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아프가니스탄 전역

[스크랩] [번역] 러시아-소련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정규전, 1993 - `제 3장, 바스마키 저항운동의 진압`

박용수 2014. 10. 27. 16:22

< 원문출처 : 'Russian-Soviet Unconventional Wars in the Caucasus, Central Asia, and Afghanistan' by Dr. Robert F .Baumann, 1993, Leavenworth Papers Number 20, US ISSN 0195 3451, ISBN 0-16-041953-0, Combat Studies Institute,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

 

 


 

제 3장 - 바스마키 저항운동의 진압

(The Liquidation of the Basmachi Resistance, 1918-1933)

 

 

 바스마키 저항운동(Basmachis)(중앙 아시아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볼셰비키 러시아인들이 벌인 전쟁은, 오늘날 제 3세계 국가들에서 선진국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을 반영하고 있는 복잡한 군사적, 사회적, 정치적 투쟁으로 볼 수 있다. 이 분쟁은 1918년에서 1933년까지 이어졌으며, 러시아의 중앙 아시아 관계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분쟁의 발단은 러시아의 동 지역 정복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인들의 정복시기로부터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이곳에는 면화(cotton) 경작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관련 산업이 팽창하였으며, 대규모 러시아인들의 이주가 이뤄지고, 잘못된 혹은 부패한 행정 사례들이 누적되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교란되고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긴장이 점차 곪아들어가면서 초창기 범-이슬람주의(Pan-Islamic)와 범-투르크주의(Pan-Turkic)의 맹아가 탄생하고 분쟁이 발발하게 되는 동인이 된다.

 

 한편, 중앙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통치가 적용된 것은, 볼셰비키들이 유럽 문명권 밖의 지역에 자신들의 혁명적 질서를 적용시키게 된 첫번째 역사적 사례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다. 중앙 아시아인들은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국이 망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어쨌든 볼셰비즘은 서구화된 중앙 아시아의 토착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 지식인 계급)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는데, 볼셰비즘은 기존 제국령 내의 모든 민족들 사이는 평등하며 이들의 자결권은 존중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존중의 근본 원인이 기존 제국령의 압제받던 민족들이라면 당연히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순진한 계산에 놓여있었다는 점이야말로 얼마 되지 않아 볼셰비키들과 중앙 아시아 민족들 모두가 서로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볼셰비키들과 중앙 아시아 민족들 간에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 중의 하나로서, 볼셰비키들은 중앙 아시아 사람들의 종교와 전통적 사회구조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볼셰비키들은 바스마키 저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자신들의 정치 프로그램 (문맥상 '모든 민족들이 평등하고 이들의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선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역자 주)을 변형시키거나 중단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편 바스마키 측에서는 대체로 통일된 조직이나 명확한 프로그램 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지역 자치, 전통 사회, 범-터키주의, 이슬람 신앙에 대한 수호자로 자처했으며, 비록 분산되어 있긴 했지만 위험한 저항운동으로서 발전시켰다. 1918년에서 1933년까지라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들은 중앙 아시아 전원지역 상당 부분에 있어서 붉은 군대가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붉은 군대 지휘관들로 하여금 문화적,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에서의 비정규전에 적응하기 위하여 큰 고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바스마키 전쟁은 볼셰비키들에게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가져다 주었다. 첫째, 붉은 군대는 1921년까지 반혁명 백군 및 폴란드 군대에 대항하여 동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1919년 중순까지는 백군으로 인하여 중앙 아시아 전장과 아예 물리적으로도 이격되어 있었다. 그 결과 초기 상황에서 붉은 군대는 중앙 아시아 방어에 별다른 자원을 투입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타격도 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둘째, 중앙 아시아 전장의 지리 조건은 대단히 생소한 어려움들을 가져다 주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인들은 전술상, 보급상 상당한 적응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셋째, 문화적 환경 문제로 인하여, 볼셰비키들은 이 분쟁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측면에 대하여 올바르게 분석하여 자신들의 정치 프로그램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바스마키 전쟁의 개요 (The Basmachi War in Perspective)

 

 중앙 아시아 정복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노력하기는 했지만, 지역민들을 공격적으로 러시아화시키려고 들지는 않았다. 또한 러시아 이민자들은 공업 부문 직업이 기다리고 있는 몇몇 대형 마을들에 몰렸으며, 그 결과 대체로 격리된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한편 토착민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생활하였으며, 이들 중 적절한 인원들은 새로운 사업들에서 직장을 잡거나 러시아식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 기관들은 지역 문화에 제한적인 영향만 끼쳤다. 전형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을 러시아 군대에서 볼 수 있었다. 징병에 대해 토착민들이 격렬하게 반항할 것을 두려워한 전쟁성에서는, (비록 일부 비정규 기병대의 몇몇 사례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중앙 아시아인들에 대해서는 병역을 포괄적으로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을 비롯한 기타 비토착민들의 중앙 아시아로의 이민은 중요한 인구학적 변화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1911년 제국 통계 조사에 따르면, 150만명 이상의 러시아계 및 비토착민들이 카자흐 초원 지대에 거주지를 마련하였으며, 이곳에서 총 41.5퍼센트의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보다 남쪽의 투르케스탄에는 407000명이 추가로 거주하고 있었고, 비록 이곳에서의 인구 비율은 6.4퍼센트에 불과하긴 했지만, 도시 개발에 미친 영향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영향이 가장 적었던 지역은 부하라 지역이었으며, 이곳에서는 전체 인구 250만명 중에 이민자 비율은 겨우 1퍼센트에 불과했다. 키바 역시 마찬가지로 영향이 적었다. 공장들이 지형을 바꿔가고 있던 여러 도시들에서 토착민들과 이민자들은 불안정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1898년 안디잔(Andizhan) 시에서의 유혈 폭동은 이들 토착민들 사이에서 점증하고 있던 불만들을 잘 드러내주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중반, 동부 전선에서의 대량 인명피해로 인하여 러시아 측에서는 인력 부족에 허덕이게 되었고, 결국 정부는 중앙 아시아 사람들을 노동 대대(labor battalions)에 투입하게로 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카자흐스탄에는 격렬한 폭동이 벌어지게 되고, 사마르칸트 지구(district of Samarkand)의 지아크(Dzhiak) 지역과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계곡(Fergana Valley)에는 폭동이 들불처럼 번지게 된다. 1916년 10월, 반군 총 숫자는 5만명에 육박하게 되며, 투르케스탄 연방총독 (예전에 스코벨레프의 참모장이기도 하였다) 알렉세이 N. 쿠로파트킨(Aleksei N. Kuropatkin)은 결국 징벌 원정(punitive expedition)과 함께 반란 부족들을 동쪽의 키르기지아(Kirghzia)로 강제 이주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의 의도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카자흐와 키르기즈에서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는 변경지역에 이르기까지 패닉 현상이 번지게 된다.

 

(연방총독 A.N. 쿠로파트킨은 중앙 아시아에서 스코벨레프의 부하로 복무한 바 있다. 그는 1898년에서 1904년까지 전쟁성 장관을, 1916년에서 1917년까지는 투르케스탄 연방총촉직을 맡는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쿠로파트킨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중단되었고, 상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임시 정부가 정권을 잡게 된다. 새 정부의 간청을 받은 위원회가 투르케스탄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타슈켄트에 설립되었지만, 이미 사건들은 가속도를 받아 통제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였다. 상 페테르부르크는 이미 혁명의 소용돌이 안에 붙잡혀 있었으며, 중앙 정부의 능력은 크게 손상받아, 어떠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제국 변방의 일들에 대해서 통제할 능력을 갖출 수는 없는 상태였다. 중앙 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자치 세력들과 파벌들이 일어나 모자이크와 같은 정치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1917년 5월, 소규모의 정치적으로 각성된 엘리트들이 주동이 되어 무슬림 민족 회의가 열렸으며, 여기서 러시아와의 연방을 이루는 투르케스탄 자치 공화국(autonomous republic of Turkestan)의 설립 요구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들 무슬림 민족주의자 대다수는 사회주의가 자치 국가 발전에 가장 적합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적어도 최초에는 볼셰비키나 기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지가 않았다. 중앙 아시아의 러시아 인구들 사이에서도 독립적인 정치 그룹들이 일어났으며, 타슈켄트에는 멘셰비키들이 주도하는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Soviet (council)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와 역시 볼셰비키의 라이벌이었던 사회주의 혁명당(Socialist Revolutionaries)이 설립되었다.

 

 중앙 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은 볼셰비키들의 10월 혁명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라이벌 단체들 및 무슬림 단체들에 불만을 갖고 있던 지역 볼셰비키들은 모스크바의 레닌 정권에 충성하는 자신들 고유의 타슈켄트 소비에트를 선포하게 된다. 11월에는 볼셰비키들의 타슈켄트 소비에트가 인민위원회(Council (Soviet) of Peoples' Commissars)로 바뀌게 된다. 한편, 부하라와 키바에는 무슬림 정권이 성립된다. 이들은 레닌의 혁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레닌 정권의 영향력은 1920년 이전까지는 중앙 아시아에 거의 미치지 않았다. 또한 코칸트에서도 단명한 이슬람 정권이 형성되었었는데, 이들의 경우 러시아 연방 내에서의 자치를 요구했었다.

 

(사마르칸트의 Registan complex. 소련 지배기에 복원된 것이다.)

