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러시아-소련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정규전, 1993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저자 : 로버트 F. 바우만 박사 (Dr. Robert F .Baumann)
추천의 글 (Foreword)
(번역 생략)
서문 (Preface)
1917년 10월의 볼세비키 혁명 이전, 러시아인들은 구식 율리우스 달력 체계(old Julian calendar)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레고리 달력 체계(modern Gregorian calendar)와 비교했을 때 19세기 기준으로 12일이 늦게 된다. 이 연구서에서 인용된 19세기 날짜들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기록된 것이다. 물론 이 연구서의 20세기 날짜들은 오늘날의 달력 체계대로 기록된 것이다.
번역(인명이나 사건 등의 러시아어->영어 표현 과정; 역자 주)에 있어서 이 원고에서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의회 도서관 체계를 따랐다. 우선, 러시아 "강세 표기(hard signs)"를 영어로 옮기지 않았다. 둘째, 이름과 장소 등에 대한 철자법에 있어서, 가능한 한 이미 영어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식으로 기재하였다.
본인은 이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도움에 특히 감사드리고 싶다. 즉, 로버트 E. 베를린, E. 윌리스 브룩스, ... (이하 생략)
제 1장 - 러시아의 중앙 코카서스 지방 정복 : 산악민들과의 전쟁
(Russian Subjugation of the Central Caucasus: The War Against the Mountaineers)
산악민들과의 전쟁 (The War Against the Mountaineers)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801년에서 1864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의 코카서스 전역은 현대전에 있어서 대단히 흥미롭고 교훈을 주는 에피소드들로 이뤄져 있다. 중앙 코카서스의 산악지대와 숲 속에서 버티고 있는 의지력 강하고 책략에 능한 무슬림 부족들과의 싸움에 있어서, 러시아 군부는 서방식 재래식 군대가 발달된 수송수단이나 통신수단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이 부재한 지역의 비서방적, 비정규적 군대와 싸울 때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곤란한 상황들을 다수 겪게되었다. 반복되는 러시아군의 실패와 오판, 저항군의 대단히 유능한 리더십 등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군 분석가들은 자신들의 접근방법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가 코카서스 내부 지역을 정복하게 된 것은 지역 환경과 적들의 성격을 러시아 측이 서서히 인식하고, 과거의 지적, 조직적 타성을 극복하면서 자신들의 전술과 전략을 적응시켜 갔으며, 최종적으로 전쟁에 있어 무자비하고도 조직적으로 적을 무찔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세기 무렵 러시아 제국주의 세력이 코카서스 지역으로 남진했던 배경에는 지정학적 논리가 깔려 있었다. 자연적 장벽이나, 혹은 한때 강력했던 오스만 터키 내지는 페르시아의 방해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가 코카서스로 침입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비록 러시아가 코카서스 지역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지난 이반 4세 (일명 이반 뇌제 (Ivan the Terrible)) 시기 코카서스 산간지대 북쪽 가장자리에 있던 소국인 카바르다 왕국(kingdom of Kabarda)과의 관계가 최초이지만, 이 지역에 러시아가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로 힘을 갖게 된 것은 2세기 무렵이 지난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1762-96)) 치세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1785년, 첫번째 코카서스 지역 총독(viceroy)으로 임명된 그레고리 포템킨 공(Prince Grigory Potemkin)의 노력과, 천재적 장군이었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General Alexander Suborov)의 노력에 힘입어, 러시아군은 코카서스 깊숙히 진군하여 러시아의 힘을 카스피해와 흑해 연안까지 확장시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황제가 사망하면서 러시아 세력은 소위 말하는 코카서스 라인(Caucasian Line)까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코카서스 라인은 일련의 요새지들과 코삭 정착지들로 이뤄진 것들로서, 코카서스 북쪽 경계에서 흐르고 있는 쿠반 강(Kuban River)과 테렉 강(Terek River)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코카서스 라인은 토지와 주민, 통신망 측면에 있어서 러시아 유효 통치 범위의 최남단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대제))
1801년, 러시아가 조그마한 기독교 왕국이었던 그루지아(Georgia)를 합병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코카서스 심장부에 장기적인 이해관계(long-term stake)을 갖게 된다. 1799년, 그루지아 국왕 게오르기 12세(Georgii XII)는 주변의 수많은 무슬림 이웃들 - 특히 터키와 페르시아 - 에 의해 자국이 파괴될 것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의 보호를 청하게 된다. 페르시아를 격퇴하고 옛 그루지아 영토를 무력으로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1세 황제(Tsar Alexander I)는 흑해 및 카스피해에서 코카서스 산악지대 남쪽 가장자리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권을 획득(obtained title)하게 된다. 그러나 그루지아에 대한 종주권(sovereignty)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북쪽으로 코카서스 라인까지 이르는 지역에 끼어있는 영토들에 대해서도 요구를 하게 된다(지도 1 참조). 그러나 이 지역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던 무슬림 부족들은 기독교 국가에 별로 충성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 그루지아는 남부 코카서스의 황제 지배권 내의 한 섬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된다. 코카서스에서의 러시아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코카서스 라인과 그루지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부족들을 복속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도 1. 19세기 러시아 남부 변경지대)
(※ 사진들을 클릭하면 커집니다. )
전장 개요 (Theater Overview)
코카서스 지역은 수많은 고대 민족들의 고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역할을 수행하였고, 문화의 교류장 내지는 전쟁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세기 초반, 이 지역의 인구는 약 2백만명에 육박하였다. 이들 중에 두드러진 것은 남부 지역의 기독교 민족인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Armenia)가 있었고,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는 무슬림 민족인 아제르인(Azeris)들이 두드러졌다. 덜 알려지긴 했지만, 러시아의 전략 문제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 내륙 산간지대와 숲지대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부족민들이었으며, 이들은 도합 50만명 가량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러시아 지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저항 거점들은 동부의 다게스탄(Dagestan), 체첸(Chechnia), 아바리아(Avaria) 등과 서부의 쿠반 강 분지(Kuban River basin) 지역이었다.
(그레고리 포템킨 공)
저항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 중앙 코카서스의 저항군 지역은 흑해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약 600킬로미터 폭과, 북쪽의 그로즈나이아(Groznaia) 요새로부터 남쪽의 그루지아 수도 트빌리시(Tbilisi)에 이르는 약 200킬로미터의 깊이를 갖는 영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저명 지형지물로는 코카서스 산맥(Caucasus Mountains)을 꼽을 수 있으며,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가파르고 좁은 몇몇 오솔길들로 제한되었다. 거친 산봉들과 깊은 계곡들로 말미암아 다게스탄은 수많은 작고 이격된 경작 가능지대(arable terrain)들의 고립지대(pocket)들로 구성되게 되었으며, 이들은 짙은 숲들로 둘러싸인 특색을 갖고 있었다. 이들 숲들은 주변 체첸, 아바리아, 기타 산악 여러 부수민족들 지역에 특징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산악 및 숲속 부족에게 가해진 고립적 상황은 이들의 문화에도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다양한 언어와 방언들을 갖고 있었으며, 최소한 러시아로 인한 임박한 위협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뭉쳐지기 전까지는, 서로 유사성이 거의 없었다.
코카서스 내륙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처음에는 적당한 규모로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초반 20여년 동안, 코카서스의 러시아 지휘관들은 터키와 페르시아에 대한 전역을 수행하였고, 카스피해 연안 지대와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지역 일부를 손에 넣었다 (지도 2 참조). 내륙 지역의 불령 부족들(unruly tribes)이 러시아 지배에 있어서 명백한 위협이라는 사실은 매우 점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항이 격화됨에 따라, 러시아는 반란이 심한 산악지대와 상대적으로 평정된 산아래 지역 부족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산들을 따라 일련의 경계요새지대(cordon of fortified points)들을 건설하게 된다. 러시아 전초들과 근접한 산아래 부족들은 러시아군에 대항할 능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했으며, 오히려 산악민족의 습격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러시아 지휘관들은 점차 산악민족들을 가둬두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으며, 단지 북 코카서스의 현상 유지만을 위해서라도 서서히 병력을 증가시켜야 된다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러시아 장군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에르멜로프(General Aleksei Petrovich Ermolov)는 돌격(storm)이나 포위(beseige)가 어렵다는 점에서 이 산악지대를 "거대한 요새(great fortress)"라고 보았다.
(지도 2. 1763-1914년 기간의 코카서스 및 트랜스코카서스 지역)
러시아가 중앙 코카서스를 복속시키는 과정은 대략적으로 3단계 시기로 구분된다. 첫번째 시기는 1801년에서 1832년간의 기간으로, 러시아는 사용할 수단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단지 교역과 우호 촌락들에 대한 산악민족들의 습격을 방지하는데 맞춰진 일종의 경찰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이따금 코카서스 군단(Caucasian Corps)이 활동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소규모 수비대들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1832년에서 1845년 사이 기간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 샤밀(Shamil)의 영도에 따라 산악민들의 저항이 거세졌으며, 엄청나게 불어나 러시아 지배의 안정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일회성의 대규모 작전으로 산악민들을 분쇄하려던 여러 차례의 러시아측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845년에서 1859년 사이, 러시아는 대규모 병력 파견과 함께 보다 끈질기고 조직적인 접근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이 시기 러시아군은 산악민족들의 거점 가장자리 지역에 대하여 가혹한 전역을 펼치면서 이들 치하의 인구와 영토를 조직적으로 감소시키게 된다.
러시아군의 증가는 코카서스 전쟁(Caucasian War)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1818년,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 에르멜로프 장군은 휘하에 단지 정규군 6만명만을 갖고 있었다. 1840년대 항쟁이 점차 격화되면서 러시아군의 규모도 점차 증가하여 20만명에 육박하게 된다. 결국 일명 "코카서스의 정복자(conqueror of the Caucasus)"라고 불리는 A.I.바리아틴스키 장군(General A.I.Bariatinskii)에 대한 당대 연대기작가 A. 지세르만(Zisserman)이 말한, '이 장군의 위대한 계획들은 그가 30만명의 병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것이었을 것이다'의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러시아군은 정규군 부대들과 비정규군(대체로 코삭) 부대들의 혼합체였다. 정규군의 경우 대다수가 러시아계(ethnic Russians)로서, 제국 내부지역에서 선발된 농부들을 당시 유럽식 표준에 따라 훈련시킨 병력들이었다. 반면 코삭들의 경우, 세습적인 군사 계급의 일원이었으며, 변경에서 전사(warriors)와 식민가(colonists)의 이중 역할을 수행하곤 했었다. 소규모 토착민 민병대 - 일부는 토착민 장교의 지휘하에 있었다 - 역시도 추가적인 인력을 제공했고, 호송 임무에 많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토착민 비정규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그루지아인들이었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에르몰로프 장군. 산악민들과 최초로 대결한 러시아의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1816-27)이다.)
