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러시아-소련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정규전, 1993 - `제 2장, 중앙 아시아의 정복`

박용수 2014. 10. 27. 16:12

<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제 2장 - 중앙 아시아의 정복

(The Conquest of Central Asia)

 


 코카서스 정복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추가적인 팽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로의 진출은 논리적으로 영국-러시아간의 경쟁지역인 터키 해협(Turkish straits), 코카서스 지방, 페르시아 북부 및 아프가니스탄 등의 연장이라고 봐야 했다. 영국과의 경쟁관계는 러시아의 팽창에 있어서 억제요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극제 역할을 하였으며, 러시아로 하여금 중앙 아시아를 선점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게 되었다. A. I. 바리아틴스키 장군(General A. I. Bariatinskii)은 코카서스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면서, 카스피해(Caspian Sea) 동쪽 연안의 러시아 항구들과 아랄해(Aral Sea)간을 잇는 철도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러시아의 힘을 키바 칸국(khanate of Khiva) 지역에 투사하기 위한 필수 단계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연은 "미래의 우리 성공에 도움 되지 않으며, 적들로 하여금 아시아 지역의 영토 및 영향력을 강화시킬 자유를 제공할 것"이라고 하였다.

 

 바리아틴스키는 중앙 아시아 정복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처럼 코카서스에서 복무했던 장교들 중에서 여럿은 중앙 아시아 정복에 참가한다. 바리아틴스키의 옛 참모장이었던 드미트리 밀류틴은 전쟁성 장관으로 재직하는 1861년에서 1881년간의 20년간 이 정복의 결정적 시기를 관장하게 된다. 스스로의 코카서스 전쟁 경험으로 인하여 그는 비재래식 전쟁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인내의 필요성과 제국 지배에 대한 도전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임 당시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임무는 스텝 남부 지역의 미약하지만 말썽투성이인 오아시스 칸국들(oasis khanates)에 대하여 러시아의 지배권을 심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다른 장관들은 비용과 위험성을 확신할 수 없는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대하여 통일된 견해를 갖지 못한 상태였다. 실제로 새로 투르케스탄 연방총독(governor general of Turkestan)이 된 콘스탄틴 P. 폰 카우프만(Konstantin P. von Kaufman)은 1868년, 비판자들로 하여금 중앙 아시아 지배가 갖는 이점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상회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비망록(memorandum)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이 전체 지역을 단 20여년만에 석권하게 된다. 이는 정복에 대한 열망, 상업적 이익의 갈망, 지역 지휘관들의 야망 등이 혼합되면서 촉진되었다. 이를 위해서 육군은 중앙 아시아의 가혹한 기후와 넓은 사막에 최적화된 새로운 종류의 전쟁 방식(warfare)을 배우게 된다.

 

(드미트리 밀류틴은 코카서스에서 젊은 장교로서 복무하였으며, 1861년에서 1881년 사이에는 전쟁성 장관으로 근무한다.)

 

(연방총독 K.P 폰 카우프만)

 

(카자흐 부족민의 모습 (베레슈차긴이 그린 그림))

 


 전장 개황(Theater Overview)

 

 1800년 당시, 중앙 아시아는 2개의 지리적, 문화적으로 구분되는 지역으로 나눠졌다. 북쪽 절반은 광대한 초원지대(steppe)로서, 기후적으로 여름과 겨울이 극단적인(subject to climatic extremes in summer and winter) 지역이며, 주로 거주하는 사람들은 약 2백만명에 달하는 카자흐 유목민들(nomadic Kazakhs)이었다. 이 사람들은 서쪽으로는 중앙 아시아 윗쪽과 카스피해 가장자리까지, 동쪽으로는 중국 접경지대의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까지의 지역 내에 살고 있었다. 카자흐 인들의 삶은 평원 목축인(plains herders)들에게 흔한 1년 단위 이동 사이클(annual cycle of migration)에 맞춰져 있었다. 카자흐 말들은 작았으며,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초원 지역의 가혹한 조건에 완벽히 적응되어 있었다. 장거리 행군의 경우에는 코삭 말(Cossack mounts)들보다도 훨씬 잘 버텼다. 카자흐 인들의 삶은 자연 법칙에 의해서 결정지어졌으며, 이들은 공식 정치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고, 부족장들에게는 부족 내부 및 부족들 사이에서 필요한 일종의 통제 비슷한 것을 유지할 정도에 필요한 것 이상의 권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카자흐인들은 순니 이슬람(Sunnite Islam) 규정들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도 비슷한 자유분방함(informality)을 보였다.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계획의 맥락에 있어서, 카자흐 초원지대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 및 아프가니스탄 주변부의 고대 오아시스 왕국들간을 갈라놓는 전방지대(frontier zone)를 형성했다 (지도 1 참조). 러시아로부터의 무자비한 정치적, 인구학적, 군사적 압력에 처한 카자흐인들의 입장은, 마치 비슷한 시기의 북아메리카 평원 부족들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코삭들과 이민자들의 무자비한 침투는, 부족들로 하여금 처음에는 저항하게 만들었고, 이어서는 러시아의 무자비한 인구학적, 군사적 압력에 무너지게 만들었다. 러시아 관리들과 장군들의 의식적인 계획 여하는 제쳐두고라도, 러시아인들과 카자흐인들간의 문화적 이질성은 상호 공존할 수 있다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게 만들었다.

 

 중앙 아시아의 두번째 커다란 지역은 아랄 해 남쪽의 사막 지대로, 몇몇 대형 하천들로 구분된 지역이며, 남동쪽 끝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있다. 이 지역의 문화는 수세기 동안 고대 대상 무역로(ancient caravan routes)들로 연결된 일련의 비옥한 오아시스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사막을 지배한 것은 3개의 칸국 - 부하라 칸국(Bukhara)(인구 3백만), 코칸드 칸국(Kokand)(인구 150만), 키바 칸국(Khiva)(인구 50만) -들로서, 종종 자신들의 영향력을 초원지대에 까지 확장시키기도 하였다.

 

(지도 1. 19세기 러시아의 남부 변경지대)

 

 이 칸국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 그룹(ethnic group)은 우즈벡인(Uzbeks)들로서, 긴 이슬람 전통을 지녔으며, 정교한 사회구조와 발전된 농업 및 상업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보다 약간 덜 영향력 있던 민족들로 타지크인(Tajiks)들과 키르기즈인(Kirghiz)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주로 중국과의 접경 지대에 있던 남동쪽 구석 산악지대에 주로 살고 있었다. 반대편 서쪽에는, 주로 유목민적 습성을 갖고 있는 투르코만인(Turkomans)들이 목축, 어업, 약탈 등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키바와 코칸드의 칸(khan)들, 부하라의 에미르(emir)는 전제정치(ruled as despots)를 하였다. 이들의 군대는 규모는 컸지만, 동시대 유럽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장비 및 조직이 뒤떨어져 있었다. 특히 코칸드와 부하라의 경우 경제가 발전되어 있었으며, 외국 상인들에게 자신들의 면화, 직물, 비단, 염료, 과일 등을 수출하였다. 키바는 다소 덜 번화하였으나 가장 안전한 지역에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안정되어 있었다. 키바는 코칸드나 부하라처럼 독립적인 전통들을 갖는 무역 중심지들의 결합체가 아니라, 사방이 사막으로 둘러싸인 별도의 왕국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외교적 압력이나 침공에 덜 취약했다.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침공은 3단계로 이뤄지는데, 이는 이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반영한다. 1735년 러시아가 카자흐 초원지대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렌버그(Orenburg)까지 자국의 남쪽 국경선을 확장한 이래, 대략 1840년까지에 이르는 105년 동안, 러시아는 남동 볼가 지역과 서부 시베리아의 국경지대에 정착민들을 보내고 강화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1840년에서 1864년에 이르는 기간, 러시아 세력은 카자흐 초원을 포위한다. 이 다음 단계는 3개의 중앙 아시아 칸국들을 복속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1873년 키바의 함락으로 막을 내린다. 1880년대의 테케 투르코만(Teke Turkomans)의 패배는 정복의 마지막 단계를 장식했으며, 러시아의 영토를 오늘날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선까지로 확장시켰다.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는, 적과의 전투는 그다지 심각한 도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러시아 관찰자가 말한 것처럼, 보급조직 문제와 수송수단 확보야말로 "이 전역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려움"이었던 것이다.

