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9.11 이전까지의 아프가니스탄 정세, 2001 (Backgrounder on Afghanistan: History of the War) - 휴먼라이트워치

박용수 2014. 10. 27. 16:10

< 원문출처 : 휴먼 라이트 워치 - Backgrounder on Afghanistan: History of the War
 (http://www.hrw.org/legacy/backgrounder/asia/afghan-bck1023.htm) >

 

< 역주 및 참고사진 출처 :

[1] Mohammed Zahir Shah (http://en.wikipedia.org/wiki/Mohammed_Zahir_Shah)

[2]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http://en.wikipedia.org/wiki/People's_Democratic_Party_of_Afghanistan)

[3] Hezbi Islami (http://en.wikipedia.org/wiki/Hezbi_Islami)

[4] Islamic Dawah Organisation of Afghanistan (http://en.wikipedia.org/wiki/Ittehad-al-Islami)

[5] Islamic Unity of Afghanistan Mujahideen (http://en.wikipedia.org/wiki/Peshawar_Seven)

[6] Mohammad Najibullah (http://en.wikipedia.org/wiki/Mohammad_Najibullah)

[7] Ahmad Shah Massoud (http://en.wikipedia.org/wiki/Ahmad_Shah_Massoud)

[8] (http://en.wikipedia.org/wiki/File:Talibanbeating.jpg) >

 

 


아프가니스탄의 배경 : 전쟁의 역사 (Backgrounder on Afghanistan: History of the War)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군 주도의 군사 간섭은 이 국가가 23년에 걸친 내전의 제 4단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각 단계마다 외국 세력들이 한쪽 편을 지지함으로써 분쟁을 격화시켰다.


 

제 1단계 : 사우르 혁명과 소련 침공(The First Phase: The Saur Revolution and Soviet Occupation)

 

 1978년 내전이 발발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은 무하마드 자히르 샤(Muhammad Zahir Shah) 치하의 왕정국가였다. 자히르 샤는 1933년에 왕위에 올랐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 모두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경제 원조를 미끼로 내세웠다. 1954년 미국이 파키스탄과 군사적 연계를 맺은 후, 아프가니스탄은 점차 소련 원조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64년, 자히르 샤는 소위 로야 지르가(Loya Jirga)라고 불리는 부족장들 대회의를 열어 보다 대의적인 정부(representataional government)를 건설하기 위한 헌법을 초안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히르 샤는 어떤 권력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정치 당파들을 구성하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선거를 위해 경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자히르 샤는 1973년 사촌인 다우드 칸(Daoud Khan)에 의하여 자리에서 밀려난다; 그 이후로 왕은 로마에서 계속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다우드는 1965년 창설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PDPA)의 파르참 파벌(Parcham faction)과 동맹을 맺었다. 1967년, PDPA는 2개 파벌로 분리되었는데, 파르참(Parcham("깃발(flag)")) 파벌은 도시지역의 교육받은 파슈툰족(Pashtuns)과 기타 민족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칼크(Khalq("민중(masses)")) 파벌은 시골 지역의 교육받은 파슈툰 족 및 기타 민족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민족 집단으로서, 수세기 동안 정부 요직을 장악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기타 주요 민족 집단으로는 타지크족(Tajiks), 하자라스족(Hazaras), 우즈벡족(Uzbeks) 등이 있다.)

 

(1963년 촬영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국왕 무하마드 자히르 샤의 모습. 1973년, 눈 수술을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간 동안 사촌인 무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가 벌어지고, 내전 발생을 우려한 국왕의 사임으로 쿠데타는 성공한다. 자히르 샤는 이후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을 지속했으며, 2002년 나토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귀국한다. 당시 왕정복고 움직임도 있었으나 그는 단지 국부(baba)라는 칭호로 만족한다고 하며 사양한다. 2007년 경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1])

 

 권력을 장악한 다우드는 파르참 파벌을 소외시키고 정부와 소련과의 거리를 벌리고자 하였다. PDPA의 양개 파벌은 1977년 재통합하여 1978년 4월 27일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다우드를 죽이고 권력을 획득한다.

