 (2) (Second Chechnya War, 1999-2006) - 글로벌시큐리티

박용수 2014. 10. 27. 16:10
< 원문출처 : 글로벌시큐리티 - Second Chechnya War - 1999-2006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war/chechnya2.htm) >

 

< 역주 및 사진 출처 :

[6] (http://fmso.leavenworth.army.mil/documents/grozny2000/grozny2000.htm)

[7] (http://wikimapia.org/#lat=43.2995331&lon=45.7101899&z=17&l=0&m=b&show=/97293/Minutka-Square)

[8]  Russia's Chechen wars 1994-2000: lessons from urban combat, 1289호 (공)저: Olga Oliker (http://books.google.co.kr/books?id=coTg0jV7rLIC&pg=PA48&lpg=PA48&dq=Minutka+Square&source=bl&ots=F5-DFAm0LX&sig=UgIN8S2k8EUNWjg9R628KmawYoY&hl=ko&ei=CBzRTMA-hcFxxLTojgs&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9&ved=0CEIQ6AEwCA#v=onepage&q=Minutka%20Square&f=false)

[9] Global Jihad - Pankisi Gorge Training Camps (http://www.globaljihad.net/view_page.asp?id=1344)

[10] Global Jihad - Ruslan Gelayev (http://www.globaljihad.net/view_page.asp?id=1340)

[11] Agrotourism in Pankisi Gorge (http://www.pankisi.org/cgi-bin/blosxom.cgi/english/history)

[12] Akhmad Kadyrov (http://en.wikipedia.org/wiki/Akhmad_Kadyrov)

[13] Moscow theater hostage crisis (http://en.wikipedia.org/wiki/Moscow_theater_hostage_crisis) >

 

 


1단계 - 공군작전. 1999년 9월 (Phase One - The Air Campaign - September 1999)

 

 초기 러시아측에서는 "차단 및 폭격(cordon and bomb)" 전략을 채택했다. 최소한 러시아 군당국은 무슬림 반군들의 침투를 막는 한편, 체첸 전체를 점령하지 않고도 북코카서스 지역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하여 체첸과 다게스탄 사이에 "보안 지역(security zone)"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 목적이 엉망진창 지역(breakaway region)을 봉쇄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군사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목적이 체첸에서의 3년 전의 치욕적인 패배를 뒤집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9월 중순 경, 러시아가 체첸 주변의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 엉망진창 지역과의 모든 교통은 차단될 것이라고 하였다. 내무부 관계자에 따르면, 1천명 이상의 반군들이 다게스탄 국경 근처 체첸지역에 몰려들고 있다고 하였다.

 

 1999년 9월 22일, 내무부 차관 이고르 주보프는 러시아군이 체첸을 포위하였으며, 이 지역을 탈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체첸 국경지역 모 장소에 2만에서 5만명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보프 장군은 군사 계획가들이 러시아 사상자수가 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상군 침공에는 반대하는 조언을 하였다고 하였다.

 

 러시아는 수주에 걸쳐 NATO식의 공중작전을 벌였고, 지역 수도 그로즈니 일대에 대해서도 수일간에 걸쳐 공습을 감행하였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목표는 지난 달 다게스탄을 침공한 체첸 반군들을 소탕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공습이 시작되자 체첸의 전화 시스템이 1차 목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전력 공급(electricity supply)이 차단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다른 보다 심각한 결과들 외에도 특히 체첸 행정부가 정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공습으로 인하여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사망하고, 최소 10만명의 체첸인들이 피난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를 벗어나려던 주민들은 국경도로가 폐쇄된 것을 알게 되었고, 인근 잉구세티아로 향하는 고속도로 상에는 차량들이 수킬로미터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

 

 러시아 공군 사령관인 아나톨리 코르누코프(Anatoly Kornukov)는 러시아의 체첸 공습과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간에는 유사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민간 목표에 대한 공격은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체첸에서 찍은 비디오 자료에는 그로즈니의 가옥들이 폭격당하면서 민간인들이 살해당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1999년 9월 23일, 러시아군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의 공항을 폭격하였다. 이는 1996년 내전이 종료된 이후 체첸 수도에 대한 러시아의 첫번째 공격이었다. 9월 25일에는 러시아 군용기가 외곽 지역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하면서 총 1700회의 소티(sorties; 출격)를 기록하였다. 러시아측 주장에 따르면 총 150개의 군사기지가 파괴되었고, 교량 30개, 차량 80대, 통신 중계소 6개, 산간 도로 250킬로미터가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국방장관 이고르 세르게예프는 "마지막 산적이 격멸될 때까지" 체첸 폭격이 지속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세르게예프는 지상군 파병 가능성을 일축하고 당분간은 공습으로만 공격이 진행될 것이라고 하였다. 9월 말에 이르러 러시아군이 체첸 땅에 침입하여 일부 영토를 점령하게 된다.