 

 코카서스에서처럼, 군사적 승리 한가지로는 정치적 안정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독립적인 중앙 아시아 부족들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는 강압과 외교, 끈질긴 군정 통치(military administration)를 교묘하게 섞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군사 지휘관들이 평소 관심사를 벗어난 분야에 대하여 미묘한 판단과 타협을 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만 했다.


 

중앙 아시아 정복 (The conquest of Central Asia)

 

 19세기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오렌버그와 시베리아 라인(Siberain Lines)(코카서스 라인과 비슷한 개념임)이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영토를 공식적으로 구분지었다 (지도 1 참조). 각각은 일련의 코삭 정착촌들과 요새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이들의 목적은 카자흐인들이 국경을 넘어 습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한편, 반대로 초원으로 보복 공격을 가하는 발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820년대, 러시아는 초원지대에 행정구역을 설정했다. 서부 지역 카자흐 부족들은 오렌버그 연방총독(governor general of Orenburg)의 담당이었으며, 그는 러시아의 이름으로 지배할 토착 족장(임기제 술탄(termed sultans))들을 선출하였다. 각 술탄들은 약 200여명의 코삭 경호원들 - 이는 꼭 필요한 자산으로서, 강력한 경호 없이는 아무도 초원 깊숙히 들어갈 엄두를 못내었기 때문이었다 - 을 제공받았다. 서시베리아 정부(goverment of Western Siberia)에 의한 극동지역 카자흐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여러 칸국들의 반 러시아 선동의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의 지배에 대한 카자흐인들의 저항은 간헐적으로 폭발해오긴 했지만, 특히 1840년대에 들어 갑자기 강력해졌는데, 당시는 케니사리 카시모프(Kenisary Kasimov)라는 이름의 카자흐 족장이 러시아 지배에 대항하여 부족들을 조직하고 "카자흐 샤밀(Kazakh Shamil)"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시기이다. 카자흐 집단들(Kazakh bands)(통상 1000명 미만이었다)은 러시아 외곽초소들과 대상(caravans)에 대한 히트-앤드-런 공격에 능했다. 1843년부터 러시아는 케니사리를 붙잡기 위하여 오렌버그와 서시베리아 라인으로부터 몇차례의 소규모(2천명 미만) 원정을 실시하기 시작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케니사리는 추격받을 경우 전투를 회피하였으며, 대신 광대한 초원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택했다. 멍청하게 기마 카자흐 전사들을 추격하러 초원 속으로 들어가는 육군 분견대의 경우 스스로 길을 잃거나 탈진시키는 위험 속에 빠뜨리는 셈이었으며, 이는 곧 적들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길이었다. 지방 부족들에 대한 자신들의 실패를 위장하기 위하여(이를 알게 되면 다른 부족들도 케니사리의 기치 아래로 몰려들테니), 러시아인들은 도망치는 적에 대한 화려한 승리들을 선전하였다.

 

 1847년, 케니사리가 라이벌 부족민의 손에 의해 사망하자 초원 지역의 분쟁은 사그러든다. 이러한 행운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중앙 아시아 깊숙히 제국 전초기지들을 설치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공고화할 기회를 얻는다. 러시아 지휘관들은 아메리카 평원에서 인디언들과 싸우고 있던 미군들과 달리, 가축들을 몰아내고 재산을 파괴하고 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한 카자흐 마을들과 숙영지들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하는 방법을 금방 익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 측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코칸드와 키바로부터의 교란이 존재하는 한, 초원 북쪽 변경지대로부터 초원지대를 평정하려는 것은 아무런 성과가 없는 시도임이 경험을 통해 증명된다.

 

(카자흐인들의 겨울 숙영지 (이 그림은 스코벨레프 장군의 중앙 아시아 전역 당시 종군한 러시아 예술가 베레쉬차긴이 그린 그림이다) )

 

 러시아 측에 있어서 오랫동안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키바 칸국은, 부하라로 가는 대상 행렬(merchant caravans)이나 카스피해 연안에 정박한 어선 등에서 러시아 신민들을 종종 붙잡곤 했다. 표트르 1세(Peter I)(표트르 대제(the Great))는 1717년 키바 칸국을 정복하기 위한 첫번째 시도를 하였는데, 당시 베코비치-체르카스키 공(Prince Bekovich-Cherkasskii) 휘하의 3727명의 군대를 보내 키바를 향한 길고 위험한 행군을 실시토록 한다. 베코비치-체르카스키 공은 이후 훨씬 대규모의 키바 군대를 격파하지만, 이어 협상을 실시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칸은 복속할 것처럼 위장하여 베코비치-체르카스키 공으로 하여금 휘하 군대를 도시 안의 5개 지역에 분산 수용하도록 설득한다. 러시아인들이 도시 내로 들어와 자리잡자마자, 칸의 군대는 각각 분산된 분견대들을 습격하여 이들을 학살하게 된다.

 

 러시아의 두번째 원정 시도는 1세기가 넘게 지난 뒤에 벌어졌으나, 거의 비슷한 수준의 재앙으로 끝나게 된다. V. A. 페로브스키 장군(General V. A. Perovskii) 책임 하에 1839년 이뤄진 원정이 실패한 근원은 1825-26년 겨울 당시, 키바로부터 수백 마일 북쪽에 위치한 엠바 강(Emba River) 일대의 카자흐 약탈자(Kazakh raiders)들에 대한 보복 원정을 실시했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월에 오렌버그를 출발한 2310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카자흐인들의 겨울 숙영지를 완벽히 기습한다. 눈덮힌 초원으로 급히 도망칠 경우 맞게 될 비참한 운명을 선택하는 대신, 카자흐인들은 신속하게 항복해버린다. 이 작전의 경험을 통해 러시아인들은 겨울 시기 초원을 통과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믿게 된다.

 

 1839년 원정의 대략적인 원인은 오렌버그와 키바 사이에 벌어진 반복적인 관계 악화라고 볼 수 있다. 1836년, 분노한 러시아 당국에서는 당시 오렌버그와 시베리아 변경지대에 있던 모든 키바 측 상인들을 억류하는 한편, 키바에 억류된 러시아인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포로 교환은 신속히 이뤄졌고 총 105명의 러시아 포로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 거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키바의 칸은 망기쉴락 반도(Mangyshlak Peninsula)(카스피해 쪽으로 돌출된 지역으로, 몇몇 제국 어업기지들이 위치한 곳이다)에서 200명의 러시아인들을 추가로 생포한다. 이에 따라 1839년 3월, 러시아 군사 계획가들은 칸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한 원정을 제안한다.

 

 최초의 원정 계획은 봄에 50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출발시키되, 그 의도를 아랄해 연안에 대한 과학 원정(scientific expedition)으로 위장하게끔 되어 있었다. 페로브스키는 오렌버그에서 상 엠바 강(upper Emba River), 우스트 우르트 고원(Ust Urt plateau), 아랄해 서쪽 제방을 거치는 총 1000마일 가량의 원정로를 선택했다. 그러나 2가지 고려에 의해 그는 1840년 봄이 아닌 1839년 가을에 출발하는 쪽을 선택했다: 즉, 겨울에 보다 물을 얻기 쉽다는 점과, 1825-26년 겨울 원정의 선례였다. 2개의 전방 보급소를 설치하는 것을 포함한 준비과정은 완벽한 비밀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작전 실시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침공군 경로상에 위치한 카자흐 부족들을 동쪽과 남쪽으로 소산시킴으로써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낙타 및 몰이꾼(driver)들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원정을 위해서는 각개 병사당 2마리씩의 낙타를 필요로 하였고, 한 몰이꾼이 4내지 5마리의 낙타를 다룬다고 했을 때, 약 2000명 이상의 토착민 몰이꾼을 필요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러시아인들은 9000마리 이상의 낙타와 2000마리 이상의 말들을 동원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마초(forage)만도 보급수송량(supply train)의 절반을 차지할 상황이었다. 대규모 행군종대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러시아인들은 9월 14일에서 17일 사이에 4개의 별도 분견대로 나누어 이동하게 된다. 각 분견대들은 항상 해지기 2시간 전이면 멈췄는데, 동물들로 하여금 먹을(graze) 시간을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야간에는 숙영지에서 약 1킬로미터 거리에서 소규모의 코삭들이 경계망을 펼쳤다. 단지 며칠이 지나자 날씨가 추워지고 눈폭풍이 닥쳐왔으며, 원정 내내 페로브스키를 괴롭히며 인원과 동물들을 쓰러뜨리게 된다. 12월 19일 엠바 강의 보급소에 도착하였을 무렵, 부대는 이미 3000여마리의 낙타를 상실했으며, 나머지들도 훨씬 적은 양의 물자만을 운반할 힘이 있었다.