 

(사우르 혁명 직후의 카불 시내의 광경. 다우드 칸이 PDPA 지도자들을 체포하며 탄압의 징후를 보이자 하피줄라 아민을 비롯한 PDPA 칼크 파벌 소속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정권을 무너뜨린다. [2])

 

 칼크 파벌이 주도하는 PDPA 정부는 과격한 토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전국에 걸쳐 대규모 압제를 자행하였으며, 수만명에 대한 체포와 즉결 처형을 실시하였다. 목표가 된 인물들에는 정치가나 종교 지도자, 교사, 학생, 기타 전문 직업인, 이슬람 단체, 하자라스족이나 시아파 등의 소수 민족 사람들을 들 수 있었다. 정부의 억압적 조치와 시골 사회를 테러를 통하여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전국에 걸쳐 봉기가 일어났다.

 

 아프간 사회가 분열될 경우 소련 남부 국경의 안보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군대가 붕괴되는 등의 상황 악화에 놀란 소련은 1979년 12월 24일 수천명의 병력들을 카불로 공수한다. 칼크 파벌 대통령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은 소련 정보부 병력들이 정부를 장악하면서 암살당했고, 그 대신 파차미 파벌의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이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약 11만 5천명의 소련 점령군과 카르말 정부는 대규모 체포와 고문, 분란자의 처형, 시골 지역 공습, 공개 처형 등으로 봉기를 분쇄하고자 하였다. 약 백만명의 아프간 사람들이 이 시기에 사망하였으며, 대체로 공습 사망자들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카불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보다 확대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국외로 도주하는 난민 행렬은 불어나 1천 6백만 인구 중에서 5백만명이 난민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저항의 핵심이 된 이슬람 단체들 - 집체적으로 지하드 전사(jihad fighters) 혹은 무자헤딘(mujahidin)이라고 불린 - 은 파키스탄과 이란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이 분쟁을 냉전의 시각에서 바라본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는 저항군에게 대량의 지원을 실시하였으며, 이들 대다수는 파키스탄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이러한 무기 공급로로 말미암아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 파키스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파를 키우는 데 있어 커다란 능력을 갖게 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기타 무슬림 국가들로부터 수천명의 무슬림들이 저항군에 가담하였다. 대부분은 파슈툰 파벌들과 함께 싸웠는데, 이들은 파키스탄과 사우디 아라비아, 굴부딘 힉마탸르(Gulbuddin Hikmatyar)의 히즈비 이슬라미(Hizb-i Islami), 압둘 라술 사야프(Abdul Rasul Sayyaf)의 이티아디 이슬라미(Ittihad-i Islami)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도 있었는데, 그는 1980년대 초에 파키스탄에 건너와 이들 외국인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필요한 훈련 시설들을 건설했다.

 

 < 역주:

히즈비 이슬라미 - 이 단체의 명칭은 '이슬람 당'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한다. 굴부딘 힉마타르에 의하여 1975년 파키스탄에서 창설되었으며, 그 원류에는 다시 1969년,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카불 대학교 교사 및 학생들이 만든 무슬림 소년단(Muslim Youth organization)으로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1979년 굴부딘 힉마타르가 이끄는 히즈비 이슬라미 굴부딘 파벌과 물라비 요나스 칼리스가 이끄는 칼리스 파벌(Khalis faction)로 쪼개졌다고 한다. [3]

 

이티아디 이슬라미 - 이 단체의 명칭은 Islamic Union for the Liberation of Afghanistan (Ittehad-e Islami bara-ye Azadi-ye Afghanistan)이며, 198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저항운동을 결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되었다고 함. 지도자는 압둘 라술 사야프(Abdul Rasul Sayyaf). 1985년 결성된 Peshawar Seven의 일원이 된다. [4]

 

Peshawar Seven - Seven Party Mujahideen Alliance로도 불리며, 1985년 소련 및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정권과 싸우는 7개 정파들의 동맹체로 발족하였다. 가맹 그룹은 Khalis faction (Khalis), Hezbi Islami (Hekmatyar), Jamiat-i-Islami (Rabbani), Islamic Union for the Liberation of Afghanistan (Sayyaf) 의 4개 이슬람 단체들과 National Islamic Front for Afghanistan (Gailani), Afghanistan National Liberation Front (Mojaddedi), Revolutionary Islamic Movement (Mohammadi)의 3개 전통주의 단체들이다.[5]  >

 

 

 

제 2단계 : 제네바 협정으로부터 무자헤딘 내전에 이르기까지 (The Second Phase: From the Geneva Accords to the Mujahidin's Civil War)

 