1801년의 어느 누구도 산악지대의 후진적 사람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그토록 거대한 규모의 병력이 필요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러시아인들은 알 수 없었지만, 수세기에 걸친 서로간 혹은 외부인에 대항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산악 민족들은 생존 전문가들이 되었고, 개개인의 꾀와 용감성에 기초한 전사 전통을 발전시켜오고 있었다. 전쟁 후반부에 이들이 일부 현대식 라이플들을 획득하기 전까지는, 이들 폭도들이 갖고 있던 무장은 세이버와 구식 머스켓, 대포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산악민족들은 유능한 방어 전술가이자 소규모 게릴라식 침공 전문가들이었다. 오랜 경험을 통하여, 이들은 우세한 적이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에는 절대로 싸워서는 안되며, 자연을 동맹으로 삼아 적이 불리한 조건으로 유인하여 싸워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산악민들이 군사적 미덕들을 갖고 있긴 했지만, 서로 간에 동맹이 자주 변화하였고, 서로 간의 옛 갈등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공통의 적에 대항한 싸움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연계조차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였다.
코카서스 전쟁(The Caucasian War)
그루지아 합병 이후의 약 30여년 동안, 러시아 당국은 이들 산악민들이 산발적인 경찰 활동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단순히 귀찮은 존재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인들이 소위 "무리디즘(muridism)"이라고 부르게 된 한 종교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834년에는 교활하고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샤밀(Shamil)이 나타나면서 저항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실로 우스꽝스러운 용어인 "무리디즘"이라는 말은 러시아인들이 "무리드(murid)"라는 단어로부터 만든 것으로, 이는 사도(disciple), 즉 해당 지도자에 가장 가까운 지지자들(adherents)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샤밀은 종교적 호소와 독특한 정치적 재치, 공공연한 힘에 의한 위협 등을 혼합하여 산악 부족들을 군사-정치 동맹으로 단결시켰고, 소위 나이브(naibs)라고 부르는 지역 지도자들 아래에 두었다. 이를 통하여 샤밀은 전쟁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 단순한 분쟁(contest)을 진짜 전쟁(real war)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단지 수년만에 그는 상비 보병대와 상비 기병대를 창설하였으며, 각 지역마다 징집병을 모집했고, 그의 누더기 군대는 점차 유럽식 정규군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샤밀은 계급 체계를 도입했으며, 이제 막 만들어진 휘하 포병대를 위하여 대포와 화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샤밀의 권력에 있어 전략적 중심은 동부 산악지대의 다게스탄 종족들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인력과 필수 보급품들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북쪽 사면의 삼림지역과 산언저리에 살고 있는 체첸 부족들의 지원 또한 똑같이 중요했다. 산악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레즈기안 부족(Lezgian tribes)의 도움 역시 단지 약간만 덜 중요할 따름이었다. 이 연구에서는 샤밀의 직접 통치하에 있던 동부 산악지역을 러시아인들이 복속시킨 과정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서부 코카서스(트란스쿠반(Transkuban) 지역과 흑해 연안지대로 이뤄진) 역시도 같은 시기에 군사행동이 벌어진 장소였다. 그러나 1821년부터는 별도의 전장이 된다. 비록 샤밀이 이들 트란스쿠반 지역의 부족들과 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기적 운명은 부분적으로는 이들로 인한 러시아군의 분산 여하에 달려있었다. 또한 압하지아인들(Abkhazians)과 기타 흑해 연안 부족들의 활동은 종종 러시아에 대항하여 외국 세력들이 간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영국의 외교적 지원 하에 있던 터키는, 코카서스 부족들의 봉기를 자국의 흑해 동부 연안 지역에 대한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한편 영국은 코카서스 문제를 일명 대 "동부 문제"(great "Eastern Question"), 즉 흑해 및 이와 연결된 해협에 관한 지배권 문제의 맥락으로 보았으며, 영국으로서는 러시아를 배제하고자 하려는 입장이었다.
에르멜로프 장군이 1816년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을 맡을 당시, 그에게는 이 지역이 러시아 역사 속에서 가장 긴 항쟁이 벌어지는 전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1812-13년에 나폴레옹을 무찌르고 러시아군이 자랑스럽게 파리 한가운데를 행진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시점에서, 러시아 제국의 군사력은 가히 무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에르멜로프는 군사 및 정치 상황에 대한 예리한 분석가였으며, 머지않아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자신이 보유한 자원의 한계점까지 소모할 내용임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에는 은폐된 은거지들로부터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었던 습격자들에 대항하여 에르멜로프는 700마일에 걸친 코카서스 지역 주변부를 방어할 책임이 있었으며, 이를 위한 방책으로 그는 테렉 강변의 그로즈나이아(Groznaia)나 체첸지역 변방 악사이 강(Aksai River) 너머의 브네자프나이아(Vnezapnaia)와 같은 요새를 구축하는 것을 선택한다. 또한 그는 다게스탄 주변부 일대로 적극적인 원정을 실시하여 타르쿠(Tarku), 쿠린(Kurin), 카지쿠무크 칸국(Kazikumukh khanates), 아쿠샤(Akusha), 그리고 대 체첸(Large Chechnia)과 소 체첸(Small Chechnia)을 제국의 직접 지배권 내에 두게 된다.
이로써 에르멜로프는 러시아의 코카서스 지역 수장 중에서 스스로 산악민들 - 이들은 이제까지 외부인들에게 거의 간섭당해본 적이 없었다 - 문제에 깊숙히 뛰어들어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에르멜로프의 군사적, 행정적 정책들의 효과성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의 업적을 살펴보자면, 그는 러시아 지휘관들 중에서 신속한 이동을 위하여 숲속으로 도로를 개통함으로써 호전적 체첸 부족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주요 수비대들과 러시아간의 통신망을 개통해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인물들 중 하나이다. 1812년 브네자프나이아에 요새를 구축함에 따라, 러시아는 거꾸로 산악 족장들에게 러시아의 침공을 경고하는 효과도 불러일으킨다. 에르멜로프는 우호적 부족의 엘리트들과 협조하였으며, 이들을 자신의 행정부의 관리로써 활용하였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에게 굴복하지 않는 부족들에게는 잔인하고도 보복성의 습격을 가했다는 점과 극명히 대조된다. 에르멜로프는 불복종에 대해서는 작물과 숲, 마을을 한꺼번에 파괴함으로써 엄청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에르멜로프는 어떤 부족이 단순히 우호적이라거나 적대적이라고 이분법적으로 항상 구분할 수는 없으며, 많은 마을들이 러시아 지배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편 1820년대 후반까지 다게스탄 지역의 저항은 극적으로 급증하게 된다.
1826년 에르멜로프의 보고에 따르면, 산악민들의 반란이 점차 신앙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 이러한 변화는 불길한 징조였다. 1826년의 체첸에서의 한 봉기 - 러시아가 장악한 남부지역에 대한 페르시아의 침공과 겹치는 시기이다 - 는 고요라는 환상(illusory calm)을 깨버렸고, 니콜라이 1세 황제로 하여금 지난 10년간의 진전이 불충분한 것이었음을 확신하게 하였다. 에르멜로프는 머지 않아 황제가 총애하는 I.F. 파스케비치 백작 (General (Count) I.F. Paskevich)에게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직을 넘겨주게 된다. 니콜라스 황제의 위임을 받은 파스케비치는 휘하 행정부를 조직적으로 러시아화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다게스탄과 상 페테르부르크 사이의 경우보다 문화 및 관습에서 훨씬 상이하고,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는 지역의 민족들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하는 잘못된 가정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기독교계인 그루지아인들은 고분고분했지만, 무슬림계인 산악 부족들은 분명 아니었다. 한편 20년대의 나머지 시기에 걸쳐(throughout the remainder of the decade)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전쟁(1826년)과 터키와의 전쟁(1828-29)이 러시아 지휘관들의 관심을 끄는 사이에 이 지역의 러시아군 존재감은 점차 약화되어 있었다. 이 시기, 종교 지도자이자 정치 지도자인 카지 물라(Kazi-mullah)가 산악 지역에서 지지자들을 모으고 1828년 러시아에 대한 성전을 촉구하게 된다. 이후 몇년간 산악 부족민들은 러시아와 동맹 중인 작은 왕국 타르쿠(Tarku)를 공격했고, 러시아의 요새들인 브테자프나이아, 부르나이아(Burnaia), 데르벤트(Derbent)를 공격했다. 부족한 자원상황 속에서도 파스케비치는 이 지역의 러시아 방어들을 약간씩 강화시키긴 했지만, 러시아는 결국 산악민들의 저항에 대하여 타협하든지 아니면 이들을 전멸시키거나 하는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가 이룬 성취 중에서 가장 큰 기여를 꼽는다고 한다면, 아마 이 지역에 대하여 최초의 군사적 지형조사를 실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834년에 코카서스 지역에 대해 어느 정도 완결된(reasonably complete) 최초의 지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산악 내륙지대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아직도 대략적인 부분이 많았다. 1831년 폴란드에서 봉기가 일어남에 따라 러시아의 관심은 코카서스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고, 파스케비치 원수(Field Marshal)(1829년 기준)가 자리를 뜨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파스케비치 시기에는 코카서스 평정에 있어서 별다른 진전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파스케비치 장군(백작)은 다른 곳의 사건들로 인하여 산악민들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산악민들에 대항한 군사행동에서 특징적인 것으로는 1830년 G.V.로센 중장(Lieutenant General G.V. Rosen)이 카지 물라를 생포하기 위하여 고향 마을 김리(Gimri)로 실시한 원정을 들 수 있다. 로센은 약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속으로 진군하면서 지역 부족들을 항복하도록 만들긴 했지만 카지 물라를 생포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하지만 로센은 러시아의 무력의 우세함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판단하고 부대를 물리게 된다. 그러나 이들 부족들은 다시 과거의 행태로 돌아갔고, 원정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셈이 되었다. 19세기 코카서스 지역 전쟁에 대한 러시아 역사가였던 N.F. 두브로빈(N.F. Dubrovin)의 말을 빌리면, "이 원정은 우리 측에 단호함과 끈질김이 없으며, 명령 속에 확신이 없었음을 증명해 준 것에 불과했다" 라고 할 수 있다. 두브로빈의 설명은 특히 로센이 받은 모순된 지침에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한편으로는 산악민들을 복종시켜야 했으며, 반면 군사력 사용을 최소화하면서 상업관계를 증진시키도록 되어있는 상태였다. 또한 로센에게는 파스케비치가 누렸던 전장 전반에 대한 지휘권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전쟁성 장관 A.I. 체르니셰프 공(Prince A. I. Chernyshev)으로부터의 1835년 지침에는, 다음 해의 목표들과 사용할 병력의 규모, 각각의 야전 지휘관들에 대한 것들까지 특정되어 있었다. 현명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이 정책은 실패하고 만다.