 

 악 부락 보급소(Ak Bulak supply station)까지의 여행은 15일이 소요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훨씬 많은 동물들을 손실하게 된다. 이제 대략 5000마리 가량의 낙타만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악 불락 자체의 상황도 한심했는데, 질병이 만연하여 만신창이가 된 수비대가 이제껏 여러 차례의 키바인들의 공격을 막아왔던 것이다. 키바까지 아직 500마일이 남아있었지만, 눈 앞에서 병력들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본 페로프스키로서는 퇴각하는 외에는 선택할 길이 없었다. 부대의 퇴각 과정에서도 인원과 동물들은 더 많이 상실되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총 1054명의 인명과 10000여마리의 낙타, 그리고 대다수의 말들이 죽는 결과를 맞는다. 비록 이 원정이 러시아-키바간 관계에는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이에 놀란 칸이 결국 400여명의 러시아 포로들을 반환하는 계기가 된다.

 

 1840년대에는 코칸드가 키바의 중앙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에 대한 가장 큰 적수로서의 자리를 빼았게 된다. 코칸드는 시르 강(Syr River) 북쪽의 카자흐 부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코칸드가 갖고 있던 지역 헤게모니에 대한 열망은 러시아의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것이다. 케니사리가 죽은 뒤에도 러시아의 정책입안자들은 "유목민들을 복종하도록 유지하는 것(to hold them in obedience)보다 이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것(to take nomads as subjects)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 초원 남부 가장자리를 장악하려는 러시아의 협조된 진격이 개시되었다. 니콜라스 1세 황제는 1845년, 전진요새기지(forward based fortification)들과 기동분견대(mobile "flying detachments")를 활용하여 지방민들의 저항을 억제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조직적인 러시아군 진격 전략을 승인한다. 러시아군은 오렌버그에서 북서 방면으로, 서시베리아에서 북동 방면으로 좁혀들면서 코칸드를 잠식해가며 전방경계선(forward frontier line)을 확보하였다. 1847년, 이들은 카스피해 연안 시르 강(Syr River) 입구에 아랄스크 요새(fortress of Aralsk)를 건설하였다. 아랄스크는 1848-49년 배치된 아랄 해 함대(Aral Sea flotilla)의 모항이 되었으며, 이들은 아랄 해를 측량하고 키바로의 접근로를 확보하였다. 1853년, 러시아인들은 시르 강을 따라 더 남쪽에 위치한 악 메쳇(Ak Mechet)를 점령하였으며, 이곳에 페로브스크 요새(Fort Perovsk)를 건설하였다. 1854년에는 시베리아에서 출발한 이와 별도의 부대가 일리 강(Ili River)과 이식 쿨 호수(Lake Issyk Kul) 남쪽 베르노에(Vernoe)(오늘날의 알마 아타(Alma Ata) 지역)에 요새화된 초소들(fortified outposts)을 설치하였다.

 

 크림 전쟁(1853-56)의 발발로 더 이상의 진격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 시점에서 러시아는 이미 초원 대부분의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고, 단지 베르노에 건너의 키르기스 부족들만이 문제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의 사례로 들 사항은 부구 키르기스(Bugu Kirghiz)에 대한 이야기이다. 1820년대부터 코칸드에 정복되어 있었던 부구스(Bugus)(대략 10000가구 가량 거주)는 1855년에 러시아에 복속하기를 희망한다. 그 대응으로 코칸드는 다른 부족들을 부추겨 부구스를 공격하게 하였고, 1860년에 러시아 원정군이 새로 설정된 알라타브 지구(Altav district)를 확보하게 될 때까지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1860년대 중반의 작전 목표는 시르 강의 전초기지(outposts)들과 베르노에 사이에 있는 러시아 변경지역간의 간극을 잇는 데에 있었다.

 

 1864년, 한 야심만만하던 대령이던 M.G. 체르니아에프(M.G.Cherniaev)가 베르노에에서 부터 병력을 이끌고 코칸다인들의 요새인 아우리에 아타(Aulie Ata)를 거의 피해없이 점령하게 된다. 거의 동시에, N.A. 베레브킨 대령(Colonel N.A. Verevkin)이 이끄는 분견대가 투르케스탄의 마을(the town of Turkestan)을 점령한다. 양개 부대는 체르니아에프 휘하로 합류한 뒤 침켄트(Chimkent)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코칸드와 부하라의 영토에 대한 남부 변경지대를 가로지르는 연속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들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전초기지(outposts)들은 디자인과 목적에 있어서 유럽 지역의 변경 요새들(border fortresses)과 크게 상이했다. 이는 이곳을 방문한 한 외국인 관찰자의 다음과 같은 증언으로 알 수 있다 : "내가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본 모든 초원 요새들 - 카라부탁(Karabutak), 우랄스크(Uralsk), 1번 요새(Forts No. 1), 2번 요새(Forts No. 2), 페로브스키 요새(Fort Perovskii), 쥬락(Djulak) -은 동일한 패턴이었는데, 화포 및 규율을 갖고 있지 못한 부대를 막는 정도에 적합한 진흙 벽으로 되어 있었고, 수백명 규모의 경험 많은 코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비록 간단하고 원시적이긴 했지만, 이들 영구 진지들은 러시아 지배를 확장시키는 데 있어서 심리적, 군사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코카서스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인들은 가시적으로 군사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지배자에 대해서는 원주민들이 별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M.G. 체르니아에프 대령 (이 그림에서는 장군 복장을 하고 있다.))

 

 1863-64년간 진행된 러시아 정복사업들로 인해 중앙 아시아 문제가 국제 정치에서, 적어도 러시아와 영국 관계에 있어서는 핵심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840년대 기간 동안 중앙 아시아에 대한 영국의 외교적, 상업적 접촉이 증가하면서 이는 러시아로 하여금 강력한 경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신들의 인도 제국을 위한 방패로 간주하게 되었고, 러시아의 지속적 남진이야말로 자신들의 위치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우려에 반응한 러시아 외무부 장관 미하일 고르샤코프(Mikhail Gorchakov)는 1864년 아시아 문제와 러시아 목표의 제한성에 대하여 요약한 유명한 비망록을 발표하게 된다 :

 

  중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입장은 고정된 사회 구조가 없는 반-야만적인 유목민들과 접촉하게 되는 모든 문명 사회들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다... 자국의 변경지대의 안전과 상업적 관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뒤틀리고 안정적이지 못한 성격을 가진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이웃들로 하여금 보다 문명화된 상태로 상승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러시아는 어떤 거대한 정복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경 조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팽창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단지 추구하는 바는 책임 있는 국가들로 이뤄진 안정된 국경이며, 일단 이것이 이뤄지면 더 이상의 정복은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충돌하기 원치 않았던 고르차코프가 완전히 위선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자기 정부 내의 많은 사람들이 칸국들과의 전쟁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부서들간의 상반된 견해는 국내외로 여러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이후에 벌어진 자국의 군사적 진격들을 칸국들의 반역행위로 인한 직접적 결과라거나, 욕구가 과다한 지휘관들이 승인받지 않은 활동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계산된 소설(calculated fiction)은 한 학자에 의해서 "불복종의 전설(legend of insubordina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기까지 한다. 사실로 들어가 보았을 때, 직접적인 감독이 없고 상 페테르부르크와 신속한 통신이 곤란했던 상황에서 야심적인 지휘관들의 존재가 실제로 러시아의 팽창을 촉진시키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근본적으로 방향성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일 밀류틴이나 알렉산드르 2세가 중앙 아시아로의 팽창을 강력히 중단시켰다면 아마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영국과의 관계에 파국이 펼쳐지지 않는 한, 진격을 일반적으로 용인하였다.