 

2단계 - 지상전. 1999년 10월~11월. (Phase Two - The Ground Campaign - October-November 1999)

 

 1999년 10월 1일이 되면서 체첸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와 체첸 의회의 권위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체첸의 1996년 당시의 의회를 유일한 합법적 통치체로 선언하고, 체첸 정부는 방랑(exile)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였다. 총리는 드디어 지상전의 시작을 명령하였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목표가 체첸 접수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지만, 물밑으로는 꼭둑각시 정부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은 체첸 내부로 15킬로미터를 진군하여 전략 요충지들을 점령함으로써 보안 지역(security zone)을 구축하게 된다. 이는 모스크바 당국이 지난 3년 전 체첸 반군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로 이 엉망진창 지역에 지상군을 보낸 첫번째 사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방장관 이고르 세르게예프는 이러한 이동이 결코 침공(invasion)이 아니며, 야금야금 영토를 점령해가는 소위 말하는 "무균지대 경계선(sanitary cordon)"의 확장이라고 하였다. 러시아 군사 계획가들은 지공 전략(go-slow strategy)이 지난 1990년대 중반 체첸 작전에서 여론 지지를 잃게 만든 대량 전사상자의 발생을 억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10월 5일, 러시아 지상군은 체첸 북부의 1/3을 점령하였으며, 북부 체첸을 가로지르는 테렉 강(Terek River)에 도달하였다. 최초 러시아인들은 이 공화국을 양분하여 러시아측이 점령한 지역에는 친 러시아계 정부를 수립하고, 반대편에는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군이 수도 그로즈니 북쪽 25킬로미터 지점까지 육박한 상황에서,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에 대항한 성전을 촉구했다.

 

 1999년 10월 15일, 코카서스 지역 연방군 사령관인 빅토르 카잔체프(General Viktor Kazantesv)는 러시아 군사작전의 1단계 - 즉, 체첸 주변에 보안 지역(security zone)을 만드는 것 - 가 완료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휘하 병력들이 2단계 군사작전에 돌입할 것이며, 공화국 내에서 체첸 반군들을 일소할 것이라고 하였다. 러시아군은 체첸 전사들에 대하여 전차와 포병 사격을 통한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포병 사거리 안에 두는 전략적 능선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러시아군 제 1 차장 (The first deputy chief of Russia' armed forces)인 발레리 마닐로프 장군(General Valery Manilov)은 그로즈니에 대한 정면 공격은 실시하지 않을 것이지만, 러시아군은 수도 내의 이슬람 전사들을 격파할 것임을 말하였다.

 

 1999년 10월 21일, 러시아 지대지 미사일이 그로즈니를 강타하여 최소한 140명을 살해하고 그외 다수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로켓들은 체첸 수도 중심가를 강타하여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다수의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 그로즈니 여러 곳에서 폭발이 벌어졌으며, 체첸 대통령궁 근처의 시장 역시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측 대변인은 이 번잡한 시장이 목표가 된 이유가 이곳이 반군들이 무기 시장을 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다게스탄 모즈도크(Mozdok)에 소재한 러시아 공군기지에서 발사된 SS-1 스커드(SCUD) 미사일과 SS-21 스카랍(SCARAB) 미사일이 장거리 화력지원을 하고 있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이들 공격 직전에는 체첸 북부 지역의 민간인 마을과 가정, 농장 등에 공습과 포격이 가해졌었다.

 

 2003년 10월, 러시아군은 체첸에서 빠져나가는 마지막 도로를 차단한다. 러시아 전차들이 그로즈니에서 서쪽의 잉구세티아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했다. 지난 몇주간 이 낡은 2차선 고속도로가 이 엉망진창 공화국과 외부 세계간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러시아의 침공이 있은 이후로 체첸을 벗어난 18만명의 사람들은 이 도로를 이용했었다.

 

 러시아군은 수도 외곽의 진지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어러차례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로즈니 2킬로미터 지점에서 돈좌된다. 도시 민간인 대다수는 도주하였고, 거리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동쪽 3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구데르메스 시에 대해서도 공습 및 포격을 집중했다. 구데르메스를 점령할 경우 러시아의 동부 체첸 점령에 있어 큰 계기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대단히 심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러시아 군용기들과 포병들은 체첸 수도 그로즈니와 제 2도시인 구데르메스의 목표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러시아군은 잉구세티아 국경과 인접한 체첸의 국경 촌락인 바무트(Bamut)에 대해서도 포격을 실시했다.