 

 적백내전의 초기 절반 시기 동안, 레닌의 볼셰비키 국가는 지속적인 위기 속에 있었으며, 다양한 전선에서 다양한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변방인 중앙 아시아의 구제국령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게다가 이 지역 볼셰비키들은 남부 초원지대 및 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혁명 백군에 의하여 모스크바와 지리적으로도 절단되어 있었다. 한편 스스로 힘으로만 활동해야 했던 타슈켄트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식 질서를 건설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비전 속에 매달려 있었다. 조직 및 전망에 있어서 철저히 러시아적이었던 이들은, 19세기 유럽의 과격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이론들에 기반한 규정들로 이뤄진 혁명 강령을 전파하려고 하였다. 이들의 노력은 거의 예외 없이 대다수 중앙 아시아인들 사회들과 적대관계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파벌들에 비해 조직과 무장에 있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타슈켄트 인민위원회(Tashkent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는 러시아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어 적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에 나서게 된다. 1918년 1월, 붉은 군대는 코칸드의 무슬림 민족주의자 정부를 격파한다. 그러나 이들은 부하라와 키바에 있는 신정권들을 격파할 만한 자원은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이윽고 페르가나 계곡으로부터의 빨치산 전쟁이 확산되어 중앙 아시아 전역이 휩싸이게 된다.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7월 15일에 작성한 전보를 통해, 자칭 투르케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urkestan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이 보고 있던 위기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군대에는 탄약과 총이 부족하다... 상황은 재앙으로 번지고 있다. 아슈카바드(Ashkabad)에서는 폭도들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상점들은 약탈당하고 정부 기관들은 베르노에(Vernoe)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타슈켄트는 절단되었다." 8월에는 신정부가 전쟁을 이끌 투르케스탄 군 혁명 군사 평의회(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Turkestan Army)를 설치하였으나, 인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타슈켄트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붉은 군대 수비대는 소규모에 분산되어 있었다 (표 3 참조). 그러나 모든 종류의 병력들을 미친 듯이 긁어모은 결과, 타슈켄트 볼셰비키들은 간신히 투르케스탄의 주요 도시들과 마들들에 대하여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한편 교외 지역에서는 바스마키 도당(Basmachi bands)들이 힘의 공백을 활용하여 저항 거점들을 만들고 있었다.

 

(표 3. 타슈켄트 외곽의 러시아 수비대의 구성)


 아이러니하게도, 초창기 바스마키들의 일부는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이후의 소련 사학자들의 설명에 대략적으로는 부합하는 무법자들이었다. 유명한 바스마키 지도자들 중의 두 사람인 이르가쉬(Irgash)와 모다민 벡(Modamin Bek)은 1913년 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저항의 뿌리는 사회적, 인종적, 종교적 긴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바스마키 도당들이 공통적인 프로그램이나 최소한의 정치, 군사적 조직조차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 저항의 지속 정도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실로 역사가 리차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 이 운동을 "사실상 서로 연계되지 않은 수많은 부족 반란들..."이라고 묘사하였다. 잠시 동안 코칸드 임시 정부의 대통령을 맡았던 무스타파 초카에프(Mustafa Chokaev)는, 대중 선전 수단이 부족했던 것과 글을 읽을 줄 알고 정치적으로 각성된 인구가 부족했다는 점이 인민들을 조직하는 노력을 저해하였다고 회상하였다. 결국 바스마체스트보(Basmachestvo)라는 이름 아래 있었던 다양하고도 독립적인 그룹들은, 러시아인들의 지배에 대한 깊은 반감과 복종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결심 외에는 별로 공유하고 있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스마키들의 무장은 빈약했다.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구식 무기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러시아-터키 전쟁(1877-78) 당시의 유물인 베르당 소총(Berdan rifles)이 다수 있었으며, 비슷한 정도로 구식에 속하는 포병 장비들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바스마키들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하여 외국(특히 영국)의 무기들을 받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러한 지원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으리라고 볼 만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바스마키들이 실전에 동원한 잡다한 무기들이야말로 이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바스마키들은 무장에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간의 전술적 연계도 대단히 불량했다. 특히 개활지에서 붉은 군대와 대적했을 경우 심각하게 드러나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바스마키 운동이 가장 최고조에 이른 시점에서도 이들은 공장이나 고립된 붉은 군대 수비대에 대한 히트 앤드 런 공격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우세한 적을 만나면 도주하였다. 이들은 소수 그룹으로 활동하였으며, 강인하고 교활하였으며, 성공적인 게릴라 작전과 관련된 3가지 장점들을 활용하였다: 지형에 대한 면밀한 지식, 도로 및 마을에서 떨어진 지역에서의 우세한 기동성, 지역민들로부터의 적극적 혹은 수동적 지원(이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신병들도 제공하였다). 한 러시아 군사관찰자가 쓴 감회를 보면, 이것이 알제리나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의 그것과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바스마키)은 겉으로는 전혀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지역 농민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은 우리 부대 주변에 있었으며, 침투에 망설임이 없었고 구분되지 않았으며, 교활하였고, 스파이 활동에 놀랄만큼 투신하였으며, 이들의 네트워크는 아프간 변방에서 타슈켄트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는 여러 방향에서 나타났다. 한 기록을 예로 들자면, 아이딘(Aidyn)에서 벨락(Belak)으로 향하던 무장 열차가 미리 약정된 신호에 따라 멈춰선 뒤, 50박스의 탄약을 바스마키들에게 넘겨주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례에서는 간첩이 포위된 소규모 붉은 군대 수비대 음식에 약을 타는 바람에, 단지 9명의 수비대원만이 제정신을 유지한 채 구원군이 올 때까지 요새를 지켜낸 경우도 있었다.


 

1919-22년의 중앙 아시아 전장 (The Central Asian Theater, 1919-22)

 

 투르케스탄에 전면전이 발생한 것은 1919년 후반 이후가 되어서의 일이며, 이는 붉은 군대가 서부 시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백군을 몰아내고 모스크바와 중앙 아시아간의 물리적 장벽을 제거한 뒤의 일이다. 모스크바의 레닌 정권은 상황을 장악하기 위하여 6명으로 구성된 투르케스탄 위원회 - 제 4군 사령관 미하일 프룬제(Mikhail Frunze)와 제 4군 정치 인민위원 V.V 퀴비셰프 (Fourth Army Political Commissar V.V. Kuibyshev)를 포함- 를 타수켄트에 11월 파견하여 권한 행사를 하도록 한다. 위원회는 공식 평가를 통해 기존의 당 조직은 민중들과의 신뢰가 결여되어 있으며, 민중들은 공산주의 프로그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민족 인민위원회(Commissariat of Nationalities) 기관지인 지진 나쇼날노스테이(Zhizn' natsional'nostei)에서는 1920년 3월, 지역 간부들이 과욕에 의해 심각한 정책적 실책을 저질렀음을 인정하였다. 이 신문에서는 또한 중앙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선언하였는데: "투르케스탄은 우리의 이념을 동방에 전파하는 중심지이다. 투르케스탄은 주변의 동방 국가들이라는 벌들이 영양분을 구할 수 있는 꽃밭과도 같다."라고 하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 모스크바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 자신의 군사적 존재를 강화시킬 필요성도 인식하게 된다. 3월 24일, 프룬제는 레닌에게 보내는 전보를 통하여, 최근(1919년 8월) 투르케스탄 전선에 조직된 부대들은 "매우 한심한 상태(most wretched picture)"에 있으며, 병력들은 "묘사하기도 어려운 어중이 떠중이(indescribable rabble)"이라고 하였다. 붉은 군대 병력들은 숫자 상으로 적었고, 병사들에게는 제복이 없었으며, (페르가나 계곡에서는) 상당수가 신발 조차 없었다. 병력들의 1/4이 구식 베르당 소총을 갖고 있었고, 또다른 1/4의 경우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러시아에 보내 준 영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테르메즈(Termez)(아프간 변경 지역)에서 크라스노보드스크(Krasnovodsk)에 이르는 광대한 제 1군 지역을 담당하는 것은 단지 4500명의 보병과 700명의 기병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지나치게 늙었거나 다른 전선에서라면 복무 부적합으로 판정될 인원들이었다. 투르케스탄의 붉은 군대 부대들은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차 대전 당시 잡은 외국인 포로들로 구성된 소위 국제 여단(international regiments)이라던가, 무슬림 자원병들로 구성된 부대라던가, 지역 붉은 친위대(territorial Red Guard)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로부터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1919년 당시 페르가나 전선의 참모진은 자신의 전투 서열(order of battle)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프룬제는 전장에 위치한 부대들을 재조직하는 것 외에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스마키 도당들을 공격하고 추격할 충분한 수의 기병대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투르케스탄 전선군(Turkestan Front)은 2개 군 및 1개 분견대 병력(two entire armies and elements of a third)으로 이뤄져 있었다. 제 4군은 3개 소총 사단(203정의 기관총으로 무장) 및 예비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총 병력은 21650명이었다 (소련식 편제에서는 군(army) 아래가 군단(corp)이 아닌 사단(division)임에 주목할 것. 역자 주). 제 1군은 3개 소총 사단 및 타타르 여단(Tatar Brigade)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기록된 병력 수는 32129명에 기관총 515정, 야포 99문으로 되어 있었다. 제 11군은 아스트라한(Astrakhan)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이 방면으로 배속시킨 분견대 규모는 17236명이었다. 붉은 군대의 실병력 규모는 시기에 따라서, 부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프룬제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1920년 투르케스탄 제 2사단을 검열한 결과, 기병 연대(cavalry regiments)는 130에서 220명 규모를 갖고 있었고, 보병 연대(infantry regiments)의 경우 200명에서 400명 규모를 갖고 있었다.