 

 그러나 고르챠코프가 1864년 성명을 발표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바보 혹은 거짓말장이가 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소장(major general)으로 승진한 체르니아에프가 코칸드가 지배하고 있던 상업 중심지 타슈켄트(Tashkent)로 소규모 병력을 데리고 진군했던 것이다. 도시를 탈취하려던 그의 최초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돌아와 1865년 도시를 점령한다. 이로 인해 중앙 아시아 정치에 밀려온 불안정 상태는 러시아로 하여금 코칸드 및 부하라 문제에 필연적으로 끌려들어가게 만들었다. 코칸드의 칸이 러시아 군대의 물결을 막느라 힘을 소모하고 있는 사이, 부하라는 이를 이용하여 코칸드 시(cities of Kokand)와 코젠트 시(cities of Khodzhent)를 탈취하였고, 만약 체르니아에프가 타슈켄트에 러시아군을 주둔시키지 않았다면 이곳까지도 공격하였을 것이다. 체르니에프는 타슈켄트를 점령하고 우선 1년간 모든 세금을 면제하는 인기 정책을 펼쳤으며, 이로써 타슈켄트의 러시아 지배를 공고히 한 뒤인 1866년, 이제 부하라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 그는 밀류틴에 의해 보다 책임감 있는 장군인 D. I. 로마노프스키(D.I.Romanovskii)로 경질된다. 비록 체르니아에프가 경질되긴 했지만, 전반적인 진행 방향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그해 말, 로마노프스키 장군은 부하라로부터 코젠트를 탈취하였으며, 이로써 부유한 페르가나 계곡(Fergana Valley)는 러시아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어 코칸드-부하라 변경지대에 있던 우라-티우베(Ura-tiube)도 함락된다.

 

 로마노프스키 장군은 자신의 동기와 방법에 대하여 1866년 10월 7일 전갈을 통하여 오렌버그 지구 사령관(commander of the Orenburg district) N. 크리자노프스키 장군(General N. Kryzhanovskii)에게 설명하였다: 우라-티우베는 이제껏 유럽인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장소로서, 시르 강 계곡의 부하라 에미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며, 이곳을 점령하는 것은 에미르에게 최근의 반 러시아적 행동들을 중단하도록 하라는 경고였다. 로마노프스키의 부대는 9월 7일 보병 19개 반개 중대와, 코삭 기병 5개 "백여명(hundreds)" 부대, 로켓 부대(a rocket command), 8문의 산악포(mountain guns), 4문의 18파운드 박격포 등의 규모로서 출발한다. 23일 경, 우라-티우베의 상황을 알아보는 한편 수비대 사령관과의 회담을 하기 위하여 정찰 분견대가 전방으로 파견된다. 요새의 북쪽면이 가장 강하다고 판단한 러시아인들은, 아무 자연 장애물이 없는 남쪽 방향으로부터 주공을 지향하기로 결심한다. 러시아 포병대는 성벽 사이에 간단히 구멍을 만들어 냈다. 공격부대는 단지 30분만에 성벽을 함락시켰으며, 전투 자체는 다시 1시간이 지나자 종결되었다. 전투에서 사망한 러시아인은 단지 17명 뿐이었다. 이 공격은 승인받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우라-티우베 점령은 밀류틴을 불쾌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크리자노프스키에 대한 다음번 통신문에서 이 지역에 있어서의 추가 군사작전을 금하도록 지시하였다.

 

 1868년까지의 러시아의 행동들로 말미암아, 부하라에는 매우 강력한 반-러시아적 성직자 파벌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에미르로 하여금 코칸드, 키바, 카쉬가르, 아프가니스탄과 외교적 동맹을 맺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다. 부하라의 영향력은 계속 증대되고 있었으며, 지역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이러한 에미르의 도전은 러시아가 새로 차지한 영역(투르케스탄 지구(the district of Turkestan))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가 있었다. 이에따라 연방총독(Governor General) K. P. 폰 카우프만은 고대 상업도시인 사마르칸트(Samarkand)에 대한 즉각적인 선제공격을 실시하여 부하라군을 격퇴시킨다. 근방 카티-쿠르간(Katy-kurgan)에 약 700명의 수비대를 남겨놓은 후, 카우프만은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하라군 주력을 찾아 출발하게 된다.


 늦은 봄에 이르러 그는 찾아나서던 사냥감을 몰아넣게 된다 - 부하라군은 약 6000명의 보병과 기병 15000명, 14문의 경포로 구성되어 있었다(러시아측 주장에 따른 수치임). 무장과 지휘에 있어 압도적이었던 러시아군은 이들을 쉽게 격파한다. 한편 카티-쿠르간을 지키고 있던 수비대는 외부로부터의 약 4만명에 이르는 병력의 지원을 받는 도시 내부민들의 대규모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포위당한 러시아인들은 카우프만이 돌아와 사태를 해결하기 전까지의 1주일간을 잘 버텨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에미르는 1868년 러시아에 대규모의 특권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부하라는 배상금(imdemnity)를 물어야 함은 물론, 자신들의 시장에 러시아 상인들이 유리한 조건 하에서 무한정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했다. 완벽한 모욕감에 사로잡힌 에미르는 왕위를 포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인들은 그를 다루기 쉬운 꼭둑각시로서 남겨두고자 하였다. 또한 러시아인들은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으며, 이곳은 이후 군사 지휘관의 통제를 받는 제라브샨 지구(Zeravshan district)로서 통치되게 된다.

 

 러시아가 1850년대와 1860년대의 시르 강 남쪽으로 신속하게 확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러시아 군사력이 칸국들의 구식 군대들에 비하여 훨씬 우월함을 증명한 것이었다. 칸국들은 초원 부족들에 비해서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훨씬 잘 조직되어있긴 했지만, 이들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열등한 재래식 상대(inferior versions of what the Russians considered a conventional adversary)였기 때문에 오히려 훨씬 제압하기 쉬웠다. 이들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이들의 도시들은 고정 목표물이었으며, 화력과 규율면에서 뒤떨어지는 이들의 군대는 개방된 전장에서 러시아군과 반복적으로 정면대결을 펼쳤다. 비록 숫자상으로는 우위를 점했지만, 이들 오아시스 칸국들의 중앙 아시아인들은 승리할 가망이 거의 없었으며, 이는 이들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패배 기록들에서 잘 나타난다. 러시아인들은 1847년에서 1873년까지의 백여차례의 군사작전을 통털어서 놀랄만큼 적은 수효인 2000명 가량의 전사상자 피해만을 입었다.

 


 중앙 아시아에서의 전투의 성격 (The Nature of Combat in Central Asia)

 

 중앙 아시아의 정복이 전혀 군사적 문제를 수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인들이 코카서스에서 겪었던 장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해결하였다. 예를 들어 행군종대의 이동순서(the order of column movement)나 보급수송대의 방어 패턴(the pattern of defense of the supply trains) 따위는 러시아의 코카서스에서의 경험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비록 가능한 경우에는 전방 보급소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코카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다수 원정대는 사실상 자급자족해야 했다. 도시와 수비대, 또는 야전의 부대들 사이에서의 통신은 유지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대규모 부대를 여러 제대(echelons)들로 나누는 것이 종종 필수적이었는데, 가장 양호한 경로를 통과하는 경우라도 그 경로상의 우물의 수는 전체 원정대를 단번에 지원하기에는 거의 항상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873년, 대 키반 전역(great Khivan campaign)의 일부였던 망기쉴락 분견대(Mangyshlak detachment)는 사막을 통과할 때 3개 제대로 이동하였다. 첫번째 제대는 03:00에서 09:00 사이와 16:00에서 20:00 사이에 이동했다. 두번째와 세번째 제대는 각각 한단계씩 뒤 시간에 움직였다.  즉 두번째 제대는 16:00에 출발하였고, 항상 한 정거장만큼 뒤에 있었다. 세번째 제대는 두번째 제대 뒤를 따랐다. 일반적으로 각각의 제대는 서로에서 6시간 거리 이상으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앙 아시아에서조차도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지 않으면 적은 위험한 존재였다. 부대가 이동 중에 있을 경우, 보급수송대(supply train)는 보병에 의하여 전방향에 대한 방호가 이뤄져야 했다. 또한 보급수송대 자체에서도 음식이나 다른 물건들을 담은 나무 상자를 갖고 있는 낙타들은 바깥쪽에 위치시켰는데, 이를 통하여 여기에 실린 물건들을 이용한 차량진(laager)을 신속하게 구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병(통상 코삭들)으로 이뤄진 전위 및 후위부대는 주력으로부터 1~2마일 거리에 위치하였다. 코삭들은 또한 대열 전체에 걸쳐 근접 거리에서 순찰을 실시하였다.