로센이 김리로부터 퇴각하자마자, 카지 물라는 물라들 및 지역 부족 원로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자신이 세운 동부 코카서스 부족들을 통합하여 러시아인들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제시한다. 한편 로센은 체르니셰프에게 러시아가 장악할 능력도 의도도 없는 지역에 대한 산발적 원정이란 무의미함을 보고한다. 이러한 행동들의 결과는 단지 토착민들을 일시적으로 흩뜨리는 것 뿐이며, 장기적으로는 이들에게 반감을 심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센을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이 위협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산악민들의 호전적 성격과 민활함 탓에, 이들이 카지 물라 아래 통일된다면 러시아의 지배에 있어서 분명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코카서스 라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로센의 수중에 있는 15개 보병연대(54000명) 및 수비대 병력들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필요로 했다.
1832년 김리에 대한 러시아 원정 당시, 카지 물라의 급작스런 죽음이 잠시 러시아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긴 했지만, 저항의 종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후 벌어진 일은 모든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잠시의 공백을 거쳐 카지 물라의 부관인 샤밀(Shamil)이 이맘(imam) 직을 승계하였으며, 그는 자신의 스승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나 실용적 조직가로서 모두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이슬람 신앙의 전통을 잘 교육받은 샤밀은 또한 전쟁에 필수적 교훈들도 흡수함으로써 막강한 전략가임을 드러내게 된다. 앞서의 20여년간의 전투 동안, 산악민들은 러시아인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기 위해 필요한 군사력 집중 및 협조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여로 말미암아, 산악민들은 통상적 습격활동 이상으로 복잡한 공세적 전술작전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러시아인들은 독립 분견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단지 수 개 중대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할 지경이 되었다. 산악인들은 기강이 유지된 부대(disciplined formation)를 격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증명되었으며, 특히 포병을 극복할 만한 무언가는 전혀 갖고있지 못했다.
그로 인하여 러시아 지휘관들 사이에 자리잡은 자만심은 183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카지 물라를 격퇴하고도 그 성과를 확대하여 반군들을 공세적으로 압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산속의 적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질적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코카서스 군단(Caucasian Corps)의 지휘관은 관심을 흑해와 카스피해 해안선을 방위하는 데에 집중한다. 실질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수동적 자세를 취했으며, 적의 습격에는 반응했지만 산악 부족들을 어떤 조직적 형태로 공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러시아인들이 동시에 저지른 또다른 실수는 산악 주변 지역의 순종적인 부족들에 대한 제국 지배를 강화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는 향후 커다란 말썽을 일으키는 발단이 된다. 이들 지역의 우호적 민족들은 산악 지대의 호전적인 이웃들로부터의 지속적인 협박과 약탈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834년에 산악민들은 아바르 칸국(Avar khante)의 중심지 쿤자크(Khunzakh)를 타격하여 당시 러시아에 충성하던 지배 가문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정적인 지배란 불가능하였다.
러시아측이 코카서스 지역 항쟁에 있어 전반적인 접근법 개발에 실패한 반면, 샤밀은 그렇지 않았다. 이 새로운 이맘은 숨쉴 공간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산악 부족들이 이제껏 알지 못했던 수준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비록 샤밀이 신앙적 권위에 근거하여 권력을 잡긴 했지만, 그는 또한 숙련된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가용한 모든 자원들을 끌어모아 고집불통으로 독립적 성향을 가지려던 족장들 사이에서 동맹을 이끌어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서 빗나가지 않았는데, 이는 1837년 러시아 황제가 제시한 제국 권위를 인정하는 댓가로 사면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대신 샤밀은 산악 지대의 방어력을 믿는 쪽을 선택했다. 그는 체첸에서 러시아쪽에 노출된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마을에서 철수하여 숲속 깊이 이동하도록 종용했고, 이로써 이들의 취약성을 감소키는 한편, 러시아군으로 하여금 이들의 음식과 재산, 노역 등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인들에게 파괴된 마을의 주민들이 다음 추수 시기까지는 인근 부족들에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협조 시스템을 구축했다. 샤밀은 자신의 사령부를 안디 강(Andi River)가의 산간 깊숙히 자리잡은 요새화된 촌락인 아쿨고(Akhulgo)에 위치시켰다 (지도 3 참조). 험준한 통로로만 접근이 가능하고, 돌산 꼭대기에 위치하며 3면이 가파른 계곡면으로 둘러싸인 아쿨고는 이상적인 자연 방어진지였다.
(지도 3. 아쿨고 전역, 1839년)
1839년 러시아인들이 샤밀을 생포하기 위하여 아쿨고에 대한 원정을 결심하였을 때, P.Kh. 그라베 장군(General P.Kh. Grabbe)은 브네자프나이아에서 시작하여 샤밀을 지원하는 양개 요새인 살라타우(Salatau)와 굼벳(Gumbet)을 통과하는 약 50마일에 이르는 행군로를 선정하였다. 그라베는 이 경로를 거쳐가면서 샤밀의 군대를 격파하게 되면 아쿨고 수비대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한편, 안디 강 서안에 위치한 토착민들의 지원병을 차단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리라 생각했다. 또한 이 축선을 따라 거둔 성공은 타르쿠와 쿠믹 평원을 방어하는 노출된 러시아 방어진지들을 보호하는 효과도 거둘 것이었다. 이후 안디 강변의 아쿨고와 인접한 마을인 아실타(Ashilta)에 도착하게 되면 러시아인들이 쿤자크(Khunzakh)에서 테미르-칸-슈라(Temir-Khan-Shura)에 이르는 통신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라베의 소위 체첸 분견대(Chechen detachment(otriad))는 6616명의 병력과 16문의 야포를 가지고 5월 21일 브네자프나이아를 출발하여 살라타우를 쿠믹 부족들과 분리시키는 산악 능선을 가로질러 탈라-수 계곡(Tala-su valley)에 숙영지를 설치한다. 아프셰론 연대(Apsheron Regiment)에서 2개 추가 대대가 도착하였기 때문에 - 이후에도 1개 대대가 더 온다 - 이들의 총 병력은 9개 대대 약 8000명의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부대는 굼벳을 통과하는 행군에 충분한 보급품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안디 강을 도강하는 이 시점으로부터는 테미르-칸-슈라에 이르는 통신선을 유지하는 것이 재보급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5월 25-26일, 사우크-불라크(Sauk-bulakh)의 위험한 고개를 건너는 데 성공한다. 약 12마일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과정에서 병력들은 매 발걸음마다 오솔길에 흩어져있는 돌들과 잔해들을 치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눈덮인 정상에 오르게 되었을 때, 부대에는 물과 연료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 둔중한 부대가 굼벳으로 향하는 돌산 속의 한줄기 오솔길을 따라 내리막을 가는 과정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코카서스의 좁은 산악통로를 따라 행군하는 러시아군 대열을 그린 초창기 인쇄물. 거친 지형과 요새화된 마을은 이들 지휘관들과 병력들이 맞아야 했던 어려움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5월 30일, 러시아군은 요새 촌락 아르구아니(Arguani) 앞에 도착하였고, 이곳에는 샤밀이 대부분 레즈기아인(Lezgians)들로 구성된 약 16000명의 부족민 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퇴각에 따르는 심각한 위험성 및 어려움 외에도 적과 교전하겠다는 바램이 더해져 그라베는 산악민들의 진지를 돌격(storm)으로 탈취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라베는 휘하 병력을 분할하여, 2개 대대를 요새촌락 측방으로 위치시켰다. 휘하 부대 지휘관들은 직접 아르구아니로의 접근로를 정찰하였으며, 17:00 무렵, 광정면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6월 1일, 러시아군은 마을 내로 침입하였으며, 매 건물을 하나씩 소탕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이제 수없이 많은 소규모 전투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러시아 일반참모부 장교였던 드미트리 A. 밀류틴 중위(Lieutenant Dmitrii A. Miliutin)(이후 이 전역에 대한 역사가가 되는 한편, 러시아의 전쟁성 장관이 된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전 9시, 아군은 이미 마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무리드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던 여러 집들의 평평한 지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혈사태는 어두워질 때까지 하루종일 지속되었다. 무리드들을 사클리아스(saklias)(주거지)에서 몰아낼 유일한 방법은 지붕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인화물질을 던져넣음으로써 기둥들에 불이 붙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에도 저들은 가옥 내에서 여러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으며, 종종 몰래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갈 방법을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완전히 불탄 시체로 발견되기 마련이었다. 저들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이들 중에서 가장 광신적인 자들은 이교도들 중 일부라도 죽일 수 있으면 만족하기도 하였다. |
샤밀은 자군 진지가 붕괴되고 있음을 깨닫고 퇴각하였다. 2일간에 걸친 전투로 아르구아니가 폐허가 되고 그라베 군은 장교 30명과 병사 611명을 상실하였다. 이 절망적인 전투 과정에서 샤밀이 입은 병력 피해는 약 200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진격을 속행하기 전, 러시아인들은 한때 마을을 이루고 있던 500여채의 석조 가옥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였다. 아르구아니 함락은 아쿨고를 향한 통로를 여는 것이었으며, 이곳에는 샤밀이 휘하의 가장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데리고 퇴각해 있는 상태였다. 러시아인들은 안디 강을 굽어보고 있는 키르카트 마을(village of Chirkat)로 진군하였고, 토착민들이 불태워버린 다리를 재건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공병들이 자신들의 일을 완료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사실 다리는 자재 부족으로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그라베는 쿠린 연대의 2개 대대와 휘하 기병 전체로 기동 분견대("flying detachment"(letuchii otriad- a highly mobile unit))를 구성하여 테미르-칸-슈라 통로로 이동 중인 보급부대(이들은 우호적인 토착민 민병대의 호위하에 움직이고 있었다)가 사그리틀(Sagrytl)에서 안디 강을 도하하는 것을 돕도록 파견하였다. 테미르-칸-슈라 통로를 확보하는 것은, 그라베의 후방지역에 있던 폭도들이 브네자프나이아로 돌아가는 통로를 절단하였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일단 새 보급품이 추진되자 이제 강 양편에 발판을 마련한 그라베는 아실타 및 아쿨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총 인구가 단지 4000명(이는 천여명의 무장 전사들까지 포함한 것이다)에 불과한 아쿨고에서는 샤밀이 주변 마을로부터 추가 병력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아쿨고는 사실 3개의 별도의 방어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 아쿨고(Old Akhulgo)와 신 아쿨고(New Akhulgo)가 각각 깊은 하천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이들 사이에는 몇몇 목제 다리가 놓여였었다), 또한 동, 북, 서쪽으로의 접근로를 모두 감제하는 안디 강의 한 단애(notch)를 장악하고 있었다. 신 아쿨고 전방인 남쪽 지점에는 모든 접근지점을 감제할 수 있는 석조 진지인 수르카이 탑(Surkhai's "tower")이 매우 가파른 바위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탑은 구 아쿨고와 신 아쿨고의 요새지들 사이를 잇는 핵심 연락망을 구성하고 있기도 하였다. 산악민들은 인공 장애물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탑들과 마을 앞에는 돌벽과 연락 참호망을 구축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연 방어 진지를 보강하였다.