 

 1920년에 키바와 부하라에 대하여 실시된 붉은 군대의 군사작전은 성공적이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기존의 인종적, 종교적 적대감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키바는 1920년 2월 함락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과격 단체인 청년 키바당(Young Khivans)을 집권하게 조치하면서 호라즘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horezm)을 선포하였다. 부하라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이뤄졌다. 1920년 8월, 청년 부하라당(Young Bukharans)이 부하라 시에서 봉기하였고, 사전 약정 신호에 따라 붉은 군대에 에미르(emir)를 쓰러뜨리기 위한 청원을 하게 된다. 11월, 부하라와 소련간에는 협력 조약이 맺어진다.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룬제는 중앙 아시아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 정책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레닌 스스로도 일련의 화해 조치들을 지시하였다: 시장을 재개장하였고, 음식 분배를 균일화하였으며, 지역 당원들을 선발하였다. 붉은 군대는 중앙 볼가 지역에서 투르케스탄 지역까지의 무슬림 타타르인들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양성한 타타르 여단(Tatar Brigade)을 파병하였다. 또한 프룬제는 전향한(혹은 전향한 것으로 간주된) 바스마키들로 구성된 "소비에트 바스마키(Soviet Basmachi)" 분견대를 창설하였다. 1920년 8월, 투르케스탄 중앙당 위원회는 시르 다르야,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트란스카스피야 행정구의 무슬림 공산주의자 500명에 대하여 붉은 군대에 배치하도록 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상의 성공은 실질적이라기 보다는 다소 환상에 가까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세속 국가인 부하라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Bukharan People's Soviet Republic)의 선포는 부하라 전역에 불만을 촉발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전국 각지에 산재했던 저항군 세력들이 전직 에미르인 사이드 알림 칸(Said Alim Khan)과 우즈벡 실력자 이브라김 벡(Ibragim Bek)의 아래로 뭉치기 시작했다. 1921년 3월, 키바에서 또다시 문제가 터져나왔는데, 이는 투르케스탄 위원회(Turkestan Commission)가 호라즘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oviet Socialist Republic of Khorezm)을 선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청년 키바당 지도부 상당수가 저항군에 합류하게 된다.

 

 투르케스탄에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른 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러시아의 볼셰비키 권력 체계 전체를 위협하게 되었다. 폴란드와의 전쟁 수행과 크리미아 지역의 백군 잔당들을 무찌르는 일에 동시 다발적으로 투입된 붉은 군대로서는 추가적 인력 확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당국은 1920년 여름 중앙 아시아 무슬림들에 대한 징병을 실시한다. 1916년 지역민들의 반응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들 공산당 지도부는 이처럼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볼셰비키들은 공개적으로는, 이들 토착민들을 징집할 수 없게 만들었던 과거의 압제적 환경을 자신들이 이미 해소하였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사회 분석(social analysis)에 근거한 성급한 낙관론은 다시 한번 근거 없음이 증명된다.

 

 5월 7일, 프룬제는 중앙 아시아인 35000명을 징병하라는 지시서에 서명한다. 8월까지 약 25000명에 이르는 토착민들이 군에 징병된다. 지역 소비에트에서는 징병자 명단 작성 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징병대상자의 도덕적, 정치적 신뢰성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프룬제는 별도의 무슬림 부대를 창설하게 해 달라는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의 청원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프룬제는 이렇게 할 경우 각자의 신앙에 따른 별도의 부대를 창설하는 것을 부추기는 위험한 선례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우즈벡, 키르기즈, 투르코만, 타지크 등등의 국가별 부대(결국에는 무슬림 부대가 된다)를 창설하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마도 프룬제는 이러한 국가별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 그 자체로는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위험한 범-이슬람주의, 범-터키주의의 경향을 막는 효과를 가질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징병 캠페인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이들 국가별 부대들이 곧 투르케스탄 지역 붉은 군대에서 기록상 기준으로 1/3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인들을 군대로 급속도로 융합시키는 데에는 여러 심각한 어려움들이 뒤따랐다. 10월 10일, 지즌 나쇼날노스테이(Zhizn' natsional'nostei)에서는 중앙 아시아인들을 군 생활에 적응시키는 데에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큰 장애물들이 있으며, 이들을 성공적으로 적응시키려면 이노롯치(inorodtsy)(외부인들)들 사이에 신뢰할 만한 기간요원들을 심지 않으면 안된다고 인정하였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붉은 군대에서는 몇가지 양보하여 지역 관습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한편 토착민 장교들을 모병하는 것을 강화하였다. 사실 1918년 1월부터 모스크바에서는 (이후에는 카잔에서) 중앙 무슬림 군사대학(Central Muslim Military College)가 창설되어 무슬림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운영되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타타르인들과 바쉬키르인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정치 교육과 군사 교육은 동등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1919년 9월에 카잔에 설립된 무슬림 기병 및 보병학교(Muslim Cavalry and Infantry Course)를 통해서도 임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완화 대책들도, 병역 의무 개념(concept of a service obligation)이나 군사 조직화(military regimentation)에 대한 개념에 전혀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징병을 받아들이게 만들기에는 별로 충분하지가 못했다. 결과는 예상 가능했다. 부하라에서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1921년까지 이 지역의 징병은 연기되었다. 무슬림 징병 대상자 상당수가 도주하여 바스마키가 되었고, 볼셰비키들은 한때 모범적인 토착민 부대로 간주되었던 제 1 우즈벡 기병 여단(1st Uzbek Cavalry Brigage)을 무장해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토착민 정치 기간요원은 매우 구하기가 힘들었다. 프룬제는 5월 29일 작성한 전보를 통하여, 제 11 타타르 연대에서 발생한 어떤 불행했던 사건의 원인이, 정치 일꾼들이 주민들에 대한 민사업무에 신경쓰느라 야전부대를 소흘히 한 탓으로 간주하였다. 러시아인들과 토착 중앙 아시아인들간의 불신이 쌓이고 있다는 증거가 가득했다. 10월에는 무슬림 카잔 연대의 640명이 변절하여 바스마키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제 27 소총 연대가 1920년 베르노에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붉은 군대 내에 있는 무슬림 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킬 것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집 앞에서 차를 마시는 투르코만인들. 1890년 무렵)

 

 이러한 징병 포고는 그 자체의 실패를 차치하고더라도, 저항군 병력 수를 1920년 여름 동안 3만명 규모로 늘리는 효과를 내었다. 바스마키 운동은 정치적 지원을 통해서도 탄력을 받았다. 바쉬키르 민족주의자이자 단명한 우릴 남부 지역의 국가였던 바쉬키르 자치 공화국(Bashkir Autonomous Republic)의 전직 대통령인 제키 발리도프(Zeki Validov)는, 모스크바가 그의 정부를 해산시키자 저항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한편 보다 중요한 사건으로는, 1921년 소련 정부에 의해 부하라를 방문하도록 초대되었던 엔베르 파샤(Enver Pasha)가 저항운동에 합류하여 중앙 아시아의 인종적, 종교적 형제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엔베르 파샤는 단지 40세의 나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전직 전쟁성 장관이었으며, 1913년의 제 2차 발칸 전쟁 당시에는 터키 일반 참모단 단장(chief of the General Staff in Turkey)이었다. 그는 바스마키 저항운동에 소수의 터키 장교들을 데려온 외에도 수많은 전술상, 조직상의 지식들을 전수해 주었다. 그의 첫번째 정치적 제스처는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성전(holy war)을 선보하는 것이었으며, 스스로를 투르케스탄, 부하라, 키바의 총 사령관으로 칭하는 것에 있었다. 엔베르 파샤의 성공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인 1922년 봄, 그는 부하라 서부 전역과 동부 상당수를 사실상 석권한다.

 

 그가 1922년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그는 이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다) 얼마만큼을 이룰 수 있었을까에 관한 의문은 학계에서도 의론이 분분하다. 예를 들어 바스마키학 학자인 마사 올콧(Martha Olcott)의 경우에는 엔베르가 "소비에트 투르케스탄을 만드려는 볼셰비키의 계획을 끝장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글렌다 프레이져(Glenda Fraser) 같은 경우에는 엔베르 스스로도 성공할 가능성을 낮게 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엔베르의 성공이 절정에 달하던 시점에도, 그에 대항하는 힘은 대단히 강력하였다. 1922년 말, 투르케스탄의 붉은 군대의 규모는 정규군과 비정규군을 합하여 10만~ 15만명에 이르렀다. 더 이상 다른 전장에 병력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는 상황에 이르른 볼셰비키들은 이제 군사적 상황을 자기 편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엔베르 파샤 같은 지도자들의 죽음과, 독립적인 족장들을 활용한 볼셰비키들의 외교공세는 저항운동의 의지를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화되기는 했어도 바스마키들은 끈질기고 위험한 적이었다. 부하라의 에미르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물론 과장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투르케스탄에는 6만명의 바스마키들이 남아있었고, 이들 중에서 21000명은 부하라에, 26000명은 페르가나 계곡에 있었다. 향후 십여년간 각지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가장 끈질긴 저항이 벌어졌던 곳은 부하라와 페르가나 계곡이었다.