 

 투르케스탄에서의 러시아 행군부대는 다수의 말과 낙타를 갖고 있었는데, 숙영을 위해 멈추기 전까지 하루에 30마일 이상을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원 지형은 평평한 개활지였기 때문에 야간 숙영지로 적합한 방어하기 좋은 곳이 별로 없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휴식시에는 통상 방진 형태(square formation)를 취하였고, 가끔씩은 짐과 수레등을 이용하여 흉장(breastwork)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코삭들과 보병들이 외곽면을 맡았고, 대포와 로켓등은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였다. 말과 낙타들은 방진 안쪽에 위치시켰으며, 기타 가축들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적들인 유목민들은 용감하고 꾀가 많긴 했지만, 러시아군 진형을 붕괴시키거나 공격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규율을 갖고 있지가 못했다. 유목민들이 선호했던 공격 방식 중의 하나는 러시아군 행군종대를 포위하고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전경험에서 나타난 결과는 러시아인들이 진형을 유지하고 돌파를 방지할 충분한 예비대를 유지하는 경우, 그 결과는 숫적으로 압도적인 적들에게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러시아인들로서는 별로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칸국의 군대들은 다른 유목민 집단들과 비슷하게 대다수가 기병으로 이뤄졌으며, 군사기술(military art)에 대한 활용이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러시아군에는 3가지 주요 병종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보병이 이 중에서 가장 중요했다. 중앙 아시아 기병들은 러시아 정규군 혹은 코삭 기병을 맞아 대등하게 혹은 더 우세하게 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토착민 기병 및 보병들은 유럽식 보병의 절제된 화력 - 이는 1860년대 라이플이 등장하면서 더욱 심해진다 - 을 전혀 극복할 수가 없었다. 적이 전투를 근접전으로 몰아가는 데에 성공하게 되면, 이번에는 보병의 총검이 위력을 드러냈다. 러시아 기병 중에서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유용했던 종류는 코삭 기병들로, 이들은 인원과 말 모두에 있어서 내구력이 뛰어났다. 기병이 추격전과 기동에 있어 유용하긴 했지만, 희소자원인 물과 마초(forage)가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대규모 활용은 곤란했다. 또한 기병 분견대가 주력에서 멀리 떨어져서 활동하는 것도 위험했다. 초원 지대의 어려움 속에 익숙한 카자흐의 토산 말들은 북쪽 지방에서 잘 길러진 말들에 비하여 이 환경에서는 훨씬 강했다.

 

 혼성 부대로 이뤄지고 긴 보급수송행렬로 굼뜬 대규모 러시아 행군부대는 기만 기동이라고는 거의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초원지대에 전방보급소를 설치하는 것도 적에게 대략 어느 방향으로 작전이 곧 이뤄지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점을 드러냈다. 대규모의 낙타 및 몰이꾼들을 구입이나 임대, 고용의 방식으로 확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토착민들에게 경고하는 효과가 있었다. 가능한 한 러시아인들도 최종 목적을 숨길 수 있는 접근로를 선택하긴 했지만, 작전 보안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간에 이동하는 어떤 부대도 장거리에서 관측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동하는 것은 오직 밤에만 가능했다.

 

 러시아군의 사막 진군의 끝은 통상 요새화된 촌락을 공격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곤 하였다. 초기에는 지휘관들이 통상적인 공성전 절차를 따랐다. 그러나 대다수 중앙 아시아 요새들이 별로 내구력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곧장 단순한 포격 후 돌격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표준 공병 절차(standard engineering procedure)에 따라 이뤄진 1853년의 공성전은 3주가 소요되었다. 반면 1861년 이아니 쿠르간(Iany Kurgan) 함락시에는 하루가 걸렸고, 1864년 아우리에 아타 역시도 하룻만에 함락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인들은 중앙 아시아인들에게는 성벽으로 돌격하는 부대를 격퇴할 만한 화력과 규율이 결여되어 있음을 배우게 된다. 1860년대 러시아가 강선 화포를 도입한 것도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과거의 활강 무기들(smoothbore weapons)과는 달리, 고속의 강선포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진 진흙 요새들을 쉽게 무너뜨리고 관통할 수가 있었다.

 

 초원 깊숙한 지역에 영구 요새들을 구축하게 되면서, 러시아인들은 더이상 임시 보급소를 설치하기 위하여 분견대를 정기적으로 보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행군 과정에 있어서 러시아 병사들의 가장 큰 적은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온 중앙 아시아 전사들이 아니라, 극도의 더위와 추위, 질병, 갈증, 피로 등이었다. 통상 우물 위치를 찾기 위하여 정찰 혹은 지역민 심문 등이 이뤄졌다. 그러나 물이 적당히 공급되는 때라도 이동 행렬 속의 삶은 종종 괴롭고 건강에 나쁜 경우가 잦았다. 대규모 원정인 경우 병자와 부상자는 야전 병원에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만약 행군부대가 충분히 커서 별도로 호위가 가능한 경우에는 이들을 따로 움직이도록 배려할 수가 있었다. 종종 연료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으며, 비록 이 지역의 풀들은 잘 타기는 했지만 풍성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그 결과 동물 똥(animal dung)을 요리용 연료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다시 음식이 악취에 오염되지 않도록 뚜껑 달린 솥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칸 세이드 마호메트-라킴, 키바의 칸)

 


1873년의 키바 전역 (The Khivan Campaign of 1873)

 

 러시아인들은 느리지만 조직적으로 지역 사정에 적응해 나갔으며, 점차 생각이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1868년에 이뤄진 부하라 복속은 거의 필연적으로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옛 호적수인 키바의 칸(khan of Khiva)을 길들인다는는 도전을 재개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이뤄질 경우 러시아인들은 아프간 변경지대로 통하는 통로인 아무 강(Amu River)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게 된다. 1870년, 밀류틴 스스로가 키바에 대한 작전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하였다. 키바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만든 한 중요한 한 단계로서, 1869년 카스피 연안에 크라스노보드스크 기지(base at Krasnovodsk)가 설치된 것을 들 수 있다. 이어진 몇년 동안, 코카서스 군구로부터의 러시아 부대들이 트란스카스피아(Transcaspia) 지역과 칸국 주변지역을 집중적으로 정찰하였다.

 

 사방이 험악한 사막으로 둘러싸인 키바 칸국은 난공불락의 목표물이었다. 오아시스 지역의 40만명 가량의 인구 외에도, 칸은 주변의 투르코만 유목민들(Turkoman nomads)에 대해서도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이들 상당수는 상황을 보아가며 그에게 관심 및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칸은 자신의 지리적 위치와 가혹한 주변환경을 가장 중요한 방어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크기의 군대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보병(주로 우즈벡인(Uzbek)으로 구성되었고, 구식 머스켓으로 무장) 및 기병(주로 투르코만인으로 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는 비록 그다지 효율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사막을 거치느라 지쳐빠진 적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어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앞에 놓인 위험을 잘 알고 있던 연방총독 카우프만은 키바로의 원정을 코카서스 군구의 지휘부에 맡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휘권 다툼은 결정 과정에 있어서 어떤 일을 낼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또한 과거의 재앙들을 생각해 보면 또한 정당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카우프만은 자신의 전체 지휘 하에, 코카서스(카스피해 동쪽 연안으로 수상 수송된 병력들 이용)와 오렌버그, 투르케스탄에서 동시에 원정대를 출발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낸다. 보안에 신경썼음에도 불구하고, 칸 세이드 마호멧-라킴(Khan Seid Mahomet-Rakhim)은 러시아의 의도를 알아챘고, 러시아의 준비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크라스노보드스크로부터의 원정 준비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칸은 망기쉴락 반도 지역의 카자흐인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인들이 낙타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또한 1872년 칸은 크라스노보드스크에, 이어 코카서스에 사절을 보내 러시아와의 화평을 구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렀을 당시의 러시아는 이미 칸과의 협상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고, 카우프만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옛 키바 도시 성벽의 잔해)

 

 카우프만은 1873년 봄에 작전을 개시하여 심각한 여름 더위가 닥쳐오기 전에 키바에 도착하고자 하였다 (지도 7 참조). 카우프만의 계획에 따르면, 2개 부대가 투르케스탄 지구(Turkestan District) - 하나는 타슈켄트(편성은 드지작(Dzhizak)에서 이뤄짐)에서, 또 하나는 카잘린(Kazalin)에서 - 출발하여 600에서 700마일 거리를 가로지르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아무 강(Amu River)(이 강은 사막 가장자리와 키바 오아시스로 들어가는 문턱간의 경계선이기도 하다)에서 합류하여 같이 도하한 뒤, 다른 곳에서부터 진군해온 병력들과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렌버그에서 출발하는 3번째 부대는 가장 긴 1000마일을 행군하도록 되어있었다. 한편 코카서스 군구에서 편성된 2개의 추가 부대가 망기쉴락 및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거리는 가장 짧았지만(약 500마일 가량) 그렇다고 가장 쉬운 접근로는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경로상에서의 물 확보 문제를 반영하여 투르케스탄과 코카서스 부대를 별도의 행군부대(column)로 나누었고, 각각의 행군부대는 다시 제대들(echelons)로 나누었다.