그라베가 아쿨고에 도착할 무렵, 그라베의 유효병력은 약 6000명의 군대와 수천명의 토착민 민병대를 더한 것이었다. 아쿨고를 완전히 봉쇄할만한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라베는 안디 강 남쪽 편에서부터 공성전을 벌일 시도를 하였고, 소규모 전초대들로 이뤄진 초계선을 설정하여 밤마다(야음을 틈타) 이들을 전진시켜 포위망을 압축시켰다. 그러나 샤밀이 강 건너로의 통신망을 유지하는 한, 이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매번 봉쇄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러시아군 손실은 늘어갔으며, 대다수 인원은 엄폐를 위해 이 지형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 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그라베에게는 총공격을 감행할 만한 충분한 수의 공병(engineer) 및 포병, 포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샤밀은 러시아 사령부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위치인 아실타 근방의 능선에 병력을 위치시키는 방법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시도했다. 그라베에겐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인들은 공격 준비 징후를 눈치채고 산악민들을 격퇴시켰다.
그라베는 다시 아쿨고 봉쇄에 신경을 집중할 수가 있었고, 6개의 포병 진지를 설치하는 한편 강둑을 연하여 공병(sapper) 부대를 배치하였다. 그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수르카이 탑을 점령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단지 백여명의 수비대가 지킬 뿐이었지만, 대단히 어려운 목표였다. 6월 29일, 경야포 3개 포대가 탑으로 사격을 개시했지만 사각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요새지를 가리고 있던 돌무더기들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러한 짧고 무익했던 준비사격이 끝나고, 쿠린 연대의 2개 대대와 압셰론(Apsheron) 및 카바르딘(Kabardian) 연대의 각각 1개 대대씩이 경사지를 기어올라 탑으로 돌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315명의 사상자를 낸 채 격퇴당하고 말았다. 산악민들도 큰 대가를 치렀는데, 요새 지휘관인 알리 벡(Ali Bek)을 잃었던 것이다. 그라베는 즉각적으로 재시도하기로 하였고, 이번에는 보다 사각이 덜 가팔라서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법한 동쪽 편으로 4문의 야포를 위치시켰다. 이곳에 대한 지속적인 포격은 테미르-칸-슈라를 통한 대상(caravan)을 통한 탄약 재보급으로 가능했으며, 결국 방어자들을 진지에서 몰아낼 수가 있었다.
수르카이 탑 함락은 전술적 상황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러시아인들은 이제 아쿨고에 대한 포위망을 강력하게 조일 수가 있었으며, 경포 2문을 탑의 잔해 위에 올려놓을 수가 있었다. 7월 12일 추가 3개 대대가 도착하면서 그라베는 16일 돌격(storm)을 감행하겠다는 결심을 내린다. 적의 사기가 낮다는 정보에 일부 근거하고 있던 이 결심은 밀류틴을 크게 놀라게 만든다. 밀류틴은 당시 장군의 요청에 따라 공성전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러시아군 배치 계획을 막 완성한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선행 조치도 못한 상황에서, 무엇이 우리 지휘관을 그렇게 중요하고도 위험한 전법을 선택하도록 갑자기 몰아갔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직 아군 배치와 병력 배분조차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아군 포대들에는 아직 충분한 탄약이 비축되지 않았다; 보병들의 진군을 용이하게 할 포병준비사격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
그럼에도 그라베는 공격부대를 3개 부대로 편성하였으며, 이들 중 주공은 브랑겔 중장(남작) (Lieutenant General (Baron) Vrangel) 휘하의 3개 대대로 이뤄진 것으로서 신 아쿨고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것이었다. 나버지 부대들은 단지 적군을 고착시키고 혼란을 주는 임무였다. 2번재 부대는 1개 대대로 구성되어 구 아쿨고로 향했으며, 3번째 부대는 1개 반 대대규모로 이뤄져 아실타 강 계곡을 점령함으로써 구 아쿨고와 신 아쿨고의 적 수비대들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했다. 포병 준비사격이 이뤄진 후 공격이 개시되었다. 브랑겔 부대는 수많은 장애물들에 봉착했고 신 아쿨고 전방의 좁은 지역에서 심각한 십자포화에 걸려듦으로써 곧 고착당하였으며, 결국 8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야음을 틈타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다. 브랑겔 부대의 모든 장교들은 전사 혹은 부상당했다. 러시아인들은 첫날 전투에서의 샤밀군의 피해가 15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라베는 이에 굴하지 않고 봉쇄를 재개했으며, 4개 대대의 기병대(각각 규모는 상이함)를 아쿨고 건너편의 강 좌안을 봉쇄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이는 부상자들을 탈출시켜 이제는 180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되는 샤밀군에게 추가적 보급이나 탈출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려는 조치였다. 이후 몇주간에 걸쳐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아쿨고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질병이 방어군의 전투력을 악화시켰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샤밀은 협상을 시도했고, 자신의 12살 아들을 그라베에게 선의의 증표로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라베와의 짧은 만남은 그가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하는 상황에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8월 중순 무렵, 위생 불량 및 질병은 러시아인들에게도 피해를 안겨주어 각 대대별로 전투 능력을 유지한 병력이 평균 450명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러시아군 배치에 대해서는 지도 4 참조)
(지도 4. 1839년 8월 4-22일간의 러시아군 배치도. (아쿨고 함락까지))
그라베는 더 이상의 지연은 큰 대가를 치뤄야 함을 자각했고, 8월 17일 다시 한번의 총공세를 계획한다. 그는 다시 3개 부대로 편성하여 공격을 실시한다. 3개 대대로 구성된 주력은 신 아쿨고 성벽을 공격하여 외곽 방어를 쉽게 돌파한다. 절망에 빠진 샤밀은 다시 한번 자신의 아들을 백기를 들려 내보냈고, 회담이 짧게 재개되었지만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양군은 8월 21일 재격돌한다. 격전 속에서 샤밀은 가족들과 함께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한다. 러시아군은 900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대부분 여성들과 아이들이었고, 일부는 포로가 되느니 끝내 죽음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총 80일간의 아쿨고 전역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반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쿨고 함락은 군사적으로는 성공이었다. 적의 아성이 함락되었으며, 그라베는 역경 속에서도 산악 깊숙히 러시아의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샤밀은 휘하의 가장 유능했던 전사들을 상당수 상실하였다. 게다가 이맘 스스로도 가까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두브로빈이 말한 것처럼, "러시아군의 빛나는 활약과 대규모 인명 손실도 아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우리 힘에 대하여 산악민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쿨고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한 여파로, 샤밀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러시아군은 필연적으로 퇴각해야 했으며, 이로써 그의 명성은 오히려 공고해졌고, 그는 산악 부족들을 집결시켜 이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련의 공세 활동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게스탄, 체첸, 아바리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영향력이 급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부 코카서스 외의 지역들에도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부의 체르케스 부족들(Cherkes tribes)도 봉기하여 러시아의 흑해 수비대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1842년, 그라베는 샤밀의 새 중심지인 다르고(Dargo)로 원정을 실시했는데, 이번에는 심각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물이 부족한 채로 엄혹한 날씨 속에서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가며 길게 신장된 행군부대는 체첸의 짙은 숲속에서 적이 벌이는 사격에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마침내 목표지점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한 상 페테르부르크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전쟁성 장관 체르니셰프 공이 모든 군사작전을 중단시키고 친히 코카서스를 방문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산악민들은 이 휴지기를 이용하여 아바리아를 유린하였으며, 1843년, 샤밀은 광범위한 공세를 개시한다.
아바리아의 러시아 요새들에 대한 샤밀의 작전은 그가 군사 계획가로서 성숙하였으며, 그가 전략적 상황을 잘 붙잡아 광범위한 계획을 실행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였다. 러시아인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 1843년 8월 28일, 총 만명에 달하는 3개의 개별 산악민 부대가 갑자기 운트소이쿨(Untsoikul)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러시아군 부대를 압도하여 총 486명의 장병들을 살해한다. 2일 뒤, 이들은 지역 수비대를 점령한다. 이어진 4주 동안, 샤밀은 단 1개의 요새를 제외한 아바리아의 모든 러시아 전초들을 격파하고 총 2000여명의 피해를 입힌다. 러시아인들은 아직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이제 가장 큰 역경은 지나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샤밀은 아바르 강과 카지-쿠무치(Kazi-kumuch) 강 사이의 교차로에 있는 게르게빌(Gergebil)을 장악했으며, 이곳에서 아바리아와 테미르-칸-슈라의 러시아 기지간의 유일한 통신로를 장악할 수가 있었다. 쿠믹 평원으로의 침공을 위장함으로써, 샤밀은 러시아군을 게르게빌로부터 멀리 유인할 수 있었고, 게르게빌은 장기간의 항쟁 끝에 샤밀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신속하고 잘 위장된, 그리고 교묘하게 실행된 기동으로 샤밀의 게릴라 군대는 주도권을 잡은 동시에 러시아인들을 당혹 속에 빠뜨린다.
러시아인들의 분석과 재평가 (Russian Analysis and Reassessment)
1840-43년의 재앙은 코카서스에서의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있어 즉각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법을 향한 기초가 닦여지게 된다. 사실 조직적으로 코카서스 지역을 격파한다는 중심개념은 이미 수 년 전에 나타난 바가 있었다. 에르멜로프 스스로가 이미 "총검이 아닌 도끼"가 이 지역을 평정시키는 핵심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핵심은 코카서스 지역 내에 도로망을 개척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르멜로프에게는 이러한 정책을 수행할 만한 인력이 충분하지가 않았다. 이들을 복속시키는 최종 방법에 대하여 어느 정도 예견한 사람으로 A. A. 벨리아미노프 장군(General A.A. Veliaminov)을 들 수 있다. 그는 1832년 장문의 글을 통해 적 지역으로 요새들을 점진적으로 늘려가는 한편 코삭 마을들을 건설하는 방법을 주장했다. 이는 침공하는 산악민들의 통로를 차단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방법만으로는 승리를 거두는 데에 적어도 30여년은 걸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신속한 승리를 위해서는 각각 7000여명 규모의 5개의 독립 부대를 창설하고 각각 산악민들의 도피처와 경제 기반들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저항할 물질적 기반이 소진되면 저들은 결국 항복할 것이었다.