 

 1999년 11월 8일, 러시아는 체첸 및 그 주변에 총 10만명의 병력이 되도록 증원군을 파견한다는 선언을 한다. 내무부 증원군 역시도 북동 체첸 지역에 파견되었으며, 이곳에서 연방군은 그로즈니 동쪽 제 2도시인 구데르메스를 포위하고 있었다. 러시아 군용기들은 이제 군사 지도자들이 반군 거점이라고 표현한 남서부 도시 우루스-바르탄(Urus-Martan)을 폭격한다. 또한 남부 산악지대에 위치한, 러시아인들이 소위 군사기지들이라고 부른 곳들을 폭격하기 시작한다. 그로즈니 외곽의 반군 진지들과 체첸의 남부 지역에 새로운 로켓 물결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러시아 제트기들은 체첸 여러 곳을 폭격 및 소사하면서, 매우 느리고 조심스러운 러시아군의 진격을 지원한다. 이러한 신중한 진격은 지난 체첸에서의 전쟁에서 사용한 전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러시아군의 전술은 몇년 전의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가 교훈을 얻었음을 나타내준다. 당시에는 도시 시가전에 유능한 체첸 전사들과 정면 대결을 펼치면서, 수천명의 어린 러시아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이제 훨씬 느려졌으며, 병력을 집어넣기 전에 지속적인 폭격과 포격을 가하여 전사들이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마을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려는 마을 장로들과 러시아 장교들이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마을들에 대한 조직적인 폭격과 포격 이후에, 주민들은 최후통첩을 받는다: 저항군이 떠나고 러시아군이 마을을 조용히 접수하게 하던지, 아니면 민간인들은 마을을 나가고 마을은 잿더미로 만들던지. 어떤 마을에서는 더이상 폭격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 속에서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유화전술("heart and mind" strategy) 내에는 가스와 전력과 같은 핵심 서비스들을 다루는 러시아 민간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첸 북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교사들과 의료진들이 곧 월급을 받기 시작했고, 노인들은 연금을 받게 되기 시작했다.

 

 1999년 11월 12일, 체첸 제 2도시 구데르메스에 러시아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고, 이는 체첸군에 있어서 심각한 패배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1월 17일에는 러시아군이 서부 국경지역 바무트의 체첸 거점을 점령하였다. 바무트는 지난 1994년에서 1996년의 전쟁 당시 체첸인에게는 독립 투쟁의 상징물이었다. 다음날 연방군은 체첸 서부 변경 마을인 아크코이-마르탄(Achkoi-Martan)을 점령하였다.

 

 11월 말에 이르러 그로즈니 주변의 봉쇄선(cordon)은 80퍼센트 완료되었으며, 단지 남쪽 접근로만이 열려있는 상태였다. 러시아 군부는 체첸 수도가 12월 중순까지는 완전 포위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로즈니 인구는 전쟁 전 30만명이었던 것이, 예측에 따라 다르지만 4천에서 4만명 수준으로 격감하였다. 군사관리들은 약 3천에서 6천명에 이르는 체첸 전사들이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진격을 막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추산하였다.

 

 그로즈니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잇는 우루스-마르탄은 산간지대를 거쳐 그루지아로 향하는 주도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 도로는 반군의 주요 보급로였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한다면 연방군으로서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지난 11월 동안 러시아 공군과 포병의 주요 목표물이었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의 체첸 방어병력이 잇을 것으로 예측되었으며, 러시아 육군 지휘관들은 대규모 사상자를 우려하여 지상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러시아군이 이 엉망진창 지역의 50퍼센트 이상을 장악한 상황에서 반군 전사들은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 전역은 전반적으로 러시아 공군과 포병의 강력한 공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로써 체첸 전사들은 거의 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3단계. 1999년 11월~ 2000년 2월 (Phase Three - November 1999 - February 2000)

 

 1999년 11월 26일, 육군 참모차장 발레리 마닐로프(Valery Manilov)는 체첸 전역의 2단계가 이제 막 완료되었고, 마지막 3단계가 곧 시작될 것이라고 하였다. 마닐로프에 따르면, 제 3단계의 목표는 산악 지대에 위치한 도적떼들을 격파하고, 동시에 질서를 회복시킴으로써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며칠 후, 러시아 국방장관 이고르 세르게예프는 러시아군이 체첸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완료하는 데에 최대 3개월 가량이 소요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전역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한 예측은 다소 다양했다. 일부 장성들은 공세가 신년(New Year's Day) 무렵이면 종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다른 관리들은 전역이 3년가량 지속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역사적으로 작전술가 내지 전술가들은 도심지 전투(urban combat)를 소모전 형태의 전투로 보았다. 이는 화력 투사를 통하여 적 군수 자산에 대한 점증적인 파괴를 달성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극단적인 도심 지형으로 말미암아 통상적인 기동성은 제한되며 대체로 다수의 인력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전선의 규모는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진격과 퇴각의 단위는 단일 건물 혹은 블럭 단위로 측정된다. 병력들은 구조물이나 폐허 속에 숨어있는 적들을 화력으로 격파하기 위하여 엄청난 규모의 탄약을 소비하게 된다. 공자는 건물에서 건물을 따라 조직적으로 진격로를 개척하고, 방자는 모든 지하실과 방을 통해 끈질긴 저항을 펼친다. 격렬하고 지속적인 근접전으로 인하여 대량의 물자 파괴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하고, 전투원과 비전투원 모두에게 대량 전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러시아 지휘관은 자신들이 그로즈니를 침공할 계획이 없다고 하였다. 그 대신의 계획은 아무래도 그로즈니는 완전히 파괴하고 제 2 도시 구데르메스를 체첸 수도로 선포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로즈니 전직 시장이었던 비슬란 간타미로프(Bislan Gantamirov)가 감옥에서 풀려나 대응 행정부(parallel administration)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횡령 혐의로 6년간 복역 중이었던 간타미로프는 러시아 치하의 체첸 지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연방군 통합지휘관 빅토르 카잔체프와 협의 중인 전직 그로즈니 시장 비슬란 간타미로프[6])