 

붉은 군대의 전술 및 전략 발전 (The Evolution of Red Army Tactics and Strategy)

 

 권한 계통의 혼란과 정치적 분열을 주원인으로 하여, 중앙 아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투쟁은 시작부터 난관을 겪게 된다. 1918년 1월에는 군사부문 인민위원(People's Commissar for Military Affairs)이었던 오시포프(Osipov) 본인이 투르케스탄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난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군사 재조직 과정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기능 구분이 이뤄지게 된다. 즉, 조직 및 행정 부분은 군사 인민위원회(Military Commissariat)에 떨어지게 되고, 반면 야전의 작전 부문에 대해서는 최고 작전 참모부(Supreme Operational Staff)(단, 최고 책임자는 당원이 맡는다)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20-22년간의 기간 동안의 전투 작전들을 연구하면서, 붉은 군대의 분석가들은 중앙 아시아 지역의 전쟁 성격이 다른 전장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D. 주에프(D. Zuev)가 1922년에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서방식 전쟁 방식은 기계화 보병(mechanized infantry)로 특징지어짐에도 불구하고, "길없는 산악지대와 사막으로 이뤄진 중앙 아시아 전장의 특성과, 투르케스탄의 후진적이고도 조직되지 않은 적들의 특성들에 비춰볼 때, 구식 원리들 - 강인하고 과묵한 각개 병사들을 양성하는 것 - 의 유용성은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중앙 아시아 지역의 지휘관들에 대한 공식 안내문에는 노농적군(Workers and Peasants Red Army)의 공식 규칙들에 명시된 일반 원칙들을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또한 이 규칙들이 모든 전술 상황에 있어서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주에프는 공식 군사 잡지인 보엔니 라보트닉 투르케스타나(Voennyi rabotnik Turkestana; 대략 '투르케스탄의 군사 일꾼(военный работник туркестана)'인 것으로 보임. 역자 주)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제정 러시아 당시 중앙 아시아의 사막 작전을 통해 겪은 교훈들을 기억하도록 하였고, 특히 우물과 연료 공급원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산악전이라는 주제 역시도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분석가 V. 라브레네프(V. Lavrenev)는 한 지휘관이 다른 전장에서 얼마나 유능했었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그는 "이곳(중앙 아시아의 산악지대)에서는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실수 연발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라브레네프는 본대와 평행하게 움직이는 측위 부대 및 전위와 후위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강력하고 강인한 병사의 가치에 대하여 언급하엿고, 또한 산악 환경에서의 토착민 부대의 필요성도 언급하였다. 보급수송행렬(supply train)이 항상 부대를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의 짐과 장비들을 들고다닐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산악 전투의 분권화된 특성 탓에, 일반 병사에게까지도 "가장 넓은 범위의 주도권(the broadest initiative)"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가장 중요한 점으로는, 방향 설정 문제와 험한 지형 탓에 필연적으로 병력이 분산되기 때문에 공격에 있어 최고 수준의 사격 통제가 절실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라브레네프의 조언을 따른 지휘관들의 경우 기관총 사격을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1919년에서 1924년 기간 동안 군 총사령관(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ed forces)이었던 세르게이 카메네프가 1923년 쓴 글에서는, 승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장 일관되고 포괄적인 설명이 나타나 있다. 5월과 6월 기간 동안 현장 검열을 실시한 카메네프는 "바스마키와의 투쟁을 위한 시스템(System for the Struggle with the Basmachis)"이라는 비밀 문건을 통하여 자신의 결론들을 요약하였다. 그는 우선 중요한 인구 중심지와 철도의 중요 방어 지점, 통신 거점, 공업지대를 군사적으로 점령해야 하며, 또한 알려진 바스마키들의 소굴을 강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일단 이러한 지역들이 정부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 책임은 군대에서 정치 관리들의 손으로 넘어간다고 하였다.

 

 원칙적으로 붉은 군대의 부대들은 적도당들을 고립시켜 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이들이 격오지의 은신처나 아프가니스탄 국경 너머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다. 이러한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야전의 군사 부대들은 환경이 가용한 한 유연하고 기동성이 있어야 했다. 카메네프가 설명한 것처럼, 교활한 바스마키 도당들은 습격 부대(raiding parties)로서 활동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기동분견대(flying detachments)"(letuchie otriady)라는 비정규 경기병 조직을 편성하여 수비대간 연락 임무 및 바스마키 기지들을 공격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부대의 규모는 소대에서 사단 규모로 다양했으며 (사단은 이론상으로 2천명까지 구성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적은 인원이었다) 바스마키 도당들과 싸우는 데에 있어서 "핵심 활동 부대(main active force)"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습의 기회를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 기동분견대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통상 다른 부대들과 협조하여 활동하였다. 기동분견대를 지원하는 것으로 "습격분견대(raiding detachment)"(istrebitel'nye otriady)가 있었는데, 다소 빨치산적 성격을 갖는 지역민 부대였다. 이들의 임무에는 정찰임무와 적을 괴롭히는 임무가 있었다. 붉은 군대는 은거지에 숨어있는 바스마키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유린 작전(sweep)을 펼쳤다.

 

 붉은 군대는 통상적으로 프룬제의 조언에 근거하여 자군을 지나치게 얇게 분산시키는 일은 피했다. 프룬제는 집중된 군대만이 바스마키 도당을 추격하여 파괴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조되어 각지의 무역 마을들에 위치하고 있던 소규모 파출소(outpost)들은 방어 및 공격을 수행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했다. 한편 철도망을 따라서는, 병력 수송차량과 압축면화 꾸러미를 장갑으로한 무장차량을 끌고다니는 증기 기관차가 돌아다녔다.

 

 비록 바스마키 소탕 작전에 있어서 핵심 요소는 아니긴 했지만, 공중 및 해양 자산들도 중요한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붉은 군대의 항공기들은 정찰 임무에 있어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종종 전투에도 기여하였다. 비록 기총 소사나 폭격이 적에게 물리적으로는 큰 효과를 주지 못하긴 했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대단했다. 이 전쟁 후반부에, 소련인들은 최초로 공중수송(airlift)을 전투에 활용하게 된다. 또한 해군 부대는 아랄 해를 통한 수송 지원을 실시하였다. 바스마키들이 부하라와 키바를 장악하고 있는 한 아무 강(Amu River)을 통한 수송은 불안전했기 때문에, 프룬제는 아무 강에 증기선 9척과 내연기관 선박 2척, 커터(cutter; 일종의 소형 군용선) 1척으로 구성된 전투 선단을 유지하였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중앙 아시아 지역 전역과 마찬가지로, 야전 부대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극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처음에는 붉은 군대의 보급수송 행렬은 탄약과 보급품만을 수송했지만, 점차 각개 병사의 개인 물품이나 가족들까지도 운반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부대들은 자신들의 보급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하는 것을 싫어했다. 병사들이 상대적으로 가볍고 기동성 있는 부대로서 행군하는 데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동물들과 이들에 필요한 마초 탓에 보급수송 행렬은 거대하고 거추장스러웠다. 바퀴 4개짜리 마차는 산악지대에서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낙타에 짐싣는 기술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치명적 기술이었지만, 당시에는 잊혀진 것이었다.

 

 야전에서의 재보급을 위해서는 면밀한 준비와 함께 믿을만한 통신 유지를 필요로 하였다. 일광반사신호기(heliograph)는 1차 대전 무렵에는 거의 잊혀진 기술이었지만, 도로와 전신 네트워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따라서 통신 차단작전에도 취약한) 광대한 지역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용함이 드러났다. 당시의 무전기는 대단히 거대했기 때문에 힘든 산악 행군에 동반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가 못했다. 반면, 일광반사신호기, 특히 야전용으로 가볍게 만든 모델의 경우에는 당나귀 2마리로도 쉽게 운반이 가능했으며, 대부분 조건 하에서 신뢰성이 있었다. 기병용으로 만든 소형 모델의 경우, 단지 직경 3인치 크기의 거울만 있으면 되었으며, 소부대로 하여금 최대 15마일까지 거리에 있는 본대와 연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산악지형이나 사막에서 신속한 이동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포병이었다. 중포에 소수의 탄약만 따라오더라도 험한 지형을 움직이는 부대를 사실상 마비시켰다. 1921년에 이미 붉은 군대의 분석가들은 중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 제정 군대의 경험들을 검토하였고, 야포(field guns)와 달리 운반이 용이하고, 높은 지역의 목표를 맞출만큼 고각이 큰 산포(mountain guns)를 활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산악 지대에서 기관총과 화포의 주요 역할은 아마도 보병이 적에게 접근하는 것을 지원하는 엄호사격에 있었을 것이다.

 

 중앙 아시아에서의 기동성과 전투력 적용은 자연적으로 바스마키에 대한 우수한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1925년, 분석가 P. 안토노프(P. Antonov)가 크라스나이아 즈베즈다(Krasnaia zvezda; '붉은 별'쯤으로 해석됨. 역자 주)에 "바스마키와의 전투에서의 전술(Tactics of the Struggle with the Basmachis)"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바를 살펴보면, 그는 소련 측이 지역 사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강력한 포로 심문과 병사들과의 인터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바스마키 도당들의 위치확인 및 식별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만약 이들이 평화롭게 도주할 수 있게 놔두면, 패배한 바스마키 도당들은 다시 뭉쳐 돌아올 것임을 경고하였다. 간단없는 군사적 압력만으로써 이들의 복속을 보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항복하는 바스마키 도당들을 해산하는 것만으로는 이들이 장래에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보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안토노프는 이들을 감시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에 두는 것을 주장하였다. 다른 말로, 야전에서의 승리는 주민 통제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단지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프룬제는 핵심적인 문제는 바스마키들을 군사적으로 무찌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비록 이는 고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대적으로 정해진 노력만으로 (다른 조건이 충족된다면)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핵심 문제는 주민들로 하여금 바스마키가 적이라고 - 적어도 바스마키들이 승리할 수 없으리라고 - 믿게 만드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1920년 6월, 퀴비셰프(Kuibyshev)의 발의에 따라 제 1차 투르케스탄 정치노동자 회의(first Congress of Political Workers of Turkestan)가 열려, 붉은 군대 내의 무슬림들에게 정치선전(propagandizing)을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정치적 사업은 반드시 토착민들의 문화적, 종교적 성향을 반영하여야 하며, 정착민(colonists)들 간에 팽배한 국수주의(national chauvinism)을 척결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당에서는 투르케스탄의 모든 행정구(oblast)(district)에 당 학교(party schools)를 설치하였다. 학교들은 각 붉은 군대 전선군들, 군들, 사단들에 있는 정치 부서의 지원 하에 개교되었다. 투르케스탄 전선군의 정치 부서에서는 러시아인, 무슬림, 마갸르인(Magyars), 독일인에 대한 당 학교를 운영하였다. 붉은 군대 내에서의 정치 활동들의 결과 부대 전체가 해산되고 재편성되는가 하면, 새로운 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퀴비셰프는 토착 주민들에 대한 범죄 문제로 인하여 소비에트 제 4 연대(Soviet 4th Regiment)를 무장 해재 및 해산하는 것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군대 내외에서 공산주의 정치 일꾼들의 가장 민감함 정치선전 목표였던 것은 저항력의 원천으로서의 이슬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앞서의 반 종교 선동이 그리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부작용만 불러일으켰던 것을 잘 알고 있던 소련측에서는 인내심을 갖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이슬람 기관에 대한 정면 공격을 줄이기 시작했다. 수정된 접근방법은 경제 개발을 강조하고, 세속적 공교육을 강화하여 토착 기간요원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법정들이나 학교들과 같은 토착 종교 기관들은 당분간 계속 작동하게 내버려뒀다.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이 지역의 토착문화가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는 것에 당혹스러워 하였다. 예를 들어 투르케스탄 전선군 군사혁명위원회(Military Revolutionary Council for the Turkestan Front) 위원들이 1926년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 법에 따라 어떤 연령의 여성들도 취직이 가능하다고 한 선포 내용은 지역 관습과 배치되어 무용지물이었다고 하였다.