1830년대 후반에서 1840년대 초반의 분석가들에게 명백했던 사실 하나는, 러시아인들이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산악민들 마을을 타격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는 산악민들을 평정할 수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상황에 대해서 가장 잘 관측한 두 사람을 꼽자면 일반참모부의 젊은 장교들이었던 드미트리 밀류틴 대위(첫번째 코카서스 원정 이후 진급)와 I. 모출스키 대위(Captain I. Mochulskii)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적들의 기술에 대해 보다 제대로 알기 위하여 코카서스로의 임시 배속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재래식 전장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참모부 아카데미에서는 코카서스 지역을 젊은 장교들에 대한 "전투 학교"로 보기도 하였다.
모출스키는 1837년에 코카서스에서 복무한다. 밀류틴은 1839년과 1843년에 복무한다. 모출스키는 복귀하면서 코카서스에서의 러시아의 실패 주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힌 연구서를 작성한다. 모출스키는 대단히 거친 지형과 저항운동에 내재된 정신적, 군사적 잠재력이 적들에게 제공하는 장점들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주요한 원인은 직접적으로 러시아측의 약점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러시아 장교들이 산악전에 있어서 경험이 부족하고 부적절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고 믿었다. 이들은 코카서스 지형을 모를 뿐만 아니라 이런 지형을 매복 등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러시아군의 장비는 부적당하여, 여름이나 겨울이나 똑같은 모직 코트와 양말, 신발 안감등을 사용했다. 이들은 지루함과 낮은 사기에 의해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유럽식 훈련 탓에, 지휘관들은 정신적으로 중포병과 무거운 보급행렬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고, 이로 인하여 형편 없던 도로망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모출스키와 밀류틴 모두 과거 노력들이 낭비된 핵심적 원인이 러시아가 코카서스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펴지 않았다는 점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150여개나 되는 요새들에 대해서는 발리아미노프가 찬탄했던 것과는 반대로, 가용 인력을 쓸데 없이 분산시키는 낭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이처럼 소규모로 분산된 수비대 병력으로는 충분한 영역을 지배하지 못하며, 종종 자신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밀류틴은 "코카서스에서의 러시아 지배를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Thoughts About the Means of Establishing Russian Rule in the Caucasus)"라는 소고를 통해 요새 수를 줄이고, 주요 부족들과 핵심 주 통신로들을 보호하는 전략적 지역에 있는 것들만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개별 수비대의 병력 수가 증가됨으로써 이러한 요새들은 강력한 기동부대가 출격할 수 있는 기지가 되며, 이로써 언제라도 질서를 회복시키고 러시아 지배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밀류틴은 코카서스 지방에 대한 보다 조직적인 군사적 침투와 함께, 지역 문화에 덜 배타적인 문화정책, 무역과 산업의 발전 등을 통하여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코카서스인들 대부분에게 제국 지배의 장점과 필연성을 이해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상 페테르부르크 및 코카서스의 러시아 지휘부는 정복을 위한 조직적 접근법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40년까지 러시아인들은 상당한 전술적 수정을 실시하였다. 행군간 신장된 대열의 취약성을 인식하여, 지휘관들은 가능한 한 밀집 방진 대형(close, rectangular formation)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길이는 보급수송대열의 길이와 기타 요소들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었다. 행군대열 측위는 전위와 후위에 맞닿아 있었다. 기병, 포병, 수송대는 이 방진 안쪽에서 움직였고, 저격수 집단들은 외곽 경계선(outer security cordon)을 형성했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사각형 숙영지를 만드는 관습을 만들었고, 보병과 포병을 안쪽에 위치시켰다. 소규모 부대의 경우에는 종종 보급차량들을 차량진(laager)으로 활용했다. 또한 기동성에 중요성을 두어 코카서스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경 산악포(light mountain gun)를 개발하였으며, 1842년 코카서스 군단은 최초로 산악포(mountain gun) 포대를 편제 내에 두게 된다.
전쟁 최종 단계 (Final Phase of the War)
M.S. 보론초프 백작(Count M. S. Vorontsov)은 1844년 코카서스 지역 사령관을 맡았는데, 샤밀의 군대를 한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격멸하라는 니콜라스 황제의 직접적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비록 군사 및 민간에 관한 모든 전권을 위임받은 총독이었지만, 과거 이런 임무에 성공하지 못한 똑같은 종류의 군대를 가지고 이를 성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코카서스의 베테랑 지휘관들은 회의적이었다. 보론초프의 전임자였던 부관감 네이드하트(General Adjutant Neidhart)는 샤밀이 황제가 추구하는 것처럼 결정적인 전투에 말려드는 것보다 차라리 다르고의 새 사령부를 버리고 퇴각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샤밀은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약해진 다른 곳으로 침공을 벌일 기회를 잡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작전은 추진되었고, 네이드하트 스스로도 보급시스템을 책임지게 되었다 - 보급은 진군로상에서 보급품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었기 때문에 극히 중요한 기능이었다. (지도 5 참조). 결국 토착민 짐꾼들이 필요 보급품의 절반을 운송한다.
(지도 5. 1845년의 다르고 전역)
보론초프는 42문의 대포를 가져갔다; 21개 대대 및 4개 공병중대가 동원되었다; 비정규 기병은 1600명; 그리고 토착민 민병대가 1000여명 동원됨으로써 도합 18000명을 이뤘다. 일부는 도상의 추진 보급소(advanced supply points)에 잔류했으며, 대략 13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실제로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이 병력은 5월에 살라투에 집결했으며, 산악지대에 첫 풀이 돋아나는 시기에 안디로 이동했다. 6월 5일, 보론초프는 키르크 고개(Kyrk Pass)를 점령했으며, 5개 대대를 점령군으로 남겨두었다. 이제 그는 악천후와 마주치게 된다.
6월 6일, 주력부대 10마일 전방에서 파섹 장군(General Passek)이 이끄는 전위부대가 적군을 추격한다. 명령도 받지 않고 주력부대에 전갈을 보내는 것도 무시한 채, 파섹 장군은 주누-미르(Zunu-Mir) 산까지 진격한다. 이 기동이 갖고 있던 문제는 당초 보론초프가 부대를 미치칼(Michikal)을 거쳐 안디로 향하게 하려고 했지, 주누-미르를 거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파섹이 주누-미르의 극심한 추위 속에 정지하였을 때, 그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보급품이 부족하고 주력 부대와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었지만, 그는 퇴각하는 모습을 보여줄 경우 토착민들이 더욱 샤밀 주변으로 모일 것임을 걱정하였고, 결국 퇴각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론초프가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게 되자, 그는 파섹에게 주누-미르에는 마초(forage)가 없으니 기병과 토착민 기마 민병대들은 돌려보내라고 전갈을 보낸다. 그러나 이 조치는 너무 늦은 것이었고, 500여마리의 말들이 쓰러지게 된다. 또한 6월 11일 보론초프가 파섹과 만나기 전까지 약 450명이 동상을 입게 된다.
그 동안 샤밀은 러시아군 진격 범위 밖에 머물러 있었고, 레즈기아인 영토로의 주 접근로인 소위 말하는 안디 관문(Andi Gates)에서도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이 교활한 게릴라 지휘관은 다르고까지 10마일을 더 후퇴했다. 마침내 7월 4일, 단지 6일치 보급품만이 남은 상태에서 보론초프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다르고까지 행군하기로 결심한다. 거의 동시에 그는 코카서스 라인의 서측면(다게스탄 북쪽 가장자리)의 지휘관인 프라이탁 장군(General Freitag)에게 다르고를 향한 원정군이 이쪽 방향으로 퇴출해야 할 것을 대비하여 지원부대를 준비하라고 전갈을 보냈다. 7월 7일, 짧고 격렬한 전투 끝에 러시아인들은 다르고를 점령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샤밀은 놓치고 말았다. 또한 총 7940명의 보병과 1218명의 기병, 342명의 포병과 16문의 대포를 가지고도 이들은 적을 크게 격멸한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 체첸인들로 구성된 산악민들은 숲속으로 사라졌으며 주변에 남아 보론초프 부대가 이츠케리아(Ichkeria)를 통과하여 돌아갈 때 격파할 기회가 있을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르고에 깃발을 올린 보론초프의 가장 당면한 급박한 문제는 보급부대가 도착하도록 보장하는 것에 있었다. 7월 9일, 그는 휘하 부대를 분할하여 보병, 포병, 기병의 절반을 K. 폰 클루게나우 중장(Lieutenant General K. von Klugenau) 휘하의 분견대로 구성하고 수송부대를 마중 나가 숲속을 따라 인도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이후의 분석가들에게 비난받은 사항은 굼뜬 포병과 숲속 지형에 맞지 않는 기병을 이 부대에 포함시킨 보론초프의 결정이었다. 파섹은 쿨루게나우의 전위를 맡아 통로를 개척했는데, 이 과정에서 산악민들이 러시아군의 퇴각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해놓은 다양한 장애물 (넘어뜨린 나무 따위)들에 봉착하게 되었다. 적들이 만든 장애물들을 개척하고 숲속에 숨어있는 저격수들과 싸우면서 행군부대는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산악민들이 기다려왔던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재앙에서 게릴라들은 고립된 인원들을 집단공격하였고, 파섹과 휘하 556명의 장병들을 살해하였다. 사기가 바닥난 클루게나우는 다르고로 퇴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게스탄을 통해 퇴각하는 것까지도 고려할 정도였지만, 결국 끈질긴 행군 끝에 보론초프의 주력부대와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7월 11일, 재합류한 러시아군은 다시금 어려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번에는 왔던 방향 쪽이 아니라, 퇴각을 감추기 위한 게르젤 아울 촌락(village of Gerzel Aul) 방향 쪽이었다. 행군 첫날부터 과거 파섹의 전위부대가 했던 실수가 되풀이되었다. 루블린 엽병 연대(Rublin Jaeger Regiment)의 3대대가 도로를 연하여 급하게 구축된 적진을 공격하기 위하여 돌진해나갔고, 그 결과 스스로가 일시적으로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로를 개척할 임무를 띄고 있던 공병들을 노출된 상태로 방치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주력부대의 보급수송행렬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클루게나우(당시 보론초프로부터 행군제대의 작전 통제를 위임받고 있었다)가 부대의 질서를 되돌려놓은 시점까지의 2일간의 전투 동안 휘하 병력 피해는 553명 전사에 약 800명 부상에 이르렀다.
7월 12일 밤, 보론초프는 프라이탁 장군에게 보내는 5부의 명령 사본을 5개의 다른 경로로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게르젤 아울 부근에 있는 원정군과 합류하도록 즉각 출발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11개의 대단히 소진된 대대들로 이뤄진 보론초프의 부대는 교과서적인 방법대로 악사이 강(Aksai River)을 따라 행군을 실시했다. 즉, 전위와 후위를 본대 가까이에 위치시키고, 보병 측위를 양 옆에 배치시키는 것이었다 (표 1 참조). 이동과정에서 러시아군은 저항에 봉착했으며, 7월 16일의 심각한 전투를 거쳐 보론초프군의 사상자는 전사에 103명, 부상에 372명이 늘어났다.