 

 1999년 12월 1일, 체첸 반군들은 몇몇 촌락들과 러시아군에게 함락당한 첫 대도시인 구데르메스 외곽 지역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군에 대항하여 일련의 반격을 감행한다. 그로즈니 동쪽 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 아르군(Argun)에서는 이번 러시아 공세 시작 이래로 가장 강력한 반군 전사들의 저항이 벌어졌다. 아르군와 우루스-마르탄에서 체첸 전사들은 러시아군이 가장 피하고 싶어했던 게릴라 전술을 펼치는 강력한 저항을 선보였다.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몇몇 촌락들에서 전사들이 퇴각하고 있지만, 이는 러시아군을 산악지대로 유인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1999년 12월 4일, 북 코카서스지역 러시아군 사령관 빅토르 카잔체프 장군은 그로즈니가 러시아군에 의해 완전 봉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12월 5일에는 러시아군 항공기가 그로즈니에 다음과 같은 경고가 담긴 전단을 살포한다: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테러리스트 및 도적들로 간주되어 포격 및 공습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더이상의 협상은 없다". 러시아인들은 최종시한을 설정하였고, 그로즈니 주민들로 하여금 12월 11일까지는 떠날 것을 강요하였다. 러시아인들은 그로즈니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수를 15000명으로 추산하였던 반면, 제네바로 망명 중이던 일단의 체첸인들은 민간인 인구가 5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를 확인하여 주었다.

 

 러시아는 그로즈니의 체첸인들에 대한 5일간의 "떠나던지 죽던지"식 통첩에 대해 쏟아지는 국제적 비난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정작 체첸 작전을 담당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빅토르 카잔체프는 이 최후통첩 전단이 단지 경고 목적일 뿐이었다며 한발 물러선다. 러시아 지휘부는 그로즈니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는 회랑 지대를 마련하였다. 다만 전쟁 지역에서 들려온 소식들에 따르면, 12월 11일에 이곳이 개통되었음에도 이곳을 이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비상 대처 장관(Emergency Situation Minister) 세르게이 쇼이구(Sergey Shoigu)는 민간인 피난을 위해 러시아군의 포격을 중단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러시아 군사관리들은 체첸 전사들이 수도 내에 갖혀있는 만여명의 민간인들의 탈출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도시 내에 묶여있는 민간인들은 동족들이 막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탈출민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과 사격이 무서워서 가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로즈니에 남아있던 민간인들 중에 상당수는 늙거나 병약한 사람들로서, 여행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로즈니 외곽의 러시아군은 명백히 강력한 공습 및 포격으로 도시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며, 도시를 완전히 주저앉혀서 반군으로서는 방어가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12월 13일, 러시아 군대는 그로즈니 근교에 있는 체첸의 주 공항을 탈환한다. 이 공항은 지난 전쟁 당시 러시아의 주 군사기지였다. 이곳은 이번 전쟁 당시 군용기들의 첫번째 목표물 중의 하나였으며, 그 이후로는 이제까지 기능을 멈춘 상태였다.

 

 12월 9일이 되자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체첸 도시인 우루스-마르탄을 점령한다. 그러나 폭탄과 박격포로 마을 내의 반군 전사들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는데, 반면 체첸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전사들은 이미 철수한 상태라고 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다음 목표는 수도 남동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샤리(Shali) 마을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그로즈니를 제외하고 분리주의자들이 아직까지 장악하고 있는 몇 안되는 마을 중의 하나였다. 러시아군은 샤리와 그로즈니를 잇는 2개의 교량을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고 12월 11일에는 마을을 포위하여 천천히 반군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12월 13일, 러시아 장군 겐나디 트로셰프는 샤리 마을에 항복하던지 파괴되던지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러시아 관리들은 대다수 체첸 전사들이 샤리를 떠났다고 보았지만, 일부 저격수들과 소규모 총잡이들이 마을 내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12월 중순에 이르러, 러시아군은 체첸 남부지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였으며, 체첸 동쪽의 이웃인 다게스탄으로부터의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항공부대는 아르군 협곡과 체첸 남부 산악지대 발치에 위치한 목표물들을 타격하였다.

 

 12월 14일 현재, 전투는 그로즈니 동부 외곽 지대에 집중되었고, 정찰부대들이 반군 거점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러시아 지상군들은 그로즈니 외곽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반군 전사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며, 동네에서 동네로 이동하면서 도시를 감제하는 전략적 고지에 집중하는 느린 속도의 진격을 개시했다. 체첸 지휘관의 말에 따르면, 반군이 도시의 북부와 남동쪽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6회의 러시아군 공격을 격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소 100여명을 사살하였고 그로즈니의 미누트카 광장(Minutka Square) 전투에서 전차 몇대를 파괴하였다고 한다. 약 2천명의 반군 전사들이 전차부대를 매복공격하여 러시아 전차를 RPG로 타격하였다는 것이다.