 

 전반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상당한 자원을 교육과 정치선전에 할애하였다. 이들은 대규모 정치 행사를 벌이는 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퀴비셰프는 소위 선동 열차(agitation trains)라고 불리는 "로사 룩셈부르크 호(Rosa Luxemberg)"와 "붉은 동방 호(Red East)"를 동원하여 혁명을 옹호하는 순회행사(whistle-stop tours on behalf of the revolution)를 펼치도록 하였다. 1925년까지 투르케스탄 당국에서는 군중 앞에서의 정치 행사를 6만건 이상 실시하였다. 보다 실용적인 수단으로는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소작민(peasants)들에 대한 세금 지원과, 농민들에 대한 종자 지원, 사면의 확대, 1921년 12월의 무슬림 학교 및 재산에 대한 복구 같은 화해 시도 등이 있었다.

 

 경제적 조건 역시 덜 중요하지 않았으며, 레닌의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 NEP)으로 인하여 기존 농산물에 대한 국가의 강제 징발이나 상업 행위에 대한 엄격한 규제 등에 상당한 완화가 이뤄졌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는 지역당 기구에 대한 직접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그 예로, 약 16000명의 부하라 공산당원 중에서 1000명 가량을 숙청하였다. 1923년 3월, 투르케스탄과 부하라, 호라즘의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지역 전반의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연합 경제 계획에 합의하였다. 비록 완벽한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노력들은 토착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례 1: 페르가나의 저항운동 (Case One: The Fergana Resistance)

 

 중앙 아시아에서의 저항운동 전반에 걸쳐 가장 크고 지속적으로 저항을 지속했던 지역은 인구 밀집 지대인 페르가나 계곡 지역이었다. 이곳은 이미 반세기 이전의 러시아 정복 당시에부터 꾸준히 저항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이 지역의 지형은 바스마키식 전투에 적합한 형태였다. 계곡 주변은 깊은 골짜기로 나뉘어진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수많은 관개 수로들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페르가나에서의 저항은 부족계통(clan line)에 따른 수많은 소규모 독립적인 파벌들로 이뤄졌다 - 이 사실은 전투 수행 방식에 반영되었으며, 일관된 전선을 따라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아닌 고립된 계곡이나 산악지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양상을 낳게 된다. 저항운동은 그 노력들이 분산되었으며, 협동된 활동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바스마키 그룹들 간에 연계는 거의 없었지만, 각각은 강력한 내부 규율을 유지하였다. 페르가나 바스마키들은 일반적으로 최신 무기들은 결여되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훌륭한 기수(horsemen)였으며 이들이 가장 잘 하는 전술은 매복과 소규모 습격이었다. 한 붉은 군대의 기록을 통해 1920년 11월에 있었던 바스마키들의 고전적인 매복 사례를 살펴보자. 당시 400명으로 구성된 바스마키 도당들이 코칸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서 95명으로 구성된 투르케스탄 소총 사단의 측면과 후방을 타격하였다. 붉은 군대의 보병들은 이 공격을 격퇴할 만큼 신속하게 방어대형을 짜지 못했고, 소규모 기병으로 이뤄진 후위는 분해되었다. 공격자들은 부대 보급행렬 및 기관총을 탈취했고, 공격할 때처럼 신속하게 사라졌다. 이 사건 자체로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도 없이 반복되었으며, 이는 이 분쟁의 성격을 말해주고, 또한 바스마키들의 끈질긴 존재능력을 보여주었다.

 

 페르가나 바스마키들은 종종 낮에는 농부로 일하다가 밤에 비밀리에 활동하곤 했다. 일부는, 특히 1921-22년의 어려운 겨울 시기에는 "계절적 볼셰비키(seasonal Bolsheviks)"가 되곤 했는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1920년의 붉은 군대 추산에 따르면, 12개의 독립된 바스마키 도당들이 총 5650명의 무장 전사들을 데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 계곡의 붉은 군대의 전력은 대략 정규군 4000에서 5000명 규모였고, 소수의 공산당원과 지역 민병대로 보강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군사 활동은 수비대간의 지휘 관계가 불명확했던 점과, 유능한 행정기관이 부재했던 관계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장 뚜렷한 저항군 지도자로 떠올랐던 인물이 마르겔란(Margelan) 마을에서 과거 소련 민병대 지휘관을 했었던 마다민 벡(Madamin Bek)이었다. 마다민은 어디든 가능한 경우라면 동맹자를 구했고, 도망 중인 백군 병력이든 바쉬키르인이든 타타르 지식인이든 가리지 않았다. 백군 도주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스스로 러시아 농민 군대(Russian Peasant Army)라고 칭했던 집단으로, 한때 붉은 군대 장교였던 콘스탄틴 몬스트로프(Konstantin Monstrov) 휘하에 있었으며, 정부가 곡물을 강제 수집하는 데 반대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9월 무렵에는 마다민은 자체적인 기초 행정조직을 수립했고, 10월에는 이르가쉬(Irgash), 쿠르쉬르맛(Kurshirmat), 칼호드자(Khalkhodzha)와 같은 다른 대규모 바스마키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지배구역을 설정하였다. 쿠르바쉬(kurbashi)라고 불린 지역 지휘관들은 민사 및 군사 권력을 통할하였다. 이어 마다민은 스스로를 수반으로 하는 페르가나 임시 정부(Fergana Provisional Government)를 선포하였고, 몬스트로프를 자신의 부관(deputy)으로 하였다. 그의 군사 참모장으로는 또다른 러시아인이 복무하였다. 영국 전쟁성(British War Office)에서는 마다민이 베르당 및 터키식 소총으로 무장한 4000명의 병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르가쉬는 1500명을, 칼호드자의 경우 1000명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인도 사무소(Indian Office)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바스마키들에게 기관총은 있지만 화포는 없었다.

 

 마다민과 몬스트로프의 연합군은 잘랄라바드(Jalalabad)를 점령하였고, 9월에는 안디잔에 위치한 붉은 군대 수비대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규율이 느슨하고 협조가 엉성하였던 탓에, 포위공격은 효과적이지 못했고, V.N. 시도로프(V.N. Sidorov) 휘하의 500명의 수비대는 전술적 기회를 잡아 포위를 돌파하게 된다. 몬스트로프의 병력이 분해되기 시작하면서, 마다민의 바스마키들은 붉은 군대의 반격에 의해 퇴각하게 되었고, 몇몇 개별 도당들은 항복하였다.

 

 이 연합은 공동의 적으로 인해 맺어졌지만 근본적으로는 공유하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고, 일년 내로 흩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마다민의 성전(holy war) 요청과 같은 것은 그의 러시아 동맹자들에게는 마음에 들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항군의 핵심 부분이 붕괴된 것은 투르케스탄의 군사적인 고립이 종료된 것에 달려있었다. 붉은 군대의 증원군이 도착하게 되었고, 투르케스탄 인민위원회의 군사정치적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페르가나에서의 새 정책의 성공 여부는 각각의 지역 주민들 내에서의 계급 분화 정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보다 발전되어 있던 도심 지역에서는 로카이 계곡(Lokai Valley)나 카라 쿰 사막(Kara Kum desert)처럼 1세기 전이나 당시나 삶에 별 차이가 없는 격오지에 비해서 보다 잘 순응적인 경향이 있었다.

 

 1920년 3월, 마다민은 돌이킬 수 없는 후퇴에 몰리게 된다. 패배한 휘하 부대들은 이윽고 공산주의자들 손에 러시아 제 1 우즈벡 기병 여단(Russian 1st Uzbek Cavalry Brigade)으로 재편성되게 된다 - 이는 무슬림들이 붉은 군대와 동맹할 수 있다는 잠재성을 보여준 사례가 된다 (사실 이미 수천명의 볼가 타타르인들과 바쉬키르인들이 남부 우랄지역과 시베리아 지역에서 백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협력한 바가 있다).

 

 이러한 대규모 귀순 시도는 대부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항복한 바스마키 상당수가 조만간 저항군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한 그룹 중 하나는 라흐만쿨(Rakhmankul)의 지휘 하에 있었는데, 1개월 반이 지난 뒤에 도로 바스마키가 된다. 규율 문제와 재투항 문제 등으로 인하여 지역 군사 당국에서는 바스마키 도당 전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버렸고, 대신 최근 투항자들에 대한 정치 세뇌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마다민 스스로는 다른 바스마키 족장들에게 보내지는 붉은 군대의 사절이 되었다. 그러나 옛 동맹자들의 손에 죽고 만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격을 보다 강화한다는 프룬제의 결심을 강화시키게 된다. 그는 붉은 군대 수비대를 강화하였으며, 모든 협상을 중단하였고, 바스마키에 가담하는 어떤 인원에 대해서도 즉결 처형하겠다고 선언한다. 1920년 여름에 모든 행정구마다 군사 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군정 및 민정 권한에 대한 중앙집권화가 이어진다. 페르가나 지역을 예로 들면, 제 2 투르케스탄 사단의 군사 위원화가 모든 독재적 권한을 위임받게 된다.