(표 1. 보론초프군의 행군 서열)
이 시점에서 보론초프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가진 가장 강력한 대대도 단지 300여명의 전투 가능한 보병을 가진 수준이었으며, 약 1500명에 달하는 부상자 및 병자들을 돌봐야만 했다. 게다가 포병대는 애초의 635마리의 군마 중에서 400여마리를 상실했고, 대포 대다수는 스스로 파괴해야만 했다. 7월 17일 현재, 보론초프 부대에 남아있는 화포는 2문의 경야포와 6문의 산악포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전령들은 게릴라들의 봉쇄선 사이를 무사히 통과하였고, 7월 18일, 프라이탁 장군 휘하의 구원부대가 도착하였다. 원정대는 구조되었다. 그러나 총 피해는 장군 3명과 장교 186명, 병사 3321명에 달했다.
비록 이 다르고 원정은 그 자체로는 비극적인 결과였지만, 장차 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접근 방법에 있어서는 중요한 전기를 부여하게 된다. 대규모 러시아군이 후방과 통신선을 완벽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로 산악 깊숙히 들어가는 일이 두번 다시 없게 된 것이다. 보론초프는 앞으로 러시아는 매우 천천히 전진해야 하며, 샤밀을 산속으로 밀어넣기 전에 우선 평원과 산언저리 지역을 평정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특히 대 체첸과 소 체첸은 러시아군 작전의 핵심지대로 떠올랐다. 체첸의 숲 지역과 산언저리 지역을 함락시키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샤밀의 인력 및 자원 공급원을 없애는 길이었으며, 또한 다게스탄 내부로 깊숙히 진군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846년이라는 해는 코카서스 전쟁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해였다 - 특히 니콜라스 황제가 더이상 간섭을 삼가게 된 것은 적지않은 것이었다. 이제 보론초프는 분권화된 행정을 통하여 군사정책에 인내심을 가미하였으며, 이에는 토착민 관리들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부족 지도자들의 특권을 상당부분 부활시켰는데, 이들의 권력은 "무리디즘"의 영향 속에서 그간 크게 침식되어 왔었다. 또한 트빌리시와 코카서스 라인을 잇는 전략 군사로인 그루지아 군사 도로(Georgian Military Road)의 완성에 신경을 썼다. 비록 러시아인들이 응집된 군사 전략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지만, 보론초프는 스스로를 제한되고 성취 가능한 목표 내로 한정시킴으로써, 샤밀이 더 이상의 승리를 거두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보론초프의 계산된 진격을 평가하며, 일반참모부의 역사학자인 D.I. 로마노프스키(D.I.Romanovskii)가 나중에 쓴 바에 따르면, "러시아는 코카서스 평정이라는 대사업에 기여하지 않는 한, 단 한 명의 헛된 희생이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로마노프스키와 다른 이들은 보론초프가 정력적이지 못했고, 기회를 붙잡는 데에도 실패하였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프라이탁 장군과 그 뒤를 이은 바리아틴스키 장군(General Bariatinskii)은 체첸 숲들과 마주한 좌측방(Left Flank)에서 보론초프의 정책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각각은 자르고 불태우기 정책(cut-and-burn policy)을 가차없이 시행함으로써, 해당 지역을 장차 작전에 필요한 기지로 만드는 한편, 해당 지역 주민들이 영구히 복속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847년 살티(Salty) 탈환과 1848년 게르게빌(Gergebil) 탈환은 이제까지의 러시아측 이득을 공고화하는 한편, 앞으로의 대승리를 미리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샤밀은 이맘직을 사임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무리디즘의 불길을 다시 타오르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1852년에 이르러 체첸 지역은 더이상 러시아군 공격에 대한 은신처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규모 토착민들이 강제로 러시아의 통치지역 안으로 재이주당했다. 보론초프는 카바르다 및 여러 곳에서 토착민 민병대들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조직적인 숲 파괴와 체첸 지역 작물 및 마을들의 파괴는 1853년 크림 전쟁(Crimean War)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일련의 동계 작전 과정을 통해 계속되었다.
러시아측의 승기가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샤밀은 점차 몰락에 가까워지게 된다. 카바르다를 러시아 통치권 밖으로 유지하려던 그의 군사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치적 문제들도 그의 실망을 더욱 심화시켰다. 특히 1846년 그의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상당수의 산악 주민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샤밀을 이맘으로, 저항군 지도자로 인정했던 부족들도 그에게 왕조적 계승권을 부여할 의사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초기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M.N.포크로브스키 (M.N.Pokrovskii)에 따르면, 1840-45년 시기의 대 성공이 산악민들 사이에 안도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많은 족장들 사이에서는 샤밀이 요구한 엄격한 규율(draconian discipline)에 대하여 불평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결과 러시아의 압력 증대와 산악 부족들 사이에서의 응집력 저하가 겹쳐지면서, 샤밀은 크림 전쟁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군에 발생했던 자원 부족문제를 활용할 수 있을만한 입장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터키와 영국으로부터 많은 정신적 지지와 함께 1854년에는 최신식 라이플을 제공받기도 했지만, 그로서 바라고 있었던 것은 연합군이 코카서스 지방에 상륙해 주는 것이었다. 1854년, 샤밀은 딱 한차례의 대규모 원정을 실시하는데, 당시 그는 15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전사들을 결집시켜 트빌리시의 러시아군 사령부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그루지아인들의 저항과 함께 후방 체첸 지역에서의 폭동 위협이 발생하면서, 샤밀의 러시아에 대한 공세는 이스티수 마을(village of Istisu) 부근에서의 참패와 함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 시점 이후부터의 코카서스 드라마의 주역은 바리아틴스키 장군이 된다. 1845년 다르고 전역에 참가하였으며 1851년부터는 코카서스 라인 좌측방(Left Flank) 지휘관으로서 성공적인 임무를 완수한 바리아틴스키는 공세를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1854년 밀류틴이 발간한 저서 '코카서스에서의 러시아 지배를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에 깊이 감동한 것에 분명한 이 장군은, 자신이 1856년 알렉산드르 2세 황제로부터 코카서스 총독으로 임명받자, 밀류틴을 자신의 참모장으로 선택하였다. 바리아틴스키는 자신이 체첸 지역에서 적용했던 것과 동일한 무자비한 방법으로 산악민족들을 평정할 심산이었다. 장군은 숲들을 잘라내고 마을과 작물들은 불태웠으며, 체첸인들에게 죽거나, 도망치거나, 러시아 영토 내에 정착하거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이 벌인 꼼꼼하고도 조직적인 재정착 작전은 1855년에 시작되었다. 바리아틴스키의 전략은 전쟁을 신속하고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는 것이었다. 전쟁장관 I.O. 수호자넷(I.O. Sukhozanet)이 장군이 한 말을 회상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군 병력이 크게 감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승리들을 상회하는 봉사이다"라고 하였다.
총독으로서, 바리아틴스키는 이전까지 없었던 수준의 자유도와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었으며, 휘하에는 터키에서 막 돌아온 2개의 사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공격적 지도자라는 그의 명성이 병사들의 사기를 앙양시켰다. 바리틴스키는 즉각 전장의 지휘체계를 재편하였는데, 당시의 지휘체계는 1830년대 무리디즘이 창궐한 시기의 것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던 데다 수비적 개념에 기반하고 있었다. 바리아틴스키의 계획은 밀류틴에 의하여 세부화되었고, 총 5개의 군단수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개 군단은 서부 코카서스 지역(이 연구의 범위 밖이다)으로, 3개 군단은 동부 산악지역 - 체첸지역을 바라보는 좌익(Left Wing)과, 테렉에서 시작하여 안디 산악지대까지의 지역 -으로 할당하였다; 프리카스피안 사령부(Pricaspian command)는 다게스탄의 모든 병력들을 관할했다; 레즈기안 전선(Lezgian Line)은 산악지대의 남동쪽 가장자리를 맡았다. 비록 사령부들의 책임지역은 많이 바뀌지 않았지만, 전반적인 지휘체계는 보다 효율적으로 변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좌측방 군(the army of the Left Flank)(이제부터는 좌익(Left Wing)이라 칭하겠다)은 행정적으로 스타브로폴(Stavropol)로부터 모든 통제를 받았다. 또한 기존의 병력 분산은 전장의 모든 지역에서 적들에게 숫적 우세를 보장할 따름이었다. 참모장으로서 밀류틴의 업무는 각각의 사령부들이 독립적으로 작전할 수 있는 수단(군수지원과 공병지원을 포함한다)을 갖게하고, 다른 사령부들과 협동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리아틴스키 공은 코카서스 총독으로서 1856년에서 1859년간 진행된 산악민 정복을 지도한다.)
바리아틴스키의 목표는 다게스탄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완전히 함락시키는 것에 있었다. 전역을 "요새에 대한 일반적 공성전"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바리아틴스키는 산지 방어의 핵심은 내륙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곽 부수지역들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하였다. 산악지대로의 접근로들을 장악하고 여러 축선으로 조직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러시아는 중앙부의 붕괴를 강요할 수가 있었다. 바리아틴스키는 수비대 임무에 묶인 병력을 최소화하였고, 단지 가장 전략적인 위치만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격적 계획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임무는 좌익(Left Wing)의 지휘관이었던 N.I. 에브도키모프 장군(General N.I. Evdokimov)에게 떨어졌다. 그는 다음해 동안 게릴라들에게 어떠한 휴식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었다. 과거 관행과 크게 대조되게도, 에브도키모프는 적과의 교전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이는 산악 주변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그는 산악지대로 향한 접근로를 개척하는 데에 주력하였으며, 도로 개척으로 가능해진 기동에 의지하여 게릴라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의 전투를 회피하였다. 에프도키모프가 점점 더 깊이 침식해들어가면서 적들이 그에게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체첸은 일단 개척될 경우 다게스탄의 산악민들 은신처들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접근로였기 때문에, 러시아군 작전에 있어서 핵심지대가 되었다. 게다가 체첸 부족들은 더이상 샤밀을 지지하는 쪽으로 통합되어 있지가 않았다. (한편, 남쪽의 레즈기안 전선(Lezgian Line) 방면에서는 산악 통로들에 눈이 쌓임으로써, 여름이 될 때까지 작전이 제한되었다.)