 전쟁을 끝내려는 협상의 정점은 1988년 제네바 협정(Geneva Accords)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핵심 요소는 소련이 1989년 2월까지 모든 정규군 병력을 철수한다는 합의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의 막대한 지원 속에서 공산주의 정부는 1992년 초까지 권력을 유지했으며, 반면 유엔은 모든 정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과도적 절차를 이끌어내고자 광적으로 노력했다. 이는 실패했다. 마침내 미국과 동맹국들은 탈레반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유엔의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아프간에 대한 국제적 개입 부재로 말미암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원조국들은 지속적으로 원조를 실시하긴 했지만,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원조국들은 피곤해지기 시작했고, 지구촌 다른 곳에도 인도적 원조가 필요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원조는 만성 부족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2년 초, 타지크족 군대의 지도자 아흐메드 샤 마수드(Ahmed Shah Massoud)와, 과거 나지불라(Najibullah)와 동맹관계였던 강력한 우즈벡족 민병대의 대장인 압둘 라시드 도수툼 장군(Gen. Abdul Rashid Dostum), 하자라족 일파인 히즈비 와닷(Hizb-i Wahdat)이 함께 뭉쳐 소위 북부 동맹(Northern Alliance)을 결성하였다. 4월 15일, 정부군과 동맹관계에 있던 비 파슈툰족계 민병대들이 반란을 일으켜 카불 공항을 접수하면서 나지불라 대통령이 유엔의 정권이양 절차 이전에 국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 나지불라는 카불의 유엔 시설로 도피하였으며, 이후 4년간 이곳에 머물게 된다. 4월 25일, 마수드는 카불에 입성하였으며, 다음날 북부 동맹의 파벌들은 파키스탄의 하수인(protege)인 굴부딘 힉마탸르가 이끄는 히즈비 이슬라미를 배제한 연립정부를 세우는 데에 합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힉마탸르는 카불에 대한 무차별 대규모 로켓 공격을 가하였으며, 이는 1995년 2월 카불지역 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된다.

 

(소련의 위성국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제 4대 대통령 무하마드 나지불라 아흐마자이의 모습. 카불 태생으로 1975년 카불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PDPA의 파르참 파벌에 가입했으며, 1978년 사우르 혁명으로 혁명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칼크 파벌과의 알력으로 해임되고 유럽으로 망명하게 된다. 1979년 소련 침공으로 카불로 돌아온 뒤 1981년 정치국 정규멤버가 되었으며, 1986년에는 소련의 압력으로 밀려난 바락 카르말 대통령 후임으로 선출된다. 소련의 철군과 내전의 격화로 말미암아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고, 나지불라는 1992년 사임한다. 이후 카불의 UN 시설로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도스툼으로부터는 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뒤 잔인하게 고문당한 뒤 처형당한다. 그의 시체는 탈레반에 의해 카불의 아리아나 광장에 전시되었다. [6])

 

 1992년 6월, 힉마탸르가 아직도 카불을 로켓으로 공격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미아티 이슬라미(Jamiat-i Islami)의 타지크족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라바니(Burhanuddin Rabbani)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Islamic State of Afghanistan, ISA)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하자라족 파벌인 히즈비 와닷과 사야프의 이티하디 이슬라미간의 전투 과정에서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납치 또는 살해되었다. 통치 회의(슈라(shura))에 자신의 지지자들이 쌓여있는 것을 확인한 뒤, 라바니는 1992년 12월 다시금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94년 1월, 힉마탸르는 1992년 초까지 나지불라 정권과 동맹관계에 있던 강력한 우즈벡족 민병대 지도자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 장군과 동맹을 맺는다. 이들은 라바니와 그의 국방장관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몰아내기 위하여 카불에서 대규모 내전을 벌인다. 1994년 한해에만 카불에서 25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 대부분은 로켓공격 및 포격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이었다. 1995년에 이르러 도시의 1/3 가량이 잿더미가 되었다.