 

 권한이 통합되면서 행정은 보다 효과적이 되었고, 이후의 성공은 군사적인 부문 외에도 정치적 능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프룬제는 분쟁원인의 정치적, 인종적, 사회적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토착민 저항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이들의 불만과 불신을 완화시키는 데에 크게 달려있음을 이해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프룬제는 페르가나 주민들에 대한 정치 활동에 최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주문하였고, 토지와 수자원 개혁을 시작했다. 또한 1920년 3월, 78회의 회의(meetings)와 18회의 강연(lectures), 21회의 토론회(discussions)를 열었으며, 그에 대한 보고서 사본을 우즈벡어와 러시아어로 만들어 회람시켰다. 또한 공립 학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이런 프로그램이 갖는 정확한 효과를 측정할 길은 없지만, 정책 개혁과 정치선전은 확실히 지역 여론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에서 1920년 여름 이뤄진 징병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응은 페르가나 저항운동에 새로운 불꽃을 불러일으켰으며, 쿠르쉬르맛은 추가로 휘하에 6000명의 새 전사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었다. 소련 정부에 징병된 많은 무슬림들이 도주하여 저항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볼셰비키는 제 1 우즈벡 기병 여단을 무장해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민들의 지지와 정보력 우세로 인하여 저항운동은 다시금 지역에서 우세를 점하게 된다.

 

 붉은 군대는 공세적으로 반응했지만, 스스로가 장기전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붉은 군대 부대들은 어떠한 재래식 전술 상황에서도 우세를 점할 수 있었지만, 1921년 당시 저항군은 광범위하게 유지되었고, 특히 동부 페르가나 지역(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지역)이 심했다. 엄청난 거리를 지나 산간 격오지에 숨어있는 교활한 게릴라 도당들을 사냥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의 쉴새 없는 압박은 점차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한 추산에 따르면, 1922년 2월에서 10월 기간 동안, 붉은 군대는 200여 바스마키 집단 중에서 119개를 소탕하였다. 그 과정에서 4000명 이상을 살해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듬해 페르가나 혁명 군사 소비에트에서는 중요 행정 중심지 모든 곳에 위치한 수비대에서 기동 분견대를 조직한다. 또한 러시아인과 토착민이 혼재된 도시에서는 각각을 따로 담당하는 2중 행정 시스템을 도입한다. 그해 말에 이르르면, 쿠르쉬르맛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도주하게 되고, 계곡에는 2000명 미만의 바스마키들만이 잔류하게 된다.

 

 그 결과 1923년이 되면 산발적 전투는 지속되긴 했지만, 페르가나는 더 이상 전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이 된다. 1925년 여름, 이브라임 벡이 저항 운동을 부활하려는 시도를 벌이지만 부족 지도자들 - 이들 대다수는 아직도 소규모 지역에서 완전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 을 규합하여 동맹을 만드는 데에 실패한다. 그 결과 저항운동 도당들은 안전한 기지와 마초 공급원을 잃게 되어, 결국 페르가나 계곡에서도 가장 오지의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사례 2: 부하라에서의 저항운동 (Case Two: The Resistance in Bukhara)

 

 1920년 여름의 시점에 있어서, 공산주의 통치를 확립하는 데 있어 부하라만큼 명확한 곤란이 있었던 곳은 없었으며, 이곳의 상황은 페르가나의 사태들에 동조함으로써 폭발하게 된다. 퀴비셰프는 중앙 아시아에서의 바스마키 운동의 힘은 전적으로 부하라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적 입장에 의존하였으며, 이들은 각자를 정치적으로 잡아당기는 효과를 가졌다고 하였다. 투르케스탄의 중요 통신선 한가운데에 위치한 부하라를 바스마키가 통제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소련 통치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또한 무슬림 저항운동에 대한 지원통로이자 은신처인 아프가니스탄의 태도는 부하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부하라를 점령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부하라가 에미르(emir)의 손아귀에 있게 되면 소련 세력에 저항하는 구심점(rallying point)역할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이곳을 장악하면 아시아의 혁명을 위한 발진기지가 된다.

 

 무슬림 선직자들의 강력한 지원에 자극받은 부하라의 에미르 알림 칸(Alim Khan)은 힘을 모으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전례없는 수준의 동원령을 실시하여, 붉은 군대의 추산에 따르면 (단, 과장된 수치로 보임) 보병 8275명과 기병 7580명, 비정규군 27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모으게 된다. 망명 중인 백군, 터키인, 아프간인들 등의 잡다한 집단들의 도움을 얻어 에미르는 젊은 부하라 사람들을 군대로 불러모았고, 이어 부하라, 카티르치-케르민(Khatyrchi-Kermin), 키탑-샤흐리시아베(Kitab-Shakhrisiabe) 등에 수비대를 설치하게 된다.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 및 그 복잡성에 비춰볼 때, 부하라에서의 붉은 군대의 작전은 바스마키와의 전쟁 부석에 있어서 중요한 사례연구가 된다. 작전 시작 단계에서 프룬제의 투르케스탄 전선군은 동에서 서까지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에 대하여 책임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미레체(Semireche)의 농민 반란과 페르가나 계곡에서의 바스마키와의 전투, 신생 호라즘 인민공화국에 대한 군사 지원, 부하라의 에미르에 대한 반란 조직 등의 업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프룬제는 보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하라 공격을 위해서는 완벽한 기습에 의존해야 했다. 이의 성공은 소련 측에서 에미르에게 협상 사절을 보낸 것과도 일부 관련이 있으며, 이 사절은 공산주의자들의 공세 전날에 협상제의를 했던 것이다.

 

 부하라 작전 과정에서 프룬제는 휘하에 6에서 7천명의 보병과 2300명의 기병, 35문의 경포와 5문의 중포, 장갑차 8대, 장갑열차 5대, 항공기 1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붉은 군대는 카타-쿠르간(Kata-Kurgan), 사마르칸트, 노비이 차르드쥬이(Novyi Chardzhui) 지역의 과격분자들을 사주하여 준비시킨 폭동을 통해서도 이점을 얻을 수가 있었다. 프룬제는 붉은 군대를 추가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당시 백군과 폴란드 군대와의 전투로 인해 이 요청에 대한 답변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결과 프룬제는 국가 부대(national unit)의 창설에 의존하게 되었고, 제 1 무슬림 연대(1st Muslim Regiment)로부터 시작하여 무장 정치 일꾼 및 철도 일꾼들 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1890년 무렵의 부하라의 모습)

 

 프룬제의 계획은 2개의 명령으로 이뤄졌으며, 4개의 독립 작전 그룹들에 의한 동시 타격에 기반하고 있었다. 완벽한 비밀 유지를 위하여, 문서상으로 하달되거나 전화로 연락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8월 12일에 작성된 첫번째 명령은 각각의 그룹에 할당된 부대들의 집결 장소를 지정하는 것이었으며, 8월 25일에 발령된 두번째 명령은 이들의 협조된 이동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제 4 기병연대와 제 1 동방 무슬림 연대, 몇몇 지역 수비대들로 구성된 카간 그룹(Kagan Group)의 경우 카간(Kagan)에서 구 부하라(Old Bukhara) 및 스타-마하사(Star-Makhassa)에 이르는 주 공격축선상을 따라 북상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에미르의 야전군 주력을 격하파고, 에미르와 그의 정부요인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지휘관 벨로프 동지(Comrade Belov)는 챠르드쥬이에서의 봉기 성공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두번째 독립 작전 부대는 공산주의자들이 챠르드쥬이에서 사주한 폭동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후에는 북쪽으로 휩쓸고 가면서 카라-쿨을 점령하고 이아카-툿(Iakka-tut)의 철도를 점령함으로써, 에미르가 이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동시에 다른 기병 부대들은 아무 강과 부르탈릭의 도섭장들을 장악하고, 구 부하라에서 테르메즈까지의 철도선을 절단하도록 하였다. 차르드주이 그룹은 1개 소총 연대와 1개 소총 대대, 1개 기병대대와 1개 부하라인 분견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외 2개 그룹은 카타-쿠르간과 사마르칸트에 집결하였으며, 구 부하라 동부에서 활동하게 되어 있었다. 첫번째 그룹은 1개 기병 연대와 1개 기병 대대, 1개 부하라 공산주의자 분견대로 이뤄졌으며, 사마르칸트와 구 부하라까지의 가도상에 위치한 카티르치(Khatyrchi), 지아엣딘(Ziaetdin), 케르민(Kermine)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두번째 그룹은 1개 소총 연대와 1개 기병 사단, 1개 독립 기병 여단, 1개 공병 중대로 이뤄졌으며, 샤크리시아베-키탑(Shakhrisiabe-Kitab) 축선의 에미르 군을 격파하고 쿠쉬카 강(Kushka River) 지역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부하라 작전은 8월 28-29일 야간에 구 챠르드쥬이를 제 8 부하라 혁명 분견대(8th Bukharan Revolutionary Detachment)가 점령하면서 계획대로 시작된다 (지도 10 참조). 챠르드쥬이에서 나온 기병대는 8월 30-31일간 아무 강 우측 제방에 있는 마라짐(Marazym)과 부르달릭(Burdalyk)으로 가서 엄호 위치를 잡게 되고, 그동안 제 5 소총 연대의 일부가 포함된 특수 분견대가 카라-쿨까지 북상하게 된다. 동쪽에서는 붉은 군대가 카타-쿠르간에서부터 서진하여 키질 테페(Kizil Tepe)까지 진격하였고, 사마르칸트에서부터 남진하여 키탑을 거쳐 쿠쉬카 강까지 가게 된다. 보다 남쪽 및 서쪽에서는 아무 전대(Amu flotilla)가 아프간 국경을 따라 아무 강을 순찰하면서 도주로를 차단하였다.