 

(지도 7. 키바 전역. 1873년)

 

 긴 준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부대들은 장거리 행군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카우프만이 직접 지휘한 드지작 부대(Dzhizak column)는 3월에 출발했으나 4월에 심각한 더위를 만나게 된다. 카우프만은 여러 차례 휘하 부대를 쪼개야 했고, 어떤 경우에는 선두에서 후미까지 7시간 반 거리가 되도록 대열이 신장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그는 휘하 기병들을 별도 경로로 이동하여 아무 강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키바 전역에서의 러시아군의 구성에 관해서는 표 2를 참조할 것).

 

(표 2. 키바 전역에 참가한 러시아군의 구성)

 

 칸국 변경지방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카우프만이 가장 우선적으로 염려했던 것은 다른 행군부대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과, 그의 존재를 지역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4월 30일 이래로 다른 부대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 5월 14일, 장군은 기마 전령을 나머지 4개 행군부대들에게 파견하나, 이들 중 단지 2명만이 목적지에 도착한다. 한편 그는 근처 마을들 주민들에게 선포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황제 폐하는 이 지역의 "평화로운 노동자들(peaceful laborers)"에게 전쟁을 거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용서할 수 없이 적대적이고 자신의 신민들을 억압하는 이들의 지배자에 대항하여 전쟁을 거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카우프만은 자신의 마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반면,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이들의 재산은 압류할 것이라고 하였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인들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었으며, 일부 토착민들은 안내자 역할을 하거나 물품 수집관 역할을 하는 등으로 도움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무 강에 도착한 카우프만은 더이상 물 부족 문제에 직면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그 대신 마초를 모두 소모했기 때문에 더이상 수송용 동물에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키바까지의 남은 짧은 거리에 있어서는 토착민들의 수레에 의지하게 된다. 카우프만은 3척의 철제 소형 노젓는 배(small iron rowboat), 일명 "카우프만키(Kaufmanki)"(또는 "작은 카우프만(little Kaufmans)")들로 구성된 소형 선단을 이용하여 강을 탐사하거나 도하하는 데에 활용하였다. 카우프만은 기병 3개 대대를 도하지점 방어를 위해 남겨두었으며, 보병 12개 중대와 3개 "백인대(hundreds)", 12문의 야포를 가지고 전진하였다. 여기까지 진행한 그로서는 사실상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장병들이 초원지대의 가혹한 환경에 오랫동안 익숙해져있던 오렌버그 부대(Orenburg column)의 경우 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 2월에 집결한 이 부대는 4월 중순에 아랄해의 북서 연안에 도착하였으며, 깊은 눈속을 뚫고 4개 제대를 형성하여 전진하였다. 5월 8일, 오렌버그 부대는 쿤그라드(Kungrad)에 접근하였으며, 5월 12일에는 코카서스 분견대의 선두부대가 키바로 향한 최후 진격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를 받아볼 수가 있게 되었다.

 

 망기쉴락 부대(Mangyshlak column)는 - 아마도 칸의 노력의 결과인듯 하다 - 필요한 수의 낙타를 도저히 획득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지휘관 N. P. 로마킨 대령(Colonel N. P. Lomakin)은 휘하 보병의 1/3를 줄여 18개 중대 중에서 12개 중대만을 데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6개의 기병 대대들 중에는 다게스탄 비정규 기병 연대(Dagestan Irregular Cavalry Regiment) 소속 부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최근에 동부 코카서스에서 복속된 산악민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로마킨이 병력 수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4월에 킨더리 만(Kinderli Bay)을 출발한 이들은 가혹한 사막 날씨 속에서 심하게 고생하였으며, 인원들이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쉬-악트(Bish-akt)의 보급소에 간신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두번째 코카서스 부대인 크라스노보드스크 분견대는 치키쉴리아(Chikishliar)에서 출발하여 사막을 건너는 여행을 완료하지 못하고 해안가로 퇴각하였다. 5월 12일, 로마킨은 쿤그라드에서 오렌버그 부대와 합류하였고, 이로써 총 16개 보병중대 및 8개 기병대대, 14문의 대포를 가진 분견대가 되었다. 약 6000명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키바 군대는 이들에게 몇차례 공격을 가했으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러시아인은 단지 17명 뿐이었다.

 

(키바 및 하자르-아스프 성문)

 

 5월 28일, 모든 부대들이 키바 주변에서 카우프만 지휘하에 뭉쳐졌으며, 칸은 운명을 인정하고 항복 사절을 보낸다. 이어 이뤄진 조약을 통해 키바는 아무 강 동안의 영토를 할양하였으며, 예전에 부하라가 했던 것처럼 러시아 상인들에게 대규모 특권을 부여하였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1873년의 전역은 러시아가 이 지역 전반에 걸쳐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누적된 경험 및 보급과 정찰에 대한 세심한 주의, 임시 및 영구 수비초소 설치, 전술적 우세함 등이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 군대를 무적으로 만들었다. 자연(기후와 지형)은 러시아의 가장 큰 적이었지만, 이제 극복된 것이다.

 

(키바의 대광장)

 

(오늘날의 키바의 거리 (옛 건축물들은 복원한 것이다))

 

 


정복의 마지막 단계 (The Final Phase of Conquest)

 

 3개의 칸국 모두를 복속시킨 상황에서, 군정 문제(problems of military administration of the region)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말썽이 생긴 곳은 코칸드였으며, 이곳 지배자인 쿠도이아르 칸(Khudoiar Khan)은 황제의 도구로서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1875년 7월, 반란군 봉기가 일어나 칸은 코칸드에서 쫓겨나 러시아군의 보호 속으로 도망친다. 잠시 후, 반군은 쿠도이아르의 아들인 나스르-에딘(Nasr-Eddin)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코젠트(Khodzhent)의 러시아 수비대를 공격한다. 이 부대는 1개 대대와 2개 중대의 보병, 지역 민병대, 코삭 1개 기병대대, 1개 포대로 구성되어있었다. 8월 9일, 4개 보병중대가 중심이 된 분견대가 요새를 나서 약 10000명에 육박하는 반군들과 전투를 벌여 이들을 마을 밖으로 몰아낸다. 타슈켄트에서는 반란에 대처하기 위하여 카우프만이 즉각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한다.

 

 8월 22일, 16개 보병중대, 9개 기병대대, 20문의 야포로 구성된 러시아군 부대가 4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아마도 과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군과 마크람(Makhram) 부근에서 교전을 벌이면서 포위당한다. 잘 지향된 보병 및 포병 사격으로 러시아인들은 쉽게 포위를 무너뜨렸으며, 적진을 향한 공격이 이어졌다. 당시 젊은 지휘관이었던 M. D. 스코벨레프 대령(Colonel M.D. Skobelev)은 코삭 3개 기병대대를 이끌고 도주하는 반군 측면을 공격하였으며, 약 6마일에 걸쳐 도주하는 잔당들을 추격하였다. 이 작전 과정에서 러시아 사상자는 6명 전사에 8명 부상이었다. 카우프만은 승리 직후 코칸드로 행군을 실시하였으며, 이곳에서 반군 지도자인 압두라흐만-아브토바치(Abdurakhman-avtobachi)는 8000명 가량의 기병들과 함께 도망쳤다. 러시아인들은 마르겔란 마을(town of Margelan) 및 그 너머까지 추격을 지속하였다. 나스르-에딘은 평화를 구걸하는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으며, 결국 러시아에게 시르 강 동안에 있던 코칸드의 모든 기존 영토를 할양하게 된다.