 

제 3단계: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정복 (The Third Phase: The Taliban's Conquest of Afghanistan)

 

 이 시기, 국가 나머지 지역은 다양한 파벌들이 나눠갖고 있었으며, 많은 무자헤딘 지휘관들이 각자 지역 군벌로서 행세하고 있었다. 인권단체들은 자주 자신들의 사무소가 털리고, 차량이 납치당하고, 인원들은 위협받는 상황을 겪고 있었다. 탈레반(taliban)이 일어선 것은 이러한 배경 속의 일이었다. 자신들이 승리한 뒤에 벌어진 혼란 상황에 환멸을 느낀 전직 무자헤딘들이 칸다하르 주(Qandahar province)의 전직 무자헤딘이었던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Mullah Mohammad Omar)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 집단은 구성원 중 상당수가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스스로를 탈레반, 즉 학생들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 이 집단의 핵심 멤버가 된 사람들에는 다른 저명한 파슈툰족 파벌들의 지휘관들과 전직 칼크 PDPA 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목표는 안정을 되찾고 (자신들의 해석에 따른) 이슬람 법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역 군벌들에 대하여 공격을 실시하여 성공하였으며, 이로써 군사적 명성을 얻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1994년 10월,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중앙아시아로의 무역로를 안전하게 하는 한편 카불에 자신들과 밀접한 정부를 세우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탈레반에 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들의 상품을 중앙아시아로 안전하게 보내기를 갈망하던 파키스탄 상인들은 곧 탈레반의 가장 강력한 재정 후원자들이 되었다. 1995년 9월, 탈레반은 헤랏(Herat)을 장악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Islamic State of Afghanistan)과 이란과의 지상 통로를 절단하게 된다. 탈레반이 헤랏 점령에 있어서 혁신적인 기동전을 선보인 배경에는 파키스탄이 이에 필수적인 자산들을 지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카불을 점령하고, 마수드는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퇴각한다. 마수드는 카불을 상실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이란과 러시아의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한다. 탈레반에 대항하기 위한 북부동맹이 재창설된 것이다.

 

 1997년, 탈레반은 국명을 아프카니스탄 이슬람 토후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으로 정한다; 물라 오마르는 아미르-울 모미닌(amir-ul momineen)(신앙인들의 지휘관)라는 직함을 얻게 된다. 탈레반 당국은 자신들이 지배한 지역에서 자신들 방식의 이슬람 법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즉, 건강목적을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특정 범죄들에 대한 태형(corporal punishment)를 도입하였다. 여성들이 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카불과 여러 도시들의 여자 학교들을 폐쇄하였다. 단, 탈레반 치하 지역에서도 여성 국민학교들은 계속 운영되었다. 또한 탈레반은 여성들의 복장에 있어서 엄한 규칙을 강요하였고, 남성들에게는 턱수염을 기르게 하는 한편, 서구식 두발이나 복장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기관을 들자고 하면, 그것은 아마 도덕 향상 및 악행 방지부 (Ministry of Promotion of Virtue and Prevention of Vice)(al-Amr bi al-Ma'ruf wa al-Nahi 'an al-Munkir)일 것이다. 이 부서는 도덕적 행동과 관련되어 탈레반이 선포한 모든 포고들을 강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탈레반은 1997년에서 1998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자신들의 통치영역을 넓히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이곳에서는 도스툼 장군이 중요도시 마자리 샤리프 시(city of Mazar-i Sharif) 서쪽의 시베르간(Shiberghan) 지역에 사령부를 두고 총 5개의 주를 다스리며 일종의 작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마자리 샤리프 시에서는 도스툼의 군대와 히즈비 와닷 군대가 불안정한 동맹을 이룬채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즈비 와닷은 마자리 샤리프 시의 수 많은 하자라족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1997년 5월 19일, 도스툼 장군의 부관 중 하나인 압둘 말리크 팔라완 장군(Gen. Abdul Malik Pahlawan)(일반적으로 "말리크(Malik)"라고 알려져 있다)이 도스툼 장군과의 불화를 기화로 탈레반과 협정을 맺고, 도스툼 군대의 지휘관 여럿과 약 5000여명의 병사들을 감금한다. 탈레반이 마자리 샤리프에 입성하자 파키스탄은 이 기회를 빌어 신속하게 탈레반을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UAE)도 탈레반을 승인한다. 그러나 말리크와 탈레반간의 동맹은 탈레반이 지역 하자라인들을 무장해제시키려 시도함에 따라 곧 깨지게 된다. 마자리 샤리프 시 거리에서 수백명의 탈레반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약 3000여명이 포로가 되어 즉결처형되었다. 1998년 8월, 탈레반은 마침내 마자리 샤리프 시를 점령하였으며, 이어 하자라족 민간인 2000여명 이상을 처형한다. 이후 도스툼 장군은 터키로 망명을 떠난다; 말리크 역시 도주하였고, 일설에는 1997년부터 이란에서 망명생활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탈레반은 마자리 샤리프 시를 점령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하자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중부 고원 촌락인 바미안(Bamian)을 점령한다. 이 일이 벌어진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과거의 북부 동맹은 자신들과 다른 민족들로 구성된 파벌들 - 특히 전직 잘랄라바드 슈라(Jalalabad shura(council)) 구성원들이 주도하는 파슈툰족 집단인 동방위원회(Council of the East) 등이 포함되었다 - 의 지원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어 명칭을 아프가니스탄 구원을 위한 통일 이슬람 전선(United Islamic Front for the Salvation of Afghanista), 짧게는 통합 전선(United Front)라고 개칭하게 된다. 라바니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Islamic State of Afghanistan)의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다. 도스툼 장군은 통합 전선 내에서 계속 군대를 지휘했다; 히즈비 와닷의 수장인 무하마드 카림 카릴리(Muhammad Karim Khalili)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자라족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던 시아파 계열 단체 하라카티 이슬라미(Harakat-i Islami) 역시도 통합 전선의 일원이 되었다. 사야프도 통합 전선 내의 지도자 위치를 유지했다; 그러나 휘하 병력 다수는 탈레반에 투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8월, 미국은 파키스탄 접경지역에 위치한 빈 라덴의 유명한 훈련장을 공습한다. 이 공습은 나이로비(Nairobi)와 다르 에스살람(Dar es-Salamm)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에 대한 폭탄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1999년 10월, 유엔은 탈레반에 빈 라덴을 넘기라며 제재를 가했다. 탈레반 항공기의 이착륙이 금지되었고, 해외 탈레반 자산은 동결되었다. 탈레반이 빈 라덴을 넘기지 않자, 제재는 확대되어, 2000년 12월 19일, 탈레반에 대한 무기 금수가 이뤄지고, 탈레반 관리들의 해외 여행이 금지되었으며, 해외 탈레반 사무실들이 폐쇄되었다.