 

(전쟁 전과 후의 미누트카 광장의 모습[7]. 미누트카 광장 주변에는 5층에서 9층 크기의 고층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었고, 광장 500미터 거리에는 가장 크고 도시 전체를 감제할 수 있는 12층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2000년 1월의 전투 기간 중에서 이곳 일대는 양측이 서로 장악하기 위해 가장 피비린내나는 격전을 벌인 장소라고 한다. [8]) 

 

 러시아 지상군은 도심을 향하여 3방향에서 느리게 진군하였다. 당시 사용한 전략은 반군으로부터 사격을 유도한 다음, 병력은 퇴각시키고 포병과 로켓 공격으로 체첸군 진지를 타격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한 장성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신년 전까지 도시를 장악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1월의 눈폭풍으로 말미암아 연방군의 진격은 멈추게 된다.

 

 사상자가 증가함에 따라 최초 열광적이었던 전쟁에 대한 여론 지지도 점차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정부는 러시아 언론에 대한 심한 통제에 대하여 점차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즉, 사상자 숫자를 축소 발표하는 것과 지난 체첸 전쟁 때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동일한 군사전술을 쓰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2000년 2월까지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러시아군은 폭설과 강력한 반군 저항으로 인하여 총공격(all-out assault)을 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체첸 전사들은 기상 조건을 이용하여 연방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15명 가량으로 구성된 잘 조직된 반군 전사들이 도시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종종 러시아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안심하고 있던 러시아 병사들을 뒤에서 공격했다. 2월 3일 현재, 그로즈니의 50퍼센트 가량이 연방군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다.

 

 2000년 2월 초, 수천명의 체첸 전사들이 소위 전술적 후퇴를 통하여 그로즈니를 빠져나와 남부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다. 체첸 지도자들은 러시아군 진지에 대한 히트 앤드 런을 포함한 게릴라전으로써 전쟁을 지속하겠다고 하였다. 그로즈니로부터의 퇴각은 체첸인들에게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도시 서쪽 외곽에 설치된 지뢰원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전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저명한 체첸 지휘관들 중에서도 여럿이 사망하였으며, 가장 악명 높은 군벌 샤밀 바사예프도 이 과정에서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2000년 2월 초, 참모차장 발레리 마닐로프 장군은 체첸에 파병된 병력 규모를 감축할 것이며, 이제 그로즈니는 정부의 손 안에 있다고 하였다. 러시아측 대변인은 9만 3천명의 병력이 체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실제 병력은 훨씬 많았다고 하고 있다. 군사 관리들에 따르면, 전투가 끝나고 나서 총 1만 5천명의 병력이 공화국 내에 영구 주둔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최종 단계 - 2000년 2월 (Final Phase - February 2000)

 

 2월 중순이 되자, 러시아 항공기들이 체첸 남부 산악지대의 체첸 진지로 의심되는 곳을 폭격하였다. 이곳에는 약 8천명에 달하는 체첸 전사들이 주둔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군사 관리들은 연방군이 거친 지형을 관통하고 있는 2개 협곡들을 감제하는 전략적 고지들을 장악했다고 하였다. 국방장관 이고르 세르게예프는 최대 5만명의 지상군이 남부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소위 "최종 공세"를 통해 이곳의 체첸 반군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산악지대를 장악하려는 전투 과정에서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에 대한 히트 앤드 런 공격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쟁이 질질 끌게 되면서, 이웃 잉구세티아로 피난한 피난민들은 러시아측이 수만명의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는 난민촌에 대한 서비스 공급을 조용히 차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러시아 관리들은 전쟁이 아직도 진행 중이며, 시골 대다수가 잿더미가 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난민촌 거주자들에게 "해방된 체첸"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수백만 달러를 파괴된 지역의 기본 서비스들을 복구하기 위하여 할당하였다. 몇년 전의 1차 체첸 전쟁 당시에도 서비스들을 복구하려는 결정이 시도된 바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체첸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고, 반군 지역을 다시 품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할당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자금은 부패한 관리들의 횡령으로 사라졌으며, 이들 중 하나는 이제 러시아 편에서 싸우고 있는 한 체첸 군사지도자였다. 점령 후 1년이 넘게 지난 뒤에 체첸인들은 수도 그로즈니를 탈환했고, 러시아인들은 물러났었다.

 

 러시아인들은 전쟁이 곧 끝나리라 예상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전 전쟁에서 잘 써먹은 게릴라 전술을 반군들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1년 이상 전쟁이 계속되리라고 보았다.

 

 모스크바에서 승리를 선언한지 여러달이 지난 2000년 말, 러시아군은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occupy)했지만, 실제로 통제(control)는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 병사들과 경찰들은 주기적으로 반군 전사들을 찾아 마을들을 수색했고, 러시아 군용기들과 헬리콥터들은 공중에서의 전쟁을 지속했다. 반군들은 지속적으로 매복 공격을 실시했고, 상당한 성과를 내었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99년 8월부터 2000년 9월 말까지 약 3200명의 러시아군이 사망했다. 이는 매주 10명 가량의 러시아군이 사망한 셈이었다.