 

(지도 10. 1920년 붉은 군대의 부하라 점령)

 

 한편 8월 29일, 카간 그룹은 2개 행군 대열로써 구 부하라를 북쪽에서 압박하게 된다. 우측 대열은 제 10 소총 연대, 제 12 소총연대, 제 1 기병 연대, 1개 장갑차 분견대로 이뤄졌으며, 철도에 평행한 주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도시의 카르신 문(Karshin gates)가 보이는 지점까지 진군한다. 좌측 대열은 제 1 무슬림 소총 연대와 1개 기병 분견대, 1개 특수전 연대(special forces regiment)(polk osobogo naznacheniia)로 이뤄졌으며, 카라-쿨 문(Kara-Kul gate) 앞까지 가서 멈춰섰다. 도상에서 양개 대열 모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양개 대열 모두 저녁 무렵 도시 외곽에 도착한다.

 

 작전이 둔화된 것은 부하라의 오래되었지만 거대한 성벽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이 성벽은 130개의 방어탑과 11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8월 31일과 9월 1일, 제 25,26,43 항공정찰분견대가 가벼운 공중 폭격을 실시하여 방어자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약 10미터 높이에 5미터 두께를 가진 성벽을 돌파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122mm와 152mm 화포에 달려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장갑 열차에 탑재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화포의 화력을 도시 성문에 집중하였는데, 이곳은 성벽에 비해서는 보다 약한 편이었다. 이 상황에서 벌어진 화력 활용 실수는 붉은 군대 장교들의 경험 부족을 여실히 나타내는 사례였다. 실질적으로 반격할 화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화포를 직사거리까지 접근시키는 대신에, 약 5~6킬로미터 거리에서 사격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로 인한 효력 감소는 두말할 것이 없었다. 8월 31일, 공산주의자들은 제 1 동방 무슬림 연대를 앞세워 도시로 첫번째 돌격을 감행하지만, 잠시 돌파에 성공한 외에는 외곽 요새를 점거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화포 사용에 있어서의 미숙, 소규모 전차 부대 활용의 미숙, 불명확한 목표지점 등이 노력들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프룬제는 이 공격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다음과 같은 탄식을 남긴다: "만약 작전이 이렇게 미숙하게 수행된다면, 도시는 절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8월 31일, G. V. 지노비에프(G. V. Zinoviev)가 제 1군 일부 병력을 데리고 도착하여 지휘권을 넘겨받는다. 재집결한 붉은 군대는 9월 1일 카르신 동문(eatern Karshin gate)과 사마르칸트문(Samarkand gate)에 대한 공격을 실시한다. 외부 성곽지대를 돌파한 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9월 2일, 붉은 군대의 공병들이 내성벽을 폭파하여 돌파구를 내었고, 이어 포병 사격과 공중 폭격이 이어졌다. 방어선이 유지되는 동안 완강히 저항하던 방어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3개 소총 여단과 1개 사관생도 연대, 제 1 무슬림 연대(사마르칸트의 공산주의자 부하라인들로 구성)의 공격 앞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 4 기병대는 도시 내에서의 시가전에 활약했지만, 혼란과 약탈 과정 속에서 북쪽과 북동쪽의 탈출로를 차단하는 것에는 실패하게 된다. 붉은 군대의 정보가 허술한 점과 이들 공격 부대가 도시 내에서 분산된 점을 활용하여, 에미르는 500여명의 기병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에미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공격이 시작되었을 무렵 자신은 도시 외부의 자택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붉은 군대의 항공부대는 이후 에미르가 북상하는 것을 보고하게 된다. 기병대가 추적에 나섰지만, 에미르의 후위부대에 의해 지연되게 된다. 키질 테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감시를 능숙하게 빠져나온 에미르는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악 쿠탈 고개(Ak Kutal Pass)를 지나 기사 요새(fortress at Gissar)로 향했다. 그의 탈출은 향후 붉은 군대에게 심각한 비용을 낳게 만들지만, 아무튼 당시로서는 9월 14일의 부하라 인민 공화국의 선포를 막지 못하였다. 퀴비셰프는 11월, 부하라 혁명이야말로 중세 봉건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으킨 세계 최초의 혁명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군사적 성공에 자극받은 공산당원들은 정치적 공세를 미친듯이 조직하게 된다. 부하라 청년 동맹(Bukharan Union of Youth, BUY)이 1920년 10월 창설되었으며, 즉각적으로 지부들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BUY에는 수동적인 맹원들이 설 자리는 없었으며, 새로운 맹원들을 모으기 위한 집중적인 3주짜리 정치 선동 훈련 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열정이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BUY 중앙 위원회의 최초 9명 중에서 토착 중앙 아시아인이었던 4명이 금세 직무 유기 혐의로 퇴출되었다. BUY를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공산당에서는 부하라에 소수의 경험많은 무슬림 조직가들을 파견하게 된다.

 

 부하라 공산당(Bukharan Communist Party, BKP) 역시도 비슷한 성장통을 겪지만, 1923년 제 3회 총회에서 적대 계급 - 즉, 상인, 지주, 물라(mullah; 회교 학자), 전직 정부 관리 등 -에 속하는 인원들을 숙청할 수 있을만큼 안정되게 된다. 당시 BKP에서는 당원 1560명에 후보자는 167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존하는 것은 당원 모집에 문제를 일으켰으며, 신규 당원 상당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당 추산에 따르면, 당원 40퍼센트가 문맹이었고, 50퍼센트는 반문맹인 것으로 나왔는데, 이는 인쇄된 정치선전물을 활용하는 데 큰 제약을 주게 된다. 이후 지역 사정을 보다 용인하게 되면서, 당원의 70퍼센트가 무슬림으로 채워지게 된다. 또한 여성의 평등권에 대한 공개적 선포에도 불구하고, BKP에는 토착민 여성이 단 1명 뿐이었다.

 

 한편, 당의 영도 하에, 부하라의 공산군은 1921년 지원병제에서 2년제 징집병제로의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최초의 징병으로 당원 1000명과 비당원 1000명을 포함하게 된다. 부하라 나지랏(Bukharan Nazirat) 혹은 공공 계몽 인민위원회(Commissariat of Public Enlightenment)에서는 8세에서 16세에 이르는 젊은이들에 대한 징병전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정치 세뇌과정과 체육 훈련을 병행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상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야전에서의 저항 운동을 해치우는 일은 완료되지 않고 있었다. 1921년, 에미르를 따르는 무장 추종자가 부하라 지역에 15000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스마키 주력은 부하라 동부에 위치한 기사 요새로 퇴각하여 있었으며, 이 요새는 이브라임 벡이 거주하고 있던 콕-타쉬(Kok-Tash) 마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제 1 투르케스탄 기병 사단과 제 1 투르케스탄 기병 여단, 제 5 보병연대, 제 12보병연대로 구성된 추격부대는 수르칸 강(Surkhan River)를 넘었다. 여기서부터 붉은 군대는 제지받지 않는 난동을 부렸으며, 두샨베와 다른 마을들을 점령했고, 에미르를 아프가니스탄의 피난처로 밀어내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러한 전술적 성공을 전략적 승리로 전환시키지 못하였다.

 

 명백한 전장 논리를 뒤집으며 바스마키 봉기가 붉은 군대의 후방에서 터져나왔는데, 일부 경우는 붉은 군대의 주민들에 대한 만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미르는 붉은 군대가 페레즈 행정구(district of Ferez)에서만 5만명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놀랍게도 부하라 동부 격오지의 바스마키 병력 규모는 1922년 초에 최고치를 기록하게 된다. 분산된 공산군들은 1월 퇴각하게 되며, 2월이 되면 전장은 다시 부하라 시 주변부로 되돌아가게 된다.

 

 바스마키 저항운동이 더 이상의 에너지원을 찾지 못할 시점에서, 1922년 봄에 엔베르 파샤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정치적 감각과 군사적 전략을 겸비하며 저항운동에 불을 붙이게 된다. 이 저항운동에 참가한 다른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엔베르는 지적능력이 뛰어났으며, 일관된 저항운동을 조직할 정치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령 중앙 아시아 지역은 민족주의 운동(즉, 범-투르크주의)을 유지하기에는, 볼셰비키 사회주의를 고양시키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지역이었다. 족장들 사이에 만연한 부족 정치와 군벌적 사고방식들로 인하여, 바스마키 저항운동은 각각의 역량들을 합한 것보다 훨씬 약한 상태였다. 이브라임은 나름데로 주도권을 추구하며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최전성기 시점에서 엔베르는 부하라의 16000명의 바스마키 중에서 3000명 가량을 지휘하였고, 소련 학자인 K. 바실리에프스키 (K. Vasilievskii)가 인정할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 지지(obshchenarodnyi)를 얻게 된다. 2월 경, 엔베르의 군대는 두샨베를 점령하고, 부하라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힘은 무기의 부족 및 통일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항상 제약되었다. 특히 화포와 탄약 문제가 심했다.

 

 엔베르의 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붉은 군대 사령관 S. S. 카메네프는 부하라 집단군(Bukharan Forces Group)(투르케스탄 전선군 통제 하에 둠)을 창설하였고, 그 아래에 2개 기병 여단과, 2개 기병 대대, 1개 소총 사단을 두게 되어 총 7530명으로 이뤄지게 된다. 공산군은 엔베르를 2개 대열로 추격하게 되는데, 1개 대열은 아프간 접경지역을 봉쇄하였고, 나머지 1개 대열은 북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엔베르를 비옥한 기사 계곡(Gissar Valley)로부터 몰아내도록 하였다. 부하라 동부에서의 2개월간의 작전 동안, 공산군은 엔베르를 계속 도주하도록 하였으며, 7월에는 두샨베를 재탈환하였고, 엔베르가 다시는 병력을 증강하거나 주도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였다. 최종 전투는 두샨베 동쪽의 발쥬본(Baldzhuvon)과 코발링(Khovaling)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공산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엔베르의 영향력은 1922년 8월 4일 전투에서 전사함에 따라 급작스런 종말을 맞게 된다.