1856년 11월에서 1857년 4월에 이르기까지, 에브도키모프는 대 체첸 지역(Large Chechnia)에 대한 4차례의 작전을 실시하였다. 비록 체첸인들과 이들과 동맹한 다게스탄 부족들의 격심한 저항에 직면하긴 했지만, 그는 이어진 여름 기간동안에 벌어질 다게스탄 작전을 위한 통로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한다. 3월, 에브도키모프는 2개의 요새를 건설하면서 러시아의 위치를 크게 전진시킨다. 이들 요새는 각각 바스 강(Bass River)의 샬린(Shalin)과 다게스탄 가장자리의 코비-샤프돈스카이아(Khobi-Shavdonskaia)였다. 그 결과, 에프도키모프 뒤에는 가능한 빨리 자신의 통치 안에 두고자 하는 체첸 평야가 위치하고 있었고, 앞에는 산악지대로의 접근로이자 그의 주목표인 아르군 협곡(Argun ravine)이 위치하고 있었다. 자신의 다음 수를 숨기기 위하여, 에브도키모프는 1857년 가을에느 그가 대 체첸 지역의 아브투라(Avtura)로 진군할 계획이라는 말을 흘렸으며, 이로써 샤밀의 군대를 소 체첸 지역(Little Chechnia)에서 유인해내어 아르군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들고자 하였다. 일단의 러시아군이 아브투라 방향으로 행군을 시작하여 샤밀로 하여금 이곳 방위를 위해 병력을 모으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 부대는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협곡을 향해 아르군 강 우측 제방을 따라 움직였으며, 이곳에서 보즈드비텐스크(Vozdvizhensk)에서 출발한 에브도키모프가 지휘하는 제 2제대와 합류하게 된다. 합류한 러시아군은 협곡으로 진입하여 짙은 숲속으로의 진군을 속행하였다. 병력의 일부는 이즈마일(Izmail)로 향하였고, 나머지는 남아서 도로 건설 및 방어진지 건설 임무를 수행하였다. 에브도키모프 휘하의 전방 부대는 샤로-아르군 강(Sharo-Argun River)를 따라 이동하여 산속으로 들어갔으며, 다차-보르자(Dacha-Borza) 마을 근처에서 아르군 요새(Fort Argun)을 건설하였다. 단 한차례의 작전으로 에브도키모프는 최소한의 인명피해로써 아르군 협곡을 점령하였으며, 소 체첸 지역 정복은 모든 실질적인 측면에서 완료되었다. 에브도키모프는 샤밀에게 활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모든 촌락들을 불태우고 15000명 가량의 체첸인들을 모두 강제이주시켰다.
산악지대로의 접근로를 청소하고 후방을 안정시킨 에브도키모프는 1858년 여름에 산악지대 깊숙히 일련의 원정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샤밀의 최종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6월, 여러 축선을 따라 이동하는 3개 행군제대 중의 하나로서 활동하던 에브도키모프의 체첸 분견대(Chechen detachment)는 주공을 실시하기 위하여 찬타-아르군 협곡(Chanta-Argun gorge)를 따라 진격한다. 1857년에 전략 요충지 부르투나이(Burtunai)(이곳은 다게스탄 보병연대(Dagestan Infantry Regiment)의 새로운 참모본부가 된다)를 점령한 바 있었던 다게스탄 분견대(Dagestan detachment)는 마칙(Machik)으로 이동했다. 한편 레즈기안 분견대(Lezgian detachment)는 카누크(Kanuch)를 따라 레즈기아 내륙 산지로 이동하면서 남부 레즈기아의 불령 마을들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샤밀은 러시아군 후방 지역의 부족들을 봉기시키기 위하여 영웅적인 시도들을 하였으나, 1840년대와는 달리 그의 호소는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승리하지 못하고 점차 패배자의 모습을 띄게 된 샤밀은, 자신을 향한 지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러시아군이 아르군 계곡 상부를 점령하면서 샤밀 지배하의 영토는 크게 감소되었고, 그에게는 이제 다게스탄 북부 일부와, 안디 지역, 이츠케리아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아르군 서쪽에 있는 부족들은 주로 체첸인들과 잉구시인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항복하는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결정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는데, 이는 최소한 러시아인들이 샤밀의 보복으로부터 이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보장이 섰기 때문이었다.
(1890년 무렵의 트빌리시)
에브도키모프는 7과 3/4개 대대 규모 병력과 4개의 산악포, 1개 민병대 대대 병력을 가지고 아르군을 향한 다음 작전을 벌인다. 그는 산악민들을 기습하여 샤타 마을(village of Shata)을 점령하고 바라덴 초원(Varadel meadow)을 장악하였다. 표준 절차에 따라 병력들은 즉각적으로 나무를 잘라 숲속으로의 길을 내기 시작했고, 아르군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들었으며, 중간규모의 요새진지도 설치하였다. 러시아군의 존재를 눈치챈 산악민들은 러시아군으로부터 2마일 가량 떨어진 거점인 아흐(Akh) 지역에 진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약 9000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가 이곳에 집결했지만, 러시아군이 도착하자 거의 전투도 벌이지 않고 방어가 붕괴되었다. 이는 당시 저항운동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며칠 내로 러시아인들은 아르군 우측 제방 지역과 대 체첸 지역의 서부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10월 말까지 그루지아 군사도로(트빌리시에서 모즈도크까지 이어지는)에서부터 샤로-아르군 강(Sharo-Argun River)에 이르는 산간지역 부족들은 러시아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샤밀의 마지막 반격은 1858년 여름 늦게 나즈란(Nazran) 부근으로 강제이주된 잉구시 부족민들의 반란 이후 벌어진다. 통상적으로 순종적인 잉구시인들은 몇몇 대형 주거지대로 몰려들어 과밀상태가 되었고, 이러한 불만은 곧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샤밀은 찬티-아르군 강(Chanti-Argun River)을 건너 운동의 열정을 되살리고자 시도하였지만, 나즈란 수비대를 격퇴하려는 두차례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샤밀에게는 더이상 의지할 바가 없었으며, 단지 산악지대의 최후의 은신처로 퇴각하여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1859년 2월, 에브도키모프는 바라이틴스키의 지시 없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샤밀의 수도인 베덴(Veden)으로 진군한다. 아르군으로의 러시아군 진격을 막는 데 실패한 샤밀로서는, 베덴을 구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며, 베덴은 2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바리아틴스키는 에브도키모프의 주도성과 공격성을 칭찬하였다:
에브도키모프는 단 한차례도 적이 원하는 장소, 적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도록 허용한 적이 없다. 잘 계획된 기동의 결과로 샤밀과 그의 일당들이 장악하던 가장 강력한 진지들이 거의 저항조차 못한 채 함락되었다... 조직적 전쟁 수행과 주요 지휘관들의 유능한 조치들, 병력들을 라이플로 무장시킨 것의 총 3가지가 코카서스에서의 우리편 손실을 최소화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전술적 이동에 의해 교전이 성사되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우리측 성공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
베덴 함락이 사기에 미친 영향은 실질적 결과보다도 커다란 것이었다. 부족 전체와 샤밀에 헌신하던 동맹자들이 이제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복속하기를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한 러시아 장교인 로스티슬라브 A. 파데프(Rostislav A. Fadeev)(그는 장군으로 전역하였으며, 나중에 널리 알려진 정치 평론가(publicist)가 된다)는 자신의 코카서스 전쟁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한때 샤밀의 가장 광신적인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잃고 단순한 "병사들"이 되었다고 하였다. 더이상 매 한치의 땅을 위해 싸우고 죽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단지 가족들과 재산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인들은 이제 이들을 보다 통상적인 적들을 대하듯이 할 수가 있었고, 오랜기간 지속되어온 항쟁을 다게스탄으로의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하여 결정지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9년 당시 바리아틴스키 외에는 다게스탄의 몰락이 그토록 임박한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는 체첸의 상황을 미뤄볼 때 샤밀의 산간지역 거점이 붕괴되는 것은 여러 해가 지난 뒤의 일일 것이라고 보았다. 바리아틴스키의 최종 원정 계획은 3가지 일반 방향을 통한 다게스탄으로의 공세작전을 수반하고 있었다(지도 6 참조). 에브도키모프 장군의 체첸 분견대가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어있었다. 14000명의 병력(12와 1/2개 규모의 보병대대들과 1개 용기병대(dragoons), 900명의 코삭, "백여명(hundreds)"의 토착 민병대 2개 부대, 16문의 야포, 8문의 로켓 발사기)으로 구성된 에브도키모프의 분견대는 안디 능선(Andi ridge)(아르지-람 산(Mt. Arzhi-lam)을 경유하여)을 따라 베덴에서 티크눈찰(Tikhnuntsal)로 움직였고, 이어 안디 강으로 동진하였으며, 이곳에서 지원부대를 기다리게 되어 있었다.
(지도 6. 러시아군 부대들의 연결과 다게스탄으로의 최종 진격, 1859년)
동시에 벌어진 남작 브랑겔 중장의 진격은 프리카스피안 분견대의 9000명으로써 부르투나이에서부터 남진하는 것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샤밀을 크게 놀라게 함으로써 체첸 분견대로 하여금 안디 강으로의 행군을 사실상 방해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샤밀은 안디 강 동쪽 제방에 수천명의 전사들을 집결시켰었다. 산악민들은 어떤 지점에서의 도하도 대단한 피해 없이는 이뤄지지 않도록 만들 수가 있었으나, 브랑겔의 진격에 따라 이 기회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7월 15일, 브랑겔의 부대가 키르캇(Chirkat)과 사그리틀(Sagrytl) 사이의 강에 도착하였고, 17일에는 도강을 실시한다. 카지 무하메드(Kazi Muhamed)는 브랑겔 부대가 단지 자신의 북쪽 측면을 위협할 뿐만이 아니라 도주로까지도 위협하고 있음을 깨닫고 퇴각하여 아버지와 합류하게 된다. 샤밀은 이제 보다 동쪽의 구닙 고원(Gunib plateau)으로 퇴각하는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 여파로 아바르 강(Avar River) 서쪽의 부족들은 러시아에 앞다퉈 복속을 요청하게 된다.
(바리아틴스키에게 항복하는 샤밀 (어느 러시아 예술가의 그림))
8월 초 남쪽으로부터 레반 벨리코프 공(Prince Levan Melikov)의 레즈기안 분견대(7천명)가 안디 강의 보트리크(Botlikh)에 도착함으로써, 바리아틴스키는 휘하 병력들을 성공적으로 집결시키게 되었고, 이어 구닙으로의 마지막 행군을 준비하게 된다. 승리를 눈앞에 둔 러시아 지휘관들은 앞다퉈 복종을 간구하는 부족들의 사절들로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바리아틴스키는 최종 공격에 앞서 지역에 대한 사열 여행(inspection tour)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마을 곳곳마다 수많은 인파들이 코카서스 총독을 맞아 자신들의 충성심을 나타내 보였다. 후방 상황에 만족한 바리아틴스키는 구닙 포위를 개시하였다. 이곳은 산악의 다른 수많은 요새지역들처럼 창의적 방어자에게 크나큰 이점을 제공하였다. 약 45도 각도의 거친 급경사 낭떠러지들로 둘러싸인 넓은 고원지대인 구닙은 적당히 많은 병력만 갖고 있다면 거의 무한정으로 방어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샤밀에게 불운했던 것은 당시 그에 충성하는 부하들의 규모가 이제는 400여명에 불과한 수준으로 감소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규모로는 비록 극히 용맹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러시아군 공격에 대해 모든 방어 지역을 보호할 수가 없었다. 비록 샤밀이 항복하라는 제의를 거부하였지만, 바리아틴스키는 이 "무리드"의 용맹한 지도자를 반드시 생포하라는 엄격한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군이 자신의 최후 은거지로 밀고들어오고서야 샤밀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의 항쟁을 포기(아마도 그와 함께 있던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해서일 것이다)하게 되었다.