 

 2002년 7월 22일, 북 코카서스의 군 사령부에서 제출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99년 가을부터 시작된 체첸 전쟁 과정에서 총 4249명의 연방요원들이 사망하고 1228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군부는 또한 이 기간동안 연방군이 총 13517명의 반군을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비록 푸틴이 2002년 초에 군사 작전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였지만, 반군은 여전히 체첸 남부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매주 20~30명의 러시아 병사들을 죽이고 있다.


 

전투의 재개, 2002-2006 (Renewed Fighting - 2002-2006)

 

 2002년 여름 동안,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체첸의 반군 분파들을 재통합하였고, 과거 그와 의절했던 과격 지휘관들에게 주요 정부 직위를 제공하였다.

 

 2002년 9월 중순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인근 그루지아가 러시아를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러시아는 체첸 근처의 판키시 협곡(Pankisi Gorge)에서 체첸 반군들이 공격 준비를 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그루지아를 오랜 기간 비난해왔다. 러시아 지도자는 트빌리시 정부가 그루지아의 판키시 협곡 지역에 과거 러시아 땅을 공격한 체첸 반군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하였다. 푸틴 대통령은 그루지아가 테러리스트를 격멸하기 위한 단호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이러한 테러리스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제법에 걸맞는 적절한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편지는 유엔 사무국장 코피 아난 및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회원국들에게 보내졌다.

 

 

 

(전직 체첸 국방장관이자 체첸 반군 지도자 중의 하나인 루슬란 겔라예프의 사진과, 그가 건설한 훈련캠프가 위치했던 판키시 협곡의 위치. 당시 그루지아 정부는 압하지야의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코도리 협곡(Kodori Gorge)을 2001년 10월 경 공격해주는 댓가로 루슬란 겔라예프의 부대에 무기를 공급해주었다고 한다.[9][10] 한편 판키시 협곡 관광 안내 웹사이트에는 2001년-2002경 일단의 무기 및 마약 밀매꾼들과 인신매매업자들이 계곡 내에 몰려왔으나 그루지아 군민의 단호한 소탕작전으로 모두 쫒겨났다고 소개되어 있다.[11] )

 

 그루지아는 러시아의 주장과 비판을 반박하였으며, 자국은 해당 협곡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반군들을 근절하였다고 하였다. 트빌리시에서, 그루지아 대통령 에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는 푸틴의 성명을 성급한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루지아 관리들은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의 협조를 구하였으며, 그루지아, 러시아, 미국이 판키시 협곡 지역 일대에 대한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회담을 하지고 제안했다. 2002년 8월, 그루지아 대통령 세바르드나제는 해당 협곡으로 1000여명의 그루지아 병사들을 파견하였지만, 군사 작전 이전에 작전이 벌어진다는 것을 미리 공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반군들이 달아날 시간을 제공하였다. 러시아는 그루지아의 행동을 단지 대외 관계를 위한 제스처 정도로 평가절하하였다.

 

 한편, 2002년 10월 23일, 일단의 총잡이들이 체첸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며 모스크바의 한 극장을 습격하여 백여명의 인질들을 붙잡았다. 총잡이들은 건물 일대에 폭약을 설치하고, 만약 러시아군이 건물을 공격할 경우 인질들을 사살하거나 폭발물을 폭파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인질범들은 바사예프가 자신들의 "최고 군사 에미르(supreme military emir)"라고 하였다. 러시아군의 구조 작전 과정에서 사용된 펜타닐(fentanyl) 무력화 가스의 효과 탓으로 100명 이상의 인질들이 목숨을 잃었다. 구조된지 48시간이 지난 뒤에도 대부분 인질들은 가스 효과 탓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이들 중 약 1/4 가량은 중환자실(intensive care)에 있어야 했다. 러시아 관리들은 처음에는 2002년 10월 26일의 공격 당시 어떤 가스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진압 피해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13]) 

 

 연방군이 극장을 습격한 다음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테러리스트들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을 것이며,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수단을 쓰려고 한다면, 러시아는 그 위협에 합당한 수단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루가 지난 뒤, 러시아군이 체첸 지역에서 대규모 치안 강경단속을 벌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러시아 내무부는 모스크바 지역의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를 적발하기 위하여 "기존에는 써본 적이 없던 수단(unprecedented measures)"이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체첸인들의 요구에 양보할 기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이하 체첸 지도부는 극장 사건과의 어떠한 연관 고리도 부인하였으며, 인질범들 스스로도 마스하도프 조직과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러시아 관리들은 이는 거짓이라고 하였다. 체첸 전사들은 체첸 일반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심장부에서의 대규모 작전은 자신들의 독립 투쟁이 단지 현실일 뿐만이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체첸 반군들은 친 러시아계 체첸 행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반역자라고 보았고, 종종 이들을 목표물로 삼았다. 2002년 10월, 체첸 반군은 그로즈니의 경찰 건물을 폭파하여 25명을 살상한다.