 

 엔베르의 리더십이 사라지면서 바스마키 저항운동의 힘도 수그러들게 된다. 최근까지 500에서 1000명에 이르렀던 그룹들도 이후에는 25에서 30명 수준까지 약화되고 만다. 1923년 1월 시점에서 투르케스탄 전선군은 부하라 공화국 내의 바스마키의 세력이 25개 집단에, 총 2495명의 병력인 것으로 추산하였다. 부하라 동부에는 그 외에도 2290명의 바스마키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투르케스탄 전선군 사령관 A. I. 코르크(A.I.Kork)는 계속 공격적으로 전쟁을 추구하였다. 제 3 기병 여단은 엔베르의 부관이던 셀림-파샤(Selim-Pasha)를 추격하여 산악 깊숙히까지 파고들어갔으며, 175킬로미터에 이르는 포위기동을 실시하였고, 셀림 파샤 휘하의 바스마키들을 콜루다르(Koludar), 구자르(Guzar), 텡기-코람(Tengi-Khoram)의 삼각지내 안으로 몰아넣게 된다. 3월 13일, 공산주의자들은 또다른 전술적 승리를 이룩하지만, 셀림의 잔당들이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했다. 바스마키 저항운동의 마지막 아성인 로카이에서 셀림은 이브라임 벡과 연결하여 공산군에 대적하게 된다. 공산군은 신속한 우회 기동을 통하여 바스마키들의 후방을 타격하였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바스마키들은 흩어지게 된다.

 

 바스마키 도당들은 1924년에도 부하라 서부에 다시 출현하였고, 구 부하라에서 불과 수마일 떨어진 지점의 몇몇 마을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기병대에 의해 곧 진압된다. 이러한 게릴라 공격은, 더 이상 전쟁에 지친 지역 주민들을 격동시킬 수가 없었으며, 또한 소련의 지배에 순응한 마을들에 대한 공격 역시도 부작용만 일으켰다. 결론적으로, 군사적 성공의 누적 효과와 현실적 사회 정책의 지원을 받은 능숙한 정치 선동,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직력 등이 소련에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바스마키 전역에서의 결론 (Conclusion of the Basmachi Campaigns)

 

 1924년 가을, 소련 정부는 중앙 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우즈벡 및 투르코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zbek and Turkoman Soviet Socialist Republics)과 타지크 자치 공화국(Tajik Autonomous Republic)으로 재편한다. (키르기지아(Kirghizia)는 1926년에 자치공화국이 되고, 1936년에 연방공화국이 된다.) 비록 소련 통치력 증가에 대한 상징성은 갖고 있었지만, 이러한 정치적 재편성은 격오지의 분쟁까지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키바가 최종적으로 평정되는 데에는 거의 10여년이 소요되었다. 전통 세력가였던 쥬나이드 칸(Dzhunaid Khan)은 신생 호라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얼마 안되어 우즈벡 SSR에 흡수됨)의 정치적 실책을 활용하여  1924년 초기 공화국 수도 키바를 장악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크게 2가지 결정이었다. 첫째, 호라즘 지도부에서는 종교적 토지에 대한 국유화를 선포하고, 성직자의 선거권을 거부하였다. 둘째, 공산군측이 별로 신뢰할 수 없었던 투르코만 지원병 부대를 무장해제 시킨 뒤, 지도자들을 처형했던 점이다. 이어 모스크바에서는 호라즘 공화국을 해산하고 이 지역에 군사 원조를 실시한다. 그러나 쥬나이드는 1927년 이란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저항을 계속한다. 이브라임 벡은 1926년 로카이 계곡 지역에서 새로운 공세를 펼치지만, 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쫓겨가게 된다. 바스마키 운동에 대한 아프간으로부터의 추가 지원은 1926년 소련과의 조약 체결로 인해 종결되게 된다.

 

 소련의 사회 정책은 1928년 저항운동을 재발하게 만든다. 스탈린의 집단 농업 결정으로 말미암아 농민 저항운동이 벌어짐과 동시에 소련 전지역에 기아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중앙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라임은 1930-31년 타지키스탄에 다시 등장하였고, 소련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OGPU(보안군) 제 83 사단을 파병하여 질서를 되찾게 조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1931년 쥬나이드 칸이 투르크메니스탄에 돌아왔고, 카스피해의 크라스노보드스크 요새를 점령하게 된다. 소련은 OGPU 제 63사단을 파병하여 그를 이란으로 몰아낸다. 이후에도 소련의 통치가 완벽히 자리잡지는 못했다. 현대적인 투르크메니스탄 외곽 지역 및 다른 곳의 유목민들은 소련 정부기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사막과 초원지대를 계속 돌아다녔다.

 

 소련이 바스마키 저항운동을 격파한 사건은, 예전에 러시아 제국이 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에서 무슬림 부족들의 저항운동과 싸웠던 경험과 비교하여 2가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다. 첫째, 1917년 당시, 중앙 아시아의 주요 마을들과 도시에는 상당수의 슬라브계 및 유럽계 인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이민자들의 증가가 토착민들을 소외시키는 효과를 갖기도 했지만, 또한 혁명을 위한 도덕적, 물질적 기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둘째, 러시아 제국과는 달리, 볼셰비키들은 중앙 아시아 지역을 새로운 질서 속에 완전히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있어 정치적, 문화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크게 신경쓰게 되었다. 비록 막스-레닌주의 자체가 중앙 아시아의 승리를 위한 청사진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볼셰비키들이 중앙 아시아 전장에 대하여 미리 사회적 분석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이들 볼셰비키들은 "정치적 각성(political consciousness)"의 중요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수준이 어찌되었던 간에 이것이 사람들이 저항할 것이냐 복종할 것이냐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볼셰비키들 - 특히 중앙 아시아의 지역민 기간요원들 - 이 정치적 결정 과정의 심각한 오류들에 무죄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토착민들의 전통을 심각하게 짓밟았으며 (특히 여성들과 성직자들의 사회적 역할이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성급하게 징병제도를 도입하였으며, 때때로 무분별한 파괴와 유혈을 낳기도 하였다. 게다가 카메네프의 1923년 전략 구상은 실제로는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실수의 결과를 개선시킬 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대규모 정치선전 활동을 실시하였으며, 대중에게 인기없는 결정은 반복적으로 뒤집거나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워크 안에 갖혀있긴 했지만, 이들은 - 적어도 레닌, 스탈린, 퀴비셰프, 카메네프, 프룬제 등의 핵심 인물들은 - 결정적 상황에서 실용적인 감각을 나타내 주었다.

 

 이렇게 열처리된(tempered)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볼셰비키들은 중앙 아시아에서의 결과는 전장에서의 사건들을 승화시킴으로써 이뤄지는 것들이며, 전쟁에서 군사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측면을 보자면 붉은 군대 자체가 정치 전쟁의 도구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분쟁 기간의 결정적인 시기마다 붉은 군대의 지휘관들은 민사 및 군사 권력을 모두 휘둘렀으며, 대부분의 경우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경제적 양보를 하였고, 종교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완화하였다. 토착민 장교들로 이뤄진 국가부대(national units)의 창설은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 비록 상당수가 변절하긴 했지만. 토착민 공산주의자들을 정치 장교로 활용한 것 역시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앙 아시아에서의 러시아계 볼셰비키들이 스스로의 전통적인 민족적 국수주의(ethnic chauvinism) 내지는 식민주의 가치관(colonizer's mentality)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련 붕괴 시기까지도 나타나던 현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식 질서가 다수의 시골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고 보는 것 역시도 잘못이다.

 

 전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저항운동의 비통일성을 성공적으로 이용하였다. 우세한 조직과 전술, 장비들이 결국에는 바스마키들의 자연적 유리함을 무력화시켰다. 일단 소련 연방의 가장 격오지로 쫓겨가든지, 국경을 넘어 습격하는 소규모 집단으로 감소된 이후부터는 바스마키들은 더 이상 주민들과 연계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중앙 아시아 정복의 성공은 3가지 일반적 원인들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엔베르 파샤가 지휘하던 짧은 기간을 제외한다면, 바스마키 저항운동에는 응집력 비슷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의 정치적 실책들을 극복하고 경제 및 사회 정책들을 효과적으로 지역 환경에 맞게 적응시켰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보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물론 나중에는 번복된다). 셋째, 붉은 군대는 자체적인 경험 및 제국 시기의 작전에 대한 연구로부터 교훈을 얻어, 중앙 아시아의 거친 산악지대와 사막에서 비정규적인 적들과 어떻게 해야 가장 잘 싸울 수 있는지를 깨우쳤다.

 

 

제 3장의 원저자 주 및 참고문헌

 

1. 바스마키 도당(Basmachestvo)에 대한 붉은 군대의 작전들에 관해서는 서방에서 그리 널리 연구된 분야가 아니다. 이 항쟁의 정치적인 대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긴 했지만, 붉은 군대가 벌인 활약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학문적 조사가 부족한 편이다. 소련 학자들이 중앙 아시아에서의 동란들에 대해서 많은 논문들을 내긴 했지만, 이들은 러시아계와 중앙 아시아 민족들간의 문화적, 종교적 차이가 정치적 대립과 저항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서는 단지 편향되게만 다루었다. 에덴 나비(Eden Naby)가 쓴 "지하드의 개념과 공산지배에 대한 저항" (1986)이라는 논문에서는 중앙 아시아에 민족개념(ethnictiy)과 국가 자결주의(national self-determination)를 도입한 것은 러시아인 스스로이며, 이로써 "소비에트 지역을 5개의 연방 공화국으로 분열시켰고..." 그 의도는 범-이슬람주의 내지 범-투르크주의 경향을 견제하는 데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서방에서도 최근 몇몇 학문적 연구들이 이뤄지면서 바스마키 연구들에 대한 상황은 개선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특기한 것으로 ... (후략)

 


(이하 역주 및 참고문헌 생략)

 

출처 : FocusWar
글쓴이 : 운영자-박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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