 

(2001년 8월 26일, 카불에 잠입한 RAWA라는 인권단체가 비밀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의 일부 장면. 비디오에는 2명의 탈레반 종교경찰이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벗은 혐의를 받은 한 여성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겨있다고 한다. [8])

 

 2000년에서 2001년에 이르기까지, 북동지역에서 마수드 군대와 탈레반간의 전투는 지속되었으며, 탈레반은 2000년 9월 탈로칸(Taloqan)을 점령하였고, 연합 전선은 동쪽의 파이자바드(Faizabad)로 밀려났다. 이 지역의 전투와 함께 심각한 가뭄이 전국을 덮치면서 수쳔명의 민간인들이 파키스탄 내의 구호캠프로 밀려들었다. 중부 바미안 주에서는 2000년 12월, 히즈비 와닷과 하라카티 이슬라미 군대가 잠시동안 야카오랑 마을(town of Yakaolang)을 점령했다. 그러나 2001년 1월 8일 탈레반에게 다시 내주고 만다. 마을을 탈환한 탈레반은 보복으로 최소한 17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 마을은 1월에서 6월에 이르기까지 여러차례 주인이 바뀐다; 탈레반은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밀려나면서 이 마을과 함께 주변 마을들까지 모두 불살랐다. 2001년 초, 도스툼 장군은 마수드와 만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도스툼 군대는 2001년 중반 무렵 탈레반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재개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미아티 이슬라미 계열 전직 헤랏 주지사이자, 탈레반의 구금으로부터 2000년 경 탈출해나온 이스마엘 칸(Ismeal Khan)의 군대가 중서부 지방에서 탈레반에 대항한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비디오 카메라에 폭탄을 숨기고 언론인으로 위장한 자살 폭탄테러범에 의해 암살당한다. 연합 전선 지도자들은 이 암살이 빈 라덴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관찰자들은 이 암살로 인해 9월 11일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가해진 테러공격 이후 시기를 이끌어갈 연합 전선의 가장 유능한 지도자가 사라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카불 북쪽 판시르 계곡에 자리잡은 일명 판시르의 사자(Lion of Panjshir) 아흐메드 샤 마수드의 무덤. 마수드는 소련 침공 시기와 탈레반 지배 시기를 통털어 해외로 도주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 유일한 지도자로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7])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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