 

 2002년 12월 27일, 반군들은 최소한 55명을 살해하고 백여명을 부상시킨다. 폭발물이 가득 찬 2대의 차량을 몬 자살 폭탄테러범들이 체첸 수도 그로즈니로 들어가 체첸 행정부 앞에서 자폭하였다. 이 폭발로 약 200여명이 근무하고 있던 4층 건물이 사실상 박살나버렸다. 이 공격이 자신들이 했다는 집단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 3년간 러시아군과 지역 장악을 위해 싸워왔던 체첸 반군들의 소행인 것으로 보인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은 크레믈린 정부가 2003년 3월, 체첸을 러시아의 일부로 확인하는 헌법 국민투표(constitutional referendum)를 벌인 이래로 공세의 수준을 강화했다.

 

 2003년 6월 5일, 한 여성 자살 폭탄테러범이 러시아 공군 장교들과 인근 체첸지역 민긴인들을 태운 버스를 공격하여 20여명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이 지역에서 한달 내에 벌어진 3번째 사건으로, 이 엉망진창 공화국의 생활이 정상화되고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에 또다른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

 

 2003년 6월 6일, 러시아 하원에서는 무장 해제한 체첸 분리주의자들과 체첸에서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 군경들에 대한 부분 특사를 승인한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이 특사로 이 엉망진창 지역의 평화가 복구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하였다. 의회는 체첸 분리주의자들과 지난 1990년대 중반 이래의 2회의 체첸 분쟁에 참전한 러시아 연방군에 대한 특사에 대하여 352표대 25표로 통과시켰다. 특사 조치는 수일 내로 발효되었으며, 당국으로 하여금 2003년 9월 1일까지 무장을 해제하거나 분리주의를 부인한 체첸 분리주의자의 경우 처벌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 특사는 러시아 연방군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였다. 체첸 민간인들과 인권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많은 러시아 병력들이 전쟁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

 

 러시아 의회의 2개 파벌인 자유주의 야블로코 파(liberal opposition Yabloko)와, 극단적 국수주의 파벌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 파(ultra-nationalists aligned with Vladimir Zhirinovsky)는 이 특사에 반대하였다. 러시아 언론사들은 야블로코파의 세르게이 미트로킨(Sergei Mitrokhin)이 이 특사는 단지 대통령의 언론 플레이에 불과하며, 체첸에서 거의 매일같이 폭력이 지속되고 있는 한 현실화될 수 없다고 한 것을 인용하였다. 지리노프스키는 이 특사를 치욕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서방 인권단체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을 벌인 러시아 병사들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이 특사에 분노를 표시하였다. 이들은 이 특사에서 러시아 병사를 죽이려고 한 체첸 반군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하였다.

 

 체첸은 러시아군과 체첸 분리주의자들간의 전쟁으로뿐만이 아니라, 체첸 내부 파벌 분쟁들로도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모스크바가 밀어주고 있는 체첸 지도자인 아흐메드 카디로프(Akhmad Kadyrov)는 이런 파벌들 중의 하나를 대표하였고, 다른 파벌 지도자들은 그와 직접적인 연계가 없는 한 특사는 그저 이론적인 것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2003년 10월, 새 체첸 지도자를 뽑는 선거 캠페인이 가열되어 감에 따라, 이 특사 조치는 카디로프측을 강화시키고, 다른 경쟁자들간에는 추가적인 긴장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푸틴과 함께 자리한 아흐메드 카디로프[12])

 

 사실상 단일후보이자 크레믈린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던 카디로프는 2003년 10월 5일 선거에서 80퍼센트 이상의 표를 얻는다. 2003년 10월 19일, 아흐메드 하드지 카디로프는 엄중한 경호 속에서 체첸 대통령으로서 선서를 한다. 카디로프의 합법성과 그의 정치적 기록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의문점이 남아 있다. 아흐메드 하드지 카디로프의 대통령 취임은 그가 반군 무프티(mufti; 이슬람 학자)의 지위에서 크레믈린이 지지하는 대통령으로 전환하는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게 된다.

 

 카디로프는 자신들의 사병들을 동원하여 체첸 내의 정적들을 혼내주는 데 사용했다는 정황이 널리 나타나고 있으며, 러시아 병력들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던 야만적 수단들도 종종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3천명에서 5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이는 카디로프의 전사들이 수많은 민간인 실종과 고문, 살해에 연루된 것으로 믿고 있다.

 

 2004년 5월 9일, 체첸의 친러시아파 대통령인 아흐메드 하드지 카디로프가 살해당하고, 북 코카서스 지역 러시아 최고 지휘관이 치명상을 입는다. 이는 북적대는 그로즈니 경기장 관람석에 설치된 폭탄에 의한 것이었다. 카디로프는 제 59회 2차대전 승전 기념 군사 행사 도중에, 그의 귀빈석 아래에 설치된 폭발물로 말미암은 상처로 사망한다.