 

(M. D. 스코벨레프 (장군 복장을 한 모습))

 

 러시아인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이라면, 이 반란을 만들어 낸 것은 나스르-에딘이 아니었으며, 그의 항복이 결코 이 반란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의 혼란기를 미리 예견하는 것처럼, 수많은 반군들이 코칸드 영토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쿠도이아르 칸의 친척인 풀랏-벡(Pulat-bek)의 기치 아래로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안디잔(Andizhan)을 중심지로 삼는다. 이번에는 결사적이고도 잘 조직된 방어가 러시아의 공격을 격퇴하게 된다. 안디잔 함락은 이제 스코벨레프가 할 일로서 남겨지게 된다. 그는 최근의 무용으로 소장(major general)으로 급속 승진한 상태였다. 스코벨레프는 티우라-쿠르간(Tiura-kurgan)과 나만간(Namangan)을 연달아 공격했으며, 후자를 실시하는 과정에서는 강력한 포격과 함께 돌격을 통한 공격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어 안디잔으로 진군하였는데, 단순히 포격만으로 방어자들을 항복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해 말, 비록 도시 장로들로부터 쿠도이아르 칸을 돌려보내라는 초대가 있긴 했지만, 러시아는 결국 그를 복위시키려는 의도를 버리게 된다. 그 대신 스코벨레프는 도시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1876년 2월,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코칸드 지역 전체를 합병한다고 선포하게 된다. 코칸드 남동쪽의 먼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키르기즈 부족들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스코벨레프는 공식적으로 "과학 원정대(scientific expedition)"로 규정된 - 영국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서 -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파미르 고원(Pamir) 언저리의 알라이 계곡(Alai Valley)으로 들어간다. 그의 의도는 지역주민들에게 러시아가 새로 장악한 영토의 모든 구석구석까지도 힘을 투사할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코카서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우월성을 성취한다는 것 자체는 효과적인 지배라고 하는 방정식 중에서도 단지 일부만을 채워넣는 것이었다. 1867년, 황제는 투르케스탄 연방총독직(Turkestan governor generalship)의 창설을 승인하며, 이는 시르-다르야(Syr-Darya)와 세미레체 지구(Semireche oblasts)(또한 이후에 확보한 영토들도 포함되며, 예를 들어 카우프만 지휘 하에 1876년에 확보한 페르가나(Fergana)등을 들 수 있다)를 포함하였다. 군사적 권한과 민간 권한(외교 관계 포함)을 모두 한 사람인 카우프만에게 일임함으로써, 행정체계는 최적화되었다. 경험 많은 행정가인 카우프만은 코카서스에서 복무한 바 있으며, 토착민들의 관습과 신앙을 지나치게 짓밟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들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새로운 지배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 끈질기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였으며, 현지의 사회적 삶의 형태에 대해서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존중해 주었다. 러시아인들의 숫자가 적었고(대략 25000명 가량이었을 것이다) 넓게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에 비춰봤을 때,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무모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카우프만은 처음에는 가능한 한 토착민 관리들과 제도들을 활용하여 통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보았다. 그의 10년간의 첫 통치기간 동안은 군사작전을 수행할 필요성 때문에 정부 임무들에서는 소원해져 있었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투르케스탄 지역에 성공적으로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1877년, 코칸드 지역에서의 분쟁의 여파로 인해 카우프만은 토착 경제 및 사회제도 대신에 러시아식 행정체계 쪽으로 선호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에서 근무할 러시아 관료를 선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전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괴로운 직업을 선택할 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러시아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 대하여 제국 다른 변방지대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이민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식민지화는 대단히 값비싼 투자였으며, 상 페테르부르크의 많은 이들은 과연 중앙 아시아에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1877-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 이후에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지배에 큰 문제가 된 것은 트란스카스피아(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의 테케 오아시스 지역에 사는 투르코만 부족들의 끈질긴 저항이었다. 또한 영국과의 긴장관계로 말미암아 투르코만인들을 신속하게 복속시켜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1879년, 코카서스 제 1군 사령관이었던 I. D. 라자레프 장군(General I.D. Lazarev)은 약 6000명(8 1/2개 규모의 보병 대대와 10개 기병대대) 규모의 분견대를 이끌고 이들 고집센 유목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테케 오아시스로 진군하였다. 라자레프가 도상에서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작전은 불길하게 시작하였고, 이어 N. P. 로마킨 장군이 지휘를 맡게 된다. 보급 문제에도 불구하고 로마킨은 이란 국경지대 근방에 있는 괵 테페(Geok Tepe)로 신속히 밀고나갔으며, 이곳에는 약 2만명의 투르코만인들이 거대한 흙 요새 안에 모여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신속하게 외곽 방어진지들을 차지하였으며, 요새를 포병 사격으로 타격하였다. 다수의 여성과 아이들이 포함된 대규모 투르코만인들이 요새 밖으로 뛰쳐나왔으나, 러시아군 포격에 의해 다시 안쪽으로 쫓겨들어간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한 로마킨은 거만하게도 요새에 돌격할 것을 선택하였으며, 그 결과 화력에서 열세한 투르코만인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안겨주게 된다. 러시아인들과 근접전 내지 육탄전으로 싸울 수 있게 된 투르코만인들은 침략자들을 창과 세이버로 격퇴하며 러시아측에 총 453명의 사상자 피해를 입힌다. 로마킨은 혼란 속에서 퇴각한다.

 

(1890년 무렵 괵 테페의 철도역의 모습)

 

(1890년 무렵 밭을 갈고 있는 테케 투르코만인의 모습)

 

 이후 이뤄진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로마킨의 공격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요새 벽이 가파른 참호로 보강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격 부대를 요새의 특정 지역에 집중시키는 대신, 5개 대대는 광정면에 걸쳐 진격하였다. 로마킨의 오류는 또한 공격 지원을 위하여 포병 화력을 연계 또는 집중시키지 않은 것에도 드러났다. 또한 그는 요새 벽을 넘어갈 특별부대를 만드는 것도 생략해버렸다. 퇴각 또한 준비 부족 뿐만이 아니라 "지휘권 단일화의 완벽한 부재(total lack of unity of control)"에 의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부상자들을 운반할 수 있는 8대의 적십자 수레들(Red Cross wagons)은 전부 합해서 겨우 16명만을 수용할 수가 있었다. 사기가 바닥난 병력들이 이앙기-칼라(Iangi-kala)의 기지까지 8마일 거리의 행군을 마쳤을 때, 거의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이들 병력들은 거의 탈진상태에 빠진 채였다.

 

 러시아의 패배가 안겨주는 심리적 효과들을 없애기 위하여 다급해진 밀류틴은 가능한 한 빨리 새 원정대를 조직하도록 독촉한다(지도 8 참조). 최근 터키와의 플레브나 전투(Battle of Plevna)로 영웅으로서 떠오른 부관감 스코벨레프는 황제의 직접 부름에 따라 이 작전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로마킨과 라자레프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주도 면밀한 준비를 실시했다. 스코벨레프는 크라스노프도스크와 치키쉴리아로부터 가능한 모든 접근 경로들에 대한 대규모 정찰을 실시하였으며, 바미(Bami)야말로 양쪽 방향 모두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보급소 장소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는 또한 바다를 통한 재보급을 조직하였으며, 외교적 지원을 얻어 괵 테페 반대편의 페르시아 방면으로부터의 보급소도 설치하기에 이른다. 장비와 기술들에 열광적이었던 스코벨레프는 최신식 군사장비 - 기관총, 로켓, 수류탄, 일광 신호기(heliographs) 등 - 뿐만 아니라 정수 장치(water-freshening devices)까지도 가져간다.

 

(지도 8. 악칼-테케 전역. 1880-81)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있어서, 스코벨레프는 소위 말하는 "투르케스탄 비율(Turkestan proportions)"을 적용한다. 즉, 200명으로 구성된 1개 중대는 1000명의 조직되지 않은 중앙 아시아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 1개 중대일지라도 제대로만 지휘된다면 중앙 아시아 전장에서는 "움직이는 스트라스부르크(moving Strasbourg)"에 상당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코벨레프는 자기 자신의 가정들에만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이는 아니었으며, 괵 테페의 성벽으로 1000명 규모의 원정대를 정찰목적으로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스코벨레프는 요새에 대한 위장 공격까지도 실시하였다. 성벽 서쪽에 120발의 대포를 쏜 뒤, 갑자기 스코벨레프는 음악 연주에 맞춰 휘하 부대를 질서 정연하게 퇴각시켰다.

 

 11월, 스코벨레프는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괵 테페에 대한 실제 원정을 시작하였다. 1879년 현재, 투르코만인들은 테케 오아시스 깊숙히 퇴각하여 최종적으로는 괵 테페까지 갔으며, 이곳에는 대략 35000명의 남녀, 아이들이이 몰려있었다. 스코벨레프는 우선 괵 테페로의 물 공급을 장악할 수 있는 이앙기-칼라 마을을 점령한다.