결론들(Conclusions)
러시아의 코카서스 지역에서의 승리의 원인을 살펴보자면, 인력과 자원의 일반적 우세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중요 요소로서 떠오를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거대한 제국의 자원을 갖고있지 못했다면, 대단히 강한 의지로 지혜롭게 대처한 저항군을 맞아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들을 정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산들이 승리를 필연적으로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것은 황제들이 대를 이어 이곳 코카서스가 복속시키는 데 드는 비용에도 불구하고 차지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의 장기화가 황실 인원들을 특별히 흔든 적이 없었으며, 당시 아직 유아기에 있던 대중 언론들도 아직 미숙한 상태라 제국 정책에 대하여(니콜라스 1세 치하의 자유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정도의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파데프(Fadeev)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이 당연한 것이며 거의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갔다..."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자체 역량을 현명하게 선택하여 적용시킴으로써만이 러시아는 코카서스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로마노프스키는 러시아는 군사적, 비군사적 방법을 솜씨좋게 섞음으로써만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코카서스 부족들을 무력 사용 없이 복속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만약 우리의 행동이 단지 무력에만 의존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복속이 어떻게 언제쯤에나 이뤄질지를 상상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과 지역 주민들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하고 정책들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 결합되면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는 방해를 받는다. 샤밀의 흥망과 관련된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전쟁의 핵심은 숲이 우거진 산간 오지지역의 지배를 위한 투쟁에 있었다. 샤밀은 체첸 지역과 레즈기안 지역의 통제가 자신의 자원을 확대시키고 러시아측에 붙은 족장들에 대항한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를 제공한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국경지대에 대한 효과적인 군사적 지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게스탄 오지 민족들의 지지를 얻거나 복속시키지 못한다면, 샤밀에 대한 효과적인 작전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에르멜로프는 러시아 법과 관습 적용에 있어서 점진주의자적인 관점을 가졌으며, 자신의 관료 체계에 있어서 토착 엘리트들을 대단히 많이 기용하였다. 반면 그의 후임자인 파스케비치는 조직적으로 토착 관료들을 숙청하였으며, 자신의 행정 기구를 러시아화하였다. 한편 G. V. 로센 장군은 중간적인 견해를 가졌는데, 토착 관습들을 타파하는 쪽을 지지하는 한편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는 순응하기로 하였다. 1830년대 그루지아와 스타브로폴 외 지역에서의 러시아 지배가 완전히 분해되는 것을 목도한 니콜라스 황제는 보론초프에게 마음대로 쓸어버릴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보론초프의 보다 유능하고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행정부는 이미 복속한 부족들 사이의 적대감을 감소시켰고, 러시아군 후방 지역의 안정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상당한 진전을 이뤄낸 보론초프조차도 억압과 관용, 행정부 현대화와 관습의 존중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적합한 혼합 정도를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오랜 시간동안 러시아인들은 코카서스에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창의적인 기법들을 적용시킨다. 예를 들어 바리아틴스키는, 체첸에서의 좌측방(Left Flank) 사령관으로서의 복무기간 동안 능숙하게 체첸인들 사이의 분리주의적 경향을 북돋아줌으로써, 이들이 샤밀의 절대 권위 주장에 덜 호응하도록 만들었다. 바리아틴스키는 오래 전의 에르멜로프처럼 러시아 지배 내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의 중재에 있어서는 토착민 법정 시스템을 적용하였다. 그는 특정 애로사항들을 완화시키는 데에도 주목하였는데, 예를 들어 1859년, 그는 제국의 금지령을 완화시켜 소수의 부족민들이 메카에 순례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지역 정보요원들을 고용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많은 족장들이 이 방법에 경각심을 갖고 친러시아 성향을 띄는 부족민에 대해 주의하여 관찰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토착민들을 동화시키는 데 있어서 장기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토착민들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유인이 되기도 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의존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도 러시아측에는 정책의 일관성이 없었다. 비록 체첸과 다게스탄 주변부에 있는 부족들과 경제적 유인책을 통해 보다 공고한 관계를 형성하긴 하였지만, 내부 지역에 있던 자급자족적인 부족들은 대체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러시아의 군사적 승리 방책에 대한 탐색은 단지 한가지 결정적 진실을 인식하는 데에 달려있었다: 동부 코카서스의 산악 지역은 단번의 전격전으로 함락할 수 없으며, 단지 수년여에 걸친 끈질기고 조직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와 장군들이 이러한 관점을 거부함에 따라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들이 낭비되었다. 게다가 적당한 통신선을 구축되지 않고, 도로가 희소하며, 지형이 험준한 상태에서는 러시아인들이 지역 어느 곳에 대해서도 통치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1846년부터는 대다수 관찰자들에게 코카서스를 함락시키기 위한 포괄적이고도 효율적인 시스템의 개발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포크로브스키(Pokrovskii)는 이러한 분석에서 벗어나 작전적 계획보다는 기회가 결과에 대한 주요 결정인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 샤밀이 자신 고유의 방식대로 이슬람을 바라봤던 민족들에게 종교적 규율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강요함에 따라 보다 독립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족장들이 샤밀의 지배에 대해 점차 소원해졌다는 것을 든다. 포크로브스키는 계급 분석(class analysis)에 근거하여, 바리아틴스키에 의해 샤밀 이전시기의 특권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토착 귀족들이 산악민들의 대의를 저버렸다는 것도 지적한다. 포크로브스키의 주장도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샤밀의 동맹이 취약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으며, 이는 특히 그의 군사적 몰락과 함께 뚜렷이 드러났다. 이맘의 권위는 그의 불패의 리더십에 대한 일반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실제 벌어진 일들이 이 믿음을 무너뜨리자 샤밀은 그의 의지를 강요할 물리적 수단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의 도덕적 권위는 증발하게 된다.
샤밀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러시아인들은 최초로 저들의 전술과 전략을 사용하였다. 전쟁 최후반부에 등장한 라이플의 출현은 일반적 부대를 대단히 강력하게 만들긴 하였지만, 동부 코카서스에서의 사건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산악민들은 스스로 소수의 현대 무기들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비록 러시아측의 전술적 화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위에 있었지만, 각각의 무기의 우위와 규율잡힌 기동의 혼합 효과는 단지 적들이 재래식 방식으로 전투에 참가했을 때에만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비록 고통스럽게 쌓인 것이긴 하지만, 수많은 전투 경험 역시도 러시아측의 효율성을 증대시킨 요인이었다. 밀집종대 대형과 이를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하는 규율이 갖는 전술적 중요성을 이해함으로써, 러시아군은 산악민들이 유리했던 매복전투에 덜 취약해졌다.
전술적 수준 이상을 살펴보면, 바리아틴스키가 샤밀의 최종 패배를 위해 수립한 계획에서 그가 성공적 전략적 결심을 하기 위해 밟았던 단계적 목표들을 이해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전장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 부대들의 분리되지만 한편으로 협조된 기동은 궁극적으로 더 커다란 목표를 위해 주의깊게 계산된 것이었다. 1859년 7월 3개 부대가 보트리크 부근에서 합류하였을 때, 이들은 후방의 저항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아바리아의 지도자들이 서둘러 투항하러 달려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리아틴스키와 에브도키모프 휘하의 러시아군은 잘 계획된 기동과 기만이 샤밀 휘하 게릴라들의 우세한 기동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산악민들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인들의 정복 방식의 핵심은 자연적, 인문적 환경을 재구성하는 데에 있었으며, 이로써 바리아틴스키가 전투의 조건을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윌리엄 셔먼 장군이 실시한 "바다로의 행진(march to the sea)"를 크게 상회하는 러시아의 초토화 정책은, 대규모 강제 이주정책과 맞물려 샤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을 제거하게 되었으며, 중부 코카서스를 영구적으로 변형시키게 되었다. 포크로프스키는 러시아의 압제 속에서 약 40만명의 부족민들이 터키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보다 많은 수가 제국령 내로 강제이주당했다. 서부 코카서스에서는 인구 이동이 특히 심했는데, 궁극적으로 50만명 이상의 체르케스족이 조상들의 땅에서 쫓겨났다. 그 자리는 코삭들과 러시아 내부지역에서 온 식민가들이 차지했다. 도로 네트워크의 건설과 궁극적으로 철도망의 건설은 코카서스를 제국 내 통상적 통신망 안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러시아는 남아있는 토착민들의 마음은 지배하지 못했을지라도 땅만큼은 지배할 수가 있었다. 1877-78년 사이의 러시아-터키 전쟁과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벌어진 수많은 봉기들은, 정복(conquest)이 반드시 동화(assimilation)와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코카서스에서의 경험은 러시아 군대에게 단지 소규모의 유산만을 남겨주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코카서스 전장에서의 교훈들을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한 조직적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는 유럽 전장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1년에서 1881년 사이에 전쟁장관으로 복무하였으며, 스스로의 분석이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밀류틴 조차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응하기 위하여 러시아 군대를 현대화 하는 데에 정신이 팔리게 된다. 게다가 코카서스에서의 길고 피비린내나는 항쟁은 실제보다 더 많은 명성들을 뿌리게 된다. 그러나 역사가 존 셸던 커티스(John Sheldon Curtiss)가 말한 것처럼, 코카서스에서의 경험을 무시한 댓가는 클 수가 있었다. 산악지대에서의 게릴라와의 수년간의 전투 경험은 "이곳의 지휘관들에게 연병장 기술들보다는 기동성과 민첩성을 중시하도록 가르쳤고, 병사들의 주도성과 열의에 가치를 두도록 만들었다".
코카서스에서의 일부 베테랑들은 이 전쟁의 교훈들을 점차 활발해지고 있던 중앙아시아 전장들로 전수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1861년 밀류틴이 전쟁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이 가치있는 지식이 단지 생존할 뿐만이 아니라 적용될 수도 있었다. 밀류틴의 재임기간과 그 이후, 코카서스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기사들과 역사서들이 만들어져 널리 회람되었다. 물론 정당하게 말하자면, 평균적인 러시아 장교들은 이걸 거의 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는 유럽 대륙의 보다 커다란 위협에 심취되어 있었고, 코카서스에서 벌어진 일들은 군대의 제도적 기억 속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2개 세대가 지나면서, 비정규전 및 산악전에 관한 핵심 요소들은 처음부터 다시금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제 1장의 원저자주 및 참고문헌 (Notes, Bibliography)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