 

 2004년 6월 22일, 북 코카서스의 러시아 연방 내 또다른 준자치 공화국인 잉구세티야 공화국에서, 폭도들이 나즈란(Nazran), 오르조니키제프스카야(Ordzhonikidzevskaya), 카라뷸락(Karabulak)의 3개 도시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치안 및 정부 건물들에 대해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 공격으로 최소한 48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싸움은 체첸 전직 대통령이자 반군 야전 지휘관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휘하 병력들이 이제 기존의 게릴라 전술로부터 러시아 연방군과 친러시아계 체첸인들을 향한 직접적 공세로 전환하겠다고 말한 직후에 발생한 것이었다.

 

 2004년 8월 29일, 체첸에서는 아흐메드 카디로프의 후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가 벌어졌다. 알루 알카노프(Alu Alkhanov)가 당선되었는데, 그는 러시아가 미는 후보자였으며, 85퍼센트 개표 당시 73.48퍼센트의 표를 얻었었다. 반군들과 선거 참관인들은 신속하게 이 결과를 비판하였다. 미국 국무성에서도 체첸에서의 선거 과정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부유한 사업가인 말릭 사이두라에프(Malik Saidullayev)가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인권단체에서도 우려를 표명하였지만, 선관위에서는 선거 과정이 공정했다고 주장하였다. 체첸 반군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러시아가 알카노프의 사망 서류에 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체첸 반군 지도부 역시도 취약한 상태였다. 2005년 3월 8일, 전직 체첸 대통령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러시아 연방 치안국(FSB) 특수부대의 공격으로 사망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이 불명확한 가운데, FSB 국장인 니콜라이 파트루셰프(Nikolay Patrushev)는 그가 숨어있던 벙커에 투척된 수류탄이 터지면서 마스하도프가 우연히 죽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러시아 언론의 경우, 혼전 속에서 마스하도프가 경호원이 발사한 총에 오인 사살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가 죽은 뒤, 압둘-카림 사두라예프(Abdul-Khalim Sadulayev)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2006년 6월 17일 대통령직을 수락한지 고작 1년여만에 FSB 부대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2006년에 체첸 반군들에게 닥친 또다른 타격은 2006년 7월 10일의 샤밀 바사예프의 죽음이었다. 바사예프는 잉구세티야에서 차를 타고 가던 중 폭발로 사망한다. 폭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바사예프의 야만적 전술 - 특히 베슬란 학교 학살사건 -을 논하였고, 그가 체첸 분리주의주의자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있긴 했지만, 그가 반군에서 핵심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부록: 2004년 베슬란 사건 (Beslan, North Ossetia)

 

 베슬란 마을은 체첸 공화국 근방 북오세티야에 위치한 인구 3만명의 마을이며, 지난 1999년 이래로 분리주의자 반군들이 러시아군과 싸워온 곳이다.

 

 2004년 9월 1일, 베슬란 학교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수백명의 어린 학생들과 여러 사람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무장 반군들은 모스크바 당국이 체첸 반군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백명의 러시아 병력들이 학교 건물을 포위하고, 여러 다른 협상가들이 반군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맨 처음부터 당국에서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발표했으며, 약 300명의 인질들이 베슬란에 잡혀있다고 하였다. 실제 인질 수는 1000명 이상이었다.

 

 아무도 자신들이 벌인 일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이 인질극의 배경에는 체첸 반군이 있으리라고 의심되었다. 분리주의 지도자 대표인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분리주의자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자신들은 이 인질극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 인질극이 벌어지기 하루 전에는 체첸인으로 추정되는 한 자폭테러범이 모스크바 지하철역에서 자폭하면서 9명을 살해하였고, 1주일여 전에는 자폭 테러가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2차례의 러시아 항공기 추락으로 89명이 사망했었다.

 

 러시아 특수부대가 학교를 공격한 이후, 약 330명 - 이들 중 약 절반이 어린이들 - 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죽었고, 이들 모두가 공격 중에 살해당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사건 3일이 지나도록 수십명의 사람들의 행방이 끝내 밝혀지지가 않았다.

 

 2004년 9월 17일, 체첸 야전 지휘관 샤밀 바사예프는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이 베슬란 학교 인질극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 성명에서, 바사예프는 최근 러시아에서 벌어진 다른 테러 공격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책임임을 밝혔고, 이들 모두가 소위 "리야두스-살리킨(Riyadus-Salikhin)"이라는 부대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하였다.

 

 성명에 따르면, 만약 인질범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인질들은 풀려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요구란 체첸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러시아군은 철수하거나, 아니면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사임하는 것이었다. 이 성명에서는 베슬란 사건에 참가한 인원이 33명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체첸인들 뿐만 아니라 잉구시인, 오세티아인, 러시아인과 2명의 아랍인까지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카에다와의 연관은 부인하였다.

 

 

(북오세티야 베슬란의 위치와 베슬란 학교의 위성사진)

 

 

참고문헌

 

(생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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