 

 12월 18일 이앙기-칼라로 돌격하기 전, 스코벨레프는 휘하 장교들에 내리는 지침 속에 투르코만인들의 전투의 질에 관한 상세한 평가와 이들과 교전하는 데 있어 실용적인 조언들을 포함시킨다:

 

  지역 목표물들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완강한 전투가 예상된다. 적들은 용감하고 각개 전투에 있어서 능란하다; 적들은 효과적으로 사격하며 좋은 부무장을 갖고 있지만, 개인별로 늘어진 대형으로 싸우거나 또는 분산된 형태로 싸운다; 또한 자신들의 지도자의 의지에 별로 복종하지 않으며, 그 결과 이들의 엄청난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연합 작전이나 집단 기동에는 부적합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스코벨레프는 적들이 전투 조건을 결정하게 놔 두지 않을 것이었다.

 

 이앙기-칼라를 점령함으로써, 스코벨레프는 괵 테페에 대한 조직적인 공성전 및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지도 9 참조). 러시아의 포위망(siege lines)은 병력들을 위험할 정도로 얇게 분산시켰는데, 이는 스코벨레프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러시아인들이 포위망에 채울 병력조차 부족하고 따라서 괵 테페 주변 2마일 지역에 대한 완전한 봉쇄를 실시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던 투르코만인들은, 1879년 당시의 승리를 재현하길 기대하며 러시아군의 총공세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스코벨레프는 로마킨의 과오를 반복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지도 9. 괵 테페 요새로의 돌격. 1881년 1월 12일)

 

 스코벨레프의 계획은 성벽 아래에 지뢰를 뭍어 폭파시킨 뒤, 반시간 동안 포격을 퍼부은 뒤에 2개 돌격부대를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이 괵 테페의 전투가 격렬하게 장시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리라는 점은, 병사들에게 각각 2일간의 식량과 200발의 탄약을 지급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뢰는 계획대로 1월 12일 아침 11:20에 폭발하였으며, 스코벨레프의 주력 부대 우익 전방으로 폭 40야드에 이르는 돌파구를 만들어주었다. 러시아인들이 내부 요새(innner fortress)로 침투하자 대규모의 투르코만인들이 요새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뎅길 테페 언덕(hill of Dengil Tepe)으로 퇴각하였다. 두번째 러시아군이 요새 남쪽에 난 돌파구로 침입해 들어왔다. 일단 성벽 대로 들어서자 러시아인들은 예상한 것보다 저항이 적으며 엄청난 패닉 현상이 일어나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전투가 지속되는 도중에도 수천명의 투르코만인들이 북쪽을 향해 요새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러시아 기병대가 도주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전투원 비전투원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면서 약 8000명을 죽인다. 괵 테페 내에서 사망한 투르코만인들은 대략 6500명 가량이었다. 이날 작전으로 러시아측에서 입은 피해는 전사 59명에 부상 254명이었다. 이 전역 전체를 통털어 사상자는 전사 290명에 부상 833명이었으며, 이외 645명이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결론 (Conclusion)

 

 괵 테페에서의 러시아의 승리는 중앙 아시아의 제국 지배에 대한 마지막 실질적 저항을 종식시키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은 투르코만인들 기억 속에 씻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게 되는데, 이후 한 영국 관찰자의 회상에 따르면 "5년 뒤 아쉬카바드(Ashkhabad)로의 철도가 개통되는 기념식 행사 과정에서 러시아 군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자, 투르코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애처로운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남자들은 먼지 가득한 땅바닥에 머리를 쳐박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영국 관찰자의 기록은 사실 자기 주관적이며 어쩌면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쨌든 괵 테페의 사건이 갖게 된 심리적 영향이 심대했음은 분명하다. 러시아인들은 1차대전 전까지는 중앙 아시아와 투르크메니아(Turkmenia) 지역 지배에 있어 거의 저항에 마주치지 않게 된다.

 

 비록 여러 전술적 특성에 있어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만, 중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경험은 코카서스의 것들과는 중요한 점에서 여러가지로 차이가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의 저항은 전혀 통일되지 않았으며, 단 한번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일어나 분산된 반군 노력들을 한 방향으로 지향시키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 투입된 그리 많지 않은 러시아군 규모 - 보병 총 규모는 31개 대대를 넘은 적이 없으며, 기병 전력 역시도 그보다 훨씬 적었다 - 를 고려하였을 때, 만약 저항운동이 통일되었거나 지역민들이 광범위한 게릴라전을 펼쳤더라면 광대한 지역(대략 3백만 평방 킬로미터)에 거주하는 5백만명에 이르는 인구들을 통제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스코벨레프 장군은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이러한 잠재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저항의 장기화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정적이고도 잔혹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장군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으며, 그 결과 러시아는 장기간 동안 안정적인 지배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에 알짜배기 저항운동이 없었다는 점이야말로 스코벨레프의 무자비함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코카서스와 비교해 보았을 때, 중앙 아시아에서는 전사 정신과 종교적 열정이 결합되지가 않았다. 초원의 카자흐 유목민들과 테케 오아시스의 투르코만인들은 훌륭하고 용감한 전사들이었지만, 이들의 동기는 대체로 자신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바램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작았으며, 이들의 독립적인 기질도 이들이 힘을 뭉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었다. 한편, 칸국들의 대규모 정착민들의 경우, 종종 끓어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전쟁에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풍부한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만들어진 이들의 종교는 이들을 순교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중앙 아시아의 고대 상업 중심지들은 보다 번영하는 시대에 대한 코스모폴리탄적인 전망을 일부 유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흡수는 제국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 모두 해당되었다. 러시아는 카스피해 및 이곳의 시장들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으며, 이란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강화시켰고, 이를 통해 영국과의 문제에 있어 새롭고 가치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군대에 남은 유산은 코카서스의 사례에서와 유사하게 별로 크지 않았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영웅적 전설을 가지고 있던 스코벨레프의 급작스런 사망 역시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중앙 아시아에서 복무했던 장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경험을 전수할 새로운 전장을 찾지 못했다. 러시아는 점차 유럽 문제에 발이 묶이기 시작했으며, 극동지역에서의 시장 경쟁과 영향력 확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원 지대와 사막에서의 대 작전들에 관한 러시아 장교들의 전망은,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지(Daily Telegraph) 특파원이었던 데이비드 커(David Ker)에게 한 러시아 장교가 한 다음의 말을 통해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투르케스탄은 프랑스에 있어서의 알제리(Algeria)나 마찬가지다 - 보다 심각한 일을 위한 일종의 훈련장이었다. 우리 젊은 장교들 다수가 이 원정을 통하여 첫 경험을 얻게 되었으며, 이로서 보다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시아식 전장(Asiatic warfare)은 유럽식 병사들에게 그다지 좋은 교훈(hardly a good school)은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투르케스탄은 이전의 코카서스처럼 비정규전(unconventional warfare)에 있어서는 좋은 훈련장이었다. 이 무명 장교가 투르케스탄을 알제리와 비교한 것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적합한 표현이었다. 프랑스인들이 비재래식 적들이 강력한 국가의 의지와 자원을 소진시킬 수 있음을 배웠던 것처럼, 러시아 역시도 20세기에 대단히 강한 의지를 갖는 적에 의한 비정규전적 저항이 재래식 군사 수단(conventional military means)을 통하여 진압하기에는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충돌하는 문화간의 간극은 포격으로써는 메울 수가 없다(The gulf between cultures on the frontier could not be bombarded away). 이러한 간극을 메꾸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러시아 행정부는 점진적으로 식민을 위한 길을 닦고, 외부인 방식을 침투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누적된 무슬림들의 불만은 끈질긴 저항운동에 불을 붙이게 되었고, 이는 붉은 군대(Red Army)의 집체적 정신(collective wits)을 시험하게끔 하였다.

 

 제도적 측면에서 러시아 군대는 수십년간의 중앙 아시아 작전을 통해 얻은 교훈들을 전혀 교리화하지 않았다. 1차 대전 시기에 이르르면, 투르케스탄 군(the army of Turkestan)은 고유의 특성을 상실한 채 단지 다른 유럽식 군대나 마찬가지가 된다. 결국 1920년대에 중앙 아시아에 전란이 번지는 상황에 이르러, 붉은 군대의 역사 분석가들은 과거의 군사 서적들과 논문, 기억들을 훝어가며 중앙 아시아 전역에서 적용된 교리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제 2장의 원저자 주 및 참고문헌 (Notes, Bibliography)

 

(생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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